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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생 대한민국의 기업인 겸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이동녕(1905)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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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9년 10월 6일 | ||
충청도 목천현 읍내면 동리 (現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 | |||
사망 | 1940년 3월 13일 (향년 70세) | ||
중화민국 쓰촨성 치장현[1] | |||
묘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 임정요인 묘역 | ||
재임기간 | 제3대 임시정부 국무령[대리] | ||
1926년 4월 29일 ~ 1926년 5월 2일 | |||
제5대 임시정부 국무령[대리] | |||
1926년 5월 16일 ~ 1926년 7월 7일 | |||
제1-2대 임시정부 국무회의 주석 | |||
1927년 8월 19일 ~ 1933년 3월 6일 | |||
제5-7대 임시정부 국무회의 주석 | |||
1935년 11월 2일 ~ 1940년 3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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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아버지 이병옥, 어머니 광주 안씨 | ||
자녀 | 아들 이의상[5], 이의식, 이의백[6] | ||
학력 | 불명 | ||
종교 | 유교 (성리학) → 개신교 → 대종교 | ||
자 | 봉소(鳳所) | ||
호 | 석오(石吾, 石五, 石梧)·암산(巖山) |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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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개화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 이철희 전 서울교육대학교 총장과 이석희(1922~2014) 전 대우그룹 부회장이 그의 손자다.호는 석오(石吾), 독립운동가들의 회고록에서는 이름을 대신해 주로 석오로 등장한다.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 멤버로 초대•2대, 5~7대 임시정부 주석, 제3·5·9·10·13·14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과 제1대·12대·15대 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지내 임시정부 중반기 바람 질 날 없던 상황에도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탱한 대들보같은 존재였다.
임시정부가 성립될 때부터 1927년 헌법 개정까지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이었으며, 이후로도 죽는 날까지 국무회의 주석(1927~1933, 1935~1940)으로 정부수반을 역임했다. 초기의 국무총리-대통령 이승만(1919~1922)[7], 항쟁기의 주석 김구(1940~1945) 사이에서 국무회의 주석(정부수반)으로 임시정부가 무너지지 않는 가장 중대한 역할을 담당했으나, 8.15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여 (안타깝게도) 일반인들의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그러나 임시정부 연구에서는 그야말로 중요한 인물.
2. 생애
1869년 10월 6일 충청도 목천현 읍내면 동리(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아버지 이병옥(李炳鋈)과 어머니 광주 안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병옥은 1876년(고종 13) 식년시 진사시에 2등 18위로 급제하고# 1891년(고종 28) 증광시 문과에 병과 59위로 급제하였으며,# 그해 정5품 교리(校理)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1894년 갑오개혁 이전에 정3품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올랐다. 갑오개혁 이후에는 탁지부 재무관(財務官)과 의성군수, 영해군수 등을 역임했다.[8]5살 때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수학했고 10살 때 충청도 문의현 남면 후곡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후곡리)에 살던 조부 이석구(李錫九)의 집에 기거하면서 사서삼경을 읽었다.[9] 1897년 12월 부친이 영해군수로 부임했을 때[10] 따라가서 행정을 보조하면서 뛰어난 식견을 피력해 주변으로부터 '작은 군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후 부친이 평안남도 평양부로 전근가게 되었지만 가족을 대동할 수 없었기에 그는 한성부로 갔다.
그는 1885년 17살의 나이로 한성부 중부 정선방 대묘동계 봉소(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봉익동)에 정착하고 자신의 자를 마을 이름에서 따 '봉소(鳳所)'라고 지었으며 1892년 24살의 나이로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입격했다. 1896년 독립협회가 조직되자 평소 개화 운동에 관심이 많아 적극 가담했다. 그는 만민공동회 운영위원을 맡아 간사부에서 활동하며 외세 배격과 비정 쇄신 등을 요구했고 민권 운동과 개화 운동을 함께 추진했는데 이준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7개월만에 풀려났다.[11]
자신의 개혁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제국신문 논설위원이 되어 사설 등 시국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그는 '민족자강의 방도'라는 논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외에도 철도 부설론이나 위국의 방도론 등 수십 편 사설을 집필하여 민족 의식을 보다 선명하고 투철하게 나타내었다. 1898년 10월 28일자 논설인 ‘위국의 방도’에서 국민 참정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각종 이권이 외국에 양여되고 정부의 고위관리가 무능부패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자강을 도모하기 않기 때문이다, 대저 자강을 급히 서둘러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는 강대국에게 침략당할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것을 면하려면 먼저 세계사 발전에 발맞추어 개화를 힘써 실시해야 한다. 다음은 세계의 과학기술을 올바르게 받아들여 소화시키는 방도가 있는 것이다.
1900년경 전덕기 목사의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가 되자 상동교회에 다니는 동시에 기독청년회 총무를 맡아 목회 활동에 전념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일제가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시키자 상동교회에서 상동청년회를 조직해 투쟁을 전개했다. 상동청년회는 국학에 관한 내용인 교과를 가르쳤고 한글 보급 운동을 추진해 주시경이 1906년 <대한국어문법>을 발간하는데 기여했으며 한국사, 세계 지식, 법률, 경제 대의, 수신 등 과목은 청년들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주체 의식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이후 하와이에 거주하던 강천명이 보내준 자금 5원을 기반으로 청년학원을 직접 설립해 교사를 맡았으며 청년학우회도 설립해 총무로 활동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제에게 넘어간 소식을 접하고 동지들과 함께 을사조약 무효와 을사오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인 덕수궁의 대한문 앞으로 달려가 혈서로 '사수독립'이라는 글자를 쓰고 복합 상소했으나 일제 경찰이 달려들어 시비가 벌어졌는데 주변에서 참관하고 있던 시민들이 동참해 맞섰다. 그러자 일본군은 중대 병력을 투입해 칼을 휘두르며 진압했고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2개월간 옥고를 치르다 풀려났는데 일제에게 요시찰 대상으로 낙인찍혀 더이상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에 해외로 망명하기로 결정하고 북간도 용정에 사립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가를 길러내기로 결심했으며 3만원을 장만해 박무림, 정순만, 황공달 등과 함께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무사히 도착했다.
도착한 뒤 이상설 등 동지들과 프랑스 신부 퀴리의 도움으로 단층 한옥의 학교 건물을 건설했는데 그는 이 건물에 '서전서숙'이라는 간판을 달고 태극기를 내걸었다. 숙장은 이상설이었고 교사로는 박무림, 여준, 이동녕, 정순만, 황공달 등이 맡았으며 교과목으로는 한국의 언어, 역사, 지리, 풍속, 국제 공법, 수신 등을 주안점으로 두었다. 수업료와 침식은 모두 무상이었으나 지원하는 이가 적자 두만강 연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자녀 교육의 사명과 구국 의지 심화를 위해 협조해줄 것을 간청했는데 김약연이 자신에게 한문을 배운 제자를 보내 입학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노고로 학생은 100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갑, 을 두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시켰는데 갑은 고등반, 을은 초등반으로 했으며 뒤에는 병반까지 확대 운영했다. 동지들과 분담하여 수업을 진행했는데 그가 맡은 교과목은 수신, 한국사, 한문이었다. 그러나 친일 단체인 일진회가 방해하는 바람에 운영에 차질을 빚었으며 고종이 서전서숙을 운영하던 이상설에게 헤이그 특사에 가담할 것을 지시했고 이상설은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운영 자금을 끌어써야 했던 바람에 서전서숙은 건립된지 1년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이후 여준, 황공달 등과 함께 변장을 한채 국내로 귀국했다.
1907년 초 안창호, 양기탁 등과 비밀 결사 문제를 협의한 뒤 김구, 유동열, 이갑, 이동휘, 전덕기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다. 비밀 결사 단체여서 회원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회원 상호 간 접촉이나 사업 추진도 금하였는데 연락을 취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YMCA 출입 사진사가 담당하였다고 하며 1910년 전후에는 회원 수가 대략 8백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공식 대표는 양기탁이었고 총무에는 이동녕, 재무에는 전덕기, 조직 선전에는 안창호가 맡았다. 이동녕은 신민회가 설립한 오산 학교 등 학교와 학회를 후원해 청년 육성에 힘을 기울였고 동지들과 함께 전국 애국 계몽 강연에 나서 애국주의, 민권 의식 고취, 공화 의식 제고, 새로운 사조, 지식 산업 실시, 인습 타파, 교육 입국 필요성, 민력 양성 활용 방안, 실력 육성 비결 등을 중점적으로 강조했으며 청년층에게 민족 의식을 확대 보급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효과적이라는 판단하에 청년학우회와 청년동지회를 중심으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신민회의 청년 운동을 주도하였던 청년학우회 회원을 통상과 특별 등 2가지로 분류하여 강한 훈련에 임하게 하였고 1910년 3월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총무원이 되어 청년 육성의 구체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신민회는 3가지 항일 투쟁 방침을 세웠는데 첫째는 민족 교육, 둘째는 민족 기업 육성, 셋째는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민족 의식을 널리 선양해 국민 정신 개조를 이끌어내는 미래 지향적인 교육이었다. 하지만 활동이 구체적으로 전개될 움직임이 보이자 일제의 감시, 경계, 감독, 구금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활동은 위축되었다.
1908년 이시영, 장유순, 주진수 등과 함께 북간도 명동촌으로 갔으며 김약연이 건립해 운영하고 있던 사립 학교 '명동서숙'을 찾아갔는데 명동서숙에는 황의돈 등 유수한 인사가 교사로 봉직하면서 제2세 한인 동포에게 애국 사상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있었다. 명동서숙을 키우기 위하여 낯선 북간도에 정착하면서 정열을 쏟고자 하였으나 여건이 열악하였으며 1907년 8월 통감부가 간도파출소를 설치하고 한인 독립지사들을 감시함으로 효과적인 활동을 하기가 어려워 다시 귀국하여 새로운 민족 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했다. 이 시기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고 전국 각지에 빚을 갚기 위한 의연금 모금 조직이 창설되었는데 이러한 조직을 항일 투쟁으로 전환시키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서울 등지에서 신문을 이용해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선포되자 그는 국내에서인 국권 회복 운동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1910년 12월 그는 원산의 부모님에게 하직서를 보내고 가산을 정리한 뒤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했다.
봉천군벌 장쭤린을 찾아가 한인 동포들이 편히 살 수 있는 근거지를 마련하는데 방해하지 말 것을 호소해 승낙을 얻어냈다. 이후 유하현에 경학사를 조직해 한인 동포들의 생활, 교육 등 자치 기관으로서 활동하게 했으며 주경야독하는 자활 기관이었는데 뒤에 서로군정서로 발전하였다. 또한 서전서숙 등 경험을 토대로 교육 기관 설치를 구상하였는데 젊은 역군을 양성하는 것이 곧 민족의 광복을 앞당기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빈창고를 빌어 신흥강습소를 개교시켰다. 경학사장은 이철영을 추대했고 운영은 김달, 김창환, 윤기섭, 이갑수, 이관직, 이광, 이규룡, 이동녕, 장도순 등이 맡았다. 신흥강습소 교사로는 박찬익 등이 한국의 언어, 역사, 지리, 풍속, 제도 등을 가르쳤고 교육 과정은 본과와 특별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본과는 중학 과정이며 특별과는 사관 양성의 속성과라 할 수 있었다. 양성된 인재는 800여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1번째 특기생으로 배출된 애국 청년들인 김련, 변영태, 성주식, 이규봉 등이 초대 소장인 이동녕으로부터 초급 장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삼원보에서인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고 사관생도였던 맏아들이 병마에 시달리다 사망하는걸 지켜봐야 했다. 1912년 가을 경학사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부민단이 새롭게 조직되었으며 소재지는 통화현 합니하로 옮겨졌고 신흥강습소도 함께 이전하여 제2의 새로운 기지 건설에 매진했다. 1913년 신흥무관학교로 승격되었고 교장에는 여준이 임명되었으며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신흥학우단도 조직되었다.
1913년 봄 수원군에 거주한다는 맹보순(孟輔淳)이라는 인물로부터 일제 경찰이 김형선,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장도순 등을 체포하러 만주로 떠났으니 피신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이동녕은 동지들과 의논한 끝에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행선지를 이상설이 살고 있는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정하였으며 러시아로 떠나면서 부인과 자식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1913년 9월 도착하고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거처를 1913년 10월 하바롭스크로 옮기며 독립운동의 거점 확보를 꾀했다. 1914년 초 민충식 등이 찾아왔는데 그를 맞이한 이동녕은 권업회를 조직한 이상설과 대종교 신자 권대동, 백순, 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등을 자주 만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할 것에 합의했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러시아가 전쟁에 휘말려 정신이 없는 틈을 타 극동 총독 보스타빈의 양해와 협조를 얻어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 이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러시아 정부와 대일 연합 작전을 계획하며 군사 모집은 물론 훈련할 수 있는 사관학교 설립 등을 계획했으나 중간에 러시아 당국이 불법 군사 조직이라며 체포해 3개월간 옥고를 겪기도 했다. 1915년 석방되어 나온 그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민족 의식의 선양이라고 믿고 이를 고취하기 위하여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해야 하며 그렇게 된 뒤에 우리 나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가르쳐 새로운 민족 사관을 정립시킴으로써 민족적 긍지와 사명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여 구체적으로 재러 한인들에게 민족 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계기는 신문이 효과있다고 강조했으며 이를 이루기 위해 부호 최봉준의 자금을 통해 <해조신문>을 발행하고 배포하였다. 발행을 통해 민족 의식을 선양하고 구국 투쟁의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던 이동녕은 1918년 초 백순과 함께 동만주 영안으로 이동했는데 대종교 교주 김교헌이 이끄는 총본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기독교인이면서도 입교한 이동녕은 단군의 국조 사상을 이어 민족의 유구한 문화적 긍지를 높이 선양하여 동지와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려는 의도에서 이를 신봉하게 되었으며 신규식과 함께 대종교 서도본사 포교책을 맡아 선교 활동에 매진했다.
1918년 12월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감명을 받아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대내외에 표명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로 결심했다. 김교헌 교주를 필두로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날인했다. 서명한 인사는 총 39명이었다. 동삼성 지린성에서 제작해 배포된 대한독립선언서는 국내외에서 활약하던 독립지사가 거의 망라되었고 이 시기에는 가장 앞섰던 독립선언서였다. 이후 배포하며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는데 이때 블라디미르 레닌을 면담하고 돌아오던 여운형을 만났다. 그는 여운형과 국제 정세 및 이에 대처하는 한인의 입장을 교환하면서 이러한 시기일수록 민간 지도자가 나서서 우리도 민주 정부를 세우고 그것을 구심점으로 하여 새로운 독립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로 가서 민주공화제를 전제로 한 정부 구성을 추진했다.
1919년 3월 10일 상하이에 도착하고 베이징에서 이광, 이시영, 이회영 등과 만나 민주 공화 정부 수립에 관한 문제를 논의했다. 3월 20일경 이회영의 집에서 박용만, 조성환 등과 함께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계획을 의논한 결과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론이 내려졌고 상하이로 돌아와 30여 명 민족지사들과 논의했다. 이후 동지들과 함께 연락사무소를 프랑스 조계 내 보창로 329번지에 정하고 구체적인 문안 작성에 착수했다. 이때 먼저 입법 기관인 의회를 구성해 헌법, 헌장, 서고문, 강령, 정강 등을 정하고 나서 정부 부서 각료를 내정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22호에서 국내 8도 국민 대표와 소련, 미국, 중국 등지까지 국민 대표를 모두 망라하여 구성된 임시 의정원이 개최되었다. 정부 조직을 위한 임시사무소에는 현순이 총무로 있었는데 그는 조직을 위한 선언서를 각국에 발송하였고 4월 8일 한성 임시정부로부터 각료 명단과 임시 헌법 초안을 가져옴으로써 보다 구체적인 임시정부 수립을 진행시켜 나갔다. 4월 9일 손정도 등 제의로 각 지방 대표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 의정원 의원 29명을 선출하였다. 1919년 4월 10일 프랑스 조계 내 김신부로 22호에서 제1회 임시 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어 4월 11일 오전까지 진행되었고 이 자리에서 의장 등을 선출하였다. 논의 끝에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손정도가 부의장, 서기에는 이광수와 백남칠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리하여 초대 의장이 된 이동녕은 동지들과 협의 끝에 국호는 대한민국, 연호는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또한 관제를 의결한 뒤 전문 10조로 된 임시 헌장을 선포하고 선서문과 정강을 통과시킨 뒤 각료를 선임하여 국무원을 조직했다. 이리하여 1919년 4월 13일 이동녕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대내외에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당시 내각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 때 최고 지도자로 추대된 국무총리 이승만이 미국 워싱턴 D.C.에 체류하면서 오지 않자 4월 30일 국무총리 대리로 취임했다. 또한 상하이에는 안창호, 이동휘 등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며 신규식은 병석에 누워 있어 행정 기능이 거의 가동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이시영 법무총장이 임시정부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그도 얼마 뒤 신병 치료차 베이징으로 갔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단일 통합된 뒤 재무총장을 맡아 상하이로 다시 부임해 오게 되었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4월말 경 의장 자리를 부의장인 손정도에게 위임처리하고 자신은 국정을 돌보는데 진력했다. 5월 25일 안창호가 내무총장에 취임하기 위하여 군자금을 가지고 미국에서 와서 임시정부의 임무를 개시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안창호가 관장하는 내무부는 1920년 1월 중순부터 연통제를 실시하여 업무 연락, 기밀 문서 수발, 군자금 조달 등 국내외를 통제하고 통할하였다. 교통부에서도 이에 앞서 교통국을 설치하여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통신 정보 수집, 검토, 교환, 기밀 문서 수발 등의 업무를 전담하면서 역시 국내외를 활발히 연락하고 통할하였다. 그러나 이 두 조직은 2년 후 일제에게 발각되어 관련 인사들이 모두 체포되면서 더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19년 6월 중순 재무부에서 부령 제1호로 인구세 시행 세칙을 공포시행한 뒤 7월에는 정부령 제3호로 임시 징수령을 공포하여 4천만원 독립공채 발행을 계획하였다. 이는 재정 타개를 위한 임시 조치로 인재 양성할 무관학교를 세우는데 필요한 재정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서전서숙 경험을 살려 중국 운남강무당, 보정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 등에 한인 교포 청년들을 입소해 훈련하게 하였으며 7월 2일 안창호, 이광수 등 발의로 임시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 4권을 펴냈다. 한편 상하이 임시정부 인사들은 각지에 설치된 임시정부의 지도자들과 회합을 갖고 단일화를 위해 노력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소련 대한국민의회 정부, 서울 한성정부, 기호 대한민간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 평안도 신한민국정부 등이 각기 수립될 단계에 있었다. 이에 상하이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하여 대한국민의회 정부와 한성정부 요인들이 통합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1919년 9월 2일 임시 의정원 결의에 따라 임시 헌법 개정을 공포했고 9월 11일 국무원 권한이 강화된 체제의 신내각이 탄생했는데 이 때 다시 내무총장에 임명되었고 국무총리 대리는 사임했다. 국호는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확정하고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보창로 329호에 쑨원 심복인 두월생의 거중조정으로 청사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이 때 성립된 신내각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걸었던 기대도 좌절되자 경무국장인 김구를 비롯한 박은식, 신규식, 엄항섭, 여운형, 이시영, 이유필, 조성환, 조완구 등과 자주 협의하면서 고국의 동포를 위해 무엇을 할지 방략을 모색했다. 그는 이 때마다 민의를 기반으로 공리를 창명하고 공익을 증진하는 등 민주 정부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강조하였으며 그 구심점이 되는 존립 가치, 행동 방향, 목표가 확고하게 정돈되어 있고 그것을 위해 모두 신명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 대업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1921년 12월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하여 상하이에 도착하여 약 6개월간 머물렀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무총리인 이동휘와 심한 갈등을 빚었으며 급기야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퇴하고 러시아로 떠나 버렸고 김립 피살 사건 여파로 좌익 세력이 대거 이탈해버렸다. 더욱이 이승만이 미주 지역으로부터 보내는 군자금을 전액 송달하지 않고 있는 등 독단적인 일처리에 대한 문제가 불거져 분란이 일어났다. 결국 1925년 이승만은 강대국에 대한 위임 통치 청원 등 문제까지 지적되어 탄핵을 받고 대통령직을 박탈당하였다. 이 시기 이동휘 후임으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고 내무총장을 맡았다가 이승만이 도로 미국으로 떠나버린 뒤 사실상 행정부 수반으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노동국총판이었던 안창호마저 사퇴하면서 불신이 팽배해졌으며 이후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주장과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민족 최고 기구를 창조하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는데 대표적인 개조파로는 김마리아, 안창호, 여운형 등이 있었고 창조파로는 김규식, 박은식, 신숙, 신채호 등이 있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개시되었고 1923년 1월 120여 지역과 단체에서 120여 명 대표 인사가 상하이에 집합하여 약 5개월간 60여 차례 회의를 진행시켜 나갔으나 성과없이 결렬되었고 수많은 인사들이 떠났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22년 김홍서, 노백린, 도인권, 윤기섭, 이시영, 이유필, 조소앙, 차이석, 현순, 홍진 등 50여 명 지사들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했다.
1924년 4월 정식으로 국무총리에 취임했고 김구가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는데 1924년 6월 군무총장까지 겸임했다가 1924년 9월 장기 궐석중이던 대통령을 대행하여 최고 영도자를 맡아서 민족 진영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이 때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홍승균을 시켜 이동녕을 찾아가 일본에 귀화할 것을 권한 일이 있었지만 홍승균의 뺨을 치고 내쫓아 버렸다. 이로 인해 부친이 원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5년 2번째로 임시 의정원 의장이 되었으며 대통령 대리로 집무하다가 박은식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줬다. 그러나 6개월이 못된 1925년 11월 박은식이 병사하면서 난항을 겪었다. 이후 국무령 중심 지도 체제로 제2차 개헌이 이뤄졌고 1926년 8월 국무령이 되어 법무장도 겸임하면서 효율적으로 운영하고자 전력을 기울였다. 몇 달 후 국무령 직을 이상룡에게 넘겼지만 이상룡은 얼마 안되어 사퇴했으며 양기탁에게 국무령 직이 넘어갔지만 거부당했고 뒤이어 후보로 거론된 안창호도 사절했다. 이후 홍진이 맡았지만 역시 오래 버티지 못했는데 이에 김구를 찾아가 맡아줄 것을 제안했지만 김구는 자신의 출신 배경이 미천하니 수반이 된다면 임시정부의 위신을 격하시킬 것이라며 거절했다. 이에 임시정부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많은 기여를 한 김구가 맡지 않는다면 문을 닫아야 한다며 호소했고 결국 김구는 수락했다. 1926년 12월 14일 김구를 선출하는데 성공하고 1927년 4월 제3차 개헌에 참가해 일종인 집단 지도 체제인 국무위원제를 채택했다. 제3차 개헌안은 1927년 1월 15일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발의되었고 1927년 2월 5일 50개조로 축조 통과되어 3월 5일 공포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국무위원으로 정부 내각을 조직하되 주석은 그대로 존치하나 국무회의에 장이 되는 정도이고 국무위원의 호선에 따라 교대로 집무하는 것을 원칙으로 규정하였다. 어떤 특정인을 어느 기간 동안 정부 최고 책임자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진급 인물을 망라하여 국무위원회를 구성하고 정책을 수행하게 했다. 이렇게 개편된 임시정부의 각료는 다음과 같다.
주석 이동녕
내무장 홍진
외무장 조소앙
군무장 지청천
법무장 이시영
비서장 차이석
참모총장 유동열
부임소 조성환, 송병조, 조완구
국무위원 이동녕, 김구, 이시영, 조소앙, 홍진, 송병조, 유동열, 조완구, 조성환, 차이석, 지청천
내무장 홍진
외무장 조소앙
군무장 지청천
법무장 이시영
비서장 차이석
참모총장 유동열
부임소 조성환, 송병조, 조완구
국무위원 이동녕, 김구, 이시영, 조소앙, 홍진, 송병조, 유동열, 조완구, 조성환, 차이석, 지청천
3차 개정 헌법은 1차 개정 헌법보다는 소규모지만 2차 개헌 때보다는 현실성이 보완되었으며 민주공화제적인 민중 의식 성격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개헌은 모든 국무위원의 평등한 권리와 책임이 주어짐을 골격으로 하고 있어 종래의 모든 분란을 일소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민주적인 지도 체제로 전환이 이루어진 셈이 되었다. 또한 국무위원이 국무를 총괄하고 임시 의정원에 대해 책임을 지며 2개월 이상 집무하지 않았을 때에는 자연 해임된다는 엄격한 규정을 두었다.[12] 제3차 개헌을 통한 지도 체제 개편으로 주석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자 임시정부가 침체 상황을 극복하고 공고한 기반 위에 올라설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모든 역량을 집결시켰으며 이 무렵 민족 유일당 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지탱할 정당을 구상했다. 1930년 김구, 안창호, 엄항섭, 이시영, 조소앙, 조완구 등과 함께 상하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했으며 민족 진영의 쇄신을 도모하고 파벌적, 지역적 분열 등을 청산하여 해외 독립운동 전선 통합을 기하고자 하였다.
1931년 만보산 사건이 벌어진 후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김구와 협의한 뒤 일제 수뇌부와 친일파를 사살하고 침략 기관을 파괴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했으며 그는 김구가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김철, 조소앙, 조완구 등과 함께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으로 하여금 천황을 처단하려 했지만 실패했지만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훙커우 공원 의거가 성공하면서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호의적으로 변했으며 이후 중국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 감시, 검거가 강화되면서 임시정부가 위태로워지자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가흥, 항주 등지로 옮겼다. 그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요직을 사임한 뒤 3년간 민족 진영 단합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 잡고 정당 통합 운동에 전력투구하였다. 이에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의 이동녕 외에 의열단, 한국혁명당 등 각 단체의 대표가 모여 연합을 통해 대일 혈투를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에 합의함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1935년 7월, 김두봉 일파와 김원봉의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미주 대한독립당 등이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시키면서 임시정부 운영을 위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조소앙 등이 한국독립당을 해산하고 임시정부를 떠나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하면서 임시정부는 기능이 정지될 지경에 이르렀다. 1935년 11월 임시정부 주석이 되자 송병조, 양우조, 엄항섭, 이시영, 조소앙, 차이석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한 후 당수가 되었으며 임시정부의 공보와 기관지 <한성(韓聲)> 등을 발행 배포하여 지속적으로 한국인의 독립 사상과 광복 의욕을 북돋는데 진력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임시정부는 난징, 가흥, 진강, 장사, 광주, 유주를 거쳐 기강으로 피신했다. 고령의 나이에 피신 생활을 전전하면서 심한 고생을 겪었지만 그 와중에도 임시정부에 활력을 불어넣을 방안을 모색했다. 1937년 11월 25일 김구, 송병조,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차이석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고문을 작성하여 국내외 동포들에게 민족적 단결과 최후의 일각까지 완전 자주 독립을 쟁취할 수 있게 모든 민족적 힘을 집중하자고 호소했다. 1939년 71세의 고령으로 임시정부에 4번째로 국무위원회 주석이 되어 김구와 함께 전시 내각을 결성하였으며 1939년 11월 시안에 조성환을 주임으로 한 대한군사특파단을 파견하여 무장 세력 양성을 착수하게 했다. 1939년 12월 22일 김구, 이시영, 조성환 등 국무위원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차 포고문을 내외에 발표했는데 내용은 1905년 이후 한민족이 일제와 싸워온 내력을 설명하고 각 독립 투쟁 영역과 처절하였던 전쟁 장면을 재현하면서 새로운 독립운동 계획을 세웠으니 국내외 동포들이 적극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역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사투를 벌인 여파로 극도로 쇠약해져서 급성 폐렴 증세에 걸렸으며 결국 1940년 3월 13일 쓰촨성 기강에서 향년 72세로 사망했다. 이동녕 선생은 당시 임시정부가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여러 당으로 분열되어 의견 다툼이 있던 것이 안타깝게 여겼고 이에 죽기 직전 "광복을 하고자 하면 3당 합당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실제로 충칭에서 3당이 합당되었다. 유해는 기강에 매장되었다가 1948년 봉환식이 거행되면서 국내로 이송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 1969년 개봉한 영화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배우 김동원이 연기했다.
- 1979년 KBS <일요사극 맥>을 통해 <벼랑 위의 파수병>이라는 제목으로 이동녕의 일대기를 드라마화했는데 극본은 김항명, 연출은 장형일 PD가 맡았으며 배우 김흥기가 연기했다.
[1] 현 중국 충칭시 치장구(綦江區).[대리] 본인이 취임거부 하였다.[대리] 본인이 취임거부 하였다.[4] 태자첨사공파 25세 녕(寧) 항렬. 지파는 삼척공파. 연원부원군 이광정(李光庭, 1552~1629)의 후손이다.[5] 19세 때 북간도에서 풍토병으로 사망[6] 석오 선생의 동생에게 입양 되었다.[7] 대통령에서 탄핵된 것은 1925년이나, 1922년 자신을 대통령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며 상하이를 떠난 이후로는 실질적으론 임시정부를 분열시킨 존재였다.[8] 1891년(고종 28)에는 종6품 부사과(副司果), 6품 문신 겸 선전관(文臣兼宣傳官), 종5품 부사직(副司直)·홍문관 부교리(副校理), 정5품 교리(校理), 사헌부 지평(持平) 등을 역임했고, 1892년에는 종6품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정6품 사간원 정언(正言), 정5품 사간원 헌납(獻納)·시독관(侍讀官), 정4품 사헌부 장령(掌令), 1893년 종6품 서학 교수(西學敎授)·남학 교수(南學敎授), 정3품 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 1894년 종6품 동학 교수(東學敎授), 종4품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종3품 사헌부 집의(執義), 정3품 장악원 정(掌樂院正), 갑오개혁 이후인 1895년 탁지부 재무관(財務官), 1896년 의성군수, 1897년 영해군수 등을 역임했다.[9] 2002년 이연희 교수가 출간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이동녕과 그 시대>에 따르면 어렸을 때 자신의 집과 조부의 집을 왕래하면서 고향 산천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조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키웠다고 한다.[10] 1897년(고종 34) 12월 7일 영해군수에 임명되어#, 1899년 6월 10일 해임되었다.#[11] 유영익 교수 저서 <젊은 날의 이승만>에 따르면 이때 옥중에서 박용만, 신홍우, 이승만 등과 교분을 맺고 구국 운동 의지를 끝까지 이어가기로 맹세했다고 한다.[12] 훗날 윤봉길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추적을 피해 항저우, 가흥 등지로 피신하다가 2개월 결석하면서 규정에 저촉되어 자동 사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