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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60026><colcolor=#fff> 천도교 Cheondoism | 天道敎 | |
파일:274669215.jpg | |
천도교 중앙대교당 내부 | |
창시자 | 최제우 |
교령 | 현암 윤석산 |
창시일[1] | 1860년([age(1860-01-01)]주년) |
주요 인물 | 손병희 최제우 최시형 박인호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906호 (경운동 88, 수운회관[2]) |
링크 | | | | | |
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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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도교(天道敎)는 1860년 조선 말기 대신사 최제우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창시한 동학을 계승, 발전시킨 한국의 민족 종교로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 지상천국(地上天國)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1905년 12월 1일, 3대 교주 손병희가 동학을 종교화하여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개편하였는데, 이는 당시 사상으로만 머물러있던 동학을 정식 종교화, 법의 제도권하에 들게하여 당시 만연하던 일제의 조선민족주의 탄압으로부터 동학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2. 용어
천도교에서는 포교를 포덕, 집회를 여는 장소를 '교당(敎堂)', 천도교의 최고 책임자를 교령이라 한다. 1955년 1월 13일 천도교 교헌(敎憲)이 나오면서 공식적으로 대표를 교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기는 3년이며 3년에 한 번 열리는 천도교 전국대의원회의에서 새 교령을 선출한다. 또한 교인끼리는 서로를 동덕이라 부른다. 동덕여자중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대학교가 천도교의 미션스쿨로 출발한 것이다.'포덕'(布德)이라는 말은 연호로도 사용한다. 최제우가 용담정에서 한울로부터 깨달음을 받았다는 1860년(조선 철종 11년)을 원년(1년)으로 삼아 헤아린다.
2024년 기준 포덕 165년.
국궁에서 국궁인들끼리 서로를 부르는 접장이란 말도, 원래는 천도교의 포접제 하에서 쓰던 말이었다.#
수운 최제우를 대신사(大神師)라,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신사(神師)라, 3대 교주 의암 손병희를 성사(聖師)라, 4대 교주 춘암 박인호를 상사(上師)라 칭한다. 또한 4대 교주까지 각기 기념일을 정하여 천도교의 절기로 삼았다.
3. 기념일
- 천일(天日): 4월 5일. 1860년에 최제우가 한울로부터 깨달음을 얻었음을 기림.
- 인일(人日): 12월 24일. 1897년에 손병희가 최시형으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림.
- 도일(道日): 1월 18일. 1908년에 박인호가 손병희로부터 교주직을 승계받음을 기림.
4대 교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 시절인 1908년, 천도교단 차원에서 종교축일을 전부 양력으로 기념하기로 정하고 1909년부터 시행하였다. 그런데 이때 기존의 음력 날짜를 따로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고, 날짜를 그대로 옮겼다. 예를 들어 최제우가 1860년 음력 4월 5일에 한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데, 양력 4월 5일에 기념하는 식이다.[3] 천도교 내부에서도 이렇게 날짜만 옮기지 말고 양력으로 환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교단이 방침을 바꿀 정도는 아닌 듯하다.
4. 교리
동학을 계승한 종교답게 기본적인 골격은 동학과 큰 차이가 없다. 최제우 스스로가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가 합일된 것이라. 그러나 도인즉 같으나 이치는 다르니라"라고 하였다.[4]4.1. 궁을기(弓乙旗), 궁을장(弓乙章)
궁을기(弓乙旗) | 궁을장(弓乙章) |
천도교 서울 중앙대교당에 걸려있는 궁을기 | 중앙대교당 내부에 있는 궁을장 |
천도교를 대표하는 상징은 '궁을(弓乙)'이며 최제우가 작성한 동경대전의 첫 장인 '포덕문'에 처음 등장한다[5]. 그 후 3대 지도자인 의암 손병희가 최제우의 득도 당시 받은 궁을영부(靈符)를 상징하여 제정하였으며, 포덕 47년부터 게양하고 있다. 궁을기는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이 약동하며 물결치는 파동의 한문식 표현 방법으로, 만물의 생사와 흐름을 관장하는 '한울'이라는 지극한 기운의 상징 그 자체이다. 그 의미로는 사람이 하늘을 모시고 있다라는 시천주(侍天主), 내 마음이 네 마음과 같다라는 뜻의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성‧심‧신 삼단(性心身三端), 천인합일(天人合一) 등 인내천(人乃天)의 요체(要諦)를 밝혀주고 있다.
4.2. 인내천(人乃天)
천도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상엔 보이지 않지만 퍼져서 활동하는 기(氣,에너지)가 있으며, 이러한 에너지 활동들이 세상을 주관해 우주 만물의 모든 활동(사계의 흐름, 기상현상 등)과 생물의 생사를 움직인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기운 전체를 아우르는 것을 지극한 기운, 즉 한울로 칭하며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우주의 모든 만물의 탄생과 죽음, 자연 현상 변화 모두 이 지극한 기운인 한울의 개입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천도교인들은 물물천(物物天)과 사사천(事事天)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말하자면 세상 만물에 한울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자연과 심지어 사물까지 모두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그러나 모태인 동학이라는 종교가 본디 서학인 그리스도교에 반발해 형성된 만큼, 신을 인간과 분리시켜 절대적 위치로 상정하는 교리에 대해서는 특히 반발하는 입장을 취하며 또한 천당이나 지옥과 같은 사후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도 부정한다. [6]
앞서 말한 한울은 사람의 육신 밖에도 존재하지만(외유기화) 육신 안에도 존재하며(내유신령), 이러한 이유로 천도교에서의 신은 사람과 하나가 된 '신인합일'의 상태라 볼 수 있다. 동학 초기 최제우는 신이나 상제가 인간의 육신 밖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무릇 사람이라면 모두 마음 속에 한울님(天主)을 모시고(侍) 있다 말하며 시천주(侍天主)를 주장했고, 2대 지도자인 해월 최시형은 한울님을 부모처럼 모시고 또 기른다는 점에서 시천주를 양천주(養天主)의 개념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이는 3대 지도자인 의암 손병희에 의해 '사람이 곧 한울이다'라는 의미의 인내천(人乃天)으로까지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다.
결국 천도교의 신관에서 신은 인간 육신 밖에서 상벌이나 구원, 심판 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릇 사람이라면 마음 속에 '깨끗한 본심'의 형태로 모두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육관[7]에서 비롯된 습관된 마음으로 사람을 보지 않는다면 모두 그 본질은 깨끗한 한울 그 자체가 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곧 한울이다(인내천)라는 범인류애적 사상으로 발전되며, 어른, 아이, 여성 할 것 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한기 때문에 당시 신분과 성 차별이 만연하던 조선 사회에서 대단히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를 대할 때 큰 절을 올린 것과, 해월신사법설의 '내수도문'에서 만인에 대한 공경과 사랑을 주장한 것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8]
4.3. 세계관
천지 만물과 자연의 흐름, 심지어 시간과 사건의 발생과 소멸 모두 한울이라 하는 지극한 기운에서 발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은 이 거대한 기운의 흐름 속에서 무왕불복한다는 것이 천도교의 기본적인 세계관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인간의 경우 보이지 않는 한울이 육신을 얻어 탄생한 피조물로, 다른 만물과는 다르게 자신의 근원(한울)에 대해 사유하고 한울이 자신의 육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수도를 통해 자각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가장 '신령하다'라고 표현한다[9]. 물론 이때 말하는 '신령함'은 다른 만물에 비해 우월한 위치를 가져서 이 피조물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설명이라기 보다는 타 생명체에 비해 한울을 자신의 마음 속에 모실 수 있는(侍) 유일한 생명체로써 그 특별성을 가진다로 이해하면 된다.[10]한편, 천도교에서는 생명이나 자연의 흐름 뿐만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나 운수 역시 한울의 일부이므로 이 역시 한울을 모시고 있는 당대 인간들의 마음가짐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던 시절은 이미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조선 내 삼강오륜의 질서가 완전히 파괴된 때로, 안으로는 도적과 강도가 들끓었고 외부로는 전쟁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망국의 시류였다. 최제우는 소위 이런 아포칼립스적 풍조가 일어난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자신의 본심인 한울의 마음을 잊고 습관된 마음(습관천)과 이기적인 생각(각자위심)으로 소위 '욕심'과 '악'을 숭상하는 사회 기조를 만들었고, 한울은 세상의 운수와 함께하기 때문에 그 스노우볼이 굴러 세상 자체가 아예 선(善)을 우습게 여기는 시대로 흘러 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당시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반목하고 싸우는 것은 사람들이 본래 악해서나 그들이 믿는 신이 타락해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다 함께 습관천과 각자위심의 마음으로 살다보니 그런 괴질운수의 사회로 세상 기운을 흘러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이것을 개개인에 적용한다면 천도교에서는 모든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한울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곧 만병의 근원이 자신의 마음에서 기원한 것임을 의미한다. 즉, 시련이 있을 때 자신을 바로 잡고 습관된 마음이나 각자위심의 마음을 버리고 올곧게 행동한다면 심각한 시련으로 스노우볼이 굴러갈 수 있었던 일 역시 긍정적으로 해결될 수 있지만, 그 시련에 너무 몰두하여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스트레스를 주는 등) 없던 병도 생기고 스노우볼 역시 부정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천도교의 세계관은 '나의 마음'이다.
따라서 천도교인들의 시선에서 세계가 이렇게나 고통에 가득 차 있는 것은 우리가 본심을 잃고 각자위심의 마음으로 내 안의 한울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기 때문에 이들의 이상적인 삶과 신앙의 궁극적 목표는 이러한 한울님 마음을 회복하여 세상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우리 육신 안에 모셔져 있는(侍) 한울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 즉 적자지심의 마음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 마음을 회복하여 서로 타인을 부모처럼 공경한다면 천국이란 것을 어디 멀리서 찾을 것 없이 당장 실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인간의 육관에서 비롯된 습관된 마음으로 인해 이러한 깨끗한 마음을 잊어버린지 오래이고 또 이것을 회복하기 매우 힘들고 고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도를 해야하며 이것이 천도교에서 말하는 수심정기(守心正氣)이다. 이렇듯 육신의 쾌락과 고통 관념에서 벗어나 깊은 도에 이른다는 건 불교와도 비슷하다. 육신 안에 한울이 존재함을 인지하고, 습관된 마음을 버리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깨어있는 상태가 된다. 결국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마음에 지극한 기운(신, 한울님)을 영원토록 몸과 마음에 모시며 그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천도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며 최종적으로는 이 지상 위에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자는 '지상천국', 만민에게 덕을 베풀자는 '포덕천하', 나라에 충성하고 훌륭한 사회구성원이 되자는 '보국안민'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행복해지자는 '광제천하'의 실현이다.
4.4. 사후관
한편, 구세주나 절대신이 없는 천도교의 특성상 천국이나 지옥, 연옥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한울로부터 태어나 땅으로부터 육신을 얻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사망할 경우 육체는 왔던 곳인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환원'한다고 한다. 즉, 천도교의 사후관은 한울에서 육신을 얻어 왔으니 죽을 때도 한울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에 그저 기운에서 탄생해 기운으로 돌아간다는 '무왕불복'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수운 최제우가 '천국'을 찾는 사람들에게 내세에 천국 찾을 생각 하지 말고[11] 이 땅위에 지금 건설하도록 노력하라라며 비판했다면, '사후'에 관해서는 의암 손병희가 '성령출세설'에 의해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천도교에서는 '육적 장생', '영적 장생' 그리고 '덕업 장생' 세 가지가 존재하는데 여기서 육적 장생은 불로불사하는 것이 아닌, 만병의 근원이 마음 씀씀이에서 오기 떄문에 깨끗한 자신의 본심을 지키며 산다면 그만큼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의미이다. 영적 장생은 누군가가 환원하여 하나의 한울 기운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영혼은 소위 개체성령이 되어 후대의 마음 속에 영원히 불멸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의 존재가 수만년의 선대들의 한울이 쌓이고 쌓여 탄생한 만큼 나의 몸 안에는 선대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나 역시 환원하게 될 경우 후대의 마음속에 기억된다는 것이다. 또한 후대 중 누군가가 이미 사망한 본인을 지극하게 생각하거나 본인이 남긴 뜻과 학문을 이어받는다면 비록 본인의 몸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정신은 불멸하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천도교에서 부르는 '덕업 장생'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느 철학자의 삶과 그의 학업을 심도있게 공부하다보면 어느 순간 탁 트인 듯 그 철학자의 삶과 정신 가치관을 비롯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순간이 오기도 하는데, 천도교에서는 이 순간을 '해당 철학자와의 기운이 나와 통했다'라고 표현한다. (비단 철학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남긴 학업에 깊이 심취해서 연구했을 때, 그 사람의 가치관, 정신, 삶과 일치가 되는 것인 셈이다) 결국, 해당 철학자는 죽어 사라졌지만 그 기운은 우주 속에 여전히 존재했고, 내가 그 뜻을 기억하고 깨달은 순간 그 기운과 나와 소통한 것이다. 이게 천도교에서 말하는 영적 영생이다. 기독교인들이 열광적으로 기도할 때 간혹 '예수님을 보았다'라고 말하거나, 백팔배를 열심히 드리던 불자가 '부처님의 형상을 보았다'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매일매일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잠겨 그녀를 사모하며 기도하던 사람이 어느날 '어제 분명히 어머니 목소리를 들었어!'라고 말하는 것 모두 그 사람의 기운과 일치가 되어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천도교에서는 이러한 일을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예수, 부처, 무함마드, 공자, 하다못해 돌아가신 어머니 모두 그저 환원했을 뿐이니 누군가 해당 인물에 대해서 정말 진지하게 고찰하고 기도하고 사모하면 그 기운이 자신과 통해 영적 경험을 했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며, 이는 궁을에서 설명한 것 처럼 그 영혼 기운의 파동이 나와 맞아서 일어난 일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천도교에서는 데자뷰 현상을 내 몸 안에 있는 전대조상들의 기억을 떠올리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선조들 역시 이미 육신은 사라졌지만 혼은 우주로 환원했고, 나는 그들의 기운(한울)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결국 나는 조상과 함께라는 말이 되는데, 한울과 내가 통했다면 조상들 중 누군가의 기억을 마치 파편처럼 떠올린다는 것이 된다.[12] [13] [14]
이러한 이유로 의암 손병희 역시 양산 통도사에서 수련할 때 "옛적에 이곳을 보았더니, 오늘 또 보는구나"라고 말했는데(성령출세설),이는 한울과 나의 구별심이 없어진 지경에 이른 손병희가 이미 사망한 최제우의 기억을 떠올린 일종의 영적 체험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수와 향만 준비한 천도교 신자의 제사상 | 천도교 신자의 제사상. 숟가락 위치가 반대이다. |
천도교에서는 제사 역시 나 자신을 위한 제사(향아설위)로 시행하는데, 이는 앞서 말한 것 처럼 내가 기리고자 하는 조상은 어차피 나의 몸 속에 하나의 기운으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15] 그것이 곧 조상님에게 좋은 식사 대접하며 잘 모신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천도교식 사후관에서 온 것이다. 즉, 천도교의 시각에서 제사는 먹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조상님도 감응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망자 중심의 제사는 벽에다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향벽설위'라 칭했다. 해월 최시형은 이에 더 나아가 "물이라는 것은 만물의 근원이니라. 만 가지를 차리어 벌려 놓는 것이 정성이 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청수 한 그릇이라도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것이 옳으니라."라며 청수 한 그릇과 망자를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만으로 이루어진 매우 간소화 된 제례 방식을 권고하기도 했다[16]. 이에 많은 천도교 신자들은 여전히 청수 한 그릇과 양초정도만 준비하고 조상을 모시거나 아예 본인이 식사하는 방향으로 숟가락을 놓는 등의 향아설위를 실현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우주 만물은 큰 기운을 받아 태어났고 그 명이 다하더라도 큰 기운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나를 누군가가 지극히 기린다면 영적 장생을 하는 것이고, 살아생전 큰 덕을 쌓았다면 덕업 장생을 하는 것이다. 그 후에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지 안 태어나는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수운 최제우는 자신이 다시 태어날지는 안 태어날지는 모르지만 태어나더라도 믿지 않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결국 육신의 부활은 의미가 없으며 영적 장생을 하되 그 사람을 기리는 사람에게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천도교에서 육신이란 결국 땅으로부터 받은 한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육신이 다시 부활하거나 윤회를 하는 등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내 육신을 이루는 철분은 먼 옛날 로마 시대의 창과 방패, 고려시대 대장간의 망치에 왔을 수 있고 수분은 선사시대 갈매기의 배변에서 왔을 수도 있고, 로키산맥의 물에서 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수 만년의 세월과 함께 내 혼(기운)은 수 만년대의 선조들과 함께 내 후대에 대대로 이어져 내려갈테니 이것이 천도교식 윤회에 대한 해석이라고도 볼 수 있음과 동시에 앞서 설명한 '무왕불복'의 세계이다.
4.5. 신앙의 목적
아브라함계 종교의 목적이 천국으로의 구원, 불교의 목적이 현생에 깨달음을 얻어(해탈) 윤회의 사슬을 끊는데 있다면 천도교의 신앙의 목적은 크게 정리한다면 다음 네 가지이다.포덕천하(布德天下)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이 천도교의 진리를 알고 실천하도록 덕을 펴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포덕은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전도가 되겠다.
그런데 천도교에서는 단순히 교리를 전파한다는 의미의 포교가 아니라, 덕을 편다는 의미로써 포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주기도문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말이 있는데 이게 포덕천하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광제창생(廣濟蒼生)
방황하는 사람들을 구제하자는 말로 쉽게 말해 잘못된 관념과 타락한 이기주의인 각자위심으로 인하여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 삶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앞서 설명된 것 처럼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 모든 것은 사실 한울로 연결되어있으며 한울의 자손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천이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마치 천지부모를 모시듯 공경하며 사랑하면 사람들 마음 속에 있던 각자위심의 마음은 점차 사라지고 현세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중생구제'가 여기에 정확히 해당된다.
보국안민(輔國安民)
천도교는 현세에 집중하며 개인의 해탈->사회에 영향->국가 전체가 건강해짐이라는 단계로 수행을 하기 때문에 사회, 정치, 국가문제에 등을 돌리지 않으며 오히려 국가를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이는 제정일치같은 성격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혹은 같은 시민 동료로서 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또 보존하기 위해 기꺼이 헌신하고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그 목적에는 "안민", 즉 '우리 모두를 위해서'라는 당위성을 가진다.[17] 즉, 나만을 위한 구원이나 해탈을 바라지 말고 공동체, 나아가 국가를 위한 마음을 가질 것을 천도교에서는 권유하고 있다.
지상천국(地上天國)
일명 후천개벽의 세상으로 수운 최제우는 살아생전 말세의 화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서학을 믿으며 그곳에서 말하는 천당(궁궁촌)을 찾는 모습을 보며 '차라리 지금 이 땅을 천국처럼 만들라'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지상천국의 건설이다. 지상천국 건설은 폐쇄된 이단 공동체를 만들자는 의미가 아닌 "내가 한울과 일체임을 깨달으니 마음이 편해지고 맘이 편해지니 주변인들에게 한 없이 관대해짐" -> "그 영향력으로 주변 사람도 행복해짐"(덕의발현) -> "한 사회, 공동체가 건강해짐" -> "사회가 건강하니 국가도 건강해짐" -> "전 국민이 욕심 없이 행복하니 그곳이 천국이다"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개념이다. 동학농민운동 역시 이러한 개벽된 사회 건설을 꿈꾸며 탄생한 운동이지만, 이 동학 혁명이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나자 의암 손병희와 야뢰 이돈화는 단순히 의지가 있는 사람들만의 기도만으로는 이러한 이상이 실현되기는 어렵다고 판단, 정치와 종교가 서로 도와 의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교정쌍전(敎政雙全)'의 개념을 주장했다. 교정쌍전은 이슬람식 신정일치나 국가 수장이 국교 수장을 겸하는 교정합일의 사회가 아닌, '교'가 사람들의 선악 구분을 위해 바른 길로 인도하고, '정'이 사물을 분별하여 사람들을 제도권에서 보호하는 형식으로 마치 새가 날기 위해 오른쪽 왼쪽 날개를 함께 사용하는 형식의 사회이다. 이러한 이유로 천도교는 일상에서의 참여와 사회 개혁 운동에 적극적인데, 이는 천도교의 본질이 동학이고, 동학은 성리학을 극복하고 사회개혁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써 탄생했기 때문에 태생부터 개혁주의적인 성격을 띄기 때문이다.
천도교에서 말하는 도(道)와 덕(德)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아무리 머리로 공부를 한들 실제로 행하지 않으면 덕이 발산되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했다. 이 때문에 천도교는 직접 행하고 직접 사회 활동에 참여해 지상천국을 건설할 것을 주문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의 목적 네 가지 모두 지극히 현세적이다.
4.6. 후천개벽
후천개벽은 징벌의 날, 심판의 날 혹은 세계 종말론과 같은 사상이 아니라 아름다운 세상이 곧 찾아올 것이니 다 함께 힘 내자라는 믿음이다. 즉, 마치 휴거나 종말론처럼 갑자기 어느 날 예언에 따라 세상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겨울에서 봄이 찾아오듯이 자연스럽게 또 봄과 같은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세상의 모든 흐름은 수평적이지 않고 한울의 기운 아래에서 무왕불복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은 없다. 결국 지금 세상이 이렇게 전쟁, 욕심, 시기, 질투, 폭력으로 얼룩 져 있는 것은 봄이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찾아오기 전 마지막 아포칼립스인 셈이며 이런 시간이 점차 지나가 사람들이 한울 마음을 되찾고 상대를 공경한다면 모두가 전쟁의 공포, 시기 질투에서 해방될 것이니 이 시기가 천도교에서 말하는 후천개벽이다. 물론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에 이런 개벽의 순간이 오더라도 또 사람들이 한울 마음을 잊고 습관천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다시 봄이 지나 추운 겨울로 가는 것이 세상의 흐름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후천개벽 사상을 천도교적 종말론이라고 오해하여 종말의 끝에 옥황상제가 다시 재림하여 신자들을 구원한다는 등의 낭설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신흥 종교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천도교에서 후천개벽은 절대로 휴거와 같은 종말론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른 평화로운 시기로 봐야한다. 특히나 수운 최제우가 살던 구한말의 상황은 외부로는 외적, 내부로는 부정 부패와 전염병, 기근, 범죄로 막장인 상황이었던지라 최제우는 이를 괴질운수, 불순천리, 상해지수로 표현했다. 이에 어떻게하면 좋은 세상이 오겠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희망으로 최제우는 "우리 모두 각자위심을 버리고 한울의 마음으로 일치해 타인을 공경하고 사랑한다면 그 때가 바로 후천 개벽이다"라고 말했다.동학 초기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이 후천개벽 사상을 마치 종말론으로 오해하거나 당장 어떤 물리적인 수단을 통해 단번에 이루어낼 수 있는 결실로 보는 경향이 많았다. 이에 수 많은 최제우의 제자들이 몰려들어 그에게 어떻게 해야 후천개벽을 앞당기거나 이루어낼 수 있는지 질문했고, 이에 대한 대답이 동경대전의 '탄도유심급' 부분이다. 탄도유심급에는 "가까운 데 있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정성에 있고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은 듯하나 그러하고 먼 듯하나 멀지 아니하니라라 말하며 마음을 조급히 하지 말라"라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 '후천개벽의 도래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얼마나 한울 마음을 되찾고 타인을 한울처럼 공경하며 살아가는지에 따라 달렸다[18]'라는 의미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이 후천개벽 사상을 새 세상에 대한 이상향으로 삼았을 때, 2대 지도자였던 해월 최시형은 혁명 초기에는 폭력 혁명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때 되면 알아서 찾아오는 것이 후천개벽이다'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며, 초반에 농민군을 진정시키기 위해 탄도유심급의 일부를 인용했을 정도이다.
4.7. 오관(五款)
수도를 위한 올바른 자세의 세 가지는 '성(成)', '경(敬)', '신(信)'으로 각각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지극 정성을 다할 것(최선을 다할 것)', '남을 항상 공경하는 자세로 대할 것(타인을 한울님처럼 대할 것)'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이다. 그 외 수도 방법으로는 주문을 통한 한울 체험과 더불어 기독교의 십계, 불교의 오계에 해당하는 규율로는 천도교 오관(五款)의 실행이 있다.천도교의 오관에는 [주문], [청수], [시일], [성미], [기도]가 있다.
주문은 사실상 천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위 오관 중에서도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다고 봐도 무관하다. 이 '주문'은 기독교의 주기도문, 사도신경, 불교의 반야심경과 비슷한 포지션으로 기독교에서는 위 주문을 외우며 주님이 이룩한 모든 것들에 대한 믿음을 재확인하며, 그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함축한 불교의 반야심경 역시 이것을 외우며 그의 가르침과 뜻을 잃지 않기를 기원한다. 천도교의 주문 역시 '한울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기 위함으로, 크게 [강령주문], [본 주문], [신사 주문]세 가지가 있지만, 앞 강령주문과 본 주문 두 개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강령주문]은 '한울님의 지극한 기운이 내 몸에 임하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도와 뜻을 가졌으며 至氣今至 願爲大降(지기금지 원위대강)이라고 읊는다. 강령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어감 때문에 접신이나 빙의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 보다는 내 안에 모셔져있는 한울의 지극한 기운을 느끼기 위해 가르침을 청하는 주문으로 보는 것이 좋다. 이 때문에 천도교에서는 일반적으로 '한울님 체험'을 하고자 하는 신도들을 위한 일종의 워밍업 용도로 사용된다.
[본 주문]은 '믿음에 대한 확인'으로, 기독교의 사도신경, 불교의 반야심경에 해당한다. 천도교에서는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라고 말하며 뜻은 '한울님을 내 몸 안에 모셨으니 모든 일이 한울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항상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이다.
천도교의 오관에서는 위 주문을 잊지 않고 꼭 시간이 될 때마다 되새김질 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즉, 천도교인이라면 최소한 알아야 할 항목으로, 교인들은 위 주문을 외우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내가 우주와 일치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재확인 한다. 보통 강령주문+본 주문을 포함해 21자를 외우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주문은 [본 주문] 13자로 심지어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장치로도 활용이 된다. 만약 천도교인이 본 주문, 강령 주문을 모른다면 그건 주기도문, 사도신경을 모르는 개신교인, 반야심경 뜻을 모르는 불자, 성호를 그을 줄 모르는 가톨릭 교인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천도교 시일식 중 '주문 3회 병송' 때 부르는 것으로, 위와 같이 느린 템포로 천천히 음에 맞춰서 병송한다고 보면 된다.
청수는 말 그대로 깨끗한 물을 의미하는데, 이는 물이 만물의 근원이자 깨끗함, 나아가 모든 자연에 평등하게 대함으로 평등함 그 자체를 상징하는 동양 사상에서 온 것이며 이 깨끗한 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내 마음을 올곧게 잡고 정화하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외에도 수운 최제우가 참형을 당하기 직전 깨끗한 물 앞에서 기도를 한 것을 기리기 위한 목적에도 있다. 굳이 비유를 한다면 가톨릭의 성수, 개신교의 십자가와 약간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청수는 그냥 시일식 때 깨끗한 물을 그릇에 담아 놓고 기도할 것을 권유하는 것으로, 천도교 신자가 집에서 심고 할 때 그냥 하지 말고 청수 한 그릇과 함께 조금 더 진중한 마음으로 해보기를 권유하는 의미이다. 매주 일요일 천도교 교당에서 시일식이 진행되고, 이때는 교회 차원에서 청수를 봉전하는데(청수봉전), 청수봉전을 위한 의식 자체가 있을 정도로 청수는 사실상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19]
시일은 매주 일요일 11시 교당에서 진행되는 시일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천도교 유튜브에서 매주 생방송을 한다.
성미는 오늘날로 치면 헌금인데 과거에 매일 아침과 저녁 밥쌀을 낼 때마다 식구 한 사람에 한 숟가락씩 생쌀로 떠서 일정한 그릇에 모아 두었다가 월말에 소속교구에 바쳤다. 그러나 이건 옛날 이야기.[20] 지금은 당연히 돈으로 낸다.
마지막으로 기도는 가정에서 매일 시일식을 밤 9시에 올리라는 것인데, 그냥 신자로서 기도의 일상화를 권고하는 느낌으로 받으면 된다. 이 매일기도의 경우에는 청수봉전 심고 주문 경전봉독 심고 순서로 일반적인 매주 시일식보다는 훨씬 간소하게 이루어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주문' 때 본주문 3회 병송이 아니라 신사주문이라고 다른 주문을 105회 해야하는데 기독교인이 매일 새벽기도 나가기 힘들고 불교신자가 매일 108배 못 하는 것 처럼 바쁜 현대 천도교인들이 매번 이 것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개인의 상황에 맞게 시행해도 무관하다.
5. 교령
동학 · 천도교 교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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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 2대 | 3대 | 4대 | |
최제우 | 최시형 | 손병희 | 박인호 | |
교령 | ||||
초대 | 2대 | 3대 | 4대 | |
이종린 | 정광조 | 이종린 | 공탁 | |
5대 | 6-10대 | 11-15대 | 16대 | |
공진항 | 신용구 | 최덕신 | 김명진 | |
17대 | 17-19대 | 20-21대 | 22대 | |
이우영 | 이영복 | 고정훈 | 정운채 | |
23-24대 | 25-26대 | 27대 | 28대 | |
오익제 | 김재중 | 김광욱 | 김철 | |
29대 | 30대 | 31대 | 32대 | |
이철기 | 한광도 | 김동환 | 임운길 | |
33대 | 34대 | 35대 | 36대 | |
박남수 | 이정희 | 송범두 | 박상종 |
천도교의 최고지도자를 일컫는 말. 3년 임기제다.
6. 예복
천도교의 구 예복.*
2013년 12월 발표 후 검토를 거쳐*, 2014년 3월 25일(포덕 155년) 정식 발표된* 천도교의 신 예복.* 왼쪽부터 교역자복(남/녀), 집례복(남), 수련복(남/여), 청수봉전복(여), 설교자복(남)이다.
7. 입교 방법
입교 방법은 간편한 편. 천도교를 신앙하고자 하는 사람은 거주지에서 가까운 천도교 교당이나 수도원에서 입교식을 하면 된다.
천도교에서는 여타 종교의 '예비신자교리'와 같이, 예비신자를 위한 교육 및 차담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디딤돌"이다. 매주 일요일 9시 30분부터 10시 40분까지 천도교 중앙대교당 옆에 위치한 수운회관에서 진행되며, 중앙대교당 측에 연락하면 해당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받을 수 있다.
입교식에는 교(敎)를 전해주는 전교인(傳敎人)과 교(敎)를 받는 수교인(受敎人), 그리고 의식을 집행하는 집례자 및 침례인이 한자리에 모여서 익을 행한다. 입교식 때에 수교인이 서천문을 낭독하고 전교인은 수교인에게 전해준다. 입교식이 끝난 후에 집례나 전교인은 수교인에게 수도의 요령, 오관실행[21] 등 신앙의 절차과 기초적인 교리를 설명해 준다.
8. 역사
개칭 이전의 역사에 대한 내용은 동학 문서 참고하십시오.
8.1. 일제강점기
전신인 동학이 구한말 반외세적 성격을 강하게 표출했듯이, 천도교 또한 일제강점기 들어 일제에 맞서 활약한다. 가장 유명한 업적으로서 1919년 3.1 운동을 가장 앞장서서 주축이 되어 주도했으며, 1920년부터 1926년 사이에는 기관지인 개벽을 간행하여 민족 정론지로 발돋움시킨다. 이러한 배경으로 1920년대 이후 발흥하였던 사회주의세력이 천도교를 좌우합작을 위한 민족주의세력의 대표로 인식하였다. 이는 종단이라는 특성상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단체보다도 재정적인 능력이 컸기 때문이었다.이러한 인식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소련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소련공산당은 한반도 내부의 사회주의 세력에게 천도교 세력과 함께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6.10 만세운동이었다. 또한 어린이, 여성의 인권은 물론 심지어 지구 환경까지 존중(천지부모 일체설)하는 안목을 갖고 있었다. 당시 천도교의 활약은 어린이날 지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대표적인 천도교인이다. 그는 당시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의 셋째 사위였다. 게다가 '어린이'라는 용어 자체가 천도교에서 만든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어린이에게 경어 사용 역시 천도교가 만들고 시작한 것이다.동덕여자중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동덕의숙도 천도교에서 설립한 일종의 미션스쿨이었다. 또한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학원도 이용익에게서 김성수가 인수하기 전까지 천도교에서 운영하였다.
8.2. 신구파 갈등과 신파의 친일 행적
1922년 손병희가 사망한 후 천도교 내부는 엄청난 갈등에 휩싸였는데, 이를 '신구파 갈등'이라고 칭한다. 기존 독립투쟁 노선을 따르던 손병희 계열 구파와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을 주장한 최린 계열의 신파간 갈등이 심했다. 그래도 신구파 갈등이 심각함을 신파와 구파 모두 알아서 1930년대 초반 일시적으로 신구파가 통합됐지만 얼마 안 가 다시 분열되었다.이후 신파가 천도교를 장악해 천도교는 3.1 운동 시절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아주 노골적인 친일 종교로 변질되었다. 자치론과 일선동조론을 받아들이며 노골적인 친일파로 전향했고, 그 거두가 최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에 반감을 가진 일반 신도들을 억지로 동원해가며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종교로 인정받지 못하고 유사종교단체 취급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끌려간 최린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는 말도 있다.[22]
구파는 반일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무인멸왜기도운동(1938년 무인년 독립운동)을 시도했지만 일제에 적발되어 구파의 세력이 거의 사라졌다. 신구파가 혁파된 것은 8.15 광복 이후다.
8.3. 해방과 군사정권 시기
해방 후에는 세력이 급속히 미미해져 현재는 꽤나 마이너한 종교가 되었다. 이는 앞에서도 설명했듯 지독한 신구파의 갈등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 와중에서 조직과 세력이 대부분 와해되었고, 신도의 상당수가 북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23]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6.25 전쟁 직후 월남한 천도교인들이 많았고[24] 박정희 정권 때[25] 정권의 지원으로 인해 교세 재건을 시도했다.[26] 이 시기 1960~1970년대 당시 천도교는 '반공종교'라는 이름하에 친정부 성향을 가진 종교였고, 교령에도 정계와 닿은 사람들이 많이 앉으면서 종교집단보다는 정치집단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가톨릭, NCCK계열의 개신교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을 때 천도교는 불교와 함께 침묵으로 일관했다. 1978년 천도교 춘천교구장이 유신정권에 반대해 분신 자살한 것이 거의 유일한 민주화 운동 참여다.
그러나 거창 양민 학살사건에 개입하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여 서독 대사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최덕신 교령이 1986년 4월에 월북하는 사건이 터졌고, 천도교 교단은 이 사건에 타격을 받아 거의 교세가 무너졌다. 거기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 1997년 8월 오익제 교령[27]의 월북 사건이다. 교령 두 명이 월북을 해버렸으니 교단의 이미지가 안좋아진 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8.4. 현재
원래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취지는 난세에 흔들려서는 안되는 조선인들의 근본 신앙관과 마음가짐이었다. 이후 변질되어 정치집단에 가까운 행보를 보이다 교령들의 월북 사건으로 결정타를 입어 흔들리고 교세도 쇠퇴하였던 천도교는 이후 종교 본연의 성격을 되찾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윤석산 한양대 명예교수 등 학자들의 교학 연구에 대한 노력을 했으나 신도수의 감소폭만 줄였을 뿐이다.위의 서울교구 중앙대교당만 보면 지금도 교단활동이 활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국내의 민족종교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본부를 제외하면 상황이 상당히 열악하다. *그나마 어느 정도 희망적인 사실은, 비록 신자가 적은 소수 종교이지만 1995년 이후 신자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다.[28]2014년 12월에는 서울 서소문 성지화 사업과 관련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마찰을 빚었다(관련 링크 참고). 천도교 측에서는 서소문에서 동학 신자들도 순교했고 효수당했는데[29] 천주교만 서소문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에 세워진 대구 관덕정 순교기념관도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 성지화 사업을 추진했는데, 천주교의 순교지이자 최제우의 순교지여서 천도교에서 반발했다(관련 링크).
이외에 식목일 폐지[30]를 반대한 곳이 천도교인데 최제우가 동학의 깨달음을 얻었음을 기념하는 천도교 최대의 축제일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1908년까지는 음력 4월 5일에 기념하였는데, 1908년에 천도교에서는 음력 날짜를 그대로 양력으로 옮겨 기리기로 결정하고 1909년부터 최제우가 계시받음을 양력 4월 5일에 기념하였다. 식목일과 천도교 그 자체는 연관이 없지만 4월 5일을 천도교의 날로 동시에 기념하고자 하는 의미도 있으며 실제로 신도들은 4월 5일을 누가 물어보면 식목일과 천도교 창시일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2개를 동시에 대답한다.
이외에도 학계에서 천도교 연구에 대해서는 단국대학교가 학교의 설립자가 독립운동가 장형으로 민족주의 관련 연구가 활발하므로 천도교 관련 자료와 연구 실적이 국내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실제적인 연구는 교립 종합대학교를 보유하지 못한 천도교 대신 아이러니 하게 원불교에 소속된 원광대학교가 동학의 권위자인 전임 총장 박맹수 박사(현직 원불교 교무이기도 하다)를 중심으로 많은 전문가들이 포진해 국내에서 활발한 동학관련 연구와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9. 북한의 천도교
김일성은 세기와 더불어에서 천도교를 다소 고평가하였고, 북한 지역에서는 천도교청우당이 우파 종교정당이 되어 당초에는 막대한 당원을 바탕으로 무시 못할 세력이었으나, 1950년 영우회(靈友會) 사건을 비롯해서 북한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은 숙청당하며 위성정당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북한에서는 기독교가 외래종교인 데다가 기독교 세력 상당수가 남한 교단과 연계된 이유 때문에 천도교를 나름대로 우대해주고 있다. 북한에서는 공식적인 천도교 조직으로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와 '천도교청우당'이 존재한다.천도교 평양교당에서 봉행되는 시일식.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있다.
북한 정부 및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가 UN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북한 천도교는 신자 1만 5천여 명에 교당 52개 시설이 있어서 북한에서 가장 신자 수가 많은 종교라고 한다. 평양에는 평양교당이 있고 남북천도교 합동시일식을 한 적이 있다.
10. 미션스쿨
대한민국의 천도교 산하 고등교육기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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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자인 유명인
11.1. 과거 신자였던 유명인
- 김구 - 청년 시절에 동학 '아기 접주'였다가 개신교 감리회로 개종.
[1] 다른 말로 '포덕'(布德)이라고도 한다.[2] 천도교 중앙대교당 옆에 있다.[3] 1860년 음력 4월 5일을 그레고리오력으로 환산하면 5월 25일이다.[4] 다만, 동학의 탄생이 유불도와 관계가 없는 한국의 고유 사상이라는 연구논문도 있다.[5] 不然 吾有靈符 其名 仙藥 其形 太極 又形 弓弓 受我此符 濟人疾病 受我呪文 敎人爲我則 汝亦長生 布德天下矣[6] 천도교인의 신앙 목적 중 하나는 '지상천국'이며, 이는 천국이란 곳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건설하자라는 의미이다.[7]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고 지각할 때 사용하는 여섯 가지로 눈, 귀, 코, 몸, 혀, 뜻이다. 천도교에서는 인간이 이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려하기 때문에 내 안에 있는 참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고 습관되고 왜곡된 마음으로 산다 말한다.[8] 부모님께 효를 극진히 하오며, 남편을 극진히 공경하오며, 내 자식과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오며, 하인을 내 자식과 같이 여기며, 육축이라도 다 아끼며, 나무라도 생순을 꺾지 말며, 부모님이 분노하시거든 성품을 거슬리지 말며 웃고, 어린 자식 치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이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니, 천리를 모르고 일행 아이를 치면 그 아이가 곧 죽을 것이니 부디 집안에 큰 소리를 내지 말고 화순하기만 힘쓰옵소서. '해월신사법설'- 내수도문[9] 陰陽相均 雖百千萬物 化出於其中 獨惟人 最靈者也.[10] 이는 동양철학에서 세계를 상징하는 세 가지인 '천(天)', '지(地)', '인(人)'에서 비롯된 것이다.[11] 혹은 궁궁촌 찾아가고 혹은 만첩산중 들어가고 혹은 서학에 입도해서 각자위심 하는말이 내옳고 네그르지 시비분분 하는말이 일일시시 그뿐일네 (용담유사)[12] 간혹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한 사람의 장기를 기증받은 사람이 똑같은 이유로 자살을 한다거나, 그 사람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는 등의 이상현상과 일치하다[13] 게임 바이오쇼크에 의하면 한 사람의 DNA구조를 바꾸는 물질로 '아담'이 등장하는데, 이 아담을 자신의 몸에 투여하면 그 사람의 데자뷰를 보는 등의 게임적 요소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천도교에서 말하는 성령출세와 매우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14] 무당의 접신과도 비슷하다.[15] 천도교에서는 어떤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한울님이 감응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 아무리 평소 좋아하는 치킨이라도 군대 입대 10분 앞두고 먹는 음식이랑 금요일 밤에 게임하며 맥주 한 잔과 먹는 음식은 맛 부터가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16] "마음으로 백년상이 옳으니라. 천지부모를 위하는 식고가 마음의 백년상이니, 살아있을 때에 부모의 생각을 잊지 않는 것이 영세불망이요...(중략)"[17] 나라가 외세에 의해 멸망하려하자, 결국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했다. 이때의 슬로건이 보국안민이었다.[18] 개벽이란 한울이 떨어지고 땅이 꺼져서 혼돈한 한 덩어리로 모였다가 자-축 두 조각으로 나뉨을 의미함인가? 아니다. 개벽이란 부패한 것을 맑고 새롭게, 복잡한 것을 간단하고 깨끗하게 함을 말함이니, 천지 만물의 개벽은 공기로써 하고 인생 만사의 개벽은 정신으로써 하나니, 너의 정신이 곧 천지의 공기이니라" - 의암성사법설, 인여물개벽설.[19] 시일식이 끝나고 이 청수는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 좋은 일에 쓰는 것을 추천한다. 예를 들면 뭐 함께 마신다거나 분작을 하거나 밥을 짓는등. 가톨릭 전례에서 영성체를 천박하게 먹지 않고 경건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먹는 것과 일치한다.[20] 과거의 경우에는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할 당시는 물론 화폐경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현물도 많이 사용하던 시대였다. 동시에 전국민의 대다수가 농부였다.[21] 오관(五款)은 천도교인이 지켜야하는 5가지 덕목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주문, 청수, 시일, 성미, 기도의 다섯가지 수행방법을 이른다.[22] 심문장에서 자기변호에 바쁜 이광수를 향해 입 닥쳐!를 외친 일화로도 유명하다.[23] 당시 전체 천도교도의 90% 이상이 북한 지역에 있었다. 광복 당시 북한지역에는 천도교도가 150만 명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수치는 북한의 다른 종교 신자를 합친 수보다도 많은 수였다. 천도교 다음은 37만 5천명의 불교.(북한 "조선중앙연감", 1950).[24] 1920년대까지만 해도 무려 300만이라는 신도 수를 보유했고, 그 이후로 신도 수가 대폭 하락했음에도 60년대 당시 기록에 따르면 무려 60만명이 넘는 천도교인들이 월남했다고 한다.[25] 박정희의 아버지인 박성빈이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영향으로 박정희 개인은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26] 대표적인 예로 수운회관 건립, 용담정 정비 등이 있다.[27] 2012년 9월 1일 북에서 사망[28] 1995년 2만 8천명, 2005년 4만 5천명, 2015년 6만 6천명으로 미미하게나마 신자 수가 계속해서 늘고 있다.[29] 순교: 최시형, 이필제, 전봉준, 최재호, 안교선/효수: 김개남[30] 정확히는 공휴일에서만 제외하는 것이지만 뜻도 불명확한데 쉬는 날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기에 그냥 폐지로 보아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