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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부 가메오카(亀岡)시 소재 오모토 본부 미로쿠(みろく) 회관. 2대 성지 가메오카 천은향(天恩鄕)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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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大本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성립된 일본의 신토(神道)계의 신흥종교. 아야베시에 살던 가난한 과부 노파 데구치 나오(出口なお), 나오의 막내사위 겸 양자인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郎)를 공동교조로 여긴다. 한국식 한자 이름은 대본교. 오모토교(大本敎)라고도 하나, 정식 명칭은 敎를 붙이지 않는다. 교토부 아야베시에 있는 매송원(梅松苑)과 가메오카시(亀岡市)에 있는 천은향(天恩鄕)을 모두 본부로 여긴다. 공동교조 2명과 관계 있는 두 곳을 모두 본부로 삼은 것이다.
막부 말기 메이지 시대 간사이지방에서 발생한 일본 3대 신흥종교[2]로, 메이지 25년(1892) 2월 3일[3] 당시 57세였던 데구치 나오라는 과부가 신들림하여 신령의 말을 하면서 시작했다. 이 신은 나오에게 신들림한 상태로 나오와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간방의 금신(艮の金神, 우시토라노 곤진)이라고 밝혔다. 데구치 나오는 이후 병을 낫게 하는 신력을 지닌 사람으로 아야베에 조금씩 이름이 알려졌다. 나중에 우에다 기사부로, 훗날 '데구치 오니사부로'라고 개명하여 오모토의 성사로 불리는 사람이 나오에게 찾아와 합류하면서 비로소 오모토가 종교조직으로 발족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경전은 《오모토 신유(大本神諭)》, 《영계 이야기(靈界物語)》. 신도 수는 17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한국에서 오모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현대 일본에서도 오컬트나 종교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듣보잡에 가깝다. 그러나 오모토 이후 나타난 일본 신흥종교 대부분에게 영향을 준, 일본 종교계에서는 큰 파장을 미친 종교이다. 예를 들면 오모토의 기관지 편집주간 출신이 세운 생장의 집이라든가, 오모토 신자 출신이 세운 세계구세교 등.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식민지 조선에서 이름을 떨치던 보천교와 교류한 적이 있다. 둘 다 당시 일본으로부터 감시대상인 동시에 오모토는 친 제국주의 성향을, 보천교는 시국대동단 결성 등 친 제국주의 움직임을 보였다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4]
일본 소설가 타카하시 카즈미(高橋和巳 1931-71)가 1966년에 출판한 소설 사종문(邪宗門)에 등장하는 신흥종교단체 히노모토 구령회(ひのもと救霊会)의 모델이 오모토 교단인 것으로도 회자되곤 한다. 소설 제목이 사종문(사악한 종교단체)인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오모토를 모델로 삼은 작중의 종교단체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2. 역사
2.1. 개조開祖 데구치 나오
개조 데구치 나오의 삶에 대해서는 이 페이지를 확인하면 좋다.데구치 나오(出口なお, 1837-1918)는 본디 '기리무라(桐村)'가 성씨이며, 교토 후쿠치야마번에 터 잡은 부유한 목수 가문의 장녀였다. 하지만 나오가 태어날 당시에 일본은 덴포 대기근 시절이라 입 하나라도 줄여보고자 부모는 아기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쌍수를 들고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대기근은 넘겼으나 아버지가 제대로 재산을 관리하지 못하여 가세가 기울어 빈한하게 살다가, 아버지가 콜레라로 죽자 다른 집에 하녀로 들어가 돈을 벌어 병약한 모친을 수발했다.
나오의 작은이모 데구치 유리코가 자식 없이 남편과 사별하자, 유리코는 나오의 모친에게 나오를 양녀로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오는 아야베에 있는 데구치(出口) 일가에 입적되었고 이후로 데구치란 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양어머니인 유리코가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나오는 아야베에 사는 목수와 결혼하였다. 이때 남편이 데구치가에 양자로 들어와 성과 이름을 모두 바꾸어 데구치 마사고로(出口政五郎)란 이름을 사용했다.
남편 마사고로는 목수로서는 솜씨 좋은 사람이었으나 가정을 잘 돌보지 않고 술 마시며 놀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처음 결혼할 때만 해도 남편이 신혼집을 하나 뚝딱 만들 정도로 가세에 여유가 있었지만, 점차 가정이 어려워져서 조그만 집으로 몇 차례 이사를 갔다. 나오는 평생 동안 자식 11명을 낳았지만 그중 세 쌍둥이가 유아사망하여, 3남 5녀가 남았다.
1885년에 남편 마사고로가 지붕에서 일하다가 떨어져서 골반을 다쳤다. 그런데 평상시에 술독에 빠져 살던 부작용인지 가벼운 중풍 증상까지 겹쳐 마사로고는 아예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못난 남편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직업이 있고 수익이 있던 남편이 아예 누워버리자 당장 먹고 살 길이 급해졌다. 나오는 못 쓰는 물건들을 주워 파는 등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그리고 남편은 그 와중에도 나오에게 술을 사오라고 요구했다. 나오는 옛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이러한 남편의 요구에도 말없이 따랐다고 한다. 죽기 며칠 전에도 술을 1병 달라고 해서, 나오는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겨우 술을 사들고 들어가야 했다. 며칠 뒤에 남편이 사망하여 정말 쓸쓸하게 장례식을 치렀다.
재앙은 가세가 기울고 남편이 죽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장남은 자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집을 떠나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장녀 요네코는 인근에 사는 웬 홀아비와 눈이 맞더니 보쌈당해 결혼했고[5], 장녀와 결혼한 그 남자는 나오네 집안을 위협하며 나오의 3남을 양자라고 데려가 바렸다. 1889년에 차녀 히사코가 무사히 결혼하는가 했더니, 이듬해에 광증이 발병했다. 1892년 1월 27일에는 장녀 요네코마저 똑같은 광증이 발병했다. 거듭되는 재앙 때문에 나오는 인근에 퍼졌던 금광교 교회에 찾아가기도 했는데, 훗날 이 시기를 "지옥의 가마솥에 빠진 것 같았다."'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나오에게는 아직도 어린 두 딸이 남아 있었다.
장녀가 미친 증세를 보인 지 3일 후인 1월 30일(음력 설날), 나오에게 처음으로 신들림의 조짐이 나타났다. 나오가 꿈을 꾸었는데 웬 궁전에서 옥좌에 앉은 위엄 있는 사람을 2명이나 만나고, 죽은 남편 마사고로도 만났다. 나오는 꿈속에서 남편을 만나자 너무나도 반가워 달려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꿈을 연달아서 꾸다가 2월 3일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신들림 증상을 나타냈다.
나오는 그날 장녀를 문병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오는 갑자기 신이 들려 그 이전까지 남들이 들어본 적이 없는 위엄 있는 남자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오가 이렇게 된 모습을 보고, 집을 보던 4녀 료코와 5녀 스미코는 "엄마까지 요네코 언니처럼 미쳐버리면 우린 어떻게 되지?"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나오는 신이 들리긴 했지만 자기 의식을 잃지 않고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들림 상태에서 나오는 스스로 '자기 몸 안에 들어온 존재'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 존재는 스스로를 '간방의 금신'이라고 밝혔으나, 나오는 "당신이 여우나 너구리의 귀신이 아니라 큰 신령인 줄 어떻게 알죠?" 하며 믿지 않았다. 이에 신령은 "나는 신이다.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삼천세계를 무너트리고 다시 세울 신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6]
나오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간방의 금신'이라고 칭한 존재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 훗날 오니사부로를 만나, 오니사부로가 '진혼귀신법'이라는 술법으로 잡귀가 아니라 진짜 신령이라고 판정해준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믿었다.
나오는 오니사부로를 만나기 전, 방화범으로 오해를 받아 경찰에 취조받고, 미친 여자라고 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갇히는 등 수모를 겪었다. 이렇게 갇혀 있을 때 간방의 금신에게 계시를 받아 처음으로 '오후데사키'라고 하여 신령이 내리는 말을 적기 시작하였다. 이후 나오는 죽기 얼마 전까지 약 20여 년간 오후데사키를 적었다. 나오는 본디 문맹이었으나, 오후데사키를 쓸 때만큼은 오직 히라가나로만 쓰긴 했어도 글을 쓸 수 있었다.
기껏 나오고 봤더니 맏사위가 나오의 가난한 재산을 전부 처분한 뒤였다. 나오는 부득불 사위들 집에 얹혀 살거나 떠돌아다녔으며, 어린 두 딸은 다른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다. 이후 나오가 신통한 힘으로 병을 낫게 한다는 소문이 퍼져 아야베의 금신(金神)이라고 불리며 조금씩 추종자가 생겼다.
1895년에는 근위병으로 입대한 나오의 차남 세이키치가 만 23세 젊은 나이로 대만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나오는 이 소식을 접하고 간방의 금신을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오의 장남은 가정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다가 결국 가출하여 종적을 감추었고, 삼남은 맏사위 집에 입양되었다. 나오에게 자기 손으로 번듯하게 키웠다고 말할 수 있는 아들은 차남 세이키치뿐이었으므로, 그 죽음에 더욱 상심한 듯하다.
1898년에 '우에다 기사부로'라는, 신토를 공부한 젊은이를 만나면서 비로소 종교조직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1900년에 우에다는 나오의 5녀인 스미코와 결혼하면서 데구치 가문에 입적하여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郞)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나오는 오니사부로가 들어온 뒤, 교단의 대외적인 일에는 가급적 손을 끊고 종교적인 것에만 집중하였다.
장모-사위 관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 나오와 오니사부로는 종교적으로 격돌했다. 나오와 오니사부로가 모두 신들림을 할 수 있었는데, 신들림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를 맹렬하게 공격했던 것. 데구치 나오는 오니사부로에게 들린 신이 악신이라고 생각했고, 나오의 추종자들은 오니사부로를 매우 공격했다. 이러던 싸움은 나오 생애 말년의 어느날, 오후데사키에서 오니사부로에게 들린 신이 바로 미륵님 계열이고, 나오에게 들린 신보다 더 우위라고 인정하면서 끝났다. 그리하여 오니사부로는 오모토 교단 내부에서 나오의 권위까지 흡수하여 그동안의 분열을 통합하고 온전히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1917년, 오니사부로는 나오가 그동안 쓴 오후데사키를 읽기 쉽게 문장을 정리하여 오모토 신유(大本神諭)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나오는 이듬해인 1918년, 추종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만 81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2.2. 나오 사후 성사聖師 오니사부로의 활동
나오가 사망한 후에는 나오의 막내딸(5녀)이자 오니사부로의 아내인 스미코가 오모토의 2대 교주가 되었으나, 실제적인 영향력은 스미코보다는 오니사부로 쪽이 더 컸다. 나오가 사망한 뒤에는 스미코보다는 오니사부로가 실제적인 교주였고, 지금도 오모토 교단은 오니사부로가 나오와 함께 교단의 공동교조라고 인정한다. 오니사부로는 신토를 공부한 사람으로 나름대로 특이한 카리스마가 있었던 듯하다. 신토에서 공부한 이런저런 술법을 오모토에 도입하여, 이것을 보고 오모토에 들어온 사람들도 많았다. 오니사부로는 나오의 피 끓는 듯한 격정이 넘치는 오후데사키의 주장을 가급적 순화하여 해석하려고 애썼다.오니사부로는 어릴 때부터 아케치 미츠히데를 좋아하여 영계에서 환상을 보았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1919년에 고향 가메오카시(亀岡市)에 있던 미츠히데의 성을 구입, 오모토의 성지 천은향(天恩郷)을 조성했다.[7] 이 터는 지금도 오모토 교단 소유로 남았지만, 역사적 유적지임을 감안하여 터 안에 종교적 시설물을 세우지 말라는 금지를 받았다.
나오 사후 당시 일본의 혼란한 사회상에서 오니사부로의 카리스마에 끌려, 또한 현세를 격하게 부정하는 오모토의 사상에 끌려 한때는 신도 수 100만에 달하는 거대교단이 되었다. 또한 오니사부로는 우익적인 성향을 띤 관계로, 군부 내의 급진파가 오모토 교단에 대거 입교하였다.
일본 정부가 오모토의 세력과 사상에 위협을 느껴 1921년에 제1차 오모토 사건이 일어났다. 오모토 교단은 압수수색을 당하고, 아야베에 있는 (나오가 살던 집터 뒤쪽) 혼구산(本宮山) 정상에 있는 장생전(長生殿)이 깨끗이 철거되었다. 또한 기존에 오모토 교단이 입교자들에게 실시했던 신들림 주술 진혼귀신법(鎮魂帰神法)이 언론에 보도되어 사교(邪敎)로 공격받는 요소가 되자, 오니사부로는 자신이 도입했던 진혼귀신법을 '신계의 대본영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하며 금지하여 몸소 묻어버렸다.[8]
제1차 오모토 사건 이후, 오니사부로는 교단을 정비하고 교리를 통일할 필요성을 느끼고는 오모토의 또 다른 경전 <영계 이야기(靈界物語)> 집필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921년부터 34년까지 총 81권에 달하는 서적을 차례차례 발간했다.
1928년에는 오니사부로가 비로소 미륵의 시대가 열린다며 '미륵대제'를 열었다. 이것은 본인이 미륵이라는 또 다른 선언이기도 했다. 일본어로 미륵은 미로쿠(みろく)라고 하는데, 숫자 567도 '미로쿠'라고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쇼와 3년(1928) 3월 3일은 음력으로 2월 12일이었는데, 음력으로 따지면 오니사부로가 태어난 지 꼭 56년 7개월이 되는 날이었다.[9] 불교에서 말하기를 미륵보살은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56억 7천만 년 뒤에 하생(下生)한다고 한다. 오니사부로는 자기가 음력으로 만 56세 7개월이 되는 이날부터 미륵의 세상이 열리고, 자신이 미륵으로 하생했다고 주장했다.
1935년에는 2차 오모토 사건이 일어났다. 2차는 유독 가혹해서 일본 정부는 법률을 반쯤 무시하고 오모토 교단을 탄압했다. 데구치 나오의 묘소가 감히 메이지 덴노의 능과 흡사하다 하여 파해치고 시신을 공동묘지의 길가 가까운 장소[10]에 재매장하고 나오의 배 부분에 묘표를 세웠다. 1차 사건 이후 재건 중이던 장생전을 또다시 파괴하고, 아케치의 성에 있던 천은향 건물 역시 없애버렸으며, 교단의 재산을 압류하고 교단 간부들을 체포하여 심문하였는데, 심문 과정에서 사망자도 발생하였다. 고문을 받는 도중 3대 교주의 남편 데구치 히데마루가 정신이상에 걸리기도 하였다. 일본 제국 경찰은 2차 오모토 사건 당시 오모토 교단이 무장을 했으리라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극도로 주의를 기울였으나, 아무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박해로 교단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신도 수가 격감했으나, 어찌어찌 교단을 수습하여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패전 이후 오니사부로가 법원에 재심을 요청하여 무죄 판결을 받아내었다. 탄압 과정에서 압류당한 교단의 재산을 돌려받는 소송을 걸 수도 있었으나, 오니사부로가 사회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는 도리가 아니라면서 포기하고, 종교생활에 집중하며 천은향 시설을 재건했다.
오니사부로는 기이한 카리스마가 있었던 듯, 그를 좋게 보는 사람도 있고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적어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한 종교의 교조가 되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사람이 평범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겠지만. 오니사부로는 예술에도 심취하여 "예술이 곧 신앙이요 삶"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서예, 도예, 단가(短歌) 짓기 등을 퇴고 따위 전혀 하지 않고 다작하였다. 공장에서 쏟아내듯이 만들었기에 예술적 가치는 작품마다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한 종교의 교조가 된 인물의 기이한 심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색다른 예술적 색채를 엿볼 수 있다.
나오 사후 교단의 진정한 지도자로서 오모토를 이끈 오니사부로는 1948년 1월 19일, 향년 만 76세로 숨을 거두었다.
1980년에는 제3대 교주의 후계 지위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교단이 3파로 분리되었다. 이중 소수파인 '오모토 신도연합회'에서는 이것을 3차 오모토 사건이라고 부르며 이 또한 이미 예언된 바라고 주장하지만, 다수파인 '오모토 본부'에서는 '걔네들은 우리랑은 전혀 상관없음. 오모토도 아님'이라면서 완전히 없는 취급을 한다. 또다른 분파 애선원은 교세가 워낙 미미하여 보통은 무시한다.
1992년 오모토 본부는 옛 위치(혼구산 정상)를 피해 장생전을 재건했는데, 교단 측 설명에 따르면 20세기에 일본 전통건축방식에 따라 지은 건물 중에서는 최대규모라 한다.
3. 숭배대상
데구치 나오에게 계시를 내린 신인 간방금신(艮の金神, 우시토라노 곤진)[11]을 일본서기에 언급된 구니토고타치(国常立尊)와 동일시하여 땅의 주재신으로 보고, 미륵대신(みろくの大神)을 하늘의 주재신으로 여기는데, 당연히 미륵대신이 땅의 주재신보다 높다. 두 신 이외에도 다른 신토의 신령들도 모신다. 또한 받드는 신들을 전부 가리켜 오모토스메오미카미(大本皇大御神)라고 부르는데, 바로 여기서 교명 '오모토'(大本)가 유래했다.그런데 간방금신은 그 이름이 상당히 이상하다. 간방(艮方)은 팔괘에서 간괘(☶)가 방위로는 북동쪽을 가리키는 데에서 북동 방향을 뜻한다. 또한 금신(金神)은 음양도에서 방위에 따라 재앙을 내리는 신을 말한며, 금신이 있는 방향으로는 나뭇가지도 자르지 않고 공사를 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간방금신이라고 하면 북동쪽에서 재앙을 내리는 신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북동쪽은 일본에서 귀문(鬼門)이라 하여 매우 불길하게 여기므로, 금신 중에서도 간방금신은 더욱 꺼림직한 대상이다.
그러나 오모토에서는 민간에서 부정적으로 여기는 간방금신이야말로 '인간세상을 무너트리고 새 새상을 건설할' 올바른 신, 대신(大神)이라고 믿는다. 오모토가 금광교(金光敎)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바로 '금신'을 좋은 신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쓰키히(月日)는 일본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아마츠카미(천신)인데, 간방금신이 바로 쓰키히에게 권한을 받아 본디 이 세상의 주재신이라고 한다.[12] 그러나 3천 년 전에 사악한 신들이 간방금신을 북동쪽에 봉인하였고, 이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하였다. 이런 꼴을 보고 다른 선한 신들도 이 세상에 손을 끊었으므로, 나오는 이 세상은 당연히 고통과 재앙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간방금신이야말로 이 세상에 재앙을 부르는 악신이라며 부당한 오명을 뒤집어 썼다고 했다.
금광교에서 처음으로 금신의 진면목을 알아 사람들에게 전했고, 이후 나오를 통해 간방금신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간방금신이 인간세상을 무너트리고 좋은 세상으로 다시 만들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오모토의 급진성, 혹은 피 끓는 듯한 격정이 느껴진다. 학자에 따라서는 나오가 쓴 오후데사키에서 직접적이진 않지만, 천황마저 저주하는 인상이 있다고 평하기도 할 정도였다.
데구치 오니사부로는 나오에게 강신했다는 간방금신을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만 등장하는 구니노토코다치(国之常立神)[13]와 동일시하여 해석한 이후, 간방금신 대신 구니노토코타치를 신명으로 부르는 신자들도 많다.
1차, 2차 오모토 사건 이후 오니사부로를 필두로 한 오모토 교단은 오후데사키의 피 끓는 듯한 격정, 종말론적인 면을 가급적 숨기고 부드러운 종교가 되려고 노력했다.
4. 교리
세계가 언젠가 단일화된다고 하며, 이는 이란의 바하이교와 비슷한 면이 있다. 모든 종교의 신은 이름만 다를 뿐 결국은 하나로 귀일된다는 이른바 만종동근(萬宗同根)의 사상이 깔려 있다. 한편 국가신토로 대표되는 황국사관에서 천황을 현인신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오모토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황국사관을 가졌는데 이에 따르면 천황은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주류였던 국가신토의 교리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교리고, 당시 등장한 신토계 신흥종교들은 하나같이 이런 식으로 천황 중심주의에 반대되는 교리가 있어서 일본 정부로부터 상당한 탄압을 당했다.오모토는 데구치 나오와 데구치 오니사부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카리스마가 동시에 반영되어 일본의 다른 신흥종교와 비교하더라도 그 성향이 남다르다. 게다가 두 사람은 서로 갈등하고 기싸움을 벌이며 신들림한 상태로 싸우기도 여러 번 하였다.
데구치 나오는 무식하고 가난하며 고생을 많이 한 과부 할머니였다. 그리하여 나오는 보수적인 미덕을 지지하며, 또한 근대화와 서양문물을 거부하고 당시 일본을 짐승의 나라라고 극언하며 매우 강하게 비난하였다. 상하관계도 필요 없고 학문도 금전도 필요 없는 이상세계가 도래한다고 주장하였다. 나오의 영향을 받은 신자들은 심지어 러일전쟁 때 일본이 패배하기를 기대하였으며, 일본이 승전하자 오히려 오모토 교단에 실망할 정도였다. 일본이 패전하면 그 충격의 여파로 이상세계가 도래하리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오니사부로는 우익적 신토 사상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으로, 나오에 비하면 좀 더 온건한 우익사상을 지지하였다. 친제국주의적이면서도, 또한 당시 일본에 새로운 유신을 일으켜 사회를 혁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나오가 근대화와 서양문물을 거부한 반면, 오니사부로는 찬성하고 적극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나오의 주장은 못 배운 하층민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오니사부로의 주장은 군부의 급진파나 우익적 지식인에게 인기가 있었다. 나오 사후 오니사부로가 교단의 주도권을 온전히 잡자 군인이나 우익적 지식인이 많이 입교하여 오모토의 교세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문에 분명히 '우익적인' 입장을 견지하는데도 일본정부는 오모토가 무장혁명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교단을 탄압하였다.
오니사부로의 영향으로 오모토의 교리는 나오가 처음 홀로 종교적 주장을 할 때와 비교해서 달라졌다. 현 오모토의 신관은 대충 아래와 같다.
현 오모토에서는 우주에 초월적 유일신이 있으며, 그 존재를 고대 신토에서는 (일본서기의 신대기에서 말하는) '아메노미나카누시'라고 부른다 하였다. 이 유일신은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을 간방금신(구니노토코타치)에게 내렸으나, 다른 신들이 구니노토코타치의 힘을 시기하여, 아내 도요쿠모(豊雲野尊)[14], 다른 권속들과 함께 세상의 북동쪽(간방)에 봉인하였다. 그럼으로써 세상에는 악이 횡행하게 되었으나, 구니노토코타치는 봉인을 깨고 데구치 나오를 신탁자로 선택하여 세상에 나왔다. 또한 구니노토코타치의 아내인 도요쿠모는 오니사부로로 태어나 세상을 바꾸기로 하였다. 또한 하늘의 주재신 미륵대신이 오니사부로에게 깃들이 오니사부로는 신계의 사명을 받아 '미륵 님'이 되었다.
여기서 오모토 교단이 오니사부로를 데구치 나오보다 격이 더 높은 인물로 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오는 신탁자이지만, 오니사부로는 신이 인간으로 화생한 인물이라고 하니 격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 또한 오모토에서는 데구치 나오는 여자의 몸에 남자의 영혼이 깃든 변성남자라고 하고, 오니사부로는 남자의 몸에 여자의 영혼이 깃든 변성여자라고 설명한다.
5. 제례
오모토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종교법인 오모토(본부)를 기준으로, 1년에 4번 큰 제례를 올린다. 3개월마다 대제일이 오도록 배치했다.2월 3일: 절분대제. 밤새도록 제례를 거행하며, 간단하게 사람이 그려진 종이를 아야베시에 흐르는 유라가와강(由良川)에 뿌린다. 사람의 몸에 깃든 부정(不淨)이나 액운을 없애는 일본 풍습을 종교의례로 삼은 것인데, 개조 데구치 나오 생전부터 거행하였다.
5월 5일: 미륵대제.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구세자 미륵이 됨을 기념한다.[15]
8월 7일; 서생(瑞生)대제.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태어남을 기념한다.[16] 오니사부로 생전, 그가 만 50세가 되는 1921년에 음력 생일 7월 12일[17]에 아야베에서 처음으로 시작했다. 1947년에 오니사부로의 뜻에 따라 명칭을 '서생제'라고 바꾸었고, 1948년 오니사부로가 사망하자 지금처럼 '서생대제'라고 하였다. 2002년까지는 음력 7월 12일에 거행하였으나, 2003년부터는 제2차 오모토 사건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석방된 날(1942년 8월 7일)을 기념하여 8월 7일에 거행한다.[18]
11월 첫째 일요일: 오모토 개조(開祖)대제. 데구치 나오를 기념하며, 추수감사절의 의미도 있다.
6. 분파와 교주
교주는 반드시 초대 교주의 피를 이은 부녀자(여성)여야 하며, 따라서 여계를 통해 계승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교주의 남편(물론 데릴사위)은 사실상 교단의 실권자인 경우가 많다.- 초대(개조) - 데구치 나오(出口なお, 일명 直, ナオ). 생몰 1837.1.22.-1918.11.6.
- 2대 - 데구치 스미(出口すみ, 일명 澄、すみこ、澄子), 초대 교주의 5녀. 생몰 1883.2.3.-1952.3.31.
- 남편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郎). 聖師라고 불리며 교단의 공동교조이다. 교단에서는 '미륵 님'이라고 하면서 구세자로 여긴다. 데구치 나오와 종교적으로 정면충돌하여 서로 신들린 상태에서 크게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나오의 추종자들은 오니사부로를 (나오에게 들린 신에게 맞서는) 악신이 들렸다고 간주하고 적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 나오가 오니사부로를 전면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대립이 끝났다. 사적으로는 사이도 좋아서, 나오가 죽었을 때는 오히려 (아내이자 나오의 막내딸인) 스미가 방에서 쫓아낼 정도로 슬피 울었다고 한다. 나오와 오니사부로의 관계는 장모-사위, 혹은 종교적 협력자로 단순구분할 수 없는, 굉장히 미묘한 것이었다.
- 3대 - 데구치 나오히(出口直日), 2대 교주의 장녀. 생몰 1902.3.7.-1990.9.23.
- 남편 데구치 히데마루(出口日出麿). 원래 이름은 다카미 모토오(高見元男)지만, 결혼하면서 장인인 오니사부로의 주장으로 개명하였다. 오니사부로는 히데마루가 데구치 나오의 요절한 차남 세이키치의 환생이라고 말하였다. 제2차 오모토 사건 때 고등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아 정신이 이상해졌다. 오니사부로는 사위가 이렇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고는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전술한 1980년의 내분으로 교단이 셋으로 분리되었다. 하지만 제3분파인 애선원(후술)이 워낙 교세가 미미하기 때문에 제외하고 오모토 2대 분파라고 하기도 한다. 본디 4대 교주는 장녀 나오미로 예정돼 있었으나, 교단 지휘부에서 나오미의 남편을 교단에서 추방하고, 또한 3대 교주가 장녀 나오미의 계승권을 취소하고 키요코를 새 후계자로 세움으로써 이후 오모토가 분열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6.1. 오모토(본부)
오모토(본부)는 종교법인이다. 전체 오모토 신자들 중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4대 - 데구치 기요코(出口聖子)
- 5대 - 데구치 구레나이(出口紅)
6.2. 오모토 신도연합회(大本信徒連合会)
분파 오모토 신도연합회는 종교단체가 아닌 임의단체이다. 신도연합회에서는 자신들은 기존의 오모토와 별개의 종교단체를 세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단체로 등록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4대 - 데구치 나오미(出口直美)
- 5대 - 데구치 나오코(出口直子)
- 6대 예정자 - 데구치 하루히(出口春日)
- 7대 예정자 - 데구치 나오카(出口直佳)
후계자가 불확실한 본부 쪽과는 달리 신도연합회 쪽은 딸 - 외손녀까지 있어 후계구도가 안정적이다. 오모토 신도연합회의 다음 교주가 될 데구치 하루히(出口春日)가 스즈미야 하루히의 모델이 아니냐는 말이 이 바닥에서 잠깐 돌았다고 한다. 심지어 데구치 하루히에게 하루히 시리즈를 보내준 사람도 있었다고... 본인은 자기가 딱히 스즈미야 하루히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단지 이름이 겹쳐 생긴 사소한 해프닝인 듯.
또 다른 분파 애선원(愛善苑)은 (오모토의 성사인) 데구치 오니사부로를 애선원의 원주라고 주장한다. 오니사부로가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결국 교주를 두지 않겠다는 소리. 원리주의적인 성격이 짙다. 참고로 '애선원'이란 이름도 일본 패전 이후에 잠시 오모토 교단이 교단명으로 사용했던 이름이다. 오니사부로가 아직 살아 있던 때의 애선원을 모범으로 삼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더구나 애선원은 데구치 나오를 최소한으로만 인정하는 듯하다. 하지만 워낙 교세가 미미하다.
7. 에스페란토와의 관계
교단 차원에서 에스페란토를 후원한다. 앞서 말했듯 교리에 언젠가 세계가 단일화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데구치 오니사부로가 에스페란토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에스페란토 전파에 공이 큰 사람을 골라 매년 '데구치상'을 수여하는데, 이게 에스페란토계에서는 꽤 권위가 있다.8. 무술계와 관계
희한하게도 오모토 교단은 지속적으로 무술계와 연관을 맺는다. 아이키도의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오모토의 신도였다. '합기'라는 명칭 역시 오니사부로가 처음 제안한 뒤, 모리헤이가 다케다 소가쿠에게 전하여 만들어졌고, 아이키도도 오모토의 평화사상에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 또한 아이키도의 첫 도장이 오모토 본부에 있었고, 모리헤이는 오니사부로와 몽골로 선교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지금도 오모토는 아이키도와 관계가 깊다.모리헤이가 오모토 교단을 떠난 뒤에도, 모리헤이의 생질이자 제자인 이노우에 노리아키(井上鑑昭)는 여전히 오모토 신자로 남아 신에이타이도(親英体道)라는 무술을 정립했는데, 모리헤이의 초기 무술 형태와 가깝다고 한다. 이노우에가 처음 무술 이름을 정할 때에도 오니사부로의 말을 듣고 신와타이도(親和体道)라 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이름을 한 글자만 바꾸어 신에이타이도(親英体道)라 하였다.
현대로 들어와도 와라쿠(和良久)라는 무술이 오모토와 연관되었다. 와라쿠는 본디 극진공수도를 배웠고[21] 정도회관(正道会館)의 사범이기도 했던 마에다 히라마사(前田比良聖, 1956-)라는 사람이 2000년에 창시하였다. 와라쿠라는 이름도 오모토(본부)의 4대 교주 데구치 기요코가 지어주었다고 한다. 와라쿠의 특징은 무술 수련 과정에 오니사부로가 전한 언령(言靈)이나 주술수련을 대놓고 결합하였다는 것이다. 수련하기 전에 신토에서 사용하는 아마쓰노리토(天津祝詞)라는 기도문을 낭송한다거나 수인을 맺는 등 무술과 신토식 주술을 합쳤다.
[1] 오모토에서는 성사 오니사부로를 미륵님이라고 여긴다. 미륵(彌勒)의 일본식 발음이 미로쿠. 오니사부로가 있었던 천은향에 미로쿠 회관을 세움도 그런 이유에서이다.[2] 다른 2가지는 나라현의 천리교(天理敎)와 오카야마의 금광교(金光敎). 천리교 역시 여자인 나카야마 미키가 신내림을 받아 창시하였으므로, 종교학자들은 오모토와 천리교를 비교해보곤 한다. 오모토 대신 흑주교를 당시 일본의 3대 신흥종교로 손꼽기도 한다.[3] 일본에서 사용하던 음력으로는 1월 5일. 데구치 나오는 음력 1월 1일에도 신령한 꿈을 꾸는 등 조짐이 있었다고 한다.[4] 당시 한일 양국에는 일선동조론 등을 너무 깊이 받아들여 친제국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일본 정부가 내선일체를 제대로 못한다고 비판하는(...)단체들이 존재하였다. 이런 단체들은 우익 성향인데도 일본 정부/총독부의 요주의 대상이었다.[5] 정상적으로 청혼하면 나오에게 인정받기 어렵다고 생각한 듯하다.[6] 신들림 상태에서도 의식을 잃지 않았음이 나오가 천리교 교조 나카야마 미키와 다른 점이다. 미키는 신들림 증상을 보일 때면 종종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7] 이 때문인지 지금도 오모토 교단은 매년 5월 천은향에서 아케치 미츠히데 위령제를 지낸다.[8] 이 방침은 현 오모토 교단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9] 오니사부로는 1871년 8월 27일(음 7월 12일)에 태어났다.[10] 사람들 발에 밟히기 쉬운, 좋지 않은 곳이었다. 의도적으로 여기에 매장하였다.[11] 우리말 번역어로 딱 정해진 것이 없어서, 사람에 따라 간금신, 간의 금신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혹은 그냥 일본어 발음을 음역하기도 한다.[12] 참고로 쓰키히는 오모토보다 수십 년 먼저 생긴 천리교에서도 교조 나카야마 미키가 '천리왕'이란 이름을 내세우기 전에 '쓰키히의 말씀'이라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쓰키히가 일본 민간신앙의 천신이므로, 천리교와 오모토가 모두 일본 민간신앙에 영향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13] 이 신명은 정말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만, 일본 땅이 만들어질 때 여러 신들이 차례로 나왔는데 그 중 구니노토코타치라는 신도 있었다는 정도로만 언급될 뿐 그 이외의 전승은 일절 전하지 않는다. 실제로 숭배되던 신이라기보단 서술자들이 일본제국의 프로파간다를 고취하기 위해 내세운 재창조한 신격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 신명이 '국토의 영원한 존립'을 뜻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근대의 신토주의자들이 매우 중요시하였다. 아마 오니사부로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14] 오모토에서는 도요쿠모가 간방금신에 대응대는 곤방금신, 즉 남서쪽(곤방)의 금신이라고 주장한다.[15] 오모토 신도 연합회에서는 4월 첫 번째 일요일에 거행한다.[16] 서생(瑞生)은 상서로운 탄생이란 뜻이 아니라 서령(瑞霊)의 탄생이란 뜻이다. 오모토 교단은 간방금신의 아내 도요쿠모노미코토(豊雲野尊)를 서령이라고 부르며, 오니사부로로 화현했다고 믿는다.[17] 1921년의 일본 음력 7월 12일은 양력으론 8월 15일이다.[18] 오모토 신도 연합회는 예전처럼 매년 음력 7월 12일에 거행한다.[19] 결혼하긴 했으나 자식이 없어서 죽기 얼마 전에 구레나이를 양녀를 들였다.[20] 데구치 구레나이는 3대 교주 2녀 부부의 둘째 딸이다. 따라서 본인 입장에서 데구치 기요코는 본디 작은이모가 된다. 작은이모가 양어머니가 된 것.[21]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최영의 총재를 사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