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6 20:23:27

프랑코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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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1943의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파일:whattheydo.png 파시즘 여부 논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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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국
Estado Español (1936~1975)
에스파냐 왕국
Reino de España (1947~1975)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77년).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Coat_of_Arms_of_Spain_(1945-1977).svg.png
국기 국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panish_State.png
1936년 ~ 1975년
국가 척탄병 행진곡(Marcha Granadera)[1]
위치 오늘날의 스페인, 아프리카 식민지
수도 부르고스(1936년~1939년)
마드리드(1939년~1975년)
인구 27,900,000명(1950년)
정치 체제 왕정(명목상)[2]
일당제 독재
국가 원수 카우디요 (총통) → (명목상)
정부 수반 카우디요 (프란시스코 프랑코)
언어 스페인어[3]
종교 가톨릭
민족 스페인인
주요 사건 1936년 스페인 내전
통화 에스파냐 페세타
성립 이전 스페인 제2공화국
멸망 이후 스페인 왕국

1. 개요2. 정치
2.1. 권력의 집중2.2. 파시즘 혹은 권위주의2.3. 민족주의2.4. 가톨릭주의2.5. 역대 국가 원수2.6. 역대 내각 수반(수상)
3. 사회
3.1. 문화3.2. 산업3.3. 민주화 운동
4. 프랑코의 사망과 독재의 종식5. 관련 문서

1. 개요

1936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군부 세력이 스페인 제2공화국에 반대하여 내전을 일으키고는 승리하여 세운 스페인의 정치 체제.

1936년부터 공식 국호로 스페인국(에스파냐국, Estado Español)을 썼지만 1947년에 보르본 왕조 복고를 선포하면서 스페인 왕국(Reino de España)이라는 국호도 쓰였다.[4] 일반적으로는 프랑코의 스페인(España franquista), 프랑코 독재정권(dictadura franquista), 프랑코 체제(régimen de Franco)라고 많이 부르는 편이다. 3년의 걸친 스페인 내전 끝에 1939년 스페인 전역을 장악했고 이후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할 때까지 일인 독재/일당 독재[5]를 펼쳤다. 프랑코 사후 프랑코의 유언에 따라 왕정 복고가 이루어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한 이후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지게 된다.

2. 정치

2.1. 권력의 집중

1938년 8월에 내전에서 승기가 굳어지자 프랑코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법률과 법령을 공포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이어서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1939년에는 팔랑헤만이 유일한 스페인 내 합법 정당으로 선포되었고 1942년에는 정부 조직법을 통과시켜 모든 권력을 중앙 정부와 총통(Caudillo)에게 집중시킨다. 애초에 직접 선거로 뽑히지도 않았던 의회는 단순히 자문 기구로 전락해버렸고 모든 법률은 정부에 의해서 상정되었다. 기존 스페인 제2공화국이 카탈루냐, 바스크 지역에게 줬던 자치권 역시 당연히 폐지. 모든 지방 정권의 수장들은 프랑코에 의해서 임명된다.

2.2. 파시즘 혹은 권위주의

프랑코 정권이 파시즘 정권이었는가 아닌가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는 파시즘 정권이지만 최근 들어 몇몇 스페인의 사학자들은 프랑코 정권을 파시즘으로 분류하기보다 단순히 권위주의 독재 정권으로 분류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유는 프랑코 정권이 어떤 하나의 통일된 이념을 갖춘 것이 아니라 지주/가톨릭/군부 등 다양한 세력들이 각자 다양한 목표를 가지고 결합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프랑코 본인만 하더라도 무정부주의공산주의에 격렬한 반감을 드러냈을 뿐 그 외에 딱히 특별한 정치적 지향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등에 비교해도 프랑코 정권은 일단 존속 기간이 사십년 가깝게 압도적으로 길었고, 2차대전과 함께 사라졌거나 대전 이후 새로 생긴 독재 정권들과 달리 대전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모두 겪었다. 그만큼 프랑코 정권의 성격을 '파시즘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이에 따라 부분적으로 구 내전 이전 정치적 파벌을 정리하고, 어느정도 정상적인(?) 독재국가(?)가 되어 능력주의에 기반한 관료 엘리트들에게 국정을 위임하기 시작한 50년대 이후로는 확실히 '권위주의 우파'정권에 가까워졌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내전 기간 도중과 나머지 유럽은 대전 중이었던 전시 직후 체제까지 프랑코 정권이 자행한 자국민의 정치적 '청소'에 가까운 대량 학살과 사상적 색출, 탄압,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정치적 반대파를 아예 마치 다른 인종인 마냥 타자화 하기 위해 동원했던 안토니오 바예호-나헤라의 유사 우생학적 이론과 그 사회적 여파까지 고려하면 정권 초기에는 소위 '오리지널'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보다 확실하게 억압적이고 폭력성으로도 다른 파시스트 집단(나치 독일, 헝가리 화살십자당, 루마니아 철위대 등)에 뒤지지 않는다. 보통 이런 자국민 학살 규모의 폭력적 탄압이 사그라들고, 정치범도 그나마 '재판' 비슷한걸 거치면서 사형보다 투옥을 하며 이후로 점차적으로 누그러지기 시작한 기점은 연합군의 승리가 명백했던 1944년으로 보며, 이런 (나머지 유럽과 세계 정세 변화에 맞물린) 프랑코 정권의 성격 변화는 파시즘 자체의 정의 문제와는 별개로 파시스트라 부를만큼 폭력적 대중동원, 사상적 과격화를 했냐 안했냐를 판단함에 있어 의미 있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프랑코의 팔랑헤 정권은 권위주의적인 철권 통치로 일관했다. 모든 정치적 결사와 노동 조합은 폐쇄되었고 좌파인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모조리 투옥되었다. 표면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현대 독재 정권과 달리 프랑코 정권은 대놓고 민주주의를 부정했고 그래서 민주주의를 옹호했다가 체포된 사람까지 있었다. 표현의 자유 역시 존재할 리가 만무했다. 언론이 정부를 조금이라도 비판했다가는 바로 폐간되고 신체와 생명의 위협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여기에 프랑코가 직접 조직한 비밀경찰이 사회 곳곳을 감시하면서 반정부적인 움직임이 나타나는지 안 나타나는지를 감시하기까지 했다.

2.3. 민족주의

프랑코는 '하나의 스페인'을 만드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페인의 각 지역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심히 못마땅했던 프랑코는 기존의 제2공화국이 각 지역에게 부여했던 자치권을 뺏은 것은 기본이고 바스크어, 카탈루냐어 같은 지방의 토착어까지도 '비스페인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철저히 탄압했다.[6] 반대로 '스페인적인 것' 혹은 스페인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투우플라멩코는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프랑코의 40년 독재를 겪은 이후 스페인에서 '민족', '국가'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정치체, 정부 등 기관의 역할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이는 국가라는 뜻의 단어인 estado는 금기시되어 현대 스페인에서도 자국의 국체를 표현할 때 일부러 pais,[7] nacion 같은 더 애매모호하지만 덜 권위주의적인 단어를 쓰게 되었다.

2.4. 가톨릭주의

프랑코 본인의 신앙심은 논란이 되고 있지만 팔랑헤 당원들 대부분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그들에게는 가톨릭이야말로 스페인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주/가톨릭 교회/군부 등등 온갖 다양한 세력이 이합집산한 팔랑헤당에서 가톨릭이야말로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프랑코 정권은 굉장히 교회에게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해 준다. 결혼과 이혼은 무조건 교회의 성사를 통해서 진행되어야 했고 제2공화국 시기 몰수된 교회의 재산을 반환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금 가톨릭 사제들이 스페인의 공교육을 담당하는 것까지 허락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취하는 것도 모자라서 막대한 금전적 지원까지 했다. 1953년에는 교황청과도 협상을 체결해 교황청이 직접 스페인의 주교를 임명하는 정책을 재개하기에 이른다.

2.5. 역대 국가 원수

2.6. 역대 내각 수반(수상)

  • 프란시스코 프랑코(1936~1973)
  •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1973.1~1973.12)
  •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1974.1~1975.11)[9]

3. 사회

3.1. 문화

스페인 내전을 거치면서 재능있고 명망있던 예술인들 대부분이 살해당하거나 박해를 피해 해외로 망명을 떠났다. 파블로 피카소, 아메리코 데 카스트로, 클라우디오 산체스 알보르노즈, 가르시아 로르카, 미겔 에르난데스, 안토니오 마챠도, 루이스 부뉘엘, 페드로 살리나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등의 예술가와 문예가들이 활동했던 스페인 제2공화국 시절은 스페인 현대 문화의 황금기 중 하나였지만 프랑코 정권 하에서 종말을 맞았다.

그리고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심각한 문화적 공백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것을 메꿔준 것이 바로 스페인식 3S 정책, 그 중에서도 영화와 축구였다. 프랑코 정권은 많은 수의 영화관을 건설했고 그 결과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 스페인은 미국 다음으로 영화를 많이 소비하는 국가가 된다.

그러나 독재였던만큼 정권의 구미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으면 여지없이 가위질을 당해야 했다. 아울러 프랑코 정권은 가톨릭 교회에도 검열권을 줬기 때문에 가톨릭의 심기에 거슬리는 내용이면 또 검열되었다. 그나마 루이스 가르시아 베를랑가하비에르 바르뎀의 삼촌인 후안 안토니오 바르뎀이 탄압을 받아가면서 스페인 영화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 시절 언론, 문화 탄압 과정의 일부로 스페인에 들어오는 모든 해외 영화는 혹시나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시민이 '위험한 사상'을 접할 가능성이 있는 자막이 아니라 소위 그 '위험한 내용' 자체를 아예 원천적으로 검열할 수 있는 더빙만 강제했다.

축구 역시 프랑코 정권에 이용당했다. 레알 마드리드 CF가 대표적으로 이 시기 레알 마드리드 CFUEFA 챔피언스 리그를 5연패하는 기염을 토해내면서 스페인 대중들에게 암울한 정치 현실을 잊게 해주는 환각제로의 역할을 함으로써 프랑코 정권의 정당성에 이용되었다.

3.2. 산업

20세기 이후로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프랑코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 스페인의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특히나 3년에 걸친 내란은 스페인의 국력을 추락시켜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스페인의 산업과 특히나 식량은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 이러한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프랑코 정부가 처음에 채택한 정책은 바로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을 통한 자립'이었다. 관세를 높여서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한편으로 무역과 환율 역시 시장의 원리가 아니라 국가의 통제 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1960년대에 이르면서 프랑코 정부는 자신들의 정책을 완전히 전환시켜 국가 주도의 정책을 포기하고 시장 원리에 맡기는 한편으로 고립주의를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해외 투자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관광업의 발달이 눈부셔서 프랑코의 사망 즈음에는 해마다 3천만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스페인을 방문해 관광업은 스페인 경제에 있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자리잡는다.[10]

3.3. 민주화 운동

프랑코의 철권 통치 하에 1950년대까지 각종 민주화운동노동 운동은 스페인 내에서 거의 일어나지 못했다. 이 시기 반체제 운동은 대부분 망명객들이 외부에서 조직한 제2공화국 망명 정부가 주도한 반체제 운동 아니면 반대로 외부와 연계나 구호의 가능성 없이 북부 지방의 산맥이나 대도시의 구석에서 고립되어 소규모로 반프랑코 파르티잔 활동을 하다가 하나둘씩 격파 당했다.

하지만 195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프랑코 내각은 좌익이 하도 작살나서 우파 진영 내 일체감이 약해진 탓인지 처음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대표되는 새로운 가톨릭 교회의 개혁 운동에 긍정적인 사제들과, 총통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교회가 더 중요한 카를리스타, 제2공화정과 내전 시대의 치열한 이념 대립의 경험이 없어 전투적 반공주의라는 점에서 정권의 지도층과 온도 차이가 뚜렷했던 젊은 테크노크라트들을 중심으로 우파 내 프랑코에 대한 일괄적인 지지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후 사회 곳곳에서 각종 정치적인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다.

그리고 이 틈을 타 국외에 머무르던 공산당,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좌파 정당, 노조가 재침투하여 다시 영향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성장을 시작한 1960년대부터 다시금 노조가 비밀리에 결성되어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고 학생들 역시 반 프랑코 운동의 선두 주자로 나서기 시작한다. 심지어 1969년에는 프랑코의 동상이 시위 중이던 대학생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1972년에는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프랑코의 절대 권력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프랑코를 가장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은 믿었던 교회의 배신이었다. 물론 기존의 기성 사제들이야 변함없는 프랑코의 지지자였지만 젊은 사제들은 적극적으로 사회 변혁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대놓고 표출하는가 하면 노조나 학생 단체와 함께 민주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바스크 지역에서는 바스크 출신 사제들이 ETA에 가입하는가 하면 미사바스크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11]

4. 프랑코의 사망과 독재의 종식

1975년 83세의 나이로 프랑코가 사망한 이후 프랑코주의가 계속 유지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프랑코 사망 직후에는 비밀 경찰들이 계속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반대파들을 투옥하는 모습을 보여서 독재가 지속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팽배했지만 국왕으로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주도 하에 아돌포 수아레스가 총리로 임명되고[12] 수아레스 내각이 정치범 석방, 공안 재판부 폐지, 바스크·카탈루냐 지방의 자치 허용과 같은 정책을 실시하면서 서서히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의회 군주제와 민주적 법치 국가', '스페인 전역의 자치권 허용'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헌법이 1978년에 통과되면서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최종적으로 안착된다. 1981년에 극우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시도하는 23-F 같은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현명한 대처 덕에 무난히 진압될 수 있었다.

5. 관련 문서



[1] 지금의 스페인 국가인 왕의 행진곡이다. 프랑코 정권 시기에는 척탄병 행진곡으로 곡명을 바꿨다.[2] 1947년에 공식적으로 왕정 복고를 선언했다. 하지만 1969년 공식적으로 후안 카를로스가 계승자로 지명되기 전까지 왕실이 없는 왕정(...)이었다.[3] 단순히 공식 언어로 스페인어를 지정한 것이 아니라 카탈루냐, 바스크 지방에서 쓰이던 토착 언어를 철저히 탄압해버렸다.[4] 프랑코 정권 시절에는 헌법이 없었기 때문에 공식 국호에 대해서 명확한 성문법적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5] 프랑코가 수장으로 있는 팔랑헤당만이 유일한 정당이었다.[6] 재밌게도 프랑코 본인도 갈리시아어 사용 지역에서 태어났다. 다만 프랑코 가문은 그 뿌리가 안달루시아에 기반하고 있으며 나중에 갈리시아로 이주했다. 프랑코는 갈리시아어도 잘 구사하지 못했다. 또한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의 탄탄한 공업과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을 토대로 하나의 거대한 정치 운동으로 발전한 저 두 지방의 지방주의와 달리 갈리시아는 예나 지금이나 목가적인 어촌 중심에 개발도 별로 안 되었고 산티아고 순례지가 위치한 곳으로 정치적 근대주의와 소원한 지방이다 보니 중앙 국가에 도전할 만한 지방 민족주의가 굉장히 약했다. 경제적 역량은 떨어지고, 애초에 우파적 중앙 민족주의자들이 추종하는 민족카톨릭주의 사관 내에서 산티아고 마타모로스 신앙과 성지 같은 종교적 커넥션을 통해 갈리시아 지방의 지분이 어느 정도 보장이 되니 갈리시아인들 입장에선 굳이 독자적 지방 민족주의를 주장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7] '국가'라는 뜻으로 영어의 country와 비슷하게 정치적 의미가 덜하다.[8] 두번 다 프랑코가 위독해지면서 임시 국가 원수 대행을 맡았다.[9] 이후 스페인 왕국 체제에서 수상직을 유임하지만 1976년 7월 1일 후안 카를로스의 압박으로 사퇴한다.[10] 여담이지만 외국 관광객들이 비키니 입고 스페인 해변에서 놀러다니자 가톨릭 주교들이 프랑코에게 '우리 스페인에서는 저런 모습 절대 허용할 수 없다'라고 거세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11] 이때 프랑코가 반정부 성향의 사제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하면서 '나는 하느님에게 책임을 지지 교회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적도 있다.[12] 하지만 아돌포 수아레스 역시 프랑코 정권 시기 국영 방송사 사장직을 지내던 고위 관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