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제1중간기 제10왕조 4대 파라오 메리카레 Merikare | ||
당시 서기였던 오르카우케티(Orkaukhety)의 팔레트, 메리카레의 카르투슈가 새겨져 있다.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메리카레(Merikare)[1] | |
부왕 | 와카레 케티로 추정 | |
선대 | 와카레 케티로 추정 | |
후대 | 이름 없는 임시 후계자가 있었거나 멘투호테프 2세로 추정 | |
묘지 | 메리카레의 피라미드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연도는 불명이나 재위기간은 50년으로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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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리카레는 이집트 제1중간기에 활동한 10왕조의 파라오이다. 그는 선왕의 가르침을 받아 남부의 11왕조와의 공존 정책을 펼쳤으며, 테베와의 전쟁 대신 헤라클레오폴리스 중심의 국정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고,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멘투호테프 2세가 이끄는 테베 세력에 의해 그의 왕조는 정복당하며 중왕국이 시작되었다. 메리카레의 피라미드는 존재가 확인되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2. 생애
메리카레는 제10왕조 말기에 즉위한 파라오로, 중년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여겨진다. 선왕의 정체는 불분명하며, 일부 학자들은 그를 와카레 케티와 동일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메리카레에게 주는 가르침’이라는 문헌은 메리카레의 아버지가 남긴 것으로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그의 통치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문헌에서는 왕국의 동부 국경이 안정되었으나 여전히 주의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테베와 대립하던 시기에 상이집트 지역을 보다 유화적으로 다룰 것을 조언하고 있다.메리카레는 기원전 2075년경 즉위한 후 헤라클레오폴리스와 테베 두 세력의 공존을 인정하고 평화 정책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의 통치기는 비교적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으나, 이후 나일강을 따라 함대를 이끌고 원정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시유트에 충성파였던 케티 2세를 노마치로 임명하고, 현지 신전 복원을 지시하였다. 이후 상류로 더 이동하여 샤쇼테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국경 지역에서 세력을 과시하였다.
기원전 2040년경, 메리카레는 헤라클레오폴리스가 정복당하기 불과 몇 달 전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후계자가 즉위했으나, 곧바로 멘투호테프 2세 휘하의 테베군에 의해 멸망하였다.
3. 메리카레의 피라미드
메리카레는 사카라에 피라미드를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명칭은 ‘메리카레의 거처는 번영하리라’[2]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제6왕조 시기에 만들어진 테티의 피라미드 근처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다. 피라미드 건설에 참여한 관리들의 직책은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그의 장례 신전은 제12왕조까지 존속하였다. 실제로 메리카레의 카르투슈는 테티 및 메리카레의 장례 의식을 담당한 네 명의 사제들의 비문에서 확인된다.4. 유물
메리카레의 이름은 토리노 파피루스에 등장하지 않지만, 헤라클레오폴리스 파라오들 중 가장 많은 고고학적 증거가 남아 있다. 그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유물과 기록으로는 첫 번째로 상술한 《메리카레에게 주는 가르침》이 있다. 두 번째로는 문서 상단 사진에 있는 아시유트에서 발견된 재상 오르카우케티의 나무 필통이 있다. 세 번째로는 메리카레 집권 당시에 임명된 아시유트의 총독 케티 2세의 묘비명에 나온다. 마지막으로 사카라에서 발견된 그의 피라미드와 장례 제사를 언급하는 9개의 석비에도 메리카레가 등장한다.5. 이론
2003년, 이집트학자 아르카디 F. 데미드칙(Arkadi F. Demidchik)은 메리카레의 재위 시기에 대한 기존 학설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만약 메리카레가 멘투호테프 2세의 원정 시기에 통치했다면, 그의 피라미드와 장례 제사가 테베 세력의 정복 이후에도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메리카레에게 주는 가르침(Teaching for King Merikare)》에서 언급된 남부에서의 화강암 획득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데미드칙은 또한 테피비(Tefibi)와 메리카레가 언급한 티니스(Thinis) 전투가 동일한 사건이며, 이는 테베 지역의 파라오 인테프 2세가 반대편에서 수행한 전투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이를 근거로 메리카레의 통치 시기는 기존보다 수십 년 앞당겨져야 하며, 이는 제10왕조의 권력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와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