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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찬드라굽타 마우리아(Candragupta-Maurya) |
별칭 | 전나라급다(旃那羅笈多) 월호(月護) |
부친 | 수리야굽타 |
생몰년도 | 기원전 349(?) ~ 기원전 298? |
재위 기간 | 기원전 322년 ~ 기원전 298년 |
종교 | 자이나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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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마우리아 왕조의 창건자. 본명 찬드라굽타 마우리아(Candragupta-Maurya). 재위 기원전 324~298년. 한역 불경인 《잡아함경》 권23의 <아육왕경>에는 전나라급다(旃那羅笈多)라고 음역되어 있으며, 한역하면 월호(月護)라고 되어 있다.인도 역사상 최대의 정복군주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서북 인도에 침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과 통일국가 건설에 강한 자극을 받았다고 추측된다.
재상이며, 스승인 카우틸리야(Kautilya 혹은 Canakya)는 외교력과 전략면에서 찬드라굽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불교 기록에 다르면, 찬드라굽타는 본래 북인도 핍팔리바나(Pipphalivana) 지방을 지배하는 크샤트리야 계급의 모이리아(Moirya) 가문에 속했다. 이 가문은 석가모니 시대부터 이름이 알려진 명문이었으나, 그의 어머니는 수드라 계급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따라 마우리아(Maurya)라는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2. 고난과 사자와의 만남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가 요약한 폼페이우스 트로구스의 저서 《필리포스 역사》에 따르면, 그는 난다인 왕의 비위를 거슬렀다가 사형을 선고받은 평민이라고 했다.[1] 그는 어떻게든 빠져나온 후 달아나다가 안전한 밀림에서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자는 동안 사자가 와서[2] 얼굴의 땀을 핥아주었고, 잠이 깨자 자신이 왕이 될 것임을 알았다고 한다.3. 치세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25년 바빌론에서 붕어하자,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군대가 인도에 침입한 것에 대하여 민족 저항 의식을 불러일으킨 후 이를 이용해 그리스 세력권이었던 펀자브 지방과 서북 인도를 정복했다.외교와 전략으로 마가다국 난다 왕조의 세력이 약화되는 틈을 타 공격을 가하여 다나난다(Danananda) 왕을 죽이고, 마가다의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점령하여 마우리아 왕조의 수도로 삼았다.
찬드라굽타는 무려 6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각지를 정복했다. 마우리아 왕조의 통치는 북으로 히말라야 산맥, 서로는 인더스 강 유역의 아프가니스탄과 발루치스탄, 동으로는 벵갈의 브라흐만푸트라 강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북인도를 완전히 통일했으나 데칸 고원 이남의 케랄라, 타밀나두 지역에는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 가운데 한 명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셀레우코스 제국를 세우고, 305년 알렉산드로스가 점령한 땅을 회복하러 인도를 재침공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1세는 찬드라굽타에게 격퇴되었고, 평화조약을 맺은 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을 맺으러 사신으로 온 메가스테네스(Megasthenes)는 인도 견문록을 남겼다.
4. 여담
마우리아 왕조의 창건자이지만, 손자인 아소카 대왕이 너무 유명해서 그런지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처지는 편이다.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전쟁 방식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기 힘든데 대다수의 추측은 주로 게릴라 전술이나 마케도니아 왕국으로부터 망치와 모루 전술 등을 습득해서 싸웠을거라고 추측한다.
<문명 6>에서 간디와 함께 인도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임페라토르: 롬>에서 마우리아 왕조의 군주로 등장하며, 아들 빈두사라, 손자 아소카도 구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