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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마케도니아 왕국 34대 국왕 | |
리시마코스 Λυσίμαχος | Lysimachus | |
휘 | 리시마코스 Λυσίμαχος |
출생 | 기원전 361년/기원전 355년/기원전 351년 |
마케도니아 왕국 펠라 또는 테살리아 크라노네 | |
사망 | 기원전 281년(향년 69~70세 또는 73~74세 또는 79세~80세) |
사르데스 인근 코루페디온 | |
재위 기간 | |
트라키아 왕국 바실레우스 | 기원전 306년 ~ 기원전 281년 |
소아시아 왕국 바실레우스 | 기원전 301년 ~ 기원전 281년 |
마케도니아 왕국 바실레우스 | 기원전 288년 ~ 기원전 28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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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도니아 왕국 34대 국왕. 알렉산드로스 3세의 호위병 출신으로, 트라키아에서 기반을 닦아 디아도코이 전쟁에 참가해 안티고노스 1세,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 피로스 1세 등을 꺾고 트라키아, 소아시아 서부, 그리고 마케도니아 왕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고, 결국 셀레우코스 1세의 침공으로 패망했다.2. 생애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 펠라 출신이라고 한다. 반면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테살리아의 크라노에 출신이며,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와 동일한 혈통이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리아노스와 에우세비우스 모두 그의 아버지가 테살리아 출신으로 마케도니아에 귀순한 귀족 아가토클레스라고 기술했다. 태어난 년도 역시 불명확하다. 일부 기록에는 기원전 361년 출생이라고 기록했으며,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는 기원전 355년생이라고 기술했다. 아피아노스는 기원전 351년생이라고 주장했다.리시마코스는 기원전 332년부터 326년까지 알렉산드로스 3세의 호위병으로 활동했는데, 30세 이전의 나이에 이와 같은 역할을 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기원전 361년 또는 기원전 355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리시마코스에게는 형 알키마코스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이오니아로 파견되었다. 또한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에 따르면, 리시마코스의 동생 필리포스는 기원전 329년 아시아 원정 중 전사했다고 한다. 또한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또다른 동생 아우토디코스는 필리포스 3세의 호위병을 맡았다고 한다.
리시마코스는 펠라의 왕궁에서 고급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며[1], 알렉산드로스 3세 즉위 후 호위병 중 한 사람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 동행했을 테지만, 정확한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확실하지 않다. 다만 아리아노스의 <알렉산드로스의 아나바시스>에서 그에 관한 기록이 간략하게나마 남아 있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332년 시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를 습격한 사자와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2] 그리고 기원전 328년에는 사마르칸트에서 술에 취해서 자신에게 폭언을 퍼붓는 클레이토스를 창으로 찔러 죽이려는 알렉산드로스로부터 창을 빼앗으려 했지만 끝내 막지 못했고, 알렉산드로스가 뒤늦게 후회하여 자결하려 하자 얼른 막아서 독방으로 끌고 갔다고 한다. 기원전 326년 인도의 도시 상갈라 공방전 때 그에 관한 기록이 기술되어 있다.
상갈라 포위 기간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100명 미만의 병사를 잃었지만 부상자 수는 1,000명이 넘었다. 그 중에는 알렉산드로스의 개인 호위병인 리시마코스와 다른 장교도 포함되었다.
기원전 324년, 알렉산드로스는 슈쉬에서 리시마코스를 포함한 호위병들에게 군사적 공적을 세운 것을 기리고자 왕관을 수여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할 당시(기원전 323년) 리시마코스, 아리스토누스, 페이톤, 레온나토스, 페르디카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그리고 페우케스타스 등이 임종을 지켜봤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리시마코스가 훗날 마케도니아 왕이 된 뒤의 일화를 소개한다. 리시마코스는 그리스 학자 오네시크리토스가 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기>를 읽던 중, 알렉산드로스 3세가 아시아에서 원정을 떠나고 있을 때 아마존 여왕과 만나 사랑을 나눴다는 대목을 보고 쓴 미소를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그 때 어디에 있었는가?"[3]
알렉산드로스 3세가 붕어한 후, 제국의 섭정을 맡은 페르디카스는 유력한 장군들에게 제국의 여러 영토를 분배했다. 이때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를 배정받았다. 트라키아에 도착한 후 그가 직면한 첫번째 과제는 트라키아 부족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일찍이 필리포스 2세에게 복속하여 마케도니아의 간접 지배를 받고 있던 오드리시아인은 알렉산드로스 사망 후 세우테스 3세의 지휘하에 영토를 되찾고 마케도니아를 위협했다. 그는 수적으로 열세한 병력으로 이들에 대항해야 했고, 다른 디아도코이들은 자기들끼리 세력다툼을 벌이고 있었기에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오드리시아인과 격전을 벌였다. 기록에 따르면, 양측 모두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휴전을 맺었다고 한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오드리시아인의 왕 세우테스 3세가 기원전 322년 안티고노스 1세가 지배하는 소아시아로 망명했다고 기술했지만, 학계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간주한다.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와 레온나토스가 사망한 후, 디오도코이들은 레바논의 트리파라디소스에서 만나 안티파트로스를 새 섭정으로 세우고 제국의 질서를 재정비했다. 이때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의 사트라프로 재차 공인되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이때 안티파트로스는 페르디카스와 약혼했다가 파혼당한 딸 니케아를 리시마코스의 아내로 주었다고 한다.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한 뒤 카산드로스 연합과 새 섭정 폴리페르콘 연합 간의 대규모 전쟁이 제국 곳곳에서 벌어졌지만, 리시마코스는 여기에 관여하지 않고 트라키아에서 기반을 다지는 데 몰두했다. 다만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기원전 318년 폴리페르콘의 동맹이었던 클레이토스[4]가 보스포루스 해전에서 참패한 뒤 트라키아 해안에 상륙했다가 리시마코스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그는 카산드로스 편에 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원전 315년 흑해 연안의 한 도시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기원전 315년, 폴리페르콘을 축출하고 새 섭정에 오른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 1세의 세력이 지나치게 팽창한 걸 두려워하여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바빌론의 사트라프 셀레우코스 1세, 그리고 리시마코스와 연합하여 반 안티고노스 연합을 결성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쟁은 4년간 진행되었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다가 기원전 311년 종식되었다. 기원전 309년, 그는 리시마키아 시를 건설하고 트라키아의 수도로 삼았다. 기원전 306년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의 활약으로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함대를 섬멸하고 키프로스를 장악한 안티고노스 1세는 자신을 왕으로 선포했다. 그러자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 등 그의 경쟁자들도 잇따라 왕으로 선포했는데, 그 역시 이들에게 뒤지지 않고자 왕을 칭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데메트리오스는 연회 자리에서 아버지야말로 진정한 왕이고, 셀레우코스는 코끼리 사육사, 프톨레마이오스는 항해사이며, 리시마코스는 귀중품 보관자라고 지칭했다고 한다. 에우세비우스는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비웃기만 했지만 리시마코스는 분노했다고 기록했다.
기원전 302년, 데메트리오스에게 연전연패하여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모조리 내주고 마케도니아마저 잃게 생긴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에게 평화 협정을 맺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당시 거듭된 승리에 도취되었던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답했다. 이에 카산드로스는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그리고 아시아의 셀레우코스에게 연합을 호소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바로 옆에 있던 리시마코스는 즉시 카산드로스와 합류하였고, 카산드로스가 테실리아에서 데메트리오스를 상대하는 사이 자신은 병력을 총동원하여 소아시아를 전격 침공했다. 그는 안티고노스가 안티고니아에서 축제를 즐기는 틈을 타 플라펠루스 장군의 활약을 앞세워 많은 영역을 빠르게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안티고노스는 즉시 대군을 일으켜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그는 아나톨리아 고원 일대에서 리시마코스의 군대와 조우해 곧바로 결전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리시마코스는 결전을 미뤘고, 그 사이에 겨울이 오면서 양측은 날씨가 풀릴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동계 숙영에 들어갔다. 이때 아내 니케아가 이미 죽어서 홀아비였던 그는 겨울 숙영을 하던 에라클레아 폰티카에서 에라클레아의 전 참주 디오니우스의 미망인이자 섭정인 아마스트라와 결혼했다. 이무렵 인도 전선에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의 전쟁을 마무리한 셀레우코스 1세는 귀환하던 중 카산드로스의 사절단을 만나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함께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이를 수락하고, 대군을 이끌고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셀레우코스의 대군이 소아시아로 몰려오고 있다는 급보를 접한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에 있는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전갈을 보내 당장 자신에게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에페수스에 상륙한 뒤, 리시마코스가 점령한 해안의 많은 도시들을 순식간에 탈환하고 셀라에나에서 아버지와 합류했다. 한편 셀레우코스는 헤라클레아에서 리시마코스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후 양측은 디아도코이 전쟁 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로 일컬어지는 입소스 전투를 벌였다. 전투 결과는 리시마코스-셀레우코스 연합의 대승이었고, 안티고노스 1세는 투창 세례를 받고 전사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디아도코이 최대의 영역을 자랑했던 안티고노스 왕조는 붕괴되었고, 승자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안티고노스의 영역을 분배했다. 그는 이를 통해 소아시아 서부를 처음으로 획득하고 소아시아 겸 트라키아의 왕을 자처했다.
기원전 301년, 그는 아내 아마스트라와 이혼하여 에라클레아 폰티카로 돌려보내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딸인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의 딸 리산드라와 자신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아가토클레스를 결혼시킴으로써 아집트와의 동맹을 강화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지나치게 강력해지고 있는 셀레우코스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기원전 296년 데메트리오스 1세가 그리스로 출정하면서 킬리키아를 비우자, 그는 그 틈을 노려 킬리키아로 침공해 몇몇 도시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데메트리오스가 그리스에서 입지를 확고히 하고 기원전 294년 마케도니아까지 장악하자,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자신에게 망명 온 안티파트로스 1세를 죽여 데메트리오스에게 바치고 그와 평화 협정을 맺어 마케도니아 왕으로 군림하는 걸 인정했다. 그즈음 다뉴브 강 너머 영역을 장악하고자 원정을 단행했지만, 게타이 부족의 군주 드로미케테스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자기가 점령한 다뉴브 이북 땅을 모두 반납하는 조건으로 기원전 292년 풀려났다.
데메트리오스는 리시마코스가 패배의 여파로 약해진 틈을 타 트라키아로 쳐들어가 많은 영토를 확보했지만, 보이오티아에서 갑작스런 반란이 일어난 데다 에페이로스 왕국의 피로스 1세가 서쪽 변경 지대를 갉아먹자 할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가 500척에 달하는 거대한 함대를 건설하여 장차 소아시아로 쳐들어갈 기회를 노리는 등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그 주변의 통치자들인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 피로스는 불안감을 느꼈고, 이내 함께 힘을 합쳐 그를 치기로 하였다. 기원전 288년, 리시마코스와 피로스는 차례로 마케도니아를 침공했다. 데메트리오스는 병사들이 대규모로 탈영하자 변장을 한 채 급히 탈출했다.
그 후 리시마코스와 피로스는 마케도니아에서 공동으로 통치했으나, 기원전 286년 리시마코스가 피로스가 방심한 틈을 타 기습을 가해 피로스를 에페이로스로 내쫓고 마케도니아를 독차지했다. 한편 기원전 286년 아테네가 데메트리오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후원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아테네를 포위 공격했으나 쉽사리 공략하지 못하다가 아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게 아테네 포위를 맡기고 함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쳐들어갔지만 리시마코스의 아들 아가토클레스에게 패하고 키프로스로 후퇴했다. 데메트리오스는 다시 함대를 모조리 긁어모아서 소아시아 탈환 작전에 착수했으나, 갑작스런 기근과 역병으로 많은 전력을 손실한 뒤 셀레우코스 1세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리하여 리시마코스는 강력한 경쟁자였던 데메트리오스를 꺾고 마케도니아-트라키아-소아시아 서부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리시마코스는 몇년 후 결정적인 실책을 저질렀다. 그는 전처 니케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 아가토클레스를 후계자로 뒀고, 후처 아르시노에 2세와의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필리포스를 낳았다. 역사가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아르시노에는 자기 아들이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고, 이를 이루기 위해 남편에게 아가토클레스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모함했다고 한다. 그녀가 정말로 그랬는지는 불분명하나, 그가 아가토클레스와 사이가 급격히 나빠진 것만은 분명하다. 결국 그는 능력이 출중하고 인격도 훌륭했던 아가토클레스를 의심한 나머지 긴급 체포한 후 처형해버렸다. 아가토클레스의 아내이자 아르시노에의 이복 누이인 리산드라는 아가토클레스의 지지자들과 함께 셀레우코스 1세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리시마코스가 이 일로 백성들의 지지를 잃어버리자, 셀레우코스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소아시아 서부로 진격했다. 기원전 281년 2월, 셀레우코스와 리시마코스는 사르데스 인근의 코루페디온에서 조우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리시마코스는 부하들의 연이은 배신으로 인해 전군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우다가 끝내 전사했다. 셀레우코스는 그의 유해를 확보한 뒤 리시마키아 근처에서 화장했다. 한 기록에 따르면, '히르카누스'라는 이름의 애완견이 주인의 시체를 독수리로부터 지켜냈고, 주인의 시신이 장작더미에 올려져 태워질 때 거기에 몸을 던져 같이 죽었다고 한다.
리시마코스의 왕국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그 역시 다른 디아도코이들과 마찬가지로 역사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셀레우코스 1세가 건설하고 이름 붙인 안티오크, 카산드로스가 건설하고 이름 붙인 테살로니카와 더불어, 리시마코스는 자신의 죽은 아내를 기리며 안티고네이아[5]를 '니카이아'로 개명하였으니 이가 동로마 시대에 큰 존재감을 발휘한 도시 니케아였던 것이다. 다만, 대도시로서의 영화를 오랫동안 누리지 못하고 몰락한 안티오크와 니케아와 달리, 테살로니카만이 도시의 이름을 현대에 이르기까지 보존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 대도시로 기능하고 있다.
[1] 리시마코스는 매우 진지한 성격으로 역시나 엄격한 태도로 인해 친구가 없던 칼리스테네스와 잘 맞아 자주 철학적사상을 교환했다고 한다.[2] 실제로 리시마코스가 주조한 주화 뒷면에는 사자를 묘사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3] 대왕과 원정을 같이 치른 당사자로서, 사실관계에 대해 지적할 수 있는 자신감이 배어있는 말이다. 이미 당시부터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에 대해 허구적인 설화가 많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4] 흰 클레이토스(cleitus the white)로 알렉산드로스에게 직언하다 죽은 검은 클레이토스(cleitus the black)와는 동명이인.[5] 안티고노스 1세가 건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