불가리아 차르국 Царство България Tsarstvo Bǎlgariya Tsardom of Bulgaria | ||
국기 | 국장 | |
Съединението прави силата 단결은 힘 | ||
상징 | ||
국가 | Шуми Марица 마리차는 전진한다 | |
1914년 당시 불가리아 왕국[1] | ||
1942년 당시 불가리아 왕국[2] | ||
지도 | ||
1908년 10월 5일 ~ 1946년 9월 15일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불가리아 공국 |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 |
지리 | ||
위치 | 발칸반도 동남부 | |
수도 | 소피아 | |
면적 | 95,223㎢(1908년) 110,994㎢(1946년) | |
인문환경 | ||
인구 | 4,215,000(1908년) 7,029,349(1946년) | |
언어 | 불가리아어 | |
종교 | 불가리아 정교회 | |
민족 | 불가리아인 | |
정치 | ||
정치체제 | 입헌군주제 비자유민주주의(1919~1923) 군부독재(1923~1934) 권위주의 일당제(1934~1935) 전제군주제(1935~1944) 인민민주주의(1944~1946) | |
국가원수 | 차르 | |
통치 가문 | 삭스코부르고츠키 가문[3] | |
역대 차르 | 페르디난트 1세 보리스 3세 시메온 2세 | |
주요 총리 |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키몬 게오르기에프 게오르기 쿄세이바노프 보그단 필로프 | |
경제 | ||
통화 | 불가리아 레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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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칸반도 남부에 있던 왕국. 군주의 칭호가 차르(цар)였기 때문에 불가리아 차르국 또는 불가리아 제3제국(또는 제3차르국)이라고도 한다.[4]짧은 존속 기간 동안 굉장히 스펙타클한 변화를 겪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2. 역사
2.1. 페르디난트 1세 치세
불가리아 공국이 1908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왕국으로 승격되면서 통치자이던 페르디난트 공이 차르로 승격하였다.팽창주의적이고 투쟁적인 국가였기에 오스만 제국에서 불가리아 민족주의자들은 그리스 민족주의자들만큼 골칫거리였다. 그리고 언어적으로 유대가 있는 마케도니아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왕국 선포 10년 만에 3번이나 전쟁을 치러(1차 발칸 전쟁 - 2차 발칸 전쟁 - 1차대전) '발칸의 프로이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4개국에 불과한 동맹국의 일원 중 하나였다. 기본적인 국력차 때문에 후대에 별로 주목은 못 받았지만 그래도 2차 발칸 전쟁 때의 설움을 갚아주려고 독이 단단히 올랐었는지 총합 약 400만명 정도의 인구에서 10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으며, 참전하자마자 발칸 전선에서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를 털어먹고 다녔으며, 심지어 원정 온 영국군과 프랑스군 상대로도 우위를 점했다. 지지부진하던 세르비아-오헝 전선이 1915년 불가리아가 전쟁에 뛰어들자마자 순식간에 동맹국에 유리해졌을 정도.[5] 1918년에는 부쿠레슈티 조약을 체결하여 2차 발칸전쟁에서 빼앗겼던 남도브루자도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패색이 짙어지자 결국 동맹국 중 제일 먼저 항복, 협상국과 뇌이 조약을 맺었고 그리스와 세르비아에게 영토를 빼앗겼으며 군비 제한까지 당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1918년 터르노보 공[6] 보리스에게 양위하고 고향 독일로 은거했다.
2.2. 보리스 3세 치세
1923년 쿠데타가 일어나 좌익 정권은 무너지고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총리는 암살당하였으며[7] 쿠데타의 주역 알렉산더르 찬코프가 총리가 되었다. 보리스 3세는 군경의 도움을 받아 전제 독재 정치를 폈다.1925년에는 그리스와 무력 충돌 사태가 있었는데, 국제연맹의 중재로 전쟁 발발도 막고 배상금도 받았지만 찬코프는 조기대응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1926년 총리에서 실각당했다.
1927년에는 불가리아 왕국군 장교들이 극우 정치 조직인 즈베노(Звено)를 결성했으며, 1934년에는 즈베노가 쿠데타를 일으켜 1923년 쿠데타에 가담한 적이 있던 키몬 게오르기에프가 총리가 되었다. 그 이후 즈베노는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군사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보리스 3세는 1935년 1월 22일 즈베노가 왕정을 폐지하려고 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려 자신과 친밀한 불가리아군 장교들을 이용해 즈베노를 몰아낸다.[8]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나치 독일의 강압에 의해 추축국에 들어가서[9] 독일의 그리스 침공과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돕기도 했다. 물론 나치의 위협에 의해 추축국에 들어가긴 했지만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땅이던 서부 트라키아를 점령하고 제2차 발칸 전쟁 당시 루마니아에게 빼앗긴 남부 도브루자를 루마니아로부터 되돌려받는 등 어느 정도 이득을 챙기기도 했다.[10] 그러나 독일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같은 슬라브계 국가인 소련을 치는 독소전쟁에는 참전을 거부했다.
또한 이 시기 불가리아는 반유대주의 정책을 펼쳐 1943년까지 유대인들을 독일의 절멸수용소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교회의 압력에 더해 디미터르 페셰프(Димитър Йосифов Пешев)가 쓴 반유대주의 정책의 폐지를 촉구하는 편지[11]가 불가리아 정부에 보내진 후에는 반유대주의 정책이 폐지되었다.[12]
소련은 처음에 독일에 대패하자 불가리아를 중재로(당시까지 불가리아와 소련은 우호적) 독일과 강화를 하려고 했다. 이 때 주모스크바 불가리아 대사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우랄 산맥까지 밀려난다고 해도 결국은 당신들이 (전쟁에서)이길 것"라고 말한 바 있다고. 그런데 소련군은 전세가 역전되어 루마니아의 항복과 전향을 받아내자 가만히 있던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하고 침공했다. 물론 양국의 전쟁상태는 사흘 정도 지속되다 끝났고 그 사흘간에도 제대로 된 교전은 없었다고 한다.
그보다 조금 전인 1943년에 국왕 보리스 3세는 아돌프 히틀러와 회담한 뒤 급사했고(독살설이 유력하다), 6살 난 터르노보 공 시메온이 뒤를 이었다.
2.3. 시메온 2세 치세
국왕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키릴 왕자, 니콜라 미호프 장군, 보그단 필로프 총리가 섭정단을 구성해 실권을 행사했다.1944년 9월, 불가리아에서는 불가리아 조국전선이 쿠데타를 일으켜 키몬 게오르기에프가 또 총리가 되었으며[13] 섭정단도 모두 교체되었다. 이후 불가리아는 사흘만에 소련과 강화를 맺고 옛 동맹국 독일에 선전포고, 불가리아군은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축선에서 소련군을 보조했다.
불가리아는 이번에도 패전국이 되어 소련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전쟁 이후에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고, 공산당 투표를 통해 1946년 9월 9일, 왕정 폐지가 결정되면서 불가리아 왕국은 종말을 맞았다. 그리하여 소련에 의해 점령된 타 유럽 국가들처럼 공산주의 국가인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시메온 2세는 아직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실권이 없었던 탓에 모후 조반나와 함께 망명이 허락되었지만, 키릴 왕자를 포함한 1차 섭정단은 추축국 편에 선 책임을 지고 처형당했다.[14] 여담이지만 페르디난트 1세는 이때까지 살아 있었다.[15]
망명을 떠났던 시메온 2세는 민주화 이후 불가리아로 돌아와 총리를 지내기도 했으며, 퇴위한 지 80년이 다 되어가는 2023년 현재까지 잘 살아 있다.
윗나라인 루마니아와 옆나라 세르비아와 마찬가지로 국내 여론 중에 군주제 복귀론이 나오고는 있지만 현재 정치권 내부에서는 현행 민주 공화정 체제의 수호를 주장하고 있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3. 역대 차르
불가리아 차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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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대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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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토도르 부르모프 | 클리멘트 터르노보스키 | 드라간 찬코프 | 페트코 카라벨로프 | |
제5대 | 제6대 | (제3대) | (제4대) | |
요한 에른루트 | 레오니드 소볼레프 | 드라간 찬코프 | 페트코 카라벨로프 | |
(제2대) | (제4대) | 제7대 | 제8대 | |
클리멘트 터르노보스키 | 페트코 카라벨로프 | 바실 라도슬라보프 | 콘스탄틴 스토일로프 | |
제9대 | (제8대) | 제10대 | 제11대 | |
스테판 스탐볼로프 | 콘스탄틴 스토일로프 | 디미터르 그레코프 | 토도르 이반초프 | |
제12대 | (제4대) | 제13대 | (제12대) | |
라초 페트로프 | 페트코 카라벨로프 | 스토얀 다네프 | 라초 페트로프 |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제17대 | |
디미터르 페트코프 | 디미터르 스탄초프 | 페타르 구데프 | 알렉산더르 말리노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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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 제18대 | (제13대) | (제7대) | |
알렉산더르 말리노프 | 이반 에브스트라티예프 게쇼프 | 스토얀 다네프 | 바실 라도슬라보프 | |
(제17대) | 제19대 | 제20대 | 제21대 | |
알렉산더르 말리노프 | 테오도르 테오도로프 |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 알렉산더르 찬코프 | |
제22대 | (제17대) | 제23대 | 제24대 | |
안드레이 랴프체프 | 알렉산더르 말리노프 | 니콜라 무샤노프 | 키몬 게오르기에프 | |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펜초 즐라테프 | 안드레이 토셰프 | 게오르기 쿄세이바노프 | 보그단 필로프 | |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24대) | |
도브리 보질로프 | 이반 이바노프 바그랴노프 | 콘스탄틴 무라비에프 | 키몬 게오르기에프 | |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인민 공화국 ]] | ||||
(제24대) | 제32대 | 제33대 | 제34대 | |
키몬 게오르기에프 |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 바실 콜라로프 | 벌코 체르벤코프 | |
제35대 | 제36대 | 제37대 | 제38대 | |
안톤 유고프 | 토도르 지프코프 | 스탄코 토도로프 | 게오르기 필리포프 | |
제39대 | 제40대 | |||
게오르기 아타나소프 | 안드레이 루카노프 | |||
[[불가리아| 공화국 ]] | ||||
(제40대) |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
안드레이 루카노프 | 디미터르 포포프 | 필리프 디미트로프 | 류벤 베로프 | |
제44대 |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
레네타 인조바 | 잔 비데노프 | 스테판 소피얀스키 | 이반 코스토프 | |
제48대 | 제49대 | 제50대 | 제51대 | |
시메온 삭스코부르고츠키 | 세르게이 스타니셰프 | 보이코 보리소프 | 마린 라이코프 | |
제52대 | 제53대 | (제50대) | 제54대 | |
플라멘 오레샤르스키 | 게오르기 블리즈나슈키 | 보이코 보리소프 | 오그냔 게르지코프 | |
(제50대) | 제55대 | 제56대 | 제57대 | |
보이코 보리소프 | 스테판 야네프 | 키릴 페트코프 | 걸러프 도네프 | |
제58대 | 제59대 | |||
니콜라이 덴코프 | 디미터르 글라브체프 | }}}}}}}}} |
총리 계보는 불가리아 공국에서 이어진다.
대수 | 이름 | 임기시작 | 임기종료 |
16대 | 알렉산더르 말리노프 | 임기 중 국체 변경 | 1911.3.29 |
17대 | 이반 게쇼프 | 1911.3.29 | 1913.6.14 |
18대 | 스토얀 다네프[A] | 1913.6.14 | 1913.6.17 |
19대 | 바실 라도슬라보프[A] | 1913.6.17 | 1918.6.21 |
재선 | 알렉산더르 말리노프 | 1918.6.21 | 1918.11.28 |
20대 | 테오도르 테오도로프 | 1918.11.28 | 1919.10.6 |
21대 |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 1919.10.6 | 1923.6.9 |
22대 | 알렉산더르 찬코프 | 1923.6.9 | 1926.1.4 |
23대 | 안드레이 럅체프 | 1926.1.4 | 1931.6.29 |
3선 | 알렉산더르 말리노프 | 1931.6.29 | 1931.10.12 |
24대 | 니콜라 무샤노프 | 1931.10.12 | 1934.5.19 |
25대 | 키몬 게오르기에프 | 1934.5.19 | 1935.1.22 |
26대 | 펜초 즐라테프 | 1935.1.22 | 1935.4.21 |
27대 | 안드레이 토셰프 | 1935.4.21 | 1935.11.23 |
28대 | 게오르기 쿄세이바노프 | 1935.11.23 | 1940.2.16 |
29대 | 보그단 필로프 | 1940.2.16 | 1943.9.9 |
대행 | 페터르 가브로프스키 | 1943.9.9 | 1943.9.14 |
30대 | 도브리 보질로프 | 1943.9.14 | 1944.6.1 |
31대 | 이반 바그랴노프 | 1944.6.1 | 1944.9.2 |
32대 | 콘스탄틴 무라비에프 | 1944.9.2 | 1944.9.9 |
재선 | 키몬 게오르기에프 | 1944.9.9 | 1946.11.22 |
5. 매체에서
1차 대전의 동부 전선을 다루는 게임, 탄넨베르크에서 주요 세력으로 등장한다. 존재감 없기로 유명한 1차 대전기 불가리아 왕국을 주목한 몇 안되는 작품. 아예 불가리아령 도브루자가 맵으로 추가되었다.마블 코믹스의 아이언맨은 설정상 불가리아 출신인데, 처음 등장한 1962년을 기준으로 보면 불가리아 왕국 시절에 태어났다.
6. 여담
세르비아 왕국과는 철천지원수 관계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페르디난트 1세는 대놓고 "내 삶의 목적은 세르비아의 파멸"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불가리아가 세르비아의 영토를 점령한 뒤에는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고, 마케도니아인들을 불가리아인들로 동화시키려고까지 했다.[1] 2차 발칸 전쟁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직전[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최대 강역[3]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가톨릭계 분파로, 시조는 초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첫째 남동생 페르디난트이다. 페르디난트의 뒤를 이은 수장 아우구스트의 3남이 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로 즉위했고, 코하리 분가의 직계는 아우구스트의 차남 루트비히 아우구스트에 의해 이어지다가 2010년에 루트비히 아우구스트의 증손자 요하네스 하인리히가 후사 없이 사망하며 대가 끊겼다.[4] 불가리아 제3차르국이 성립된 시기 즈음에는 이미 차르의 의미가 황제에서 왕의 의미로 격하된 상태였다. 그 예로 러시아 황제가 겸했던 폴란드 입헌왕국의 왕위 역시 공식 칭호는 폴란드 차르였고 러시아 제국 황제는 로마 황제의 칭호 중 하나인 임페라토르로 칭했다. 그래서 서구권에서는 불가리아 제1, 제2차르국의 군주는 황제로, 불가리아 제3차르국의 군주는 왕으로 번역한다. 현재도 폴란드와 세르비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차르는 임금 정도의 의미로 통한다.[5] 다만 세르비아가 전력을 죄다 오헝 방면에 때려박은지라 뒷마당을 고스란히 내준것도 있었다.[6] 불가리아 왕국에서 왕의 후계자에게 붙이던 칭호.[7] 그것도 그냥 암살당한 게 아니라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IMRO)의 손에 넘겨져 처참하게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들이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는 1923년에 스탐볼리스키가 IMRO를 억제하는 내용의 니시 조약을 체결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8] 즈베노 자체는 여전히 잔존해 있었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수립 이후에야 해체되었다.[9] 이 때문에 불가리아에서는 자국이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 등 다른 추축국 주요국들과 다르게 나치 독일의 강압에 의해 추축군으로 강제 참전한 전쟁의 피해국이라고 주장하며 독일이 폴란드, 체코에게 매년 제2차 대전 시기 나치의 만행에 사과하듯이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전쟁 과거사 사과를 불가리아한테도 해줄 것을 독일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대전 당시 직접적 피점령지이던 폴란드, 체코와 주권국이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역사적 맥락이 전혀 다르다며 불가리아 측의 사과 요구를 무시, 거부하고 있다.[10] 현재 불가리아 영토인 남부 도브루자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포기한다.[11] 이 편지에는 43명이 서명하였으며 30명은 보그단 필로프 총리의 압박에도 서명을 철회하지 않았다.[12] 정작 페셰프는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반공주의자에 반유대주의자라는 이유로 박해받았다. 사후 페셰프는 열방의 의인으로 등록되었다.[13] 이후 게오르기에프는 인민 공화국 치하에서 부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도 2번이나 수여받았다.[14] 도브리 보질로프 전 총리를 포함한 67명의 국회의원들도 함께 처형당했다.[15] 망명지인 독일 코부르크에서 1948년 9월 10일에 사망했다.[A] 불가리아 공국 시절에도 총리를 역임했다.[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