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3 20:53:30

지청천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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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8QhKrES.jpg
출생 1888년 2월 15일
조선 한성부 북부 진장방 삼청동계[1]
사망 1957년 1월 15일 (향년 68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조선대한제국일본령 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본관 충주 지씨
별칭 본명은 지대형(池大亨)
아명은 수봉(壽鳳)
자는 석규(錫奎)
호는 백산(白山)
직업 독립운동가, 군인(장군)
학력 교동소학교
배재학당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26기
신흥무관학교 교관
소속 한국 광복군
최종 계급 한국 광복군 정장
참전 자유시 참변, 쌍성보 전투,
대전자령 전투, 동경성 전투 등

1. 개요2. 생애3. 가족4. 여담


파일:지청천.jpg

1. 개요

대한민국독립운동가[2], 군인. 또 민주당계 정당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정치인. 본명은 지대형(池大亨)이고 아명은 수봉(壽鳳), 호는 백산(白山), 자는 석규(錫奎)이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제의 수배를 피해 여러 이름을 돌려가면서 사용하기도 하여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성인이 된 후 자신이 스스로 지은 청천(靑天)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드물어 눈의 띄기 쉬운 성인 지씨 대신, 어머니의 성씨이며, 흔한 성씨인 이씨 성을 자주 사용했다. 때문에 이청천(李靑天)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었다.

2. 생애

1888년 한성부에서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집안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5살 때 아버지가 장중풍 돌아가셨고,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899년 교동 소학교를 졸업했고, 1906년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1908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에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이뤄진 뒤라 조선보병대 정도만이 유일하게 남은 군사 조직이어서 사관 학교에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1909년에는 육군 무관 학교마저 폐쇄되면서 1학년, 2학년 사관생도들은 일본 도쿄의 육군 중앙 유년 학교[3]로 유학을 선택하거나 자퇴하게 되었다. 지청천은 일본행을 선택했다. 이때 일본행을 택한 각오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 26기로 졸업하여 임관했다. 일본 육사 26기로 동기는 쿠리바야시 타다미치(1891년생), 이응준(1891년생), 홍사익(1889년생), 김경천(1888년)이 있다. 병과는 보병이었다. 일본군 육군 중위로 근무하던 중인 1919년에 동기 김경천과 함께 남만주 삼원보로 망명했고,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망명 당시에 일본군 교범 등을 들고 갔으며, 아내에게도 자신의 행방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뒤늦게 일본군이 수배령을 내렸지만, 이미 지청천은 만주로 빠져나간 뒤였다.[4]

파일:ndTwFTG.jpg

그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들어가 1920년 서로군정서의 간부로 근무했다. 1920년 북만주에서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신흥 무관 학교를 폐쇄, 이후 서일, 김좌진과 함게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자유시로 이동했으나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이후 오하묵 등과 잔여 병력을 이끌고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다시 고려혁명군을 결성하는데 참여하였고,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하지만 교육방침 등에 있어 당시 고려혁명군을 장악, 통제하고 있던 소련 당국과 대립하였고, 결국 소련에 체포, 투옥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명활동으로 석달 후 풀려났고 이후 만주로 돌아왔다.

북만주로 돌아와 정의부와 혁신 의회에 참여하였다. 1930년대 중국의 호로군과 함께 한중 연합 작전을 펼쳐 쌍성보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일본의 만주 사변으로 만주 전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만주에서 더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되자 지청천 장군은 중국 본토로 이동, 1934년에 김구가 설립한 뤄양 군관 학교 한인 특별반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에 김규식, 김원봉, 조소앙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 설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 내부의 권력투쟁의 결과 김원봉의 의열단계와 김두봉의 고려공산당계 등 사회주의계열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를 견제하려던 지청천, 조소앙, 김규식, 신익희 등 우파 민족주의자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창당 두 달만에 김원봉의 의열단계는 사회주의를 비판하던 지청천을 강제 제명했고, 이에 반발한 조소앙, 김규식, 신익희 등 우파 계열 인사들이 집단 탈당하게 되었다.

민족혁명당 탈당 후 지청천은 조선 혁명당을 창당하였고, 조소앙은 한국 독립당을 재창단, 김구는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였고 이 3당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1940년 이 3당을 합당하여 임정의 통합 정당인 한국독립당이 탄생된다. 1939년 한간 인루겅 암살을 지령하였으나 실패했다.
파일:FB_IMG_1474743092863.jpg
사진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절 지청천. 오른쪽은 김구.

1940년 9월 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이전했고, 9월 17일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에 창설되었고, 지청천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한편 당시 충칭에는 역시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던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본대가 머물고 있었는데, 조선의용대는 1941년 확대간부회의에서 화북 연안에 있는 중국 공산당으로의 합류를 결정했고, 이에 반대하는 김원봉 및 그 예하 본대 90여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병력이 모두 이탈하여 연안에 합류하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되었다. 1930년대부터 한인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주문해오던 장제스는 김원봉에게 임시정부에 합류할 것을 압박했고, 장제스의 지원이 끊기자 버티지 못한 김원봉은 1942년 조선의용대 잔여 병력을 데리고 광복군에 편입했다. 김원봉이 부사령관이 되었으나, 과거의 앙금 때문에 김원봉은 총사령관 지청천의 지시를 받기를 거부하여 부대를 따로 돌렸고 이 때문에 지청천이 온전히 부대를 운용하지 못했다. 당시 장준하는 광복군 제2지대 소속으로 지청천의 밑에서 복무했다.[5]

광복이 이뤄지자 1946년에 귀국해 광복군을 재건하려고 하였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실패하고 우익 청년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세웠다. 남북 협상에 반대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서울특별시 성동구로 출마하여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다. 대한국민당(1948년)에 대동 청년단의 잔존 정치 세력을 이끌고 합류하였다. 대한국민당(1948년)민주국민당(1949년)이 합류하면서 민주 국민당에 합류하게 된다. 지청천은 당시 민주 국민당의 최고 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1월 15일에 급서하였다. 향년 68세.

3. 가족

가족으로는 아내인 파평 윤씨 집안의 윤용자가 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인 지달수와 지정계, 딸인 지복영[6]도 한국 광복군에서 활동했고, 뒤에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하여 중령으로 전역했다.

그의 외손자인 이준식 교수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핵심 인사중 한명이었고,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재산 환수 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현재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4. 여담

  • 독립 운동 때문에 도망을 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이름을 자주 고칠 수 밖에 없었다. 지청천이라는 이름 이외에도 호나 자, 외가의 성인 이(李)를 이용하여 지수봉(池壽鳳), 지을규(池乙奎), 지석규(池錫奎) 이청천(李靑天), 이대형(李大亨) 등 여러 이름을 사용하였다.
  • 당시 지하활동을 하는 투사의 숙명과도 같이 가명을 꽤 많이 썼다.[7] 그 중 지씨 대신 어머니의 성을 쓴 이청천이란 가명이 특히 많이 쓰였는데, 실제로 좀 오래된 기록이나 서적에는 본명 못지 않게 이청천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등장하며 적잖은 사람들은 아예 본명이 이청천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나무위키의 본 문서 역시 이청천이라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다.
  •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한터라 일본어를 잘했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에 재직할 당시에도 일본인 같은 어투를 사용했다고 한다. 특히 연설 때 '에-또'를 연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 해방 이후 병역법을 창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징집병 제도의 초안은 모두 지청천의 병역법에서 기초하였다.
  • 6.25 전쟁 발발 직전에 지청천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수비 태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이승만은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결국 전쟁이 터지자 지청천은 "이승만 박사가 내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이런 일이 터졌다"라며 한탄했다. 지청천은 자발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승만은 끝끝내 그를 푸대접했다. 특히 지청천은 광복군 총사령관임에도 해방 이후 군 관련 요직은 커녕 장관 하나 제대로 거친 적이 없다.[8] 이승만이 지청천을 이렇게 홀대한 것에는 만주 독립운동가 출신이라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청천이 해방 정국부터 정부수립 초기 이승만과 최대 라이벌이었던 김구와 가까웠던 사이라는 점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지청천과 같이 활동하던 이범석은 이승만 아래서 국무총리 및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1]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2] 일본 육사 졸업, 만주 서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 군단, 정의부와 고려 혁명군 참여, 1930년대 한중 연합 작전 구사(대전자령 전투, 쌍령 전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등), 임정 광복군 창설시 총사령 등 화려한 무장 독립 투쟁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3] 일본육군사관학교의 예과였다.[4] 일본군에서 군무이탈하여 독립군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5] 한국 광복군은 크게 1지대, 2지대, 3지대로 나뉘는데, 1지대는 김원봉이 지휘, 2지대는 지청천이 지휘, 3지대는 김학규가 지휘했다. 여기서 1지대와 2지대間의 내분이 생각보다 심했다.[6] 한국광복군 최초의 여자광복군이라고 한다. 실제로도 참전해서 일본군과 싸운 전적이 있다.[7] 한국의 독립운동가 말고도 다른 나라에서도 지하운동가들은 다들 당연히 가명을 썼다[8] 물론 여론이 떠들썩하자 마지못해 무임소 장관(現 특임장관)이라는 형식적 직함을 주기는 했다.[9] 본래 초연에서는 성규 혼자 모든 회차를 연기 했지만, 살인적인 스케줄 온유 입대 후 앙코르 공연 부터 더블 캐스팅으로 진행 중이다.[10] 초연 캐스팅 보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정말 더블 캐스팅이 아닌 이상 쉴새없이 공연에 나서야 한다. 성대에 무리가 오지 않을까 걱정 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