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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김부산(金扶山)·김봉남(金鳳南) |
호 | 추산(秋山) |
출생 | 1895년 |
한성부 서서 용산방 공덕리계 (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1] | |
사망 | 1943년 6월 6일?[2] |
사망지 불명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3호 |
서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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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존하는 사진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등재된 사진 |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인물이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지만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사람은 김익상뿐이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기 때문에 김익상의 최후에 대해 많은 이견이 있다.
2. 생애
1895년 한성부 서서 용산방 공덕리계(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목재 상사를 경영하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되던 1907년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어 아버지도 목재 상사를 경영하던 중 일본인에게 속아 가산을 탕진하면서 실의에 빠져 살다가 김익상이 21세 되던 1915년 별세하고 말았다.#그는 일찍이 평안남도 평양부로 이주하여 숭실학교를 다녔고 숭실학교 졸업 후에는 개신교 계열의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후 경성부로 돌아가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3]에 입사하여 기계감독으로 근무했다.
1920년 그는 중화민국 봉천성 심양현(瀋陽縣)에 있던 지점으로 전근을 갔는데 이때 알게 된 송모 씨와 공모하여 잎담배 6개비를 훔쳐 남만창고(南滿倉庫)에 보관하고 광성연초공사 명의로 창고증권을 받았으며 이 증권을 이용해 운송업에 종사하던 모씨로부터 300엔을 마련해 송모씨와 함께 직예성 톈진시로 도주했다.#
톈진시로 도주한 그는 이를 기회삼아 평소 꿈꾸던 비행사가 되려고 비행학교가 있던 광둥성으로 향했지만 당시 쑨원과 중국국민당이 이끌던 호법정부는 2차 호법운동을 통해 북벌을 한창 계획하고 있었고 당초 운영되던 비행학교는 폐교되었기에 꿈을 이룰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상하이 프랑스 조계로 향했다. 상하이로 간 김익상은 프랑스 조계 백이로(白爾路) 삼익리(三益裡)[4]에 거주하면서 전차 회사의 감독관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항일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기로 결정하고 김원봉이 조직한 무장 투쟁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1년 그는 단장 김원봉의 명령에 따라 국내로 잠입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일본인으로 위장해 기차를 타고 국내 잠입에[5] 성공한 김익상은 사촌동생의 집에 가서 하룻밤 묵은 후 다음 날인 9월 12일 거사를 결행했다.
거사 당일인 9월 12일 아침 김익상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고 2발의 수류탄을 지닌 채 오전 10시 20분 경기도 경성부 왜성대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로 잠입했다. 조선총독부를 경비하는 일본군 헌병대는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한 김익상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고 전등을 고치러 온 사람으로 착각하였다. 이렇게 김익상은 유유히 조선총독부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고 2층 어느 방에 폭탄을 던졌는데 조선총독의 집무실로 판단하고 폭탄을 던졌지만 애석하게도 비서과였고 설상가상으로 폭탄마저도 불발탄이었다. 뒤이어 그는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는데 이때 던진 폭탄은 폭발했지만 애석하게도 회계과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6]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이 터지자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왔는데 이들과 마주친 김익상은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고 하고 유유히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 나왔다.
결국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조선총독부가 폭탄 폭발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빠져나간 김익상은 곧바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김산의 <아리랑>에 따르면 당시 의열단원들은 거사 이후 자결이나 사형으로 순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가 살아서 돌아오자 의열단에서는 그에게 "본분을 다했으니 앞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본인이 "계속 의열 투쟁을 하겠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곧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고 정신이 든 일제는 범인을 잡겠다고 한동안 난리를 쳤지만 끝내 잡지 못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이 김익상이라는 사실이 다음 문단의 사건으로 그가 붙잡히면서 밝혀지게 된다.
사이토 마코토 처단에 실패한 김익상은 1922년 3월 말 다나카 기이치 육군대장[7]이 필리핀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으로부터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라'는 임무를 받게 되었다. 이번에는 오성륜(吳成崙)[8]·이종암[9] 등과 함께 3인조로 거사에 투입되었는데 이들은 3월 28일 다나카 기이치가 상하이에 도착하면 배가 선착하는 황포탄(黃浦灘)에서 하선하자마자 곧바로 오성륜이 첫 저격을 맡아 다나카 기이치를 사살하고 만일 실패할 경우 김익상이 뒤를 맡아 다나카 기이치를 사살하는데 김익상마저 실패할 경우 군중 속에 숨어 있던 이종암이 폭탄으로 다나카 기이치를 폭사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들은 위와 같은 계획을 세우고 김원봉 등으로부터 각각 폭탄 1개와 권총 1정을 지급받아 1922년 3월 28일만을 기다렸다. 거사 당일인 3월 28일 예정대로 다나카 기이치 일행은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날 오후 3시 배가 황포탄 하구 공공 조계 부두에 선착하고 다나카 기이치가 내리자 첫 저격을 맡은 오성륜이 곧바로 다나카 기이치를 향해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애석하게도 한 영국인 여성이 다나카 기이치한테 악수를 하러 간답시고 다가가는 바람에 맞으라는 다나카 기이치는 안 맞고 영국인 여성의 등에 총이 맞아 버려서 등에 총을 맞은 영국인 여성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당황한 다나카 기이치가 우왕좌왕 허둥대며 급히 자동차에 타려 할 때 2번째 저격을 맡은 김익상이 역시 권총을 발사했으나, 다나카 기이치가 쓴 모자만 맞추었다. 이에 3번째 저격을 맡은 이종암이 3시 30분에 곧바로 군중 속을 헤치고 다나카 기이치가 탄 자동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지만 애석하게도 폭탄마저 불발이 되면서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이때 이종암은 곧바로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던지고 군중 속으로 숨어들어 체포를 면했지만 오성륜은 도주할 때 권총을 들고 있었던 바람에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익상은 거사 직후 현장으로부터 북쪽을 향해 도주하던 중 자신을 뒤쫓던 중국인 마차꾼에 권총을 한 발 쏘아 마차꾼의 넓적다리를 맞혀 전치 10일간의 치료를 요하는 경상을 입혔으며 다시 구강로(九江路)에서 사천로(四川路)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앞서 불행히 오인 사격으로 인해 살해된 영국인 여성의 남편인 미국인 '톰슨'[10]과 맞닥뜨려 그의 가슴에 1발을 쏘아 마찬가지로 전치 10일간의 치료를 요하는 총상을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톰슨이 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고 결국 사천로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앞서 체포된 오성륜과 함께 일본 영사관에 소재한 감옥에 수감되었고 1922년 5월 19일 상하이에서 소위 절도, 폭발물 취체규칙 위반, 건조물 파괴, 살인미수 및 상해치사 등의 혐의에 대해 예심이 종결되어 나가사키재판소에서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런데 그해 9월 오성륜은 감옥 문을 부수고 탈옥하는 데 성공했지만 불행하게도 김익상은 탈옥에 실패하여 결국 일본 나가사키로 이감되기에 이른다. 그는 같은 해 11월 6일 나가사키공소원에서의 1심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이어 1923년에 있었던 상고심에서는 하늘이 도왔는지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김익상의 이후 행적은 불분명한데 1925년 옥중에서 순국했다는 말도 있지만 김익상의 후기 행적에 대한 이른바 '정설'은 이렇다. 1943년 김익상은 20년 간의 옥고를 치르고 마침내 만기 출소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무슨 연유에선지 다시 일본 경찰이 그를 연행해 갔고 이후에는 종적이 묘연해졌는데 이로 보아 일본 경찰에 의해 암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그 때문에 김익상이 언제 사망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며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김익상이 1943년 6월 6일경에 죽은 것으로 보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김익상이 언제 죽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김익상의 시신조차도 나온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하나의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후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다.
[1] 출생지인 공덕동 286번지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지번으로, 삼성래미안공덕3차아파트 304동과 후문 사이의 도로로 추정된다.[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41년 8월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3]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담배를 제조하는 곳이었다.[4] 현 중국 상하이시 황푸구(黃浦區) 즈중로(自忠路) 163롱(弄).[5] 이때 검문하려는 일본인 형사를 보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일본인 모자와 대화하여 일본인인 것처럼 행세해 넘겼다.[6] 1922년 예심결정서의 요지를 보면 당시 피해상황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마루 위에 깊이가 5치(약 15cm)나 되는 구멍을 뚫고 깨어진 조각은 마루와 그 근처 벽과 아래층으로 떨어졌고, 파편은 접대용 탁자 세 곳을 상하게 했으며, 유리창 세 개가 깨지고 사면의 벽·문에 20여 곳이나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있고 그밖에 사무용 책상 두 다리와 의자 2다리 중 한 다리씩 각각 파손되었다."[7] 1918년 9월부터 1921년 6월까지 하라 다카시 내각 및 제2차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에서 일본 육군대신을 지냈으며 1927년 4월 20일부터 1929년 7월 2일까지 제26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기도 했다.[8] 오성륜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의열단의 단원이었다. 이후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장제스의 국민혁명군과 힘을 합치고 일본군 등에 맞서 무장투쟁을 했으며 동북항일연군의 군수처장 등을 역임했다. 1941년 일본에 체포된 후에는 변절하여 만주국에서 활동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버렸다. 이후 내몽골 자치구의 굴라크에서 맞아죽었다는 주장이 있다.[9] 독립운동 당시에는 양건호(梁健浩)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30년 가출옥 상태에서 병사하였다고 한다.[10] 후에 이들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불운하게 아내를 살해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일본 사법당국에 "김익상을 관대히 처리해 달라"고 진정서를 넣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