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12 02:45:49

이봉창

건국훈장 대통령장(複章) 수훈자 파일:건국훈장대통령장약장.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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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李奉昌
파일:IE000984016_STD.jpg
파일:대한민국 국기.png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파일:대한민국 국기.png
생몰년도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
(향년 32세, 총 11750일)
출생지 대한제국 한성부 서서 용산방 동문외계 동문외 (원효로2가)
사망지 일본제국 도쿄 시 우시고메 구 이치가야 형무소[1]
국적 대한제국
본관 전주 이씨(全州李氏)
별칭 일본명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
또다른 이름은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
칭호(稱號)는 의사(義士)
직업 독립운동가, 시인, 교육자
가족 이진규(부), 밀양 손씨(모), 주간란, 정봉희(서모)
이범태(형), 이봉준, 이종태(이복 동생)
이실(양자)
이은임(조카)
이세창(종손)
학력 문창초등학교(명예 졸업장 추서)
간사이 공업학교 야간학부 중퇴
조직 한인애국단
의거 쇼와 천황 암살미수 사건
파일:attachment/122484492739_20081025.jpg
오른쪽 사진은 합성이다. [2]

1. 개요2. 생애와 의거3. 언론 보도4. 모던보이 5. 후일담
5.1. 의거가 성공했다면?
6. 폭탄 이야기

1. 개요

"나는 赤誠[적성]으로써 祖國[조국]의 獨立[독립]과 自由[자유]를 回復[회복]하기 爲[위]하야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의 一員[일원]이 되야 敵國[적국]의 首魁[수괴]를 屠戮[도륙]하기로 盟誓[맹서]하나이다."
大韓民國[대한민국] 十三年[13년] 十二月[12월] 韓人愛國團[한인애국단] 앞, 宣誓人[선서인] 李奉昌[이봉창][3]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쇼와 천황(히로히토 천황) 암살미수 의거(義擧)로 유명한 인물이다.

2. 생애와 의거

용산의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을 거쳐 용산역에서 역무원과 운전 수습생 등으로 일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식 이름도 얻었다.

그는 정말 일본을 좋아하고 일본어도 유창하게 잘 하는 등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그는 조선인이었고 그 까닭으로 온갖 차별을 받으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4년 동안 용산역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단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승진 속도와 봉급 차 등 조선인 차별 대우에 박탈감을 느껴 철도국을 사직하였다. 특히 여기에는 히로히토 천황 즉위식 당시 아흐레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었던 것이 큰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히로히토의 즉위식은 1928년 11월 10일 이었고, 이봉창 의사는 11월 7일부터 11월 15일까지 구금되었다. #, #.[4]
"조선인으로 태어나 이태왕(李太王) 전하(殿下)의 옥안(玉顔)을 뵌 적이 없으며 경술병합(庚戌倂合) 후 신일본인(新日本人)이 되어 천황(天皇) 폐하(陛下)의 성안(聖顔)을 뵌적도 없다. 또 조선 역사도 안 배웠고 일본 역사를 가르쳐 받은 적도 없다. 일국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도 모르고 그 나라 제왕의 성안(聖顔)도 본 적이 없는 것은 참으로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봉창은 순수하게 천황의 얼굴이 보고 싶어 즉위식에 참석하려 했건만 일본 경찰한글 편지를 발견하면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정작 편지에는 별 내용이 없어 훈방되었으나 조선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 깊은 회의를 느꼈다.
"일부러 돈까지 써 가며 교토의 유치장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일본 국민의 자격으로 천황(天皇) 폐하(陛下)를 뵈러 온 것이 아닌가? 한글이 섞인 편지를 갖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나쁜가? 역시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인 주제에 일본 천황 같은 것을 볼 필요는 없다는 것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아 유치장에 갇히게 된 것이다."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고, 따라서 사상도 저절로 변해... 누군가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갈 기분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져 우리 2천만 동포의 자주권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31세에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알게 되고 상하이에 있는 거류 민단 사무실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했다. 그러나 워낙 일본인 같은 제스처와 능숙한 일본어[5], 거기에 임시정부의 멸칭이었던 '가정부(假政府)'[6]라는 표현을 씀에 거리낌이 없어 임시정부 인사들의 의심을 받았다. 누구나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유일하게 김구가 어느 정도 믿어줘 이봉창과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고, 이를 통해 진심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구이동녕조소앙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아무튼 이 때 워낙 일본인같아서 임시정부의 직원들에게서 '영감'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 별명을 증명하듯, 일본인 사회나 마찬가지인 상해 홍커우 지역에 거주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일본인 지인을 수없이 많이 두었다. 심지어 일본 총영사관의 경찰까지 지인으로 두었고 일본 영사의 내정까지 무상으로 드나들었을 정도였다. 이봉창이 의거를 하러 일본으로 갈 때 부두까지 나와서 잘 다녀오라고 마중을 나온 일본 경찰까지 있었다.

임시정부 직원들과 함께 여관에서 한 술자리에서 자신에게 밀정이라고 의심을 하거나 비판하는 태도를 보이는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직접 사와 대접까지 하면서 대인배스럽게 호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 때 이봉창 의사는 대뜸
"왜황을 도살하기는 극히 용이한데 하고(何故, 무슨 까닭)로 독립운동자들이 이것을 실행하지 아니합니까"
라고 묻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깜짝 놀라며 “용이할진대 아직까지 왜 못 죽였겠소.”라 묻자
내가 연전에 도쿄에 있을 때 어느 날 천황하야마(葉山)[7]에 간다고 하기에 왕관(往觀)하였는데 천황이 내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이때에 나에게 총이나 작탄이 있으면 어찌할까’하는 감촉이 얼른 생겼었습니다.
그리고 이 취중진담이 천황을 암살한다는 엄청난 계획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봉창 의사의 취중진담이 있었던지 며칠 후, 이봉창 의사는 김구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8]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로 왔습니다.
백범일지에는 백범 김구와 이봉창 의사의 각별했던 모습이 나온다.
1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이봉창 선생을 비일리 법조계[9]중흥여사로 청하여 하룻밤을 같이 자며 이 선생이 일본에 갈 일에 대하여 여러가지 의논을 하였다. 만일 자살이 실패되어 왜 관헌에게 심문을 받게 되거든 이 선생이 대답할 문구까지 일러주었다. 그 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는 내 헌옷 주머니 속에 돈뭉치를 내어 이봉창 선생에게 주며 일본 갈 준비를 다하여 놓고 다시 오라 하고 서로 작별하였다.
이틀 후에 그가 찾아왔기로 중흥여사에서 마지막 한 밤을 둘이 함께 잤다. 그때에 이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일전에 선생님이 내게 돈뭉치를 주실 때에 나는 눈물이 났습니다. 나를 어떤 놈을 믿으시고 이렇게 큰 돈을 내게 주시나 하고, 내가 이 돈을 떼어 먹기로, 법조계 밖에는 한 걸음도 못 나오시는 선생님이 나를 어찌할 수 있습니까. 나는 평생에 이처럼 신임을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처음이요, 또 마지막입니다. 참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일은 영웅의 도량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정식으로 한인 애국단에 가입한 시기는 1931년 12월 13일. 그리고 백범일지에는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 슬퍼하는 김구를 향해 "자신은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며 위로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동차 위에서 깊이 허리를 숙이고 떠난다.

이후 일본으로 잠입했는데 도쿄에서 숙박했다가 거사 바로 전날 도쿄를 벗어나 가와사키에서 숙박했다. 일부러 숙박처를 도쿄에서 외곽으로 변경한 까닭은 천황의 행차 전날 밤부터 각 치안기관에서 도쿄 관내에 있는 음식점, 여관, 유곽, 절, 빈집 등 공공장소를 검문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거 이후 일본 경찰이 조사하여 이를 알게 되자 이봉창 의사의 치밀함에 놀랐다고 한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도쿄 교외에서 열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천황을 겨냥하여 도쿄 경시청 부근에서 수류탄 한 개를 던졌다. 그러나 이봉창 의사는 마차 여러 대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 천황이 탄 마차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두번째 마차에 폭탄을 던졌는데, 폭탄은 명중했지만 히로히토는 그가 지나보낸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고,[10] 그 폭탄은 마차를 끌던 말과 그 말에 탄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다.[11] 폭탄 투척 이후 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경찰들은 이봉창 의사가 던진 줄 모르고 이봉창 의사 앞에 있던 일본인을 구타하자 이봉창 의사는 이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자수를 했다. 이때 침착한 어조로 "숨지 않을 테니 점잖게 다뤄라."고 말했다. 가지고 온 폭탄 두 개 중 던지지 않은 것은 일본 경찰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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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월 8일 거사 직후 체포된 이봉창 의사.

이봉창 의사에 대한 공식 취조는 1월 8일 오후 3시 50분에 시작되었다. 경시청 형사부장 자리에서 외부와 통하는 연락을 일체 차단된 상태에서 진행했으며, 검사가 직접 취조했다. 아래의 글은 검사가 직접 작성한 본문을 그대로 번역, 옮긴 것이다.
범인은 언어가 명석하여 일본인과 다름이 없고, 태도는 태연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미소를 띄웠으며, 이런 중대한 범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반성하는 관념은 털끝만큼도 없다. 1928년(쇼와 3년) 11월에 거행된 즉위식을 참관하기 위해 교토로 갔을 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무고하게 10일간이나 유치된 것에 분개하여 사상의 변화를 일으키고 1930년 11월에 상하이로 가서 중국인이 경영하는 레코드회사 영창공사에서 근무하고, 백정선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1931년 12월 23일에 도쿄에 왔고, 1932년 1월 4일에 백정선으로부터 은행을 통해 다시 100원의 송금을 받고, 7일 아사히 여관을 떠나 가나가와가와사키의 유곽에서 묵고, 8일 오전 8시에 전차로 하라주쿠에 도착하고, 검색이 심해 거사에 불리함을 알고 전차로 요쓰야역으로 가고, 다시 경시청 앞으로 가서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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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가려진 채 일본 경찰과 함께 재판장으로 들어가는 이봉창 의사.

1932년 9월 16일 일본 대심원(대법원 격, 현재의 최고재판소)에서 첫 공판이 열리고 바로 9월 30일 오전 9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죄명은 대역죄(大逆罪).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12]

광복 후 김구가 1946년 일본 정부로부터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묘에 안장하였으며[13], 대한민국 정부는 이봉창 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3. 언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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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월 10일 중앙일보[14]에서 보도된 이봉창의 의거. 매우 비난하는 어조의 기사를 실었다.

당시 신문사 사장은 노정일. 일부에서는 이 기사를 실은 신문사 사장이 여운형이라는 허위사실을 퍼뜨리고 있는데, 이 무렵 여운형은 감옥에 있었다.

여운형은 1932년 7월에 출옥하고, 지인들의 도움[15]을 받아 1933년 2월에 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했고, 1933년 3월 7일부터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쳐서 창간되었다. 위키백과를 보더라도 1933년 2월 16일 여운형이 중앙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1933년 3월 7일부터 제호를 조선중앙일보로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봉창 의거는 1932년 1월에 있었으므로, 저 사건은 여운형이 조선중앙일보를 맡기 전에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 보도라는 말은 신뢰하기 어렵다. 또한 조선중앙일보에 나왔다는 표현도 당시 쓰여진 다른 기사들과의 연장선에서 파악해야지 한 대목만 인용하고 그걸 근거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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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1월 10일 동아일보에서 보도된 이봉창의 의거. 동아일보 역시 이봉창의 의거에 대해 격렬히 비난하는 어조의 글을 실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봉창의 의거에 대해 매우 비난하는 어조로 썼다. #(이는 일본 사법성 발표의 인용인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원로 언론인인 이혜복(1923년 생)은 "그 당시 신문을 그렇게 쓰지 않으면 신문이 못 나간다. 총독부로부터 검열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되려 사건을 보도한 자체가 쾌거라는 의미. (검열시대엔 행간을 잘 읽어야한다)[16]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총독부는 신문사들을 압박해서 독립운동가들을 '강도' 등의 표현으로 쓰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반면에 해외에 있어 총독부의 검열 대상이 되지 않았던 한인 신문사[17]들은 '통쾌한 의거였다'는 식으로 대서특필했다.

중국의 신문사인 <민국일보>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봉창이라는 한인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맞지 않았다(不幸不中)"라고 적었는데 이 '불행'이라는 두 글자를 보고 눈이 뒤집힌 일본 제국이 군대를 동원해 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사를 실었던 그 신문사와 그 지역 일대에서 학살을 벌였다. 결국 일본은 상하이에서 중국과 전쟁을 치뤘고, 이후 쇼와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행사를 벌였고 이 때 윤봉길이 행사에 참가한 일본군일본 제국 관련 인물들을 향해 물통 폭탄을 던졌다.

4. 모던보이

그는 '모던보이'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

이봉창은 여자와 마작을 좋아했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다이쇼 13년(1924년) 4월 - 계집질과 마작으로 빚을 져서 용산역의 조차(操車)[18]과를 퇴직금을 얻을 목적으로 퇴직함.

쇼와 5년(1930년) 3월 - 가명을 '마츠이 카즈오'로 바꾸고 상경해 도쿄도 교바시구 미나미오다하라마치의 채소절임 가게에 취직한다. 7월에는 도쿄도 혼고구 모리카와초의 모리야 가방 가게로 전직한다.

쇼와 5년(1930년) 12월 - 중화민국 상하이직할시 민행로로 망명한다. 영창공사의 축음기 외판원으로서 일한다.

5. 후일담

의거 이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자들은 조선의 친일파였다. 재일 친일파의 대표격인 박춘금은 1월 8일 궁내성을 비롯하여 여러 일본 고위층 인사들을 방문해 불경범인이 조선인인 것에 대해 송구스럽다며 사죄를 했으며 9일에는 친일단체 120명을 소집해 궁성 입구에서 또 직접 사죄를 했고 국내의 친일 세력들은 1월 9일 서울의 요정 식도원에 모여 이봉창 의거에 대해 사죄하기로(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저 사건을 자신들이 했다고 알렸는데, 그 결과 일제의 감시 때문에 각종 지원이 끊겨서 김구가 그림을 그려 팔며 힘들게 임시정부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윤봉길의 의거 이후로, 윤봉길의 의거에 감명을 받은 장제스의 지원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회생의 길을 얻고 남경중앙군관학교 분교에 조선인 훈련반도 보내고, 돈을 지원받아서 보내기도 한다. ##

한편으로는 일본 본토의 고위 관료들에게는 이 사건은 재앙이었다(...). 당시의 일본에서 천황이 가지는 상징성이나 위치는 지금에 비해서도 압도적인 것이었는데, 그 천황이 암살당할 뻔했으니 발칵 뒤집힌 건 당연지사. 당시 수많은 고위 관료들이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진 사퇴하거나 해임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편 80년대 중순에 이봉창 의사의 조카가 힘들게 살아갔던 것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과거 자료에서 이봉창 의사의 부인이 80년대 중반에 서거했다고 했지만, 이봉창 의사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다른 독립운동가와 헷갈린거 아닌가 의심된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부인이 80년대 중반에 서거했기 때문에 비슷한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의 경우와 혼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비슷한 인물로 조명하가 있다. 이쪽은 다이쇼 천황의 사돈이자 쇼와 천황의 장인, 즉 고준 황후의 아버지이자 현임 나루히토 천황의 외증조할아버지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를 독 묻은 칼로 찔러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 국내가 아닌 타국(대만)에서 의거를 일으킨 점도 비슷하다.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인 배경식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이봉창 의사의 최고 업적이라 함은 임시정부가 의열투쟁의 길로 나가게 한 것과 함께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일으키게 한 것이라고 뽑았다.[19]

도쿄 신주쿠구 요쓰야에 있는 요초마치 놀이터 부지가 옛날 이치가야 형무소 자리였는데, 놀이터에 옛 형사사범들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그런데 그 인근에 쓰레기들이 많아서.....#

5.1. 의거가 성공했다면?

만약 암살에 정말로 성공하여 히로히토 천황이 사망했다면 당시는 아키히토(1933년 12월생)가 태어나기도 전이었으므로[20] 차기 천황은 그의 바로 아랫동생인 야스히토가 이었을 확률이 높다.[21]

이봉창 의사는 체포됐다면 당연히 일제의 최고존엄인 덴노를 시해한 1급 범죄자로써 사형당했을 것이고 설사 정말 운 좋게 도망쳤다면 1급 조선인 수배자로써 쫓기는 몸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훗날 한반도가 독립을 했다면 이봉창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과 더불어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투 톱으로 기념되어 졌을 것이고 천황을 죽인 인물인 만큼 일본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한국인이 됐을 것이다. 물론 이봉창의 독립 한국내 대중적 인지도가 지금보다 엄청나게 높아졌을건 당연한 거고

일제 내각의 예상 반응은 추가바람

6. 폭탄 이야기

이봉창 의사의 의거 때 쓰인 수류탄은 김홍일(당시 쓰던 가명은 왕웅)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봉창 의사에게 수류탄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도 김홍일이라고 한다. 그는 1931년에는 상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는 등 중국군의 병기를 관리했다고 한다.

이봉창 의사는 2개의 폭탄을 준비했는데 1개는 왕웅을 통해 상하이 병공창에서 1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한테 보내서 얻어온 것이라고 한다. 1개는 의거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자결용이었다.

이봉창 의사는 마미(麻尾)라는 수류탄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무게가 가벼워 멀리 던질 수 있고 휴대가 간편하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불발탄이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폭발력이 다소 약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파일:external/img11.itiexue.net/13204631.jpg
마미(麻尾) 수류탄
국군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 장교였던 나의 상식에 의하면, 아무래도 그 거리가 100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표적물을 보통 수류탄을 던져 가지고 실수 없이 명중시키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약간 구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보통 수류탄 대신에 마미(蔴尾) 수류탄을 구해서 이 동지한테 주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마미 수류탄은 보통 수류탄에 비해서 폭발력이 약하다는 것이 좀 단점이긴 하지만, 그 대신 중량이 가벼워서 멀리까지 던질 수 있는 데다가 불발탄이 없고, 또한 휴대하기가 간편한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휴대하기가 간편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 수류탄을 도쿄까지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로 당시 김구 선생과 나는 보통 고심한 것이 아니었다.
김홍일,『대륙의 분노 -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273쪽

백범 김구는 훗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전에 이봉창 의사의 의거 실패를 기억하여 제대로 터지는 폭탄을 부탁했다. 그리고 그 하나로 무시무시한 전적을 올렸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봉창과 윤봉길이 의거 시 사용한 폭탄 모두 상해에 있는 병공창에서 제작한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 당시 창장은 자신들이 건네주었던 폭탄 화력이 미약하여 암살 미수에 그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윤봉길에게는 시험을 거듭한 폭탄을 성심성의껏 제조하여 20여 개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이 폭탄 제조에 대한 썰은 총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김홍일이 직접 제작했다는 썰이고, 다른 하나는 김홍일이 폭탄제조자 왕바이슈를 주선했다는 점. 그런데 김홍일 장군이 대만대사로 활동하던 중에 왕바이슈와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이때 이 왕비아슈가 이봉창 열사의 폭탄을 제조해 주었다고 하였기에 대체로 김홍일이 중국 병기공창 주임으로 있을 동안 왕바이슈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김구의 요청에 따라 왕바이슈와 김구를 이어 주었고, 폭탄제조에 필요한 화약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독립운동의 특성상 기록을 남길 수가 없어 거의 모든 독립운동 관련기록이나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위 썰도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1] 현재 도쿄구치소. 옛 이치가야 형무소는 없어졌다.[2] 이봉창 의사의 얼굴 사진을 그림에 떼어 붙인 것. 의거 전 중간에 있는 사진을 찍었는데, 그 내용이 흐릿하여 알아보기 힘들자 왼쪽 사진에서 얼굴을 따와 만든 것이다. 잘 보면 턱선이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결정적으로 손과 수류탄도 사진이 아니라 펜으로 그려 넣은 그림이라 자세히 보면 사진이 아니라는 티가 난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조악하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자료로서는 가치가 있는 사진이라 할 수 있다.[3] 위의 이미지에서 이봉창이 목에 걸고 있는 글귀의 내용.[4] 두 번째 링크의 경우, 글 목록의 다른 글들은 꽤나 환빠스틱한(…) 내용들이니, 게시물 본문만 읽자.[5] 처음 임시정부와 접촉할 때도 한국어를 안 쓰고 일본어를 썼다.[6] 사실 일본어로 임시정부를 뜻하는 일반명사이지만 그 당시 임정을 보는 일제의 시선이 고왔을 리가 없으므로 멸칭으로도 자주 쓰였다.[7] 일본 가나가와현에 있는 마을. 황실 별장이 있어 천황 등의 황실 인물들이 자주 왕래했다.[8] 김구는 그때까지도 이봉창을 믿지 못해 자신의 이름을 백정선이라는 가명으로 말했다 한다. 덕분에 이 의사는 죽을때까지 김구의 이름을 백정선이라 알고 있었다 한다.[9] 상하이에 있던 프랑스 조계. '법'은 프랑스의 중국어 음차 표기인 '법란서'의 준말이다. 임정이 이곳에 있었으며 프랑스 조계는 강대국인 프랑스의 사법권이 미치므로 일본이 간섭할 수 없었다. 임정 인사들은 상하이에서도 여기를 벗어나면 일제 밀정들의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면 중국에서 항의하겠지만 당시 중국 상황이 여간 개판이 아니었던 탓에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0] 흔히 대통령이 이동할 때, 대통령이 탑승한 것과 똑같은 자동차가 다섯 대씩 이동한다. 당시에도 그런 보안책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11] 당시 타임지 기사에 따르면, 이 말이 몸빵을 한 덕에 상으로 당근 1상자를 받았다 카더라.[12] 당시 일본에서 천황을 포함한 황족에게 위해를 가하는 범죄는 대심원에서 1심 재판만 행해져 항소가 불가능했고, 사형만이 선고될 수 있었다.[13] 전술한 대로 이봉창 의사는 서울 용산구 출신이다. 즉, 삼의사 중 유일하게 고향에 안장된 셈.[14] 지금 있는 중앙일보는 1965년에 설립되었고 본문 내용과는 관련 없는 신문사다.[15] 대표적으로 조동호가 그를 도와주었다.[16] 이는 1980년대까지도 이어져서 당대 사람들은 신문기사를 보면 그대로 믿기보다는 속뜻을 추론하면서 읽은 경우가 많았다.[17] 대표적으로 미주에 있던 한인 신문사 신한민보.[18] 열차를 편성하거나 다른 선로에 넣거나 나누거나 하는 일[19] 전술한 이봉창 의사의 모던보이적 성향에 대한 책을 썼다. 물론 후기에서 몸이 안 좋아져서 엄청 고생했다고 썼지만 말이다.[20] 그렇게 됐으면 나루히토 천황이나 아이코 공주, 후미히토 일가 등은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을 테니 일본 황실의 가계 역사가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다.[21] 그런데 야스히토의 아내인 세츠코 비는 한 번의 유산을 제외하면 평생 자녀를 가지지 못했다. 물론 야스히토가 천황이 됐다면 좀 더 안정적인 환경을 보장받아 출산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그런거 없이 똑같이 무자녀 상태였다면 결국에는 아들을 셋이나 둔 막냇동생인 다카히토에게 천황 자리가 갔을 것이다. 늦둥이인 다카히토는 형들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데다가 100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형들에게 자녀가 없었다면 기어이 천황 지위에 올랐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