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07 17:12:46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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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李東輝 | Yi Dong-hw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9D%B4%EB%8F%99%ED%9C%98.jpg
출생 1873년 8월 29일
조선 함경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
사망 1935년 1월 31일 (향년 61세)
소비에트 연방 프리모르스키 지방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병사
재임기간 1919년 8월 27일[1] ~ 1921년 3월 16일
본관 하빈 이씨
호) 대자유(大自由)
학력 한성무관학교 졸업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졸업
정당 무소속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이념 사회주의
군사경력 대한제국 육군 참령


1. 개요2. 생애3. 평가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一人)이 필사(畢死)하기까지 최후의 일인(一人)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必成)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혁신공보(革新公報)》, 1919년 12월 25일자 기사
조국광복을 위한 일이라면 모든 일에 앞장서서 ‘선봉’에 서고 마는 그의 진보적 행동성, 전통적인 권위와 사회적 제약과 굴레를 과감히 개혁하고자 했던 그의 혁명성은 다른 사람들의 추종을 불허했다.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년 12월 31일

1. 개요

일제강점기 시기에 활동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그의 생애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전후로 확연히 나눠지는데, 1917년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후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이 급격히 줄어들며,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공산주의 활동에 매진했다.

일제 시대 초기에는 무장투쟁을 주장하던 대표적인 인사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공산주의자로 전향하여 볼셰비키에 가입했다. 1918년에는 한인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다른 요인들과의 의견 대립으로 곧 탈퇴했다.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후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공산주의 활동에 투신했다.

2. 생애

본관은 하빈(河濱).[2] 호는 성재(誠齋)이며 대자유(大自由)라는 이름도 썼다.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에서 아전 이승교(李承喬)[3]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9년에 서울의 육군 무관 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개혁당을 조직하여 개화 운동을 했다. 1907년에 강화도의 강화 진위대 참령으로 근무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전등사에서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했다. 그 해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하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해 투옥을 겪었다.

1912년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북간도로 건너가 이종호 등과 대전무관학교를 세웠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볼셰비키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케렌스키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다. 그러다가 김알렉산드라[4]에 의해 석방되었다.

고려공산당의 모체가 되는 한인사회당을 창립하였고, 대한 국민 의회를 조직했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 총장, 국무 총리를 지냈다. 이 때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고 무장 투쟁을 주장하여, 외교론과 실력 양성론을 주장한 기독교계 독립 운동가인 이승만, 안창호 등과 대립했다.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계열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이동휘 자신이 중심인 상해파여운형이 중심인 이르쿠츠크파, 그리고 김중연의 엠엘파는 통합에 실패했다. 끝내 통합을 못본 채 김규식이 수반인 임시 정부와는 별개의 한국 정부를 만드는데, 소련으로 가서 인정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1922년에 코민테른에서 독립 운동을 위해 지원한 200만 루블을 받는 과정에서 측근인 한형권, 김립이 40만 루블을 고려공산당 조직 기금으로 쓴 사건인 일명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터지자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 직을 사임했으며, 시베리아에서 병사했다.

3. 평가

이동휘는 한인 최초의 공산주의자 중 한명이었다. 최초의 한인 공산주의자는 한인 2세 알렉산드라 킴, 두번째는 이동휘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독립운동가 중 한명이었으나,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후 가장 먼저 공산주의에 귀의했고[5] 이후 한인 공산주의의 형성과 발전에 누구보다도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정통했던 골수 공산주의자는 알렉산드라 김이였으며, 이동휘는 그녀에 비해 체계적으로 공산주의를 접하지 못했으며, 공산주의에 대해 알렉산드라 김만큼 이론적으로 정통하지는 못했다. 실제로는 이동휘보다 알렉산드라 김이 초기 한인 공산당 활동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이며, 알렉산드라 김이 독립운동가로서 인지도가 있던 이동휘를 얼굴 마담으로 내세웠던 측면이 있었다. 다만 알렉산드라 김이 1918년 이른 나이에 사망하면서, 이후 이동휘가 진짜로 완전히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이동휘와는 별도로 러시아 한인 2세를 중심으로 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이동휘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이긴 했지만, 이들 러시아 한인 2세들처럼 소련과 코민테른에 철저히 종속되려는 생각에는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루크츠크 고려공산당과 한때 통합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결국 통합에 실패하고 제 갈길을 가게 되었고, 이루크츠크파는 이후 소련 영내에서 철저히 소련의 하수 조직이 되면서 이동휘 측과는 더이상 엮이지 않게 되었다.

이동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이승만, 김구 등 임시정부 주류들과 의견 대립으로 탈퇴한 후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하며 독립운동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와 임정 해체에 뜻을 같이 했던 요인들에 의해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당시 창조파를 이끌었던 인물들 중 상당수는 소비에트와 직접 연계된 인물들이 많았고, 이들은 임시정부 해체 후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는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동휘는 소련의 직접 지령까지는 원하지 않았고 때문에 창조파에서 개조파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 백범일지 발췌 - 하루는 이동휘가 내게 공원에 산보하기를 청하기로 따라갔더니, 조용한 말로 자기를 도와 달라 하기로 나는 좀 불쾌하여서 내가 경무국장으로 국무총리를 호위하는 데 내 직책에 무슨 불찰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손을 흔들며, “그런 것이 아니라,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겠은즉 두 번 피를 흘림이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아우님이라는 뜻이니 이동휘가 수하 동지들에게 즐겨 쓰는 말)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향을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이 씨에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이 씨는 고개를 흔들며, “안 되지요” 한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족 독자의 운동이요,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반되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심은 대불가(大不可)니 나는 선생의 지도를 받을 수가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하오” 하였더니 이동휘는 불만한 낯으로 돌아갔다. 이 총리가 몰래 보낸 한형권이 러시아 국경 안에 들어서서 우리 정부의 대표로 온 사명을 국경 관리에게 말하였더니 이것이 모스크바 정부에 보고되어, 그 명령으로 각 철도 정거장에는 재류 한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두르고 크게 환영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여서는 러시아 최고 수령 레닌이 친히 한형권을 만났다. 레닌이 독립운동 자금은 얼마나 필요하냐 하고 묻는 말에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이라 대답한 즉 레닌이 웃으며,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 루블로 족하겠는가?” 하고 반문하므로 한은 너무 적게 부른 것을 후회하면서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마련하니 당장 그만큼이면 된다고 변명하였다. 레닌은, “제 민족의 일은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고 곧 외교부에 명하여 200만 루블을 한국 임시정부에 지불하게 하니 한형권은 그 중에서 1차분으로 40만 루블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떠났다.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기별을 받자 국무원에는 알리지 아니하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받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이 따로 있어서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매수하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히 숨어서 광동 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호화롭게 향락 생활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그 죄를 물으니 그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러시아로 도망하여 버렸다. [6]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해방되기 십수년 전에 이미 공산혁명을 전제로 한 독립운동을 유도하기 위해 김구를 포섭하려 했고 민주주의로 갈 경우 민족간에 피를 흘리는 것을 전제로 했다는 내용과 공산혁명시 제3국제공산당[7]의 지휘와 명령을 받아야만 하는 것을 인정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다만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김구의 시각에서는 이동휘를 저렇게 보는 것이 당연할 것이고, 이동휘는 오히려 소련에 충성하는 이르쿠츠크파와 대립하며 민족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이라고 보는게 맞다. 오히려 국제공산당에서 한인사회당이 공산주의 활동을 하는데 쓰라고 준[8] 자금을 한인사회당이 썼다는 이유로 김립을 죽이라 지시한게 김구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1995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이동휘 기념비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질 예정이다.#


[1] 1919년 8월 27일부터 1919년 9월 11일까지는 임시정부 수반으로 재임함.[2] 희소한 본관으로 하빈은 지금의 대구 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으로 시조 이거(李琚)가 조위총의 서경 유수군을 토평한 공으로 하빈군(河濱君)에 봉해짐으로써 그의 후손들은 하빈(河濱)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거는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16대손이자 이준의, 이의방, 태조 이성계의 6대조 이린과 형제지간으로 하빈 이씨는 전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이다. 그래서 하빈 이씨를 전주 이씨 평장사공파라고도 한다.[3] 이후 이발(李發)로 개명한다.[4] 한국인 최초의 공산주의자이자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가 극동에 세운 임시정권인 극동인민공화국의 외무장관이었다.[5] 알렉산드라 김은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볼셰비키 당원이었다.[6]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1&nNewsNumb=20180328387&nidx=28388|백범일지 범우사, 2002.8.5, 3판3쇄 306~308P 발췌 칼럼 인용[7]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3인터내셔널 혹은 국제공산당은 1919년 3월 러시아 공산당의 주도 인물들이 설립하여 1943년 스탈린에 의해 해체된 조직이다. 이 조직의 목표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무장군대를 포함하여 세계의 부르주아의 타도와 완전한 국가 철폐의 과도기적인 단계로서의 세계 소비에트 공화국의 창립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코민테른에 가입하기 위해 공산당은 21개 조항을 수락해야 했다. 이는 다음의 것들을 포함했다: (1) 공산주의 선전과 동요 활동을 하고 대중 앞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상을 떠받친다 (2)중책을 맡은 개량주의자들과 중도주의적 의견의 지지자들을 제거하는 것 (3)체제전복 임무를 위한 불법(합법적인 것을 포함하여) 조직을 창립한다.[8] 물론 그 공산주의 활동이 반제국주의 운동이므로 어떤 의미이므로는 독립운동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