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6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6세 Ptolemy VI Philometor 𓊪𓏏𓍯𓃭𓐝𓇌𓋴𓋹𓆓𓏏𓇿𓊪𓏏𓎛𓌻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프톨레마이오스 6세 Πτολεμαῖος | Ptolemy | |
출생 | 기원전 186년 5월/6월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
사망 | 기원전 145년 (향년 44세)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1차 | |
기원전 180년 ~ 기원전 164년 (약 16년) | ||
이집트 파라오 2차 | ||
기원전 163년 ~ 기원전 145년 (약 18년) | ||
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5세 클레오파트라 1세 | |
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2세 | |
부모 |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5세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1세 | |
배우자 | 클레오파트라 2세 | |
자녀 | 프톨레마이오스 유파토르, 클레오파트라 테아, 클레오파트라 3세, 프톨레마이오스 7세 | |
종교 | 이집트 다신교 |
[clearfix]
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6대 파라오. 왕조 역사상 폐위되었다가 복위된 첫번째 파라오로, 일생 동안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상대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다. 또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내부분열을 이용하여 안티오코스 3세에게 빼앗겼던 이집트의 영역을 대부분 탈환하였으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여파로 사망했다.2. 생애
기원전 186년 5월 또는 6월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클레오파트라 1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남동생으로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여동생으로 클레오파트라 2세를 두었다. 기원전 180년 9월 시리아 원정을 준비하던 부친이 갑자기 사망한 뒤, 어머니에 의해 공동 파라오로 즉위했다. 당시 6살의 어린 나이여서 어머니가 정사를 돌봤다. 그러던 기원전 176년, 클레오파트라 1세마저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환관이자 가정교사인 에우라이오스와 시리아 출신의 해방노예이자 이집트로 시집 올 때 자신과 함께 했던 레네오스에게 아들을 부탁했다.두 섭정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위엄을 높여서 자신들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다. 기원전 175년 초, 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약혼을 주선했다. 다만 두 사람 다 아직 어린 아이였기 때문에, 결혼은 여러 해 동안 이뤄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테오이 필로메토레스(Teoi Philometores: 어머니를 사랑하는 신들)로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숭배에 통합되었다. 기원전 170년 10월,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공동 파라오로 등극했다. 이 해는 새로운 시대의 원년으로 선포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성인식을 치렀지만, 실제로는 에우라이오스와 레네오스가 권력을 독차지했다.
에우라이오스와 레네오스는 지난날 안티오코스 3세가 빼앗아간 코엘레-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탈환하길 희망했다. 그들은 로마에 사절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티오코스 4세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중재를 부탁했지만, 로마 원로원은 굳이 개입하고 싶지 않아 어느 쪽도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기원전 170년 또는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 4세가 이끄는 셀레우코스군이 이집트의 국경 요새 펠루시움 근처에서 프톨레마이오스군을 격멸하고 펠루시움을 점령했다. 그 후 안티오코스 4세는 나일강 삼각주로 진격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을 평정했다. 에우라이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에게 해의 사모트라케 섬으로 피신시키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장군 코마누스와 시네아스가 정변을 일으켜 왕궁을 장악했다. 이후 안티오코스 4세가 알렉산드리아로 접근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그를 맞으러 나왔다. 그는 이집트가 셀레우코스 제국의 보호국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격분했다.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길고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의 주인인 그들이 하루아침에 타국에 복종하는 꼴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셀레우코스군 장병들이 신전을 약탈하기까지 하자, 그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코마누스와 시네아스는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유일한 왕으로 선포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에 대응하여 알렉산드리아를 포위했지만 도시를 점령할 수 없었고, 겨울이 다가오자 기원전 169년 9월 이집트에서 철수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안티오코스 4세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인 협약을 맺었을 뿐 진심이 아니었다고 호소했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이에 설득되어 그를 다시 파라오로 모셨다.
이집트가 협정을 거부하고 그리스에 사람을 보내 새로운 용병대를 모집하기 시작하자,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8년 봄 이집트로 쳐들어가서 멤피스를 장악한 뒤 이집트의 왕을 칭하고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진을 쳤다. 한편 셀레우코스 함대는 키프로스로 항해해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고 키프로스를 수중에 넣었다. 이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곧 멸망하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집트를 석권하는듯 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로마 공화국이 개입했다.
로마 사절 가이우스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안티오코스에게 이집트와 키프로스에서 즉시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안티오코스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포필리우스는 지팡이로 왕 주위에 원을 그리고, 안티오코스에게 대답을 하기 전에는 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다고 하였다. 안티오코스는 지난날 로마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로마가 얼마나 강한지 파악했기에,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대신, 셀레우코스 제국이 남부 시리아를 계속 영유하는 건 인정되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공동 통치를 하였지만, 두 형제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자신을 쫓아내고 동생을 단독 파라오로 선출하려 했던 일을 뼈저리게 기억하며 동생을 경계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 역시 야심을 이루기 위해 형을 몰아낼 때를 노렸다. 그러던 기원전 165년, 궁정관 디오니시오스 페토사라피스가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게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암살하려 했다고 선동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즉시 동생을 찾아가서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밝혔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이를 믿고 형과 함께 경기장에 공개적으로 함께 나타나 자신들의 관계에 문제가 없음을 대중에 과시했다.
디오니시오스 페토사라피스는 알렉산드리아를 탈출한 뒤 병사들을 설득하여 피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테베에서도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두 반란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농장이 파괴되어 정부의 농업 수입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기원전 165년 가을, 정부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사유지를 몰수하여 국영지로 삼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에 대토시 소유자들은 분노했고,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이를 활용하여 정권을 탈취하기로 작정했다.
기원전 164년 말,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쿠데타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를 축출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환관과 세 명의 신하와 함께 로마로 망명해 자신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다시 키프로스로 가서 그곳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았다. 기원전 163년 여름,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몰아내고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소환했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동생과 화해하기로 하고, 키레나이카의 지배권을 그에게 주었다.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클레오파트라 2세의 공동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키레나이카에 만족하지 못했고, 기원전 163년 말 또는 162년 초에 로마로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로마 원로원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키프로스를 받아야 했는데 분할이 불공평하게 이뤄졌다고 판단하고,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를 알렉산드리아에 사절단으로 보내 프톨레마이오스 6세에게 키프로스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저하면서 쉽사리 넘기려 하지 않자, 사절단은 그해 162년 말 로마로 돌아와서 프톨레마이오스 8세가 무력으로 키프로스를 장악하는 걸 도우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타국의 권력 분쟁에 병력을 보내 주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겨서 결정을 미뤘다.
이 무렵, 로마에 인질로 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데메트리오스 1세가 폴리비오스 등의 협조에 힘입어 로마를 탈출한 뒤 안티오코스 5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이를 도와줬지만, 데메트리오스 1세가 왕위에 오른 뒤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양국간의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기원전 158년 또는 154년, 키프로스 총독 아르키아스가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500달란트를 받고 섬을 셀레우코스 왕조에 넘기려 했지만, 곧 발각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기원전 154년 형이 보낸 암살자의 공격을 가까스로 모면한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원로원에 출석해 암살 시도로 입은 상처를 보이면서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5척의 로마 선박과 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와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테르무스가 이끄는 두 번째 사절을 그와 함께 하게 하였고, 그리스로 가서 용병을 자유롭게 고용할 수 있는 권한도 줬다. 프톨레마이오스 8세는 그리스에 들러 용병을 고용한 뒤 키프로스를 점령하려 했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의 군대에 붙잡혔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로마 사절까지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로마가 분노할 걸 두려워해, 동생을 용서하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딸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동생과 약혼시키고 성년이 되면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로마의 요구에 따라 동생을 키레네로 돌려보낸 뒤 아들 유파토르를 키프로스 통치자로 삼고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유파토르는 불행히도 기원전 152년 가을에 사망했다. 이에 또 다른 딸 클레오파트라 3세를 파라오로 삼기로 하고, 그녀를 신격화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그러던 기원전 150년 셀레우코스 왕위를 노리던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와 손을 잡기로 하고, 프톨레마이스에서 클레오파트라 테아와 알렉산드로스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알렉산드로스 1세는 이집트의 지원에 힘입어 데메트리오스 1세를 붙잡아 처형하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단독 군주가 되었다.
기원전 147년 데메트리오스 1세의 장남 데메트리오스 2세가 크레타 용병대와 함께 시리아로 돌아와 여러 영토를 장악하자,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를 지원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원전 145년 시리아로 진군해 셀레우키아 피에리아를 포함한 해안가의 모든 셀레우코스 도시들을 장악했다. 그런데 그는 돌연 편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 이유가 뭔지는 분명하지 않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6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재상 암모니우스가 자신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는 걸 알고 암모니우스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거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에게 등을 돌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 테아를 알렉산드로스로부터 떼어낸 뒤 데메트리오스 2세와 재혼시켰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안티오키아에 접근했다. 안티오키아 수비대 지휘관 디오도토스 트리폰과 히에락스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도시를 넘겨주었다. 당시 킬리키아에서 반란군과 맞서고 있던 알렉산드로스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안티오키아로 돌아왔지만, 프톨레마이오스 6세와 데메트리오스 2세는 오이노파루스 강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라비아로 도망쳤지만, 곧 암살당했다. 디오도토스와 히에락스는 그를 셀레우코스 왕으로 선출할 의사를 밝혔지만, 그는 로마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합에 반발할 걸 우려해 데메트리오스 2세를 잘 섬기라며 거절했다. 그 대신 코엘레-시리아를 이집트의 영역으로 귀속하게 했다. 이로써 지난날 안티오코스 3세에게 했던 영토 대부분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돌아왔다.
그러나 앞서 오이노파루스 강 전투 때 입은 부상이 악화되면서, 이집트로 귀환하던 중 사망했다. 그는 딸 클레오파트라 3세와 7살된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7세가 공동 파라오로서 자신의 뒤를 잇기를 원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프톨레마이오스 8세를 파라오로 앉히기로 결의했다. 이로 인해 이집트는 혼란에 빠졌고, 데메트리오스 2세는 이 틈을 타 기원전 145년 말 시리아에서 프톨레마이오스군을 몰아내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권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