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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20101><colcolor=#E0C03D> | |
출생 | 기원전 355년 |
미상 | |
사망 | 기원전 297년 (향년 58세) |
마케도니아 왕국 펠라 | |
재위기간 | 마케도니아 바실레우스 |
기원전 305년 ~ 기원전 297년 | |
아버지 | 안티파트로스 |
어머니 | 미상 |
배우자 | 테살로니케 |
자식 | 필리포스 4세, 알렉산드로스 5세, 안티파트로스 1세 |
왕조 | 안티파트로스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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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도니아 왕국 안티파트로스 왕조 초대 국왕. 디아도코이 전쟁 시기 알렉산드로스 3세의 후손들을 멸족시키고 새 왕조를 개창하였다.2. 생애
기원전 355년경 필리포스 2세의 신임받는 장군이었던 안티파트로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3세와 비슷한 나이대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 헤파이스티온과 함께 알렉산드로스의 친구로 지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왕위에 오른 뒤 페르시아 원정을 감행했을 때 동행했다. 다만 그가 원정 때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기원전 323년, 그는 아버지를 대신해 알렉산드로스에게 어떤 청탁을 하러 찾아갔다. 그러던 중 몇몇 페르시아인들이 알렉산드로스 앞에 엎드려 있는 것을 목격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식으로 자랐고 전에는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기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에 화가 나서 두 손으로 카산드로스의 머리카락을 난폭하게 움켜줘고 그의 머리를 벽에 쳐박았다. 그는 이 일로 알렉산드로스를 두려워했던 듯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가 나중에 마케도니아 왕이 된 뒤 델포이를 돌아다니며 조각상을 감상하던 중 알렉산드로스의 조각상을 힐끗 보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거의 기절할 뻔했다고 한다.
기원전 323년 6월 10일 또는 11일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했다. 그 또는 안티파트로스가 알렉산드로스를 암살했다는 소문이 당대에 파다했지만, 플루타르코스 등 학자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독살당한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며 소문을 부정했고 현대 학자들도 근거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그 후 장군들은 알렉산드로의 이복형 아르다이오스가 필리포스 3세로 명명되어 왕위에 올랐고, 록사나가 임신한 태아가 아들일 경우 알렉산드로스 4세로서 공동 왕에 선출하기로 합의했다. 기원전 321년 섭정을 맡았던 페르디카스가 알렉산드로스의 관을 훔쳐간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징벌하려 했다가 원정에 실패한 뒤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안티파트로스가 주재한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열린 회의에서, 광대한 제국은 여러 지휘관들에 의해 분열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이집트를, 셀레우코스 1세는 바빌로니아를,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를, 그리고 안티고노스 1세는 소아시아의 많은 지역을 지배했다. 그리고 안티파트로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에 대한 섭정을 맡기로 했다.
안티파트로스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에 대한 통제가 잘 되지 않자 안티고노스와 손을 잡기로 했다.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 장성 크라테로스를 살해하고 페르디카스와 연합하여 자신과 맞서는 에우메네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가 자신들을 제거하고 군대를 독차지할 지도 모른다고 의심했고, 아버지와 함께 노병들을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대체로 조용하게 지냈다.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했다. 그런데 그는 아들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서 섭정을 맡기 힘들다고 판단하고(안티파트로스의 생각과는 다르게 카산드로스에게는 폴리페르콘을 압도하는 군사적 재능이 있었다) 유능한 사령관 폴리페르콘을 섭정으로 삼았다. 카산드로스는 이에 반발하여 폴리페르콘을 몰아내고자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재차 동맹을 맺었다. 폴리페르콘은 이에 두려워하여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게 마케도니아로부터 독립시켜주겠다며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카산드로스는 아테네에 옛 정치체제를 회복시켜주기로 했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테베를 재건해 민심을 끌어모았다. 그 결과, 그리스인들은 카산드로스의 편을 들기로 했다.
기원전 317년 카산드로스는 아테네 남서쪽 페게우스에 기지를 세우고 메갈로폴리스에서 폴리페르콘을 격파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가두었다. 이후 필리포스 3세의 부인인 에우리디케와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의 섭정에 올랐으며, 부하 데메트리오스에게 아테네를 맡겼다. 폴리페르콘은 에페이로스의 올림피아스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올림피아스는 에페이로스 군주 아이아키데스를 설득해 군대를 모아 며느리 록사나, 손자 알렉산드로스 4세를 데리고 카산드로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원정 중인 틈을 타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갔다. 필리포스 3세와 에우리디케가 이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대치하자, 올림피아스는 알렉산드로스 4세를 병사들에게 공개해, 마케도니아군의 항복을 받고 무혈 입성했다. 이후 필리포스 3세 부부와 카산드로스의 동생 니카토르를 생포한 뒤 기원전 317년 12월 필리포스 3세, 에우리디케, 니카토르를 잡아 죽였다.
이에 분노한 카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갔고, 기원전 316년 피드나에서 폴리페르콘에 충성하던 병사들이 병력 차가 너무 나는 걸 보고 귀순한 덕분에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두었다. 폴리페르콘은 간신히 몸을 피한 뒤 올림피아스를 탈출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는 올림피아스를 생포한 뒤 왕을 죽인 죄목을 적용해 올림피아스를 처형했다. 이후 필리포스 2세의 딸이자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이복동생인 테살로니케와 결혼하여 아르게아스 왕조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테살로니케와의 사이에서 필리포스 4세, 알렉산드로스 5세, 안티파트로스 1세를 낳았다.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일어나면서 기원전 314년에 안티고노스와 대립했다가 안티고노스가 그리스 전역의 폴리스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티레 선언을 하면서 카산드로스에게 반발해 여러 폴리스들이 봉기하자 안티고노스와 화평을 맺었으며, 폴리페르콘이 지배한 펠로폰네소스를 공격했지만 협상을 맺고 펠레폰네소스 이외의 그리스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313년에 에페이로스에서 국민들이 아이아키데스를 왕위에 복귀시키자 동생 필리포스를 시켜 아이아키데스를 죽이도록 했으며, 기원전 312년에는 아이아키데스의 뒤를 이은 알케타스 2세를 쫓아내기 위해 공격했다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기원전 310년 글라우키아스에게 명령을 내려 트라키아의 암피폴리스에서 은거 중이던 알렉산드로스 4세와 록사나를 독살시켰다. 또한 폴리페르콘에게 뇌물을 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서자 헤라클레스까지 독살하게 했다. 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폴리페르콘을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307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가 카산드로스가 에페이로스를 장악하러 간 사이에 아테네를 기습 점령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이듬해 키프로스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해군을 섬멸하고 키프로스를 장악했다. 그는 기세를 이어가 기원전 305년 로도스를 포위하고 엄청나게 거대한 공성탑 헬레폴리스까지 동원하여 공격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보낸 지원군에게 막혀 결국 로도스를 공략하지 못했다. 한편, 카산드로스는 꿋꿋이 에페이로스 공략전을 이어갔고, 기원전 306년에 알케타스 2세가 살해당하고 피로스 1세가 즉위하자 기원전 302년에 에페이로스를 공격해 피로스를 쫓아냈다.
기원전 305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에 공식적으로 즉위하였고, 데메트리오스가 로도스로 간 사이에 아테네를 포위하였지만 공략이 지지부진하다가 아테네로 돌아온 데메트리오스에게 격파되었다. 데메트리오스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전부 귀속시키고 마케도니아로 진군할 태세를 갖추자, 카산드로스는 안티고노스에게 휴전을 맺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는 카산드로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답했다. 이에 카산드로스는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 그리고 아시아의 셀레우코스 1세에게 연합을 호소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바로 옆에 있던 리시마코스는 즉시 카산드로스와 합류하였고, 카산드로스가 테실리아에서 데메트리오스를 상대하는 사이 자신은 병력을 총동원하여 소아시아를 전격 침공했다. 얼마 후 사절단을 접견한 프톨레마이오스 역시 안티고노스에 대항하는 동맹에 가담하기로 하고, 시리아의 시돈을 침공했다. 기원전 302년 소아시아를 침공한 리시마코스는 안티고노스가 안티고니아에서 축제를 즐기는 틈을 타 플라펠루스 장군의 활약을 앞세워 많은 영역을 빠르게 점령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안티고노스는 즉시 대군을 일으켜 소아시아로 진군했다. 그는 아나톨리아 고원 일대에서 리시마코스의 군대와 조우해 곧바로 결전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리시마코스는 결전을 미뤘고, 그 사이에 겨울이 오면서 양측은 날씨가 풀릴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동계 숙영에 들어갔다.
기원전 301년 인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셀레우코스 1세가 카산드로스의 메시지를 받고 즉시 반 안티고노스 연합에 가담해 소아시아로 진격했다. 안티고노스는 그리스에 있는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전갈을 보내 당장 자신에게 합류하라고 명했다. 이리하여 안티고노스-데메트리오스 부자와 리시마코스-셀레우코스 연합군이 입소스 전투에서 맞붙었는데, 안티고노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데메트리오스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군대를 거의 잃어버렸다. 카산드로스는 이 틈을 타 데메트리오스의 통치를 받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대부분 복속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297년 사망한 뒤 그의 아들들이 후계 쟁탈전을 벌였고, 그 와중에 데메트리오스가 개입하면서 그가 이룩한 왕조는 마케도니아에서 축출되었다.
3. 평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혈통을 끝장내버린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당대에도 많은 구설수를 낳았던 듯하며[1][2] 오늘날에도 상당히 음험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부인, 아들들을 모두 제거한 것도 그렇지만, 생전 알렉산드로스가 파괴했던 테베도 보란듯이 재건하는 등, 알렉산드로스에 반대되는 행보들을 보인 것을 보면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이 있지 않았느냐는 시각도 있다.[3]카산드로스 사후 그의 아들들의 내분으로 안티파트로스 왕조가 단명하면서 카산드로스가 남긴 역사적 유산은 극히 제한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딱 하나 오래간 것이 있었으니 훗날 그리스 제2의 도시가 된 테살로니카였다. 알렉산드로스의 혈육들을 살해했지만 사실상 유일하게 남은 마케도니아 왕족이자 자신의 부인인 테살로니케[4]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하려 했으며, 새로이 건설한 도시를 그녀의 이름을 따서 붙였던 것이다. 테살로니케는 카산드로스 사후 살해당했지만 도시의 이름만은 2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살아 남았고, 오늘날에도 그리스의 대도시로 남아 있다.
[1] 심지어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를 독살하기 위해 안티파트로스에 의해 파견된 것이라는 당대의 악의적인 추측도 있었다.[2] 하필이면 또 카산드로스의 왕조도 알렉산더 사후의 분위기마냥 카산드로스가 죽자 곧 망해버렸다.[3]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는 카산드로스가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졌을만한 일화들이 언급된다. 이방인들이 알렉산드로스에게 경배하는 의식을 보고 비웃었다가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벽에 머리가 쳐박혔다거나, 훗날 그리스를 장악하고 알렉산드로스의 조각상을 마주하자 벌벌 떨고 기절했다거나...[4] 알렉산드로스 3세의 이복 여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