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2-27 19:54:55

박용만(1881)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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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容萬
1881년 ~ 1928년

1. 개요2. 생애3. 신천지 계획4. 비극적인 최후 5. 기타

1. 개요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현 철원읍) 중리 출생. 본관은 밀양(密陽)#, 이명은 박용필(朴容弼), 박용만(朴容晩)이며, 호는 우성(又醒, 宇醒), 종교는 개신교이다. 옌시산 계열의 국민혁명군 참의(參議)[1]

독립 운동 초기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중의 한 명으로 불릴 정도로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을 벌였으나, 같은 독립운동 세력이었던 의열단에 의해 암살당했다.

2. 생애

1904년, 일본에 황무지 개간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보안회에 가담하였다가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이승만정순만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2]
석방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래스카 주립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11년부터 임시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해외에서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무장 훈련을 하고, 독립 전쟁을 일으키자는 것. 이 당시 하와이에는 이미 5천여 명의 한인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으므로, 하와이로 건너가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대한인 국민회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1913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외교 독립론을 주장하면서 일본에 대하여도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하와이의 교포 사회는 박용만 지지파와 이승만 지지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고, 박용만은 결국 대한인 국민회에서 밀려나 1918년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아 대조선 독립단을 창설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 부총장에 선임되었으며 그 후 주로 중국에서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그 뒤 임정에 실망을 느껴 임정 반대자로 바뀐다. 그뒤 무장 투쟁론을 버리고 새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이 신천지 계획이다.

3. 신천지 계획

현재의 조선 반도는 지역이 협애하여 도저히 독립군으로 만들기 부족하다. 구조선의 영토였던 시베리아 및 만주, 몽고의 땅을 근거로 하여 조선인을 여기에 이주시켜 발전을 추구하여 사실상 동포의 영유로 귀속하게 할 것이다. [3]

조선 반도는 독립 국가로 만들고 지키려하기엔 땅이 너무 좁아서 좁지않으니깐 대신 시베리아, 몽고, 만주를 '고조선의 땅'였다 주장하며 거기서 독립군 기지를 세우자는 사상이다. 그러기 위해 하와이로 1925년에 가서 동포들을 설득하려한다. 자신이 조사한 만주를 설명하여 동북아 대륙은 땅이 넓은데 인구가 적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한 민족이 영주하고 토착하여 자손의 발전을 꾀하기에 최고로 적합한 땅인 것을 의심한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다만 실제 발언을 보면 독립군 기지를 만들자는거지 한인 국가로 지배하자는 주장을 한 적은 없다. 그리고 위의 내용은 일본 첩보원이 미국 내의 한인들에게 들은 내용을 요약한거라 정확한 인용도 아니다

4. 비극적인 최후

그러나 1923년 말 비밀리에 한국에 다녀온 이후 변절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 "일본은 시베리아 출병 때 실패했고 국내와 국제 문제 때문에 대부대를 동원하는 출병은 하기가 어려우니 내놓은 대안) 나의 우견으로 볼 때 일본은 오히려 조선 인민을 지휘하여 움직여 정노의 임무를 맡겨 시베리아의 동부를 숙청하는 것이 제일의 양책", "즉시 전위전초의 첨병이 되어" 싸울 것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물론 이건 조선 총독부와 접촉하기전에 편지를 보낸 것[4]이니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총독부를 만나보는데 항일을 주장하면 당연히 잡혀들어간다. 그리고 해당 편지를 인용해놓은 일본 문서에선 박용만을 분명히 불령선인이라 서술하고 있다.[5] 만약 진짜 변절했으면 박용만을 불령선인이라 적을리는 없다.

결국 1928년 다른 독립 운동가의 손에 암살당했다. 한때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의 소행으로 알려졌으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규준은 20살의 나이로 병사하는데 박용만이 사망할 때는 이규준이 사망한지 1년 후이다.[6]

실제로는 의열단원 이해명이[7] 일방적으로 박용만을 친일파로 규정하고 단죄한답시고 그를 암살한 것이다. 그러나 이해명의 암살에 대해선 뒷말이 많은 편으로 다른 이야기에선 이해명과 이규준, 박인식등 이 박용만을 찾아와 독립 운동 자금 1천원을 요구했는데 박용만이 이를 거부하자 설전이 벌어졌고 이에 격분한 이해명이 암살한 것이란 말도 있다.

이해명은 임정 내의 박용만 정적들에게 영웅으로 떠받들어졌고, 이들을 통해 중국 고위층과 연결된 덕분인지 "의분에 의한 살인"으로 인정되어 징역 5년만 살고 나왔다고 한다.

임시 정부 계열(이승만, 김구)에선 박용만을 심하게 모함했다.[8] 박용만이 인지도가 덜한 이유중 하나.

5. 기타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이 미국에 유학한 동안 부친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일한은 박용만과 대립한 이승만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당시 미주 지역의 인식처럼 박용만 암살의 배후가 임시 정부라고 여기고 임시 정부에도 협력하지 않았다고.

1962년 3월 1일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95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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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8년 초, 옌시산이 국민 혁명군 제3 집단군 총사령에 임명된후 8월, 옌시산의 부하인 제3 집단군 제26사 사장 장잉우(張英武)은 위임장을 써 박용만을 국민 혁명군 참의(參議)로 임명되게 하였다. (한애라. 박용만의 중국과 러시아에서의 민족 운동, 학위 논문(석사)-- 상명 대학교 일반 대학원 : 사학과 2015년 8월, 64쪽)[2] 그리하여 세간에선 이들을 삼만이라고 불렀다.[3] 최용호(하와이 주립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박용만 - 문무를 겸비한 비운의 민족주의자 (한국사 시민 강좌 47집 132)[4] 참고 논문 : 최용호(하와이 주립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박용만 - 문무를 겸비한 비운의 민족주의자 (한국사 시민강 좌 47집 126 ~ 127)[5] 같은 논문 확인[6] 당시 임정에서는 박용만이 변절했다고 여겨 그의 죽음을 정당화했는데, 미주의 독립 운동가들은 임정이 박용만 암살의 배후라고 여겨 임정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특히 그의 최대 정적이었던 이승만김구로부터 박용만은 변절자가 맞으니 미주 지역을 달래 달라는 편지를 받았으나 그럴 리 없다며 씹고 임정을 비판하는 데에 동참했다.[7] 본명이 이구연이다.[8] 방선주, 在美韓人의 獨立運動, 한림 대학교 출판부, 1989년 : 한애라. 박용만의 중국과 러시아에서의 민족 운동, 학위 논문(석사)-- 상명 대학교 일반 대학원 : 사학과 2015년. 8월,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