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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 | 바오로 6세 | 요한 바오로 1세 | 요한 바오로 2세 | 베네딕토 16세 | ||||||
제266대 | ||||||||||
프란치스코 | }}}}}}}}}}}} |
가톨릭 교회의 교황 | ||||
제256대 레오 13세 | → | 제257대 성 비오 10세 | → | 제258대 베네딕토 15세 |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 |
본명 | <colbgcolor=#FFFFFF,#1F2023>주세페 멜키오레 사르토 (Giuseppe Melchiorre Sarto) |
출생 | 1835년 6월 2일 |
오스트리아 제국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리에세 | |
사망 | 1914년 8월 20일 (향년 79세) |
이탈리아 왕국 로마 사도 궁전 | |
재위기간 | 1903년 8월 4일 ~ 1914년 8월 20일 (11년 16일) |
즉위미사 | 1903년 8월 9일 |
장례미사 | 1914년 8월 23일 |
시복 | 1951년 6월 3일, 비오 12세 |
시성 | 1954년 5월 29일, 비오 12세 |
축일 | 8월 21일 |
사목표어 | Instaurare Omnia in Christo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회복하며) |
서명 | |
문장 | |
교황관과 열쇠, 그리고 방패가 있는 전통적인 교황 문장 형식을 지니고 있다.[1] 방패 상단부에는 오른발로 책[2]을 얹고 있는 성 마르코의 사자가 새겨진 베네치아 총대주교 문장이 있고, 하단부에는 거친 바다 속에 닻이 놓여 있으며 위에는 황금육각성이 떠 있는 만토바 주교 문장[3]이 있다. | |
언어별 성명 | 라틴어: Sanctus Pius PP. X 이탈리아어: Papa San Pio X 영어: Pope Saint Pius X |
[clearfix]
1. 개요
"교회에서 사도직의 가장 큰 장애물은 신자들의 소심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들의 비겁함입니다."
가톨릭의 제257대 교황이자 성인. 축일은 8월 21일.당시 기독교 교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대적 풍토를 거부하고, 오히려 전통적인 해석 및 관습을 계속 유지하도록 장려한 가톨릭 전통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오랫동안 각종 부조리로 문란해지고 해이해지던 교회 시스템 및 성직자 교육 등의 면에서 이를 다시 바로잡는 중요한 쇄신 개혁을 단행하였으며, 특히 교회법과 성무일도서[4] 등을 개정하고 새로이 체계화한 20세기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교황 중 하나이다.
비오 10세는 탈권위적이고 대중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종교의 모습을 거부하되 폐단은 과감히 없애, 현재의 가톨릭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것보다 더 유명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예감하고 막아볼려고 동서분주(東西奔走)했고 100% 적중률(?)의 예언과 기적의 교황 이미지도 존재한다.
2. 즉위 전
1835년 우체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검소하게 살았고 심지어는 신발이 닳아 빠질까봐 맨발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오랫동안 신학교 교수신부를 역임하다가 1875년 트레비소의 주교가 되었고,[5] 이후 만토바 주교를 거쳐 베네치아 총대주교로 서임되었다. 당시 그가 주교 및 대주교직을 지내고 있을 때 깊은 신앙심과 성실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시민들에게 상당한 존경과 지지를 받았다. 1903년 7월 20일, 교황 레오 13세가 서거하자 새 교황 선출을 위해 7월 26일 베네치아를 떠났다. 신자들이 "곧 다시 돌아오십시오, 추기경 전하!"라고 외치자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그대들에게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군중은 살아서도 죽어서도[6] 다시 못 돌아올 착한 추기경에게 열렬한 갈채를 보냈다.
3. 교황 선출
본인은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며,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내려 하면 웃어넘기곤 했다. 그렇기는 해도 그가 농담을 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내가 교황이 되든지 아니면 죽을 것임을 당신은 압니다. 이는 깰 수 없는 사건이지요. 나는 9년 동안 톰볼로에서 보좌신부를 지냈고, 그 다음 9년 동안은 살자노에서 주임신부였으며, 다음 9년 동안 트레비소에서는 종교법 고문을 지냈습니다. 그 후에는 9년 동안 만투아의 주교였고, 이제는 다시 9년 동안 베네치아 총대주교를 지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교황이 되든지, 아니면 죽든지 할 것입니다.
그의 동료가 "그렇다면 나는 전자를 바랍니다."라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후자를 바랍니다. 교황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응수했다. 또한 그는 교황선거가 끝나면 베네치아로 돌아가려고 표를 미리 끊어 놓았는데, 교황으로 선출되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설마 본인이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는 생각치 않았던 모양. 사실 행운의 기차표 덕이라기 보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개입이 있었다. 전임 교황 레오 13세의 온건한 진보 성향, 그리고 반(反) 헝가리 왕국 정책[7]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자신의 명의로 크라쿠프 대주교인 푸치나 추기경이 거부권(Jus exclusivae)을 행사하도록 했다.[8] 레오 13세 재임기 1887년부터 국무장관이었던 마리아노 람폴라 추기경(1843~1913)이 콘클라베에서 유력 후보자로 떠올랐는데,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 추기경들 다수가 그를 지지하고 있던 상태였다. 거의 대부분의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은 람폴라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커지자, 이에 거부감을 가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거부권을 행사했고, 결국 람폴라 추기경은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9] 결국 1903년 8월 4일 실시된 제7차 투표에서 베네치아 총대주교 주세페 사르토, 즉 비오 10세가 선출되었다. 이 때의 기억 때문인지 비오 10세는 이듬해 개별 국가의 콘클라베 간섭을 금지하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선거 개입권을 폐지했다. 그리고 아쉽게 교황 자리를 놓친 람폴라 추기경에게는 성무회의 의장직을 제수했다.#
4. 재위 기간
훗날 교황 요한 23세가 되는 안셀로 론칼리가 1905~1914년에 고향 베르가모 교구장 자코모 라디니타데스키(Giacomo Radini-Tedeschi, 1857 ~ 1914) 주교 밑에서 비서 신부로 일하던 시절, 주교는 당시 가톨릭 기준으로 좌파적인 신념을 지니고 사회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비오 10세와 충돌했다. 비오 10세는 주교에게 벌려놓은 사업을 멈추라고 명령하였다. 주교는 비오 10세의 명령에 순명하였으나 내적으로 큰 아픔을 겪었고, 요한 23세는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요한 23세가 당시 천주교 내에서 '근대주의자'라는 부정적 뉘앙스의 평가를 받았던 것도 라디니타데스키 주교의 영향이 컸다.[10]
이런 행적, 성향으로 인해, 비오 10세는 약 반세기 후에 즉위하는 개방과 탈권위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진 요한 23세와는 대척점에 서는, 20세기 가톨릭 역사에서 전통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한다. 훗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반발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비오 10세의 이름을 따서 성 비오 10세회를 세울 때 단체 이름에 비오 10세의 이름을 올린 데에는 이러한 부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비오 10세는 가톨릭 신자가 영성체를 자주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어린이 첫영성체 나이를 기존의 10~12세에서 7세까지 낮추어 영성체를 쉽게 해주는 결단을 내렸다. 이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많은 신자들은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도 보통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영성체할 뿐이었고, 많은 이가 대축일 때에만 영성체를 하였다. 또한 비오 10세는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나이인 7살이 지나고도 한참 후까지 첫영성체 시기를 미루는 것은 성체를 치유가 아니라 보상으로 여기는 그릇된 믿음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했다. 비오 10세 교황은 또 "존엄한 성체성사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런 관행은 많은 악의 원인이 됐다"며 이런 관습이 "순진한 어린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게 만들었고 영적 양식을 박탈했다"고 밝혔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도 어렸을 적 비오 10세의 영성체 개혁의 혜택을 입어 만 6살인 1911년 말에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또한 1908년에는 성심수녀회 창설자 소피이 바라를, 1910년에는 프랑스의 잔 다르크를 복녀로 시복했다. 1911년에는 천주교 대구대교구를 설정했다.
5. 예언과 기적
생전에 기적을 많이 일으켜 일찍부터 살아있는 성인으로 대접받았다. 팔이 마비된 한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의 팔을 잡았는데 팔이 순식간에 고쳐지자, 그 남자는 기쁨으로 가득 차서 "성인 교황 성하! 성인 교황 성하!" 하고 외쳤으나 비오 10세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조용히 있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온통 종기로 뒤덮인 한 아일랜드인 소녀가 찾아오자, 소녀의 머리에 손을 대자 즉시 나았다고 한다.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도 있었다고 전한다. 임신을 못하는 여인들에게는 잉태하리라는 것을, 갈라진 부부들에게는 재결합을 그리고 아주 기쁜 다른 사건들도 미리 말해 주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예언은 어쩌면 제1차 세계 대전이다. 교황비서였던 메리 델 발 추기경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혹은 여러 해 동안 없을 거라고 말할 때마다, "1914년이 가기 전에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신학생들이 서로 대적하기 위해 각자의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눈물을 흘리며 "그대들이 고백하는 신앙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전쟁터에서는 애긍심과 동정심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하였다.
1914년 8월 20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6. 시성
교황의 시신 |
시성 이전의 지하 무덤 | 시성 이후 현재의 무덤 |
역대 교황들의 시신은 영구보존을 위해 장기를 제거하거나 방부 처리를 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비오 10세는 생전에 유언으로 이를 금지했기 때문에, 사망 당시의 상태 그대로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비오 10세를 기리는 여론이 높아지자 교황청에서는 시성 작업에 착수해 1944년 5월 19일 교황의 시신을 지하 무덤에서 꺼냈다. 그런데 교황의 시신은 아무런 방부 처리 없이 안장되었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30년 동안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후 2차례의 병자 치유가 비오 10세의 전구로 인한 기적으로 공인됨에 따라 1954년 5월 29일 비오 12세가 주재한 비오 10세의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교황 비오 5세가 1712년 5월 24일 시성된 이래 교황이 시성된 것은 242년 만의 일이었다.
성인 교황의 유해는 지하 무덤에서 옮겨 대성당 내부에 있는 자헌 경당의 제대 아랫쪽 유리관에 새로 안치하였는데, 은제 가리개로 얼굴과 손은 덮어놓았다.
7. 기타
[1] 이러한 전통적인 문장 형식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 쓰였다가 교황 베네딕토 16세 때 바뀌었다.[2] 책에는 PAX TIBI MARCE EVANGELISTA MEUS(평화가 있기를, 나의 복음사가 마르코여)라고 쓰여있다.[3] 바다의 닻과 황금육각성의 상징은 히브리서 6: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4]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교회의 공적이고 공통적인 전례문이 쓰인 전례서이다.[5] 교구 고문(1875년~1884년), 공위 주교좌 부참사회장(1879년~1880년)[6] 로마에 안장되었다.[7] 당시 헝가리인이 슬로바키아인, 루신인, 세르비아인 등 헝가리 내 슬라브족을 탄압하여 마자르화하는 것에 맞서 예수회 선교사를 보내 지원하고, 공공연히 헝가리 왕국의 교육정책에 간섭했다.[8] 동로마 제국의 황제 외에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랑스 국왕, 스페인 국왕 등은 콘클라베에서 교황 후보자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국왕 카를 6세 등이 이러한 권리를 주장한 바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공식적으로 거부권을 인정한 적이 없었고, 1562년 비오 4세가 교서를 내려 콘클라베에 대한 세속 권력의 개입 차단을 주장했으나 명문화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가톨릭 국가 군주들의 거부권 행사가 사실상 가능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이후 마지막으로 거부권을 사용하려 했던 인물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였고 그는 조반니 몬티니 추기경의 교황 선출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9] 『교황 사전』176쪽,『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110쪽 참조.[10] 훗날 요한 23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직전인 1958년에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 발현 100주년 기념으로 건축된 성지 내 지하대성당의 봉헌을 주재했는데, 이 성당의 이름은 '성 비오 10세 대성당'이다. 두 사람의 악연을 생각하면, 꽤나 아이러니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