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생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김갑(1948)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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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김진원(金瑨源) |
본관 | 김녕 김씨 |
출생 | 1889년 1월 7일 |
경상도 동래도호부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 |
사망 | 1933년 3월 14일 |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 광제의원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
서훈 |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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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갑은 1889년 1월 7일 경상도 동래도호부(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서 부친 김석련(金石鍊)과 모친 박옥(朴玉)의 아들로 태어났고, 1921년에 작은아버지인 김세주(金世鑄)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는 1906년 4월 동명학교에 입학했고 1910년 3월에 졸업했다. 이후 농사를 지으며 살면서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919년 3.1 운동 때 경남 지역의 연락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쫓겨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이 주도한 동제사(同濟司)에 가입한 뒤 대종교에 입교하여 참정(參政)·지교(知敎)·상교(尙敎)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대종교 본사가 국내에서 만주로 옮기자 상하이에 서도본사(西道本司)를 설치했다.1919년 4월 10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이 되었다. 1919년 4월 22일엔 교통부 위원에 선임되었고, 이후 군무위원회 이사를 맡았으며, 법제위원회에 가담하는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업무 수행에 공헌했다. 한편, 그는 이동휘, 신채호, 장건상 등과 함께 무장 투쟁 노선을 지지했다.
이무렵 이승만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임시정부의 외교 노선에 대한 비판이 급격히 고조되었다. 이에 그는 1921년 5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국내노동당(國內勞動黨) 대표로 참석한 뒤 그곳에서 임시정부를 폐지하고 국민대표회의로 대체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를 수립하여 이상룡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재무총장(財務總長)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공화정부는 예산 부족과 중국 정부의 불허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 후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상하이에서 개최되자, 그는 13도 총간부의 자격으로 참가했다. 뒤이어 국민대표회의 참가자의 자격을 심사하는 자격 심사 위원, 선언문 및 선언서 수정 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결로 점철되자, 그는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개조파가 되어 창조파인 신숙, 윤해 등의 국민대표회의 명의도용에 대하여 13도 총간부의 이름으로 성토했다.
1924년 12월, 김갑은 박은식 국무총리의 부름을 받아들여 노동총판(勞動總辦)으로 임명되었으며, 1926년 2월 14일 김구 국무령의 추천에 따라 국무원(國務員)에 임명되었고 1927년 1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 의원으로서 새로운 임정 약헌기초위원(林政約憲起草委員)에 피선되었다. 또한 동년 2월 23일에는 상해인성소학교(上海仁成小學校) 진급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격려하였다. 1928년 7월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부장에 임명되어 재정을 마련하고자 혼신을 기울였다.
한편 민족 유일당 운동이 한국 독립운동계의 대세로 떠오르자, 그는 여기에 가담해 1927년 4월 11일 상하이 유일당촉성회 창립에 참여했다. 그러나 결국 유일당 운동이 실패하고 좌우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그는 1930년 3월 이동녕, 김구, 안창호와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특사를 국내외로 밀파하여 취지 선전과 연락을 도모했다. 그러나 1933년 3월 14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 광제의원에서 병사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김갑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