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게아스 왕조 샤한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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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Περδίκκας / Perdiccas(BC 355 ~ BC 321 / 320)
마케도니아 왕국의 장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디아도코이 중 한 사람으로 대왕의 사후 제국 섭정의 지위에 오른다.
2. 생애
마케도니아 서부에 위치한 오레스티스 출신 귀족인 오론테스의 아들로 태어났다.알렉산드로스 3세를 따라 그의 휘하에서 기병대장으로 종군해 기원전 334년의 그라니코스 전투, 기원전 333년의 이소스 전투, 기원전 331년의 가우가멜라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페르디카스는 엘리트 친위기병대 헤타이로이의 차선임 대대장이었는데, 최선임 대대장(chiliarch)이었던 헤파이스티온의 전술적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페르디카스가 그를 대신해 전설적인 전공을 세웠다. 기원전 324년에 슈쉬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주관하는 합동 결혼식에서 결혼했으며, 헤파이스티온이 사망하자 최선임 헤타이로이 대대장직과 친위대장직을 물려받았다.[1]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드로스 3세가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아직 태내에 있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들이면 왕으로 삼자고 주장했다.[2]
장군들의 회의에서 필리포스 3세가 일단 왕으로 즉위하고,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이가 아들이면 공동 왕, 딸이면 필리포스 3세가 단독으로 왕이 되기로 결정하였다. 페르디카스는 제국 섭정이 되어 자신에게 반대하는 멜레아그로스를 죽이고 에우메네스가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를 공격할 때 레온나토스에게 지원 명령을 내렸지만, 레온나토스는 이방인인 에우메네스보다 같은 마케도니아 출신인 안티파트로스를 돕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그리스로 가버렸다.[3] 이에 페르디카스가 직접 군사를 보내 에우메네스를 지원했다.
제국의 2인자인 안티파트로스와 정략 결혼으로 그의 딸인 니카이아를 부인으로 두었으나 올림피아스[4]가 클레오파트라[5]와의 결혼을 주선하자 야심 때문인지 이를 받아들인다. 결국 니카이아와 이혼하면서 안티파트로스와 적으로 돌아선다.
아나톨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페이톤에게 이를 진압하도록 시켰으나, 그 과정에서 약탈과 학살을 일어나자 이를 문책하는 바람에 페이톤의 원한을 샀다.
알렉산드로스 3세의 시신 귀속 여부를 둘러싸고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다투면서[6]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를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7]이라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공격하기 위해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지만, 나일강 도하 작전이 실패하자[8] 반란이 일어나 페이톤, 셀레우코스 1세, 안티게네스에게 펠루시온에서 살해당했다.
이후 그의 영토는 시해자인 페이톤, 셀레우코스 1세, 안티게네스에게 분할되었고, 제국의 섭정직은 정적이었던 안티파트로스에게 넘어간다. 페르디카스는 디아도코이 시대 초기 제국통합파[9]의 대표나 마찬가지였기에, 그가 죽자 제국은 서서히 분리의 길로 나아간다.
3. 관련 문서
[1] 페르디카스가 지휘하던 대대는 왕궁 서기 에우메네스가 물려받았다.[2] 알렉산드로스에게 핏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른 자식은 사생아에 갓난 아이였고 그의 이복형 필리포스 3세는 정신지체에 간질을 앓고 있었다.[3] 안티파트로스는 당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폴리스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4]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5] 알렉산드로스의 여동생[6] 그리스로 운송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탈취하여 멤피스로 옮겨 석관에 안치했다.[7] 기원전 322년[8] 2천여 명이 시체도 못 찾고 악어밥이 되었다.[9] 알렉산드로스 사후 제국을 하나로 유지하고자 하는 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