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초대 파라오 아흐모세 1세 Ahmose I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아흐모세(Ahmose)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1525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550년 ~ 기원전 1525년 (약 25년) | ||
전임자 | 카모세 | |
후임자 | 아멘호테프 1세 | |
부모 | 아버지 : 세케넨레 타오 어머니 : 아호텝 1세 | |
배우자 | 아흐모세 네페르타리 아흐모세 시카모세 아흐모세 헤누타메후 | |
자녀 | 아멘호테프 1세 | |
무덤 | 아비도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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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의 초대 파라오.북부에서 쳐들어온 이민족인 힉소스인들을 마침내 격퇴하고, 제2중간기를 종결시킨 뒤 고대 이집트의 최전성기인 신왕국을 열어젖힌 명군이었다.
아흐모세 1세는 상이집트의 테베를 중심으로 한 제17왕조의 왕자로 태어났다. 당시 이집트는 외부에서 쳐들어온 이민족인 힉소스인들이 나일 강 삼각주의 하이집트를 지배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밀려난 이집트 원주민들이 세운 상이집트의 제17왕조가 이집트를 양분하고 있었다. 아흐모세 1세는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후 치열한 공방전 끝에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이집트를 재통일하면서 신왕국을 개창했다. 또한 광산을 개발하고 무역로도 뚫었으며, 중왕국 시절 이래 한번도 이루어지지 못했던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도 재가동했다.[2] 이처럼 많은 업적을 남겼기에 신왕국의 기반을 닦아놓은 파라오로 평가받는다.
2. 통치
2.1. 정복 전쟁
아흐모세 1세 이전의 이집트는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었다. 번영을 누리던 이집트 중왕국은 왕권이 약화된데다가 결정적으로 이민족인 힉소스인들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이후 힉소스인들은 나일 강 유역의 하이집트를 차지한 채 이집트인들을 지배했고,[3] 한편 하이집트에서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었던 상이집트에서는 테베를 중심으로 이집트인들이 세운 제17왕조가 들어섰다. 제17왕조는 초기에 힉소스인들에 비하여 국력이 미약하여 간섭을 받았고, 북쪽으로는 힉소스인들이, 남쪽에서는 쿠시 왕국의 누비아인들이 끊임없이 설치면서 고달픈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제17왕조는 꾸준히 힘을 길러 나중에는 힉소스인들과도 비견될 만한 힘을 갖게 되었고, 결국 제17왕조의 파라오 세케넨레 타오가 전쟁을 선포하면서[4] 힉소스인들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세케넨레 타오는 나름 분전했으나 30년에 가까운 전쟁을 치르던 중 힉소스인들에 맞서 직접 칼을 들고 싸우다가 결국 전사했다.[5] 세케넨레 타오가 전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이자 아흐모세 1세의 형인 카모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카모세 역시 오래지 않아 사망하여 결국 10세에 불과했던 어린 아흐모세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아흐모세 1세는 친정을 펼치기에는 지나치게 어렸기에 그가 성년에 이르기 전까지는 모후인 아호텝이 대신 섭정을 맡아 상이집트를 다스렸다. 아호텝은 나름대로 상이집트를 잘 관리했다. 테베의 귀족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막았고, 아흐모세 1세가 직접 상이집트를 다스릴 기반을 깔아주면서 아흐모세 1세에게 군사 경험을 쌓아주었다. 이후 아흐모세 1세가 성년의 나이가 되자 아호텝은 바로 아흐모세 1세에게 전권을 넘겨주었고, 이로써 아흐모세 1세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아흐모세 1세가 언제부터 힉소스인들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학자들은 기록을 근거로 대략 재위한지 11년 되는 해부터 전면전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흐모세 1세는 10여 년 동안 길러온 군대를 이끌고 빠른 속도로 북진했다. 그는 헬리오폴리스를 떨어뜨린 뒤 군대를 몰아쳐 힉소스인들의 고향인 가나안 지역과 힉소스인들의 수도인 아바리스 사이를 차단해버렸다. 가나안 유역을 점령해 힉소스인들이 도움을 받을 길을 막아버린 아흐모세 1세는 본격적으로 아바리스 공략에 들어갔다. 그는 무려 3차례나 아바리스에 공성전을 펼쳤지만 중간에 남쪽 상이집트에서 소규모 반란이 일어나는 등 여러 사건들이 터지면서 지체되어 실패했고, 결국 4번째 시도에서야 아바리스 함락에 성공했다. 힉소스인들의 중심지였던 아바리스를 무너뜨린 후에는 그들의 마지막 요새인 샤루헨을 공격했고, 이마저도 끝내 함락시키면서 힉소스인들의 이집트 내 영향력을 완전히 일소시켰다. 이로써 상•하이집트를 재통일한 아흐모세 1세는 '두 땅의 지배자'를 자칭했고, 이로 인해 130여 년 정도 지속되었던 제2중간기가 끝나고 이집트 신왕국이 열리게 되었다.
힉소스인들을 물리치고 이집트를 재통일한 아흐모세 1세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외적들과 싸웠다. 그는 통일 직후 누비아와 시리아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고, 재위 22년 차에는 레반트에 당도해 거의 유프라테스 강 일대까지 진출하는 업적을 남기기까지 했다.[6] 아흐모세 1세는 비블로스까지 진출해 시리아의 아시아 민족들을 쳐부수는 데 성공했으나, 이 시리아 원정에 대한 기록들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아흐모세 1세가 굳이 가나안과 시리아 일대에 연이어 원정을 나갔던 이유는 아시아 쪽에 남아있었던 힉소스의 잔재를 완전히 깨뜨리기 위해서였다. 힉소스인들 자체가 가나안 출신의 아시아계 민족이었고, 이들의 후손이 시리아 쪽에 남아있는 이상 이집트가 완전한 평화를 찾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덕분에 힉소스인들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힉소스인들까지 확실히 정리한 아흐모세 1세는 누비아에도 군사를 파견하여, 제2중간기 동안 독립국가로 행세하던 누비아를 다시 이집트의 영향권 내에 편입시켰다.
2.2. 문화 발전
아흐모세 1세의 피라미드 |
아흐모세 1세는 아비도스에 자신의 무덤으로 피라미드를 지었다. 1899년에 처음 발견되었으며, 3년 후인 1902년부터 발굴 조사에 들어갔다. 그의 피라미드 외벽을 장식하던 석회암들은 이미 오래 전에 다른 건축물들을 짓기 위해서 다 털려나갔고, 때문에 피라미드 자체가 점차 허물어지면서 지금은 조금 높은 둔덕 정도처럼만 보일 뿐이다. 다만 고고학자들이 남아있는 외벽 석회암의 경사로 추측해본 결과, 대략 60도 정도의 상당한 고각이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8] 주변에는 그의 장제전이 1개, 왕비의 장제전이 2개 세워져 있었다. 아흐모세 1세의 피라미드 잔해에서는 그 어떠한 내부 방이나 안치실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일부 학자들은 피라미드 중간 쯤에 위치하던 매장실이 이미 다 허물어져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주장을 했고, 다른 학자들은 아흐모세 1세 무덤의 도굴 관련 기록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처음부터 그가 이 피라미드에 매장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아흐모세 1세의 사후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자신의 무덤을 피라미드 형식으로 짓지 않았고, 대신 모두 왕가의 계곡 등에 깊게 석굴을 파 자신의 미라를 묻었다.
아흐모세 1세의 미라는 1881년 데이르 엘 바하리에서 제18왕조 및 제19왕조의 다른 파라오들의 미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아멘호테프 1세, 투트모세 1세, 투트모세 2세, 투트모세 3세, 람세스 1세, 세티 1세, 람세스 2세, 람세스 9세가 그와 함께 묻혀있었고, 그 외에도 제21왕조의 시아문이나 피네젬 1세, 피네젬 2세와 같은 아문 대신관들의 미라도 함께 있었다. 아흐모세 1세의 미라는 제18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투박한 관 속에 들어있었으며, 목재 관 위에 그의 이름이 히에로글리프로 새겨져 있어 아흐모세 1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9] 1886년 6월 9일에 가스통 마스페로가 아흐모세 1세 미라의 붕대를 풀었다. 그의 미라는 코가 내려앉은 상태였고, 목은 아예 몸과 분리된 상태였다. 도굴꾼들이 미라 붕대 속에 있는 보물들까지 빼가기 위해 마구잡이로 미라의 붕대를 풀면서 생겨난 상처로 추정된다. 아흐모세 1세의 키는 대략 164cm였고, 꽤 작은 얼굴과 돌출 앞니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는 룩소르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1] 다만 미라 자체는 데이르 엘 바하리에서 발견되었다. 후대의 신관들이 도굴된 무덤에서 미라를 꺼내 재안장한 것으로 추정된다.[2] 아흐모세 1세는 이집트 역사상 피라미드를 무덤으로 만든 마지막 파라오였다. 후대의 파라오들은 모두 왕가의 계곡에 묻혔다.[3] 힉소스의 왕들이 스스로 파라오를 자칭했기에 학계에서는 이들도 이집트의 역사에 포함시켜 제15왕조로 부른다.[4] 전쟁의 원인 자체는 힉소스인들이 제공했다. 힉소스의 왕 아페피는 세케넨레 타오에게 테베의 신성한 호수에 살고 있었던 하마들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하마들을 죽일 것을 명령했다. 당연히 그 먼 하이집트까지 하마의 울음소리 따위가 들릴 리가 없었으니 단순히 제17왕조에 대한 우위를 확인하려는 엄포였다. 안그래도 쌓인게 많았던 세케넨레 타오는 이를 계기로 대힉소스 전쟁을 선포했다.[5] 참고로 세케넨레 타오는 파라오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참혹하게 죽은 인물이었다. 대략 3명 정도의 힉소스인 장정들이 전장에서 그를 도끼 등의 둔기로 난도질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미라는 두개골이 갈라져 있고, 턱뼈가 조각나 치아가 그대로 드러날 정도로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워낙 끔찍한 비주얼이기에 영화 <미이라 시리즈>에 등장하는 악당 이모텝의 외형적인 모델이기도 하다.[6] 다만 후대의 투트모세 1세가 유프라테스 강에 도달한 첫 번째 파라오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7] 다만 아흐모세 1세가 원정을 끝마치고 본격적인 복구 작업에 들어갔을 당시 그는 이미 고령의 나이였다. 아흐모세 1세의 복구 작업은 7년 정도 밖에 못갔고, 그의 후계자인 아멘호테프 1세때부터 본격적으로 건물들이 지어졌다.[8] 참고로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경사는 51도 정도다.[9] 아흐모세 1세의 관은 왕실 전용 관도 아니었고, 파라오의 격식에 맞는 화려한 관도 아니었다. 그의 무덤이 도굴된 이후 사제들이 다시 부랴부랴 재안장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