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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2년 2월 4일 |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남지리[1] (現 황해남도 재령군 남지리) | |
사망 | 1926년 12월 28일 (향년 34세) |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 |
묘소 | 황해남도 재령군 |
국적 | [[틀:깃발| (1897~1910) [[틀:깃발| ]][[틀:깃발| ]][[일제강점기| ]](1910~1926) | ]][[틀:깃발| ]][[조선| ]](1892~1897)
본관 | 나주 나씨[2] |
부모 | 아버지 나병헌 |
학력 | 신흥무관학교 (졸업) 한단학원 (졸업) |
의거 |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폭탄 투척 |
서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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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나석주 의사의 유언
나석주 의사의 유언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26년 일본의 경제 착취 기업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사옥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찰에게 10발 가량의 총상을 입자 가슴에 총을 쏴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체포되어 미와의 심문을 받다가 조선총독부 병원 수술대에서 치료를 거부하고 순국했다.
2. 생애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남지리에서 나병헌(羅秉憲)[3]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25년간 나석주의 가문이 소유한 토지였는데 기름진 땅이라 농작물이 무럭무럭 자랐으며 나석주도 어릴 적부터 집안의 농사를 돕고 살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세워지면서 나석주의 집안은 땅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일제의 지독한 수탈에 한 가족이 1년을 먹기도 힘들 정도로 사정이 나빠지자 격분한 나석주는 재령군사무소로 따지러 갔지만 일제는 콧방귀를 끼며 땅을 강제로 빼앗아 일본인에게 양도했다. 이 사건으로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농부를 때려 치운 뒤 명신학교를 수학하고 북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서 항일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때 군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황해도 평산군에서 주재소 일본 경찰과 면장을 사살하고 북쪽 지방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요인 암살과 군자금을 모으고 다녀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에 일제는 나석주를 잡기 위해 군대 병력을 증강시켰는데 이런 움직임을 감지한 나석주는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비 담당으로 일하였다. 이후 국내에 돌아와 의거할 기회만 노리던 나석주는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창숙의 요청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임무를 부여받고 중국인 '리중거'로 위장하여 입국했다.[4]
한동안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중국인 거주지에서 중국인 행세를 하면서[5] 기회를 엿보던 나석주는 거사일인 1926년 12월 28일 권총을 신문지로 감싼 채 겨드랑이에 끼고 폭탄을 지닌 채로 명동으로 향했고 을지로 일대를 휘저은 거사를 일으켰다.
먼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6] 로비에 들려 중국인 행세를 하며 경비 태세를 탐문했다. 이후 맞은편에 있는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7]에 들러 연말이라 사람이 바글바글[8]한 틈을 타 정신없이 은행 업무를 보던 은행원들 뒤로 폭탄을 투척했지만 폭탄은 불발되었고[9] 놀란 직원들과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거리의 사람들이 조선식산은행 앞으로 몰렸으나 나석주는 태연하게 "아. 쓰미마셍."이라고 하고 조선식산은행 밖으로 자리를 떴고 이후 은행 직원이 폭탄임을 깨달아 종로경찰서에 신고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조선식산은행으로 몰리자 상대적으로 경비가 한산해진 건너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가서 신문지로 숨겼던 권총으로 1층 수위실의 일본 기자부터 사살했다. 직후 2층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을 권총으로 사살했는데 먼저 총소리를 듣고 계단을 올라오는 직원 1명을 사살했고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로 가서 오모리 차장과 아야다 과장을 사살했으며 옆 기술과로 들어가 권총을 마구 난사하고 폭탄 1개를 던진 다음 아래층 현관에 있던 일본인 2명에게 권총을 쐈다. 살육전을 벌이다 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되었고 탈출할 때가 됐다고 느낀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나와 거리를 내달렸지만 출동한 일본 경찰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석주는 먼저 만난 경기도 경찰 경부 다하타 유이지를 사살하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인들을 사살하며 도주했다.[10] 그러다 체력이 다했다고 느꼈는지 전봇대에 기대어 가슴에 총을 쏴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11] 고등계 형사로 악명이 높았던 미와의 심문을 받던 중 자신이 나석주임을 밝히고 순국했다. 사후 나석주의 유해는 가족들이 서울로 와서 인수해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의 묘지에 매장했다.
3. 기타
- 진남포(현재 남포시)에서 살고 있던 나석주의 아들 나응섭이 만주로 망명을 시도했지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진남포로 끌려갔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으나 북한에서 나응섭에 대해 언급이 없던 것으로 보면 광복 이전에 사망한 듯하다.
-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 건물이 있었던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하나금융지주 본사 사옥(옛 외환은행 본점) 앞에 나 의사의 동상이 있는데 '의사'가 아니라 '열사'로 되어 있다. 열사는 비무장[12], 의사는 무력으로 항거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석주는 '의사'라고 하여야 맞다. 향후 시정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진다.
- 김구와의 사이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석주는 아내를 잃고 괴로워하던 김구 선생의 생일을 챙기기 위해 자신의 옷을 전당포에 맡기고 그 돈으로 고기와 찬거리를 사서 김구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고, 바로 그 이듬해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의거로 유명을 달리하자 김구 선생은 평생에 다시는 자신의 생일을 챙기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백범일지에 기록해 놓을 정도.
4. 대중매체에서
- 2002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손종범[13]이 연기했다. 제3화에서는 유태권과 함께 등장해 경찰들에게 쫓기던 어린 김두한을 구해주고 인연을 맺는다. 이후 역사대로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폭탄과 권총으로 일본인들을 처단하고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전신이 벌집이 되어[14] 제압된다. 신원 확인을 위해 임동호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미와의 지독한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시간을 끌다 끝내 서거한다.[15]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으로 작가인 이환경이 김두한에게 항일 포장을 씌우기 위함과 동시에 시대적인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아무 관련없는 두 사람을 엮은 것이며 유태권도 가상의 인물이다. 극 중에서 보여주는 사격술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볼 수 있는데 상하이 조와 대등할 정도다.[16] 1 : 다수의 총격전에서 엄폐물의 뒤에서 잠깐 고개를 든 경찰을 여러 명 쏴 죽여버리는 초인급 사격 실력을 발휘하는데 몇 발 피격이 되고도 계속해서 총격전을 이어 나간다.
[1] #[2] #[3] 1909년 서북학회(西北學會) 재령군지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4] 연이은 의열단의 의거로 항구에 경비가 삼엄하여 6개월간 입국 타이밍을 보았다고 한다.[5] 6년 이상 중국에 체류하게 되면서 제대로 된 임무를 못 해 보고 중국어만 늘었다고 자조 섞인 한탄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했다.[6] 현재 하나은행 을지로2가 본점 자리.[7] 이전 이름은 농공은행(農工銀行)으로 1918년 농공은행 지점이 통합하여 식산은행이 되었다. 주요 업무는 일본인들의 사업자금, 일본인들의 식민지 정착을 위한 농토 구입자금공급 등이였으며 특히 20년대 산미증식계획에서 각종 수리자금이나 총독부대행 수탈책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8] 1926년 12월 25일 다이쇼 덴노가 사망하여 임시 공휴일이 지정되었던 것도 한몫했다.[9] 합법적으로 무기를 소지할 수 없는 신분상 폭탄 반입은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는데, 당연히 폭탄들이 제대로 관리가 될 리 만무했고 때문에 폭탄이 습기를 먹는 등 고장나는 일이 적지 않았다.[10] 당시 총을 3발을 발사했다.[11] 당시 22발이 남았었다고 한다.[12] 을사조약을 비통해하며 자살한 민영환, 헤이그 특사 3인방, 3.1 운동의 유관순이 대표적이다.[13] 손종범은 나석주와 외모로도 닮은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 2006년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박창주의 6촌 동생 역으로 박창주와 더불어 악질 친일파 연기를 했다.[14] 미와의 사격 중지 명령에도 순사들이 조총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 탓에 병원으로 옮겨졌음에도 끝내 운명했다.[15] 미와 경부가 나석주를 몇 번이고 닥달하며 불라고 했지만, 나석주는 끝까지 말하지 않고 사망한다. 이에 미와는 크게 분노한다.[16] 아마 실제 역사에서 같은 의열단 소속이었던 김상옥 의사의 사격술 및 실제 거사를 부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상옥 의사는 나석주의 의거 3년 전인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의거를 일으켰고, 심지어 폭탄이 제대로 터지면서 아수라장으로 만든 후 놀라운 사격술과 은신으로 10일을 버티다가 최후의 항거에서는 일본 경찰들에게 총 10발 이상의 총알을 맞고도 초인적인 힘으로 3시간 반을 더 버텼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