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8 15:30:09

홍병기


1919년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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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홍병기.jpg
출생 1869년 11월 5일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1]
사망 1949년 1월 26일
서울특별시 국방부 제2육군 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본관 남양 홍씨 (#)
인암(仁菴)
직업 독립운동가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손병희의 측근2.3. 3.1 운동2.4. 고려혁명당2.5. 해방 후 경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천도교 신자. 본관은 남양(南陽).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홍병기는 1869년 11월 5일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이포리에서 아버지 홍익룡(洪益龍)과 어머니 한익화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홍익룡은 참봉의 벼슬을 한 양반이었지만 서자였다. 홍병기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무예를 닦았으며, 19살 때인 1887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서자라는 것 때문인지 무관으로 활동하진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24세 때인 1892년에 동학에 입교했는데 입교 동기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서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대우받는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홍병기는 동학에 입교한 후 여주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벌였고, 여주 지역의 접주로 성장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한 후, 그는 9월에 최시형의 명을 받고 여주에서 임학선 등과 함께 거병했다. 이후 그는 10월에 관하 교인들을 이끌고 경기도 편의장(便義長) 이종훈과 편의사(便義司) 이용구의 지휘를 받으며 손병희가 이끄는 충의포의 도소가 위치한 충주군 황산에 도착했다.

홍병기는 이종훈 등의 지휘를 받으며 500명의 관군과 대치했고, 보은군 장내리로 진군하던 중 충북 괴산에서 그곳 수령이 이끄는 관군과 충주에서 온 수십명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동학 농민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홍병기는 손병희, 이동훈 등과 함께 최시형을 시종하며 도주했다. 그리고 1898년 최시형이 관헌에 잡히자 손병희, 김연국 등과 함께 최시형을 구출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최시형은 처형되었다.

2.2. 손병희의 측근

홍병기는 최시형이 처형된 뒤 손병희가 새 교주로 등극하는 것을 지지했고 손병희의 가사를 돌볼 정도로 충실하게 보필했다. 1900년 동학의 도통이 손병희에게 전수되자, 홍병기는 편의장이 되었고 대정(大正)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손병희로부터 인암(仁菴)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1901년 손병희가 일본에 외유하면서 동학의 개화운동을 전개했을 때, 홍병기는 그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그는 1903년 일본 육군 참모부의 차장인 타무라 이쿠조오(田村怡興造) 등과 제휴해 친 러시아 파벌이 지배하고 있는 대한제국 내각을 붕괴시킨 후 대한제국을 개혁하려는 거사를 추진했지만 타무라가 갑작스럽게 사망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04년, 손병희는 민회를 설립해 동학을 개혁하기로 결정했다. 홍병기는 일본으로 와서 손병희로부터 민회를 설립하라는 지시를 받고 귀국 후 1904년 4월경 동학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민회의 명칭을 대동회로 정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대동회의 기치 아래에서 시위를 벌이게 했다. 그러나 동학의 재림을 두려워한 정부의 탄압으로 무산되자, 그는 그해 10월에 여러 동지들과 함께 진보회를 설립했다. 이후 진보회는 흑의를 착용하고 단발을 시행해 개화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1904년 말 이용구가 진보회를 송병준일진회와 통합시킨 후, 그는 일진회원이 되었지만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다.

1905년 12월 일진회의 매국 행위에 분노한 민중들이 동학을 매국 종교라고 비난하자, 손병희는 위기감을 느끼고 1906년 1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했다. 홍병기는 보문관의 관장으로 임명되어 교회 활동을 전념했다. 이후 1909년 10월 전제관장(典制觀長), 1910년 1월 현기사장 서리, 1911년 6월 대종사장(大宗司長) 등의 주직에 임명되어 교제를 정비하고, 포교를 확대하고, 교회를 정비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16년에는 교회의 장로에 선임되었다.

2.3. 3.1 운동

1918년 말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한 홍병기는 조선 또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해 독립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이때 권동진, 오세창, 최린이 손병희와 협의하고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조선의 독립을 획득하려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이에 적극 참여했다. 1919년 2월 25~26일, 홍병기는 천도교중앙총부에서 권동진을 만나 독립운동의 추진상황을 물어보고 자신이 민ㄹ족대표로서 참가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듣자 그 자리에서 흔쾌히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2월 27일 오후 2시경, 홍병기는 종로 재동 김상규의 집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에 보내는 건의서에 서명하고 날인하기로 돼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천도교 측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와 건의서에 서명하고 날인했다. 이후 2월 28일 오후 5시경, 그는 손병희의 집으로 가서 천도교 대표인 권동진, 오세창, 최린, 권병덕, 불교 대표 한용운, 기독교 대표 등 10인을 만나 독립선언식 개최 등에 대해 협의했다. 이윽고 3월 1일 오후 2시, 그는 태화관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에 참석했고, 독립선언식이 끝난 직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심문을 받을 때 형사로부터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그렇다. 기회가 있는대로 계속할 것이다."고 답했다. 또한 그는 4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문: 피고는 무슨 일로 이 기회에 조선독립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나?
답: 원래 조선은 4천년의 역사가 있는 나라로서 하루아침에 남의 나라 영토가 된 것을 나는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즉 민족자결이란 문제가 제창됨에 따라 이때 독립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문: 그러면 피고는 일본 정치에 대해 불평을 품고 있는가?
답: 불평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점차 조선민족을 망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조선인에 대해서는 권리라든가 대우를 해주지 않고 또 교육 정도가 일본보다 낮은 식민지 교육을 하고 있다.
문: 조선인에게 동등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일에 동등하지 않다는 것인가?
답: 같은 학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조선 사람은 일본사람 아래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그 하나요, 경제적으로도 모든 것이 일본사람보다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이룰 것인가?
답: 2월 26일 권동진이 나에게 독립선언서를 수 만매 인쇄하여 경성과 각 지방에 배포하여 인민에게 널리 알리고 또한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나 조선총독부에 제출한다고 해서 찬성하였다.
1919년 4월 19일 경성지방법원 재판기록

홍병기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공덕리에 있는 경성감옥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른 후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했다.

2.4. 고려혁명당

홍병기는 출옥 후 천도교 혁신 활동에 주력했다. 당시 천도교는 교주 1인 중심의 운영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여기에 문제를 삼고 1922년 말부터 오지영, 최동희 등과 함께 천도교 집행부를 비판하며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2년 1월 14일, 천도교 집행부는 그의 주장을 수락해 교회 책임자를 의정원의 중의에 따라 선출하고 교회를 운영하는 의정원제(議正院制)로 혁신했다. 이후 홍병기는 1922년 1월 17일 이종훈, 권동진, 이병준, 임예환, 홍기조 등 17인과 함께 종법사에 선출되었으며, 포교 담당부서인 포덕과 주임으로도 임명되었다.

그러나 1922년 4월 22일, 그는 포덕과 주임에서 해임되었다. 이는 손병희가 옛 제도로 환원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혁신운동이 좌절되자, 그는 반감을 품고 오지영 등과 함께 1922년 12월 천도교를 탈퇴한 뒤 천도교 연합회를 조직했다. 천도교연합회는 절대적 평등과 개인의 수양을 지향하며 만주에 공동체를 설립하여 공동경작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장 항일 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1922년 7월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연합해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고려혁명위원회는 외교부장 최동희를 연해주로 파견해 소련의 후원을 얻기로 하고 그 일환으로 1924년 4월 천도교비상혁명최고위원회를 재조직했다. 홍병기는 이 위원회에 집행위원장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소련이 일본과 밀약을 맺고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추방하면서 이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에 최동희는 1925년 2월 중국 길림으로 건너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했지만 삼시협정(三矢協政)' 이후 만주 군벌이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바람에 이조차 실패했다.

최동희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만주의 정의부(正義府), 천도교연합회, 형평사(衡平社)와 연합해 고려혁명당을 결성하기로 했다. 최동희는 1926년 2월 길림에서 정의부의 양기탁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 발기회를 갖고 직방법, 선언과 강령, 규칙 제정, 특파원의 파견, 창립대회 소집 건 등을 협의하였다. 3월 29일 고려혁명당이 정식으로 창당되자 홍병기는 고려혁명당 가입을 승낙했다. 고려혁명당은 만주와 상하이를 무대로 무장독립투쟁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1926년 말, 고려혁명당 중앙집행위원 이동락(李東洛)이 장춘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이동락은 당의 선언서, 강령, 당략, 규약, 맹약 등 다수의 기밀문서를 갖고 있었다. 이 일로 당 조직이 탄로가 나고 당원 다수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1927년 1월 19일, 홍병기는 만주에 있다가 신의주경찰서에서 파견된 한 경부보(警部補)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고려혁명당 인사들과 함께 신의주지방법원으로 소환되었고 1928년 4월 20일 4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928년 10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29년 7월 5일 가출옥했다.

출옥 후, 홍병기는 동대문 밖 손병희의 사저 상춘원(常春園)에서 늦게 얻은 아들 홍영섭(洪榮燮)과 함께 지냈다. 홍영섭은 1930년 8월 29일 서울시내 숭인동에 '불온한' 격문을 붙였다가 적발되어 동대문 경찰서에 체포되어 몇달간 구류되기도 했다.

2.5. 해방 후 경력

1945년 8.15 광복 후, 홍병기는 삼일동지회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충칭에서 환국하자 삼일동지의 일원으로서 독립촉성 선서식을 거행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奉戴)를 천명했으며, 임시정부 계열 인사들이 참여한 한국독립당을 지지했다. 또한 그는 동학 농민 혁명의 정신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며 포교 활동을 벌였다.

1949년 1월 17일,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에 거주하고 있던 홍병기는 오후 1시 40분 경 행당교를 지나던 중 군악대원을 실은 트럭에 치여 왼쪽 다리가 절단되고 머리에 심한 타박상을 입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그는 즉시 국방부 제2육군 병원으로 호송되어 치료받았지만 중상인데다 워낙 고령이었기 때문에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9일 뒤인 1월 26일 오후 8시 15분에 사망했다. 향년 80세. 장례식은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교회장으로 거행되었고, 망우리에 매장되었다. 그러다가 1966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홍병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출생지로 알려진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은 그의 3.1 운동 당시 주소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