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중왕국 제12왕조 2대 파라오 세누스레트 1세 𓄊𓋴𓂋𓏏𓊃𓈖 | Senusret I | |||
<colcolor=#A0522D> 칭호 | |||
부왕 | 아메넴헤트 1세 | ||
선대 | 아메넴헤트 1세 | ||
후대 | 아메넴헤트 2세 | ||
묘지 | 세누스레트 1세의 피라미드 | ||
왕비 | 네페루 3세(Neferu III) | ||
자녀 | 아메넴헤트 2세(Amenemhat II)♂ 아메넴헤트-앙크(Amenemhat-ankh) 이타카이트(Itakayt)♀ 세바트(Sebat)♀ 네페루소베크(Neferusobek) 네페루프타(Neferuptah)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971년 ~ 기원전 1926년 혹은 기원전 1920년 ~ 기원전 187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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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중왕국 제12왕조의 제2대 파라오이다.2. 가계
세누스레트 1세는 아메넴헤트 1세와 왕비 네페리타체넨(Neferitatjenen)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후는 네페루 3세(Neferu III)로 추정되는데, 자매혼 관습에 따라 그녀가 동시에 그의 자매였다는 설도 있다. 자녀로는 후계자 아메넴헤트 2세, 공주 이타카이트(Itakayt), 세바트(Sebat) 등이 거론된다. 세바트 공주는 네페루 3세의 딸로 보이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명문[4]이 남아 있다.일부 기록에 따르면, 세누스레트 1세는 아메넴헤트 1세가 피살되었을 때 이미 부왕과 공동 통치를 진행 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왕실 내 권력 구도에 변화가 있었다는 해석도 존재하나, 구체적인 경위나 시점은 자료가 제한적이라 논란이 있다.
3. 통치
3.1. 누비아 원정
재위 약 10년차와 18년차 시기에 남부 누비아로 군사 원정을 단행했다고 전해지며, 이집트의 남쪽 경계를 제 2 급류 부근까지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해당 원정에 관한 언급은 부헨(Buhen) 등지에서 발견된 비문에서 확인되고 있다.당시 원정에는 여러 지방 행정관들이 참가한 것으로 보이며, 예컨대 마-헤즈 놈[5]의 총독 아메넴헤트[6]가 ‘군대 감독관’ 칭호를 지닌 채 파견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3.2. 기근
재위 25년 무렵, 나일강의 범람이 미미하여[7] 기근이 발생했다는 기록도 간헐적으로 언급된다. 이는 당시 경제 및 농업 기반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추정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왕실 차원에서 곡물 분배 정책 등을 시행했을 가능성이 있다.4. 건축 사업
세누스레트 1세는 여러 채석장[8]으로 원정대를 보내 석재를 채집하고, 이집트와 누비아 전역에 걸쳐 다양한 신전과 기념물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4.1. 헬리오폴리스의 라 신전
세누스레트 1세는 태양신 라를 숭배하는 중심지인 헬리오폴리스의 신전을 개축했으며, 기념비적인 붉은색 화강암 재질의 오벨리스크 2기를 세웠다고 전한다. 이 중 하나는 현재 알-마트리야(Al-Matariyyah) 지역에 남아 있으며, 현존하는 이집트 오벨리스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9]
4.2. 백색 예배당
백색 예배당은 카르나크 신전 지구에 지어진 작은 예배당으로, 세누스레트 1세의 즉위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거해진 행사인 ‘헤브 세드(Heb-Sed)’[10] 의식과 관련이 깊다고 여겨진다. 정교한 부조로 유명하며, 한때 훼손된 석재가 흩어져 있었으나 20세기 초 발굴 및 연구 과정을 통해 재조립되었다.
4.3. 기타 신전
콥토스의 민 신전, 엘레판티네의 사테트[11] 신전, 아르만트(Armant)와 엘-토드(El-Tod)의 몬투[12] 신전 등 다수의 건축물을 재정비·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아비도스의 오시리스 신전 일부도 그의 치세에 개축된 흔적이 남아 있다.4.4. 세누스레트 1세의 피라미드
이름 | 𓍹𓄊𓋴𓂋𓏏𓊃𓈖𓍺𓊪𓏏𓂋𓁹𓁹𓇾𓇾𓉴 ptr-tꜣwj-z-n-wsrt |
뜻 | 세누스레트가 두 땅을 내려보신다 |
높이 | 61.25m |
경사 | 불명 |
세누스레트 1세의 피라미드는 부왕인 아메넴헤트 1세의 피라미드에서 남쪽으로 약 1마일 떨어진 곳에 지어졌다. 피라미드의 규모는 아메넴헤트 1세의 피라미드보다 훨씬 거대했으며, 새로운 기술을 통해 피라미드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피라미드로 향하는 길에는 세누스레트 1세의 대형 석회암 조각상이 있었으며, 현재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내부의 일부는 보존되어 있지만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해 침수되어 있으며, 피라미드 자체도 무너져내렸다. 또한 내부에 있었던 유물들도 대부분 도굴되었다.[13]
5. 왕실 인물
세누스레트 1세 치세에 활동한 고위 관리들의 기록은 현재까지 일부 전해지고 있다.5.1. 재상
당시 인테피케르(Intefiqer)라는 사람이 재위 초기부터 재상직을 맡았으며, 오랜 기간 재직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세누스레트’라는 이름의 또 다른 재상이 뒤를 이은 것으로 추정된다.5.2. 재무관
소베크호테프(Sobekhotep)와 멘투호테프(Mentuhotep)가 차례로 재무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멘투호테프는 세누스레트 1세 피라미드 인근에 규모가 큰 무덤을 조성했으며, 카르나크의 건축 사업에도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5.3. 상급 시종장
호르(Hor), 나크르(Nakhr), 안테프(Antef) 등 여러 인물이 상급 시종장으로 언급된다. 이들은 와디 엘-후디(Wadi el-Hudi)의 자수정 채굴 원정에 참여하거나, 리슈트(Lisht) 인근 무덤에 매장되는 등 왕실 중심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6. 왕위 계승
세누스레트 1세는 부왕 아메넴헤트 1세의 재위 20년차부터 공동 통치를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세누스레트 1세도 말년에 이르러서는 아들 아메넴헤트 2세를 공동 통치자로 책봉하였는데, 한 비문에 따르면 세누스레트 1세의 재위 43년차 무렵 아메넴헤트 2세가 재위 2년차를 맞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세누스레트 1세는 대체로 재위 45~46년 무렵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7. 여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소설 또는 기행문으로 알려진《시누헤 이야기》가 세누스레트 1세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메넴헤트 1세가 암살되고, 세누스레트 1세가 즉위하자 귀족이었던 시누헤는 오해로 인해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을 거쳐 레바논까지 망명을 가지만 이 세상에 신들이 계시는 땅 이집트만 한 곳은 없다.라는 진리를 깨닫고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세누스레트 1세의 사면을 받고 귀국한다는 내용으로, 신왕국 시대 이집트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동화로 각색되어 출간#되었으며, 2024년에는 이집트 상형문자 전문가인 서울대의 유성환 박사가 직접 이집트 상형문자 원전을 번역하여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출처] 세누스레트 1세의 오벨리스크[출처] 세누스레트 1세의 오벨리스크[출처] 세누스레트 1세의 오벨리스크[4] 쇠붙이와 돌, 살림살이에 쓰는 그릇 따위에 새겨 놓은 글[5] 상이집트의 16번째 놈[6] 이름이 아메넴헤트 1세나 아메넴헤트 2세와 동일하지만 다른 인물이다.[7] 이집트의 농사는 나일강의 범람을 기반으로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8] 시나이 반도, 와디 하마마트 등[9] 위 사진이 해당 오벨리스크이다.[10] 세드 축제라고도 한다.[11] 나일강 범람을 상징하는 여신[12] 전쟁과 매의 신[13] 후대에 발굴한 결과, 피라미드가 만들어지자마자 바로 도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