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제5대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5세 Ptolemy V Epiphanes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프톨레마이오스 5세 Πτολεμαῖος | Ptolemy | |
출생 | 기원전 210년 10월 9일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
사망 | 기원전 180년 9월 (향년 29세) |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204년 ~ 기원전 180년 (약 24년) | ||
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4세 | |
후임자 | 프톨레마이오스 6세 | |
부모 |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4세 어머니: 아르시노에 3세 | |
배우자 | 클레오파트라 1세 | |
자녀 | 프톨레마이오스 6세, 프톨레마이오스 8세, 클레오파트라 2세 | |
종교 | 이집트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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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5대 파라오. 6살의 나이에 파라오로 등극한 뒤 섭정들의 무능한 통치로 국가가 갈수록 쇠락해지자, 성년이 된 뒤 사력을 다해 국력을 회복하고자 노력했으나 독살당했다.2. 생애
기원전 210년 10월 9일 프톨레마이오스 4세와 아르시노에 3세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그해 11월 30일부터 아버지와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기원전 204년 7월 또는 8월,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붕어했다. 안티오키아의 요한에 따르면, 그는 궁전에서 화재가 일어난 지 얼마 안가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공동 파라오 아르시노에 3세 역시 이때 죽었다.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4세는 죽기 직전에 정부 아가토클레아의 권유에 따라 그녀와 이혼한 뒤 곧 죽였다고 한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그녀는 소시비오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죽음은 며칠간 비밀에 붙여졌다가 소시오비스가 신하들을 궁궐에 소집한 뒤 공표되었다. 이때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유언장을 낭독했는데,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스가 섭정하고, 아가토클레아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보살핀다는 내용이었다. 폴리비오스는 이 유언장은 소시비오스와 아가토클레스가 위조했다고 주장했다.소시비오스는 이후 기록에서 사라졌는데, 아마도 노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아가토클레스는 단독 섭정을 맡은 뒤 저명한 귀족들을 해외로 파견하여 자신과 대적하지 못하게 하고, 알렉산드리아 주둔 장병들에게 두 달치봉급을 지급했다. 또한 소시비오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는 마케도니아 왕국에 파견되어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에 맞서 양국의 동맹을 맺고 필리포스 5세의 딸과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결혼을 주선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기원전 203년, 안티오코스 3세는 아미손 시를 포함한 카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영토를 공략했다. 그리고 그해 말에는 필리포스 5세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서로 나눠가지기로 합의했다. 아가토클레스는 셀레우코스군이 이집트에 들이닥칠 걸 대비해 그리스에 사절을 보내 용병들을 고용하게 하였다.
한편,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인기 많던 여성 파라오 아르시노에 3세가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가토클레스 정권에 반감을 품었다. 그러던 기원전 203년 10월, 펠루시움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던 장군 텔레폴레모스가 아가토클레스에게 체포된 뒤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를 수비하는 장병들도 반감을 품었다. 그러던 중 아가토클레스가 궁전 경비대와 군대를 소집하자, 장병들은 이 틈을 타서 그를 모욕했다. 아가토클레스는 가까스로 빠져나온 뒤 왕실 경호원 중 한 사람인 모에라게네스가 텔레폴레모스와 유착 관계라고 의심하여 체포한 뒤 고문을 가했다. 모에라게네스는 가까스로 탈출한 뒤 병사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정권에 반감을 품고 있던 시민들은 이 반란에 호응하여 왕궁을 포위하고, 새 파라오를 데려오라고 요구했다. 다음날 새벽 군대가 진입했고, 아가토클레스는 체포되었다. 그 후 아가토클레스, 아가토클레아,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경기장으로 끌려간 뒤 폭도들에게 살해되었다.
텔레폴레모스는 이 사건 직후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소시비오스의 아들 소시비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후견인이 되었다. 얼마 후, 소시비오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는 동생 소시비오스를 텔레폴레모스에 대항하여 섭정으로 세우려 했지만 발각되었고, 소시비오스는 후견인 직임에서 해임되었다. 하지만 텔레폴레모스는 아가토클레스보다 무능한 인물이었다. 기원전 202년 안티오코스 3세가 코엘레-시리아를 침공하여 다마스쿠스를 공략하였고, 기원전 201년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가자를 점령했다. 한편 필리포스 5세는 사모스 섬을 점령하고 카리아를 침공했으며, 기원전 200년 여름 트라키아와 헬레스폰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영토와 독립 도시들을 정복했다. 그는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단지 로마에 구원을 호소했다. 하지만 로마 역시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느라 지칠대로 지쳐서 이집트를 돕지 못했다.
기원전 20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장군 스코파스가 팔레스타인을 일시적으로 탈환했으나 안티오코스 3세의 반격으로 파니움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그는 시돈에서 포위되어 장기간 농성하다가 기원전 199년 초여름에 항복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여세를 몰아 기원전 198년 코엘레-시리아와 유대를 정복하였고, 기원전 197년 소아시아의 킬리키아, 리키아, 이오니아, 크산토스, 텔메소스, 에페소스를 정복했다. 게다가 프톨레마이오스 4세 말기에 발발한 이집트 토착민들의 반란은 진압되긴 커녕 더욱 거세졌다. 반란군 지도자 호르베네페르(Horwennefer)는 테베에서 파라오를 칭한 뒤 남부 이집트를 석권하고 알렉산드리아를 꾸준히 위협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이 모든 혼란상을 똑똑히 목격했고, 상황을 수습하려면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결심했다. 기원전 196년 3월 26일, 그는 13살의 나이에 키프로스의 총독인 아르고스의 폴리크라테스의 주선하에 옛 수도 멤피스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이제부터 자신이 나라를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포했다. 폴리크라테스는 수석 장관이 되었고, 섭정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이집트 전역에서 모인 사제들은 자신들에게 큰 은혜를 베푼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찬양하는 내용의 멤피스 칙령을 통과시켰다. 이 법령은 여러 비석에 새겨졌는데, 그 중 하나가 그 유명한 로제타 석이다.
기원전 197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필리포스 5세를 격파한 뒤, 로마 공화국은 안티오코스 3세에 관심을 돌렸다. 기원전 196년 말 또는 195년 초,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안티오코스 3세를 찾아가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게 점령지를 모두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안티오코스 3세는 이미 평화 협상을 하는 중이라고 답하고 사절단을 돌려보냈다. 기원전 194년-193년 겨울, 16세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안티오코스 3세의 딸 클레오파트라 1세와 결혼했다. 이때 안티오코스 3세는 자신이 일전에 패배한 장소인 라피아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했는데, 이는 자기가 코엘레-시리아를 정복했음을 전 세계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전쟁을 가까스로 종결시킨 뒤,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남부 이집트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기원전 191년 말 또는 190년 초,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파견한 코마누스 장군이 반란군을 격파하고 테베를 탈환했다. 반란군 지도자 안크마키스(Ankhmakis)는 메로에로 철수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뒤 기원전 186년 8월 27일 테베로 쳐들어갔지만 코마누스에게 완패하고 사로잡혔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끌려간 뒤 기원전 186년 9월 6일 처형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사면령을 발표해 모든 탈주자와 난민이 본국에 돌아오게 하고 기원전 186년 9월 이전에 저지른 모든 범죄(신전을 약탈한 범죄 제외)를 사면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남부 이집트에서 더 이상 반란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새로운 군사 총독인 에피스트라고스(epistrategos)를 창설하고, 코마누스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그리스 출신 장병들이 남부의 여러 마을과 도시에 주둔하여 토착민들의 분란을 저지하게 하였다. 반란군은 이후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대한 저항을 지속했지만 기원전 185년 10월 아르고스의 폴리크라테스에게 완전 진압되었다. 폴리크라테스는 반란 지도자들에게 항복하면 후한 대접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믿고 찾아온 그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벌거벗긴 채 수레에 태워서 사이스로 끌고 간 뒤 가혹한 고문을 가해 죽였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반란과 기근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자 여러 지역에 칙령을 새긴 비석을 세우게 했다. 아스완에 있는 엘레판틴 근처 세헬 섬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나일 강이 7년 동안 불어나지 않았으므로 내 마음은 몹시 괴로웠다. 곡식이 풍족하지 못하고, 씨앗도 말라 버리고 사람이 먹어야 할 모든 것이 한심한 양이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이 수확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무도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울먹였고, 젊은이들은 넘어졌다. 노인들은 가슴이 아팠고, 다리는 구부러져 있었고, 손은 보이지 않았다. 신하들이 거처하는 곳에도 성전은 폐쇄되고 성소는 흙먼지로 뒤덮였다. 요컨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통받았다. (중략) 내가 너희를 위해 나일 강을 일으키게 하겠다. 홍수가 땅의 어떤 지역도 덮지 못하는 날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꽃들은 꽃가루의 무게로 줄기가 휘어지면서 싹을 틔우리라.
기원전 190년 12월 셀레우코스 제국을 상대로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완승을 거둔 로마는 기원전 188년 안티오코스 3세에게 타우루스 산맥 서쪽의 모든 소아시아 영토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사절을 보내 승리를 축하하면서 자기들도 빼앗긴 영토를 되찾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로마는 이를 무시하고 소아시아 서부의 영역을 승리에 기여한 로도스와 페르가몬 왕국에 넘겼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5세는 힘으로 영토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187년 안티오코스 3세가 암살당하고 셀레우코스 4세가 즉위하자, 그는 즉시 군대를 일으키기로 하고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환관이자 친구인 아리스토니코스를 그리스로 파견했다. 또한 아카이아 동맹과의 연합을 부활시키고자 그들에게 금전적 선물을 주고 지원을 받아내려 하였다. 그는 그리스에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기원전 182년 파나티나이아에서 열린 전차 경주에 참가했다. 같은 해 아리스토니코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한 해상 공격을 이끌어 아라도스 섬을 공략했다.
그러나 기원전 180년 9월, 용병대를 규합하여 시리아를 향한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려던 30세의 파라오는 급사했다. 폴리비오스 등 고대 역사가들은 그가 새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을 거둬간 것에 원한을 품은 신하들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했다. 그 후 장남 프톨레마이오스 6세가 아버지처럼 6살의 나이에 파라오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