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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비오 10세회 설립자 겸 초대 총장 | |||
가톨릭 대주교 마르셀 르페브르 Marcel Lefebvre | |||
<colbgcolor=#eee8aa><colcolor=#1f2023> 본명 | 마르셀 프랑수아 마리 조셉 르페브르 Marcel François Marie Joseph Lefebvre | ||
세례명 | 마르첼로(Marcellus)[1] | ||
출생 | 1905년 11월 29일 | ||
프랑스 제3공화국 투르쿠앙 | |||
사망 | 1991년 3월 25일 (향년 85세) | ||
스위스 마르티뉘 | |||
묘소 | 스위스 에코네 성 비오 10세 국제 신학교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
재임기간 | 유로파의 아르카디오폴리스 대주교 | ||
1948년 9월 22일 ~ 1955년 9월 14일 | |||
초대 다카르 대교구 대주교 | |||
1955년 9월 14일[2] ~ 1962년 1월 23일 | |||
튈 교구 대주교 | |||
1962년 1월 23일 ~ 1962년 8월 7일 | |||
제18대 성신신부회 총장 | |||
1962년 8월 7일 ~ 1968년 10월 26일 | |||
초대 성 비오 10세회 총장 | |||
1970년 11월 1일 ~ 1982년 | |||
부모 | 아버지 르네 르페브르 어머니 가브리엘 르페브르[3] | ||
형제자매 | 8남매 중 3남 | ||
학력 | 프랑스 신학교 | ||
직업 | 사제 | ||
종교 | 가톨릭 (전통주의 가톨릭) | ||
소속 | 성 비오 10세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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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대주교이자 성 비오 10세회의 창립자이다.가톨릭 교회와 관련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교리 및 그가 설립한 성 비오 10세회와 관련해서 그렇다. 그에 대해 평가는 상반적인데, 긍정적인 평가[5]도 있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있고 양면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2. 생애
[vimeo(108758966)]2.1. 초창기 생애
프랑스 릴 시 근처에 있는 투르쿠앙에서 공장주인 아버지 르네 르페브르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가브리엘 르페브르[6]의 8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친의 집안인 르페브르 집안과 봐띤 집안 모두 공장을 소유하고 경영하는 자본가 집안이었다. 양친의 집안 사람들 모두가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마르셀의 양친인 르네 르페브르와 가브리엘 르페브르는 결혼 전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이었다.아버지인 르네 르페브르는 공장주이자 군주주의자였고 또한 프랑스 애국자였다. 공장주로서는 계급투쟁을 조장하는 노동조합에 부정적이어서, 대신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이나 자선단체 활동을 장려했다. 왕정복고주의자로서는 프랑스 혁명의 유산인 공화정, 정교분리, 세속 공립교육 등에 반대했으며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투르쿠앙 시의회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프랑스 애국자로서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때 추축국 점령지에서 첩보활동을 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때 첩보활동 중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4년 독일 존넨부르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어머니는 가정주부이면서 남편의 사업을 도왔으며, 가톨릭 단체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성 빈첸시오회 신심단체와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가브리엘 르페브르는 병으로 1938년 사망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인 마르셀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미사를 되도록 매일 가도록 권했으며 학교도 공립학교가 아닌 가톨릭 학교를 다니도록 했다. 자녀들도 이런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아서 마르셀과 르네[7] 2명의 아들이 사제가 되었으며, 3명의 딸이 수녀가 되었다.
사진에서 맨 왼쪽이 어렸을 적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이다.
마르셀은 그 당시 가톨릭 가정의 자녀들이 그렇듯이 출생 직후 유아세례를 받았다. 영성체는 교황 성 비오 10세의 영성체 관련 개혁의 혜택을 입어서 만 6살인 1911년 말에 첫 영성체를 했다.
2.2. 신학생 시절
마르셀도 독실한 가정의 영향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중등학교인 성심학교에 다니던 청소년기에 이미 성소의 마음을 품고 있던 그는, 먼저 사제의 길을 걷고 있던 형 르네 르페브르의 권고로 사제의 길을 걷기로 한 마음을 굳힌다.마르셀은 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성신신부회(Holy Ghost Fathers)에서 설립한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에 입학한다. 교구 신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에 입학한 이유는, 아버지와 형의 영향 및 자신의 소망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교구 신학교가 자유주의에 물들고 있다고 생각해 입학에 반대했고, 형인 르네도 이미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에 재학중이었다. 여기에 선교사제로 일하고 싶다는 마르셀 본인의 소망이 더해져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성신신부회(Holy Ghost Fathers)는 1700년 클로드프랑수아 풀라르 데 플라스(Claude-Francois Poullart des Places)에 의해 설립된 사제단이다. 설립 초기부터 신학교를 운영하여 18세기에 이미 뛰어난 선교사제를 여럿 배출해내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침체에 빠졌다.
침체에 빠진 단체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가경자 프랑수아 리베르만[8] 신부였다. 리베르만 신부는 아프리카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가 1848년 기존의 성신신부회와 통합하여 성신신부회는 다시 활력을 찾았다. 그리고 재설립되다시피 한 성신신부회는 1853년 교황 비오 9세의 호소로 로마에 프랑스 신학교를 설립한다.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 역시 이전의 성신신부회 신학교처럼 뛰어난 선교사제를 여럿 배출해내었다.
신학교에서 마르셀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을 특히 좋아했다. 가톨릭 신학교 과정 자체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았고 모든 신학생들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부해야 했지만, 신학생 마르셀은 "천사와도 같은 박사"의 저작을 특히 좋아하여 즐겨 읽었다.
마르셀 르페브르는 이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의 당시 학장인 앙리 르 플로슈 사제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전통적 신앙관을 가지게 되었다. 앙리 르 플로슈 사제는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기원한 혁명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에 확고하게 반대한 사람으로서 신학생들에게도 혁명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경각심을 갖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1927년 마르셀의 군 복무 도중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çaise) 사건에 휘말려 신학교 학장직을 사임했다. 그런 가운데 마르셀 르페브르는 학업을 계속하여 1929년 4월에 부제 서품을 받고, 9월에 드디어 사제 서품을 받게 된다.
2.3. 마레드롬 본당의 보좌신부
사제서품을 받은 후 프랑스 릴 시 부근 마레시의 마레드롬(Marais de Lomme) 본당의 보좌신부로서 2년간 사목했다. 마레드롬 본당의 관할지에는 노동자들이 많이 살았다. 그는 다른 사목 활동과 함께 노동자와 빈자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상담하는 일을 했다.어쨌든 그는 프랑스에서 사목 중에도 해외 국가로 선교하러 갈 뜻을 품고 있었다. 형이자 앞서 사제가 된 르네 르페브르는 이미 아프리카 가봉에서 선교사제로 사목중이었고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 아프리카 선교사제의 길을 종용했다. 마르셀 르페브르 본인도 신학생 시절과 교구 본당 사목 중에 교구에 계속 선교사제로 보내달라 요청했다.
마침내 1931년 르페브르는 마레드롬 본당을 떠나도 좋다는 허가를 받는다. 그는 선교사제가 되기 위해서 곧 성신신부회에 입회한다. 성신신부회에서 1년여의 수련생활을 마친 마르셀 르페브르는 선교사제가 되어 1932년 가봉으로 파송됐다.
2.4. 아프리카의 선교사제와 주교성성
1932년에 마르셀 르페브르는 가톨릭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 가봉에 파송되었다. 리브르빌에 있는 성 요한 신학교의 교수로 일했고, 얼마 후엔 총장이 되었다. 교구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로 잠시 돌아가 신학교 교수로 일하기도 했지만, 이내 1947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하여 세네갈 다카르 대목구의 주교로 성성된다. 그리고 다음해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하여 프랑스령 아프리카의 교황 사절로 임명과 대주교로의 성성이 결정된다. 프랑스령 아프리카 전역에서 교황을 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2.5. 튈의 교구장과 성신신부회 총장
1962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하여 프랑스 튈(Tulle) 교구의 교구장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에 성신신부회 총장에 피선되어 몇달 만에 교구장직을 그만두었다. 성신신부회 총장에 피선된 같은 해에 프랑스어권 아프리카를 대표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중앙준비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2.6.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둘러싼 갈등과 성 비오 10세회 창립
교황 비오 12세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 교황 요한 23세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 바쳐, 가톨릭 신앙과 그 신앙의 보전에 반드시 필요한 성전(聖傳)의 수호자인 가톨릭 로마, 지혜와 진리의 여왕인 영원한 로마를 고수한다. 바로 이 충실한 지지 때문에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과 그 공의회 이후에 공의회에서 유래하는 모든 변혁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들을 거부함이요, 언제나 거부해 왔다. 그것은 신 현대주의(neo-Modernist)와 신 개신교주의(neo-Protestant)의 사조이다.[11]
1974년 그가 세운 성 비오 10세 신학교는 교황청의 시찰을 받게 되었다. 시찰자로는 2명의 사제가 파견되었다. 이때 시찰차 온 사제들은 르페브르 대주교와 신학생들에게 말도 안되는 주장들을 일삼았는데, 대표적으로 가톨릭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발언 등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이는 해당 사제의 자질을 의심해야 될 수준으로, 이런 행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도 아니며, 그 주장 자체로 이단이다. 그외에도 시찰기간 내내 미사에 한 번도 참례하지 않거나 교회 전통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행각을 여러 번 벌였다. 결국 일련의 사태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를 격분시켰다. 자신이 지켜온 가톨릭 전통이 부정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찰 직후인 1974년 11월 21일에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현대주의, 개신교주의, 자유주의에 물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이에 따른 교황청 노선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12]1974년 11월 21일 선언이라고 불리는 이 선언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다. 폐막된 지 얼마 안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에 대한 정면 부정이자, 일개 주교의 교황에 대한 불순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선언 직후 교황청에서는 "성 비오 10세회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성 비오 10세회는 활동을 계속했다.
성 비오 10세회를 이끌면서, 그는 가톨릭의 전통 전례와 전통 교리를 계속해서 고수하고 피력했다. 이에 따라 교황청과의 갈등도 불거졌다. 성 비오 10세회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아담 샤리에르 프리부르 교구장 주교의 후임 교구장 주교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지지를 받으면서 성 비오 10세회의 인가 취소와 해체를 주장했다. 바오로 6세는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하고 추기경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이름을 거론하며 대주교를 비판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개혁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으나 대주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집전한 성 비오 10세회 사제 서품식
1976년 6월 29일,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교황청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 동시에 교황청에서는 대주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개혁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사제 서품을 강행하였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서임권을 박탈해 합법적인 사제 서품권을 박탈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교황청 주교성 장관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교황에게 사죄해 용서를 받으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교황청에서는 그의 성무집행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해 그의 합법적 성무집행권을 박탈한다.
프랑스 릴에서의 미사에는 무려 1만여명이 참례했다
그러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무집행권 박탈 처분을 받음으로써 합법적 성무집행권을 박탈당했음에도 성사들을 계속 집전했다. 한편, 교황청과 대주교간의 마찰이 계속될수록 그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교황청의 성무 집행 정지 처분 이후 프랑스 릴을 방문하여 트리엔트 미사를 드릴 때에는 무려 1만여명의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했다. 이 미사의 강론에서도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개혁에는 문제점이 많으며 자신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릴에서의 미사 이후에도 유럽과 미국 곳곳에서 트리엔트 미사를 드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참관인이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혁의 지지자인 철학자 장 기통도 바오로 6세에게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타협할 것을 요청했다. 바오로 6세와 사적인 친분을 맺고 있던 당시 이탈리아 키에티(Chieti) 대교구장 대주교는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교황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양측이 화해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릴에서의 미사 이후 주변 지인들의 설득과 중재로 바오로 6세는 1976년 9월 11일 그의 알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 합의를 도출하는데는 실패했다. 바오로 6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잘 알겠으며, 기도와 함께 생각해보겠다"고 답했으나, 심사숙고한 뒤 생각을 바꿔 지인인 프랑스인 가톨릭 철학자이자 친구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참관인이었던 장 기통[13]에게 자신이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요청을 거부할 것을 설명하면서 "트리엔트 미사의 자유는 공의회에 대한 평가절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바오로 6세의 판단에도 일리가 있다. 당시에는 새 로마 미사 경본(바오로 6세 미사)의 도입이 채 5년도 안된 시점이었는데, 여기서 성 비오 10세회의 새미사 배격과 트리엔트 미사만 고집하는 행태를 교황이 인정해버린다면 이들은 교황청의 인정과 르페브르 대주교의 카리스마를 등에 업고 신자들을 계속 끌어모으며 새 미사에 가지 말라고 끊임없이 주장하면서 새 전례를 배격하는 행보를 더욱 가속화했을 것이고, 결국에는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새 전례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착을 지속적으로 거부하며 몸집을 크게 불린 뒤 교황청과 다시 충돌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또다른 거대한 교회 분열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1. 공의회 및 새 미사의 유효성과 권위를 르페브르 대주교가 인정하는 조건으로 전통 가톨릭의 합법적 활동을 허용하던지[14] 아니면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체를 물리던지 둘 중 하나인데, 여기서의 선택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세계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적으로 무오류하며, 르페브르 대주교는 가톨릭 무류성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이를 인정해줄 수는 없었다.
알현 뒤 그의 요구를 거부한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를 다시금 견책한 것도 그의 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교도권에 대한 불순명이 계속되는데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확고한 전통 가톨릭 경향에 공감하는 추기경들이 콘클라베에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추기경도 아닌데!)[15]에게 소수지만 표를 던지는 일도 있었다. 1978년에 선출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선출된지 2달 후에 그의 알현을 받고 이야기를 해봤지만, 긍정적인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교황청 노선을 거부함으로서 교황청과 계속 갈등을 빚는 와중에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매년 바티칸을 방문했다. 대주교 자신과 성 비오 10세회가 교황과 교황청을 인정하며, 교황과 교황청으로부터 자신과 성 비오 10세회가 승인받길 원한다는 표현이었다. 동시에 교회 위기의 최종적 해결책은 교황과 교황청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대주교 본인 생각의 표현이기도 했다.
2.7. 주교성성과 파문
1987년 만 82세로 연로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자신의 후임으로 세울 주교를 성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또 다시 논쟁을 불러왔는데, 주교 성성을 받기 위해서는 교황의 허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파국을 피하기 위하여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성 비오 10세회와 협상에 들어갔다.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청 측 협상자로 선임되어 후임 주교 성성 문제, 교리 문제, 전례 문제 등에 대하여 성 비오 10세회와 협상을 시작했다. 동시에 교황청에서는 추기경 2명을 파견하여 성 비오 10세회의 각급 기관들을 시찰했다. 이 때의 협상 끝에 합의가 도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성 비오 10세회 측에서는 자신들이 추천한 사제들 중 1명을 교황의 동의를 얻어 주교로 성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황청 측에서 주교 성성 허락을 자꾸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자, 참다못한 르페브르 대주교는 "아니 그럼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인가!"라면서 교황청 측에서 애초에 주교 성성을 허용할 의사가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윽고 그는 자신을 지지한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16]가 참석한 가운데 1988년 6월 30일, 교황의 허락 없이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마예레, 리처드 윌리엄슨, 알폰소 데 갈라레타 4명의 사제를 주교로 성성하였다.[17] 뒤이어 교황은 그와 그가 서품한 4명의 주교와 주교 성성식에 참석한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 총 6명을 모두 파문했다. 이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7월 2일 자의 교서 《하느님의 교회》(Ecclesia Dei)에서 르페브르의 주교 서임식을 비판하면서, 이는 가톨릭교회를 분열시키는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명백히 파문에 처한다는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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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의 자의교서하느님의 교회(Ecclesia Dei)}}}
1. 하느님의 교회는 커다란 고통을 안고 불법적인 주교 서품이 지난 6원 30일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그 자신이 세운 성 비오 10세 사제 형제회가 교회와 더불어 완전한 친교를 이루고자 하였던 지난 수년 동안의 온갖 노력을 좌절시키고 말았다. 사도좌가 가능한 한 최대한의 포용력을 보여 왔던 이러한 노력은 특히 최근 수개월 동안 강도높게 이루어졌으나, 결국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고 만 것이다.1)[1)]
2. 이 고통은 그 누구보다도 교회의 일치를 수호하여야 할 베드로의 후계자가2)[2)] 통절하게 느끼고 있다. 비록 이 사건에 직접 연루된 자들의 숫자가 소수에 불과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그 나름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르페브르 대주교의 행동이 가져온 이 특정한 사건은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반성은 물론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새로운 충성 서약의 계기가 되고 있다.
3. 이 행동은 그 자체로 극히 중대한 문제에 있어서 로마 교황에 대한 하나의 불순종이었다. 사도적 계승을 성사적으로 영속화시키는 주교 서품은 교회의 일치에 있어서 최대의 중요성을 지닌 문제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순종은, 실제로 로마의 수위권에 대한 배척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의 “이교적”(離敎的) 행위이다.3)[3)] 지난 6월 17일 주교성 장관 추기경이 보낸 공식적인 “교회법적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동을 함으로써, 르페브르 대주교와 베르나르 펠레, 베르나르 티씨에 드 말레레, 리차드 윌리엄슨, 알퐁소 데 갈라레타 신부들은 교회법이 정한 파문의 중벌을 당하였다.4)[4)]
4. 이러한 이교적 행동의 근원은 전통에 대한 불완전하고도 모순된 개념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전통의 살아있는 특성을 충분하게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명확하게 가르쳤던 바와 같이, “사도들로부터 받은 이 성전(聖傳)은 성신의 도우심으로 교회 안에서 발전한다. 사실 전해진 사실이나 말에 관해서는 그것을 자기 마음에 간직한 믿는 이들의 관상과 연구에 의해서, 혹은 그들이 체험하는 영적 사실들에 대한 깊은 이해에 의해서, 또는 주교의 직위를 계승하여 진리의 확실한 은사를 받은 이들의 설교에 의해서 그 이해가 깊어진다.”5)[5)]
그러나 특별히 로마의 주교와 주교단이 지닌 교회의 보편적 교도권을 반대하는 전통의 개념은 모순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베드로 사도의 인격 안에서 당신 교회의 일치의 직무를 맡기신 로마 주교와의 교회적 결속을 깨뜨리면서 전통에 충실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6)[6)]
5. 본인은 이미 일어난 상황에 직면하여 이 슬픈 사건으로 부각된 일부 측면을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본인의 의무라고 여기는 바이다.
가) 르페브르 대주교가 추진한 운동의 결과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전통, 즉 통상적이든 예외적이든 교회의 교도권에 의하여 특별히 니케아 공의회에서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는 세계 공의회에서 정통적으로 해석되어 온 교회의 전통에 대한 자신의 충실성을 진지하게 반성하는 자극제가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반성의 자극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반성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은 교리와 전례와 수행(修行)의 문제에 있어서 그릇된 해석과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적용을 배제함으로써 전통에 대한 충실성을 더욱더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는 한층 새롭고도 유효한 확신을 이끌어내야 한다.
특별히 주교들은 그 사목적 사명으로 인하여 어디서나 이러한 충실성이 수호될 수 있도록 충만한 사랑과 강인함으로 투철한 감독을 하여야 할 중대한 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7)[7)]
그러나 모든 사목자들과 신자들은 합법성에 대한 새로운 각성만이 아니라 은사의 다양성과 영성의 전통 및 사도직의 다양성을 지닌 교회의 부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지녀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부요는 또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아름다움이며, 지상의 교회가 성령의 충동을 받아 하늘로 들어높이는 저 조화된 “화음”의 아름다움이다.
나) 더 나아가, 본인은 신학자들을 비롯 여타 교회 학문의 전문가들이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응답의 촉구를 절감하여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참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이 지닌 그 넓이와 깊이는 더욱 심오한 연구에 대한 새로운 투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한 연구로써 전통에 대한 공의회의 지속성이 특히 교리 문제에 있어서 명확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어떤 교리 문제는 아마도 새로운 문제여서 교회의 일부 영역에서는 아직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 현재의 상황에서 본인은 본인온 지금까지 르페브르 대주교의 운동에 여러 모로 연계되어 왔던 모든 사람들에게 자부적이고 형제적인 정으로 엄중하게 충심으로 호소하고자 한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 운동에 대한 지지를 중단하고, 가톨릭 교회의 일치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와 일치하여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완수하기 바란다. 이교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중대한 범죄이며 교회법으로 정해진 파문의 벌이 따른다는 것을 모든 사람은 명심하여야 한다.8)[8)]
라틴 전통의 전례와 수행에 있어서 이전의 일부 형태에 애착을 느끼는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본인은 그들의 올바른 열망이 존중되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 그들의 교회적 친교를 촉진하려는 본인의 의지를 천명하고자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본인은 주교들의 지지와 교회 사목직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의 지지를 요청하는 바이다.
6. 이 문서가 다루는 문제의 중대성과 복합성을 고려하여, 본인은 본인의 사도적 권한으로 다음과 같이 명한다.
가) 하나의 위원회를 설치한다. 동 위윈회는 주교들과 교황청의 여러 부서와 관계 인사들과 협력하여, 지금까지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하여 설립된 형제회에 여러 모로 연결되어 왔으나, 가톨릭 교회 안에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하여 머물러 있기를 바라면서, 지난 5월 5일 라찡거 추기경과 르페브르 대주교가 서명한 협정서에 비추어 그들의 영성적 전례적 전통을 보전하고자 하는 사제들, 신학생들, 수도 공동체들 또는 개인의 완전한 교회적 친교를 촉진하는 것이 그 임무요 목적이다.
나) 이 위원회는 추기경 위원장과 상황에 따라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숫자의 교황청 위원들로 구성된다.
다) 더 나아가, 1962년 판 로마 미사 경본의 사용에 관하여 이미 얼마 전에 사도좌에서 발표한 지침들을 광범위하고도 관대하게 적용함으로써, 어디서나 라틴 전례의 전통에 애착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존중하여야 한다.9)[9)]
7. 복되신 동정녀께 특별히 봉헌된 성모성년이 이제 끝나가는 때에, 본인은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교회의 어머니의 중재를 통하여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신 성자의 저 말씀으로 성부께 비는 끊임없는 기도에 모든 사람들이 동참하여 주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wiki style="text-align:right"
교황 재위 제10년, 1988년 7월 2일,}}}
{{{#!wiki style="text-align:right"
교황 요한 바오로 2세}}}{{{#!wiki style="text-align:center"
뚤르의 전임 주교요 대주교였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지난 6월 17일의 교회법적 공식 경고와 그의 의도를 철회하라는 거듭된 호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위임 없이 교황의 뜻을 거슬러 4명의 사제를 주교로 축성함으로써 이교적 행위를 자행하였으며, 따라서 교회법 제1364조 1항과 제1382조에 규정된 제재를 초래하였다.
모든 법률적 효력을 감안하여, 본인은 위에 언급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베르나르 펠레, 베르나르 티씨에 드 말레레, 리차드 윌리엄슨, 알퐁소 데 갈라레타 신부는 사도좌에 (사면이) 유보된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았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바이다.
더 나아가, 본인은 캄포스의 전임 주교인 안토니오 데 카스트로 마이에르 주교가, 그 전례 거행에 공동 축성자로서 직접 참여하고 그 이교적 행위를 공공연하게 지지하였으므로, 교회법 제1364조 1항에 규정된 파문 제재를 받았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사제들과 신자들은 르페브르 대주교의 이교를 지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바이다. 이를 어길 경우, 자동 처벌의 파문이라는 중벌을 받을 것이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주교성에서,모든 법률적 효력을 감안하여, 본인은 위에 언급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베르나르 펠레, 베르나르 티씨에 드 말레레, 리차드 윌리엄슨, 알퐁소 데 갈라레타 신부는 사도좌에 (사면이) 유보된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았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바이다.
더 나아가, 본인은 캄포스의 전임 주교인 안토니오 데 카스트로 마이에르 주교가, 그 전례 거행에 공동 축성자로서 직접 참여하고 그 이교적 행위를 공공연하게 지지하였으므로, 교회법 제1364조 1항에 규정된 파문 제재를 받았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사제들과 신자들은 르페브르 대주교의 이교를 지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바이다. 이를 어길 경우, 자동 처벌의 파문이라는 중벌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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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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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성 장관 베르나르디노 강땡 추기경[27]}}}CCK 회보 제48호, 24-25면.
이런 교황청의 결정에 대해서, 르페브르 주교를 비롯한 성 비오 10세회에서는 자신들은 가톨릭의 일원이며, 주교 서품은 전통 가톨릭의 수호와 유지를 위한 것일 뿐, 이교가 되려고 한 건 아니었다면서 파문 결정에 불복했다. 파문 제재 교령의 효력은 2009년 1월 21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철회되었다. '르페브르 대주교가 임명한 주교들의 파문 제재 사면' 교령에는 '이 교령으로 1988년 7월 1일 주교성이 선언한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마예레, 리처드 윌리엄슨, 알폰소 데 갈라레타 주교에 대한 자동 파문 제재를 사면한다. 또한 본인은 오늘 날짜로 당시 발표한 교령이 법적 효력을 상실'한다고 되어있다.
{{{#!wiki style="text-align:center"
[교황청 주교성]}}}{{{#!wiki style="text-align:center"
파문 제재 사면에 관한 교령 (2009년 1월 21일)}}}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1988년에 서품한 네 명의 주교들에게 내려진 파문 제재를 교황 성하께서 사면하신 조치와 관련하여, 교황청 주교성 장관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이 2009년 1월 21일자로 서명한 교령이 발표되었다.]
이 교령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베르나르 펠레이 주교는 1988년 6월 30일 서품된 다른 세 명의 주교를 대표하여 교황청 비오 10세 형제회원 재일치(Ecclesia Dei) 위원회 다리오 카스트리욘 오요스 추기경에게 보낸 2008년 12월 15일 서한에서 1988년 7월 1일 교령으로 공식 선언한 주교성의 자동 파문 제재(excommunicatio latae sententiae)의 철회를 다시 한 번 요청하였다. 이 서한에서 펠레이 주교는 다른 사항과 더불어 “우리는 계속 가톨릭 신자로 머물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 로마 가톨릭 교회에 우리의 온 힘을 기울여 봉사하겠다는 굳은 다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자녀다운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수위권과 그 특권을 굳게 믿고 있으며, 그러기에 현재의 상황이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이 되고 있습니다.”라고 천명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는 관련 당사자들이 표명한, 파문 제재에 따른 영적 고통에 대한 아버지다운 연민을 가지시고, 앞에서 말한 서한에서 그들이 사도좌 당국자들과 필요한 토의를 거쳐 현안 문제가 신속하고 온전하며 만족스럽게 해결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약속을 신뢰하시면서,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마예레, 리처드 윌리엄슨, 알폰소 데 갈라레타의 주교 서품에 따른 교회법적 지위를 재고하도록 결정하셨다.
이 조치로 상호 신뢰 관계가 공고해지고 비오 10세회와 사도좌의 관계가 강화되고 견고하게 되기를 바란다. 크리스마스 축제 끝에 찾아온 이 평화의 선물이 보편 교회의 사랑의 일치를 촉진하고 분열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표지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비오 10세회 전체가 교회와 온전한 일치를 신속히 이루어 가시적인 일치의 표징인 교황의 권위와 교도권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진정으로 충성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를 바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 명시적으로 부여하신 권한에 따라 본인은 이 교령으로 1988년 7월 1일 주교성이 선언한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마예레, 리처드 윌리엄슨, 알폰소 데 갈라레타 주교에 대한 자동 파문 제재를 사면한다. 또한 본인은 오늘 날짜로 당시 발표한 교령이 법적 효력을 상실하였음을 선언한다.
{{{#!wiki style="text-align:right"
장관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
<원문 Congregation for Bishops, Decree Remitting the Excommunication ?atae Sententiae?of the Bishops of the Society of St. Pius X, 2009.1.21.>
2.8. 말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총장직에서 물러난 이후는 물론이고 주교 성성 이후로도 성 비오 10세회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주교 성성 이후에도 사목 활동을 계속했는데 이는 선종 몇 주 전까지 계속되었다. 선종 전 해인 1990년 6월에는 그가 젊었을 적 선교사제로 활동했던 아프리카 가봉을 방문하여 성 비오 10세회 소속 성당을 축성하고 신자들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또한 1987년에는 한국 선교를 지시하여 한국에 사제를 파견했고, 서초구 인근에 성모무염시태성당을 세우고 성 비오 10세회 교구를 만들었다.[28]가봉을 방문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1991년 3월 8일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생전의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후 그는 성전(聖傳) 동호회에 속한 수도회 설립자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타고 파리로 떠났다. 그러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날 새벽 중도에 차를 돌려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 날 오전 그는 스위스 마르티뉘의 병원에 입원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병원 입원 중에 수술을 받을 때까지 성체를 영했다. 종부성사는 3월 11일 받았다.
1991년 3월 25일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스위스 마르티뉘의 병원에서 암으로 선종했다. 향년 86세. 선종한 지 8일만에 장례미사가 봉헌되었고 시신은 스위스 에콘에 있는 성 비오 10세 신학교 지하 묘소에 안장되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장례미사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묘비 |
3. 사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되지 못한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가톨릭 신자인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인즉, 교회가 항상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느님, 또 다른 진리, 또 다른 구원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계실 뿐이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이며 기초인 동시에 목표이고, 언젠가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생활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영광스러운 관을 쓰게 되는 것도 그것을 통해서이다. 한마디로 지상에서건 천국에서건 오직 하나이신 우리 기쁨, 예수 그리스도밖에 아니 계신 것이다. 확신하건대, 이 진리를 단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이해하리라. 우리가 아닌 예수님이 직접 당신의 은총을 받기에 적당한 방법을 골라 주셨다. 당신이 택하신 수단은 십자가인즉, 지상의 우리 제대 위에서도 십자가 및 십자가상에서의 당신 희생이 계속되도록 정하셨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갈바리아[29]가 계속되는 곳은 우리 제대 위 말고는 어느 곳에도 없다.[30]
지지자들에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리와 전례를 지키려는 전통 가톨릭 경향의 정초를 놓았다는 평을 듣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리와 전례 보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교리와 전례에 있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교회일치주의와 새 미사 등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 6세의 새 미사 의무화에 강하게 저항하였다. 그는 가톨릭을 유일한 참 종교라고 생각했으며, 새 미사는 유효한 미사이긴 하되 흠결이 있는 미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교회일치주의나 종교간 대화는 잘못된 것이고 트리엔트 미사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에게까지 새 미사를 의무화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평생 가톨릭의 교리와 전례에 있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전통을 지키려고 강하게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수많은 충돌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트리엔트 미사와 관련해서 그렇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제한적으로 트리엔트 미사를 허용한 조치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대폭 트리엔트 미사를 허용한 조치는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영향을 받은 전통 가톨릭 신자들을 의식해서 취해진 조치이다. 참고로 현재까지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는 단체들 중 가장 규모 있는 단체는 그가 세운 성 비오 10세회라고 한다.
그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성 비오 10세회의 성향과 최근 행보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고하자.
4. 비판
4.1. 교리의 측면에서
제2차 바티깐공의회의 개혁지침에 반기를 들고 복고주의 노선을 고집해 온 프랑스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82)가 지난 6월 3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마지막 요청을 무시한 채 4명의 주교를 서품함으로써 지난 1세기만에 가톨릭교회의 분열을 가져오는 파문을 당했다. <관련기사4면>
현행 교회법에 따르면 교황청의 승인 없이 어느 주교든지 임의대로 주교서품식을 거행할 수 없으며 이를 어길 경우 양측 모두 자동적으로 파문된다.
이로써 르페브르 대주교 뿐 아니라 서품 받은 4명의 주교도 자동적으로 파문을 당했다. 그런데 르페브르 대주교는 지난 76년 교황 바오로 6세로 부터 성무집행을 정지당한바 있다.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주교서품식 라루전인 6월 29일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주교서품식을 갖지 말 것을 마지막으로 호소했으나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를 무시했다.
복구주의를 고수해오고 있는「성 비오 10세 사제회」에 의해 운영되는 스위스「에콘」신학교에서 지난 6월 30일 거행된 주교서품식에는 7천여 추종자들이 참석했다.
한편 로마 교황청은 르페브르 대주교 파문과 관련, 코뮤니케를 발표하고 교회법 1013조를 인용, 어떤 주교도 사전에 교황의 위임을 받지 않고 주교를 서품하는 것은 합법적이 아니라는 입장을 명백히 했다.
6월 17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6월 30일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이루어진 주교서품은 명백하게 교황의 뜻을 거역한 것이라고 밝힌 교황청은 특히 교황성하께 대한 불복종과 그에 속한 교회구성원들과의 일치를 공개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교회법 751조 규정에 의한 분열행위를 정식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황청은 이에 따라 르페브르 대주교나 그에 의해 서품된 주교 모두 자동적으로 파문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에 앞서 진리와 교회의 전통에서 떠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티깐의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편지를 주교들에게 보냈다.
교황청은 르페브르 대주교의 추종자들에게 주교서품식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 일치된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요청했었다.
또 교황청은 화합을 모색키 위해 르페브르 대주교가 요구해온「성 비오 10세 사제회」의 신학교를 인정하는 화합방안을 세부적으로 검토해왔는데 르페브르 대주교는 처음으로 그 계획안에 동의했으나 그 후 이의를 제기해왔다고 밝혔다.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6월 9일자 서한을 통해 주교서품식을 거행 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이 서한에서 교황은『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그러나 단호하게 그대의 행위가 교회분열을 조장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주교서품계획을 포기할 것을 요구 한다』며『그대가 주교서품으로 인한 교회법적인 결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진심으로 겸손 되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순종할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르페브르대주교는 18년 전「성 비오 10세 사제회」를 결성한 후 지금까지 2백 60여명의 사제를 서품해왔으며 스위스「에콘」신학교를 비롯 프랑스 서독 이태리 미국 아르헨티나등지에 5개 신학교를 세워 2백여명의 신학생을 양성해왔다.
교황청 금지불구, 주교 4명 서품한 불 르페브르 대주교 파문
현행 교회법에 따르면 교황청의 승인 없이 어느 주교든지 임의대로 주교서품식을 거행할 수 없으며 이를 어길 경우 양측 모두 자동적으로 파문된다.
이로써 르페브르 대주교 뿐 아니라 서품 받은 4명의 주교도 자동적으로 파문을 당했다. 그런데 르페브르 대주교는 지난 76년 교황 바오로 6세로 부터 성무집행을 정지당한바 있다.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주교서품식 라루전인 6월 29일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주교서품식을 갖지 말 것을 마지막으로 호소했으나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를 무시했다.
복구주의를 고수해오고 있는「성 비오 10세 사제회」에 의해 운영되는 스위스「에콘」신학교에서 지난 6월 30일 거행된 주교서품식에는 7천여 추종자들이 참석했다.
한편 로마 교황청은 르페브르 대주교 파문과 관련, 코뮤니케를 발표하고 교회법 1013조를 인용, 어떤 주교도 사전에 교황의 위임을 받지 않고 주교를 서품하는 것은 합법적이 아니라는 입장을 명백히 했다.
6월 17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6월 30일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이루어진 주교서품은 명백하게 교황의 뜻을 거역한 것이라고 밝힌 교황청은 특히 교황성하께 대한 불복종과 그에 속한 교회구성원들과의 일치를 공개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교회법 751조 규정에 의한 분열행위를 정식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황청은 이에 따라 르페브르 대주교나 그에 의해 서품된 주교 모두 자동적으로 파문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에 앞서 진리와 교회의 전통에서 떠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바티깐의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편지를 주교들에게 보냈다.
교황청은 르페브르 대주교의 추종자들에게 주교서품식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과 일치된 모습으로 남아있기를 요청했었다.
또 교황청은 화합을 모색키 위해 르페브르 대주교가 요구해온「성 비오 10세 사제회」의 신학교를 인정하는 화합방안을 세부적으로 검토해왔는데 르페브르 대주교는 처음으로 그 계획안에 동의했으나 그 후 이의를 제기해왔다고 밝혔다.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6월 9일자 서한을 통해 주교서품식을 거행 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이 서한에서 교황은『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그러나 단호하게 그대의 행위가 교회분열을 조장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주교서품계획을 포기할 것을 요구 한다』며『그대가 주교서품으로 인한 교회법적인 결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진심으로 겸손 되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순종할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르페브르대주교는 18년 전「성 비오 10세 사제회」를 결성한 후 지금까지 2백 60여명의 사제를 서품해왔으며 스위스「에콘」신학교를 비롯 프랑스 서독 이태리 미국 아르헨티나등지에 5개 신학교를 세워 2백여명의 신학생을 양성해왔다.
교황청 금지불구, 주교 4명 서품한 불 르페브르 대주교 파문
다음은 성청과 르페브르 대주교와의 마찰을 일으켜온 일지를 종합해본 것이다.
▲1974년 11월 11~13일 교황 바오로 6세의 요청으로 성청 성서위원회 알베르트 데스 캠프 주교와 교회법개정위원회 귈라우메온클린 몬시뇰이 스위스「에콘」신학교를 방문함.
▲1975년 6월 피에르 마미 주교가「에콘」신학교에 대해 교회법으로서의 승인을 거부함. ▲1975년 6월 10일 교회의 최고법정인 대심원은 신학교의 승인여부에 대한 판결을 해줄 것을 호소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요청을 거절했다.
▲1976년 5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게『르페브르 대주교의 운동은 교회 내에 커다란 상처를 가져오는 것임을 인식, 교황청에 순종할 것』을 호소.
▲1976년 6월 29일 르페브르대주교는 불법적으로「에콘」에서 13명의 사제와 13명의 차부제서품식을 거행.
▲1976년 7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모든 사제직으로서의 권한을 정지시킴.
▲1976년 8월 29일 교황의 명령에 도전, 르페브르 대주교는 프랑스「릴」스포츠광장에서 6천여명의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미사를 봉헌.
▲1976년 10월 11일 15페이지에 달하는 라틴어서한에서 교황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왜곡된 교회론을 채택, 교회에 반항하기 시작했다』고 비난.
▲1977년 5월 13일 르페브르 대주교 측근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2명의 바티깐신학자들과 신앙교리성 고문과 며칠간의 회담을 끝냈다고 발표.
▲1977년 7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칼라너 신부는 한 인터뷰에서『르페브르 대주교의 파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사건은 교회내의 분열을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추측한다』고 언급.
▲1979년 1월 10일 신앙교리 성장관 프란조 세퍼 추기경과의 만남 후 르페브르 대주교는 화합을 목표로 한 이번 회담의 결과는 낙관적이라고 발표했다.
▲1979년 9월 11일 바티칸대변인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그의 직무를 정지시켰던 문제점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합의를 보았다는 보도를 부인.
▲1979년 12월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칸에서 세퍼 추기경과 남몰래 만났으나 바티칸은 언급을 회피했다. 그러나 르페브르 대주교와 밀접한 소식통은 성청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고 전함.
▲1982년 6월 24일 現신앙교리 성장관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은 르페브르 대주교의 직무정지를 다시 확인.
▲1983년 6월 29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 비오 10세 사제회」총장직을 사임, 후임에 고위 장상인 프란츠 쉬미드베르거 신부를 임명.
▲1987년 1월 르페브르 대주교는 2차 바티칸공의회의 종교자유선언에 관한 자신의 보수적 지침의 설명을 담은 1백 50페이지의 문서를 바티칸에 전달.
▲1987년 6월 14일 르페브르 대주교와 라칭거 추기경은 바티칸에서 1시간 이상 회담을 갖고 개방과 상호대화의 분위기를 언급한 합동성명서를 발표.
▲1987년 10월 2일 르페브르대주교는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미사와 성찬예식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사제회를 인정하는 바티칸의 화해방안에 동의했다고 발표.
▲1987년 10월 17일 바티칸은 르페브르대주교가「사제회」를 심사하기위해 바티칸에서 임명한 방문객 명단에 공식적으로 동의했다고 발표.
▲1988년 2월 르페브르 대주교는 몇몇 문제점에 대해 거의 합의를 봤지만 그 일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경우 교황청의 승인 없이 주교를 임명할 것이라고 위협.
▲1988년 4월 8일 라칭거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와의 재결합을 위한 노력을 격려.
▲1988년 5월 23일 바티칸은 르페브르 대주교와 부분적인 일치를 본 것도 없다고 발표.
▲1988년 6월 15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칸과의 화해를 위한 노력이 실패로 끝났으며 자신은 6월 30일 예정대로 주교 서품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발표. 바티깐대변인은 그 같은 결정은 교회법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
교황청과 르페브르 대주교와의 논쟁 일지
▲1974년 11월 11~13일 교황 바오로 6세의 요청으로 성청 성서위원회 알베르트 데스 캠프 주교와 교회법개정위원회 귈라우메온클린 몬시뇰이 스위스「에콘」신학교를 방문함.
▲1975년 6월 피에르 마미 주교가「에콘」신학교에 대해 교회법으로서의 승인을 거부함. ▲1975년 6월 10일 교회의 최고법정인 대심원은 신학교의 승인여부에 대한 판결을 해줄 것을 호소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요청을 거절했다.
▲1976년 5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게『르페브르 대주교의 운동은 교회 내에 커다란 상처를 가져오는 것임을 인식, 교황청에 순종할 것』을 호소.
▲1976년 6월 29일 르페브르대주교는 불법적으로「에콘」에서 13명의 사제와 13명의 차부제서품식을 거행.
▲1976년 7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모든 사제직으로서의 권한을 정지시킴.
▲1976년 8월 29일 교황의 명령에 도전, 르페브르 대주교는 프랑스「릴」스포츠광장에서 6천여명의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 미사를 봉헌.
▲1976년 10월 11일 15페이지에 달하는 라틴어서한에서 교황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왜곡된 교회론을 채택, 교회에 반항하기 시작했다』고 비난.
▲1977년 5월 13일 르페브르 대주교 측근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2명의 바티깐신학자들과 신앙교리성 고문과 며칠간의 회담을 끝냈다고 발표.
▲1977년 7월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칼라너 신부는 한 인터뷰에서『르페브르 대주교의 파문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사건은 교회내의 분열을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추측한다』고 언급.
▲1979년 1월 10일 신앙교리 성장관 프란조 세퍼 추기경과의 만남 후 르페브르 대주교는 화합을 목표로 한 이번 회담의 결과는 낙관적이라고 발표했다.
▲1979년 9월 11일 바티칸대변인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그의 직무를 정지시켰던 문제점에 대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합의를 보았다는 보도를 부인.
▲1979년 12월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칸에서 세퍼 추기경과 남몰래 만났으나 바티칸은 언급을 회피했다. 그러나 르페브르 대주교와 밀접한 소식통은 성청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고 전함.
▲1982년 6월 24일 現신앙교리 성장관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은 르페브르 대주교의 직무정지를 다시 확인.
▲1983년 6월 29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 비오 10세 사제회」총장직을 사임, 후임에 고위 장상인 프란츠 쉬미드베르거 신부를 임명.
▲1987년 1월 르페브르 대주교는 2차 바티칸공의회의 종교자유선언에 관한 자신의 보수적 지침의 설명을 담은 1백 50페이지의 문서를 바티칸에 전달.
▲1987년 6월 14일 르페브르 대주교와 라칭거 추기경은 바티칸에서 1시간 이상 회담을 갖고 개방과 상호대화의 분위기를 언급한 합동성명서를 발표.
▲1987년 10월 2일 르페브르대주교는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미사와 성찬예식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사제회를 인정하는 바티칸의 화해방안에 동의했다고 발표.
▲1987년 10월 17일 바티칸은 르페브르대주교가「사제회」를 심사하기위해 바티칸에서 임명한 방문객 명단에 공식적으로 동의했다고 발표.
▲1988년 2월 르페브르 대주교는 몇몇 문제점에 대해 거의 합의를 봤지만 그 일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경우 교황청의 승인 없이 주교를 임명할 것이라고 위협.
▲1988년 4월 8일 라칭거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와의 재결합을 위한 노력을 격려.
▲1988년 5월 23일 바티칸은 르페브르 대주교와 부분적인 일치를 본 것도 없다고 발표.
▲1988년 6월 15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칸과의 화해를 위한 노력이 실패로 끝났으며 자신은 6월 30일 예정대로 주교 서품식을 거행할 것이라고 발표. 바티깐대변인은 그 같은 결정은 교회법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
교황청과 르페브르 대주교와의 논쟁 일지
프랑스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82)가 최근 바티칸의 지시를 거부하고 지난 6월 30일 자의로 4명의 주교를 서임함으로써 가톨릭교회는 1백여년 만에 또 다시 파문이란 큰 상처를 안게됐다.
지난 30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주교서품을 반대하는 공식적「권고」를 받았음에도 불구, 자신이 창설한 스위스 알프스 산록에 있는 에콘신학교에서 7천여명의 추종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주교서품식을 가지고, 프랑스ㆍ스위스ㆍ스페인 영국인등 4명을 주교로 서품했다.
이러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행동에 대해 바티칸은 교회법상 교황이 승인하지 않은 주교서품식을 강행할 경우 르페브르 대주교는 물론 서품 받은 사람들도 자동 파문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르페브르 대주교가 서품식을 강행하자 즉각 이들에 대해 파문조치 했다.
이번에 파문당한 르페브르 대주교는 그동안 교회 내에 알려진 보수주의자로서 교회의 쇄신과 전례의 토착화에 이정표가 됐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어온 인물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은 각국교회들이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에 반발해왔으며 교회가 성문제에 지나치게 관대하며 비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도 타협적이라고 비난해 왔다.
새로운 시대의 움직임에 발맞추려는 교회의 쇄신과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에 대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이러한 보수적인 견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해석을 둘러싸고 1968년 이래 바티칸과 충돌을 빚어왔으며 1976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무집행중지처분까지 받았다.
뿐만 아니라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칸이「신앙의 장애」가 되어왔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거짓신의 사도이며 반 그리스도교적 현대주의 대표자」라고 비방을 되풀이해왔다. 또한 그는 진정한 가톨릭신자는 그러한 교황과 교계제도에대해서 의무를 지니지 않을 뿐 아니라 바티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찬의 임무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반교회적인 언동에도 불구하고 바티칸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다른 종파로 분리돼 나갈 경우 미칠지 모르는 교회의 이미지 및 파란을 피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그를 설득해 왔다.
이러한 노력의 하나가 지난 5월 5일의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과 르페브르 대주교의 만남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와 교리문제에 관한 교황의 측근 고문인 라칭거 추기경은 수개월간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벌인 끝에 합의에 도달, 르페브르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대한 사목을『전통에 의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인정하고, 바티칸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추천한 4명중 1명을 주교로 서품하도록 인정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르페브르 대주교는 자신이 서명한 합의를 깨뜨리고 다음날인 5월 6일 기자회견에서 멋대로 합의안을 비난하고『4명 모두의 서임을 추진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르페브르 대주교 및 그의 추종자를 설득하여 교계제도 내로 수용하려는 바티칸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제2차 바티깐공의회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완고한 보수적 신자를 추종자로 갖고 있는 르페브르 대주교는 18년 전「성 삐오 10세 사제회」라는 분파를 창설한 이후 2백60여명의 사제를 서품해왔으며 이밖에 2백여명의 신학생들이 이탈리아 프랑스, 서독, 미국, 아르헨티나, 그리고 본산지인 스위스「에콘」신학교에 재학 중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5백여개의「예배장소」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수백만명에 이르는 「신심 깊은 동조자」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에콘」의「사제회」본부의 사제들은 오전 6시에 기상, 구식수단을 입고 구식 라틴어 예식으로 성무일도, 묵상, 미사봉헌 등의 사무를 보고 있으며, 양조용 포도밭을 경작, 직접 포도주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수백만의 추종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정통 로마가톨릭신자들에 의해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데「파리」대교구 대변인 장미셀 디파코 신부는『이 운동의 세력이 프랑스에서 3만, 세계적으로도 50만을 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1870년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훈령에 반발하여 교회를 이탈한「고(古)가톨릭신자」들이 결국 미국, 네덜란드 등지에서 불과 수십만으로 위축된 것과 비교해본다면, 이번 파문된 르페브르대주교의 사제회도 소수의 추종자만 가진 뒤 몰락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 가톨릭교회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전망이다.
그러나 그 숫자상의 세력이 어떻든 간에 르페브르 대주교의 전통주의적 운동이 신앙과 전례문제에 있어 교회의 궁극적인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티칸의 다음 조치가 주목되고 있다.
강동수 기자
프랑스 르페브르 대주교 파문 해설
지난 30일 르페브르 대주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주교서품을 반대하는 공식적「권고」를 받았음에도 불구, 자신이 창설한 스위스 알프스 산록에 있는 에콘신학교에서 7천여명의 추종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주교서품식을 가지고, 프랑스ㆍ스위스ㆍ스페인 영국인등 4명을 주교로 서품했다.
이러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행동에 대해 바티칸은 교회법상 교황이 승인하지 않은 주교서품식을 강행할 경우 르페브르 대주교는 물론 서품 받은 사람들도 자동 파문당할 것이라고 경고했으며, 르페브르 대주교가 서품식을 강행하자 즉각 이들에 대해 파문조치 했다.
이번에 파문당한 르페브르 대주교는 그동안 교회 내에 알려진 보수주의자로서 교회의 쇄신과 전례의 토착화에 이정표가 됐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어온 인물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은 각국교회들이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에 반발해왔으며 교회가 성문제에 지나치게 관대하며 비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도 타협적이라고 비난해 왔다.
새로운 시대의 움직임에 발맞추려는 교회의 쇄신과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에 대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이러한 보수적인 견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해석을 둘러싸고 1968년 이래 바티칸과 충돌을 빚어왔으며 1976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무집행중지처분까지 받았다.
뿐만 아니라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칸이「신앙의 장애」가 되어왔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거짓신의 사도이며 반 그리스도교적 현대주의 대표자」라고 비방을 되풀이해왔다. 또한 그는 진정한 가톨릭신자는 그러한 교황과 교계제도에대해서 의무를 지니지 않을 뿐 아니라 바티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찬의 임무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반교회적인 언동에도 불구하고 바티칸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다른 종파로 분리돼 나갈 경우 미칠지 모르는 교회의 이미지 및 파란을 피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그를 설득해 왔다.
이러한 노력의 하나가 지난 5월 5일의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과 르페브르 대주교의 만남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와 교리문제에 관한 교황의 측근 고문인 라칭거 추기경은 수개월간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벌인 끝에 합의에 도달, 르페브르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대한 사목을『전통에 의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인정하고, 바티칸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추천한 4명중 1명을 주교로 서품하도록 인정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르페브르 대주교는 자신이 서명한 합의를 깨뜨리고 다음날인 5월 6일 기자회견에서 멋대로 합의안을 비난하고『4명 모두의 서임을 추진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르페브르 대주교 및 그의 추종자를 설득하여 교계제도 내로 수용하려는 바티칸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제2차 바티깐공의회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완고한 보수적 신자를 추종자로 갖고 있는 르페브르 대주교는 18년 전「성 삐오 10세 사제회」라는 분파를 창설한 이후 2백60여명의 사제를 서품해왔으며 이밖에 2백여명의 신학생들이 이탈리아 프랑스, 서독, 미국, 아르헨티나, 그리고 본산지인 스위스「에콘」신학교에 재학 중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5백여개의「예배장소」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수백만명에 이르는 「신심 깊은 동조자」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에콘」의「사제회」본부의 사제들은 오전 6시에 기상, 구식수단을 입고 구식 라틴어 예식으로 성무일도, 묵상, 미사봉헌 등의 사무를 보고 있으며, 양조용 포도밭을 경작, 직접 포도주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수백만의 추종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정통 로마가톨릭신자들에 의해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데「파리」대교구 대변인 장미셀 디파코 신부는『이 운동의 세력이 프랑스에서 3만, 세계적으로도 50만을 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1870년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훈령에 반발하여 교회를 이탈한「고(古)가톨릭신자」들이 결국 미국, 네덜란드 등지에서 불과 수십만으로 위축된 것과 비교해본다면, 이번 파문된 르페브르대주교의 사제회도 소수의 추종자만 가진 뒤 몰락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 가톨릭교회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전망이다.
그러나 그 숫자상의 세력이 어떻든 간에 르페브르 대주교의 전통주의적 운동이 신앙과 전례문제에 있어 교회의 궁극적인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티칸의 다음 조치가 주목되고 있다.
강동수 기자
프랑스 르페브르 대주교 파문 해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주교 마르셀 르페브르(Marcel Lefebvre)의 이단적 움직임은 내면의 모순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부하기 위해서 이전의 공의회들에 호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 공의회의 가르침을 보장하는 바로 그것이 다른 모든 공의회들의 진리를 보장하고 있다. 바오로 6세와 요한 바오로 2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에 대해서 놀라운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바티칸을 무시한 채 새로운 주교들 축성을 감행하였고, 바티칸에서는 이에 대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결국 파문되었다.
『현대 가톨릭의 위기진단』
『현대 가톨릭의 위기진단』
□논단•신앙의 현재 상황<2>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재발견
요셉 라칭거 추기경과 비토리오 메쏘리의 대담
정 종 휴 옮김(전남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대치되는 양쪽의 잘못
대화의 중심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특별한 사건, 즉 1985년에 폐막 20주년을 맞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20년 동안 가톨릭 교회는 지난 200년보다 훨씬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훌륭한 문헌들이 가진 중요성과 풍요로움, 그 시의적절함과 필요불가결함을 놓고, 오늘날 가톨릭 신자이고 가톨릭 신자로 남고자 하는 사람치고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의문을 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신앙교리성 장관이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를 보고 이러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것일 뿐 아니라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일은 몇몇 주석자들이 공공연히 이에 관한 의문을 던져 보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라칭거 추기경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결정들을 옹호한 발언들은 매우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추기경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 말들을 강조하였다.
무수한 예 가운데 그가 1975년 공의회 폐막 10주년을 즈음하여 작성한 논문을 하나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브릭센에서 나는 추기경에게 그 논문의 해당 부분을 다시 읽어 주었다. 그는 그 논문에서 그가 가졌던 입장을 아직껏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우리의 대화가 있기 10년 전 그는 벌써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늘날 황혼기에 서 있다. 이른바 진보적인 쪽에서는 공의회를 완전히 한물간, 그래서 이젠 더 이상 현대에 적합하지 않은 과거지사로 다루고 있다. 그 반대로”, ‘보수’진영은 “공의회를 오늘날 가톨릭 교회를 붕괴시키고 있는 화근으로 여기고 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의 배반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환원이나 거의 환원에 가까운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계속했다. “두 가지 입장에 대하여 먼저 들려주어야 할 말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및 트리엔트 공의회와 동일한 권위에 의해, 즉 교황과 그에 결합된 주교단에 의해 지탱되었고 내용적으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아주 엄격하게 앞선 두 공의회를 계승하고 있으며 결정적인 점에서는 그들 공의회에서 쓰여진 단어까지 섞어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라칭거는 두 가지 결론을 끌어낸다. 첫째로는, “(가톨릭 신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찬성하면서 트리엔트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반대할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명백히 표현하고 이해한 대로 이 공의회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톨릭 교회의 구속력 있는 전통(verbindliche Tradition), 특히 두 개의 지나간 공의회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말은 적어도 극단적인 형태의 이른바 ‘진보주의’에 해당한다. 둘째로는, “트리엔트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찬성하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반대한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부인하는 자는 그 두 공의회를 낳은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 두 공의회를 그 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극단적인 형태에서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전통주의’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어느 것을 택하건, 나눌 수 없는 하나로서만 유지해야 할 전체(결국 교회의 역사)를 파괴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면목
거의 언급할 필요도 없겠으나,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문헌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 그리고 요셉 라칭거가 여기에 속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보기에는 공의회 이후 시대의 여러 가지 폐해를 야기한, 문헌의 다양한 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공의회 이후의 시대에 대한 라칭거의 판단은 매우 분명하다. “가톨릭 교회로서는 지난 10년이 극도로 부정적인 시기였음이 틀림없다. 공의회 이 후의 전개는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에서 비롯된 모든 이의 기대와는 천지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초대 교회의 말기 이래 그러했던 것보다 더욱더 소수파가 되어 있다.
추기경은 자신의 냉정한 판단을 이렇게 표현한다(그는 대화 도중에도 이를 되풀이했는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이 뭐라 하든 놀랄 일이 못된다. 그는 그것을 자주 강조했던 것이다.) “교황들과 공의회의 교부들이 기대했던 것은 가톨릭의 새로운 일치였는데 드러난 것은 분열이었습니다. ᅳ 바오로 6세 성하의 말씀을 빌리자면 ᅳ 자기 비판으로부터 자기 파괴로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여요. 새로운 감격이 기대되었는데 너무 자주 권태와 의기소침에 빠져 버렸습니다. 일보 전진이 기대되었는데 드러난 것은 붕괴의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은 자칭 ‘공의회의 정신’을 근거로 내세워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그럼으로써 공의회의 이름은 더 더욱 모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추기경은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벌써 10년 전에 결론을 내렸다. “교회의 참된 개혁의 전제는 지금까지 의심할 바 없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 잘못된 길로부터 깨끗이 결별하는 것임이 분명히 거론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라칭거는 다음과 같이 쓴 일이 있다. “율리우스 되프너 추기경은 공의회 후의 교회는 하나의 거대한 건축 공사장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비판적인 성직자는 덧붙이기를, 그것은 설계도를 분실해 버려 각자 자기 생각대로 집을 짓는 공사장이라 했지요.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이러한 사태의 책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이나 그 정통적인 문서들에 있을 수 없고, 공의회 이후의 그러한 전개는 공의회 교부 들의 문헌에도 반하고, 정신에도 반한다”는 것을 분명히 되풀이하고자 했다.
추기경은 말했다. “저는 확신합니다만, 우리가 지난 20년 동안에 입은 각종 손해는‘참된’공의회에 탓을 돌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ᅳ 내부적으로는 ᅳ 잠재 해 있던 다원적이고 원심적인 여러 힘이 전면에 부상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서방의 문화 혁명과 대치하고 있었다는 데 그 까닭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의견, 가톨릭 신자로 남아 있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그의 요망은 정녕 “되돌아가자”가 아니고, “근원이 되는 공의회의 정통 문헌으로 회귀하자”는 것이다.
그는 반복한다. 그에게는 “오늘날 교회의 참된 전승의 옹호는 공의회의 옹호 입니다. 우리들이 가끔(‘우’로건 ‘좌’로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나의 ‘단점’, 전승의 포기라고 생각할 계기를 주었다면, 그건 우리의 잘못이예요. 있는 것은 연속성이요, 이 연속성은 과거로의 후퇴도 앞으로의 도피도, 시대 착오적인 향수도 터무니없는 초조함도 용납치 않습니다. 우리들은 교회의 ‘오늘’에 충실히 머물려야만 하지 ‘어제’나 ‘내일’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이 교회의 오늘’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이지요. 내용을 잘라내거나 독단적으로 내용을 왜곡시키지 않은 그 문헌 말씀입니다.”
시대 역행에 대한 묘약
라칭거는 ‘좌경’에 비판적인가 하면, ‘우익’에 대해서도, 또 마르셀 르페부르 대주교로 상징되는 저 완벽한 전통주의에 대해서도 오해의 여지없이 견해를 밝히고 있다. “만약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부정으로 일관한다면 저는 그 비논리적인 자세에는 아무런 장래도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경향으로 가는 출발점은 특히 비오 9세와 비오 10세의 가르침 ᅳ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교황 우위권에 대한 엄격한 충성입니다. 그런데 교황은 비오 12세까지만 있고 그 다음은 없는 것입니까? 성좌에 대한 충성은 시대에 따라 또는 이미 확립된 자신의 확신에 얼마나 가깝느냐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입니까?”
“로마가 ‘왼쪽’을 신경썼다면 아직 ‘오른쪽’에 대해서는 동일한 강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이에 대하여 추기경은 “몬시뇰 르페부르의 지지자들의 주장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 이야기는 공을 세운 노(老) 대주교에 대하여는 즉각 성직 정지라는 엄벌로 대응하면서, 다른 방향을 향한 온갖 탈선은 이해할 수 없이 참는다는 거예요. 저는 이 방향 또는 저 방향을 향한 크고 작은 논쟁에는 끼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모순의 두 유형은 완전히 상이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요. 사실 ‘왼쪽’으로의 일탈은 교회의 현재 사고와 행동의 광범한 흐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만 거의 어디서도 그 공통된, 제대로 파악할 만한 모습을 찾지 못했습니다. 르페부르 대주교의 활동은 그에 반해 추정컨대 수적으로는 훨씬 적게 퍼져 있기는 해도 뚜렷히 구획된 교회법 기구와 신학교와 수도원 따위를 갖고 있습니다. 르페부르 몬시뇰이 화해에의 희망 속에 다행히 아직까지는 행하지 않고 있는 주교 성성을 결심한다면 언제라도 있게 될 정식 ‘이교’(Schisma)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이 대화의 시점에서는 아직 주교 성성이 행해지지 않았었고, 그 후 르페부르 주교도 사망했음. ᅳ 옮긴이 주). 우리들이 오늘날 교회 일치의 차원에서 과거에는 막 생겨나는 분열을 막기 위해 관련자들에 대한 최대한의 화해와 이해의 자세가 없었다고 비판한다면, 최대한의 화해와 이해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물론 하나의 행동 지침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화해하도록 노력하고 이를 위해 온갖 기회를 활용해야만 합니다.” 라고 응답했다.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르페부르는 사제를 서품했고 또 계속 그러하지 않습니까?”
“교회법은 그 서품이 불법이라고는 하지만 무효라고는 않고 있습니다.” 그는 설명했다. “우리는 미리 위법한 상태에서이긴 하지만 교회에 대하여는 ‘진정한’ 사제들인 이 젊은이들의 인간적인 측면도 염려해야만 합니다. 각 개인의 출발점과 방향은 확실히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내부적인 상황에 매우 강력히 영향받아 그들의 결정을 함께 받아들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현재의 교회에 대한 환멸이 까닭이 되는데, 그 환멸은 그들을 비통함과 부정적 사고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교화의 정상적인 사목 활동 안에서 온전히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여러 나라의 신학교에서 발생한 불만스런 상황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예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분열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화해를 희망하고 오직 이 희망으로 르페부르 주교의 사제단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르페부르 사건과 다른 시대 착오적인 반항에 원칙을 마련하기 위한 그의 처방은 바오로 6세부터 현교황까지의 최근 교황들의 방침을 상기시킨다. “이와 유사한 황당무계한 상황들이 지금껏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공의회 이후의 많은 자의적이고 분별 없는 해석으로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공의회의 참된 얼굴을 내 보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로 등장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와 같은 그릇된 저항에 대한 원칙을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공의회의 정신
“그러나 ‘참 공의회’에 대한 의견이 여러 가지입니다. 추기경도 말씀하셨지만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 무책임한 ‘신개선주의’의 사례들과는 별도로 일반적으로 교회의 현상황이 어렵다는 데는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 진단도 그렇고 그 치료에 관해서도 의견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의 ‘진단’에 따르면 ‘위기 현상들은 성장기에 생기는 유일한 열일 따름’이라고 합니다. 다른 이들은 이 현상들을 중병의 징후로 봅니다. ‘치료’로 보자면, 한편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문헌을 넘어서라도 보다 포괄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보다 적은 개혁과 변경을 주장합니다. 어떻게 결정해야 합니까?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지요?”
추기경은 답한다. “앞으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제 진단은 이렇습니다. 치료받고 요양받아야 할 진짜 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치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완전히 받아들여져야 할 현실이라는 것도 아울러 강조합니다. 그러나 공의회를 사람들이 달려나가면서 멀어지는 출발점으로 볼 것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그 위에 쌓아 올려져야 할 받침으로 본다는 조건 아래서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공의회의 예언자적 기능을 막 발견하고 있는 그때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몇 문헌은 그 선포 시점에서는 참으로 그 당시의 시대를 앞서감이 드러났습니다. 그 후에 문화적인 혁명과 사회적인 변동을 맞게 되었습니다만, 공의회 교부들이 이를 결코 예견할 수 없었으면서도 그들의 ᅳ 당시엔 시기적으로 빨랐던 ᅳ 답이 그 후세에 얼마나 필요했던 것인지를 혁명과 변동은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현시점에서 문헌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특별히 중요하다는 점은 자명합니다. 공의회의 문헌은 우리에게 오늘의 문제와 제대로 맞설 바른 도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공의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참된 공의회에 ‘힘입어’교회를 재건하도록 소명을 받았습니다.”
진단을 계속하면서 그는 다음 내용을 상기시켰다. 이 참된 공의회는 “이미 공의회의 기간 중에 그리고 공의회가 끝난 후에는 더 더욱, 사람들이 자기 스타일로 받아들인 ‘공의회 정신’, 사실은 공의회에 ‘반대되는 정신’이지만, 이로 인해 반대받았습니다. 이 해로운 반 공의회 정신’(Konzils-Ungeist)에 따르면 무엇이나 ‘새로운’ 것은, 또는 보기에 새로운 것은 ᅳ 새로운 것이라 자칭하는 얼마나 많은 이단이 그간 얼굴을 드러냈는지 ᅳ 언제이건 그리고 어떤 경우이건 과거의 것보다 또는 현재 있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반 공의회 정신에 따르면 교회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단절이 아니라 연속
이와 관련하여 그는 자기가 아주 예리해지기를 원한다고 강조하였다. “공의회 문헌은 가톨릭 정신의 연속성을 재확인할 뿐 어디서도 교회사를 공의회 ‘이전’ 과 ‘이후’로 분리하는 것을 정당화 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러한 도식에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공의회 ‘이전’ 교회도 없고 공의회 ‘이후’ 교회도 없습니다. 당신 친히 교회에 맡기신 신앙의 보배를 끊임없이 심화시키고 늘 보다 잘 이해하면서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교회사에는 아무런 비약도 없고 아무런 단절도 없고 또 연속성의 아무런 중단도 없습니다. 결코 공의회는 교회를 시대적으로 양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분석을 계속하는 가운데 그는 다음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을 토론에 붙이는 것은 공의회를 시작한 요한 23세 교황과 공의회를 충실히 이어받은 바오로 6세 교황의 의향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두 분에게는 신앙의 유산이란 다툴 수 없는 것이고 이미 보증받은 것이었습니다.”
“추기경께서는 혹시 일부의 사람들이 하듯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 관심사인 ‘사목적’인 측면을 강조하시려는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믿음을 ‘바꾸려고’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새롭게 현재화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대화는 분명한 정체성의 토대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뭔가 말할 것이 있고 고유한 정체성을 획득한 경우에만 자신을 ‘열’ 수 있고 ‘열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황님들과 공의회 교부들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분들 중 일부는 오늘의 관점에서는 너무 무비판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판단될 수 있는 낙관론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이 현대 세계의 긍정적인 것에 깊은 신뢰감을 갖고서 자신을 개방할 수 있다는 의견이셨다면, 그건 바로 그분들이 그 정체성, 그 믿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근년에 와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세상의, 그러니까 현대의 지배적인 사고 방식에 자제되지 않고 여과되지 않은 개방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앙 유산의 토대를 토론에 붙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겐 신앙의 유산이라는것이 더 이상 분명치도 않구요. 사실교회 밖에서발생하기는 했지만, — 정제되고 정돈되면 —사물의 교회적 시야에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가치들이 있지요. 근자에 들어 사람들은 이러한 일에 관심을 가졌지요. 그렇지만 이 두 현실이 서로 충돌 없이 만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완전히 동일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면, 교회도 세상도 모르는 소치입니다.”
“그럼 추기경께서는 ‘세상에 대한 반대’라는 옛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시는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인간에 관한 진리를 전파하면 세상이 반대하는 것이지요. 죄와 은총이 기탄 없이 이야기되면 세상은 분노합니다. 무분별한 ‘자기 개방’의 단계를 지나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소수에 속하고, 가끔 인간의 심성에 당연한 것으로 그럴 듯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곧 신약성서가 ᅳ 확실히 긍정적이지 않은 의미로 ᅳ ‘세상의 정신’이라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자임을 다시금 의식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비타협주의에의 용기를 재발견하고, 대결할 수 있는 능력, 주변 문화의 다양한 경향에 주의를 환기하고 동시에 증상은 안 좋은 데도 느낌은 좋은 공의회 이후의 연대를 단념할 역량을 재발견할 때에 이른 것입니다.”
회복?
이 시점에서 ᅳ 대화의 전부가 그랬던 것처럼 이 때도 역시 신학교의 뜰에 면한 방의 정적 속에 녹음기는 사각 사각 돌아가고 있었다 ᅳ 나는 라칭거 추기경한테 질문을 하나 던졌는데 그 답은 가장 활기있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 반응은, 문제되는 낱말(‘회복’)에 감정이 섞여 있을 뿐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흔히 생기는 미숙함 때문에 야기된 것인데, 그 낱말의 내용은 오래된 과거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ᅳ 적어도 우리들의 견해로는 一 과거란 정녕코 되풀이할 수도 없으려니와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신앙교리성 장관에게 물어 보았다. “장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해 보면, 교회의 고위층은 공의회 후 시대의 첫 단계를 종식시키려 한다고, 또 (비록 확실히 공의회 이전의 시대로의 회복은 아니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참’ 문헌으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교회 고위층은 일종의 ‘회복’을 시작하고자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여기에 추기경의 답을 그대로 옮긴다. “’회복’이라는 말이 후퇴를 뜻한다면, 그러한 회복은 도무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역사의 완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찾아오실 주님을 앞서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뒤로 돌아가다니요, 뒤로는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뜻에서라면 역시 어떠한 ‘회복’도 없습니다. 그러나 ‘회복’을 세상에 대한 갖가지 지나친 무분별한 개방 후의, 불가지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세상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해석한 후에 새로운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라 이해한다면, 그래요,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 즉 가톨릭의 전체성 안에서 여러 방향과 가치의 균형을 새로 잡으려는 의미의 ‘회복’은 지극히 바람직스럽고 교회 안에서는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라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의 첫 단계는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얘기치 못한 결과들
추기경이 내게 말했듯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상황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분위기는 지금까지 우리를 행복감에 젖게 해준 것들을 볼 때 악화되었고, 그 행복감의 열매들이 이제 우리 앞에 경고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시대의 징표에 대하여 깨어있어야 한다는 저 ‘현실론’을 취하도록 격려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람들이(비현실적으로)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화가 전혀 없었던 양 길을 되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보고 있는 바와 같이 구체적인 결과 중 많은 것은 공의회 교부들의 의향에 맞지 않아요. 그러나 분명 우리는 ‘공의회가 아예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공의회 사가요 위대한 학자, 영국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신 헨리 뉴먼 추기경은 말씀하시기를, 공의회는 언제나 교회에게는 위험이며, 그러므로 소수의 사항만 다룰 것이요, 그렇게 오래 끌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개혁이라는 것이 시간과 인내와 위험 부담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개혁은 위험하니 하지 말자’ 하는 것도 안될 일입니다. 오히려 제가 믿는 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정한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 공의회의 진정한 수용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공의회의 문서들은 피상적이거나 한마디로 부정확한 출판물의 홍수 속에 즉각 사장되어 버렸습니다. 공의회 문헌의 ‘글자’를 읽어 보면, 그 참된 ‘정신’을 찾게 해 줄 것입니다. 그 정신이 사실대로 재발견된다면, 저 위대한 문서들은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게 해 줄 것이요. 새로운 힘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거듭 말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오해함으로써 교회 안에 야기된 손실들을 명백히, 따라서 뼈아프게 바라보는 가톨릭 신자는 바로 그 제2차 공의회 안에서 재활의 가능성도 찾아야만 합니다. 공의회는 주님의 것이지,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되는 길을 계속하려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공의회를 마치 ‘성직자 시대에서부터 내려온 화석’처럼 바라보는 사람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는 더 이상 관계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의 공의회가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Unicum(유일무이한 것)이라는 것, 그것이 긴박한 문제나 위기의 압력하에서가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관련해서 보자면(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조용한 시점에서 소집된 사상 최초의 공의회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지적되었습니다. 위기는 나중에 들어온 것이고,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들어왔습니다.(그런데 추기경께서 앞서 암시하신 것의 하나로 돌아가자면) 교회가 저 문화 혁명을 극복했어야 했다고, 그러니 공의회가 없었다면 교회의 구조가 더 경직되어 손실이 더 커졌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공의회 이후의 보다 융통성 있고 보다 유연한 교회 구조가, 비록 매사에 더 비싼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어쩌면 충격에 보다 잘 대응할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추기경은 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요. 역사는, 특히 하느님께서 신비로운 길에 따라 인도하시는 교회의 역사는 우리가 가정법으로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60년대 초기에는 2차 대전 후의 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이미 재건된 세계를 만나, 그래서 뭔가 달리 참여를 위한, 일신을 위한 계기를 찾고 있는 전후 세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진보에의 낙관론과 신뢰가 전반적인 분위기를 결정했습니다. 그 밖에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은 교회의 가르침이 앞으로 조용히 전개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검사성(현 신앙교리성) 제 전임자 옷타비아니 추기경도 교회 일치를 위한 공의회 사업을 지지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한 23세 교황께서 공의회의 소집을 공고하신 후, 성청은 세계 주교들 중에서 특히 저명한 대표들과 함께 공의회 교부들이 너무 이론적이고, 너무 교과서적이며, 사목적 성격이 불충분하다고 해서 기각한 저 초안(Schemata)의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교황 성하는 기각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분께서 동의하신 이 문서에 관한 신속하고 마찰 없는 표결을 기대하셨습니다. 명백히 그 내용 중 어느 것도 교의를 바꾸고자 하지 않았지요. 그것은 교의를 종합하는 것이었고, 기껏 해야 이제까지 분명히 정의되지 않았던 점들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간 전개였던 것입니다. 공의회의 교부들이 이 문서들을 거부 했던 것도 그러한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불충분한 표현 방식이라든가, 이제까지 없었고 지금도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몇 가지 정의(定義)결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의회가 요한 23세 성하께서 기대하신 경과를 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네덜란드, 스위스, 미국과 같은 나라들은 전통주의와 로마에의 충성의 아성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공의회가 교회에게 앞으로의 비약이요 쇄신된 삶이며 하나의 새로운 일치를 뜻했으면 하는 요한23세 성하의 기도가 교회 전체로 보아 ᅳ 적어도 아직까지는 ᅳ 받아들여지지 않았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희망의 징표들
나는 불안해서 물었다. “그러면 공의회 이후 시대의 교회의 현실에 대한 추기경님의 부정적인 시각은 얼마간의 긍정적인 요소도 인정치 않는다는 것인지요?”
그는 대답한다. “역설적입니다만 확실하게 부정적인 것이 가장 먼저 긍정적인 것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많은 신자들이 출애굽을 경험하고, 이데올로기와의 타협주의의 결과를 체험했으며, 세상의 구원과 자유와 희망을 기대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없는 삶, 믿음 없는 세상이 어떤 꼴인지 사람들은 이제까지 이론으로만 알았었지요. 이제는 그 실상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실상의 공허 안에서 우리들은 믿음의 풍요로움, 믿음의 필수불가결함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힘겨운 정화 같은 것이었고 마치 불을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는데, 그 과정이 하나의 깊은 믿음의 가능성을 열었던 것입니다.”
추기경은 계속했습니다. “모든 공의회가 먼저 ‘상층부’의 개혁이고 그 다음에 저변의 신자들로 이행해야 함을 망각하지 않아야겠습니다. 공의회가 결실을 가져오려면 어떤 공의회에나 거룩함의 물결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가 그러했었지요. 그래서 참된 개혁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었던 것 입니다. 거룩함은 교회의 경우 그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룩함이 교회 지도부의 명령에서 온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결과가 언젠가 교회사의 광채로운 시대로 여겨질 수 있을지 어떨지는 공의회에 생명을 부여하도록 부르심 받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밀라노에서 성 가롤로 보로메오를 기념하면서 말씀하셨듯이,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 새로운 개혁자도 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성인들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버티었다. “추기경께서는 그러므로 교회사의 이 시대에 ᅳ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것 말고는 ᅳ 다른 아무런 긍정적인 결과도 인정치 않으신단 말씀입니까?”
“저야 긍정적인 것들을 물론 보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예컨대 한국 교회와 같은 젊은 교회의 약진이라든가 박해받아 온 교회의 활력은 차치하도록 하겠어요. 이러한 것들은 바티칸 공의회에는 거의 직접 까닭을 돌릴 수 없고 또 위기 현상들을 직접 공의회 탓으로 여겨서는 안되기 때문이지요. 교회 전체에 희망차게 울리는 것은 ᅳ 바로 서방에서는 교회가 위기인 마당에—아무도 계획하지 않았고 아무도 호소하지 않았던 바인데, 단순히 믿음의 내적 활력 자체에서 오는 새로운 움직임들의 태동입니다. 이러한 여러 움직임 안에는—더디기는 하지만 ᅳ 교회의 성신 강림의 순간과 같은 무엇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성령 운동이라든가, 꾸르실료, 훠꼴라레, 성체와 자유(Communione e Liberazione) 등을 들고 싶습니다. 확실히 이 모든 움직임은 여러 문제도 노정하고 있고, 그 안에 크건 작건 위험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다 그러지요. 현재 저는 교회의 완전한 믿음을 갖추고 온전히 믿음에 살고자 하며 그 안에 커다란 선교적 활력을 지닌 젊은이들의 동아리가 꾸준히 늘어 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 생활은 열심이지만 거기엔 내심에의 도피도 없고 사적인 것으로의 후퇴도 없으며 있는 것은 단순히 충만한 나뉘지 않은 가톨릭적인 것뿐입니다. 여기서 느끼는 신앙의 기쁨은 그 안에 널리 번지는 무엇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사제직과 수도 생활에의 새로운 성소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모든 움직임이 어떠한 사목적인 기획 부서에서 고안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자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교회 당국은 ᅳ 당국이 아주 진취적이고 싶어한들 ᅳ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건 교회 당국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도들 현재의 모습에의 접함에 긴장은 있습니다만 그 자체로서 교회의 교계 제도와의 긴장 관계는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하나의 새 세대가 부상하고 있어요. 저는 부푼 희망 속에 이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정신이 우리의 계획보다 훨씬 강하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리 발휘되고 있어서 놀랍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쇄신은 완만하게, 그러나 효과 있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기 모순과 부정의 취향에 사로잡혀 있던 낡은 형식은 사라지고 어언 새로운 모습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새로운 모습은 지배적인 관념들과의 대화에 아직은 제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용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과제는— 교회의 교직자들과 신학자들의 과제는 ᅳ 이 새로운 모습에 문을 열어주는 것,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현재 아직 지배적인 경향은 실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직접적이고 종교적인 ‘기상 전망’을 바라보는 자라면 계속하여 신앙과 교회의 위기를 이야기해야지요. 이러한 위기 상황에 편견 없이 맞설 때에만 우리는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목 170호, 121-132면.
교황청과 일치한 전통 가톨릭 성향의 신자 대부분에게는 그 당시의 행보 중 일부(트리엔트 미사 지속, 사제 서품 등)는 불가피했다고 인정받는 편이지만 주교 성성은 독단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편이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가톨릭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가톨릭 전통의 핵심적인 부분의 하나인 교황의 최고 교도권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인 것은 지나친 행보로 비판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은 가톨릭의 기본적 믿음이지만, 이 기본적인 믿음들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막는게 최고 교도권이 하는 일이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가톨릭 전통의 보전을 강조하면서도, 최고 교도권에 대한 순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점을 남겼다 할 수 있다. SSPX에 출석하는 가톨릭 신자들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신념 있는 참된 가톨릭 성직자라고 포장하지만,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주교 성성 행보는 최고 교도권을 지나치게 경시한 것으로 다른 전통 가톨릭 성향 가톨릭 신자와 단체들로부터 비판받고 있다.[31]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재발견
요셉 라칭거 추기경과 비토리오 메쏘리의 대담
정 종 휴 옮김(전남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대치되는 양쪽의 잘못
대화의 중심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특별한 사건, 즉 1985년에 폐막 20주년을 맞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20년 동안 가톨릭 교회는 지난 200년보다 훨씬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훌륭한 문헌들이 가진 중요성과 풍요로움, 그 시의적절함과 필요불가결함을 놓고, 오늘날 가톨릭 신자이고 가톨릭 신자로 남고자 하는 사람치고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의문을 품을 수도 없는 것이다. 신앙교리성 장관이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를 보고 이러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것일 뿐 아니라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일은 몇몇 주석자들이 공공연히 이에 관한 의문을 던져 보는 게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라칭거 추기경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결정들을 옹호한 발언들은 매우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추기경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 말들을 강조하였다.
무수한 예 가운데 그가 1975년 공의회 폐막 10주년을 즈음하여 작성한 논문을 하나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브릭센에서 나는 추기경에게 그 논문의 해당 부분을 다시 읽어 주었다. 그는 그 논문에서 그가 가졌던 입장을 아직껏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우리의 대화가 있기 10년 전 그는 벌써 다음과 같이 적은 바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늘날 황혼기에 서 있다. 이른바 진보적인 쪽에서는 공의회를 완전히 한물간, 그래서 이젠 더 이상 현대에 적합하지 않은 과거지사로 다루고 있다. 그 반대로”, ‘보수’진영은 “공의회를 오늘날 가톨릭 교회를 붕괴시키고 있는 화근으로 여기고 있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트리엔트 공의회의 배반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환원이나 거의 환원에 가까운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계속했다. “두 가지 입장에 대하여 먼저 들려주어야 할 말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및 트리엔트 공의회와 동일한 권위에 의해, 즉 교황과 그에 결합된 주교단에 의해 지탱되었고 내용적으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아주 엄격하게 앞선 두 공의회를 계승하고 있으며 결정적인 점에서는 그들 공의회에서 쓰여진 단어까지 섞어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라칭거는 두 가지 결론을 끌어낸다. 첫째로는, “(가톨릭 신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찬성하면서 트리엔트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반대할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명백히 표현하고 이해한 대로 이 공의회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톨릭 교회의 구속력 있는 전통(verbindliche Tradition), 특히 두 개의 지나간 공의회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말은 적어도 극단적인 형태의 이른바 ‘진보주의’에 해당한다. 둘째로는, “트리엔트 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찬성하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반대한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부인하는 자는 그 두 공의회를 낳은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 두 공의회를 그 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극단적인 형태에서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전통주의’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어느 것을 택하건, 나눌 수 없는 하나로서만 유지해야 할 전체(결국 교회의 역사)를 파괴하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면목
거의 언급할 필요도 없겠으나,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문헌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 그리고 요셉 라칭거가 여기에 속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보기에는 공의회 이후 시대의 여러 가지 폐해를 야기한, 문헌의 다양한 해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공의회 이후의 시대에 대한 라칭거의 판단은 매우 분명하다. “가톨릭 교회로서는 지난 10년이 극도로 부정적인 시기였음이 틀림없다. 공의회 이 후의 전개는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에서 비롯된 모든 이의 기대와는 천지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초대 교회의 말기 이래 그러했던 것보다 더욱더 소수파가 되어 있다.
추기경은 자신의 냉정한 판단을 이렇게 표현한다(그는 대화 도중에도 이를 되풀이했는데, 이것을 두고 사람들이 뭐라 하든 놀랄 일이 못된다. 그는 그것을 자주 강조했던 것이다.) “교황들과 공의회의 교부들이 기대했던 것은 가톨릭의 새로운 일치였는데 드러난 것은 분열이었습니다. ᅳ 바오로 6세 성하의 말씀을 빌리자면 ᅳ 자기 비판으로부터 자기 파괴로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여요. 새로운 감격이 기대되었는데 너무 자주 권태와 의기소침에 빠져 버렸습니다. 일보 전진이 기대되었는데 드러난 것은 붕괴의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은 자칭 ‘공의회의 정신’을 근거로 내세워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그럼으로써 공의회의 이름은 더 더욱 모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추기경은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벌써 10년 전에 결론을 내렸다. “교회의 참된 개혁의 전제는 지금까지 의심할 바 없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 잘못된 길로부터 깨끗이 결별하는 것임이 분명히 거론되어야 합니다.”
언젠가 라칭거는 다음과 같이 쓴 일이 있다. “율리우스 되프너 추기경은 공의회 후의 교회는 하나의 거대한 건축 공사장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비판적인 성직자는 덧붙이기를, 그것은 설계도를 분실해 버려 각자 자기 생각대로 집을 짓는 공사장이라 했지요.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이러한 사태의 책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이나 그 정통적인 문서들에 있을 수 없고, 공의회 이후의 그러한 전개는 공의회 교부 들의 문헌에도 반하고, 정신에도 반한다”는 것을 분명히 되풀이하고자 했다.
추기경은 말했다. “저는 확신합니다만, 우리가 지난 20년 동안에 입은 각종 손해는‘참된’공의회에 탓을 돌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ᅳ 내부적으로는 ᅳ 잠재 해 있던 다원적이고 원심적인 여러 힘이 전면에 부상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서방의 문화 혁명과 대치하고 있었다는 데 그 까닭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의견, 가톨릭 신자로 남아 있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그의 요망은 정녕 “되돌아가자”가 아니고, “근원이 되는 공의회의 정통 문헌으로 회귀하자”는 것이다.
그는 반복한다. 그에게는 “오늘날 교회의 참된 전승의 옹호는 공의회의 옹호 입니다. 우리들이 가끔(‘우’로건 ‘좌’로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나의 ‘단점’, 전승의 포기라고 생각할 계기를 주었다면, 그건 우리의 잘못이예요. 있는 것은 연속성이요, 이 연속성은 과거로의 후퇴도 앞으로의 도피도, 시대 착오적인 향수도 터무니없는 초조함도 용납치 않습니다. 우리들은 교회의 ‘오늘’에 충실히 머물려야만 하지 ‘어제’나 ‘내일’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이 교회의 오늘’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이지요. 내용을 잘라내거나 독단적으로 내용을 왜곡시키지 않은 그 문헌 말씀입니다.”
시대 역행에 대한 묘약
라칭거는 ‘좌경’에 비판적인가 하면, ‘우익’에 대해서도, 또 마르셀 르페부르 대주교로 상징되는 저 완벽한 전통주의에 대해서도 오해의 여지없이 견해를 밝히고 있다. “만약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부정으로 일관한다면 저는 그 비논리적인 자세에는 아무런 장래도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경향으로 가는 출발점은 특히 비오 9세와 비오 10세의 가르침 ᅳ 보다 근본적으로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그 교황 우위권에 대한 엄격한 충성입니다. 그런데 교황은 비오 12세까지만 있고 그 다음은 없는 것입니까? 성좌에 대한 충성은 시대에 따라 또는 이미 확립된 자신의 확신에 얼마나 가깝느냐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입니까?”
“로마가 ‘왼쪽’을 신경썼다면 아직 ‘오른쪽’에 대해서는 동일한 강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 아닙니까?” 하고 나는 말했다.
이에 대하여 추기경은 “몬시뇰 르페부르의 지지자들의 주장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 이야기는 공을 세운 노(老) 대주교에 대하여는 즉각 성직 정지라는 엄벌로 대응하면서, 다른 방향을 향한 온갖 탈선은 이해할 수 없이 참는다는 거예요. 저는 이 방향 또는 저 방향을 향한 크고 작은 논쟁에는 끼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모순의 두 유형은 완전히 상이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요. 사실 ‘왼쪽’으로의 일탈은 교회의 현재 사고와 행동의 광범한 흐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만 거의 어디서도 그 공통된, 제대로 파악할 만한 모습을 찾지 못했습니다. 르페부르 대주교의 활동은 그에 반해 추정컨대 수적으로는 훨씬 적게 퍼져 있기는 해도 뚜렷히 구획된 교회법 기구와 신학교와 수도원 따위를 갖고 있습니다. 르페부르 몬시뇰이 화해에의 희망 속에 다행히 아직까지는 행하지 않고 있는 주교 성성을 결심한다면 언제라도 있게 될 정식 ‘이교’(Schisma)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이 대화의 시점에서는 아직 주교 성성이 행해지지 않았었고, 그 후 르페부르 주교도 사망했음. ᅳ 옮긴이 주). 우리들이 오늘날 교회 일치의 차원에서 과거에는 막 생겨나는 분열을 막기 위해 관련자들에 대한 최대한의 화해와 이해의 자세가 없었다고 비판한다면, 최대한의 화해와 이해는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물론 하나의 행동 지침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화해하도록 노력하고 이를 위해 온갖 기회를 활용해야만 합니다.” 라고 응답했다.
나는 말했다. “그렇지만 르페부르는 사제를 서품했고 또 계속 그러하지 않습니까?”
“교회법은 그 서품이 불법이라고는 하지만 무효라고는 않고 있습니다.” 그는 설명했다. “우리는 미리 위법한 상태에서이긴 하지만 교회에 대하여는 ‘진정한’ 사제들인 이 젊은이들의 인간적인 측면도 염려해야만 합니다. 각 개인의 출발점과 방향은 확실히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내부적인 상황에 매우 강력히 영향받아 그들의 결정을 함께 받아들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현재의 교회에 대한 환멸이 까닭이 되는데, 그 환멸은 그들을 비통함과 부정적 사고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교화의 정상적인 사목 활동 안에서 온전히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여러 나라의 신학교에서 발생한 불만스런 상황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예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분열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 화해를 희망하고 오직 이 희망으로 르페부르 주교의 사제단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르페부르 사건과 다른 시대 착오적인 반항에 원칙을 마련하기 위한 그의 처방은 바오로 6세부터 현교황까지의 최근 교황들의 방침을 상기시킨다. “이와 유사한 황당무계한 상황들이 지금껏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이 공의회 이후의 많은 자의적이고 분별 없는 해석으로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공의회의 참된 얼굴을 내 보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로 등장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와 같은 그릇된 저항에 대한 원칙을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공의회의 정신
“그러나 ‘참 공의회’에 대한 의견이 여러 가지입니다. 추기경도 말씀하셨지만 현실을 보려 하지 않는 무책임한 ‘신개선주의’의 사례들과는 별도로 일반적으로 교회의 현상황이 어렵다는 데는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 진단도 그렇고 그 치료에 관해서도 의견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의 ‘진단’에 따르면 ‘위기 현상들은 성장기에 생기는 유일한 열일 따름’이라고 합니다. 다른 이들은 이 현상들을 중병의 징후로 봅니다. ‘치료’로 보자면, 한편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문헌을 넘어서라도 보다 포괄적으로 적용할 것을 요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보다 적은 개혁과 변경을 주장합니다. 어떻게 결정해야 합니까?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지요?”
추기경은 답한다. “앞으로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제 진단은 이렇습니다. 치료받고 요양받아야 할 진짜 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치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완전히 받아들여져야 할 현실이라는 것도 아울러 강조합니다. 그러나 공의회를 사람들이 달려나가면서 멀어지는 출발점으로 볼 것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그 위에 쌓아 올려져야 할 받침으로 본다는 조건 아래서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공의회의 예언자적 기능을 막 발견하고 있는 그때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몇 문헌은 그 선포 시점에서는 참으로 그 당시의 시대를 앞서감이 드러났습니다. 그 후에 문화적인 혁명과 사회적인 변동을 맞게 되었습니다만, 공의회 교부들이 이를 결코 예견할 수 없었으면서도 그들의 ᅳ 당시엔 시기적으로 빨랐던 ᅳ 답이 그 후세에 얼마나 필요했던 것인지를 혁명과 변동은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현시점에서 문헌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특별히 중요하다는 점은 자명합니다. 공의회의 문헌은 우리에게 오늘의 문제와 제대로 맞설 바른 도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공의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참된 공의회에 ‘힘입어’교회를 재건하도록 소명을 받았습니다.”
진단을 계속하면서 그는 다음 내용을 상기시켰다. 이 참된 공의회는 “이미 공의회의 기간 중에 그리고 공의회가 끝난 후에는 더 더욱, 사람들이 자기 스타일로 받아들인 ‘공의회 정신’, 사실은 공의회에 ‘반대되는 정신’이지만, 이로 인해 반대받았습니다. 이 해로운 반 공의회 정신’(Konzils-Ungeist)에 따르면 무엇이나 ‘새로운’ 것은, 또는 보기에 새로운 것은 ᅳ 새로운 것이라 자칭하는 얼마나 많은 이단이 그간 얼굴을 드러냈는지 ᅳ 언제이건 그리고 어떤 경우이건 과거의 것보다 또는 현재 있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반 공의회 정신에 따르면 교회사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단절이 아니라 연속
이와 관련하여 그는 자기가 아주 예리해지기를 원한다고 강조하였다. “공의회 문헌은 가톨릭 정신의 연속성을 재확인할 뿐 어디서도 교회사를 공의회 ‘이전’ 과 ‘이후’로 분리하는 것을 정당화 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러한 도식에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공의회 ‘이전’ 교회도 없고 공의회 ‘이후’ 교회도 없습니다. 당신 친히 교회에 맡기신 신앙의 보배를 끊임없이 심화시키고 늘 보다 잘 이해하면서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교회사에는 아무런 비약도 없고 아무런 단절도 없고 또 연속성의 아무런 중단도 없습니다. 결코 공의회는 교회를 시대적으로 양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분석을 계속하는 가운데 그는 다음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을 토론에 붙이는 것은 공의회를 시작한 요한 23세 교황과 공의회를 충실히 이어받은 바오로 6세 교황의 의향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두 분에게는 신앙의 유산이란 다툴 수 없는 것이고 이미 보증받은 것이었습니다.”
“추기경께서는 혹시 일부의 사람들이 하듯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 관심사인 ‘사목적’인 측면을 강조하시려는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믿음을 ‘바꾸려고’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새롭게 현재화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대화는 분명한 정체성의 토대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뭔가 말할 것이 있고 고유한 정체성을 획득한 경우에만 자신을 ‘열’ 수 있고 ‘열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황님들과 공의회 교부들이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분들 중 일부는 오늘의 관점에서는 너무 무비판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판단될 수 있는 낙관론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이 현대 세계의 긍정적인 것에 깊은 신뢰감을 갖고서 자신을 개방할 수 있다는 의견이셨다면, 그건 바로 그분들이 그 정체성, 그 믿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근년에 와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세상의, 그러니까 현대의 지배적인 사고 방식에 자제되지 않고 여과되지 않은 개방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신앙 유산의 토대를 토론에 붙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겐 신앙의 유산이라는것이 더 이상 분명치도 않구요. 사실교회 밖에서발생하기는 했지만, — 정제되고 정돈되면 —사물의 교회적 시야에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가치들이 있지요. 근자에 들어 사람들은 이러한 일에 관심을 가졌지요. 그렇지만 이 두 현실이 서로 충돌 없이 만날 수 있다거나 아니면 완전히 동일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면, 교회도 세상도 모르는 소치입니다.”
“그럼 추기경께서는 ‘세상에 대한 반대’라는 옛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하시는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그들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인간에 관한 진리를 전파하면 세상이 반대하는 것이지요. 죄와 은총이 기탄 없이 이야기되면 세상은 분노합니다. 무분별한 ‘자기 개방’의 단계를 지나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소수에 속하고, 가끔 인간의 심성에 당연한 것으로 그럴 듯하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곧 신약성서가 ᅳ 확실히 긍정적이지 않은 의미로 ᅳ ‘세상의 정신’이라 부르는 것에 반대하는 자임을 다시금 의식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비타협주의에의 용기를 재발견하고, 대결할 수 있는 능력, 주변 문화의 다양한 경향에 주의를 환기하고 동시에 증상은 안 좋은 데도 느낌은 좋은 공의회 이후의 연대를 단념할 역량을 재발견할 때에 이른 것입니다.”
회복?
이 시점에서 ᅳ 대화의 전부가 그랬던 것처럼 이 때도 역시 신학교의 뜰에 면한 방의 정적 속에 녹음기는 사각 사각 돌아가고 있었다 ᅳ 나는 라칭거 추기경한테 질문을 하나 던졌는데 그 답은 가장 활기있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 반응은, 문제되는 낱말(‘회복’)에 감정이 섞여 있을 뿐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흔히 생기는 미숙함 때문에 야기된 것인데, 그 낱말의 내용은 오래된 과거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ᅳ 적어도 우리들의 견해로는 一 과거란 정녕코 되풀이할 수도 없으려니와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신앙교리성 장관에게 물어 보았다. “장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해 보면, 교회의 고위층은 공의회 후 시대의 첫 단계를 종식시키려 한다고, 또 (비록 확실히 공의회 이전의 시대로의 회복은 아니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참’ 문헌으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교회 고위층은 일종의 ‘회복’을 시작하고자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여기에 추기경의 답을 그대로 옮긴다. “’회복’이라는 말이 후퇴를 뜻한다면, 그러한 회복은 도무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역사의 완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찾아오실 주님을 앞서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뒤로 돌아가다니요, 뒤로는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뜻에서라면 역시 어떠한 ‘회복’도 없습니다. 그러나 ‘회복’을 세상에 대한 갖가지 지나친 무분별한 개방 후의, 불가지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세상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해석한 후에 새로운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라 이해한다면, 그래요,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 즉 가톨릭의 전체성 안에서 여러 방향과 가치의 균형을 새로 잡으려는 의미의 ‘회복’은 지극히 바람직스럽고 교회 안에서는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뜻에서라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의 첫 단계는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얘기치 못한 결과들
추기경이 내게 말했듯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상황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분위기는 지금까지 우리를 행복감에 젖게 해준 것들을 볼 때 악화되었고, 그 행복감의 열매들이 이제 우리 앞에 경고를 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시대의 징표에 대하여 깨어있어야 한다는 저 ‘현실론’을 취하도록 격려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람들이(비현실적으로)마치 제2차 바티칸 공의화가 전혀 없었던 양 길을 되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보고 있는 바와 같이 구체적인 결과 중 많은 것은 공의회 교부들의 의향에 맞지 않아요. 그러나 분명 우리는 ‘공의회가 아예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공의회 사가요 위대한 학자, 영국성공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신 헨리 뉴먼 추기경은 말씀하시기를, 공의회는 언제나 교회에게는 위험이며, 그러므로 소수의 사항만 다룰 것이요, 그렇게 오래 끌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개혁이라는 것이 시간과 인내와 위험 부담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개혁은 위험하니 하지 말자’ 하는 것도 안될 일입니다. 오히려 제가 믿는 바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정한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 공의회의 진정한 수용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공의회의 문서들은 피상적이거나 한마디로 부정확한 출판물의 홍수 속에 즉각 사장되어 버렸습니다. 공의회 문헌의 ‘글자’를 읽어 보면, 그 참된 ‘정신’을 찾게 해 줄 것입니다. 그 정신이 사실대로 재발견된다면, 저 위대한 문서들은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게 해 줄 것이요. 새로운 힘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거듭 말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오해함으로써 교회 안에 야기된 손실들을 명백히, 따라서 뼈아프게 바라보는 가톨릭 신자는 바로 그 제2차 공의회 안에서 재활의 가능성도 찾아야만 합니다. 공의회는 주님의 것이지, 파괴적인 결과가 초래되는 길을 계속하려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공의회를 마치 ‘성직자 시대에서부터 내려온 화석’처럼 바라보는 사람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는 더 이상 관계할 바를 모르는 사람들의 공의회가 아닙니다.”
나는 말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Unicum(유일무이한 것)이라는 것, 그것이 긴박한 문제나 위기의 압력하에서가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관련해서 보자면(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조용한 시점에서 소집된 사상 최초의 공의회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지적되었습니다. 위기는 나중에 들어온 것이고,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들어왔습니다.(그런데 추기경께서 앞서 암시하신 것의 하나로 돌아가자면) 교회가 저 문화 혁명을 극복했어야 했다고, 그러니 공의회가 없었다면 교회의 구조가 더 경직되어 손실이 더 커졌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공의회 이후의 보다 융통성 있고 보다 유연한 교회 구조가, 비록 매사에 더 비싼 대가를 치르기는 했지만, 어쩌면 충격에 보다 잘 대응할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추기경은 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요. 역사는, 특히 하느님께서 신비로운 길에 따라 인도하시는 교회의 역사는 우리가 가정법으로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60년대 초기에는 2차 대전 후의 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이미 재건된 세계를 만나, 그래서 뭔가 달리 참여를 위한, 일신을 위한 계기를 찾고 있는 전후 세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진보에의 낙관론과 신뢰가 전반적인 분위기를 결정했습니다. 그 밖에 교회 안의 모든 사람들은 교회의 가르침이 앞으로 조용히 전개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검사성(현 신앙교리성) 제 전임자 옷타비아니 추기경도 교회 일치를 위한 공의회 사업을 지지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한 23세 교황께서 공의회의 소집을 공고하신 후, 성청은 세계 주교들 중에서 특히 저명한 대표들과 함께 공의회 교부들이 너무 이론적이고, 너무 교과서적이며, 사목적 성격이 불충분하다고 해서 기각한 저 초안(Schemata)의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교황 성하는 기각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분께서 동의하신 이 문서에 관한 신속하고 마찰 없는 표결을 기대하셨습니다. 명백히 그 내용 중 어느 것도 교의를 바꾸고자 하지 않았지요. 그것은 교의를 종합하는 것이었고, 기껏 해야 이제까지 분명히 정의되지 않았던 점들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간 전개였던 것입니다. 공의회의 교부들이 이 문서들을 거부 했던 것도 그러한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불충분한 표현 방식이라든가, 이제까지 없었고 지금도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몇 가지 정의(定義)결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의회가 요한 23세 성하께서 기대하신 경과를 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네덜란드, 스위스, 미국과 같은 나라들은 전통주의와 로마에의 충성의 아성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공의회가 교회에게 앞으로의 비약이요 쇄신된 삶이며 하나의 새로운 일치를 뜻했으면 하는 요한23세 성하의 기도가 교회 전체로 보아 ᅳ 적어도 아직까지는 ᅳ 받아들여지지 않았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희망의 징표들
나는 불안해서 물었다. “그러면 공의회 이후 시대의 교회의 현실에 대한 추기경님의 부정적인 시각은 얼마간의 긍정적인 요소도 인정치 않는다는 것인지요?”
그는 대답한다. “역설적입니다만 확실하게 부정적인 것이 가장 먼저 긍정적인 것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많은 신자들이 출애굽을 경험하고, 이데올로기와의 타협주의의 결과를 체험했으며, 세상의 구원과 자유와 희망을 기대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없는 삶, 믿음 없는 세상이 어떤 꼴인지 사람들은 이제까지 이론으로만 알았었지요. 이제는 그 실상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실상의 공허 안에서 우리들은 믿음의 풍요로움, 믿음의 필수불가결함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힘겨운 정화 같은 것이었고 마치 불을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는데, 그 과정이 하나의 깊은 믿음의 가능성을 열었던 것입니다.”
추기경은 계속했습니다. “모든 공의회가 먼저 ‘상층부’의 개혁이고 그 다음에 저변의 신자들로 이행해야 함을 망각하지 않아야겠습니다. 공의회가 결실을 가져오려면 어떤 공의회에나 거룩함의 물결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가 그러했었지요. 그래서 참된 개혁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었던 것 입니다. 거룩함은 교회의 경우 그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룩함이 교회 지도부의 명령에서 온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결과가 언젠가 교회사의 광채로운 시대로 여겨질 수 있을지 어떨지는 공의회에 생명을 부여하도록 부르심 받은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밀라노에서 성 가롤로 보로메오를 기념하면서 말씀하셨듯이,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 새로운 개혁자도 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새로운 성인들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버티었다. “추기경께서는 그러므로 교회사의 이 시대에 ᅳ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기인하는 것 말고는 ᅳ 다른 아무런 긍정적인 결과도 인정치 않으신단 말씀입니까?”
“저야 긍정적인 것들을 물론 보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예컨대 한국 교회와 같은 젊은 교회의 약진이라든가 박해받아 온 교회의 활력은 차치하도록 하겠어요. 이러한 것들은 바티칸 공의회에는 거의 직접 까닭을 돌릴 수 없고 또 위기 현상들을 직접 공의회 탓으로 여겨서는 안되기 때문이지요. 교회 전체에 희망차게 울리는 것은 ᅳ 바로 서방에서는 교회가 위기인 마당에—아무도 계획하지 않았고 아무도 호소하지 않았던 바인데, 단순히 믿음의 내적 활력 자체에서 오는 새로운 움직임들의 태동입니다. 이러한 여러 움직임 안에는—더디기는 하지만 ᅳ 교회의 성신 강림의 순간과 같은 무엇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성령 운동이라든가, 꾸르실료, 훠꼴라레, 성체와 자유(Communione e Liberazione) 등을 들고 싶습니다. 확실히 이 모든 움직임은 여러 문제도 노정하고 있고, 그 안에 크건 작건 위험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다 그러지요. 현재 저는 교회의 완전한 믿음을 갖추고 온전히 믿음에 살고자 하며 그 안에 커다란 선교적 활력을 지닌 젊은이들의 동아리가 꾸준히 늘어 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 생활은 열심이지만 거기엔 내심에의 도피도 없고 사적인 것으로의 후퇴도 없으며 있는 것은 단순히 충만한 나뉘지 않은 가톨릭적인 것뿐입니다. 여기서 느끼는 신앙의 기쁨은 그 안에 널리 번지는 무엇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사제직과 수도 생활에의 새로운 성소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모든 움직임이 어떠한 사목적인 기획 부서에서 고안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자생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교회 당국은 ᅳ 당국이 아주 진취적이고 싶어한들 ᅳ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건 교회 당국에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도들 현재의 모습에의 접함에 긴장은 있습니다만 그 자체로서 교회의 교계 제도와의 긴장 관계는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하나의 새 세대가 부상하고 있어요. 저는 부푼 희망 속에 이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정신이 우리의 계획보다 훨씬 강하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리 발휘되고 있어서 놀랍게 여기는 바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쇄신은 완만하게, 그러나 효과 있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자기 모순과 부정의 취향에 사로잡혀 있던 낡은 형식은 사라지고 어언 새로운 모습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새로운 모습은 지배적인 관념들과의 대화에 아직은 제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조용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과제는— 교회의 교직자들과 신학자들의 과제는 ᅳ 이 새로운 모습에 문을 열어주는 것,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현재 아직 지배적인 경향은 실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직접적이고 종교적인 ‘기상 전망’을 바라보는 자라면 계속하여 신앙과 교회의 위기를 이야기해야지요. 이러한 위기 상황에 편견 없이 맞설 때에만 우리는 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목 170호, 121-132면.
또한 과거보다 교황청이 성 비오 10세회에 대해 온건한 스탠스를 취한다고 해서, 교황청이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말을 '옳다.'고 인정한 것도 아니다. 당장 트리엔트 미사에 대한 교황청의 허용만 하더라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입장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오로 미사의 '결함'을 주장하며 트리엔트 미사를 고집했지만, 교황청은 트리엔트 미사와 바오로 미사가 둘 다 '옳으므로' 트리엔트 미사를 허용한 것이다. 이 둘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물론 성 비오 10세회 및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그리고 기타 전통 가톨릭주의자들의 트리엔트 미사에 대한 요구가 '여론'이라는 의미에서는 트리엔트 미사의 허용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나, 트리엔트 미사에 대한 허용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전반적 입장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수용'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이 둘은 다르다.
4.2.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정치적으로는 포르투갈의 안토니우 살라자르 정권과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등 권위주의 독재정부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켰다는 이유로 옹호한 것, 이슬람에 대한 지나친 일반화와 과격한 편견을 표출한 것, 비시 프랑스 하의 가톨릭 교회를 옹호한 것,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 장마리 르펜 및 국민전선과 연대한 것 등 극우 성향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부분은 마르셀 르페브르에 대한 다른 비판이 주로 교리 문제에 근거하여 교회 내에서 가해지는 데 비해, 교회 바깥의 사회적 인식과도 큰 관련을 가진 비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만 하다. 유럽의 진보주의자들(대부분 무신론자나 진보적 개신교인)은 정교분리를 당연시하는 세속주의적 원칙에 따라 기독교(특히 가톨릭)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유럽의 역사에서 가톨릭 교회는 천년 이상의 긴 세월동안 정치권력 구조의 중요한 일부분이었고, 이 때문에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18~19세기 이후에는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가장 중요한 보루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기억 때문이다. 유럽의 정치사에서 가톨릭은 절대왕정시기부터 대부분의 사회 변화에 저항한 아주 강경한 복고주의적 보수의 함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때문에 가톨릭의 영향력(특히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대한 우려는 유럽(특히 가톨릭의 영향력이 큰 국가들)의 급진주의나 진보주의, 자유주의에서 세속적 보수주의에 이르는 넓은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가톨릭이 반동적 극우세력이나 파시즘 세력과 손을 잡고 사회를 과거로 되돌리려고 시도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 가톨릭의 교세가 강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독재정권들이 자국 교회를 주요한 권력 파트너로 삼아 정권을 공고히 한 바 있고, 교회 역시 아직 교황령 내에서의 세속 권력을 가지고 있던 19세기 후반 비오 9세 무렵만 해도 멀쩡한 유태인 집안 아이를 유괴해다가 세뇌해서 가톨릭 사제로 키우는(...) 만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등의 전과가 있었다.
이 측면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속주의적 정치세력들에게도 높게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말하자면 종교의 사회적 영향권을 순수하게 종교적 영역으로 재설정함으로써 변화한 사회상과 조화를 이루고 이전까지 분쟁관계였던 진보주의, 자유주의 정치세력과도 화해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던 것. 따라서 이에 저항하여 종교 원리주의의 유지를 주장한 마르셀 르페브르의 주장은 사회적으로 경계의 대상이나 엄중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르페르브가 지도한 성 비오 10세회 내에서 권위주의 독재정부나 극우 파시즘에 대한 지지나 종교적 배타주의, 반유대주의적 흐름이 적지않게 튀어나오면서 이런 우려가 근거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 버린 셈이다.
5. 여담
그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2012년 제작되었다. 제목은 <르페브르 대주교 - 다큐멘터리 필름>(Marcel Lefebvre – Archbishop in Stormy Times)이다. 한국어 더빙판을 본 링크에서 볼 수 있다. <르페브르 대주교 - 다큐멘터리 필름>(Marcel Lefebvre – Archbishop in Stormy Times)베르나르 티시에 드 말르레 주교[32]가 엮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전기인 《마르셀 르페브르》가 있다. 한국에는 2011년 번역되었다. 일반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고 성 비오 10세회에 가면 구할 수 있다. 이 책 외에도 르페브르 대주교의 강론 모음집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도 한국어로 번역되어 1999년 선우미디어에서 출판됐다.
개인적 성품은 온화하면서 단호했다고 한다. 교회에서 강론할 때나 타인과 대화할 때나 흥분하지 않고 조근조근하게 말했다고. 단 위에서도 보다시피 말투는 조곤조곤 하면서도 말 자체는 상당히 과격하게 하였다.
[1] 마르셀은 마르첼로를 프랑스식으로 읽은 것이다.[2] 다카르 대목구 사도 목사직은 1947년 6월 12일부터[3] 혼전성은 우아틴[4] 요한1서 4장 16절.[5] 서구 가톨릭 언론을 보면 어느 쪽으로 평가하든 트리엔트 전례의 존속에 관해서는 그와 SSPX의 기여를 부정하는 평가는 드물다.[6] 결혼 전 이름은 가브리엘 우아틴[7] 마르셀의 형과 아버지는 이름이 같다.[8] 1804-1852, François Libermann, 본명 Jacob Libermann[9] 성신신부회 총장직에서 물러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 학생들 중 전통주의자들이 접촉을 해왔다.[10] 에콘 신학교[11] 《마르셀 르페브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말르레, 한국 성 비오 10세회, p838[12] 여기서 나타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측 반응에서도 대응 방식의 문제가 드러난다. 이런 사제들의 행각을 봤으면, 교황청에 시찰 온 사제들의 문제점이 있음을 보고하고 제대로 된 다른 시찰단을 보내주면 순명하겠다고 요청할 수도 있는데, 대놓고 11월 21일 선언을 통해 교황청 자체를 반대하는 식의 행보를 보였으니...[13] 장 기통은 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순명했지만 동시에 성 비오 10세회의 입장도 이해하는 사람이어서, 나중에 인터뷰에서 본인이 만약 교황의 자리에 있다면 트리엔트 미사를 특정한 상황 하에 허가해줄 생각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14] 이 1번 해결책을 선택한 쪽이 현재 교황청 지도 아래 합법적으로 일치되어 활동하고 있는 전통 가톨릭 단체들(성 베드로 사제회, 그리스도왕회, 착한 목자회 등)이다.[15] 가톨릭 교회법상, 이론적으로 교황 선출 자격은 모든 세례받은 성인 가톨릭교도 남성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관례상, 역사상 적어도 추기경은 되어야 교황 후보에 적합하다고 여겨져 왔던 상황에서 주교에게, 그것도 전임 교황과 대척점에 섰던 주교에게 표가 갔다는 것은 당시 자유주의자 내지는 진보주의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16] 1904 ~ 1991. 브라질 출신의 전통 가톨릭 성향 성직자로, 파문 직전에는 브라질 캄포스 교구의 교구장 주교였다.[17] 당시 르페브르 대주교는 83세의 고령인 데다 암에 걸려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를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교 성성은 그에게 하루라도 빨리 처리해야 할 시급한 문제였다. 교황청은 1명의 주교 서품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주교 성성 허용은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러자 르페브르는 4명을 서품하여 반발한 것.[1)] 1988년 6월 16일의 “보도 자료”, 로쎄르바또레 로마노, 영어판, 1988년 6월 27일, 1-2면 참조.[2)]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헌장 Pastor Aeternus, 3장: DS 3060 참조.[3)] 교회법 제751조 참조.[4)] 교회법 제1382조 참조.[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헌장 8항.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헌장 Dei Filius, 1장: DS 3020 참조.[6)] 마태 16,18; 루가 10,16: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헌장 Pastor Aeternus, 3장: DS 3060 참조.[7)] 교회법 제386조; 바오로 6세, 사도적 권고 Quingue iam anni, 1970년 12월 8일: AAS 63(1971) 97-106면 참조.[8)] 교회법 제1364조 참조.[9)] 경신성, 서한 Quattuor abhinc annos, 1984년 10월 3일: ASS 76(1984) 1088-1089면 참조. *[27] Bernardin Gantin, 1922 ~ 2008. 베냉 출신의 추기경으로, 추기경단 수석(오스티아 명의 주교)까지 역임한 성직자이다.[28] 방한 계획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했다.[29] 십자가상 희생제사[30]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 마르셀 르페브르, 선우미디어, p26-49[31] 물론 일각의 오해와 달리 '처치 밀리턴트' 등 상대적 소수를 제외하면 많은 교황청과 온전히 일치했거나 완전히 화해한 전통 가톨릭 성향 가톨릭 신자들은 주교 성성은 비판하지만 르페브르 대주교의 일부 행보(트리엔트 미사, 사제 서품 등)는 불가피한 점이 있었다고 인정하는 편이다.[32]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1988년 주교가 된 4명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