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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렉산드로스 4세 Alexander IV of Macedon|Ἀλέξανδρος Aἰγός |
출생 | 기원전 323년 |
헬레니즘 제국 바빌론 | |
사망 | 기원전 309년 (향년 14세) |
마케도니아 왕국 | |
재위기간 | 마케도니아 바실레우스 |
기원전 323년 ~ 기원전 309년 | |
아버지 | 알렉산드로스 3세 |
어머니 | 록사나 |
왕조 | 아르게아스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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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게아스 왕조의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드로스 대왕)와 박트리아 공주 록사나의 아들. 삼촌인 필리포스 3세(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와 공동왕으로 있었으며, 뒤에 어머니와 함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인 디아도코이 중 한 사람인 카산드로스에 의해 독살되었다. 그가 죽고 이복형제인 헤라클레스마저 카산드로스에게 독살됨으로써 아르게아스 왕조의 대는 끊기게 되었다.2. 생애
기원전 323년,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 바빌론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33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 때 대왕의 후계자 후보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복동생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와 왕비 록산나(록사네)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있었다. 대왕의 휘하에 있던 장군들은 만약 뱃속의 아이가 남자아이일 경우 이 아이와 아리다이오스를 공동왕으로 삼기로 결정했으며, 이들은 여러 차례의 담합과 조정과정을 거쳐 제국의 지역을 나누고 사트라프 직을 나눴다. 그리고 얼마 뒤인 기원전 323년 8월, 록사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복자 알렉산드로스 4세를 낳았다. 그러나 왕의 후계자가 정해지기 전까지 대왕의 유해는 방치되어 뒤늦게 장례가 치러지는 불상사가 발생했고, 왕위를 둘러싸고 휘하 장군들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진정한 후계자'를 놓고 디아도코이들 간의 암투가 벌어졌다.알렉산드로스 4세의 어머니인 록사나는 그리스 어에 따라 일반적으로 록사나(록사네)라고도 하는데,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지배하던 옥시아르테스의 딸로 권세욕이 있는 여자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후 그녀와 결혼했다. 또한 갓난아이인 조카와 공동왕이 된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 역시 결함[1]이 있었기에 성인이어도 큰 영향력을 미치기 힘들었다. 결국 페르디카스가 왕국 섭정이 되고 멜레아그로스가 그를 보좌하기로 결정되었는데,얼마 안가 페르디카스는 보좌를 맡은 멜레아그로스를 암살하고 전권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꼭두각시 왕들을 장악하면서 부인이었던 안티파트로스의 딸을 버리고 대왕의 누나 클레오파트라(Κλεοπάτρα)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페르디카스의 행동은 다른 디아도코이들의 불만을 일으켜 기원전 322년 프톨레마이오스가 대왕의 시신을 운구하는 페르디카스 군을 습격하는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2] 이후, 본격적인 디아도코이 간의 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페르디카스 암살 등으로 사건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지만, 새로이 트리파라데이소스(Τριπαράδεισος) 협정이 맺어져, 새 섭정으로 안티파트로스가 임명되고, 그에 의해 두 왕(필리포스 3세와 알렉산드로스 4세)는 바빌론에서 본국인 마케도니아로 이동하였다. 아울러 사트라프 자리도 재분배되어 리시마코스가 트라키아를 받고, 페르디카스 암살에 일조한 셀레우코스 1세가 바빌론을 받아 사건이 수습되었다.
3. 죽음과 아르게아스 왕조의 멸망
두 왕은 마케도니아로 옮겨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불씨는 살아있었고, 트리파라데이소스 협정을 통해 기원전 319년, 이들은 에우메네스를 공격한다. 그러나 카파도키아의 에우메네스를 공격하던 도중, 섭정 안티파트로스가 사망하였고, 새로운 섭정에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인 카산드로스가 아닌, 폴리페르콘이 섭정으로 지명되었다. 그런데 새 섭정은 공격 중이었던 에우메네스와 손을 잡았고,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이던 카산드로스에게 더 큰 불만을 불러일으켜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에서는 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카산드로스는 다른 디아도코이들[3]과 동맹을 맺어 내전에서 승리한다.이때 폴리페르콘은 올림피아스 태후와 어린 왕과 록사나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이자 올림피아스 태후의 고향이며, 자신의 근거지인 에페루스로 탈출하여 군세를 정비했다. 한편 권력욕이 많았던 올림피아스 태후는 오직 자신의 피를 이은 대왕의 아들만이 마케도니아를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이자 그의 여러 부인 중 한 명이 낳은 공동왕 필리포스 3세를 제거하기로 결심한 뒤, 폴리페르콘과 연합하여 기원전 317년, 마케도니아에 있는 필리포스 3세 진영을 공격했다. 병력이 약한 탓에 왕이 머무는 곳은 쉽게 점령당했고, 왕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와 왕비 에우리디케는 생포되어 쳐형되었다. 이때 카산드로스의 형제들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 역시 함께 처형당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4세는 단독왕이 되었고, 새 실권은 할머니인 올림피아스와 어머니 록사나, 섭정 폴리페르콘이 장악하였다.
하지만 올림피아스와 폴리페르콘의 이런 행위는 디아도코이들에게 명백한 반역행위로 간주되었고, 카산드로스에게 명분을 제공한 꼴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즉각 공격을 받았고, 카산드로스에게 또다시 패했다. 올림피아스는 피드나에서 항복하였고, 승리한 카산드로스는 재판을 통해 대왕의 정통후계자인 필리포스 3세 부부를 처형한 반역죄로 올림피아스 태후를 생포하여 기원전 316년, 처형하고 마케도니아를 장악하였다.
그 후, 제 3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발발했다. 원인은 안티고노스의 세력이 너무 강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BC 314년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가 손을 잡고 안티고노스와 맞섰고, 이에 맞서 안티고노스는 영토를 더욱 확장하는 한편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잔존해 있던 폴리페르콘 세력과 연합했다.[4] 이에 카산드로스와 리시마코스가 아나톨리아를 공격했고, 안티고노스는 이를 격퇴하기 위해 북진했다. 하지만 BC 312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가자 전투에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 패배하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을 받은 셀레우코스가 바빌론을 수복하자 안티고노스는 다시 남하해야 했다. 이쯤 되자 안티고노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모두 휴전을 바라게 되었고, 결국 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프톨레마이오스와 안티고노스는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 휴전 협정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이 협정은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안티고노스가 모두 외교 관계를 수립할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세력을 가졌음을 공인한 것이기 때문이다.[5] 동시에 이 평화조약(B.C 311)에 의거해서 알렉산드로스 4세의 단독 왕 인정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곧 왕과 아르게아스 왕조는 더 이상 섭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선언을 했고, 카산드로스 역시 더 이상 알렉산드로스 4세는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협정 이후, 알렉산드로스 4세는 더 이상 디아도코이들에게 실질적으로는 필요하지도 않았고, 디아도코이들이 이미 독자적인 왕국을 가지게 되었기에 걸림돌이 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기원전 310년 카산드로스는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궁전 안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어린 왕과 모후 록사나를 독살하여 모두 죽였다. 동시에 아르게아스 왕조의 유일한 남자 혈육인, 대왕의 또 다른 아들 헤라클레스 역시 폴리페르콘에게 뇌물을 먹여 죽였다.
4.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알렉산드로스 4세
로드 엘멜로이 2세의 모험의 등장인물 에르고의 정체.[1] 간질을 앓고 있었다고 하는데, 정신박약자는 아니어도 지능만 일반인보다 떨어지는 우둔한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기록에 따르면 올림피아스가 독을 먹여서 머리지능이 떨어져버렸다고 한다.[2] 대왕의 시신이 이때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방부처리되어 그의 근거지인 알렉산드리아에 영구보관되었다.[3] 안티고노스 1세,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등[4] 다만 폴리페르콘은 펠로폰네소스의 거점들에 틀어박혀 BC 303년 사망할 때까지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5] 사실상 독자적인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