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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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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3. 종류
3.1. 인공 미라3.2. 건조 미라3.3. 냉동 미라3.4. 공기차단 미라
4. 실제 사례5. 유명 미라
5.1. 문서가 있는 유명 미라5.2. 얼음 소녀(라 돈셀라/La Doncella)5.3. 함보 라마5.4. 푸허우5.5. 시베리아 우코크 얼음 미라5.6. 톨룬드 맨(Tollund Man)
6. 기타7. 매체에서의 미라
7.1. 문서가 있는 미라 캐릭터7.2. 디아블로 시리즈언데드 몬스터7.3. 겁스7.4. 미라를 소재로 한 드라마
8. 관련 문서

1. 개요

사후처리를 통해 부패하지 않도록 보존된 시신을 지칭한다. 체내의 수분이 어느 정도 빠져나가면, 시신은 더 이상 부패가 진행되지 않는다. 인간의 시신뿐 아니라 이집트고양이 미라처럼 다른 동물의 시체도 포함되지만, 식물은 죽은 후 부패하지 않고 건조되어도 미라라고 칭하지 않는다. 엄밀히 따지면 건어물(...) 역시 미라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1] 화석과는 전혀 다르니 유의할 것.

아무래도 시신이다 보니 많은 일반인들이 미라에 관해 접하는 것을 꺼리지만, 미라를 통해 고대인들의 생활을 직접 분석하고 그 시절의 영양 상태나 문화, 의복, 역사적 등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오래된, 그리고 잘 보존된 미라일수록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한국에서는 미라에 관해 다큐멘터리 원더풀 사이언스(해당 회차 링크)에서 심도있게 다루었었다. '미라' 하면 붕대를 감은 이집트 미라의 막연한 이미지밖에 없던 한국에서 큰 희소식.

2. 이름

<colbgcolor=#f5f5f5,#2d2f34> 언어별 명칭
한국어 미라
그리스어 μούμια
독일어 Mumie
러시아어 мумия
스페인어 momia
아랍어 مومياء(mūmiya')
영어 mummy[2]
에스페란토 mumio
일본어 ミイラ, [ruby(木乃伊, ruby=ミイラ)]
중국어 木乃伊(mùnǎiyī)(표준 중국어)
튀르키예어 mumya
포르투갈어 múmia
프랑스어 momie

각 언어별 표기가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엔 포르투갈어로 '아주 마르고 기운 없는 사람', '수척하고 핏기 없는 사람'이라는 뜻의 mirra(미하)[3]일본어 ミイラ를 거쳐 들어온 '미라', '미이라'로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어 مومیایی(mōmiyāyī, 모미야이)의 발음을 한자로 음차한 표기인 '목내이(木乃伊)'[4]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한편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대다수의 언어에서는 라틴어 mumia에서 유래한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mumia는 '밀랍'을 뜻하는 페르시아어 mūm에서 유래한 아랍어 مومياء(mūmiya')를 어원으로 한다.

3. 종류

3.1. 인공 미라

의도적으로 미라로 만들기 위해 인위적 시신 건조 또는 냉동, 방부제 등을 이용해 부패가 일어나지 않도록 처리된 미라. 일반인들이 미라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고대 이집트미라가 대표적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자의 시신이 남아있으면 내세(사후세계)에서 부활[5]할 기회가 주어진다[6]고 믿었기 때문에 시신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시신의 심장을 제외한[7] 내장을 제거한 후 미라를 만들었다고 한다.[8] 이런 인공 미라 제작은 고대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행해졌지만 이집트보다 기술력이 떨어졌기에 이쪽은 발견되는 대부분의 미라가 백골을 겨우 면하는 수준이다.

고고학적인 가치는 매우 높으나 인공 미라는 제작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내장을 대부분 제거하기 때문에 자연 미라들과 달리 연구하여 얻을 수 있는 생물학적인 정보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남아있는 조직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연구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하트셉수트의 것으로 추정되는 미라의 마모된 치아 조직을 통해 고대 이집트인의 식생활을 유추해낸 사례가 있다. 그리고 인공 미라를 만들 기술력을 가진 문명이면 대신에 다른 방식으로 기록이 남겨진 경우가 많다.

3.2. 건조 미라

극도로 건조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자연 미라. 사막 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3.3. 냉동 미라

미생물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저온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자연 미라. 극지방 혹은 고산지대에서 발견된다. 아래의 아이스맨 외치도 냉동 미라의 일종. 보통 미라라고는 하지 않지만 에베레스트 등반 중 사망하여 썩지 않고 등산로에 방치된 시신들도 이와 유사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4. 공기차단 미라

완전히 밀봉되어 공기가 차단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자연 미라. 늪지대에서 주로 발견된다.

의외로 한국에서도 발견되며, 한국에서 발견되는 미라는 모두 공기차단 미라이다. '회묘(灰墓)'(회격묘) 제작 방식으로 묻힌 사람들 수가 많기 때문. 조선 시대에는 무덤 안으로 물이 스며드는 것과 해충이 시신을 손상시키는 것을 막고자 관의 사방에 두껍게 석회를 칠하는 회묘(灰墓)가 크게 성행했고, 거기에 을 넣기도 했는데 석회는 강력한 방수작용을, 숯은 자동 방습작용을 하면서 전혀 뜻하지 않게 미라가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본 문서의 '실제사례/한국' 문단에서 후술한다. 유교적 가치 등으로 고인에 대한 존중을 중시하는 대한민국에서는 이렇게 생성된 미라를 발견하더라도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여, 시신을 다시 묻거나 화장(火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 실제로 발견된 미라 수와 연구된 미라 수는 많이 차이가 난다고 한다.[9] 굳이 유교적 인식이 아니더라도, 고인의 신체를 다루는 것이므로 관련 연구자들은 미라 연구에 앞서 미라에 예를 표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해부실습 같은 의료 교육 등에 관해 시신 기증자의 시신에 동서를 불문하고 예(禮)를 표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 미라의 경우 생전 당사자의 의사를 전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므로 더욱 그렇다.

4. 실제 사례

4.1.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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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한국


한국에도 미라가 존재한다. 한국의 미라는 주로 자연적으로 건조된 미라인 것이 특성이다. 조선시대 성행한 회곽묘는 그 환경으로 인해 우연한 미라 생성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인위적으로 생성된 미라와 달리 신체적 특징은 물론 착용하고 있던 의복과 장신구, 심지어 체내의 기생충, 배설물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비록 겉은 완전 건조된 미라여도 체내 수분이 남아 있어, 인위적으로 생성된 미라와 달리 CT, MRI 등 영상촬영도 가능하다고 한다. 원래 회곽묘는 미라를 만들려고 조성한 게 결코 아니다. 유교에서는 시체가 자연스럽게 썩어야 한다고 여겼고 단지 썩기 전까지만 나무 뿌리나 벌레, 짐승들로부터 시체를 보호하기 위해 석회로 곽을 감싼 것이다. 그런데 석회는 물과 반응해서 열을 방출하는 특성이 있어서, 주변 수분을 흡수한 회곽묘의 석회에서 섭씨 200도 가량의 열을 방출해 곽과 관 내부를 살균하고 건조시켜 자연 미라를 만드는 일이 었었다. 즉 의도와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1965년에는 의병장 김덕령의 무덤을 선산으로 이장할 때 시신이 미라 상태인 채로 발견되었는데, 문중 사람들은 이를 보고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려 있다고 생각해 사진 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이때가 사진기가 흔하지 않던 시절인지라... 겨우 사진기를 구해 가져왔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고 그동안 공기 중 세균과 접촉하여 부패가 진행되어버렸기에 별 수 없이 화장 처리해서 묻어버렸다고 한다. 다만 의복 등은 보존 처리가 되어서 충장사에 전시되어 있다.

1998년 경북 안동에서 이름 모를 무덤을 이장하다가 400여년전 미라 2구를 발견했다.[10] 이 사람은 이응태(1556~1586)라는 사람과 조모인 일선 문씨로 이응태의 무덤 안에는 아내가 쓴 편지가 입관한 이응태의 위에 덮여있었으며 젊은 나이에 요절한 남편에게 한글로 편지를 쓰며 아쉬워하고 슬퍼했다.[11][12] 더불어, 스스로 짚신까지 만들었는데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짚신 곳곳에 묶어 만들며 남편 병이 낫기를 기원했다. 이 편지는 2007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에서 게재된 바 있다. 자세한 내용과 국어사적 내용은 이응태 묘 출토 편지 문서 참고.

2001년에는 해평 윤씨 무덤을 이장하던 중 약 400년 전 조선시대 소년 윤호(尹鎬, 1690?~1695.5?)의[13] 미라를 발견했다. 땋은 머리카락과 손톱발톱까지 시신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약 6살 정도의 소년으로, 옷이 함께 발견되어 문헌으로만 남아있던 아동 복식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연구진들의 분석 결과 사망 원인은 천연두로 인한 합병증이라고 한다. 정확한 인명은 알려지지 않았으며,[14]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보통 '단웅이 미라'로 불린다고 한다.영상

2002년에는 파평 윤씨 여성의 미라가 발견된 적이 있다. 친정에서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임신한 채로 발견된 미라라고 한다. 사망 원인은 정확히 자궁파열로 인한 것이었다. 당시 조부가 거물이라[15] 제대로 관을 쓴 결과 의도치 않게 미라가 되었다. 이 여성의 미라는 피부에 수분이 남아있었고, 살아있는 사람의 CT나 MRI 사진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대단히 좋았으며, 그런 탓에 보통 난산으로 인한 사망 후 뱃속에 차는 부패가스로 인해 복중의 태아를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움[16]에도 불구하고, 출생 직전의 태아도 아무런 손상없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2007년에는 강원도 강릉시에서 임진왜란 시기 왜군과 싸웠던 최씨 장군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생전 폐가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폐에 좋다고 약으로 쓰이는 포황(蒲黃, 부들의 꽃가루)이 장기에서 많이 검출되었다. 사망 당시 60대였다.

2012년에는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에서 260여년 전[17] 사망한 팔회당 이시항 선생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영조 때 벼슬을 지낸 이시항 선생은 발견 당시 계급에 맞는 관복을 그대로 입고 있어 귀중한 연구 자료가 되었다. 수염을 비롯한 머리카락도 온전히 남아 있었다. 안동은 오래 전부터 세가 좋은 가문이 많아 이렇게 보존이 잘 된 미라가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시항 선생의 미라 사진이 담긴 관련 기사.

2014년 11월 3일에는 대전광역시 서구 갈마동에 위치한 도솔산[18]에서 단양 우씨의 묘를 이장하던 중 조선 시대 중종 때 궁중 음식을 담당하던 사옹원에서 봉사직 등을 지낸 우백기의 미라와 습의 등이 발견되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막 발굴된 참이라 박물관에서 바로 보존처리를 하고 향후 연구자료가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10월 17일. 전라남도 곡성군에서 379년 이상[19]광주 이씨 문경공지파 덕열의 부인인 청풍 김씨의 미라가 발견됐다. 사망 당시 70대였다. 청풍 김씨 미라 사진이 담긴 관련 기사.

2017년의 뉴스 기사에 따르면, 그냥 연구실 냉동고에 방치되는 미라가 있어 문제가 된다고 한다.관련 뉴스.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발견된 조선 전기 여인의 미라를 통해 사서의 기록을 검증한 사례가 있다. 미라의 장 속 소화물을 분석한 결과 굴을 통해 감염되는 참굴큰입흡충의 알이 발견되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하동 일대에서 신선한 이 많이 생산되어 중앙으로 상납했다고한다. 참굴큰입흡충이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에 기생했는지도 확인한 셈이다.

과거에는 미라가 발견되어도 제대로 연구할 수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 발견 자체가 후손들이 산소를 이장하느라 파묘했을 때 이루어지는게 대부분이고, 연구자들에게 알릴 경우 부검으로 시신의 뼈와 살을 분해할 것이기 때문에 조상에 대한 모욕이자 불효라고 여겨 미라가 나와도 알리지도 않고 그냥 다른 곳에 재매장해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으면 운이 좋은 편. 다만 2000년대 이후에는 CT나 MRI 등 시신을 분해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기술이 나와서 오히려 귀중한 미라를 훼손하는게 아까운 지경이 되어 많이 줄었고, 사람들 인식도 달라져서 시신을 기증하는 후손도 종종 있다.

한편 이러한 특성 때문에 조선왕릉 가운데 세조 이후의 들과 왕비들의 시신이 미라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일반 사대부의 묘에서도 잘 보존된 미라가 발견되는데, 더 엄격한 격식을 갖추어 능을 만들고 관리했다면 그 가능성은 높다. 어진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왕릉에 잠들어있는 왕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볼 수도 있다.[20] 하지만 조선왕릉의 발굴 조사는 왕릉 제례를 맡은 전주 이씨 종약원에서 강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도 영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21]

현대에 와선 역사적인 유물과 사례들 말고도 때론 방치되어 고독사한 사람이 미라화가 되어 발견되어 충격과 공포의 이슈가 되기도 한다. 2013년에는 부산광역시의 한 주택가에서 당시로부터 5년 전 고독사한 어느 할머니의 시신이 미라화된 채 발견되어 큰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다. 시신은 겨울옷을 겹겹이 싸입은 채 발견되어 세간에 여러 충격을 주었다. 이웃들의 왕래가 없었던 탓에 누구도 할머니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급격한 발전을 이룬 탓에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조선시대에 여진족 미라가 발견된 적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

4.3.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평왕은 사후 자신의 시체를 당시 불로장생약으로 여겨진 수은에 담가서 매장하라고 유언하였는데, 수은의 유독성이 미생물의 부패작용까지 억제하여, 이런 부드러운(…) 미라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초평왕에게 원수를 진 오자서가 오나라 대군을 데리고 초를 초토화시키는 와중에 이 무덤을 파내 볼링공 잡듯이 눈알을 파내고 구리 채찍으로 시체를 수백대를 쳐서 가루로 박살내 버렸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미라는 종종 발견되는데, 한국과 마찬가지로 회격묘에서 발굴되는 빈도가 높고, 미라 생성의 원리도 비슷하다. 이외에도 타클라마칸 사막 등 중국 서부 쪽에는 사막 기후때문에 미라가 되어 발견되는 시신도 종종 보이기도 한다.

현재의 후난성에서 발견됐으며, 마왕퇴한묘(马王堆汉墓,마왕퇴)에서 발굴된 여성의 미라(신추 부인)가 굉장히 유명하다.

마왕퇴한묘 미라의 생전 모습 복원 인형미라의 모습(열람 주의).

마왕퇴한묘의 미라는 워낙 시신이 잘 보존되어 의학자들이 해부한 뒤 보고서도 작성되었다. 습기찬 토양에서 관 속으로 물이 스며들었는데, 이 수분이 당시 풍습대로 매장직전 관에 부어진 에탄올과 반응하면서 관 자체가 방부액체로 채워진 결과가 되었다. 상상 이상으로 잘 보존되었다고 한다.[22]

분석 결과 마왕퇴한묘의 미라는 한(漢)나라시대[23] 인물의 미라로, 미라의 신원은 전한(前漢)의 공신인 대후 이창의 부인인 '신추(辛追, 한어병음:Xin Zhui)이고, 50세에 사망했고 사인이 심근경색이며, 동맥경화[24], 담결석, 당뇨, 심장병, 고혈압, 허리디스크, 비만을 앓았고 죽기 직전 참외를 먹었다는 것이 밝혀졌다.[25] 물론 이 무덤 역시 대량의 석회와 흙으로 밀봉되다시피 했기 때문에 부패가 억제된 것도 있다. 발굴 당시 여러 서적, 의복뿐만 아니라 부장품이었던 과일류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 때문.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여성의 아들이 먼저 급사하였고 아들의 죽음을 본 이 여성이 자신이 죽을 때를 대비하여 미리 무덤을 건설하였기 때문에 이런 밀봉이 가능했다고 한다. 다만 남편 이창과 아들의 유해는 모두 썩어 남아 있지 않았는데 이창의 무덤은 도굴되어 밀봉이 사라졌고 아들의 무덤은 모친의 무덤에 비해 밀봉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편이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웨난이 쓴 《마왕퇴의 귀부인》 또는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를 참조할 것.

아래는 신추 부인의 아들이 누구인가에 관한 분석이다.
[ 신추 부인의 아들은 전한의 제후 이희인가? 펼치기 • 접기 (터치 • 클릭)]
1. 신추 부인의 아들은 이희가 아니다.
신추 부인의 급사한 아들이 전한(前漢)의 제후 이희(利豨)는 아닌 게, 이희(利豨)는 기원전 165년에 죽었는데 묘의 연대가 기원전 168년이다. 이는 이승률의 '죽간 · 목간 · 백서, 중국 고대 간백자료의 세계에서 인용했다. 책 <마왕퇴의 귀부인>이나 <황제의 무덤을 훔치다>에 실제로 신추 부인의 아들이 이희라고 서술되어 있는지, 혹은 왜 신추 부인의 아들이 이희라고 추정했는지 근거가 필요하다.

2.신추 부인의 아들은 이희가 맞다.
<마왕퇴의 귀부인>에서는 부거유의 설을 근거로 하여 이희의 무덤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는 부거유가 발표한 이래 폭넓게 지지를 받고 있는 설이다. 무덤주인의 사망년도와 사서에 기록된 사망연도의 차이에 대해서 당시에도 의문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한 부거유의 답변과 추론을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3호묘 주인에 대해 나를 비롯해 모두가 '이희가 아니라 당연히 이희의 형제'라고 생각했다. (중략) 7~8년에 걸친 혼신의 연구 끝에 우리가 3호묘의 주인에 대해 내린 원래의 결론이 잘못된 것임을 발견했다. (중략) 논문은 주로 3호묘의 관제, 명정, 견책에 기록된 미인과 재인, 견책에 기록된 알자, 목간의 낭중, '대후가'라는 붉은 글씨와 '대후가승'이라는 봉니, 견책의 '가리', 견책의 '환자','수중', 거기제도, 종졸병마제도 등의 분야에서 무덤 주인의 신분이 열후인 것을 증명했다. <사기>와 <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제2대 대후 이희가 한나라 문제 15년(기원전 165년)에 죽었다는 기록과 3호묘 목간에 기록되어 있는 문제 12(기원전 168년)년의 기록 사이에 3년의 차이가 나는 일은 당연히 사기와 한서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즉, 이희 모친이 문제 15년에 죽었는데 이를 이희의 사망 연대로 잘못 기록한 것이다.

(중략) "제후는 2중이다"라는 것은 제후는 3개의 관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3호묘는 바로 3중의 관으로 제후의 관제에 정확히 부합한다. 장사에서 이미 발굴된 서한 초기 제후의 무덤을 보면 모두 관이 3중이다. 따라서 3호묘의 주인은 당연히 제후여야 한다. (중략) 3호묘의 명정 윗부분에는 해와 달이 그려져 있고 아랫부분에는 교룡이 그려져 있다. (중략) 한나라 때의 장례 제도에 의거하면 3호묘의 주인은 당연히 제후여야 한다. 3호묘의 견책에 무덤 주인이 '가승 1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서 백관공경표>와 <후한서 백관지>의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때에제후는 '가승 1인'을 둘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고한다. 이는 무덤 주인이 열후인 것을 말한다. 무덤에서 발견된 견책에 무덤 주인이 "88명의 미인과 20인의 재인", "환관 9인"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 후궁제도의 규정에 의하면 제후와 황제만이 '미인' '재인' '환관'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무덤 주인의 지위가 최소한 열후라는 것을 말한다. <사기>와 <한서> 같은 명저에도 착오가 있을 수 있기 마련이다. <한서 고혜고후문공신표>는 대후 이창을 '여주창'으로잘못 기록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 예이다. 이 착오는 1974년 마왕퇴 2호묘가 발굴되고 '장사승상', '대후지인', '이창'등의 인장 3점이 출토된 후에야 비로소 한서의 이 착오가 바로 잡혔다. <사기 혜경간후자년표>는 '이창(利蒼)'을 '이창(利倉)'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사기>의 기록도 정확하지 않다.

따라서 이 경우처럼 고고학 발견은 이따금 역사 문헌 기록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양옥승은 자신이 지은 <사기지의>라는 책에서 <사기>가 연대 표기에서 100여 곳 이상의 오류를 범했는데, 그중 '표(表)'에서 연대 표기의 오류가 가장 많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사기 고조공신후자년표> 고후(高后)의 기록에 "4년에 태위를 삼다"라는 기록이 있다. <사기 강후세가>에는 "혜제 6년에 태위관을 설치하고 발(勃)을 태위로 삼았다. 10년만에 고후가 죽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한서 백관공경표>에 "혜제 6년 강후 주발(周勃)이 다시 태위가 되었고 10년에 옮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혜제 6년부터 여후 8년까지는 딱 10년인데, 만일 여후 4년에 태위를 설치했으면 단지 5년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사기 고조공신후자년표>의 연대 기록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열후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경우는 그 서열이 반드시 이웃한 경우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상황이 2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서열 66위인 양평후의 공이 서열 54위인 평정후와 비교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열 99위인 송자후의 공이 서열 92위인 역후와 비교된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예외는 <사기>와 <한서>의 기록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런 연대 표기상의 착오와 오기는 <사기>와 <한서>의 표에 매우 많다. 1호묘는 2,3호묘와는 별도로 발굴됐기 때문에 지층 관계에서 볼 때 이 두 무덤보다 늦다. 1호묘에서 출토된 니반냥전(泥半兩錢)과 3호묘 전토에서 출토된 반냥전은 문제 시기의 사수반냥전(四銖半兩錢)과 같다. 이 때문에 두 무덤의 연대는 마땅히 매우 근접하며, 그 차이가 불과 몇 년에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3호묘는 무덤에서 출토된 연대가 적힌 목간을 근거로 문제 12년에 매장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1호묘는 문제 15년 전후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호묘의 주인은 제2대 대후 이희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사망 연도는 바로 <사기>와 <한서>에 기록된 이희의 사망 연도, 즉 문제 15년이다. 그리고 3호묘에서 출토된 유물과 매장 방식을 근거로 3호묘의 주인은 바로 제2대 대후 이희이며, 한나라 문제 12년[26]에 장사지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기>와 <한서>에서 이희 모친의 사망 연도인 문제 15년을 이희의 사망 연도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 확인할 수 있다.


2011년에 명(明)나라 시대의 인물 미라가 발견된 적도 있다. 상류층 여성으로, 약 700년 전의 미라.[27] 키는 150cm대라고 한다. 관 안에 물이 차 있었으며, 학자들은 관 안의 산소 농도가 낮아져 생성된 자연 미라로 추정했다. 손가락에 착용한 녹색 옥반지도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눈썹까지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당시의 복식과 생활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드물게 위의 신추부인과 혼동되는데, 이 미라는 영어권에서 보통 'Ming dynasty mummy(명 왕조 미라)', 'Wet mummy of Ming dynasty(명 왕조의 젖은 미라)'로 불린다.미라 사진이 포함된 관련 영문 글.

중국 내몽골자치구 등에서는 요나라 시기의 거란족 미라가 발견되기도 한다. 실제로 요나라 2대 황제였던 야율덕광이 사망한 이후부터 거란족들은 미라화하는 "건시(시신을 말려 장례식하는 것)"라는 풍습을 했었다. 야율덕광(요 태종)은 후진을 멸망시켰으나 하필 여름인데다가 폭염으로 인해 기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거란군들은 나중에 철수했고, 이 때 야율덕광은 열병을 앓고 있었다가 나중에 죽게 되어 이후 요나라에서는 왕의 장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는데, 당시 요나라의 태후였던 단완태후 술률평(야율아보기의 황후)은 죽은 사람이어도 시신은 한 번이라도 봐야한다며 시신을 수도인 상경임황부에 운반하라고 하였으나 덥고 습한 기후여서 운반 중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시신이 썩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이 때 어느 한 요리사가 방법을 제시했는데, 유목민들은 소나 양의 고기를 저장할 때 내장을 제거하고 소금을 사용해서 저장하니 그 방법을 사용해보자고 제안을 하였다. 왕의 시신을 해부하는 건 옳은 방법이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도리가 없다보니 결국 이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이는 훗날 요나라 거란족들의 장례 풍습으로 유지되었다. 물론 아무나 했던 건 아니었고, 귀족이나 황족들 한정이었다. 그래서 귀금속으로 만든 가면을 비롯한 수많은 부장품들을 남겼다.

4.4. 북유럽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산소와 부패균이 희박한 에 빠져 미라화된 시신이 발견되는 경우가 제법 많다. 추운 기후 등 천혜의 조건에 의해 이런 늪지대 미라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수백 년 전에서 천 년까지 이르는 오래된 시체가 살아생전 모습처럼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살인 사건으로 오인당하기도 한다. 특히 스웨덴에서는 늪지대에서 미라가 많이 나오기로 유명하다. 오래된 늪의 바닥은 실제로 거의 탄화되어 이탄 상태인데, 이를 비료나 건축 재료, 연료로 쓰려고 퍼내다 발견되기도 한다. 여기서 발견된 Peat mummy라고도 부르는 미라 중에는 교수형에 처해진 사람, 동성애자 커플[28], 몇백 년 전에 실종 처리된 소녀, 특정 종교의식의 인신공양 희생양으로 바쳐진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있다고 한다.

1950년에 발견된 4세기 고대 로마 이전 철기시대 사람의 유명 미라인 톨룬드 맨(Tollund man)도 덴마크의 늪지대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의 사진은 본 문서 아래의 이외 나무위키에 항목이 존재하는 유명 미라들 문단에 첨부되어 있다.

4.5. 북아메리카

극지방의 추운 날씨 덕에 자연적으로 미라화 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탐험가 존 프랭클린이 있는데 1845년 영국은 북서항로 개척을 위해 존 프랭클린을 필두로 탐험대를 보냈다. 그러나 전원 실종되었고 구조대는 선원 3명의 무덤과 그들이 남긴 일지만 발견 할 수 있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발견되었던 선원 3명의 무덤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춥고 건조한 기후 덕분에 모두 미라화 되어있었다. 미라 사진(열람 주의)

4.6. 남아메리카

지금의 칠레 북부지역에 거주했던 고대 친초로인들이 만든,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인공 미라인 친초로 미라(Chinchorro mummies)가 알려져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미라는 약 7000년을 넘긴 것으로, 발견된 고대 이집트 미라들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제작할 때 시신의 양쪽 팔을 제거하고 독특한 형태의 가면을 씌워 놓았다. 사회 지배층만이 아닌 일반 구성원들도 미라로 만든 것이 특징적이다.

제작 연도와 그 정교함에 비해 현대에 늦게 발견된 탓인지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집트 미라에 비해 인지도가 많이 떨어져 이런 미라들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친초로 미라와는 연관 없지만, 하술된 잉카 제국시기에 인신공양된 아이들의 미라, 그중에서도 하술된 잉카 '얼음 소녀(La doncella)'라 불리는 미라가 굉장히 유명하다.

4.7. 기독교 문화권

가톨릭정교회에서도 몇몇 성인들의 시체가 썩지 않고 보존된 경우가 있다. 부패를 막기 위해 엠버밍을 했거나, 엠버밍을 하지 않았는데도 시체가 미라화/비누화해 썩지 않은 경우로 나뉜다. 특히 기적으로 여겨져 공경받은 경우는 엠버밍을 하지 않았는데도 부패하지 않거나, 유해에서 자연적이지 않은 향기가 나거나, 사후경직이 발생하지 않거나, 사망 후 오랜 시간이 경과했는데도 유해에서 피가 흐르거나, 유해에 체온이 남아 있는 경우 등이다. 한때는 유해가 썩지 않은 것이 시복시성의 요건인 기적[29] 중 하나로 인정된 적도 있었지만 현재는 기적 심사 항목에서 제외되었다. 유해의 미라화가 기적이라기보다는 그늘지고 서늘하며 온도 변화가 적은 교회 지하무덤의 환경적 특성 때문일 가능성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유해가 온전한 경우 유리관 안에 넣어서 순례자들이 기도와 경배를 올리거나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한다. 유리관 안에 넣어져 공개되는 유해들 가운데 몇몇은 부패가 더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밀랍이나 실리콘 등으로 얼굴, 손 등을 덮는다. 교황들 중에서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복자 인노첸시오 11세, 성 비오 10세, 성 요한 23세가 있다. 이름 앞에 덧붙여진 복자나 성인의 칭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시복이나 시성 절차를 위해 관을 열었을 때 시체가 썩지 않은 채 온전하게 보존된 게 발견된 경우이다.

이미 백골이기에 미라의 정의와는 거리가 멀지만 성인의 유골을 어떻게 짜맞춰 치장하고 멋진 포즈를 취하게 한 뒤 성유물로 비슷하게 전시해놓는 경우가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해놓은 유해들 상당수가 성인은 커녕 교회와 관련조차 없는 인물들이란 것인데, 이는 한창 성유물이 유행할 당시 로마 카타콤에 있던 아무 뼈다귀들을 그냥 가져다가 화려하게 장식한 뒤 그럴듯한 성인의 이름을 붙여 순교자의 유해라고 우겼기 때문이다.

극히 드물지만 자연적으로 썩지 않는 미라도 있다. 루르드의 성모 문서 참조. 1897년에 사망했음에도 지금까지 시체의 상태는 전혀 부패하지 않은 채로 완벽히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아주 약간의 부패방지 처리를 한 것을 제외하면 어떠한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았음에도 사망 당시의 모습 그대로라서 마치 깊은 잠에 빠진 사람처럼 보일 뿐이다. 아예 기독교 측에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인정하기까지 했다.

[목록(펼치기/접기)]
||<:><bgcolor=#DCDCDC>복자·성인 ||<:><bgcolor=#DCDCDC>출생 ||<:><bgcolor=#DCDCDC>사망 ||<:><bgcolor=#DCDCDC>축일 ||<:><bgcolor=#DCDCDC>신분 ||<:><bgcolor=#DCDCDC>매장지 ||<:><bgcolor=#DCDCDC>사진 ||
성녀 체칠리아 2세기 경 2세기 경 11월 22일 동정 순교자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로마)
성 쿠르베르토 634. 687.03.20. 3월 20일 주교·수도자 던햄 대성당(던햄)
성 구틀락 673. 714. 4월 11일 수도자 크로일랜드 수도원(크로일랜드)
성 콜만노 10세기 1012.08.13. 8월 13일 순교자 멜크 수도원(멜크)
성 이시도로 1070. 1130.05.15. 5월 15일 농부 산 이시도로 성당(마드리드) #
성 베네딕토 베네젯 1163. 1184. 4월 14일 평신도 성 디디에 성당(아비뇽)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1195. 1231.06.13. 6월 13일 신부·설교가·교회학자 :성 안토니오 대성당(파도바) #
성 에드문도 리치 1175.11.20. 1240.11.16. 11월 16일 대주교·증거자 팔:성모승천 성당(코네티컷) #
포르투갈의 복녀 마팔다 1197.경 1256.05.01. 5월 2일 공주·수녀 아로카 수녀원(아로카) #
성녀 지타 1212. 1272.04.27. 4월 27일 동정녀·하녀 산 프레디아노 대성당(루카) #
코르토나의 성녀 마르가리타 1247. 1297.02.22. 2월 22일 3회원 프란치스코 성당(코르토나) #
몬테팔코의 성녀 클라라 1268. 1308.08.18. 8월 17일 동정녀·수녀원장 산타 클라라 대성당(몬테팔코)
몬테풀치아노의 성녀 아녜스 1268.01.28. 1317.04.20. 4월 20일 수녀원장 오르비에토의 도미니코회 성당 #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1347.03.17. 1380.04.29. 4월 29일 수녀·신비가·교회학자 몸: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로마)
머리:산 도메니코 성당(시에나)
#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 1384. 1440.03.09. 3월 9일 설립자 산타 마리아 노바 성당(로마) #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1380.09.08. 1444.05.20. 5월 20일 신학자·설교가 산 베르나르디노 성당(라퀼라) #
피렌체의 성 안토니노 1389.03.01. 1459.02.05. 5월 10일 대주교 산 마르코 성당(피렌체) #
볼로냐의 성녀 카타리나 1413.09.08. 1463.03.09. 3월 9일 수녀원장 클라라 수녀회 경당(볼로냐) #
성 디다코 1400. 1463.11.12. 11월 12일 수사·증거자 에르미타 데 산 디에고(세비야)
성녀 에우스토키아 스메랄도 칼라파토 1434.03.25. 1485.01.20. 1월 20일 수녀·설립자 몬테베르지네 수도원(메시나) #
파울라의 성 프란치스코 1416.03.27. 1507.04.02. 4월 2일 은수자·설립자 [30]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 1447. 1510.09.15. 9월 15일 과부·신비가 성 안눈치아타 디 포르토리아 성당(제노바) #
성 안토니오 마리아 즈카르야 1502. 1539.07.05. 7월 5일 신부·설립자 성 바르나바 성당(밀라노) #
성녀 안젤라 메리치 1474.03.21. 1540.01.27. 1월 27일 동정녀·3회원·설립자 산타 아프라 성당(브레시아) #
천주의 성 요한 1495.03.08. 1550.03.08. 3월 8일 설립자 승리의 성모 마리아 성당(그라나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506.04.07. 1552.12.03. 12월 3일 신부·선교사 봉 제수스 대성당(고아) #
성 가롤로 보로메오 1538.10.02. 1584.11.03. 11월 4일 추기경 밀라노 대성당(밀라노) #
리치의 성녀 카타리나 1522.04.23. 1590.02.01. 2월 13일 수녀 성 빈첸시오와 성녀 가타리나 대성당(프라토) #
십자가의 성 요한 1542. 1591.12.14. 12월 14일 신비가·교회학자 머리,몸:가르멜 수도회(세고비아)
손,발:산 후안 데 라 크루스 수도원(우베다)
#
#
성 필립보 네리 1515.07.22. 1595.05.25. 5월 26일 신부·설립자 산타 마리아 인 발리첼라 성당(로마) #
성녀 제르마나 쿠쟁 1579. 1601. 6월 15일 동정녀·목동 피브락 성당(피브락) #
파치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1566.04.02. 1607.05.25. 5월 25일 수녀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 데이 파치 수도원(피렌체) #
성 가밀로 데 렐리스 1550.05.25. 1614.07.14. 7월 14일 신부·설립자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 성당(로마)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1567.08.21. 1622.12.28. 1월 24일 주교·설립자·교회학자 성모 마리아의 방문 대성당(안시) #
성 요사팟 쿤체빅 1580.경 1623.11.12. 11월 12일 대주교·순교자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 #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1572.01.28. 1641.12.13. 8월 12일 설립자·수녀 성모 마리아의 방문 대성당(안시) #
성 요한 사우스워스 1592. 1654.06.28. 6월 27일 신부·순교자 웨스트민스터 대성당(런던) #
성 안드레아 보볼라 1591. 1657.05.16. 5월 16일 순교자 성 안드레아 보볼라 성당(바르샤바)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 1591.08.12. 1660.03.15. 3월 15일 과부·설립자 뤼뒤박 대성당(파리) #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1581.04.24. 1660.09.27. 9월 27일 신부·설립자 라자로 성당(파리) #
아그레다의 가경자 마리아 데 헤수스 1602.04.02. 1665.05.24. - 동정녀·수녀 콘셉시온 수도원(아그레다) #
복자 인노첸시오 11세 1611.05.19. 1689.08.12. 8월 12일 교황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 #
레온 이 델가도의 하느님의 종
예수의 마리아
1643.03.23. 1731.02.15. - 동정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
(산 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
#
성녀 루치아 필립피니 1672.01.16. 1732.03.25. 3월 25일 동정녀·설립자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1696.09.27. 1787.08.01. 8월 1일 설립자·주교·교회학자 성 알폰소 데 리구오리 대성당(파가니) #
성녀 호아퀴나 데 베드루나 데 마스 1783.04.16. 1854.08.28. 5월 19일 설립자 애덕의 카르멜회 본원(비크) #
성 도미니코 사비오 1842.04.02. 1857.03.09. 5월 6일 증거자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토리노)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1786.05.08. 1859.08.04. 8월 4일 신부 아르스 대성당(아르스) #
성 요한 노이만 1811.03.28. 1860.01.05. 1월 5일 주교 성 요한 노이만 성당(필라델피아) #
성녀 막달레나 소피아 바라 1779.12.12. 1865.05.25. 5월 25일 성심수녀회 설립자·수녀원장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파리) #
성녀 나르시사 데 헤수스 1832.10.29. 1869.12.08. 8월 30일 동정녀 산타 나르시사 데 헤수스 성당(노볼) #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 1806.05.02. 1876.12.31. 11월 28일 수녀·환시자 뤼뒤박 대성당(파리) #
성녀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31] 1844.01.07. 1879.04.16. 4월 16일 수녀·환시자 생질다르 수도원(느베르) #
성녀 바울라 프라시네티 1809.03.03. 1882.06.11. 6월 11일 설립자 산타 도로테아 수녀원(로마) #
성 요한 보스코 1815.08.16. 1888.01.31. 1월 31일 신부·증거자·살레시오 수도회 설립자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대성당(토리노) #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푸 1828.05.08. 1898.12.24. 7월 24일 은수자 성 마로 수도원(안나야) #
예수 성심의 복녀 마리아 1863.09.08. 1899.06.08. 6월 8일 수녀 예수성심성당(Ermesinde) #
성 비오 10세 1835.06.02. 1914.08.20. 8월 21일 교황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 #
성녀 프란치스카 사베리아 카브리니 1850.07.15. 1917.12.22. 11월 13일 설립자 성녀 프란치스카 카브리니 성당(뉴욕) #
성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챠 1851.07.05. 1927.06.01. 6월 1일 신부·설립자 예수 성심의 로가찌오니스티 수도회(메시나) #
성 루이지 오리오네 1872.06.23. 1940.03.12. 3월 12일 신부·설립자 안전한 보호자이신 성모 성당(토르토나) #
성 제오르지오 프레카 1880.02.12. 1962.07.26. 5월 9일 신부·설립자 기적의 패 성모 성당(함룬) #
성 요한 23세 1881.11.25. 1963.06.03. 6월 3일 교황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1887.05.25. 1968.09.23. 9월 23일 신부 산 조반니 로톤도 성당(산 조반니 로톤도) #

대체로 오래된 미라일수록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반대로 최근에 만들어진 미라는 잠든 사람과 비슷해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수준의 착각에 빠질 정도로 부패되지 않은 게 특징. 예를 들어 성녀 지타의 시신을 비롯하여 수백년 전 사망한 사람의 미라는 검게 변색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수분이 빠져나가고 어느 정도 사후 변화가 진행되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무덤 속 시신과 거의 비슷한 형태인 반면 성녀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시신은 한 마디로 살아서 잠든 사람과 거의 비슷한 인상을 준다. 물론 이는 엠버밍 기술이 시신을 좀 더 온전하게 보전하는 쪽으로 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세워지는 혼란기에, 소련 공산당정교회의 권위를 깨부수기 위해서 정교회 성인들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정교회에선 일부 성인들의 유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썩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는데, 썩은 성인들의 시체를 보여 주어 대중들의 신앙을 무너뜨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수백년 전에 죽은 시신들을 파냈는데도 일부 시신들은 위의 이유로 미라가 되어 전혀 썩지 않아 있었고, 공산당원들은 이를 보고 충공깽으로 질리고 흥분한 군중들이 공산당원들을 공격하는 사태도 있었다고 한다.

시칠리아 팔레르모에는 1599년부터 자체적으로 미라를 만드는 문화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미라는 1920년에 만들어진 로잘리아 롬바르도(아래 문단 참조)이다.

4.8. 남태평양 제도들

멜라네시아에 해당되는 뉴기니 섬의 경우 일부 지역에서 부족들이 죽은 족장을 미라화시키기도 하는데 훈제처럼 불로 태운 물질 및 재에서 나오는 연기로 미라화한다고 한다.

4.9. 불교 문화권

불교에는 부패하지 않고 살아 생전처럼 남아 있는 승려의 시신을 전신사리, 육신보살, 혹은 등신불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즉신불이라고 하여 일부러 토굴 등에 들어가 미라화되는 것을 기다리는 수행도 존재한다. 열심히 등신불이 되는 수행을 해도 사망 후 시신이 부패하면 실패다. 당연하지만 현대에 등신불이 되기 위해 고행을 하면 자살에 해당되는데 안 말리면 자살방조죄를 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무위키의 등신불 문서에서 등신불에 관한 내용을 더 자세히 읽을 수 있다.

중요한 요점이 있는데, 정통 불교적 관점으로는 등신불을 모시거나 사망 후 등신불이 되기 위해 생전에 수행하는 것은 육신이나 현세에 집착하지 않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본질에서 멀어진 행위로 금기한다. 보통 이렇게 미라가 된 승려를 부처처럼 모시는 것은, (특히 대승 불교의 경우) 속세에 남아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강한 법력(法力) 덕분에 사망한 승려의 육신이 부패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중국에서는 등신불에 을 입혀 소중하게 모셔왔는데, 문화대혁명홍위병들의 만행으로 다른 문화재와 함께 죄다 파괴되어, 현재 남은 것은 적다고 한다.

티베트 불교에서 고승(高僧)의 시신을 미라화 하여 전각에 모시기도 한다. 러시아 부랴티야 공화국 울란우데 근교의 이볼긴스키 다찬에 모셔진 승려 이티겔로프의 미라가 나름 유명한데, 인근 몽골에서 이를 보려고 오는 티베트 불교신자들도 많을 정도다. 촬영 통제가 굉장히 심하다고한다.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옻나무를 달인 물을 계속 마시면 몸 속이 옻칠되어서 썩지 않으며 옛 고승들이 이렇게 등신불이 되는 수행을 했다'와 같은 괴담이 도는데, 당연히 유언비어다. 옻칠은 옻물이 아니라 옻나무의 수액을 이용해 10번 이상의 공정을 거치는 일이다. 옻물 마신다고 몸속에 옻칠이 되면 옻물을 마시자마자 앓다 고통스럽게 끔살될 것이다. 단 등신불이 되기 위해 옻나무차를 마시는 수행을 했다는 건 사실이다.

4.10. 현대

현대는 옛날보다 고고학해부학, 역사학, 의학이 발전하면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옛 미라가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시대이다. 미라 연구처럼 많은 간학문적(間學文的) 연구가 요구되는 것은 흔치않다.

현대에는 고독사한 시신이 미라화된 채 발견되는 경우가 생각보다 뉴스에 많이 보도된다. 국내 뉴스에서도 볼 수 있다. 자살한 사람이 뒤늦게 발견됐는데 습기가 없고 통풍이 잘 되는 곳에 위치해 자연 미라가 되어버린 사건도 있다.

사이비 종교에서 미라화된 시신의 부활을 기다리며 계속 물수건으로 미라를 닦아주었는데, 그 물과 시신의 지방이 비누화 반응을 일으켜 미라 비누가 되어버린 사례가 있다. 이러한 현상을 시랍이라고 부른다.

공산권에서 소위 '인민영웅'으로 여겨져 방부 처리된 블라디미르 레닌, 호찌민[32], 마오쩌둥이나 김일성의 시체도 미라의 범주에 든다. 이쪽은 정확히 말하자면 약품 처리한 시체를 일반 공기 대신 질소 가스, 아르곤 가스를 주입한 밀봉 유리관 안에 안치한다. 산화를 막기 위한 의도가 크다. 시신이 부패되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산소에 노출되거나 조금만 습한 환경에 있으면 미라가 손상되기 쉽기 때문에 미라가 안치된 곳은 철저히 내부 기체와 습도, 온도 등을 조절한다고 한다.

레닌 미라의 경우 최초엔 기술이 완벽치 않아 유리관 속에서 얼굴 등에 부패 얼룩이 생기는 등 난리가 나서 다시 꺼내 재처리했다고 한다. 관련 책임자, 기술자들은 시베리아에 위치한 '겨울 별장' 여행을 당할까봐 두려움에 떨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도 죽은 뒤 마찬가지 방법으로 미라가 되었지만, 이후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독재자로 규정된 이후 매장되었다.

2014년 한국에서 놀랍게도 일반인이 시신을 미라로 보존해서 함께 살아온 믿기지 않는 사건이 드러났다. 죽은 남편을 미라처리한 채로 7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의 이야기. 자세한 것은 방배동 미라 남편 사건 문서 참조.

많은 논란을 일으킨 인체의 신비전(展)의 방부 처리된 신체 기증자분들의 몸은 미라의 범주에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에 제작된, 생전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방부 처리를 해 놓은 것은 보통 엠버밍이라 부르는 경우가 더 흔하다. 엘머 맥커디라고 방부 처리된 시신이 밀랍인형으로 오인되어 수십년을 여기저기 떠돌다가 손상으로 뼈가 드러나 시신임이 밝혀져 간신히 묘지에 묻힌 사례도 있다.

생태 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는 조류, 포유류, 파충류 등의 박제는 생물의 사체를 통째로 건조 및 약물 처리해 일종의 미라를 만드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변형, 내구도 등의 문제 때문에 인위적으로 만든 물질(발포 우레탄 등)을 뼈대로 동물의 가죽만 씌우는 경우가 많다. 눈동자나 연약한 조직 등은 방부 처리하지 않고 모형 제작된 일종의 플라스틱으로 대체한다. 이런 박제의 경우 미라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할 수 있다.

엄밀히 따져 현대인들이 풍뎅이류, 사슴벌레류, 나비류 등의 절지동물표본으로 만드는 것도 미라의 범주에 들 수 있다. 특히 딱정벌레류는 유난히 단단한 외골격 외피를 지니고 있어 잘 건조, 고정하면 수분이 줄어 크기가 조금 줄어드는 것 외에는 외형 변화가 거의 없기에 미라화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이 없다.

4.11. 고생물

지금은 멸종되어 사라진 공룡, 매머드, 동굴사자, 털코뿔소, 검치호고생물의 자연 미라가 발견되어 고생물학계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나무위키의 해당 항목에서 이와 관련된 정보들을 더 읽을 수 있다. 비교적 근세의 동물만 아니라 공룡도 미라 화석이 있는데[33], 공룡의 사체가 미라화가 된 이후 다시 화석이 된 것이다. 또한 공룡보다 더 오래된 트라이아스기 초기의 지층에서 발견된 리스트로사우루스의 미라도 있다. 남아 있는 조직 흔적이 일반 화석과는 차원이 달라 연구가치가 높다.

생명과학계에서는 이 미라를 바탕으로 고생물을 재구성하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영화 쥬라기 공원이 생각나는 충격적인 시도.[34] 그러나 기술적인 문제나 생태학적인 이유로, 윤리학적인 이유로 고생물 복원에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5. 유명 미라

인공 미라(인공적인 약품, 인위적 부패 방지를 통해 미라화)의 경우에만 인공 미라라고 적어놓았으며, 별도의 표기가 없거나 자연 미라라고 표기한 경우는 자연 미라이므로 참고바람.

5.1. 문서가 있는 유명 미라

5.2. 얼음 소녀(라 돈셀라/La Doncella)

라 돈셀라(La Doncella)는 스페인어로 '처녀', '소녀' 또는 '아가씨'라는 뜻이다. 'La'는 관사이다. 이하 '얼음 소녀'로 호칭 통일.

1999년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 고지대인 유야이야코(Llullaillaco) 산의 분화구에서 발견된 500여 년 전 잉카 제국시기의 아메리카 원주민 자연 미라이다. 발견 당시 5~6세 가량의 소년, 소녀 미라도 있었지만 얼음 소녀 미라의 보존 상태가 가장 좋았기 때문에 얼음 소녀라는 이름이 붙어 유명해졌다. 전 세계의 사례를 보아도 500여 년이 지난 미라가 얼음 소녀만큼 상태가 좋은 경우는 드물다.

얼음 소녀의 사망 당시 나이는 15세 정도로 추정되며, 잉카 제국 시기에 인신공양되었다. 위에 적었듯이 그녀의 근처에서 두 어린이 미라도 함께 발견 되었는데, 모두 인신공양된 아이들로, 얼음 소녀보다도 나이가 더 적었다. 사망 원인은 동사로 추정된다고 한다. 잉카에서는 인신공양을 하기 전에 제물에게 '신에게 보낼 사자(使者)'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잠시 시켜주었기 때문에, 제물이 될 어린아이들은 제물로 발탁된 이후 잠시 상류층에 가까운 생활을 하며 알코올마약[35] 등에 취한 채 지내다가, 추운 고지대에 제물로서 바쳐져 얼어 죽었다고 보고 있다. 잉카 제국의 인신공양 연구에 크게 기여한 미라이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얼음 소녀는 함께 공양된 두 어린이들보다 더 많은 양의 알콜과 마약 성분이 검출되었다고 하는데, 관련 연구자는 나이가 많았던 소녀가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알았기에, 다른 아이들보다 더더욱 약물에 의존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오래 된 미라인데도 드물게 일반에도 전시 형태로 공개되었는데, 아무래도 취해서 잠든 상태로 죽은 데다가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아 보기에 끔찍한 모습이 아니여서 그런 듯하다. 미라 사진을 무서워하는 사람이라도 이 얼음 소녀의 모습은 비교적 충격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얼음 소녀 미라의 모습

5.3. 함보 라마

1927년 가부좌 자세로 사망한 러시아의 수도자. 본명은 함보라마 이티겔로프로, 사망 당시 자신을 나무 상자에 넣어 땅에 묻어달라고 했으며 사후 75년 뒤에 상자를 다시 꺼내보라고 했다고 한다. 2002년 해당 절의 수도자들이 나무 상자를 열었는데 그의 시신이 미라화되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법의학자들의 조사 결과 피부, 관절, 머리카락의 탄력과 구조 역시 보존 상태가 아주 좋았으며 시신의 상태는 사망한지 12~36시간이 지난 시신과 비슷했다고 한다. 나무 상자 내에서 세균의 번식이 없었던 것인지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해당 절에서는 함보 라마가 부처가 되는 수행에 성공했다고 생각해 그의 시신을 보존 중이다. 일부 신도들은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은 명상에 빠진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몽골에서도 그의 스승으로 추정되는 미라가 가부좌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5.4. 푸허우

중국 푸젠성의 승려. 2012년 사망한 이후 3년 후에 관을 열어보니 가부좌 상태로 미라가 되어 있었다. 방부처리도 없었음에도 자연적으로 미라가 되었기에 놀라게 했고 이에 푸허우의 제자들은 그가 부처가 되었다며 감동을 받기도 했다. 푸허우가 있던 절의 제자들은 그의 미라에 금칠을 하고 옷을 입혀, 불상으로 모시고 있다.

조건만 맞으면 자연적으로 미라가 될 수 있지만, 가부좌의 상태로 시신이 보존된 독특한 사례인 것. 불교에서는 가부좌를 튼 상태로 죽는 것이 아무런 미련 없이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좌탈입망'으로 보기 때문에 좌탈입망으로 사망한 승려가 가부좌를 튼 상태로 보존되는 것은 숭고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다. 국내에서도 서옹 스님과 한암 스님이 좌탈입망을 한 사례가 있다.

5.5. 시베리아 우코크 얼음 미라

Princess of Ukok / Принце́сса Уко́ка

독특한 문신이 있는 게 특징이다.#

5.6. 톨룬드 맨(Tollund Man)

기원전 4세기에 사형당한 후 늪지에서 발견된 사람으로, 놀라운 보존 상태 때문에 유명하다.# 당시 살인 사건인 줄 알고 경찰 조사가 있기도 했다.

6. 기타

7. 매체에서의 미라

파일:attachment/미라/캐릭터.jpg

미라(Mummy)의 정확한 뜻은 부패되지 않고 보존된 시체이지만, 어째서인지 보통 '미라'라고 하면 저 시체가 다시 살아나서 돌아다니는 언데드 캐릭터를 떠올리게 된다.

이외에도 등장하는 매체에 따라 세부사항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표적인 특징인 붕대를 두르고 있으면 보통 미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각종 매체에서 등장하는 미라라는 언데드 캐릭터는 서구에서의 왜곡된 판타지 이미지에서 비롯된 이집트의 미라인 것이 보통이다. 거꾸로 툼 킹처럼 제대로 된 세력으로 대우해주는 사례도 있다.

저주를 걸거나 붕대로 속박하는 몬스터로 흔히 등장하지만,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부터 오리엔탈리즘섹스 어필이 더해져 매력적인 괴물로 비춰질 때도 있었다. 고고학자와 연애를 하거나 심지어는 결혼하고 관계까지 맺는(!) 소설들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좋았던 편. 그래서 훗날 흡혈귀, 늑대인간과 함께 고딕 호러에 등장하는 몬스터 대열에 당당히 끼게 되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몬무스 계열처럼 여성 미라가 각광받다가 20세기부터 남성 미라도 인간-미라 로맨스 소설에 등장했다고 전해진다.#

아래의 예시 역시 사전적인 미라의 의미보다는 이 캐릭터로서의 특징을 따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무협지, 무협 로맨스, 동양 판타지에서는 목내이라는 한문 이름으로 등장한다. 주로 마교, 혈교, 사파(무협 소설)마공, 사술, 채양보음 등의 색공으로 정기를 빨려 죽은 희생자의 최후(...).

7.1. 문서가 있는 미라 캐릭터

7.2. 디아블로 시리즈언데드 몬스터

디아블로 2에서도 등장.

디아블로 3의 경우, 자세한 내용은 디아블로 3/괴물문서 참조. 주로 칼데움처럼 건조한 지역에서 무리를 지어 출몰하며, 칼데움 하수도나 막다른 음지, 시체 더미에서 무더기로 출몰한다. 통념과는 달리 꽤 빠르므로 주의. 죽으면 몸이 뒤틀려 터지며 범위가 작은, 독(毒) 피해를 주는 녹색 기운을 내뿜는다. 높은 고행 난이도의 경우 다 잡아놓고 이 독 피해에 죽을 수 있을만큼 위험하므로 주의해야 한다.

7.3. 겁스

겁스 마법에서는 좀비, 스켈레톤, 미라 등등 각종의 시체 언데드들이 좀비라는 하나의 주문에 의해서, 그 주문이 걸릴 당시 시체의 상태에 의해서 각각 다르게 발생되는 것으로 처리한다. 겁스 마법의 사령 계열 마법 챕터에 미라의 캐릭터 시트가 수록되어 있다.

7.4. 미라를 소재로 한 드라마

2011년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스페셜 사백년의 꿈.
한국드라마 사상, 최초로 미라를 소재로 한 드라마다.
중간중간마다 미라가 살아나는 장면이 연출된다. 미라가 된 여인의 복수극을 담고 있다.

8. 관련 문서


[1] 실제로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연구를 위해 해외로 반출할 때 이집트에는 미라 관련 화물 규정이 없어 서류상으로는 건어물로 처리했다.[2] 이 단어는 영국식 영어에서는 일상어로 미국식 영어의 mommy에 해당되는, "엄마"라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Mom'보다도 더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칭하는 듯한 어감이 있다. 이를 이용한 말장난도 있을 정도.[3] 문법적으로 '건조시키다', 야위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 mirrar(미하르)가 명사화된 단어이다.[4] 현대의 표준 중국어로는 '무나이이'(mùnǎiyī)라고 하는데, 역사적으로는 철경록(輟耕録) 3권에 처음 나오고 이것이 일본과 한국에서도 받아들여졌다. 일본에서는 외래어인 ミイラ의 아테지로서 木乃伊를 쓰고, 한국에서는 1922년 시인 김형원이 발표한 <숨쉬는 목내이>란 시가 있다.[5] '부활'이라는 단어 때문에 좀비구울 혹은 영화 '미이라' 시리즈이모텝처럼 불가사의한 힘으로 시신이 되살아나는 걸로 오해되기 쉽지만, 한국 민속신앙 개념에서 보면 '혼령이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다. 참고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의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를 이브(jb), 슈트(šwt), 렌(rn), 바(bꜣ), 카(kꜣ), 여기에 간혹 세헴(sḫm)을 더해서 5가지 혹은 6가지로 구분해서 믿었는데, 이들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현세의 육신이 남아있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6] '주어진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저승의 왕인 오시리스에게 사후세계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7] 심장은 앞선 각주에서 영혼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이브'에 해당하는데, 오시리스에게 심판을 받을 때 심장의 무게를 재는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다른 내장은 제거해도 이것만큼은 남겨두었다.[8] 관 옆 항아리에 장기들을 나누어 각각 보관하였다고 한다. 장기를 내버려두면 미라를 못 만들기 때문에 빼내는 이유도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장기까지 온전히 보존하는 방부 기술은 현대에도 불가능하다.[9] 실제로 조선시대 미라 대부분이 공사 중 발견해 나온 것이라서, 학술적 연구 이후엔 대부분 적절한 곳에 재매장/화장을 한다.[10] 일선문씨가 먼저 발견된 후, 20여일 뒤 손자 이응태의 묘가 발견됨[11] 편지 내용에 아들의 어릴적 이름인 ‘원이’는 드러나 있지만 아내에 대해 추적할만한 근거는 전무했다.[12] 고성이씨 참판공파 족보에 따르면 이응태의 후사는 외아들 이성회 뿐이며 이가 아마도 편지속 ‘원이’로 추정된다.[13] 사실 소년미라가 윤호인지 확실한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해평윤씨 족보를 살펴보면 윤호의 이름 옆에 관직명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있는데 다섯살 아이가 동일인 일까 과연[14] 해평 윤씨의 족보에는 '윤호'로 기록되었지만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한동안 정확한 이름을 짓지 않았다.[15] 문정왕후의 오빠이자 윤원형의 형인 윤원량이다. 동생인 윤원형에 비해서는 유명하지 않지만, 정3품 벼슬을 한데다 그의 딸은 인종후궁이 되기도 하는 등 거물이라면 거물. 출처[16] 임신한 상태로 사망하면 부패가스가 태아를 밀어낸다. (일명 '관내 출산') 그리고 조선의 예법에 따라 한 관에 두 사람을 묻지 않아서, 과거에는 뱃속에 태아가 있으면 염하는 사람이 산도(질)를 통해 꺼내어 따로 묻었다. 다만 이처럼 출산 중 죽은 경우는 태아가 커서 꺼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묻은 듯하다.[17] 기원후 1752년으로, 정조가 태어난 해이다.[18] 이쪽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겐 원래 평범한 동네 산책 코스다.[19] 그러니까 병자호란이 한창일 때 혹은 그 이전에 사망한 사람이다. 이걸로 보아 명종 시절 태어난 사람으로 추정된다.[20] 1만원권의 세종대왕을 비롯해서 어진은 대부분 후대에 상상으로 그린 것. 특히 6.25 전쟁 당시 부산 용두산 대화재때 소실된 게 많아서 그렇다. 대부분이 이모본이기는 하지만 어진으로 초상이 남은 조선 왕은 태조, 세조, 원종(정원군), 영조, 철종, 고종, 순종 뿐이다.[21] 이집트투탕카멘 미라와 잉글랜드 리처드 3세는 그의 두골 덕분에 훗날 얼굴을 복원해 볼 수 있었다.[22] 다만, 우연히 형성된 방부액으로 인해, 물에 퉁퉁 불은 것처럼 미라가 부어 있어 비위가 약하면 보지 않는 것을 권장한다.[23] 대략 2200년 전이다.[24] 동맥을 조사했을때 동맥이 심하게 막혀있었다.[25] 위장에서 참외씨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다.[26] 무덤에 '12년'이라고 기록된 목간이 있다.[27] 대략 태조 이성계가 활동하던 시기와 겹친다.[28] 옛날 스웨덴에서는 동성애가 금기시 되었다. 동성애를 한 죄로 사형당한 것으로 보인다. 발견 당시 두 남성이 서로를 꽉 부둥켜 안은 자세로 발견되었다.[29] 가톨릭교회법상 시성을 위해서는 교회의 조사에서 둘 이상의 기적이 인정되어야 한다.[30] 1562년 위그노들이 프란치스코의 무덤을 파헤쳤을 때 부패하지 않은 유해를 발견했고, 그들은 유해를 끌어내 불태워버렸다.[31] 위 '관련 영상'에서는 시신 표면에 얇은 밀랍층을 더한 듯하다고 한다. 그래도 부패하지 않았다는 점은 변함 없다.[32] 본래 호찌민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할 것과 무덤을 간소하게 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그의 업적을 기리고 정확히는 후임자들의 정통성 확보 및 권력강화를 위해, 유언과 달리 미라화되어 안치되었다.[33] 에드몬토사우루스, 보레알로펠타, 브라킬로포사우루스 등.[34] 매머드와 동굴사자가 그나마, "비교적" 최근에 멸종한 동물들이기에 시베리아 같은 극지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지, 훨씬 더 옛 시대의 공룡의 미라 발견은 더더욱 적다.[35] 코카나무잎인데 현대의 마약 성분만 추출한 코카인과는 다르다.[36] 그리고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의 시신을 참수하여 훼손하는 비열한 짓을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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