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3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3세 Ptolemy III Euergetes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프톨레마이오스 3세 Πτολεμαῖος | Ptolemy | |
출생 | 기원전 280년 | |
고대 그리스 코스 섬 | ||
사망 | 기원전 222년 11월/12월 (향년 58세)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246년 ~ 기원전 222년 (약 24년) | ||
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2세 | |
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4세 | |
부모 |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2세 어머니: 아르시노에 1세 | |
배우자 | 베레니케 2세 | |
자녀 | 프톨레마이오스 4세 아르시노에 3세 | |
종교 | 이집트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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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3대 파라오. 바빌론까지 쳐들어간 유일한 파라오로,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룩했다.2. 생애
3차 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조를 격파하고 아나톨리아 ~ 소아시아 해안을 전부 장악한 후의 영토
기원전 28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마케도니아 및 소아시아 서부의 왕 리시마코스의 딸 아르시노에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기원전 284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공동 파라오가 되었고, 기원전 282년 단독 파라오가 되었다. 기원전 281년 리시마코스가 셀레우코스 1세와의 전쟁 도중 전사하면서 왕국은 붕괴되었고, 리시마코스의 계비이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누이인 아르시노에 2세가 아들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이집트로 들어왔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아내가 쓸모없어졌다고 판단하여 기원전 275년 자신을 몰아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이유로 아르시노에 1세를 콥토스로 추방한 뒤 기원전 273년경 누이 아르시노에 2세와 결혼했다.
어머니가 추방된 후,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어 이집트가 아닌 에게 해의 테라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훗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장이 될 로도스의 시인 아폴로니우스를 스승으로 두었다. 리시마코스와 아르시노에 2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를 대신하여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기원전 267년부터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시리아 전쟁 시기인 기원전 259년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이집트에서 추방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테라에 있던 아들을 이집트에 돌아오게 한 뒤 그를 포함한 아르시노에 1세의 자녀들을 아르시노에 2세의 자녀로 입양시킴으로써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인정받게 하였다.
기원전 250년대 후반,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와 키레네의 왕 마가스의 외동딸 베레니케 2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그러나 기원전 250년 마가스가 죽자, 베레니케의 어머니 아파마 2세가 약혼을 취소하고 마케도니아 왕자 데메트리오스를 키레네로 초대하여 베레니케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데메트리오스는 얼마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키레네의 지배는 공화 정부에 맡겨졌다. 기원전 246년 1월 28일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자연사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새 파라오로 즉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즉위 직후 키레네 여왕 베레니케 2세를 이집트로 데려와 결혼하고 공동 파라오로 삼았다. 이로 인해 키레네가 이집트에 재합병되자 그는 에클루스와 데모파네스라는 이름의 두 키레네인이 이끄는 키레네의 공화 정부를 전복하고 두 개의 항구 도시를 주변에 새로 세우게 하였다. 이 도시들은 파라오의 이름을 따서 '프톨레마이스'(오늘날 톨메이타), '베레니케'(오늘날 벵가지)라고 명명되었다.
기원전 246년 7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2세가 갑자기 죽었다. 그는 생전에 첫 번째 왕비인 라오디케 1세에게서 셀레우코스 2세를 두었다. 그러나 기원전 253년 라오디케 1세와 이혼하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여동생인 베레니케와 결혼하여 안티오코스를 낳았다. 그러다 안티오코스 2세가 소아시아에서 영지를 경영하고 있는 전 아내 라오디케 1세를 찾아갔다가 돌연 죽어버린 것이다. 라오디케 1세는 재빨리 아들 셀레우코스를 왕으로 내세우며 소아시아 서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누이 베레니케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지중해 해안을 따라 이동하였다. 그해 늦가을, 그의 군대는 셀레우키아와 안티오키아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입성했다. 그러나 그는 곧 누이 베레니케와 외조카 안티오코스가 라오디케 1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동생의 비참한 죽음에 분노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대대적인 정벌에 착수했다. 기원전 246년에서 245년 사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해군은 아나톨리아 남서부, 이오니아, 트라키아 해안을 따라 원정하여 여러 해안 도시를 공략하거나 복속시켰다. 에페소스 총독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게 지지를 표명했다. 또한 육군은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의 지휘하에 시리아를 돌파하여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해, 셀레우코스 2세가 도망친 바빌론을 향해 노도와 같은 기세로 진격했다.
훗날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그리스어로 새긴 승전비에는 그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엘람, 페르시아, 메디아, 그리고 박트리아까지 정복하고 "페르시아인들이 이집트에서 운반해온 모든 신성한 물건들"을 되찾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명백한 과장이지만, 이집트군이 티그리스 강을 건너 바빌론까지 위협한 것은 사실이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 있는 영토에 총독을 세우기도 하는 등, 이 지역을 영구적으로 통합하려는 야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상이집트의 테베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이집트로 귀환했다. 파피루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45년 나일 강의 범람이 예전만하지 않아서 기근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시리아 전쟁을 위해 막대한 세금을 물리자,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셀레우코스 왕조군은 이 틈을 타 반격하여 245년 7월 메소포타미아를 탈환했다. 여기에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해군이 안드로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해군을 격파하고 키클라데스 제도를 함락시켰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이집트로 돌아와 테베의 반란을 진압한 후,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는 비문을 세웠으며, 기원전 243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영토에서 발견한 조각상들을 이집트에서 복원한 것을 기념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2세가 반격에 나서 안티오키아를 탈환하였고 기원전 242년 시리아 북부의 내륙 지대를 탈환했으며, 다마스쿠스 주변 지역을 습격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휴전을 제의했고, 기원전 241년 양국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그 결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트라키아의 마로네이아에서 리비아의 시르티스에 이르는 동지중해 연안 일대를 지배하에 두었다. 여기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도 안티오키아의 항구 도시인 셀레우키아 피에리아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것으로 귀속되어서, 셀레우코스 왕조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공식적으로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지만, 셀레우코스 2세의 적들을 은밀히 지원했다. 기원전 241년 셀레우코스 2세의 동생 안티오코스 히에락스가 소아시아에서 반기를 들었을 때 암암리에 지원하였으며, 페르가몬 왕 아탈로스 1세를 지원하여 셀레우코스 왕조의 소아시아 영토를 갉아먹게 했다. 또한 아카이아 동맹을 지원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이어갔다. 그러나 기원전 226년 아카이아 동맹이 마케도니아와 손을 잡고 스파르타를 적대하자, 아카이아 동맹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파르타를 지원했다.
기원전 224년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3세가 '그리스 동맹'을 창설하면서, 그리스의 대다수 국가들은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에 놓였다. 하지만 아이톨리아와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와 적대 관계를 유지했고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충성을 바쳤다. 아테네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와 베레니케 2세를 신으로 숭배하는 국가 종교 의식을 조직했다. 이 종교의 중심지는 프톨레마이온으로, 젊은 남성 시민들이 시민과 군사 훈련을 받는 체육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기원전 223년 스파르타 왕 클레오메네스 3세가 끝내 참패하여 이집트로 망명하자, 그는 왕을 환대하면서 다시 권좌에 앉히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기원전 222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안티고노스 3세와 평화 협정을 맺고 클레오메네스를 더 이상 돕지 않기로 했다.
기원전 223년 셀레우코스 장군 아카이오스가 소아시아의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페르가몬 왕국을 공격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아들 마가스에게 군대를 맡겨 페르가몬 왕 아탈로스 1세를 돕게 했다. 그러나 페르가몬-이집트 연합군은 아카이오스에게 패배했다. 그는 마가스가 이집트로 쓸쓸히 귀환한 직후인 기원전 222년 11월 또는 12월에 사망했고,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뒤를 이어 파라오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