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별도 달도 따줄게에 나오는 동명의 등장 인물에 대한 내용은 오영선(별도 달도 따줄게)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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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오윤길(吳允吉) |
호 | 석농(石農) |
출생 | 1886년[1] 4월 13일 |
한성부 남부 둔지방(성외) 이태원계 이태원동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435번지) | |
사망 | 1939년 3월 10일[2] (향년 52세) |
중화민국 상해특별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17호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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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리는 독립운동가라는 의미 앞에서는 다 동지입니다. 우리 중에 큰 병이 무엇무엇 하여도 의심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이의 비방, 질시, 시의, 저주의 대부분은 선의로 상대하는 중에서 개선될 수 있습니다.
우리 사이의 비방, 질시, 시의, 저주의 대부분은 선의로 상대하는 중에서 개선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둘러싼 갈등 시기에 화합을 강조하며 정국 쇄신과 민족유일당 건설에 노력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의 사위이다.
2. 생애
1886년 4월 13일 한성부 남부 둔지방(성외) 이태원계 이태원동(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435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리(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363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옮겼다.어려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국제정세에 눈을 떴으며,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07년 8월 일제의 군대 강제 해산으로 대한제국 장교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배일사상이 문제가 되어 퇴학 처분을 받았다. 고국으로 돌아 온 선생은 1909년 이동휘의 초청을 받아 캐나다 그리어슨 선교사가 함경북도 성진부(城津府)에 세운 협신중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소위 이동휘의 교육생이 되었다.
경술국치 후 1911년 청나라 북간도로 건너가 간민교육회가 1911년 3월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延吉縣 局子街)[3]에 세운 광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14년 2월에는 간민회 의원에 선출되어 간도 한인의 권익 옹호에 적극 나섰다.
오영선은 1914년 독립군 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이동휘가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왕청현 춘경사(春耕社) 나자구(羅子溝)[4]에 세운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5]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대전학교가 폐쇄되자 1917년 1월 이동휘와 길림성 연길도 혼춘현(琿春縣) 대황구(大荒溝)[6]로 옮겨 북일중학교를 설립, 교사로 재직하면서 항일 구국 인재를 양성하였다.
같은 해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교육계몽과 무관양성을 위해 노력하였고, 선생이 교육한 많은 학생들이 간도와 연해주에서 항일무장 투쟁을 이끌었다. 그러나 1920년 4월 일본군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기습 공격하여 한인 주민 상당수를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자 오영선은 연해주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이동휘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 프랑스 조계로 이주했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면서 1920년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에 선출되었고,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어 국무총리 이동휘의 활동을 보좌했다.
이 무렵 임시정부에서는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임시정부 개혁 논의가 한창이었다. 오영선은 1922년 독립신문에 '신년의 신각오'라는 글을 기고하여 우리는 독립운동가라는 의미 앞에서는 다 동지라고 주장하며 화합할 것을 역설하였다.
오영선은 국민대표회 지지파와 정부 옹호파를 중재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결렬되자 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정국쇄신운동을 벌였다. 1924년 12월 박은식 내각이 들어서자 오영선은 법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정국쇄신을 위한 헌법을 개정하고 간도지역 정의 신민 참의 3부를 설득해 결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이끌어냈다. 오영선은 국무령 김구 체제에서 군무장에, 이동녕 체제에서 외무장과 군무장에 임명되어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하여 힘썼다.
오영선은 임시정부 외곽단체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24년 대한교민단 의사회 학무위원에 선임되어 교민 자제교육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1922년 대한적십자회 이사장과 1925년 회장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또한, 안창호와 함께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 뒤 1926년 8월 임시정부 외무총장, 1927년 1월 임시정부 군무총장 등을 역임했고, 이후 임시정부 국무원으로서 임시정부의 개혁과 대동단결을 주장하다 1939년 3월 10일 상해에서 지병으로 순국하였다. 1995년 6월 22일 중국에 안장되어 있던 유해를 봉환해와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하였다.
3. 기타
모 경찰서 고등과 사진첩에서 복제된 사진이다. |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그를 2016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4. 포스터
- 출처: 국가보훈처
5. 관련 사이트
[1] 1934년 용의조선인명부에는 1885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1943년 8월 10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3]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4]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뤄쯔거우진(羅子溝鎭).[5] 대외적인 명칭은 왕청현 제1고등국민학교였고, 나자구사관학교 또는 대전학교 등으로도 불렸다.[6]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훈춘시 잉안진(英安鎭) 다황거우촌(大荒溝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