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2 21:32:24

권동진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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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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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61년 12월 15일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안심마을#
사망 1947년 3월 9일(향년 87세)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국적 조선대한제국
일본 제국일본령 조선대한민국
본관 안동 권씨
별칭 호(號)는 애당(愛堂), 우당(憂堂)
도호(道號)는 실암(實菴)
종교 천도교
직업 독립운동가, 선교사, 정치인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을미사변과 일본 망명2.3. 계몽운동2.4. 3.1 운동2.5. 천도교 구파의 영수2.6. 말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천도교 신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권동진은 1861년 12월 15일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안심마을에서 아버지 권재형(權在亨)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6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안동에서 기거했지만 권재형 대에 괴산으로 이주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권필(權山+弼)이 무과에 급제한 뒤 오위도총부 부총관,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이래로 대대로 무관 관직을 받은 무인 가문이었다. 백부 권재유와 아버지 역시 무과에 급제했고, 권재유는 절충장군, 아버지 권재형은 경상도 중군(中軍)을 지냈다. 셋째형인 권형진도 무과에 급제한 뒤 갑오개혁에 참여해 내무참승, 의주부사, 숙천부, 평안병사, 경무사 등을 지냈다.

권동진이 8살 되던 1869년, 그의 집안이 서울 재동으로 이사했다. 이후 서울에서 소년기를 보낸 그는 19세인 1880년경 하도감(下都監)에서 일본군 장교를 초빙해 사관학교를 개설할 때 제1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사관을 속성으로 양성하기 위해 만든 사관학교 1기생은 108명이었으나, 그 가운데 1882년 봄에 졸업한 졸업생은 10명이었고, 권동진은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직후 남행부장에 임명된 그는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 조희문 등과 함께 초관(哨官)에 임명되어 좌우영의 교련을 맡았으며, 1884년 갑신정변 때는 박영효가 거느리는 전후영 소속으로 있다가 무관학교 출신 5인과 함께 대궐에 들어가 고종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권동진은 형 권형진과 함께 김옥균 등 개화파 세력과 자주 접촉하며 그들의 개화운동에 감화되었다. 그는 1934년 <삼천리>에 기고한 '한말인물의 회상, 생각나는대로 옛사람들을'에서 김옥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갑신정변 당시 전후영관으로 있었던 까닭에 김옥균을 만나뵐 기회가 많았다. 그분은 포용성이 있고 모사(謨事)하는 지략이 출중하고 정치적 식견이 고매한 품이 범인이 할 것이 아니었다. 일본 망명시에도 뵈었는데, 그 때 옥균씨가 교유하는 범위는 일본의 우수한 정치가들이었다. 개화당 운동을 통하여 볼 때 그에게 30년 후인 오늘날에서 볼 때 모사에 흠점이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마는 어쨌든 대세를 살피는 힘 등 놀라운 바가 있었다. 가히 인걸이었다.

갑신정변 후 3년여 간 별군직으로 영문 생활을 지낸 권동진은 1885년 경상남도 함양군수로 임명되었고, 1887년에 웅청현감과 함안군수 등을 역임하다가 1888년 말 실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평안도 영변으로 1년여 정도 유배되기도 했다. 1890년 초 어머니가 사망하자, 조정은 그를 3개월 동안 유배에서 풀어줘 모친상을 치르게 해줬고, 그해 8월에 정식으로 유배에서 방면시켰다. 권동진은 1893년에 안무영 종군을 맡아 군직에 복귀했고, 1894년에는 거문도첨사로 나가있다가 1895년 초 서울로 돌아왔다. 그가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셋째 형 권형진이 김홍집 내각의 경무사를 맡은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2.2. 을미사변과 일본 망명

1895년, 권동진은 훈련대에 복무했다. 당시 훈련대에는 그의 형 권형진이 제2대장을 맡고 있었다. 권형진은 조희연, 우범선과 함께 훈련대 지휘관을 맡고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훈련대를 해산하려 하자 이에 분개하여 마침 명성황후를 시해하려던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와 연계해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을 단행했다. 이때 권동진은 동지 8명과 함께 훈련대가 경복궁을 점령하는 데 가담했다. 그러나 1895년 1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감행한 뒤 친일파 관료들을 대거 숙청하자, 그는 형과 함께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권동진은 일본에 망명한 뒤 도쿄의 근위사단에서 병학을 공부했고, 3연대에서 3년여 동안 실습을 쌓고 일본 육군성에서 경리사무를 익혔다. 또한 일본에 망명한 박영효, 조희연, 장석주, 유길준, 유세남 등과 교류하면서 혼란스러운 시국을 어떻게 타파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와 동지들은 국내에서 송환을 일본에게 계속 요구하는 것에 불안해했고, 망명 생활이 길어지면서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1899년 일본 외무성은 이들에 대한 경비 지원으로 국고 부담이 커지자 귀국시키려 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이들의 이름을 개명시켜 개항장으로 보내 영사가 신변을 보호하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즉, 권동진은 진남포, 정난교는 부산, 조희문은 목포, 이창열은 원산, 이규백은 이천 등으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1900년 5월, 권동진의 셋째 형 권형진이 조선으로 귀국했다가 곧바로 체포되었다. 이에 권동진은 형을 구하기 위해 일본에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형이 참수형에 처해지는 걸 막지 못했다. 이에 분노한 그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국내의 권력자들을 타도하고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도쿄를 떠나 오사카로 거주지를 옮긴 뒤 손병희와 교제한 끝에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4년 7월,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 조희연 등과 협의해 국내 동학교단에 진보회를 조직하고 당시 러일전쟁을 치르고 있는 일본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 등과 함께 입헌군주제 실시와 조세 제도의 개혁 등을 주장하며 일본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인 1905년 12월 1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고 <천도교대헌>을 제정한 뒤 권동진 등 측근들과 함께 한반도로 돌아갔다.

2.3. 계몽운동

1906년 1월 5일 국내로 돌아온 권동진은 손병희 등과 함께 천도교의 조직 정비에 힘을 쏟았다. 그는 교우구락부를 세우고 교세 확장에 힘을 쏟았고, 도집(都執), 도사(道師)를 맡는 한편 전제관장, 포덕 주임 등을 역임하며 천도교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1907년 7월에는 정부로부터 '국사범'의 죄를 사면받았고, 이어 중추원 부참의에 임명되었지만 2개월 만에 그만두고 인쇄소 겸 출판사인 반문사를 인수하여 보문관을 설립하여 관장을 맡았다.

권동진은 이후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대한협회 실업부장과 부회장 등을 맡으며 실업 진작을 통해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이무렵 대한협회 지도부는 권동진을 비롯하여 오세창, 이병호, 이종일, 한기준, 장기렴 등 주요 교직자들이 간부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을사조약에 의한 일제의 통감정치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민중을 계몽시키면 국권회복도 달성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것은 안타깝지만 시세의 형편상 어쩔 수 없으니 당장 독립을 실현하려고 부질없는 저항을 하는 것보다는 문명개화를 실현하는 것을 시급한 과제로 인식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일제에게 멸망했다. 권동진은 을사조약과 통감부 통치를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였지만, 조선이 일제에게 완전히 귀속된 것에는 반감을 품었다. 1910년 늦가을, 이동휘가 그를 찾아와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권동진은 그에게 기회를 보아 나갈 것이니 먼저 나가라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달리 먹고 국내에서 천도교를 포교하면서 민족운동을 별도로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2.4. 3.1 운동

1912년 10월, 천도교는 민족문화 수호와 유지를 위한 범국민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민족문화운동본부를 결성했다. 총재는 손병희, 회장은 이종일이 맡았고, 권동진은 제1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겉으로는 민족문화수호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민중 시위를 도모하기 위한 비밀결사체였다. 1913년 4월, 천도교 간부들은 민중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지방조직 확대강화 대책을 논의했다. 하지만 일제가 그들을 수상하게 여기고 감시를 강하게 하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1918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체코,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도 잇따라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손병희는 권동진, 이종훈(독립운동가), 오세창, 최린 등과 함께 1918년 5월 5일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3대원칙(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을 정했다. 이들은 1918년 9월 9일에 시위를 벌이려 했지만 독립선언서를 제때 준비하지 못했고 민중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아 계획을 뒤로 미뤘다.

1918년 12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국제연맹 회의에서 민족자결 문제를 다룬다는 소식을 접한 권동진은 12월 말경 오세창, 최린과 함께 이 문제를 논의했다. 세 사람은 논의 끝에 국제연맹 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조선독립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 판단했다. 이후 세 사람은 각자 역할 분담을 했다. 권동진과 오세창은 교단 내부의 일을 맡았고, 최린은 대외 업무를 맡았다. 권동진은 손병희를 설득하는 한편 양한묵, 나용환, 나인협, 임예환 등에게 독립선언서 서명을 권유해 승낙을 받아냈다.

이후 천도교는 기독교, 불교 측 인사들과 연대하여 총 33인으로 민족대표를 구성했다. 당초 거사일은 3월 3일로 정했지만, 이날은 고종의 인산일이었기에 불경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배제되었다. 또 3월 2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기독교 측이 불가하다고 밝혔고, 이에 따라 3월 1일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했고, 인쇄는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사에서 맡았다. 2월 28일, 가회동의 손병희 집에서 열린 최종 모임에서, 장소를 당초의 파고다공원에서 태화관으로 옮기기로 했다. 이는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경우 소요가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떄문이다.

3월 1일 오후 2시, 권동진은 독립선언식에 참석했고 식이 끝날 무렵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이후 4월 8일에 열린 경성지방법원 심문과정에서, 그는 "일한병합에 대해 어떤 감상을 품고 있었는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일본은 청국과 싸워 조선을 독립국으로 했으나 조선의 정치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또 러시아와 싸우게 되어 그 결과로 조선을 보호국으로 한 것은 시세의 형편상 부득이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병합에 대해서는 표면상으로는 주권자 사이에서 원만한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다수 조선 인민의 의사가 아니고, 병합은 시대사조에 그릇되고 정책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여 나는 병합에는 불찬성이었다.

또한 8월 20일 고등법원에서 심문을 받던 중 "일본 정부나 귀족원, 중의원 양원에 청원서를 제출한 까닭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것은 이러한 상황이니 잘 고려해 보아달라는 의미이다. 고려해 보아달라는 것은 바로 독립을 하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이에 검사가 물었다.
그러면 국제연맹의 힘에 의지하고 일본정부에는 청원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떤가?

권동진이 답했다.
나는 현재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서 승인을 해주지 않는다면 국제연맹만으로는 독립을 시켜주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가장 가까운 곳의 일본이 이의없이 독립을 승인해준다면 대단히 좋을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에 검사가 다시 물었다.
그런 생각이라면 다만 일본 정부에만 청원서를 내면 될 것으로 구태어 강화회의나 국제연명에까지 청원서를 제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권동진이 답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만 반쯤 장난이 되고 말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결연히 선언을 발표하고, 이어서 민족자결을 어디까지나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국제연맹이나 강화회의에까지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어 검사가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이유에 대해 묻자, 권동진은 "조선 민족에게 독립하는 것이 좋다고 모두 다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고 답했다. 이후 경성복심법원은 1920년 10월 30일 손병희, 권동진, 최린, 오세창, 이종일, 이승훈, 함태영, 한용운 등 핵심 8명에게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권동진은 서대문 형무소를 거쳐 경성 감옥으로 이감되어 모자를 만들거나 그물짜기 노역을 하며 옥고를 치렀다. 그는 수감 중에 위병(胃病)으로 고생헀고, 한동안 병감(病監)에 수감되어 영양 보충을 위해 사식을 차입해 먹기도 했다. 그는 만기를 두달여 앞둔 1921년 12월 22일에 출옥했다.

2.5. 천도교 구파의 영수

1922년 5월 손병희가 사망한 뒤, 천도교는 분열되었다. 손병희 사후 박인호가 4세 교주로 승계되었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은 최린 등이 신파를 구성해 천도교 중앙총리원을 구축했다. 이후 최린 등 천도교 신파 세력이 자치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제와 영합하는 모습을 보이자, 권동진과 이종린 등 천도교 구파 인사들은 사회주의 세력과 연합해 이에 맞서는 연대 활동을 벌이기로 했다.

특히 권동진은 1923년 잡지 <개벽>에 '인류주의는 나의 가장 찬송하는 이상외다'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해 사회주의를 칭찬했다. 그는 모든 주의 중에서 인류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고 피력하면서, ‘인류를 위한 진리, 복리에 기반하고, 천부의 평등자유를 지향하는 것이 인류주의’라 정의했다. 그리고 인류주의 가운데 무형의 진리가 종교 또는 도덕이고, 무형의 진리가 사회주의라고 주장했다.

1926년 초 자치론이 다시 고개를 들자, 권동진 등 천도교 구파 세력은 사회주의 세력과 함께 비타협적 세력을 망라한 민족적 조직을 구상했다. 권동진은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의 강달영과 접촉하여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협의를 벌였고, 그해 6월 순종이 사망하자 6.10 만세 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박래원으로부터 6.10 만세운동의 추진 계획을 보고받고 조선 공산당 관계자 조두원 등에게 "너희는 조직 군중이나 종교단체는 그렇지 못하니 우리는 방조할 수 있다."는 언약을 주는 한 편 1만원 가량의 자금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처 자금이 모이기도 전에 만세운동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만세시위는 대규모로 일어나지 못했다.

6.10 만세운동 이후, 권동진은 이종린, 박래홍 등 천도교 구파 인사들과 함께 신간회 창립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신간회 본부 부회장을 맡았고, 1929년에는 복대표 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으며 신간회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1929년 6월 <동아일보> 기자로부터 10만원이 생기면 어떠한 일에 쓰겠는가는 질문을 받자 신간회 본부 회관을 건축하는 일과 신간회 사업자금을 쓸 것이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그러던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신간회는 진상 규명을 위해 광주에 사람을 파견하는 한편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이때 권동진은 대회 당일인 12월 13일 연설을 담당할 예정이었지만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1930년 1월 초 출옥한 그는 신간회 운동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일선에서 활약했지만 1931년 5월 신간회가 끝내 해산되면서 좌절했다.

이 무렵 천도교 신파가 자치론을 다시 들고 나오자, 권동진은 천도교청년동맹을 통해 자치운동을 규탄했으며, 이종린의 이름으로 신문지상에 천도교 일파의 자치운동 대두를 절대 반대고 철저히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천도교계는 1932년 4월 박인호의 교조 인정 문제로 신, 구파로 분열되었고, 권동진은 구파의 영수를 맡으며 구파를 이끌었다.

2.6. 말년

이후 천도교 핵심 간부로서 포교 활동에 전념하던 권동진은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뒤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45년 12월 신탁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했다. 또한 정치권이 각 정파간의 대립으로 분열되자, 그는 신한민족당을 결성해 '자율적 통일정권 수립을 목표로 전 민족의 총의 총력을 집중하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던 1947년 3월 9일, 권동진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에서 사망했다. 향년 87세. 그의 유해는 천도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뒤 화장된 후 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권동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1980년 청주 3.1 공원에 그를 포함해 충북지역 출신 민족대표 33인의 동상을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