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23:23:48

비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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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교황 문장.svg 가톨릭 교회의 교황
파일:259_pio_XI.png
제258대 베네딕토 15세 제259대 비오 11세 제260대 가경자 비오 12세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제259대 교황
비오 11세
Pius XI
파일:Pius_XI,_by_Nicola_Perscheid_(retouched).jpg
본명 아킬레 암브로조 다미아노 라티
(Achille Ambrogio Damiano Ratti)
출생 1857년 5월 31일
오스트리아 제국 데시오
사망 1939년 2월 10일 (향년 81세)
바티칸 바티칸 시 사도 궁전
재위기간 제259대 교황
1922년 2월 6일 ~ 1939년 2월 10일
서명
파일:비오 1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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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부모 아버지 프란체스코 라티
어머니 테레사 라티
학력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 (신학 / 박사)
문장 파일:교황 비오 11세 문장.svg }}}}}}}}}
1. 개요2. 즉위 이전
2.1. 학구파 사제2.2. 교황청 외교관
3. 재위기간
3.1. 교황선출3.2. 파시즘, 나치즘에 얽힌 문제3.3. 업적
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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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톨릭의 제259대 교황.

2. 즉위 이전

2.1. 학구파 사제

1857년 5월 31일 밀라노에서 견직물 공장장의 아들로 태어난 비오 11세는 1879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철학, 신학, 교회법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로 지내며 고대 및 중세 교회 고문서 연구를 통해 고문서학자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 결과 밀라노 암브로시오 도서관을 거쳐 교황 비오 10세의 초청으로 바티칸 도서관으로 옮겨가 도서관장까지 역임하기에 이른다. 한편으로는 기존의 성직자들과는 달리 스포츠맨으로서 등산 애호가의 모습도 보이기도 했다.

2.2. 교황청 외교관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비오 11세를 교황 순시관으로 임명해 폴란드로 파견했고, 얼마 후에 주폴란드 교황대사로 격상시켰다. 1920년 붉은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바르샤바에서 급히 피신한 타국 외교관들과는 달리 폴란드에 남아 볼셰비키와 대화하려 했으나 불상사가 벌어질 것을 우려한 베네딕토 15세가 그의 러시아행을 막았다. 비오 11세는 볼셰비키와 접촉을 끊지 않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폴란드인들의 반감을 샀고, 오해를 풀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폴란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오 11세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자들과 한 편이 되었던 최초의 교황 특사 중 한 명이었고, 이는 냉전과 독재 시기의 성직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3. 재위기간

3.1. 교황선출

  • 비오 11세의 즉위식 동영상
1922년 1월 22일 베네딕토 15세가 사망한 후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콘클라베에서 1922년 2월 6일 총 14표를 획득하여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3.2. 파시즘, 나치즘에 얽힌 문제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여 비오 9세 이래 반 세기 넘게 문제되었던 교황령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였으나 파시스트를 고발할 권리를 팔아 먹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영국의 신문 가디언이 2013년 1월 21일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바티칸은 어떻게 무솔리니의 수백만의 자금을 이용하여 비밀스러운 부동산 제국을 건설하였나? 라테라노 조약의 대가로 무솔리니에게 현재 시가 5억 파운드에 달하는 현금을 지원받았다는 점이 확인되었으며, 당시 무솔리니에게 받은 돈은 조세포탈을 위한 역외지역에 설립된 지주회사를 통해 관리되었다는 점 역시 영국의 전시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비오 11세는 파시스트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견해를 취했던 사람이다. 1931년에 발표한 회칙 《우리는 원하지 않는다(Non Abbiamo Bisogno)》를 통해 비오 11세는 파시즘과 무솔리니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고, 이 때문에 교황은 사망할 때까지 무솔리니와 불편한 관계를 지속했다. 한편으로는 나치와도 실제로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는데, 1933년~1936년 나치독일에 여러 번 항의문을 보냈고, 1937년 회칙 《깊은 근심과 함께(Mit Breender Sorge)》[1]을 발표해 나치즘을 민족과 인종과 국가 지도자와 같은 세속적 가치를 우상숭배하는 신이교주의라 비판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모든 유혹에 저항하라고 되어 있다.결국 바로 다음날 나치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의 신을 신봉하는 자들'이라는 기사를 냈고 2년 후 비오 12세가 즉위하자 나치 기관지인 《다스 라이히》는 비오 11세와 비오 12세를 한데 묶어서 유대인 교황들이라고 폄하했다.
괴벨스와 히틀러는 그들이 보기에 기독교가 독일 민족에 끼친 악영향 역시 마찬가지로 유대적 영향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괴벨스는 기독교가 독일 민족의 도덕과 태도를 망쳐놓았다고 생각했고, 히틀러에게도 기독교의 영상은 점점 더 그의 총체적인 적의 영상, 즉 유대인과 혼합되어 갔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세계 지배도" 반대하려 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1937년 2월 22일 '교회 문제 회담' 중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했다. 괴벨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오래전 자신의 작품 《미하엘》에서 밝힌 적이 있었다. 히틀러는 계속해서 "기독교 내부의 유대인" 바울이 이 가르침을 "조작하여" 고대 로마를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이 분열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사이비 사제들의 절멸"을 계획했다. 이렇게 종교에 대한 최후 투쟁의 시기가 개막되었으나, 나중에 전쟁 초기에 '휴전 상태'로 접어들었다.
아무튼 1937년 당시 제국종교협약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들도 탄압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반공 노선 때문에 처음에는 나치 정권을 환영했던 가톨릭교회도 나치가 로젠베르크를 통해 계속 교회 내부 사안에 개입하는 데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훗날 교황 비오 12세가 되는 파셀리 로마 교황청 국무장관이 교회와 관련한 특수한 이해관계뿐 아니라 나치의 강권 통치 자체에 대해서 독일 정부와 외교문서를 교환하였다. 평소 이 정권에 그리 비판적이 아니었던 파셀리는 이러한 외교 문서 중 하나에서 교황은 오늘날 독일에서 어느 정도로 자기 결정권이 제한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다면서 이 문제의 시정을 요구했다.
가톨릭 성직자와 관련한 괴벨스와 히틀러의 주요 체험은 1937년 1월 30일 일어났다. 히틀러는 권력 획득 4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내각 내 '비당원'을 입당시키고 이들에게 황금 당원 배지를 수여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교통우편장관 엘츠뤼베나흐의 차례가 되었을 때,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엘츠는 입당을 거부하면서, 나치당이 교회를 탄압하고 있음을 그 이유로 들었고, '총통 각하'의 해명을 요구했다. 모두가 얼어붙은 듯했다. 사람들은 "마비된 것처럼" 서 있었다. 히틀러는 분통을 터뜨리며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고 그 방을 박차고 나갔다. 괴벨스는 곧바로 행동에 돌입했다. 그는 "그러한 심각한 무례함"에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은 장관들을 불러 모아, "우리가 단합하여 엘츠의 해임을 요청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이내 관철시켰다. "이들은 검은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 조국 위에서 더 높은 권력을 지니고 있다. 축복을 독점하는 교회." 어쨌든 내각은 "이렇게 몰래 기어드는 위험"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게 되었나. 그날 저녁 그는 "몹시 격분한" 히틀러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고, 연민에 차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와 같이 선량한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1937년 3월 21일 부활절 직전 일요일 교황 비오 11세는 독일 내 모든 가톨릭 성당의 설교단에서 자신의 교서 《심각한 우려를 품고》를 낭독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들은 설교의 내용은 실제로 매우 적절하게 표현된 것이었다. 이날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교구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했다.
인종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국가 형태나 국가 권력의 담지자나 그밖에 다른 인간 사회의 형성의 기본 가치들(이들은 세속적 질서 내에서 본질적이고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한다)을 그들의 세속적 가치 등급으로부터 떼어내 종교적 가치를 위해서도 최고의 규범으로 삼고 이를 우상 숭배로 떠받드는 자들은 신이 창조하고 명령한 사물의 질서를 전복하고 위조하는 것이다.
《깊은 근심과 함께》 1937년 3월 21일
이러한 발언은 나치즘을 기독교 대신 종교의 위치로 밀어 올리려는 괴벨스에게는 이단의 목소리로 들렸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히틀러가 "예언자", "우상", "메시아"여야 하며, 과거 사도들이 그랬듯이 민족은 그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괴벨스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히틀러를 "기적"과 "징표"와 연관시켰다. 예를 들어 그는 1937년 제국 전당대회 도중 '총통 각하'가 연단에 올라서는 어느 순간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 장면을 관찰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하려고 노력했다. 괴벨스는 개인적으로 전당 대회를 "장엄 미사"로 느꼈는데, "거의 종교적 제식"인 돌격대 사열이 이를 "무한히 신비로운 마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기독교의 신이 있는 성당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나치의 신에게 올리는 미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괴벨스가 상황 악화를 원하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로부터 3월 20일 저녁 늦게 교황 교서의 내용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이러한 '도발'에 대해 '분노와 원한'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한때 기독교의 신을 독실하게 신봉했던 괴벨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행사하는 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벨스는 하이드리히에게 "이를 무시하고 죽은 듯이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체포 조치 대신 "경제적 압력"으로 대응해야 했으며, 비오 11세의 교서를 인쇄한 모든 성당 관보들은 압수, 정간 처분을 받았다. 그외에 괴벨스는 "침착성을 잃지 말고, 그 도발자들을 해치울 수 있는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라는 모토에 충실했다.
히틀러에게는 다음날까지 이 소식을 전달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이 일 때문에 밤새 노여워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히틀러는 처음에는 마찬가지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괴벨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술적 이유'에서 교회 탈퇴를 금지했던 히틀러는 일단 '침묵' 전술을 승인했으나, 점점 "과격화"되어 갔다. 3월 2일 괴벨스는 사제들이 "참을성과 관대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히틀러는 "이제 바티칸을 치기를" 원한다고 적었다. 그 '사제들'은 "우리의 준엄함, 강경함, 무자비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541~544p
1938년 나치의 인종차별 정책이 이탈리아에 도입된 뒤, 파시스트 이탈리아와도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여담으로, 비오 11세의 주치의가 프란치스코 페타치인데, 주치의의 딸인 클라라 페타치베니토 무솔리니와 내연관계였다.

3.3. 업적

나치 독일 내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국종교협약을 맺었고 노동자 권익보호 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레오 13세가 반포한 회칙 '새로운 사태' 40주년을 맞이하여 발표한 회칙 '40주년'은 노동 운동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나아갈 바에 대해 이정표를 제공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때 노동자들의 성인으로 여겨진 사람은 성모 마리아의 남편인 나자렛의 성 요셉이었다. 후임 교황 비오 12세 대에 이르러 노동절5월 1일이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지정된다. 또한 성심수녀회 창설자인 복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를 시성했다.

한국순교자 79위를 시복한 교황이기도 하다. 또한 전주교구광주대교구를 설정했다.

파스칼리나 레네르트와도 인연이 있는 교황이다. 어느 날 비오 11세가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에 신학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파스칼리나 수녀가 당시 추기경이자 자신의 직속 상관이던 비오 12세를 통해 연설문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를 한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비오 11세는 문제의 연설문을 수정한 뒤 파스칼리나 수녀를 불러 크게 칭찬하면서 앞으로 비오 12세를 많이 도와주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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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시신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있는 비오 11세의 무덤
1938년 11월 25일에만 2차례나 심장마비를 겪은 교황은 급속도로 쇠약해졌으며, 결국 1939년 2월 10일 "내 영혼은 평온하게 여러분 곁을 떠납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1] 전통적인 라틴어로 된 회칙이 아니라, 독일어로 발행되어 모든 교구의 성당에서 낭독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