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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8년 3월 4일 |
청나라 푸젠성 민허우현[1] | |
사망 | 1943년 8월 1일 (향년 75세) |
중화민국 충칭[2] | |
재임기간 | 난징 국민정부 제3대 주석 |
1932년 1월 1일 ~ 1943년 8월 1일 | |
자 | 자초(子超) |
호 | 장인(長仁) |
학력 | 학령영화중학(鹤龄英华中学) |
최종 당적 | |
종교 | 유교(성리학) |
육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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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의 관료, 중화민국의 혁명가, 정치인, 국가주석이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68년 푸젠성 민허우 현(閩侯縣)에서 태어났다.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교회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884년에는 건너편의 타이완성으로 옮겨가 타이베이 전보국에서 근무하다가 청일전쟁으로 타이완이 일본에게 할양되자 일본에 항거하는 게릴라전을 수행하다가 1902년에 대륙으로 귀환, 상하이의 강해관 세관에서 일했다.이후 태평양을 횡단해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던 중, 1905년 쑨원이 도쿄에서 결성한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여 정치에 발을 들였다. 1909년 귀국하여 장시성 주장(九江)에서 비밀리에 무장 조직을 결성하고 1912년 신해혁명 때 장시성의 지휘를 맡았으며 1912년 1월 난징에서 임시참의원이 설립되자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2.2. 호법운동
1912년 중국국민당 창당 이후 가입했고 1913년 총선에서 4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13년 위안스카이가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키자 강경한 무력 토벌을 주장했고 그해 7월, 쑨원이 대항해 일으켰던 계축전쟁에 가담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쑨원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다. 1914년 겨울에는 중국국민당의 전신인 중화 혁명당의 미국 지부 총 지부장에 선출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했다가 전국적인 저항인 호국전쟁이 일어났다. 위안스카이는 제제 취소 후 급사하고 리위안훙이 국회를 부활시키면서 호국전쟁은 끝났고 린썬은 쥐정 등과 함께 구 국민당의 강경파인 객려파를 영도하였다.국회의 수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장훈복벽으로 선통제가 복위하자 강제로 해임당했다. 복벽 진압 이후 돤치루이가 국회와 약법 회복을 거부하자 1차 호법운동이 벌어졌고 1917년 호법전쟁이 일어나 광저우에서 쑨원이 군 정부를 수립하자 광저우로 가 외교부장에 임명되었고 쥐정 등과 함께 민우사를 조직, 쑨원을 옹호하며 북방과의 화의를 거부하고 강경한 무력토벌을 동의했다. 쑨원 축출 이후 1918년 6월 12일 참의원 의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익우사와 연합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정, 부총통 선거를 실시하려 했으나 천춘쉬안의 정학회의 방해로 실패했고 정학회의 전횡에 불만을 품어 중의원 의장 우징롄과 함께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의 쑨원과 합류했다.
1920년 2차 호법운동으로 2차 광동 군정부가 수립된 후 민우사 요인들을 거느려 호법정부에 합류, 1922년에는 복건성 성장(省長)이 되었으나 얼마 안 가 사임하고 건설부장이 되었다. 1922년 영풍함 사건 이후 임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고 직예군벌들이 옹립한 리위안훙 총통이 구 국회 회복을 선포하면서 참의원 의장으로 거론되었으나 1919년 보선 의원의 자격을 취소하게 되면서 1917년 선거에서 당선되었던 왕가양이 의장이 되었다.
2.3. 국민혁명
1924년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대회 주석을 맡았다. 1924년 1차 국공합작의 현장에 있었으며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 성립 이후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보수파 혁명 원로라는 부담스러운 입지 때문에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의 견제를 받아서 8월의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또 다른 원로인 쩌우루와 함께 국민혁명의 취지를 화북에 통보하라는 구실로 외교대표단에 임명되어 사실상 베이징으로 추방되었고 이에 분노하여 베이징에서 국민당 보수 우파들을 규합하여 국공합작의 중단을 요구하는 서산회의를 개최, 서산회의파(西山會議派)를 구성하여 상하이에서 독자적 당중앙을 차렸다.1924년 11월 24일 임시 집정에 취임한 돤치루이가 불평등조약 철폐라는 쑨원의 염원을 저버리고 열강과 매국적 조약을 체결하는가 하면 1925년 2월, 쑨원의 국민회의 소집을 무시하고 선후회의를 개최한 후 선후회의 이후 퇴진하겠다는 공약을 어기고 계속 정권을 연명하려 하자 베이징의 지식인들을 규하하여 돤치루이 타도 운동을 전개했으며 1925년 11월, 궈쑹링이 반봉사건을 일으키자 이를 옹호하고 격려의 전보를 보냈으며 관동군이 궈쑹링을 방해하자 이에 항의하는 뜻을 일본 공사관에 전달했다. 린썬에 대해 광저우 중앙은 서면으로 반성을 촉구하고 만약 2개월 안에 따르지 않으면 제적한다는 처분을 내렸다. 린썬은 이에 따르지 않았으므로 결국 광저우 당중앙으로부터 제명되었다.
1926년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환영하고 대표를 파견하려 했으나 천궁보 등이 대표가 오면 체포하겠다는 강경한 반응을 보이면서 그만뒀다. 1927년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처음에는 이를 환영하였고 영한합작에 참여했으나 장제스와 왕징웨이가 물밑으로 합작하면서 서산파는 나가리되었다. 하지만 린썬의 경우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1928년 10월 8일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에서 국민정부 위원 겸 입법원 부원장에 선출되었다.
2.4. 중화민국 정부주석
1929년 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적을 박탈하기로 했던 광저우 당중앙의 처분이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1931년 2월, 장제스가 탕산 사건을 일으켜 입법원장 후한민을 감금하자 광동파, 개조파, 서산회의파가 연대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켜 장제스에게 대항했다. 린썬 역시 후한민의 감금에 반발하여 4월 30일 중앙감찰위원 등택여 등과 함께 장제스를 탄핵했다.
1931년 6월 1일 훈정 시기 약법의 반포 이후 6월 13일 3기 5중전회에서 입법원장에 선출되었다.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결국 장제스가 12월 15일 하야하자, 12월 28일 4기 1중전회는 린썬을 주석, 탕사오이 등 33명을 국민정부위원, 쑨커를 행정원장, 천밍수를 행정원 부원장, 장췬을 입법원장, 다이지타오를 고시원장, 우차오수를 사법원장, 쥐정을 사법원 부원장 등으로 선출했다. 린썬은 1932년 1월 1일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했고 쑨커 내각이 출범했으나, 쑨커는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와중에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임했고 장왕합작에 따라 행정원장에 왕징웨이, 군사위원장에 장제스가 취임하였다.
이후 1935년까지 국민정부 주석으로 임기를 수행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장제스와 왕징웨이, 그 중에서도 장제스에게 있었고 린썬은 난징에 있는 국민정부(후에 총통부)에 발도 들여 놓지
린썬과 장제스 |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대국민 연설을 하면서 국민들의 지지와 결집을 호소했다. 11월 16일, 충칭으로 이동하기 직전 장제스에게 자신은 이미 늙었으니 살아서 다시 난징을 밟기 어려울 것이라며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수집품은 박물관에 기증하고 현금은 양자와 양손에게 주며 은행예금은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부탁하고 다음날인 11월 17일 충칭으로 올라가는 군함에 올라탔다. 12월 26일, 충칭에 도착한 후 국가주석으로 정무를 보았다.
1938년 왕징웨이 공작에 포섭된 왕징웨이가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 린썬에게 난징으로 돌아와 일본에 협력할 것을 촉구했지만,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충칭에서 항일전쟁을 수행했다.
2.5. 사망
이후 1943년 5월 12일, 임시 수도 충칭에서 신임 캐나다 대사와 만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던 중 변을 당하고 만다. 린썬의 관용차는 일찍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물한 차로, 매우 튼튼한 차라서 평소에 사고가 없었고 운전사도 능숙한 인물이라서 그간 별일이 없었으나 그날 린썬의 일정이 조금 늦은 관계로 린썬의 운전사가 다소 빠르게 운전했는데 회전을 하던 도중에 대형 트럭을 피하려다가 가로수를 박고 사고가 발생했다. 린썬은 머리를 크게 부딪혔고 처음에는 별 일 없다고 해서 일정을 계속 수행하려 했으나 기절하여 병원에 옮겨졌고 결국 뇌출혈로 사망했다.후임 주석은 장제스였다. 장제스가 그의 국장에 참석하느라 카이로 회담 일정이 늦어졌다. 그의 시신은 충칭에 안장되었는데 충칭에 있는 유일한 국가 원수의 묘라고 한다. 하지만 린썬의 묘는 문화대혁명 당시에 홍위병들의 손에 폭파되고 시신은 홍위병들이 끌어내서 불살라버렸다. 1979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묘가 복원되었다.
충칭 통신 대학 근처의 린썬의 묘다. 현재는 충칭 시의 보호를 받는 문화재이다. |
읽어보면 알겠지만 신해혁명에서 중일전쟁까지 정치적 격동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다. 언뜻 보기에는 갑툭튀한 허수아비로 보이겠지만 나름대로 험난한 인생 역경을 헤쳐오면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의 첫 정치경력이 청나라 관리였을 정도였다.
3. 주요 경력
난징 국민정부 역대 주석 | |||||||
2대 | → | 대행 | → | 3대 | |||
장제스 | → | 린썬 (1931년 12월 15일 ~ 1932년 1월 1일) | → | 린썬 | |||
대행 | → | 3대 | → | 대행 | |||
린썬 | → | 린썬 (1932년 1월 1일 ~ 1943년 8월 1일) | → | 장제스 |
난징 국민정부 역대 입법원장 | |||||||
1대 | → | 2대 | → | 3대 | |||
후한민 | → | 린썬 (1931년 3월 2일 ~ 1932년 1월 1일) | → | 장쥐 |
4. 기타
- 실권자 장제스의 위상이 워낙 독보적이어서 린썬은 명목상 국가원수임에도 묻혔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그의 존재가 별로 조명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원수로 있던 당시에도 그를 몰라보는 사람이 많아서 군통의 첩보요원이 불경스럽게 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당시 중국에서 나오던 평가 중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길 좋아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의 조언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뭔가 애처로운 이야기가 있다.
- 친자식이 없어서 동생의 아들을 입양했다고 한다.
- 염소 수염이 인상적인 것으로 유명했다.
* 서거 후 중국 각지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부 도로명을 린썬로(林森路)로 개명했다. 이 중 대륙에 있던 린썬로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전부 개명되었으며, 현재는 대만 주요 대도시에 린썬로가 있다. 각 도시들마다 있는 중산로(中山路)와 평행하는 도로로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타이베이의 林森北路, 林森南路가 있다.
- 타이난에는 2026년 린썬역(林森車站)이 개업할 예정이다. 역명 자체는 이름을 직접 따온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딴 도로명 林森路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쨌거나 도시철도가 아닌 일반철도로는 최초로 사람 이름이 들어간 기차역이 된다.
5. 매체에서
- 게임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 고증을 살려서 중국의 국가원수로 나온다. 당연히 중국 유저들의 반응은 "이 분 누구세요?"였다.(...) 그나마 호이4에선 국가 지도자가 장제스로 나오고 린썬은 국가안정도 15%를 부여하는 장관진이 되었다. 고증대로라면 1943년에 교통사고로 죽어야 했지만 루스벨트나 아타튀르크 사망이벤트는 있어도 린썬 사망 이벤트 따위는 없다.(...)[5] 그런데 같은 장관인 독일의 루돌프 헤스나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미하일 칼리닌, 니콜라이 예조프는 사망 이벤트가 있다. Eight Years' War of Resistance 모드는 다른 건 다 동일하지만 1943년에 린썬 사망 이벤트가 고증되었다.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안정도 확보에 안달해야 하는 중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뼈아픈 타격이다.
6. 참고문헌
- 신해혁명사, 민두기, 지식산업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국민혁명 초기 국민당 우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김영신, 단국대학교 동약학연구원.
- 北伐 前後 中國國民黨의 內紛 : '上海中央'의 활동과 廣州中央의 대응을 중심으로, 김영신, 중국근현대사연구 4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당무에 관한 결의를 통해 본 서산회의의 본질, 유지원, 김영신, 중국학연구 58.
- 訓政時期約法 제정 논란과 ‘蔣·胡合作’의 파국, 김영신, 동양학 42권 42호,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원.
- '湯山事件' 後의 政局과 蔣介石의 對應, 김영신, 중국학연구 50권 50호,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53호,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55호,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61호, 중국학연구회.
7. 관련 문서
7.1. 사건
- 청일전쟁
- 신해혁명
- 쑹자오런 암살 사건
- 선후대차관 사건
- 계축전쟁
- 홍헌제제
- 호국전쟁
- 부원지쟁
- 장훈복벽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2차 호법운동
- 영풍함 사건
- 1차 국공합작
- 선후회의
- 국민당의 1차 동정
- 1925년 객군 반란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 국민당의 2차 동정
- 서산회의
- 중산함 사건
- 국민혁명
- 편견회의
- 반장전쟁
- 탕산 사건
- 1차 양광사변
- 만주사변
- 제1차 상하이 사변
- 열하사변
- 서안 사건
- 중일전쟁
[1] 지금의 푸젠성 푸저우시 민허우현(閩侯縣)[2]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충칭시[3] 다만 본인에겐 예외였는지 생전 결혼을 여러번 했고 심지어 노년에 10대였던 수양딸을 후처로 삼았다 한다. 사실 근현대시기 중국의 지도자급 인물들은 저우언라이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여성편력이 복잡한 편 이다.[4] "장제스의 만수 무강을 기원한다"(介石之壽)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총통부를 관통하는 대로의 이름이기도 했는데, 1990년대에 대만 원주민 민족 가운데 하나인 케타갈란(카이다거란, 凱達格蘭)의 이름으로 바뀌었다.[5] 참고로 이건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이라크 왕국도 마찬가지로 1936년 시나리오로 시작하면 (소련의 침공을 받지 않는다면)1939년 4월 5일에 사망해야 하는 가지 1세가 게임이 끝날때 까지 살아있다, 단. 1939년 시나리오에는 역사대로 파이살 2세가 국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