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1 10:44:14

이범석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대한민국의 외교관에 대한 내용은 이범석(1925) 문서를, 대한민국의 야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이범석(야구선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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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hattheydo.png 파시즘 여부 논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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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李範奭 | Lee Beom-seok
파일:attachment/이범석/beomseoklee.jpg
출생 1900년 12월 11일[1]
파일:대한제국 국기.png 대한제국 한성부 용동
사망 1972년 5월 11일, (향년 71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인 심근경색
본관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 17대손
직업 독립운동가, 정치인
재임기간 초대 국무총리
1948년 8월 15일 ~ 1950년 4월 20일
초대 국방부 장관
1948년 8월 15일 ~ 1949년 3월 20일
2대 중화민국 대사
1950년 12월 13일 ~ 1951년 9월 26일
8대 내무부 장관
1952년 5월 24일 ~ 1952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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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父 이문하
생모 연안 이씨, 계모 김해 김씨
배우자 김마리아
자녀 子 이부흥, 子 이인종
종교 유교(성리학)→대종교→개신교(침례회)
학력 항저우 체육학교
약력 대한 광복군 육군참모총장
제1공화국 초대 국무총리
제1공화국 초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제1공화국 2대 중화민국 대사
제1공화국 8대 내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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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304_532_4.jpg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1. 소개2. 생애
2.1. 개구쟁이2.2. 독립 운동에 투신2.3. 정치인
3. 성향4. 기타 등등

1. 소개

조국(祖國)!”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말이고, 또 생각 없이 불리며 일컬어지는 단어다. 그러나 조국이라는 이 두 글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게 제 각기 강력한 작용과 위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다시 없으리라 본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믿는 것이 옳은 내 견해이고, 내 체험의 소산이다. 『우등불』
대한민국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로, 초대 국무 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호는 철기(鐵驥).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중국 운남 육군 강무 학교 졸업, 만주의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참여, 청산리 전투 참전, 낙양 군관 학교 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참모장, 서울 진공 작전 담당, 그리고 초대 국무 총리 겸 국방부 장관 등을 역임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을 빛낸 인물이다.

2. 생애

2.1. 개구쟁이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17대손이라고 한다. 1900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어머니를 여의고, 8살 때 새어머니 김해 김씨를 맞이하여 그 슬하에서 자란다. 어려서 영특하였지만 개구쟁이였다. 일본 헌병이 말을 타고 지나가자 말에게 돌을 던지거나 새총을 쏘기도 했다. 한 번은 말이 놀라 요동치는 바람에 일본 헌병들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이 때문에 이범석의 아버지를 소환해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헌병을 대상으로 한 장난인 탓인지 그의 아버지는 별로 혼내지 않고 넘어갔다.

이범석은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한 번은 뱀을 맨손으로 잡아다가 외양간에 가서 들 항문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뭐라 말해야 할까? 소들이 놀라 경기를 일으키다가 하나 둘씩 푹푹 쓰러져 그대로 죽었고, 아버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이범석에게 도끼를 던졌다.[2]

그러나 새어머니 김해 김씨는 어린 아이가 그 정도 장난도 칠 수 있지 않느냐며 이범석을 편들어 감싸줬고, 아버지가 던진 도끼를 몸으로 막기까지 한다. 도끼는 새어머니의 무릎에 맞았고 새어머니는 이후 절름발이가 된다.

뒤에 이범석이 독립 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나고 집안은 일본 경찰 감시하에 놓인다. 그러나 새어머니는 그가 노숙자 생활을 하며 끼니를 거르지 않나 염려하며 그를 찾아 만주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정작 자신이 낳은 친자녀들은 본국에서 일본 감시하에 놓이게 됨에도... 새어머니의 지극 정성에 감복하여, 이범석은 새어머니와 배다른 동생들에게 더욱 각별하게 된다.

2.2. 독립 운동에 투신

1907년 자신을 친동생처럼 보살피던 집안 머슴 출신의 대한제국 군인이 정미 7조약이 강요한 군대 해산에 저항하다 죽는 것을 보고 항일을 결심했다. 1915년 경성 고등 보통학교 3학년 때 한강에서 수영을 하던 여운형[3]을 만나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상하이에서는 이범석의 매형인 신석우가 살고 있었고, 이범석은 신석우가 함께 살던 신규식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이때 신규식이 중국 동맹회 회원으로 쑨원 등과 인연이 있었기에, 이범석은 쑨원의 소개[4]로 1917년 운남 육군강무학교[5]기병과를 들어가 191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6]

1919년 5월에 3.1 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이범석은 상하이로 돌아갔지만, 상하이에서는 무장 투쟁이 여의치 않아 만주로 이주한다. 만주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고, 1920년 봄에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옮겨 사관 연성소 교수 부장이 되었고 10월 청산리 대첩에 참여했다. 이승만은 이 소식을 듣고 이범석에게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노고를 칭찬하는 친필 서신을 매년 보냈으며, 만년필, 종이, 호랑이 가죽 피복을 선물로 보낸다. 이범석은 그대로 감격을 먹게 된다.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에 밀려 연해주 이만(달네레첸스크)으로 넘어가 다른 독립군과 합류했다. 1921년 초 무장 해제를 요구받자 김좌진서일 등 북로 군정서의 일부는 만주로 돌아갔는데, 이범석은 김좌진보다 앞서 만주로 돌아갔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중국과 러시아 이만을 왔다갔다하며 독립군을 모았다고 한다.

이범석은 1923년 러시아에서 김규식의 고려 혁명군(대한 독립 군단) 기병 대장을 맡았다고 회고했는데, 동아일보의 1922년 11월 기록에 이미 시베리아에서 이범석이 김규식의 기병 대장으로 활약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23년 11월 연해주에서 백군이 축출되자 러시아 공산주의 세력은 고려 혁명군을 무장 해제시키려 했고, 반발한 김규식 등은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범석도 아마 같이 중국으로 돌아간 듯 하다. 그러나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소련 합동 민족군 연해주 지구 지휘관으로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이범석은 만주에서 김좌진, 김규식 등과 활동했고 1925년 김좌진이 주도한 신민부에 참여했다. 이 무렵 연인인 올레리야가 자살했고, 김마리아와 결혼했다. 1927년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로 내분을 겪자 이범석은 신민부를 이탈했다. 1928년 고려 혁명군 (결사단)을 조직해 무장 테러 활동을 나섰지만, 주요 동지들이 체포되고 장쉐량의 탄압이 강해지자 중앙 아시아로 도피했다. 만주 사변 즈음에 쑤빙원의 부름으로 중국으로 돌아왔다가, 마잔산의 작전 참모와 중국 동북 항일군 작전 과장(중국군 소장)이 되었다. 1932년 마잔산이 일본군에 밀려 소련으로 도주했을 때 이범석도 같이 포로처럼 수용되었지만, 중국과 소련의 국교 회복 후 주소 중국대사 옌후이칭의 중재로 협상을 거쳐 풀려났다. 1933년 4월 석방된 이범석은 국민 정부 군사 위원회의 지시로 군사 시찰단이 되었는데, 독일에 갔을 때가 때마침 히틀러 정권이 출범한 시기였다.

이범석은 나치의 경제 재건에 감명을 받았고, 독일에서 공부하던 한국인 유학생 '명'[7]의 영향으로 나치즘에 우호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범석은 로마를 거쳐 6월에 상하이로 귀국했고 김구의 부름으로 중국 중앙 육군 군관 학교 교관 및 학생 대장이 되었다. 1936년 시안 사변 이후 양후청 밑에서 기병 연대장을 했고, 장제스의 명으로 양후청이 중국을 떠나자 한푸취의 고급 참모가 되었다. 한푸취가 처형된 뒤에도 주임 참모로 활동했으며, 1939년 중국 국민당 중앙 집행 위원회 훈련 위원회 훈련단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여기서 파시즘적인 사상 훈련과 영향을 받았다.

이후 1941년 1월까지 중앙 훈련단에서 중대장, 교관 등을 지냈으며 1940년 9월 19일 한국 광복군의 참모장으로 인선되었지만, 광복군이 국민 정부에 예속되는 형태로 바뀌면서 1942년 3월 참모장은 중국인 인청푸가 되고 이범석은 부참모장 및 참모 처장이 된다. 인청푸는 이범석이 국민 정부의 말을 잘 듣지 않아서 자신이 참모장이 되었다고 회고했다.[8]

1942년 8월에는 부참모장 자리를 버리고 제2지대 지대장을 맡았는데, 이는 김원봉의 합류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공 합작에 반발하는 차원이었다. 이후 OSS와 협작하며, 서울 진공 작전을 준비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여담으로, 임정 시절 장준하는 이범석을 좌파 냄새가 난다며 깠다(...).[9]

참고 문헌

2.3. 정치인

8.15 광복 이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뒤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국가지상, 민족지상"을 내세운 청년 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창설한다.[10] 이러한 그의 행보는 상대편으로 하여금 그를 조선의 군국주의자, 심지어는 히틀러 추종자란 비판을 받게 만들었고, 족청은 이범석 유켄트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실제로 히틀러가 죽고 나치 독일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11][12] (사실, 당시 극우 반공 민족주의를 주장한 정치인들 대부분이 히빠였다. 장제스라거나... 여담이지만 1940년대 초반인 일제 말기에는 나의 투쟁을 비롯하여 극우 민족주의 및 파시즘을 섭렵하는 히빠 독립 운동가도 소수지만 존재했다...) 자동차를 탈 법한데 아침마다 을 타고 경무대에 출근하기도 했다.

대단한 이승만 추종자였으며, 이승만에게 잘 보인 덕에 초대 국무 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승만의 최측근인 윤치영의 후처 이은혜의 인척이기도 했다. 허정은 자서전에서 그가 윤치영 후처인 이은혜에게 누님 누님하며 쫓아다녔다고...

여순사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 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서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국회 속기록에도 나온다... 훗날 실리 문서에 의하면 김구와 백의사염동진은 극우 반대파, 제4연대장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고 한다. 실리 보고서. 그런데 제4연대장은 최남근으로, 여순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6.25 전쟁 중에 한강 철교 폭파를 건의했고[13], 부산에서 장택상과 이승만에 대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발췌 개헌). 이범석은 계엄군을 동원해 국회 의원 통근 버스를 연행하여 발췌 개헌을 통과시키고 이승만 장기 집권에 공헌하였다(부산 정치 파동 이후 1차 개헌).

사실 한강 철교 폭파는 인민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언젠가는 해야할 일이었다. 27일 국방부에서 열린 군사원로회의에서 김홍일 장군의 한강선 결전을 지지했던 3인 중 1명이 이범석이었다. 오히려 이범석이 일찍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면 한국전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후방3개사단 병력 뿐만 아니라 1사단 병력을 한강선으로 집결시켜 결전을 했다면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지금의 한국전쟁 초기 서부전선사와는 다른 이야기가 쓰여졌을지도 모른다

여튼 군사경험이 전무한 신성모가 타이밍을 놓치고 한강 철교를 폭파한 탓에 국군의 물자 및 장비들이 후퇴를 못한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그래서 이 문제로는 이범석 대신 신성모가 주로 까인다. 게다가 신성모는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더 까여야한다(...). 하지만 사실 이범석도 제대로 된 건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범석이 한강 철교를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는 황당하게도 "퇴로가 막혀야 한강 북쪽의 국군이 더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히 싸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즉 신성모가 한강 철교를 너무 빨리 폭파해서 국군을 궤멸시킨(...) 것은 이범석의 건의를 충실하게 따른 셈이 되는 것이다.

이범석은 이승만에 대한 열성분자였으며 장택상, 이기붕과 각각 충성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14] 하지만 족청계가 세력이 강해지자 이승만은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이승만은 이범석이 군사력을 등에 업고 자기 자리를 넘볼 것을 걱정했던 것. 따라서 다른 극우 단체인 신성모대한청년단을 내세워 원내 세력이었던 족청계를 정계에서 쫓아내버렸다.

우선, 이승만은 이범석에게 족청을 대한 청년단에 흡수시켜야하니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범석은 이를 거부하였고, 이승만은 이에 맞서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이자 족청계 지도자인 이범석을 떨어트린 뒤에 이승만보다도 나이 많은 노인이었던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올렸다. 이는 사실상 이승만에게 이범석을 후계자로 지목할 생각이 없다는 뜻 (자유당 항목 참고).

부통령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무총리 장택상은 비밀리에 자유당 당원들에게 이범석 대신 함태영을 지지하라고 했고 미리 손을 써두었다.

이범석은 부통령에서 낙선했고 장택상이 배후 공작을 벌인걸 확인, 이에 분노한 이범석은 선거에 경찰이 관여했다며 장택상을 고소하였고, 그러나 무죄... 후에 족청계 인물들과 정변을 모의했으나 소문이 유포되어 실패한다.

나중에 장택상이 일제강점기 때 경기도지사를 지낸 일본인부산에서 만난걸 족청 부하들을 통해 입수하여 장택상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아 국무 총리직에서 해임시켰다. 그러나 이 일로 이범석의 측근인 양우정 등이 희생된다.

4.19 혁명 후에 국민의당을 창당해 최고 의원이 되었으나 후에 탈당하고 1967년에는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 회담을 성사시켜 통합 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하였으며 국토 통일원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72년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한다.

여담으로, 박정희가 만주군 중위여서 흑역사급 과거를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의 형인 박상희가 여운형을 도와 독립 운동을 한 점과 함께 광복군 참모장에 있었던 이범석이 자신의 적이었던 박정희를 끝까지 지지했기 때문에[15] 박정희 살아 생전에는 과거사가 그렇게 문제되지 않았다.

반공 자주 국방을 주장한 박정희와 상통하는 측면이 많아서 그런지 박정희가 엄청 띄웠다.

1990년대 초반 비밀 해제돼서 공개된 주한 미군 G-2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측에서는 상당히 싫어한 인물이었다. 그의 민족(혹은 국수주의)주의적인 측면에 대해서 상당히 싫어한 셈. 미국 측의 시각으로는 "부패한 중국 군벌을 연상케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2016년 11월 8일에 진수된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의 8번함이 '이범석'함으로 명명되었다. 앞서 진수된 손원일급 4번함과 7번함은 역시 청산리 대첩에서 함께 활약했던 '김좌진', '홍범도'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3. 성향

네오 나치라는 평가가 있다.
1947년 5월말, 미국 신문 기자단은, 서울에서 30마일 정도 떨어져있는 옛 성곽 도시 수원에 있는 대한 청년단의 훈련 학교를 우연히 찾아갔다.(...)

이 운동의 지휘자는 이범석이었는데 그는 일제 시대 김구의 광복군 참모장이었다. 1947년 7월까지 약 7만 명이 수원 훈련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공식 발표에 의하면, 1947년 말까지 10만 명의 훈련생을 배출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수원 훈련 학교 교장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독일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히틀러 청년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것을 신문 기자단은 알게되었다. 그 학교를 방문했을 때 신문 기자단은 "Sprechen Sie Deutsch?"(독일어 할 줄 아십니까?)라는 인사를 받았다. 그와의 계속된 대화를 통해서 그 조직이 히틀러 유겐트(Jugend)를 본따서 만들었으며, 조직의 목적은 남조선 국군을 양성하여 '광복군의 영광스런 전통'을 계승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 훈련 학교는 완전히 '비정치적'인 기관이지만, 김구가 상임 교관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다양한 정치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조직에 들어오지만, 나갈 때는 똑같은 사상을 가지고 나간다는 정보도 그는 스스로 제공했다.
리처드 D 로빈슨(한국 미군정의 대민 정보 수집 분야에서 일했고, 이후 제24군단 사령부의 정보과에서 점령기를 다룬 전사 편찬 업무를 맡음. ), 미군의 배반, 과학과 사상, 1988년, 215 - 216
오후에 연락원은 우리를 또다른 "신사"인 한국 민족 청년단(족청)의 단장이며 극우 진영의 스타로 부상하고 있는 이범석 장군에게 데려다주었다. 나는 줄창 그의 이름을 들어왔었고, 몇몇 미국인들은 우리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그를 만나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우리는 미군이 한국 민족 청년아 베당해준 2층 건물에 자리잡은 본부에서 그를 만났다.(...) 이는 좋은 체격의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의 얄팍하고 굽은 코와 빈약한 콧수염이 기묘하게도 호전적인 인상을 풍겼다.(...)

그는 말했다. "오늘날의 한국은 1919년의 독일과 같소.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과 민족적 불화, 경제적 곤궁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요. 청년들의 단결이 민족 해방의 관건이 되오. 지도자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지요. 우리는 그들에게 명령에 복종하는 것, 실천적인 능력의 함양과 도덕심의 회복 등을 고육하려 하고 있오. (...) "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나는 점차로 내가 한국의 한 민주주의 조직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히틀러의 저 악명 높은 "지도자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민족, 사명, 규율, 인내 등의 단어들이 우선동일했다.(...)

이범석은 예정된 커리큘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역사학, 윤리(이범석 자신이 강의할 예정이었다.), 정치학 등이었다. "파업 분쇄 방법도 가르칠 거요. 히틀러의 유겐트의 역사도 물론." 그의 핵심 참모 중에는 3년 동안 히틀러 유겐트의 열렬한 멤버가 되었던 사람이 있다.

마크 게인(동북아시아통의 저널리스트. 마크 게인은 1946년 10월 15일에서 1946년 11월 7일까지 한달 남짓 한국에 머물면서 서울, 개성. 옹진, 부산, 동래, 대구 등을 취재함.), 해방과 미군정, 까치 출판, 1986년, 118 - 120 (본 부분은 1946년 11월 7일 서울에 갔을 때 일기임. -115쪽)

두 사람이 증언하는 핵심 네오 나치 인물은 정체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는데 서중석 교수의 제자인 후지이 다케시 박사가 관련자들 경력을 조사해 본 결과 강세형이라는 것이 밝혀졌다.[16] 이렇게 나치 좋아하고 이승만 지지자라고 독립 운동 전적까지 까대는 이들이 많은데, 과연 이게 타당한 견해인지는 생각해 볼 일. 에스토니아에서는 아예 소련에 대항해 독립을 부르짖던 이들이 나치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고, 상당수가 독일군에 참전했던 사례가 있다.

그러면서도 당대에 나치와 맞선 드골을 존경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방일보에 연재 중인 전기 시리즈에 따르면,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 선전 방송도 즐겨 들었다고.[17]

위에 언급되어 있지만, 미군이 민족주의 성향이라고 싫어한 이유가 전시 작전권이 미국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이범석이 국방부에 정훈국 창설과 대북 첩보 수집 및 교란국 창설을 시도했기 때문[18].

행보야 어떻든 당시 부패한 정치인들과 달리 상당히 청빈한 생활을 했다. 족청을 운영할 때도 기부금에 의존해서 어려운 운영을 했고, 국무총리까지 했으면서도 치부한 게 전혀 없어 은퇴 후에는 서울 변두리 지역을 전전했다. 중화민국 대사 재직 당시에는 대사관 경비를 총 5백불로 아껴서 사용했다. 보다못한 장제스가 자국 장군의 사택을 지원해 줬을 정도. 5. 16 쿠데타 때는 쿠데타 진영에서 이범석을 친이승만 계열로 보고 지원을 끊어버려 국가 원로 된 신분으로 식량도 없어 4일을 굶은 적도 있을 정도.

4. 기타 등등

  • 아내인 김마리아와는 1925년에 결혼했다. 결혼 후 톰스키에서 소련군에게 붙잡혀 8개월 동안 부부가 함께 포로가 되었다고.
  • 기병 병과 출신답게 을 즐겨 탔다. 국방부 장관 시절에도 말을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닌(...) 영상이 남아 있을 정도다.[21] 슈탈헬름을 착용하고서 말을 탄 사진도 남아 있다.
    파일:이범석기마.jpg
    이 때문인지 2000년대 중후반 디시의 2대갤 등지에서는 농담삼아 시대를 앞서간 조선의 리인액터(...)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 한국어를 포함해서 4개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어학적 소질도 있었다. 중국어, 러시아어는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소련군, 중국군 소속 장교로 활약할 정도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으며 일본어도 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음력으로는 10월 20일. 경자년 출생. 음력 생일인 10월 20일을 아무 설명 없이 표기하는 경우가 흔하여 주의할 필요가 있다.[2] 이건 그냥 장난이라고 넘어갈 수준이 아닌 게, 당시 소값은 엄청났다. 게다가 동물학대다. 물론 인명과 소값은 비교 수준이 될 수 없는 만큼, 이건 이범석의 아버지가 더 잘못한 게 맞기는 하지만. 매를 들어 훈계할 수도 있는 문제를 아들의 생명이 자칫 위험할 수 있는 도끼 던지기를 했으니 이범석 아버지 성격도 장난아니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3] 당시 여운형은 조선인들의 도항 절차와 수속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4] 당시 운남성 독군 탕지야오가 과거 중국 동맹회 회원이었고, 훗날 틀어지지만 당시에는 쑨원과 합작 관계였다.[5] 북한의 초대 국방 장관(민족 보위 성장)인 최용건도 이 학교를 나왔다. 베트남의 보응우옌잡, 중국 인민 해방군의 주더 원수와 예젠잉 원수(국방 장관)도 여기 출신. 4개국의 국방 장관을 배출한 학교인 셈이다.[6] 그러나 이범석이 입학한 운남 육군 강무 학교 12기의 교육 과정은 30개월이었고, 이범석과 같은 육군 강무 학교 12기생인 예젠잉은 1919년 12월에 졸업했다. 그런데 이범석은 1919년 봄에 졸업했기에 이상한 점이 있다. 이범석이 회고 과정에서 혼동했을 수도 있고, 쑨원과 탕지야오가 1918년에 관계가 틀어진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7] 후지이 다케시는 강세형으로 추정했다.[8] 예를 들어 국민 정부 군사 위원회가 삼민주의 교육을 강요하자, 이범석은 삼민주의를 강요하는 것은 다시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려는 것이라며 항의했다.[9] 파시즘은 극좌파와 다른 것 같기도 하면서 결정적으로 통하는 데가 분명히 존재한다. 리버럴에서 리버테리안 사이에 위치한 지식인인 장준하가 보기에는 영 못마땅했던 듯하다.[10] 극우 단체란 이야기가 있지만 꽤나 단명한 단체여서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실질적 해체는 1949년 이승만의 청년 단체 통합 명령으로 이루어졌다.[11] 한국에서 나치를 연구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브루스 커밍스에 의하면 한국에서 나치를 연구한 인물로 이범석과 안호상을 지목했다. 그 외에 춘원 이광수도 히틀러를 연구했다 한다.[12] 초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이던 안호상은 나치즘에 영향을 받아 '강력한 지도자 밑에 모두가 단결하자'는 일민주의를 제창 이승만 독재를 합리화했다. 그도 이범석처럼 나치의 패망 소식을 듣고는 슬퍼했다. 더불어 자발적인 학생회를 해산하고 군대식 학도 호국단을 만들고 교련(전투 훈련)을 시행해서 학교를 군대식 체계로 조직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도 승승장구 '국민 교육 헌장'을 만들었다.[13] 백사 이윤영의 회고록에 나온다.[14]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이기붕[15] 특별할 것도 없는게 광복군 및 독립 운동가 출신 군인들은 광복 후 자주 국방 및 치안 수립을 우선 선결 과제로 보았기 때문에 일본군 및 만주군 세력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끌어들이려 노력을 했다. 해군의 아버지인 손원일 제독이 해병대 창설을 위해 만주군 출신의 신현준을 데려오고 마찬가지로 공군의 아버지인 최용덕 장군이 김정렬 등의 일본 육군 항공대 출신들과 협력한 것도 그의 일환. 박정희도 해방 한 달 뒤 광복군에 들어가 임시 정부 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때까지 활동했기에 자연스럽게 광복군 내에 인맥이 생겼다.[16] 후지이 다케시,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 지도 교수 : 서중석, 학위 논문(박사)-- 성균관 대학교 일반 대학원 : 사학과 2010년 8월[17] 드골도 정도는 덜했지만 만만치 않은 권위주의적 지도자 였다. 그리고 드골주의에서 신 대통령제라는 단어마저 나왔다.[18] 미군에서는 이를 분리 공작 의도로 보며 매우 경계했다.[19] 광복군 시절 이범석을 연기했다.[20] 참고로 김현직과 김기현 모두 슬레이어즈피리오넬 엘 디 세이룬을 맡았다.[21] 이 당시엔 경찰에 기마대가 존재했고, 국군에서도 장철부 소령이 6.25 전쟁 당시 마지막 기병대를 지휘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