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20왕조 제3대 파라오 람세스 4세 Ramesses IV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람세스 4세(Ramesses IV) | |
출생 | 기원전 1176년 | |
사망 | 기원전 1149년 (향년 27세)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155년 ~ 기원전 1149년 (약 6년) | ||
전임자 | 람세스 3세 | |
후임자 | 람세스 5세 | |
부모 | 아버지 : 람세스 3세 어머니 : 티이 | |
배우자 | 두아텐토페트 | |
자녀 | 람세스 5세 | |
무덤 | 왕가의 계곡 KV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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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20왕조의 3대 파라오. 고대 이집트의 본격적인 몰락이 시작된 시대를 다스렸던 비운의 군주였다. 바다 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라 불렸던 아버지 람세스 3세가 죽은 이후 이집트는 바다 민족과의 전쟁에서 지출된 전비과 자연재해로 인하여 붕괴된 경제로 인해 빠른 속도로 쇠퇴했고, 람세스 4세는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그나마 람세스 4세까지는 대규모 건축물들을 건설할 만한[1] 국력이 남아있었지만, 람세스 4세가 죽고 난 후부터는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전락하게 된다.2. 생애
2.1. 즉위 이전
람세스 4세는 부왕 람세스 3세의 삼남으로, 어머니는 티티(Tyti) 왕후로 추정된다. 기원전 1164년에 형이 죽은 이후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람세스 4세는 아버지와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며 행정 경험을 쌓아나갔다. 기원전 1155년 경에 람세스 3세가 암살 미수를 당하는 초대형 사건이 터진다. 자신의 아들을 후임 파라오로 만들기 위해 티예 왕비가 제 아들 펜타웨레트와 음모를 꾸미고 람세스 3세를 하렘에서 덮쳐 둔기로 살해를 시도한 것.
테베의 하렘 궁전 서쪽 탑에서 쉬고 있었던 람세스 3세는 암살자들의 기습을 받게 된다. 파라오는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식도가 드러날 정도로 목이 깊게 베이는 등 심각한 치명상을 입고 얼마 안가서 목숨을 잃었다.[2] 그러나 한 왕족이 발빠르게 대처해 왕궁을 확보했고, 왕세자 신분이었던 람세스 4세가 바로 도시로 진입해 펜타웨레트를 포함한 음모꾼들을 사로잡으면서 쿠데타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람세스 4세는 유일한 파라오로 즉위한 후 12명의 조사관을 골라 음모꾼들을 재판에 부쳤고, 총 5번에 걸친 재판 끝에 28명의 가담자들이 처형당했다.[3]
2.2. 재위
그가 람세스 3세의 뒤를 이어 파라오로 즉위했을 무렵 람세스 4세는 고작 21세에 불과했다. 아직 젊었기에 혈기가 넘쳤던 람세스 4세는 즉위하자마자 옛 람세스 2세 대왕 시절에 버금갈만한 규모의 건축 프로젝트들을 연달아 발주했다. 왕가의 계곡에 일하는 인부들의 규모를 2배로 늘렸고, 수 백명에 달하는 원정대를 파견해 시나이 반도의 터키석 광산을 찾게 하는 등 여러 정책들을 펼쳤다. 재위 3년 되는 해에는 총 8,368명[4]의 초대형 탐험대를 꾸려 채석장 부지를 선정하거나 건축물을 지을 만한 장소를 물색하도록 시키기까지 했다.[5] 람세스 4세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들 중에 카르나크 신전의 콘수 사원과 장제전 확장 공사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시나이 반도의 와디 하마마트와 세라비트 엘-카딤에 하토르 신전을 짓고 오벨리스크들을 연달아 세우기도 했다.그러나 람세스 4세의 시기에 테베의 아문 대신관 권력이 커지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람세스낙트다. 그의 아버지는 파라오의 집사장을 맡았던 메리바스테트로 람세스낙트는 테베의 아문 대신관에 임명된 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부와 재정감사권을 바탕으로 빠르게 권력과 권위를 높였다. 람세스낙트는 람세스 9세 재위 초까지 아문 대신관직을 지냈으며 여러 유력 귀족가문들과 혼인관계를 맺어 권력을 더욱 공고히 만들었고, 왕가의 계곡에서 무덤을 조성하는 인부들에게 월급이 밀리자 국가를 대신하여 아문 신전의 이름으로 봉급을 지불하기까지 했다. 여기에 징세권까지 손에 넣었고 중부와 상이집트에서 자치를 누렸다.
3. 사후
아비도스에 남은 금석문을 보면 람세스 4세는 정말 오래 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 차례 죽음의 신 오시리스에게 '제 아버지만큼만[6] 살게 해주세요'라고 간청하는 내용을 담은 비문들이 여러 차례 발견된 적 있고, 신전이나 각종 사원들에 막대한 기부금을 내는 등 자신의 무병장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람세스 4세는 고작 6년 반만에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람세스 5세가 즉위했다.4. 가족 관계
5. 미라
람세스 4세는 왕가의 계곡 KV2 무덤에 묻혔으나, 그의 무덤이 얼마가지 않아 도굴당하면서 신관들은 왕의 미라를 다른 곳으로 재이장했다. 람세스 4세의 미라는 1898년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인 KV35에서 발견되었다. 2021년 4월에 람세스 4세의 미라를 17구의 다른 파라오 미라들과 함께 이집트 문명 박물관으로 옮겨 안치했다.[1] 물론 이마저도 거의 대부분이 람세스 3세 시절에 시작된 건축 프로젝트들을 마저 완공한 것에 불과하다.[2] 공격을 받고 즉시 죽었다는 말도 있다.[3] 핵심 요인이었던 펜타웨레트는 왕족이었기에 자살을 허락받았다. 티예 왕비의 처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몰래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4] 병사 5,000명, 아문 신전의 사제와 석공들 2,000명, 800명의 기타 인력, 130명의 전문 석공과 예술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5] 참고로 이 탐험대에서 약 900명의 사람들이 도중 사망했다. 사망률은 대략 10.7%에 달했다.[6] 부왕 람세스 3세는 30년 넘게 왕위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