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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네스 왕조 제7대 샤한샤 다리우스 1세 𐎭𐎠𐎼𐎹𐎺𐎢𐏁 | |
<colbgcolor=#941517><colcolor=#fff,#fff> 제호 | 다리우스 1세(Darius I) |
출생 | 기원전 550년 |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 |
사망 | 기원전 486년 10월 (향년 64세) |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 |
재위 | 아케메네스 왕조 샤한샤 |
기원전 522년 9월 ~ 기원전 486년 10월 (37년) | |
전임자 | 바르디야 |
후임자 | 크세르크세스 1세 |
부친 | 히스타페스페스 |
모후 | 로도구네[1] |
황후 | 아토사 외 여러 명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clearfix]
1. 개요
𐎠𐎭𐎶 𐏐 𐎭𐎠𐎼𐎹𐎺𐎢𐏁
adam / Dārayavauš
나는 다라야와우쉬(다리우스)다.
𐎧𐏁𐎠𐎹𐎰𐎡𐎹 𐏐 𐎺𐏀𐎼𐎣
xšāyaθiya / vazraka
위대한 왕이며,
𐎧𐏁𐎠𐎹𐎰𐎡𐎹 𐏐 𐎧𐏁𐎠𐎹𐎰𐎡𐎹𐎠𐎴𐎠𐎶
xšāyaθiya / xšāyaθiyānām
왕 중의 왕이며,
𐎧𐏁𐎠𐎹𐎰𐎡𐎹 𐏐 𐎱𐎠𐎼𐎿𐎡𐎹
xšāyathiya / Pārsaiy
파르사(페르시아)의 왕이며,
𐎧𐏁𐎠𐎹𐎰𐎡𐎹 𐏐 𐎭𐏃𐎹𐎢𐎴𐎠𐎶
xšāyaθiya / dahyūnām
만국의 왕이며,
𐎻𐏁𐎫𐎠𐎿𐎱𐏃𐎹𐎠 𐏐 𐎱𐎢𐏂
Vištāspahyā / puça
비쉬타스파(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자,
𐎠𐎼𐏁𐎠𐎶𐏃𐎹𐎠 𐏐 𐎴𐎱𐎠
Aršāmahyā / napā
아르샤마(아르사메스)의 손자로,
𐏃𐎧𐎠𐎶𐎴𐎡𐏁𐎡𐎹
Haxāmanišiya
하카마니시(아케메네스) 가문이다.
베히스툰 비문 中[발음]
adam / Dārayavauš
나는 다라야와우쉬(다리우스)다.
𐎧𐏁𐎠𐎹𐎰𐎡𐎹 𐏐 𐎺𐏀𐎼𐎣
xšāyaθiya / vazraka
위대한 왕이며,
𐎧𐏁𐎠𐎹𐎰𐎡𐎹 𐏐 𐎧𐏁𐎠𐎹𐎰𐎡𐎹𐎠𐎴𐎠𐎶
xšāyaθiya / xšāyaθiyānām
왕 중의 왕이며,
𐎧𐏁𐎠𐎹𐎰𐎡𐎹 𐏐 𐎱𐎠𐎼𐎿𐎡𐎹
xšāyathiya / Pārsaiy
파르사(페르시아)의 왕이며,
𐎧𐏁𐎠𐎹𐎰𐎡𐎹 𐏐 𐎭𐏃𐎹𐎢𐎴𐎠𐎶
xšāyaθiya / dahyūnām
만국의 왕이며,
𐎻𐏁𐎫𐎠𐎿𐎱𐏃𐎹𐎠 𐏐 𐎱𐎢𐏂
Vištāspahyā / puça
비쉬타스파(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자,
𐎠𐎼𐏁𐎠𐎶𐏃𐎹𐎠 𐏐 𐎴𐎱𐎠
Aršāmahyā / napā
아르샤마(아르사메스)의 손자로,
𐏃𐎧𐎠𐎶𐎴𐎡𐏁𐎡𐎹
Haxāmanišiya
하카마니시(아케메네스) 가문이다.
베히스툰 비문 中[발음]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제7대 샤한샤다. 통칭 다리우스 대제
2. 언어별 표기
고대 페르시아어 | 𐎭𐎠𐎼𐎹𐎺𐎢𐏁 (다라야와우쉬) |
고전 아람어 | ܕܪܝܘܫ (다리야와쉬) |
엘람어 | 𒆪𒊑𒅀𒄷𒌑𒆜 (다리야우이쉬) |
고대 아르메니아어 | Դարեհ (다레흐) |
고대 히브리어 | דָּרְיָוֶשׁ (다르야웨쉬) |
고전 그리스어 | Δαρεῖος (다레이오스) |
페르시아어 | داریوش (더리우쉬) |
라틴어 | DARIVS (다리우스) |
3. 생애
3.1. 초기
부조의 묘사를 토대로 다리우스 1세의 모습을 현대에 상상하여 표현한 초상화 |
파르티아 총독 히스타스페스와 로도구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젊었을 적부터 큰 야심을 가진 사내였다. 키루스 2세의 뒤를 이었던 캄비세스 2세가 조기에 사망하자 쿠데타를 일으켜 다음 계승자였던 바르디야를 죽여버리고 제위에 올랐다. 다리우스와 그 지지자들은 진짜 바르디야는 이미 죽었으며, 가우마타 또는 스판다다타라는 자가 바르디야를 참칭하고 있다고 명분을 내세웠다. 그리스에서 바르디야, 가우마타는 스메르디스, 타뉘오크사르케스, 스펜다다테스로 표기되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이때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 간에서 페르시아의 정치체제를 놓고 민주정치, 과두정치, 독재정치 중에서 논란이 일었는데, 먼저 쿠데타 동료 중 하나인 오타네스가 민주정치를 주장한다. 이에 다른 동료인 메가비주스는 소수의 엘리트들이 이끄는 과주정치를 주장하자, 다리우스는 이들의 의견에 "대중은 우매하고 충동적인 의견에 휩쓸리기 쉬우며, 그 두 방법은 제국을 다스르기 적합하지 않다" 반박하며 독재정치를 통해 이를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두고 논쟁하다가 밤에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가서 해가 뜰 무렵에 처음 말이 운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3]
그런데 이때 다리우스는 교묘한 방법을 사용했다. 하인이 암컷 말의 냄새를 미리 채취해서 해가 뜰 때 다리우스의 말이 냄새를 맡고 흥분해 울게 만든 것. 결국 다리우스는 왕으로 추대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와는 혈연 관계가 캄비세스 2세의 6촌으로 약간 멀었으므로 그는 키루스 2세의 딸이자 캄비세스 2세의 여동생이었던 아토사와 결혼해서 정통성을 얻었다.[4] 하지만 등극 과정이 이런 탓에 엄청난 반란을 겪어야 했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이 수많은 반란을 모조리 제압하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얻었으니 좋게 마무리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2. 정복 사업
반란을 억누르면서 페르시아 제국을 안정시킨 다리우스 1세는 연이어 외치에 집중했다. 정복 군주로서 카스피해에서 인도, 마케도니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정복해 아케메네스 왕조의 판도를 넓혔다. 그러나 다리우스의 정복사업이 항상 수월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스키타이와의 전쟁에서는 이들을 정벌하기 위해 수만의 군세를 이끌고 소아시아를 거쳐 발칸의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통과, 도나우 강을 넘어 북진했으나 스텝 지역의 지리에 익숙했던 스키타이는 민첩하게 페르시아군과의 정면 전투를 계속해서 피했다. 이단튀르수스 항목 참조.스키타이족은 페르시아군의 진군로에서 우물들을 메우고 식량을 남김없이 가져가면서 다리우스의 대군을 보급 곤란 상태로 텅 빈 스텝 한가운데에서 헤매도록 유인했다. 결국 참다 못한 다리우스 대왕은 스키타이의 왕 이단튀르수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는 도망만 다니고 있는데 결국 다음에 말할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에게 우리 군대에 맞서 싸울 자신이 있다면 더 이상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지 말고 한곳에서 싸우도록 하자. 만약 역부족이라고 느낀다면 더 이상 도망치지 말고 그대의 주군인 내게 헌상품으로 땅과 물을 알현하러 오라.[5]”
다리우스의 편지에 이단튀르수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이때까지 어떠한 자도 두려워해 도망친 적은 없소. 그냥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하고 있을 뿐이요. 우리나라에는 점령당하거나 황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대들과 서둘러 싸워야만 되는 도시나 과수원이 없소. 우리는 그대와 싸워야 할 합당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싸움을 피할 생각이오. 그리고 내가 주군으로서 받드는 분은 우리의 선조이신 제우스와 스키타이의 여왕 헤스티아 두 분밖에 없소.[6] 그대에게 땅과 물 대신 그대에게 합당한 다른 것을 보내 주겠소. 그리고 그대가 내 주군이라고 운운한 데 대한 나의 반응은 한 마디로 ‘엿 먹어라’요. 정 그렇게 우리와 싸우고 싶다면 어디 우리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 파헤쳐 보시지요. 그때 가서 내가 정말로 싸우기 무서워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인지 어떤지를 알게 될 겁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보면 이때 이단튀르수스가 다리우스 대왕에게 보낸 것은 새와 쥐, 개구리 각 한 마리씩과 화살 다섯 대였다. 다리우스 대왕은 쥐는 땅에서 살면서 사람과 같은 곡식을 먹고 새는 말과 닮았으며[7], 개구리는 물속에서 살고 화살은 군사의 상징이므로 즉 스키타이인들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고 우리한테 항복하겠다고 하는 뜻이라고 이해하고 기뻐했는데, 다리우스 대왕의 측근인 고브뤼아스는 이렇게 해석했다고 한다.
이 페르시아 놈들아, 선택해라. 새처럼 하늘로 솟든지 쥐새끼처럼 땅으로 꺼지든지, 개구리처럼 물에 뛰어들든지, 이 화살에 맞아 죽든지.
전격작전을 구상한 다리우스였지만 스키타이의 힘 빼기 작전에 시간만 낭비하자 대군을 동원한 페르시아 군에서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대군이 소비하는 식량이 문제였다. 스키타이가 먹을 만한 것이라곤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 황량한 들판에서는 곡식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페르시아군은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며 퇴각했고, 스키타이군은 돌아가는 페르시아군을 지속적인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참담한 페르시아의 패배였다.[8]
치세 말기에는 아테네가 자꾸만 그리스인 거주지역에서 반란을 부추기자 혼쭐을 내주고자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켜 그리스 원정에 나섰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무참히 박살나고 말았다.[9] 이 덕분에 우리는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3.3. 내치
정복사업 외에도 대규모 토목사업을 통해 페르세폴리스를 새로운 수도로 만들었는데, 선왕 키루스 대왕과 마찬가지로 노예제에 반대했기 때문에, 당시 건설에 동원된 인부들에게 빠짐없이 보수를 공평히 나눠줬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제국의 주요 도시들에 남아있던 미완 건축 프로젝트들조차 모조리 완성시켰다. 신전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서 제국 곳곳에 국교인 조로아스터교 신전들을 세웠지만 타 종교 신전들도 많이 세워줬다.[10] 다리우스 1세는 제국 전역에 거대한 건축물들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이집트의 발달된 건축 기술을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는 이집트에서 석공과 건축가들을 떼거지로 끌어가 수사의 황궁을 비롯해 많은 건물들을 만들도록 했는데 이로 인해 페르시아 전체의 건축력이 급속도로 증가했다.붉은 선으로 표시된 왕의 길 |
행정체계인 사트라프(satrap) 제도[11]를 확립하여 제국을 본격적인 행정체계를 갖춘 대제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제 구역 안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사트라프들이었으니 다리우스 1세로서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진 않을까 신경쓰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왕의 귀, 왕의 눈이라고 불리는 감찰관들을 주기적으로 파견해 사트라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토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사트라프 바로 옆에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총비서관을 두어 매달 사트라프의 행적을 담은 보고서를 올려보내도록 만들었고, 재무관도 따로 두어서 사트라프들이 국고를 함부로 남용하지 못하게 시도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다리우스 1세 시대 들어서 처음으로 다릭(Daric)이라는 금화와 시글로스(siglos)라는 은화를 발행했는데, 금화는 오직 황제만이 발행할 수 있었고 은화는 일반 총독과 장군들도 발행이 가능했다. 화폐라는 존재가 도입되면서 페르시아 경제는 이전보다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초기 형태의 은행들이 등장했고 직물, 카펫, 금은보화 등 수많은 물품들이 제국 곳곳으로 쏟아졌다. 다릭 금화의 도입은 세금 걷는 걸 더 쉽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이 덕에 페르시아 제국은 그 당시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종교적으로 보면 조로아스터교를 중심으로 한 관용정책을 폈다. 다리우스 1세 본인은 독실한 아후라 마즈다의 신자였고, 죽을 때까지 조로아스터 최고 대신관직을 유지했지만 타 종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다. 특히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 보수 작업에 재정 지원을 계속하기도 했고, 엘람의 신관들을 황궁으로 초청하거나 이집트의 신 아문에게 바치는 신전들을 짓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제국의 표준어로 아람어를 채택하고, 이집트의 법을 정비하기도 하였다.
3.4. 사후
그를 이어 아들이 제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관대한 크세르크세스 1세이다.다리우스는 현재 이란에 있는 낙쉐 로스탐에 왕가의 무덤에 안장되었는데 여러 개의 무덤 중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무덤 주인이 확실한 무덤은 그의 무덤뿐이다. 그마저 무덤은 오래전에 모두 도굴되어 남아 있는 게 없다.
4. 여담
이집트 카르가의 히비스 신전에 파라오 형식으로 조각된 다리우스 1세 |
그리스 공격 당시 마케도니아는 즉각 항복을 선언했는데, 당시 마케도니아의 왕이 알렉산드로스 1세였다. 시간이 흘러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왕이 흔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불리는 알렉산드로스 3세였고 당시 페르시아의 황제가 다리우스 3세였다.
전설에 따르면(스트라본 지리지 16권) 스키타이와 전쟁 때 스키타이군에게 똥개 훈련을 당하는 바람에 자신의 짐을 지고 이리저리 다니느라 고생한 낙타를 불쌍히 여겨 따로 집을 지어 보살펴주게 했다고 한다. 그곳은 나중에 낙타의 집이라는 뜻으로 가우가멜라라고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낙타는 아랍어에서 "자말", 영어에서 "camel" 등으로 쓰인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3명의 다리우스가 그리스의 대표적 3대 전쟁에 모두 관여했다.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를 침공해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이고, 다리우스 2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의 해군력 증강을 도와서 전쟁의 판도를 결정지었으며,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침공으로 결국 자기 대에서 망국을 맞이했다.
《성경》의 <에즈라> 6장에도 등장한다. 키루스 2세의 지시로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시작하자 유프라테스 총독 닷드내가 찾아와 "누구 지시로 성을 쌓느냐"고 묻자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키루스 황제의 명이다"라고 대답하고, 닷드내가 다리우스에게 서신을 보내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하자 다리우스가 조서를 보내 "경비도 우리 왕실에서 대신 지불할 것이니 너희들은 건축을 막지 말고, 총독의 관할구역에서 거둔 세금 중 일부를 떼어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지원금을 지급하라"라고 지시했다.
치적이 여러모로 중국 수나라의 수문제와 비견될 만한 인물.[13]
5. 대중매체에서
- 문명 4에서 페르시아 진영의 지도자로 등장하는데 뜬금없이 고증을 무시하고 흑인으로 나왔다. 실제로는 인도-유럽어족 아리안인 이란인이다. 그래도 문명 5에서는 고증이 제대로 지켜지면서 등장한다.
- Fate 시리즈에서는 후손인 다리우스 3세 관련으로 자주 언급된다. 위대한 선왕이었고, 바빌론의 니토크리스의 무덤을 연 일화는 게이트 오브 바빌론과 연이 있다.
- 영화 300: 제국의 부활 초반부에 잠시 등장한다. 마라톤 전투에서 패퇴 도중 테미스토클레스의 활에 맞는 등[14] 실제 역사와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혼란해하는 아들을 진정시키고 오직 신만이 그리스를 정복할 수 있으니 그대로 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여 나름 대왕의 면모를 보여준다.
[1] 페르시아 어로는 와르데가우나. 그녀를 사칭한 위작 미라 사건 페르시아 공주로 유명하다.[발음] https://youtu.be/unFjLTKVXo4?t=35, https://youtu.be/qkefO0NVcwY?t=395[3] 이때 오타네스는 군주가 될 의사가 없음을 밝혀 기권한다. 이에 나머지 동료들은 이를 존중해 오타니스 본인은 물론 그 가문은 그 누구도 지배할 수 없다는 권리를 부여한다.[4] 정통성이 떨어지다보니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베히스툰 산에 자신의 조상, 혈통을 강조하는 내용의 베히스툰 비문을 조성하였다.[5] 고대 페르시아가 주변국들로부터 항복의 표시로 요구했던 것으로, 흙과 물을 바치는 것은 곧 그 나라의 주권을 바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참고로 2차 페르시아 전쟁 직전에도 각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이것을 요구했고 그중 아테네와 스파르타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아테네는 사신을 생매장, 스파르타는 This is Sparta!로 유명한 우물에 사신을 던져 죽였다.) 동아시아에서 왕이나 황제에게 사신이 토산물을 바치는 것도 비슷한 이치였다. 반대로 유럽에선 왕이 영주에게 흙을 하사했는데, 이것은 그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해 주겠다는 뜻이었다.[6] 스키타이 신들을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신들 중 역할이 유사한 걸로 번안한 거다.[7] 말처럼 빠르다는 뜻이다.[8] 《인도유럽인, 세상을 바꾼 쿠르간 유목민》, 380~381쪽.[9] 물론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은 세계 최강대국이자 가장 부유한 국가로서 번영을 누렸다.[10]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집트 멤피스의 프타 신전과 네크베트 신전. 이집트 뿐만 아니라 엘람, 바빌로니아, 유대인, 메디아, 리디아 등 웬만한 지방의 토속 신앙 관련 신전들도 다 세워줬다고 볼 수 있다.[11] 제국 전역을 총 20개의 행정구역인 사트라피(Satrapies)로 나누고 이를 지방 총독에 해당하는 사트라프들에게 맡겼다.[12] 로마 황제를 사로잡은 샤푸르 1세[13] 아이러니하게도 뒤를 이어받은 후계자(크세르크세스 1세, 수양제)가 대규모 정복사업(페르시아 전쟁, 고구려-수 전쟁)을 펼치다가 실패하여 망한 것도 비슷하다. 차이라면 아케메네스는 계속 이어졌지만 수나라는 얼마 못 가서 멸망했다. 공통적으로 본인들도 그 나라들을 소규모로 먼저 침공했다가(그리스 1차 침공, 고구려 1차 침공) 망하고 내치에만 집중하여 수습했었다.[14] 그것도 테미스토클레스가 페르시아의 궁병을 죽이고 빼앗은 활로 저격한 것이다. 궁술을 천시하는 그리스 시민 치고 언제 궁술을 배웠는지 자기 손에 익은 활도 아닌 남의 활로 멀리 떨어진 함선에 있는 다리우스 1세를 정확하게 명중시키는 신기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