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중왕국 제12왕조 4대 파라오 세누스레트 2세 Senusret II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세누스레트(Senusert) | |
부왕 | 아메넴헤트 2세 | |
선대 | 아메넴헤트 2세 | |
후대 | 세누스레트 3세 | |
묘지 | 세누스레트 2세의 피라미드 | |
왕비 | 케네메트네페르헤제트(Khenemetneferhedjet) 노프레트 2세(Nofret II) 이타웨레트(Itaweret)[추정] 켄메트(Khenmet)[추정] | |
자녀 | 세누스레트 3세(Senusert III)♂ 세누스레트-손베(Senusret-sonbe) 이타카이트(Itakayt)♀ 네페레트(Neferet) 시타토르유네트(Sithathoryunet)♀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공동 통치 5년 단독 통치 15년 |
[clearfix]
1. 개요
이집트 중왕국 12왕조의 4대 파라오이다.2. 통치
2.1. 재위 기간 및 공동 통치
제12왕조 연표를 확정하는 데 있어 여러 파라오들이 공동 통치를 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쟁점이 된다. 또한, 당시 공동 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어떤 연구자들은 세누스레트 2세가 즉위하기 이전 부왕인 아메넴헤트 2세와 함께 몇 년간 공동 통치를 했다는 설을 지지하기도 한다. 공동 통치 기간은 3년가량 혹은 최대 5년까지 주장되기는 하지만, 반대로 아예 없었거나 짧았다는 주장도 있다.세누스레트 2세의 정확한 재위 기간 역시 학자들 간의 논란 대상이다. 전통적으로는 19년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했으나, 실제 고고학적 기록에서는 7~8년 차 정도에 해당하는 문서가 가장 후대의 기록으로 확인된다는 점 때문에 10년 미만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다만, 피라미드 등 대규모 공사를 완료하기 위해선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짧은 치세로는 설명이 어려운 면도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는 9~10년 정도로 보는 견해가 많다.
또 다른 논쟁으로 세누스레트 2세와 세누스레트 3세 사이에 공동 통치가 있었는지 여부가 있다. 이와 관련된 문헌 기록은 극히 제한적이며, 두 왕의 이름이 함께 새겨진 스캐럽[3] 하나가 그 흔적 중 하나로 거론된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두 파라오가 실제로 일정 기간 왕위를 나누어 가졌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2.2. 내정
세누스레트 2세의 치세는 내부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파이윰 지방의 개발에 주력하였는데, 특히 모이리스 호수에 인접한 습지대에 운하와 제방을 조성하여 농경지를 넓히려 했다. 이러한 개발로 인해 이 시기 파이윰은 중요한 경제·종교·휴양지로 성장했다.여담으로 이 시기부터 파이윰에서 악어 신 세베크에 대한 숭배가 번성했다.
2.3. 대외 활동
세누스레트 2세 통치 시기에는 대규모 원정이나 군사 충돌에 관한 구체적인 사료가 거의 없다. 대신 서아시아 지역 등지와의 무역 교류가 활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무덤 벽화에서 아아무(Aamu)으로 언급되는 민족이[4] 선물이나 공물을 갖고 방문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 중에는 헤카-카수트(Heqa-kasut)라는 칭호로 기록된 민족도 존재한다. 헤카-카수트는 이후 이집트를 정복하는 힉소스인들이다.2.4. 후계
세누스레트 2세가 사망한 뒤에는 세누스레트 3세가 계승하였다. 다만, 세누스레트 2세와 3세 간에 얼마간 공동 통치가 있었는지는 아직 학계에서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과거에는 일부 파피루스 기록이 두 왕의 연호가 겹친다는 증거로 해석된 적도 있으나, 해당 문헌의 날짜가 다른 왕의 연호라는 연구 결과가 제시되면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3. 세누스레트 2세의 피라미드
이름 | 카 세누스레트 |
뜻 | 세누스레트는 빛난다 |
높이 | 48.65m 혹은 47.6m |
경사 | 42°35' |
세누스레트 2세의 피라미드는 엘-라훈(El-Lahun)에 세워졌다. 건설 기법은 내부에 방사형 석회암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 사이에 진흙 벽돌로 채우는 형태를 취했으며, 바깥면을 석회암 판석으로 마감하는 공법을 사용했다. 피라미드 주변으로 보조 피라미드와 몇 기의 마스타바가 함께 축조되었으나, 내부에 실제 매장 흔적이 보이지 않아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라미드 내부 진입로는 기존의 북쪽 입구가 아니라 남쪽에 숨겨져 있어서, 초기에 이를 찾으려 했던 고고학자들이 애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매장실 인근에는 여러 통로와 우물형 수직 갱도가 존재하는데, 단순한 구조가 아니어서 도굴을 방지하려 한 구조로 보인다.
세누스레트 2세의 피라미드는 19세기 중반 칼 리차드 렙시우스가 처음으로 발견하여 간단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50년 후, 플린더스 페트리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발굴을 진행하였다. 플린더스 페트리가 처음으로 이 무덤을 발굴했을 때, 대부분의 물건들은 이미 도굴당했지만 세누스레트 2세의 이름이 새겨진 석고 제단, 금으로 만든 뱀 모양의 왕관 장식, 세누스레트 2세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 뼈가 남아있었다. 이후 1989년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의 N.B.밀레트 팀과 건축가 J.E.크누드스타드 팀이 이 피라미드의 조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2019년 6월 28일에 발굴 이후 처음으로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