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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60026><colcolor=#fff> 천도교 Cheondoism | 天道敎 | |
궁을기 | 궁을문양 | |
창시자 | 최제우 |
교령 | 현암 윤석산 |
창시일[1] | 1860년([age(1860-01-01)]주년) |
주요 인물 | 손병희 최제우 최시형 박인호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906호 (경운동 88, 수운회관[2]) |
링크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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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어 | 천도교 |
한자 | 天道敎 |
영어 | Cheondoism |
한국의 민족종교 중 하나로,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 이후에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었다.
2. 용어
천도교에서는 포교를 포덕, 집회를 여는 장소를 '교당(敎堂)', 천도교의 최고 책임자를 교령이라 한다. 1955년 1월 13일 천도교 교헌(敎憲)이 나오면서 공식적으로 대표를 교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기는 3년이며 3년에 한 번 열리는 천도교 전국대의원회의에서 새 교령을 선출한다. 또한 교인끼리는 서로를 동덕이라 부른다. 동덕여자중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대학교가 천도교의 미션스쿨로 출발한 것이다.'포덕'(布德)이라는 말은 연호로도 사용한다. 최제우가 용담정에서 신인에게 계시를 받았다는 1860년(조선 철종 11년)을 원년(1년)으로 삼아 헤아린다. 2024년 기준 포덕 165년.
국궁에서 국궁인들끼리 서로를 부르는 접장이란 말도, 원래는 천도교의 포접제 하에서 쓰던 말이었다.#
수운 최제우를 대신사(大神師)라,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신사(神師)라,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를 성사(聖師)라, 4대 교주 춘암 박인호를 상사(上師)라 칭한다. 또한 4대 교주까지 각기 기념일을 정하여 천도교의 절기로 삼았다.
3. 기념일
- 천일(天日): 4월 5일. 1860년에 최제우가 한울로부터 계시받음을 기림.
- 인일(人日): 12월 24일. 1897년에 손병희가 최시형으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림.
- 도일(道日): 1월 18일. 1908년에 박인호가 손병희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림.
원래는 음력으로 기렸으나 날짜를 그대로 양력으로 옮겼다. 예를 들어 천일은 원래 음력 4월 5일이었는데 지금은 양력 4월 5일이다.
4. 교리
동학을 계승한 종교답게 기본적인 골격은 동학과 큰 차이가 없다. 최제우 스스로가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가 합일된 것이라. 그러나 도인즉 같으나 이치는 다르니라"라고 하였다.[3]모태인 동학이라는 종교가 본디 서학인 그리스도교에 반발해 형성된 만큼, 신을 인간과 분리시켜 절대적 위치로 상정하는 교리에 대해서는 특히 반발하는 입장을 취하며 또한 천당이나 지옥과 같은 사후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도 부정한다. [4]
세상엔 보이지 않지만 퍼져서 활동하는 기(氣,에너지)가 있다고 믿으며 이러한 에너지의 활동들이 세상을 주관해 우주 만물의 모든 활동과 생물을 소생시킨다고 믿는다. 그리고 기가 모여 응축되면 지극한 기운이 되는데, 이것을 '신(한울님)'으로 믿는다. 따라서 우주의 모든 만물의 탄생과 죽음, 자연 현상 변화 모두 이 지극한 기운인 한울의 개입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천도교인들은 물물천(物物天)과 사사천(事事天)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말하자면 세상 만물에 한울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자연과 심지어 사물까지 모두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 한울이 육신을 얻어 탄생한 피조물로, 다른 만물과는 다르게 자신의 근원(한울)에 대해 사유하고 한울이 자신의 육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수도를 통해 자각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가장 '신령하다'라고 표현한다. 물론 이때 말하는 '신령함'은 다른 만물에 비해 우월한 위치를 가져서 이 피조물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설명이라기 보다는 타 생명체에 비해 한울을 자신의 마음 속에 모실 수 있는(侍) 유일한 생명체로써 그 특별한 지위를 가진다로 이해하면 된다.[5]
결국 사람은 모두 한울을 모시고 있으며(시천주), 인간의 육관에서 비롯된 습관된 마음으로 사람을 보지 않는다면 모두 그 본질은 깨끗한 한울 그 자체가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곧 한울이다(인내천)라는 범인류애적 사상으로 발전되며, 이는 곧 사람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를 대할 때 큰 절을 올린 것과, 해월신사법설의 '내수도문'에서 만인에 대한 공경과 사랑을 주장한 것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6]
이것이 '사람 대하기를 한울(하늘)과 같이 하라는' 천도교의 가르침이다. 상대방의 마음도 나의 마음만큼이나 소중하기 때문에, 남의 마음을 함부로 해치면 자신의 마음도 해치기 때문에 신(한울님)을 모시는데 방해가 된다고 믿는다. 즉, 나이 많다고 아랫사람 함부로 대하지 말고, 신분 높다고 함부로 갑질하지 말란 뜻이다. 그러나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던 시절은 이미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조선 내 삼강오륜의 질서가 완전히 파괴된 때로, 최제우는 이러한 풍조가 일어난 이유는 사람들이 한울의 마음을 잊고 습관된 마음으로 소위 '욕심'을 숭상하는 사회 기조를 만들었고, 한울은 세상의 운수와 함께하기 때문에 그 스노우볼이 굴러 세상 자체가 아예 선(善)을 깔아뭉개는 시대로 갔다고 말한다. 결국 당시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반목하고 싸우는 것은 그들이 본래 악해서나 그들이 믿는 신이 타락해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런 괴질운수의 사회로 기운을 흘러가게 만들었기 때문이고 최제우는 이러한 상황을 매우 슬프게 생각했다.
이에 우리 육신 안에 모셔져 있는(侍) 한울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 즉 적자지심의 마음과 일치하기 때문에 천도교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은 이러한 한울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인간의 육관에서 비롯된 습관된 마음으로 인해 이러한 한울님 마음을 잊어버린지 오래이기 때문에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수도를 해야하며 이것이 천도교에서 말하는 수심정기이다. 이렇듯 육신의 쾌락과 고통 관념에서 벗어나 깊은 도에 이른다는 건 불교와도 비슷하다. 육신 안에 한울이 존재함을 인지하고, 습관된 마음을 버리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깨어있는 상태가 된다. 결국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마음에 지극한 기운(신, 한울님)을 영원토록 몸과 마음에 모시며 그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천도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며 최종적으로는 이 지상 위에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자는 '지상천국', 만민에게 덕을 베풀자는 '포덕천하', 나라에 충성하고 훌륭한 사회구성원이 되자는 '보국안민'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행복해지자는 '광제천하'의 실현이다.
한편, 한울로부터 태어나 육신을 얻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사망할 경우 육체는 왔던 곳인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환원'한다고 한다. 즉, 한울로 왔으니 한울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천도교의 사후관이다. 천도교에서는 천국과 지옥이 없으며 구원론도 구원자나 신도 없기 때문에 그저 기운에서 탄생해 기운으로 돌아간다는 '무왕불복'의 세계관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며, 의암성사법설의 '성령출세'에 의하면 이때 한울의 기운으로 돌아간 영혼은 소위 개체성령이 되어 후대의 마음 속에 영원히 불멸한다고 저술되어있다. 한마디로, 나의 존재가 수만년의 선대들의 한울이 쌓이고 쌓여 탄생한 만큼 나의 몸 안에는 선대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나 역시 환원하게 될 경우 후대의 마음속에 기억된다는 것이며 이것을 천도교에서는 '영적 장생'으로 부른다. 또한 후대 중 누군가가 이미 사망한 본인을 지극하게 생각하거나 본인이 남긴 뜻과 학문을 이어받는다면 비록 본인의 몸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정신은 불멸하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천도교에서 부르는 '덕업 장생'이다.
수도를 위한 올바른 자세의 세 가지는 '성(成)', '경(敬)', '신(信)'으로 각각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지극 정성을 다할 것(최선을 다할 것)', '남을 항상 공경하는 자세로 대할 것(타인을 한울님처럼 대할 것)'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이다. 그 외 직접적인 수도 방법으로는 오관을 잘 따르는 것, 주문을 통한 한울님에 대한 강령체험 등이 있다.
5. 교령
동학 · 천도교 교주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교조 | |||
초대 | 2대 | 3대 | 4대 | |
최제우 | 최시형 | 손병희 | 박인호 | |
교령 | ||||
초대 | 2대 | 3대 | 4대 | |
이종린 | 정광조 | 이종린 | 공탁 | |
5대 | 6-10대 | 11-15대 | 16대 | |
공진항 | 신용구 | 최덕신 | 김명진 | |
17대 | 17-19대 | 20-21대 | 22대 | |
이우영 | 이영복 | 고정훈 | 정운채 | |
23-24대 | 25-26대 | 27대 | 28대 | |
오익제 | 김재중 | 김광욱 | 김철 | |
29대 | 30대 | 31대 | 32대 | |
이철기 | 한광도 | 김동환 | 임운길 | |
33대 | 34대 | 35대 | 36대 | |
박남수 | 이정희 | 송범두 | 박상종 |
천도교의 최고지도자를 일컫는 말. 3년 임기제다.
6. 예복
천도교의 구 예복.*
2013년 12월 발표 후 검토를 거쳐*, 2014년 3월 25일(포덕 155년) 정식 발표된* 천도교의 신 예복.* 왼쪽부터 교역자복(남/녀), 집례복(남), 수련복(남/여), 청수봉전복(여), 설교자복(남)이다.
7. 의례
모든 천도교 신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5가지 의무인 오관(五款)이 있다.1. 삼칠주 (지기금지원위대강/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7] 수행하기.
1. 청수봉전(淸水奉奠), 즉 모든 행사에 맑은 물을 모시기
1. 시일(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시일식(천도교의 종교행사를 말함)에 참여하기
1. 성미(성금 내기)
1. 기도(한울님에 대해 마음 속으로 기도를 올리는 심고)
여담으로 대부분의 백과사전을 비롯한 사전에는 오관 중 성미(誠米)를 설명하면서 '매일 아침저녁마다 쌀 한 숟가락씩 떠서 모아 한달에 한번 교단에 바친다'고 설명하나, 이건 옛날 이야기.[8] 지금은 당연히 돈으로 낸다.[9]
천도교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제사상을 차릴 때 벽 쪽에 위패를 놓고 벽 쪽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을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제사를 지낸다.[10] 이는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시천주 사상에 입각해 1897년 4월 5일 동학창도38주년기념식전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였고, 1900년 <천도교의절>에서 공식화되었다. 다만 일반 가정에서 지내는 차례의 경우 전통방식대로 제물을 진설하기도 한다.
천도교의 삼칠주는 최제우가 했던 선생주문과 추종자들이 했던 제자주문이 다른데, 제자주문이 표준이다. 선생주문은 최제우 본인이 해야 말이 되는 내용이라 드물게 개인적으로 선생주문으로 수도해보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비슷하지만 다른 주문을 잠시 사용하기도 했고[11], 또한 처음 천도교에 입교할 때는 주문의 일부만 전해주기도 했지만, 점차 제자주문 전체를 입교하는 날 전해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4대 교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 시절인 1908년, 천도교단 차원에서 종교축일을 전부 양력으로 기념하기로 정하고 1909년부터 시행하였다. 그런데 이때 기존의 음력 날짜를 따로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고, 날짜를 그대로 옮겼다. 예를 들어 최제우가 1860년 음력 4월 5일에 한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데, 양력 4월 5일에 기념하는 식이다.[12] 천도교 내부에서도 이렇게 날짜만 옮기지 말고 양력으로 환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교단이 방침을 바꿀 정도는 아닌 듯하다.
8. 입교 방법
입교 방법은 간편한 편. 천도교를 신앙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주지에서 가까운 천도교 교당이나 수도원에서 입교식을 하면 된다.
입교식에는 교(敎)를 전해주는 전교인(傳敎人)과 교(敎)를 받는 수교인(受敎人), 그리고 의식을 집행하는 집례자 및 침례인이 한자리에 모여서 익을 행한다. 입교식 때에 수교인이 서천문을 낭독하고 전교인은 수교인에게 전해준다. 입교식이 끝난 후에 집례나 전교인은 수교인에게 수도의 요령, 오관실행[13] 등 신앙의 절차과 기초적인 교리를 설명해 준다.
9. 역사
개칭 이전의 역사에 대한 내용은 동학 문서 참고하십시오.
9.1. 일제강점기
전신인 동학이 구한말 반외세적 성격을 강하게 표출했듯이, 천도교 또한 일제강점기 들어 일제에 맞서 활약한다. 가장 유명한 업적으로서 1919년 3.1 운동을 가장 앞장서서 주축이 되어 주도했으며, 1920년부터 1926년 사이에는 기관지인 개벽을 간행하여 민족 정론지로 발돋움시킨다. 이러한 배경으로 1920년대 이후 발흥하였던 사회주의세력이 천도교를 좌우합작을 위한 민족주의세력의 대표로 인식하였다. 이는 종단이라는 특성상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단체보다도 재정적인 능력이 컸기 때문이었다.이러한 인식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소련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소련공산당은 한반도 내부의 사회주의 세력에게 천도교 세력과 함께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6.10 만세운동이었다. 또한 어린이, 여성의 인권은 물론 심지어 지구 환경까지 존중(천지부모 일체설)하는 안목을 갖고 있었다. 당시 천도교의 활약은 어린이날 지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대표적인 천도교인이다. 그는 당시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의 셋째 사위였다. 게다가 '어린이'라는 용어 자체가 천도교에서 만든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어린이에게 경어 사용 역시 천도교가 만들고 시작한 것이다.동덕여자중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동덕의숙도 천도교에서 설립한 일종의 미션스쿨이었다. 또한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원도 이용익에게서 김성수가 인수하기 전까지 천도교에서 운영하였다.
9.2. 신구파 갈등과 신파의 친일 행적
1922년 손병희가 사망한 후 천도교 내부는 엄청난 갈등에 휩싸였는데, 이를 '신구파 갈등'이라고 칭한다. 기존 독립투쟁 노선을 따르던 손병희 계열 구파와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을 주장한 최린 계열의 신파간 갈등이 심했다. 그래도 신구파 갈등이 심각함을 신파와 구파 모두 알아서 1930년대 초반 일시적으로 신구파가 통합됐지만 얼마 안 가 다시 분열되었다.이후 신파가 천도교를 장악해 천도교는 3.1 운동 시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아주 노골적인 친일 종교로 변질되었다. 자치론과 일선동조론을 받아들이며 노골적인 친일파로 전향했고, 그 거두가 최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에 반감을 가진 일반 신도들을 억지로 동원해가며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사종교단체 취급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끌려간 최린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는 말도 있다.[14]
구파는 반일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무인멸왜기도운동(1938년 무인년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일제에 적발되어 구파의 세력이 거의 사라졌다. 신구파가 혁파된 것은 8.15 광복 이후다.
9.3. 해방과 군사정권 시기
해방 후에는 세력이 급속히 미미해져 현재는 꽤나 마이너한 종교가 되었다. 이는 앞에서도 설명했듯 지독한 신구파의 갈등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와중에서 조직과 세력이 대부분 와해되었고, 신도의 상당수가 북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15]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6.25 전쟁 직후 월남한 천도교인들이 많았고[16] 박정희 정권 때[17] 정권의 지원으로 인해 교세 재건을 시도했다.[18] 이 시기 1960~1970년대 당시 천도교는 '반공종교'라는 이름하에 친정부 성향을 가진 종교였고, 교령에도 정계와 닿은 사람들이 많이 앉으면서 종교집단보다는 정치집단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가톨릭, NCCK계열의 개신교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을 때 천도교는 불교와 함께 침묵으로 일관했다. 1978년 천도교 춘천교구장이 유신정권에 반대해 분신 자살한 것이 거의 유일한 민주화 운동 참여다.
그러나 거창 양민 학살사건에 개입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여 서독 대사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최덕신 교령이 1986년 4월에 월북하는 사건이 터졌고, 천도교 교단은 이 사건에 타격을 받아 거의 교세가 무너졌다. 거기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 1997년 8월 오익제 교령[19]의 월북 사건이다. 교령 두 명이 월북을 해버렸으니 교단의 이미지가 안좋아진 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9.4. 현재
원래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취지는 난세에 흔들려서는 안되는 조선인들의 근본 신앙관과 마음가짐이었다. 이후 변질되어 정치집단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다 교령들의 월북 사건으로 결정타를 입어 흔들리고 교세도 쇠퇴하였던 천도교는 이후 종교 본연의 성격을 되찾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 등 학자들의 교학 연구에 대한 노력을 했으나 신도수의 감소폭만 줄였을 뿐이다.위의 서울교구 중앙대교당만 보면 지금도 교단활동이 활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국내의 민족종교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본부를 제외하면 상황이 상당히 열악하다. *그나마 어느 정도 희망적인 사실은, 비록 신자가 적은 소수 종교이지만 1995년 이후 신자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다.[20]2014년 12월에는 서울 서소문 성지화 사업과 관련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마찰을 빚었다(관련 링크 참고). 천도교 측에서는 서소문에서 동학 신자들도 순교했고 효수당했는데[21] 천주교만 서소문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에 세워진 대구 관덕정 순교기념관도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 성지화 사업을 추진했는데, 천주교의 순교지이자 최제우의 순교지여서 천도교에서 반발했다(관련 링크).
이외에 식목일 폐지[22]를 반대한 곳이 천도교인데 최제우가 동학의 깨달음을 얻었음을 기념하는 천도교 최대의 축제일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1908년까지는 음력 4월 5일에 기념하였는데, 1908년에 천도교에서는 음력 날짜를 그대로 양력으로 옮겨 기리기로 결정하고 1909년부터 최제우가 계시받음을 양력 4월 5일에 기념하였다. 식목일과 천도교 그 자체는 연관이 없지만 4월 5일을 천도교의 날로 동시에 기념하고자 하는 의미도 있으며 실제로 신도들은 4월 5일을 누가 물어보면 식목일과 천도교 창시일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2개를 동시에 대답한다.
이외에도 학계에서 천도교 연구에 대해서는 단국대학교가 학교의 설립자가 독립운동가 장형으로 민족주의 관련 연구가 활발하므로 천도교 관련 자료와 연구 실적이 국내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실제적인 연구는 교립 종합대학교를 보유하지 못한 천도교 대신 아이러니 하게 원불교에 소속된 원광대학교가 동학의 권위자인 전임 총장 박맹수 박사(현직 원불교 교무이기도 하다)를 중심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포진해 국내에서 활발한 동학관련 연구와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10. 북한의 천도교
김일성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천도교를 다소 고평가하였고, 북한 지역에서는 천도교청우당이 우파 종교정당이 되어 당초에는 막대한 당원을 바탕으로 무시 못할 세력이었으나, 1950년 영우회(靈友會) 사건을 비롯해서 북한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은 숙청당하며 위성정당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북한에서는 기독교가 외래종교인 데다가 기독교 세력 상당수가 남한 교단과 연계된 이유 때문에 천도교를 나름대로 우대해주고 있다. 북한에서는 공식적인 천도교 조직으로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와 '천도교청우당'이 존재한다.천도교 평양교당에서 봉행되는 시일식.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있다.
북한 정부 및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가 UN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북한 천도교는 신자 1만 5천여 명에 교당 52개 시설이 있어서 북한에서 가장 신자 수가 많은 종교라고 한다. 평양에는 평양교당이 있고 남북천도교 합동시일식을 한 적이 있다.
11. 미션스쿨
대한민국의 천도교 산하 고등교육기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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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자인 유명인
12.1. 과거 신자였던 유명인
- 김구 - 청년 시절에 동학 '아기 접주'였다가 개신교 감리회로 개종.
[1] 다른 말로 '포덕'(布德)이라고도 한다.[2] 천도교 중앙대교당 옆에 있다.[3] 다만, 동학의 탄생이 유불도와 관계가 없는 한국의 고유 사상이라는 연구논문도 있다.[4] 천도교인의 신앙 목적 중 하나는 '지상천국'이며, 이는 천국이란 곳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건설하자라는 의미이다.[5] 이는 동양철학에서 세계를 상징하는 세 가지인 '천', '지', '인'에서 비롯된 것이다.[6] 부모님께 효를 극진히 하오며, 남편을 극진히 공경하오며, 내 자식과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오며, 하인을 내 자식과 같이 여기며, 육축이라도 다 아끼며, 나무라도 생순을 꺾지 말며, 부모님이 분노하시거든 성품을 거슬리지 말며 웃고,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이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니, 천리를 모르고 일행 아이를 치면 그 아이가 곧 죽을 것이니 부디 집안에 큰 소리를 내지 말고 화순하기만 힘쓰옵소서. '해월신사법설'-내수도문[7] 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한문을 번역한 뜻은 다음과 같다. "지극한 기운이 지금 다다르니 원컨대 크게 강림하소서. 한울님을 섬기면 조화가 정해지고, 영원히 잊지 않으면 만사를 알게 된다."[8] 과거의 경우에는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할 당시는 물론 화폐경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현물도 많이 사용하던 시대였다. 동시에 전국민의 대다수가 농부였다.[9] 대신 액수가 정해져 있다. 한때는 1인당 5,000원이었으나 포덕 155년(2014년)부터 10,000원으로, 반년마다 내는 연성금은 1호당 40,000원을 내던 것에서 1인당 20,000원을 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포덕 160년(2019년) 기준[10] 반대로 일반적인 유교식 제사에서 벽 쪽에 위패를 놓고 위패를 기준으로 제물을 진설하는 방식을 향벽설위(向璧設位)라고 한다.[11] 조선 조정의 탄압을 피해 최시형이 별개로 만든 주문도 있었고, 그 외에 교파에 따라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나 도교의 주문을 같이 하거나 창작하기도 했다. 다만 현재 천도교에서는 최제우가 받았던 주문들만 인정한다.[12] 1860년 음력 4월 5일을 그레고리오력으로 환산하면 5월 25일이다.[13] 오관(五款)은 천도교인이 지켜야하는 5가지 덕목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주문, 청수, 시일, 성미, 기도의 다섯가지 수행방법을 이른다.[14] 심문장에서 자기변호에 바쁜 이광수를 향해 입 닥쳐!를 외친 일화로도 유명하다.[15] 당시 전체 천도교도의 90% 이상이 북한 지역에 있었다. 광복 당시 북한지역에는 천도교도가 150만 명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수치는 북한의 다른 종교 신자를 합친 수보다도 많은 수였다. 천도교 다음은 37만 5천명의 불교.(북한 "조선중앙연감", 1950).[16] 1920년대까지만 해도 무려 300만이라는 신도 수를 보유했고, 그 이후로 신도 수가 대폭 하락했음에도 60년대 당시 기록에 따르면 무려 60만명이 넘는 천도교인들이 월남했다고 한다.[17]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이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영향으로 박정희 개인은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18] 대표적인 예로 수운회관 건립, 용담정 정비 등이 있다.[19] 2012년 9월 1일 북에서 사망[20] 1995년 2만 8천명, 2005년 4만 5천명, 2015년 6만 6천명으로 미미하게나마 신자 수가 계속해서 늘고 있다.[21] 순교: 최시형, 이필제, 전봉준, 최재호, 안교선/효수: 김개남[22] 정확히는 공휴일에서만 제외하는 것이지만 뜻도 불명확한데 쉬는 날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기에 그냥 폐지로 보아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