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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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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
파일:d1jazri.jpg
천안문 앞에서 마오쩌둥 어록(소홍서)를 들고 있는 홍위병

1. 개요2. 설명3. 배경
3.1. 건국 초기 사회 불안과 대약진 운동의 실패3.2. 《해서파관(海瑞罷官)》과 조반유리(造反有理)
4. 전개
4.1. 2인자가 된 린뱌오와 몰락4.2. 4인방의 등장과 몰락
5. 문화대혁명의 내용6. 문화에 끼친 악영향7. 해외의 반응8. 문화대혁명에 대한 다른 관점9. 이야기
9.1. 영화
10. 한국과 북한11. 문화대혁명의 비극들12. 문화대혁명 부역자들13. 현대 중국에서의 인식14. 관련 인물과 사건
14.1. 관련 인물14.2. 사건 목록14.3. 기타
15. 만일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16. 관련 매체17. 같이 보기1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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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무산계급문화대혁명)[1]
the 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
당, 국가, 인민에게 건국 이래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
중국 공산당 제11기 제6차 중앙위원회 (1981년 6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약칭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파괴 운동이다. 국내에서는 간단히 '문혁' 이라고도 부른다.[2] 일명 20세기의 분서갱유[3] + 성상파괴운동. 중국 내에서는 우회적으로 십년운란 (十年动乱)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자국의 문화를, 자국의 국민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멸절시킨 전례 없는 대사건으로, 공산주의 체제의 내재적 폭력성과 경직성, 그리고 체제적 한계를 예시할 때 킬링필드, 대숙청, 고난의 행군,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과 함께 빠짐없이 언급되는 역사적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떤 수사적 과장도 아니라, 보이는 것은 홍위병마오쩌둥만 제외하고 모조리 때려 부쉈다고 보면 된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인 공자의 묘까지 때려부쉈으니 그 정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4] 이 10년 동안의 운동으로 인해 중국의 온갖 지식인들과 수천년의 문화가 모조리 희생되었으며, 그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는 기록까지 전부 없애버렸기 때문에 겨우 남아 있는 기록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나마 대표적인 것이라면 만한전석 정도일 것이다. 문화라는 말과 혁명이라는 말에는 긍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어 오해를 부를 수 있으나, 문화대혁명은 표현과 달리 사실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완전히 파괴한 초규모의 반달리즘이자 절대 반복되어선 안 될 집단 광기이다.

2. 설명

"마오쩌둥은 1966년 이념의 성전을 발동함으로써 중국 전역을 뒤흔들었고 혁명정신을 되살리려 했다. 마오쩌둥은 학교의 문을 닫아버렸고, 학생들로 하여금 홍위병이 되어 ‘부르주아 전문가’로 일컬어졌던 교사, 교장, 교수들에 대항하는 혁명투쟁을 벌이도록 선동했다. 이 혁명운동은 사회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병원에서는 의사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도록 강요당했고, 청소부들이 환자를 돌보았다. 홍위병들은 ‘자본주의의 길로 가고 있다’면서 정부와 당의 간부들을 공격하고 군부대의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를 들고 싸움을 벌였다. 1969년에 인민해방군이 질서를 회복하기 전까지 온 나라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 직전까지 치달아 있었다.”
판도라의 상자 : 중국 - 수잔 셔크(p.19~20)
"의심할 여지 없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중에 무산계급 신사조, 신문화, 신풍속, 신습관이 반드시 지주들과 기타 착취 계급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이런 부패한 것들을 대체할 것이다.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하여 떨쳐 일어선 중국 인민은 반드시 온갖 잡귀신을 쓸어버릴 것이다."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문화 혁명(文化革命)" 또는 더 줄여서 "문혁(文革)"이라고도 한다. 원래 내세운 목표는 파사구(破四舊)라 하여,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을 타파(打破)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반한 이타주의적이고 자기 희생적인 사회주의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저 역사적인 문화 검열 사건이자, 전국 단위로 실행된 대규모 반달리즘이 됐을 뿐이다.

주요 골자는 "옛 것은 모조리 숙청하자. 문화, 교육, 정치, 가족 등 모든 것을." 중국이란 넓고 오래된 나라에서 전국 규모로 일어난 이 사건의 이름은 문화’대혁명’이지만 그 실상은 문화’대숙청’이었다.

이때 일어난 파괴의 수준은 분서갱유 같은 전승국에 의한 패전국의 "문명 파괴"였다고 보면 된다. 앞서 언급했듯 모든 성공한 정치적 행위가 그러한 것처럼 문화대혁명의 명분 또한 "이제 경제, 정치 분야의 혁명이 완수되었으니, 그보다 상부 구조인 문화를 개혁할 단계다"라는 듣기 좋은 것이었으나, 문제는 이에 따라 구체제의 봉건적이고 권위적인 관료제, 위계 질서와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중국사에서는 분서갱유, 문자의 옥 등의 반달리즘이 여러 번 있었지만, 문화대혁명이 중국 문화 전체에 끼친 피해는 분서갱유와 문자의 옥을 훨씬 능가한다. 분서갱유와 문자의 옥은 적어도 자국의 문화산업까지 파탄 내진 않았다. 중국이 고전 문화 산업에선 아직까지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문화대혁명 때문에 이마저도 유교 서적을 대만이나 한국에서 역수입하고 있는 실정이고 당연히 현대 대중 문화 면에서는 엄청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사실 이 문화대혁명식 반달리즘의 진수는 문화재 파괴보다도 문화 예술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규모 린치에 있다. 주변에 문화 예술 쪽으로 종사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집에 쳐들어가서 "게으름뱅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두들겨 팬 뒤, "현실 체험"이라면서 집단 농장에 감금하고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이러니 다른 국가들이 전부 제각기 대중 문화를 발달시켜가던 20세기 후반에, 중국의 대중 문화는 그런 단계를 전혀 밟을 수가 없었다.[5]

이 사건이 이런 식으로 나름 "혁명"이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실상은 그저 포스트 아포칼립스식 대폭동 비슷하게 흘러간 이유는 이 사건이 벌어지게 된 뒷배경 자체가 처음부터 극히 불순했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이 사건을 마치 프랑스 혁명의 동양판쯤으로 선전했다. 서구 지식인들도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진짜로 이렇게 믿기도 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중국을 뒤덮었던 시기에는 중국공산당높으신 분들이라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대표적인 피해자로는 류사오치덩샤오핑을 들 수 있다. 시진핑의 고위 간부였던 아버지 시중쉰이 순식간에 몰락했고 시진핑 자신도 량자허촌으로 하방되어 토굴집에서 살면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힘든 생활을 견뎌내야 했다고 한다.[6]

마오쩌둥이 이렇게 노욕의 끝판왕으로 사는 동안의 중국의 경제성장도 침체되었다. 우선 1967년과 1968년도에 마이너스 5.7%, 4.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류사오치 시절의 경제회복의 성과를 까먹었다. 1969년과 1970년에는 홍위병이 하방되어 사회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농어촌 개발이 진행되어 16%, 1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1970년대 초중반에 경제성장이 2.3%까지 내려앉는 등 냉온탕을 오갔다. 결국 대만과 홍콩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경제성장을 유지하면서[7] 중국의 경제력을 급속히 따라잡았고 북한도 고도경제성장을 하던 시기[8]에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서 후진 개도국으로 남게 되었다. 1960년 세계경제력 순위에서 중국은 세계 5위를 차지했고 1965년에는 6위를 기록했는데,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이후로는 서독과 이탈리아, 브라질 등에게 따라잡혀서 1976년에는 10위로 떨어지게 되었고, 1981년에 13위를 기록함으로써 정점에 달했다.[9] 그것도 그나마 인구증가율이 높아서 유지했지 그게 아니었으면 얼마나 더 떨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결과적으로 문혁의 후유증이 수습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에 힘을 쓰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휩쓸고 간 직후의 풍경은 요즘 코드로 비유하면 거의 매드 맥스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상케 하는 수준이었다. 조선족 중장년층 사이에서도 당시 중국의 상태와 달리 북한은 적어도 국가로서의 형태는 갖추고 있어서 질 좋은 물건 좀 얻어올려고 북한으로 갔다는 증언을 할 정도로 막장이었다.

3. 배경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3천만~5천만 명에 달하는 중국 인민들이 아사[10]하고 경제가 나락으로 추락하는 파멸적인 결과가 초래되자 이를 주도한 마오쩌둥의 권위는 추락하여 사실상 2선으로 후퇴하면서 국정에서 배제되었다. 대신 류사오치가 국가 주석직을 승계해서 덩샤오핑과 함께 실용주의 정책을 펼쳐 중국 인민들의 호평을 듣게 되자,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자신이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될까봐 초조해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마오쩌둥은 국부로서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고, 중앙군사위 주석으로 군통수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거역하려고 하지는 못했다. 대장정과 국공내전을 통해서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신과 같은 수준의 권위를 얻었기 때문에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그 누구도 마오쩌둥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못했다. 문제는 마오쩌둥 본인이 대약진 운동이라는 엄청난 대삽질을 저질렀기 때문에 다시 정치 일선에 전면으로 나설 수 있을 만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불을 붙인 게 펑더화이였다. 1959년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이 밀어붙인 삼면홍기(三面紅旗)[11]에 대해서 "총노선은 옳았으나 대약진 운동과 인민 공사는 잘못되었다."라고 비판했다. 물론 펑더화이의 이 발언은 나름대로 마오쩌둥을 생각해서 한 충언이었으나, 초조해져 있던 마오쩌둥에게 이 소리는 굉장히 귀에 거슬리고 고깝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펑더화이의 비판은 비판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매우 완곡한 표현으로 이루어진 한 통의 개인 편지였다. 단순히 "총노선은 옳았으나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는 잘못되었다." 라는 표현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매우 상세한 설명과 예시를 들어가면서 칭찬과 부족한 점을 차분한 어조로 언급했던 것이다. 그 예로 "전 인민들의 철강생산 중에 수많은 흙으로 만든 용광로를 만들어 많은 자원과 인력을 낭비하였다. 이는 당연히 커다란 국가적 손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운동을 통하여 전국의 지질에 대하여 대규모 조사를 하였고, 또 적지 않은 관계 부문의 전문가를 양성하였으며, 많은 간부들도 이 운동 기간 중 단련을 하였다는 점은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평가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오쩌둥이 펑더화이의 비판을 받았다는 것에서 너무 감정적인 사실 왜곡은 조심해야 한다.[12] 하지만 수신인인 마오가 최고 권력자였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사실 칭찬은 한 톨도 없는 게 맞긴 했다. 전국의 지질조사나 전문가 경험치 획득 등은 그냥 있는 사실만 쓰자니 잘못했다는 말밖에 없어서 듣기 좋게 집어넣은 빈말일 뿐이고, 마오가 그걸 못 알아들을 만한 위인도 아니었다.[13]

어쨌든 마오는 이 편지를 읽고는 펑더화이에게 " 이 자산계급 민족주의자야!"라는 거의 폭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내었고, 펑은 잔뜩 쫄아 깨갱하면서 물러나야 했다.[14] 결국 이로 인해 펑더화이는 실각하고,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인 린뱌오를 펑더화이의 후임 국방부장 으로 임명하였다.

게다가 삼면홍기(三面紅旗)에 긍정적이었던 류사오치조차도 고향 후난성을 시찰한 후 상상을 초월하는 사태를 보고 경악하여 7천인 대회를 소집하여 마오의 주장인 공9과1의 평가를 정면으로 뒤집고 "천재지변이 3할이면 인재가 7할이다."라며 마오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분노한 마오는 류사오치의 말을 막으면서 실패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다고 반박했지만, 류사오치는 오히려 성공이 일부 지역에 국한될 뿐이라고 맞서고 마오를 개인적으로 만나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격렬하게 맞섰고 논쟁을 하며 싸웠다. 둘은 곧 진정하고 화해하기는 했지만 마오는 류사오치가 자신이 죽은 후에 중국에서 수정주의를 이끌 중국의 니키타 흐루쇼프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류사오치는 1959년 4월 27일 국가주석에 올라 덩샤오핑과 함께 정돈사업이라 불리는 경제개혁을 추진하며 강제적인 집단화 추진 정책이던 인민공사(人民公社)를 일부 후퇴시키고, "생산보다 구매가 더 좋고, 구매보다 대여가 더 좋다."라는 말을 남기며, 실용적인 경제정책으로 마오의 자급자족 경제정책을 대체하려 했다.

사실 마오쩌둥도 공동식사를 비롯하여 자신이 제시한 과격한 집산화 정책이 터무니없고 오히려 악효과만 많은 것임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죽고 나서 스탈린처럼 위상이 격하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있었다. 결국, 마오쩌둥의 눈에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자본주의 노선을 부활시키려는 '주자파'로 보였을 뿐이었다.

류사오치는 자신이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서 중국을 영도할 새로운 지도자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을 뒷방 늙은이로 만들고 자신이 실세가 되려 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실은 마오쩌둥의 정풍운동이나 반우파 투쟁을 벤치마킹하여 공포정책을 반대파를 숙청함으로 당내에 입지를 확보하려는 것이 류사오치의 생각이었다. 이 과정에서 류사오치는 <공작조>를 조직하여 대약진 운동의 참혹한 실패로 사회주의 정권과 체제에 의심과 회의를 보이는 민중을 가혹하게 탄압했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집중적으로 타격당한 인물들은 바로 베이징의 대학생들이었다.

특히 칭화대학의 학생 콰이다푸는 공개적으로 류사오치를 비판했다가 류사오치에게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려서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다. 이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류사오치 정권에 대한 극도의 불만과 분노가 퍼졌는데 마오쩌둥은 이를 노리고 학생들에게 접근, 콰이다푸 등 학생들을 영웅으로 내세우며 류사오치를 비판했다. 여기에 장칭천보다, 린뱌오 등 당내 좌경세력이 마오쩌둥을 결사옹위하며 덩샤오핑과 류사오치에 대한 비난을 쏟아부으며 류사오치 세력을 회치기 위한 준비가 착착 갖춰졌다.

3.1. 건국 초기 사회 불안과 대약진 운동의 실패

1949년 국공내전 승리 이후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게 되었다. 지식인 계층으로부터 농촌 민주주의자 소리를 들으며 부패한 장제스 독재 정권의 완벽한 대체제로 인식되던 공산당은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오히려 장제스 정권보다도 더한 독재와 부패를 보여주었다.

흔히 공산화 이후 1949년~1957년까지는 대약진 이전의 평화기로 인식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이 시기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상층 구조의 창출, 토지 개혁, 집산화, 전매제 실행 등의 무리한 정책의 시행으로 인하여 인민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으며 이전에 없던 종교와 외국인, 자본가들에 대한 난폭한 공격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토지 개혁 과정에서 70~200만 명이 학살당했으며 집산화, 전매제에 저항하는 여러 봉기 진압과 종교에 대한 탄압 등을 계산해보면 공산화 초기에만 최대 400만 이상이 정권에 희생되었다.

대약진 운동 시기에 나타난 통계 조작, 장부 조작 등에 대해서 관료들이 국민당 시절의 개버릇 못 준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국민당 시절 공무원들의 경우, 50년대 초반부터 대대적으로 숙청당해 공산당 출신 하부조직들로 대체된 상황이었고 지도자 비위 맞추기 위한 통계조작같은 것은 모든 독재국가에서 관리가 없으면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며 공산당이라고 부패가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더욱이 아직까지 구시대의 관습에 젖어있던 공산당 간부들이 지역의 집단농장에서 마치 봉건영주처럼 군림하는 사례들도 보고되어 마오쩌둥이 이들에 대한 숙청을 지시할 정도였다.

아무튼, 이러한 공산정권의 모습에 실망하여 전국 각지에 반발이 빗발쳤고 흐루쇼프스탈린 비판에 자극받은 마오쩌둥이 실시한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 운동에서는 전 지식인, 학생, 노동자, 농민에 국영언론들까지 거의 비난에 가까운 어조를 쏟아내며 '장제스가 나았다!' 고 외치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이 시기의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이나 노동쟁의는 국민당 시절의 가장 거센 반정부 시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경악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즉각 반우운동을 진행하여 대숙청을 감행해 당과 국가 내 반대파들을 완전히 숙청하면서 싹쓸이를 해버렸다. 여기서 마오가 모든 직장과 기관에 10~20%의 우파가 숨어있다고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는 통에, 의무적으로 모든 기관이 직원의 10% 가량을 해고해야만 했다.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대약진 운동이었다. 대약진 운동의 결과 수 천만명의 사람이 굶어죽고 어린이와 노약자를 잡아먹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며 중국 내부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현실을 경시한 공산주의의 이론적 문제도 있었지만 오랜 내전을 거치며 중국 공산당이 지나치게 조직화가 되었고, 민주집중제보다 한술 더 뜬 주석제 하의 공산당으로 초권력적(超權力的)인 집단이 되어 주석의 주장에 아무도 감히 반발할 수 없는 초권위주의적 정당으로 변한 것이 가장 컸다.[15] 모든 것은 상명하달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고, 민중이 주인이라던 공산당의 이상은 점점 훼손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중국이란 나라 자체가 워낙에 낙후된 농업국가[16]이고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감시시스템이 없던 만큼 광적인 혁명열기 + 사적인 이익을 탐하는 공산당원들의 부정축재 행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이후에 나타난 모습을 '다섯 가지 풍조의 만연'이라 하는데 공산주의 풍조, 허위과장 풍조, 강제 명령 풍조, 생산의 눈먼 지휘 풍조, 간부 생활의 특수화 풍조가 그것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마오주의의 이상을 믿고 있던 공산당 내부 급진파와 혁명적 청년 공산주의자들, 급진적 마오주의자들은 이러한 이상을 다시 복원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류사오치는 안정화 대신에 대약진 운동의 결정적 책임을 '계급의 적'들에게 몰아서 수백만명의 당원을 숙청하고 수만명의 당원을 처형하고 현 사태에 반발하는 젊은 학생들을 마오쩌둥의 반우운동을 롤모델삼아 우파 기회주의자로 몰아서 마구 탄압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첫번째 홍위병이 되어 마오쩌둥의 지원 사격 하에 죽창을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돌리게 된다.

여기까지가 196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이미 중국은 내부에서 기아와 숙청, 내부정화 활동, 보수파의 약진, 노선 갈등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누군가가 불을 당기면 걷잡을 수 없이 펑하고 터질 상황이었다.

한편 1960년대 초중반에 걸쳐 경제가 점차적으로 정상화되던 시기에 라디오 생산단가가 급속히 하락하여 라디오의 생산량이 급속히 올라가게 되엇고, 중국에서도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는데[17] 이러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결합하여 라디오가 문화대혁명을 위한 선전도구로 널리 활용되었고, 중국사회와 문화에 그야말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3.2. 《해서파관(海瑞罷官)》과 조반유리(造反有理)

그런 가운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해서파관》이라는 한편의 연극이 거대한 화약고에 불을 당기고 만다. 1959년 당시 베이징 부시장이었던 우한(吳晗)은 역사학자로서의 지식으로[18] 연극 《해서파관》을 발표하는데, 이 연극은 명나라를 배경으로 해서라는 청백리 관리가 폭군 황제가정제에게 파직을 당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럭저럭 잘만든 연극이고, 연극을 발표하기 전부터 마오쩌둥은 해서를 높이 평가하며, "당원들은 해서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처음 연극이 발표되었을 때, 마오는 "이거 괜찮네." 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애초에 이 연극을 제작하도록 의뢰한 사람이 바로 마오쩌둥 본인이었다.[19]펑더화이:???

그러나 마오의 부인인 장칭야오원위안1965년, '문회보'라는 신문에 "이거 마오쩌둥 동지 돌려까는 내용 아닌가??" 이라는 칼럼을 발표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장칭에 의하면, 해서는 펑더화이를 의미하며, 황제는 마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1959년, 루산 회의에서 실각한 펑더화이를 빗대서 쓴 연극이라고 주장했다.[20] 이것이 바로 해서파관 사건이다.

이것이 자신을 겨냥한다는 것을 직감한 베이징 시장 펑전은 이것을 (현실사회와는 무관한) 학자들 사이의 학술토론으로 만들어서 어떻게든 파장을 축소하려 했지만 이미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은 저우언라이, 장칭, 야오원위안 등이 수많은 선전매체를 동원해서 맹공격을 퍼부었고, 아예 마오까지 직접 이 키배에 뛰어들어서,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를 통해 펑전을 비판했다. 여기에 린뱌오가 "우리 마오님은 천재! 마오님 말씀이 무조건 다 옳아요!" 식의 일장연설을 했고, 7월 27일, 홍위병 대표단들이 "사회정치를 뒤집어 엎자!" 라는 편지를 마오에게 보냈다. 이를 "조반유리(造反有理)"라 한다. 조반유리는 말 그대로, "반란이 일어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홍위병의 반란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결국 펑전은 덩퉈, 랴오모사 등과 함께 숙청당했다. 자세한 것은 해서파관 사건 문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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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의 병사들의 분노가 하늘에 가득하다[21] — 조반유리"

마오는 젊은이들이 잘한다며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고, 8월 8일, 인민일보에 《사령부를 폭격하라-나의 대자보》라는 제목의 짧은 논평을 발표했다. 공산당 안의 우파를 척결하자라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때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참고로 사건의 발단이 된 우한은, 문화대혁명 때 감옥에 갇혔다가 1969년, 옥사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4인방이 실각한 뒤 복권되었다. 펑전 역시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게 탄압을 당했으나 목숨은 건지고 1979년 덩샤오핑 집권 이후 복귀했다.

4.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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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의 제트기 형벌.[22]

1966년 8월 8일, 마오의 논평에 맞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中国共产党中央委员会关于无产阶级文化大革命的决[중국 공산당의 중앙위원회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 소위 말하는 16개항을 발표한다. 16개조의 내용은 쉽게 말해서 마오님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진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지만, 그 표현의 자유는 홍위병이 자유롭게 기존의 낡은 것들을 비판하고 타도할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목줄까지 풀린 홍위병들은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을 일으켜 대학살의 서막을 알렸다.

홍위병들의 활동에 사실상 한없는 자유를 부여하자, 홍위병들은 날개 달린 듯이 다니고 대륙의 기상(...)을 보여주면서 각지에서 소위 낡은 것들을 마구 파괴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 사당, 성당은 문을 닫거나 약탈되었으며, 베이징상하이에선 낡은 사상의 소유자들이라면서 사람들이 무차별로 홍위병들에게 붙들려 구타를 당했고, 심지어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공안들은 그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 당시 공안 수장 셰푸즈는 "누가 맞아서 죽어도…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만약에 이렇게 때려죽인 사람을 구속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 라고 발언할 정도였다. 사실, 공안이 막으려고 해도 홍위병들이 워낙 살기등등해서 함부로 다가가기도 힘들었다는 말도 있다.[23]

마오쩌둥은 이런 사태를 보고 받고도 오히려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라는 망언을 한다.[24][25]

16개조에선 "무력 쓰지 말고 좋게 말로 하자", 정확하게 말하면, "투쟁수단은 무투(武鬪)보다는 문투(文鬪)가 좋다" 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그 말을 지키는 홍위병 따위 없었다. 뭐 언어폭력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봐선 말로 하기도 한 모양이다.

류사오치는 결국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고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당직에서 쫓겨나고, 이른바 재교육을 세 번이나 받고 난 뒤, 지방의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손에는 줄칼에 베인 흔적이 있는데, 이 트랙터 엔진 공장에서 얻은 상처다. 이후 그는 1973년, 저우언라이가 복귀시켜 줄 때까지 꼼짝없이 그곳에 있어야만 했다.

8월 22일, 마오는 아예 "홍위병이 뭘 하든 태클을 걸지 말라." 는 내용의 교시를 하달했다. 이제 홍위병이 하는 일을 막으려는 자도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숙청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9월 5일에는 모든 홍위병들에게 베이징을 방문하도록 권장하는 통지문이 발표되었는데, 이때 베이징을 방문한 홍위병들이 무려 1,100만여 명에 달했다. 이때 마오는 "숙식 걱정하지 말라. 정부가 다 대준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사실상 국가재정으로 자기 사병들을 먹여주고 재워준 셈이었다.

10월 10일에는 린뱌오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주자파(走資派). 즉 자본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이라고 맹비난했으며, 펑더화이의 집에 홍위병들이 난입해서 명패를 채우고 거리로 끌고 다니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즈음 홍위병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그리고 세대교체도 이루어진다. 초기의 시설 파괴, 유적 파괴를 주도했던 홍위병들은 보수파라고 불리며, 이들은 홍오류라 하여 대부분 고위 간부나 당 관료의 자녀들이었다.

그런데 홍위병 사이에 만연하던 혈통주의에 대해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중의 두 가지 노선이라는 연설을 발표하면서 핍박받던 흑오류, 회오류 출신 홍위병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이들은 "무투(武鬪)보다 문투(文鬪)를 하라!" 라는 모토 하에 하방(下放)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들은 조반파(造反派)라고 한다.

조반파들과 보수파들은 문화대혁명 당시의 이런저런 책임을 서로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는데 출신 배경의 차이라던가 여러 복잡한 사회, 정치적 문제가 얽히긴 했지만 악행으로는 결국 그놈이 그놈이다. 홍위병 항목으로.

해가 바뀌어 1967년이 되자, 린뱌오와 장칭은 상하이를 장악하기 위해, 홍위병언론 등을 통해 상하이 지방정부의 고위직들을 맹비난한 뒤 숙청했다. 사실상 상하이 지방정부의 행정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를 1월의 폭풍이라고 한다.

베이징에선 4인방과 박자가 잘 맞은 캉성이[26] 모두가 굶을바에야 자본주의를 하자고 주장한 부총리 타오주를 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시켜 버렸다. 이제 공산당 내에서는, 자신의 정적 제거를 위해 상대방을 반혁명분자로 모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마오는 인민일보에 글을 발표하면서, 이들이 잘하는 일이라고 크게 칭찬했다. 이 시기 노동부 부장이었던 리리싼 역시 압박을 견디다 못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장칭은 문혁(文革)의 기운을 인민해방군에까지 퍼뜨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중국 건국에 기여한 인민해방군의 여러 주요 장성들이 문화대혁명에 우려를 표하자, 4인방은 언론을 동원해 문혁을 비판한 장성들을 맹비난했고, 그들은 결국 홍위병들에 의해 조리돌림을 당한 뒤 실각하고 만다. 이를 2월 역류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소련대숙청과 마찬가지로, 개국 원수로 추대된 최고위 장성들도 여럿 숙청되었다. 문혁 주도파였던 린뱌오는 당연히 해당되지 않았지만 펑더화이와 허룽은 이 기간 동안 홍위병들에게 구타조리돌림을 실컷 당한 뒤, 펑더화이는 비투회에 불려다니는 노리개로 전락했다가 암으로 사망했고 허룽은 1966년 12월 30일 장칭이 칭화대학에서 허룽을 공개적으로 공격할 것을 요청하자 겁에 질려 저우언라이에게 중난하이에 거처를 마련해달라고 사정했으나 저우언라이는 거절했다. 결국 허룽은 홍위병들에게 체포되어 고문과 조리돌림을 당했고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단식 하다가 1969년 6월 9일 사망했다. 그는 "나는 단지 마오쩌둥 주석이 한마디 말만 해주기를 바라오. '허룽은 나의 동지였다.'" 라는 말을 아내에게 남겼다.

주더의 경우, 그나마 피해를 덜 봤지만 홍위병들로부터 군부 내에서 기어다니는 군벌 찌끄러기라는 욕을 듣고 있었으며 녜룽전, 쉬샹첸, 예젠잉, 천이는 2월 역류에서 문혁파에게 저항했다가 마오쩌둥이 장칭, 캉성, 천보다를 지지하는 통에 박살이 나서 쉬샹첸과 천이가 특히 큰 피해를 입었다. 천이는 공장 노동자로 하방조치당했다.

마오쩌둥은 3월 흑풍을 허용하면서 군부대가 홍위병을 진압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으나 2월 역류로 인민해방군 지도부 자체가 무력화되었으며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으로 불어닥친 탈권 현상으로 인해 군부대가 홍위병에게 약탈당하고 홍위병들이 군구 지도부 전체를 조리돌리며 군구 부사령관 급의 고급 장교들을 끌어내서 중태에 빠질 정도로 구타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난징군구 총사령관 쉬스유는 백주대낮에 납치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해군총사령관 샤오징광도 납치당해 톈진으로 압송되어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으니 이때의 혼란상은 이루 말할 길이 없었다. 각 지방의 군구들이 홍위병의 공격으로 박살이 나서 군구 사령관도, 총정치위원도 없는 곳이 많았다. 중국의 안보와 전시상황에 존립을 책임지는 인민해방군이 겨우 동네 학생 꼬맹이들 모아서 조직한 홍위병에게 털렸다는건 이때 얼마나 나라의 기본틀이 무시당했는지 보여준다.

한편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된 홍위병들은 애초에 출신에 따라 보수파와 조반파로 나뉘어 있었고 원래부터 통일된 조직의 지휘를 받는게 아니라 각 지방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조직인지라 한 지방이나 학교에도 여러 홍위병 분파가 존재했고 홍위병의 각 병단들은 자신들이 더 혁명적으로 옳다면서 키배라고 쓰고 온갖 병림픽을 벌였으며 급기야 중화기로 무장하고 서로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참다 못한 인민해방군이 출동해서 홍위병을 가리지 않고 때려잡기도 했다.

결국 1968년이 되자, 이제 더 이상 마오를 위협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마오는 결국 신격화되는 경지에 이르렀고,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한 류사오치는 시골에 내려가 일개 농민으로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마오쩌둥은 이를 씹었다. 결국 그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방치되다가 사망했다.

이렇게 되자, 마오쩌둥 입장에서도 다시금 질서를 잡을 필요가 생겼다. 이 이상 홍위병이 날뛰는 것을 내버려두면, 마오의 권력까지 무너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오는 다시 인민해방군홍위병보다 우위라고 선언을 하고, 홍위병들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홍위병을 하던 젊은이들은 소위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으로 농촌으로 내려 보내서 홍위병들을 사실상 해체했다. 모토는 마오이즘의 핵심인 하방(下放) 활동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르게 마오이즘은 도시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혁명의 역량으로 파악했고, 이들 사이에서 전위대를 조직해서 도시를 포위한다는 것이 주요 전략이었다. 그래서 마오가 "니들 도시에선 혁명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 내려가서 농민들과 더불어 노동하면서 거기서도 혁명을 완성해야지?" 라고 하니까, 순진한 홍위병들은 우루루 낚였다. 마오에게 실컷 이용당하고도 좋다고 농촌으로 추방당한 이들은 70년대 후반이 되어 마오쩌둥이 죽은 뒤에야, 다시 도시로 돌아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어쨌든 이들이 도시에서 깽판을 치고 다니면서 중국의 경제성장률을 마이너스로 만들며 대만이 중국의 경제력을 따라잡게 공헌(?)한것과는 다르게[27] 농촌에서 일하면서 문맹퇴치나 농업생산 증대에는 큰 역할을 담당했기에 농촌근대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는 긍정적 효과가 있기는 했다.

4.1. 2인자가 된 린뱌오와 몰락

마오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류사오치덩샤오핑이 각각 가택연금과 트랙터 노동자 신세가 되어버려 정계에서 사라져 버리고 난 뒤, 고령의 마오에게 후계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마오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문혁(文革)의 일등공신인 린뱌오를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했다. 참고로 린뱌오의 공식 칭호는 마오의 충실한 전우였다.

마오는 린뱌오를 크게 신뢰했고, 모든 공식 행사에서 ‘마오 주석과 린 부주석’이란 식으로 호칭되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1962년, 중국-인도 국경분쟁인도군을 물리친 공을 세운 데다, 마오의 충실한 사냥개가 되어 동네북 류사오치를 마구 물어뜯었기 때문이다.

린뱌오의 위상은 1969년 제9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새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린뱌오는 마오에 이어 제2인자 자리를 차지했다. 저우언라이는 4위로 밀려나 더 이상 린뱌오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정치국 상무위원은 서열 순서에 따라 마오쩌둥, 린뱌오, 천보다, 저우언라이, 캉성 순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천보다보다도 서열이 밀리는 굴욕을 당했다. 바야흐로 린뱌오의 시대였다. 하지만 린뱌오는 좀 더 확실한 미래 권력의 발판을 얻고 싶어 했다. 그래서 류사오치가 실각한 뒤, 폐지된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추진했다. 마오를 국가주석에 앉히고 린뱌오가 국가부주석에 앉으면, 마오 사후에 자동적으로 린뱌오가 국가주석직을 승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 중국-소련 국경분쟁에서 린뱌오는 강경한 저항론을 주장하다가 마오쩌둥과 충돌했다. 소련이 핵공격까지 시사하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마오쩌둥은 소련을 막기 위해 미국과 손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예젠잉, 쉬샹첸, 녜룽전 등 원수들도 대부분 동의했지만 린뱌오는 인민해방군만으로 충분히 소련과 미국을 동시에 막을 수 있다면서 수정주의자를 막기 위해 제국주의자와 손잡을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정신 나간 대국 쇼비니스트라고 면박주면서 그를 데탕트 문제에서 배제하고 저우언라이, 예젠잉 등을 앞세워 헨리 키신저와 접촉했다.

위신에 타격을 입은 린뱌오는 천보다와 손을 잡고 자신의 지위를 다시 공고히 하려 했다. 1970년 8월 23일, 려산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에서, 천보다가 총대를 메고 국가주석직의 복원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마오는 천보다의 발언을 비난하면서 그를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해임시켜 버렸다. 마오는 국가주석직 복원을 린뱌오가 자신의 권력을 찬탈하려는 것으로 여겼다. 사실 이런 의심에는 린뱌오의 실수도 불을 붙였다. 천보다의 발언이 비난받았음에도 린뱌오는 마오에게 승진시켜 달라고 징징댔기 때문. 결국 국가주석직 복원 시도가 무산되고 린뱌오는 무력감을 느꼈다. 린뱌오를 의심하기 시작한 마오는 린뱌오의 권력과 당내 영향력을 점점 줄이기 시작했다.

이러자 초조해지기 시작한 린뱌오와 그의 측근들은, 결국 아직 남아있는 군권을 이용해 마오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린뱌오의 아들인 린리궈가 린뱌오를 지지하는 군내 세력들과 함께 꾸민, 소위 571 공정이라 알려진 이 음모는, 마오를 제거하고 공군 폭격과 병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571 공정에 린뱌오가 얼마나 개입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있다. 린뱌오가 직접 지휘했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린뱌오보다는 아들 린리궈가 더 주도적이었다는 말도 있다. 자료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음모는 1971년 9월 8일부터 9월 10일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마오는 중국 남부를 기차로 순시 중이었는데, 일설에는 마오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습격을 당했다고도 하며, 또 다른 설에는 마오를 암살할 것이라는 음모가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마오가 일정을 바꿔 암살을 피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 시점에 음모가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고, 어떤 시도였든 간에 결국 실패했다.

일이 틀어지자 린뱌오는 아들 린리궈와 가족들, 측근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망명하려 했다. 그러나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는 소련까지 가지 못하고, 몽골 상공에서 추락했다. 이를 9.13 사건이라고 한다. 린뱌오 일행이 탄 비행기의 추락원인도 불분명한데, 중국군이 미사일로 격추했다는 설과, 연료부족 혹은 기기불량으로 추락했다는 설이 분분하다.

린뱌오가 탄 비행기는 총알이 뚫지 못하는 특전비행기라서 아주 강한 미사일로 격추시켰다는 소문도 있으나, 물론 말이 안 된다. 비행기는 전차가 아니고, A-10 공격기처럼 장갑을 미친 듯이 두른 비행기마저도 기체에 구멍이 뻥뻥 나도 좀 더 오래 날 수 있는 정도총알 튕겨내는 게 아니다. 물론, 튼튼하게 만들면 보병소총 총알이야 튕겨내겠지만, 비행기에 그딴 장갑은 쓸 데가 없다. 미사일도 규격화되어 생산되는 물품이지, 아주 강한 미사일을 따로 순식간에 뚝딱 제조해서 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격추설 외의 정설은 린뱌오 일행이 하도 급하게 달아나느라 연료도 채우지 못하고 출발했기 때문에 연료 부족으로 중도에 추락했다는 것이었으나 2016년 해금된 몽골 기밀문서에 따르면 조종사의 실수였다고 한다. 기사

4.2. 4인방의 등장과 몰락

린뱌오가 사라진 뒤 마오의 후계자가 공석이 되면서, 마오는 앞날에 대해 크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딱히 후보자가 없자, 마오는 상하이의 당 간부였던 왕훙원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1972년, 중앙 정계로 진출한 왕훙원은 마오의 후광을 등에 업고, 1973년에는 공산당 부주석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차기 후계자로 급부상해 나아갔다.

그런데 1973년, 저우언라이마오쩌둥에게 건의해 덩샤오핑이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일각에선 저우언라이가 왕훙원을 견제하기 위해 덩샤오핑을 불러들였다고 보기도 한다. 덩샤오핑은 부총리직에 올라 정부 행정을 관장해 나아갔다.

이렇게 되자 문혁을 주도했던 장칭과 그녀의 추종자이자 선동 전문가인 장춘차오야오원위안, 그리고 왕훙원이 뭉쳐서 대놓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안티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뭉친 넷을 바로 4인방이라 한다. 이들은 언론을 장악하고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의 경제 정책을 비난했다.

1973년 말, 4인방은 뜬금없이 비림비공운동을 전개해 나아갔다. 비림(批林)은 린뱌오[林彪] 안티, 비공(批孔)은 공자 안티라는 의미로, 중국에서 유교 문화를 일소하고 린뱌오의 역적 행위를 규탄하자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상 이 운동이 겨냥한 것은 저우언라이였다. 마오가 사망한다면 후계자가 공식적으로 천명되지 않는 이상 저우언라이가 그 뒤를 물려받을 것이고,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에게 권력을 승계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저우언라이 안티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대중들은 4인방의 안티 운동에 질렸고, 이들의 행동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대중들의 저우언라이에 대한 지지가 확고했기 때문에 실효가 없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러자 이들은 목표를 바꿔 덩샤오핑을 공격했다. 덩샤오핑은 실용적 경제 정책의 추진으로 점점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덩샤오핑을 공격한 것은 효과를 거두어서, 마오는 덩샤오핑의 정책을 "우파의 복권정책"으로 판단했고, 1975년 12월, 덩샤오핑에게 자아 비판서를 쓰도록 지시했다.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방광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뜨거웠다. 4인방은 자칫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가 정치적인 폭풍으로 번질까 우려했다. 그래서 이들은 되도록 저우언라이 추모 열기를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2월이 되자 4인방은 최후로 남은 정적 덩샤오핑을 끌어내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4인방의 기대와는 달리 말년에 정신이 돌아왔던지, 마오는 4인방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화궈펑을 총리로 임명했다. 3월 말이 되자 중국 인민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저우언라이를 추모했다. 4월 5일이 청명절(淸明節)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 추모는 곧 4인방에 대한, 더 나아가 문화대혁명,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과 성토로 이어졌다. 4월 5일이 되자 수십만의 군중들이 모여 4인방을 비난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가 1차 천안문 사태이다. 4인방은 공안을 동원해 이들을 강제해산시키고, 미디어를 동원해 이 집회를 우파분자들의 책동이라고 선전하면서 그 배후가 덩샤오핑이라고 몰아갔다. 결국 4월 6일, 중앙위원회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성토했고, 덩샤오핑은 실각한 뒤 가택연금되었다. 이제 4인방이 모든 걸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4인방의 천하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사망했다. 전 중국은 추모 열기에 휩싸였고, 공공기관은 1주일 넘게 문을 닫았다. 사망 직전에 마오는 화궈펑에게 "당신이 맡는다면 안심이다."(혹은 당신이 맡고 있으니 나의 마음이 편하오)[28] 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사실상 마오가 화궈펑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4인방은 화궈펑에겐 정치적 야심이 없고 기술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화궈펑은 4인방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날렸다. 그는 실각했지만 영향력이 있던 덩샤오핑인민해방군의 지지를 받아, 10월 10일에 4인방을 전원 체포했고 이로써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5. 문화대혁명의 내용

대약진 운동에 이은 2단 콤보 크리티컬 히트로 중국을 혼란에 빠트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점철되었고, 심지어 가족 간에도 서로를 믿을 수 없었다. 개인의 인권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아버지가 마오쩌둥에 대해 아주 약간의 불만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면 아들이 그것을 공산당에 보고하고, 홍위병들이 와서 아버지를 타도한다.

타도(打倒)란 말 그대로 때려눕힌다는 의미인데, 그냥 때려눕히는 게 아니라 이상한 모자[29]에 '더러운 자본주의' 따위의 글을 적어서 씌우고 사람들이 많은 광장에 결박해 놓는다. 그리고는 묶인 사람을 사람들이 와서 한 번씩 강렬하게 비판한 뒤 구타를 가하고, 외양간이나 화장실 같은 곳에 가둔다.

당해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소 친분이 있거나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언어와 신체폭력을 집단으로 겪고 나면 정신적으로 크나큰 상처를 입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 피해자 중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혹은 이런 끔찍한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서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예 미쳐버린 사람도 부지기수. 한 예로, 소설 《낙타상자》를 발표하여 마오쩌둥으로부터 '인민 예술가'라는 찬사를 받았던 소설가 라오서는 그가 런던 대학교에서 일했었단 이유로 반동으로 몰린 후 공묘로 끌려가서 베이징 제8중학교에서 몰려나온 여중생 홍위병들에게 놋쇠 버클이 달린 혁대로 수없이 구타를 당하고 굴욕적인 사진이 찍히자 정신적인 충격과 분노로 인해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집 근처의 연못에 투신자살했다고 한다.

또한 그런 피해자 대부분은 원래 고위급 직책을 가지거나, 권위 있는 지식인 등 중국 사회의 엘리트들이었다. 정신이 멀쩡한 엘리트들이 그렇게 미쳐나가고 죽어가며 투옥되었기 때문에 중국 사회의 수없이 많은 인재가 말살당했다. 더욱 더 끔찍한 사실은 마오쩌둥은 "자살은 인민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행위다." 라고 하여, 자살할 경우 그 사람은 장례식조차 공개적으로 치르지 못하고 쓸쓸하게 화장해야 했다.

그리고 영국, 인도 등 일부 국가의 외교 공관들도 '반제국주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대사관을 불태우고 직원들을 끌고 다니며 두들겨팬 것. 서방 대사관은 말할 것도 없고 소련 대사관도 수정주의자 소굴이라고 포위를 당했고 인도네시아나 케냐, 몽골 대사관도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홍위병의 이러한 외교공관 공격 중에서 가장 스케일이 컸던 것이 1967년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이었는데 홍콩의 67폭동을 홍콩 당국이 무력으로 진압하자 홍위병들이 흥분하여 영국 대표부를 점령, 대표부 직원들을 억류하여 폭행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외교 문제가 발생했고, 나중에 심각한 국제적 고립에 몰려 혁명외교를 철회한 마오쩌둥은 방중(訪中)한 북한오진우에게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어떤 이들은 기회에 편승하여 소위 조반(造反)을 시도했다. 베이징에 있는 영국대표부를 불사르고 (중략) 그런 사람들이 바로 국민당이다."[30]

극단적으로 문화대혁명에 앞장섰던 집단인 홍위병이 득세했는데, 이들은 대개 10~20대의 학생들이었다. 공통된 특징은 녹색 인민복과 모자, 무장 벨트, 마오쩌둥 어록을 착용한 채,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죄명을 씌워 때리고 부수고 빼앗는 것. 중국의 청소년들이 대부분이 홍위병에 가담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에 대한 소회는 각각 다르다. 어떤 사람은 이 시기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재빨리 개념을 찾고 새 시대를 준비하다가, 개혁개방이 시행된 이후 외국에 나가서 성공한 사람도 있다. 따라서 간간이 반성을 하거나, 사과 글을 내는 홍위병들도 있긴 하다. 문화대혁명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홍위병 대다수는 꿈에서 깨지 못해서, 나중에 마오쩌둥이 농촌에서 노동하며 배우자는 "상산하향(上山下鄕) 운동"을 제창하자, 그에 따라 모조리 시골로 내려갔고, 1980년대까지 그곳에서 사실상의 굴라그 생활을 하면서 인생이 사그라졌다.

사실 홍위병들의 입장에서는 그 당시가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였다. 홍위병 중 초기 보수파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후기의 조반파(造反派)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가난한 계층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문화대혁명은 자신들이 자산가와 지식인들의 위에 설 수 있었던 유일한 시기인 셈. 게다가 사회 전반적으로 권위를 타파하고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앞당겼다는 점에서는 많은 이들이 인정하긴 한다.

하지만 홍위병들의 준동으로 만들어진 사회는 모두가 못 살고 모두가 못 배운 퇴보한 평등라는 점이 문제였다. 즉, 사회 전체가 다같이 추락한 것이다.[31] 자세한 내용은 본문 뒷부분의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에 나온다.

게다가 홍위병들이 무슨 고대, 중세 시대에 농경민족 침략해서 교회나 절을 불태우면서 좋아하는 타민족 야만인들도 아니고, 자기들 문화재와 지식인, 전통문화를 다 부수고, 향촌 공동체나 사회는 물론 심하면 자기들 가족도 말아먹고는 그때가 자기들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기라고 회상한다는 것부터가 문제가 심각하다. 또 권위타파와 만인평등이라지만, 문화대혁명 이후로 중국이 이 "모두가 평등해진"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엘리트 계층을 재건하는 데 진땀을 뺐고 그 결과 현대 중국이 다시 "불평등"해졌으며, 그리고 현재 중국 공산당의 일당독재가 지속되는 중국에서 과연 권위주의가 타파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 "평등"도 허울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거기에다가 개혁개방 이후로 배금주의가 판을 치면서 다른 의미로 도덕관념을 상실했다는 의견도 있을 지경이다.

중국에서 부정적 의미로든 긍정적 의미로든 봉건적 잔재는 문화대혁명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수천 년을 내려오던 향촌의 유교적 질서도 완전히 뿌리뽑혔다. 중국인들이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예절을 중시하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도 부러워하는 이유도, 문화대혁명 시절에 이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주요 책임을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이 주축이 된 4인방린뱌오에게 떠넘기고 있다. 문화대혁명을 시작한 마오쩌둥도 책임이 크지만, "음모를 꾸민 반혁명분자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게 대체적인 공식 결론이다. 중국 공산당에게 있어 근현대 중국의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마오쩌둥을 자신들의 입으로 직접 공격하여 현재 공산당의 집권 정당성마저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시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해 권력 일선에서 퇴진했으나, 그 뒤를 이은 류사오치 등의 실용주의 정치가들이 실권을 잡고 예전 자신의 과오를 수정하는 모습에서 권력에서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고 심한 분노와 권력욕을 느꼈다. 이에 아직 자신에게 남은 정치적 카리스마를 악용하여 정, 관, 군부의 권력 중심에 있는 이들을 숙청하고 권좌를 재확립하고자, 홍위병으로 대표되는 선동된 군중과 4인방, 린뱌오 등을 이용해 자신이 세운 국가를 자기 손으로 망가뜨린 것이다. 그러나 4인방을 숙청한 덩샤오핑 등은 그의 권위를 등에 업고 세력을 유지하기를 원했으며, 군중의 비난도 피하고자 죄과를 은근슬쩍 4인방에게만 물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공산당 수뇌부를 비롯한 중국엘리트이공계(理工界) 출신이 많은 것도 문화대혁명의 영향이 지대하다. 문화대혁명 때 인문계사회과학계에 대한 공격이 너무 크다 보니, 상대적으로 깔 거리가 적은 자연과학공학 계열로 인재들이 몰렸던것. 물론 문화대혁명 당시 이과 인재들도 고생했지만 문과 인재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이었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의 유력 파벌 중 중국 공산주의청년단(中国共产主义青年团)의 경우,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이공계 인재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중국의 인문학/사회과학은 이 때 피해를 너무 크게 입은데다 이후에도 중국 정부의 검열로 인해 발전 속도가 느리다. 때문에 같은 중화권홍콩이나 타이완의 학계가 더 높이 평가를 받는다는 말이 나올 지경. 물론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으로 보면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경쟁은 엘리트들의 전유물이라고 시험을 제거하고 추천을 통해서 대학에 입학시켰기 때문에 이공계도 망하긴 했었다.[32]

게다가 그나마 문화대혁명이 10여년 만에 마오쩌둥 본인의 죽음과 함께 끝나서 망정이지 만일 문화대혁명이 그 이상으로 길게 이어졌다면 역으로 마오쩌둥 본인의 역사적 평가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덩샤오핑이 집권한 직후 과거 마오쩌둥의 치적을 평가하면서 "마오쩌둥 주석은 공칠과삼(功七過三)의 지도자였다"라고 조금이나마 치켜세워준 결정적인 이유가 마오쩌둥이 비록 문화대혁명이라는 대재앙을 야기하기는 했으나 적어도 그 이전에는 각 지역 군벌들의 전횡으로 사분오열 되어가던 중국 대륙에서 군벌주의를 청산하고 중국공산당 하의 단일정부를 성공적으로 출범시켰다는 점이었는데, 그나마도 문화대혁명 후기로 가면 각 지역의 홍위병 수장들이 국가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군벌화 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마오쩌둥 본인이 비교적 일찍 죽어서 망정이지 만약에 마오쩌둥이 계속 장수하는 바람에 문화대혁명이 끝없이 이어졌다면 중국 각 지역에 홍위병 출신 군벌들이 할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랬다면 사태가 어떻게든 일부 수습된 이후 마오쩌둥에 대한 현대 중국인들의 평가 역시 그냥 천하의 개쌍놈 정도로 떨어졌을 것이다.사실 중국을 더 싑게 부수려고 통일한게 아닌가 싶다

6. 문화에 끼친 악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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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의 최대 피해자는 단연 중국의 문화였다. 따라서 내용이 길기 때문에 하위 문서로 분리해 기술하였다.

7. 해외의 반응

바로 바다 건너 중화민국의 경우는 경악 그 자체였다. 중화문명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전통과 문화를 강조하던 중화민국은 본토에서 중국 문명의 진수인 각종 문화재와 중국 사상 그 자체이자 거인 중의 거인인 공자 묘까지 때려부수는 대참상에 멘붕했다. 대만에서라도 중국문명을 사수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어 1966년, 쑨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중화문명부흥운동을 거국적으로 시행하였다. 이는 중화문명을 수호하자는 민족적 결의와 더불어, 중화문명을 파괴하는 중공은 적법한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아님을 주장하는 프로파간다로도 활용되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문혁 당시만 해도 들어오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유럽권에서는 문혁을 찬양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33] 거기에 발맞추어 일본 신좌파들 중 일부 분파들은 문혁을 대단히 찬양했다.[34]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보다 자세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 뒤로는 아무도 이를 찬양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35] 그래서 68운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36] 심지어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도 게릴라 군대답게 마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 된 데는 당시 문혁의 기능 중 구습타파와 관료제 비판이라는 기능만 부각되어 선전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쨌든 당시 중국은 제3세계의 일원이었고, 그 중에서도 소련과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한 축으로 기능했다. 공산당의 영도가 아닌, 농민을 중심으로 대중과 함께하는 혁명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당시는 소련과 코민포름의 패악질에 전 세계가 질려있던 터라, 마오주의와 문화대혁명도 일종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전공투도쿄대 점거 당시, 도쿄대에는 체 게바라마오쩌둥의 사진이 동시에 내걸렸고, 68운동 당시 소르본 대학교 정문에도 블라디미르 레닌과 마오쩌둥의 사진이 걸렸다.

비틀즈존 레논은 혁명에 대한 회의를 담은 Revolution 1이라는 노래에서 문화대혁명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But if you go carrying pictures of Chairman Mao, You ain't going to make it with anyone anyhow. [한글번역]" 여기서 이 'Chairman Mao'가 바로 마오쩌둥을 가리킨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 인과의 대화》[38] 등을 지금 읽으면, 문혁 찬양 대목에서 정신이 우주로 날아가는 걸 느낄 수 있다. 리영희는 나중에 이를 두고, "당시에는 문혁에 대한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었다"는 식으로 변명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 북한과 중국에 관한 자료를 가장 많이 열람한 사람이 리영희 교수였고, 조선일보 재직 시에도 동북아시아권 전문가로 나름대로 인정을 받던 사람이 바로 리영희였다는 점에서, 궁색한 느낌이 있는 것은 사실.[39]

좀 더 개념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사실 유럽모더니즘과 문화대혁명은 사상적으로 뿌리가 같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간은 물질에 지배되는 존재이며, 새로운 문물이 나온 것은 새로운 시대이므로, 그에 맞는 새로운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다만 유럽은 과거와 단절하긴 했어도 '파괴'하지는 않았으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중국은 그저 과거를 파괴하기만 했다. 인간이 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무분별한 선동을 가려내지 못하면, 어떠한 비극이 발생하는지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대혼란 속에서 입은 물질적, 정신적 피해는, 중국의 발전을 수십 년 늦추는 데 일조하였다.

또 이웃 북한은 겉으로는 중국의 문혁을 극좌주의라며 깠지만, 그 아이디어를 사실상 그대로 들여와 북한의 독재 체제를 견고하게 만드는 데 사용했다. 특히 김일성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은 문화 부문의 지도를 시작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할 때, 장칭을 필두로 한 4인방의 문화 정책을 거의 그대로 따라 했고[40] 거기에 주체사상으로 색을 입혀 독자적인 것처럼 꾸며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비판이 진행되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친 중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이것이 현재진행형이고, 지도자의 위대한 업적으로 찬양받고 있다. 현대 중국의 노년층들은 북한을 볼 때마다 문화대혁명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하는데, 1960~70년대에 창작된 북한의 가극들이, 21세기에 와서도 중국에서 순회공연을 벌이며 흥행하고 있는 것도, 이 시대에 대한 추억팔이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8. 문화대혁명에 대한 다른 관점

문화대혁명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기술한 책으로는,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이 있다. 이 책은 당시 문혁에 참가했던 젊은 홍위병의 후일담과도 같은데, "그래도 당시 당국에 의해 통제되던 언론/출판과 집회는 문혁 기간에 가장 자유로웠고 활발했으며, 권위주의와 관료제에 대한 타파도 활발히 논의되었다"는 논지다. 또한 중국의 발목을 잡았던 구습, 악습이 대부분 타파되었다는 것도 긍정하는 요소이다.

모든 마을에서 평등의식이 퍼져 나아가서, 대문을 열고 다녀도 도둑이 들지 않았고, 콩 한 쪽도 나눠 먹었으며, 공공 식당에서 점원을 하인 부리듯 하던 잔재가 사라졌으며, 학생은 교사의 권위에 눌릴 필요가 없었고, 더 이상 공무원들이 권위를 가지지 않았으며, 대학 입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백지답안 사건. 한 학생이 "나는 농촌에 살아서 일을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많이 없기 때문에, 도시 학생들하고 동일한 시험을 치러 대학에 가기가 불가능하다"라는 항의 서한을 받은 모택동이 대학 입학시험을 없애버린다.[41]

또한 세는나이가 사라지고 일상생활에서 국제 표준 나이인 만 나이가 정착되었다. 중국도 법적으로는 신해혁명 이후로 만 나이를 사용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세는나이를 쓰는 현재의 대한민국과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문화대혁명을 계기로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위의 미담도 당시 홍위병이었던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좋아 보였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대문을 열어놓지 않으면 "저 집은 뭔가 숨기는 게 있다!" 라고 판단하여 홍위병들이 단체로 몰려가서, 세간 살림을 부수고 집주인을 붙잡아다 문초하고 구타를 하지 않나, 물자를 나눠 쓰지 않으면 이기주의라고 동네 고목나무에 매미처럼 매달아놓고 괴롭히다가, 싹싹 빌어야 겨우 풀어주던 게 현실이었다. 처음에 높으신 분들이 작살나는 걸 보고 좋아하던 일반 서민들조차 불과 수년 만에 너무한다고 외면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동자인 마오쩌둥도 카리스마로 이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했고, 군중들은 정치적 격동상황에서 개인의 생존을 위해서 뭉치다 보니 통제되지 않은 움직임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 입시가 폐지된 뒤, 대학 입학은 무조건 교사의 추천으로만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교사의 판단을 어떻게 신뢰하는가? 객관적이지 못하다. 교사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된다!' 는 반론이 등장했다. 결국 대학을 일종의 평생교육기관처럼 만들어 버려서 누구나 다니게 되었다.[42] 입학시험이 없어진 대학에 얼마나 많은 인파 ― 나쁘게 말하면 어중이떠중이 ― 가 몰려들었으며, 그 결과로 어떤 후폭풍이 몰아닥쳤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연한 결과지만 시설은 급속히 노후화되었고, 연구 성과는 미진하게 되었으며, 고등교육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 당시 중국인들 중에는, 한국에서 "나 어렸을 때 6.25 전쟁이 터져가지고 학교를 못 갔어!" 라고 하는 어르신들이 계신 것처럼, "나 어렸을 때 문혁이 터져서 대학에 못 갔어!" 라는 세대가 존재한다. 국가의 부당한 결정으로 인해 피해만 본 사람들이 가만히 있기만 할 턱이 없으니, 이들 상당수가 반정부 세력이 되었고, 일부는 민주화 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더군다나 공공식당을 비롯한 각 점포에서 종업원을 노예처럼 부리는 굴욕적인 방식인 서빙을 금지하여, 일시적으로 모든 음식점이 셀프 서비스가 되는 상황도 벌어졌다.

대한민국6.25 전쟁 덕분에 남이고 북이고(특히 남한에서) 피난과 내부 분열과 숙청으로 지역 공동체가 죄다 박살나는 바람에, 전통적인 지주와 소작민 사이의 계급의식이 사라지고, 덕분에 토지 개혁에 대한 저항이 거의 없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6.25 전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한국에는 없다. 그리고 2020년대에 들어선 지금, 자본주의 체제를 본격적으로 들여온 중국은 동북아 제일의 빈부격차를 자랑한다. 과거에도 문제시되었던 부정부패는 여전히 잘 남아있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도 없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고, 심지어 대약진운동 같은 과오조차 '실수한 거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적당히 실드 쳐주는 중국인들조차, 문화대혁명만큼은 절대로 실드를 쳐주지 않는다. 공칠과삼(功七過三)[43]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닌 것이다.

전술(前述)했듯, 문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엄청나다 보니, 당연히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급증했다. 덕분에 마오 말기에는 '마오는 물러나시오!' 같은 구호가 일상적으로 터져 나왔고, 여기에서 제1차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다. 심지어 홍위병 가운데 급진파들도 마오쩌둥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당시 절대적인 계승권자였던 화궈펑이 이 때문에 몰락하고, 그 뒤를 덩샤오핑이 이은 건 덤. 화궈펑은 문화대혁명으로 급성장해서 마오의 바로 뒤를 이었으며, 집권하자마자 신속하게 4인방을 제압하는 등 지도력은 뛰어난 편이었으나, 문화대혁명으로 성장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얼마 못 가고 자리에서 내려온다. 지금도 중국에서 문혁으로 성장했다는 정치인은 별로 좋은 소리 못 듣는데, '마오는 물러가라'는 구호가 대놓고 터져 나오던 저 시점에선 치명적 약점이었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이 왜 1차 천안문 사태는 2차와 달리 부정하지 않는가?"에 대한 답은, 바로 문혁과 홍위병에 대한 반감이 엄청나다는 것에 있다. 문혁이 터졌을 당시에 홍위병이었던 중국인들은 지금도 "내가 그때 홍위병 출신이다"라면서 대놓고 자랑은 커녕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다.

역사학자 다니엘 벨은 이병한과의 인터뷰에서 문화대혁명이 참여 민주주의의 정점이라고 주장했다. 문혁이 파시스트적 대중운동의 논리적 연장으로부터 발원한다는 비판적 해석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는 두 권의 저서와 다수의 논설문에서 중국의 정치적 엘리트주의에 호의적인 태도를, 정치 지도자 선출의 원칙으로서의 1인1표의 개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전력이 있는 학자이다.[44] 물론 다니엘 벨이 참여 민주주의가 마냥 나쁘다고 폄하하는 학자는 아니지만,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그의 태도는 참여 민주주의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면 유토피아가 오는 게 아니라 문화대혁명 같은 게 나타난다는 다소 비판적인 자세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의 관점으로 보면 문화대혁명은 그 홍위병들의 죽창이 중앙당을 향하자마자 무자비하게 진압되어버린 미완의 혁명이다. 특히 현재의 중국공산당이 겉만 공산당이지 사실상 부르주아지 독재정당이나 다름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판국에, 중국의 마오주의자들이 해외, 특히 홍콩에서 반 중국공산당 집회를 여는 꼴을 보면서 '만일 홍위병들이 반동 수정주의자 덩사오핑과 원로 2세들의 머리를 깨버리고 완전한 혁명에 성공했다면'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고 한다.

9. 이야기

덩샤오핑의 아들이 문화대혁명 당시 덩샤오핑 눈앞에서 창문 밖으로 내던져져서, 이에 앙심을 품은 덩샤오핑이 이후에 야심찬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긴 한데, 그의 정책은 그렇게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단 홍위병들이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을 2층 베란다에서 집어 던지는 바람에, 하반신 마비로 장애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덩푸팡은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자 중국장애인연합회를 창설해서 스스로 주석에 취임한 뒤에 아버지의 이름을 내세워서 온갖 종류의 이권에 개입하면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덩샤오핑의 아들이다 보니 언론, 사법기관, 당 그 누구도 덩푸팡의 부정부패를 건들지 못하였다. 결국 덩샤오핑 사후에도 계속 자리를 지키다가 2008년 명예 주석으로 물러났다.[45]

영화 《마지막 황제》의 후반부에서 문화대혁명 장면을 볼 수 있다. 만주국 황제에 올라 전범이 된 아이신기오로 푸이교도소에서 징역형을 살고, '교화'된 후 사회로 나와 정원사가 되었는데, 거리를 지나가다 만나게 된 반동분자가 바로 그때의 교도소장(실제 인물인 김원은 조선족이었다고 한다)이었던 것. 선통제는 그래도 교도소에서 여러모로 마음 써준 그가 비참한 꼴이 된 그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나쁜 사람이 아니다.' 라고 옹호하면서 선처를 호소했지만, 결국 외면당한다. 참고로 이 부분은 사실을 각색한 것이다. 푸이가 해당 교도소장인 김원을 변호해 준 것은 사실이나 문화대혁명이 일어날 당시 푸이는 병중에 있었고, 길거리에서 홍위병에게 내쳐진 일도 없었다. 다만 일부 극단적 홍위병들이 푸이를 두고 "청나라 봉건 황조에서 인민을 약탈하던 황제"라고 까대는 일은 적잖게 있었다. 그래서 병이 났는데도 병원에서 홍위병의 공격을 염려해 입원을 거부했고, 저우언라이 총리가 직접 신원을 보증해주고 나서야 입원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국공내전중화민국(대만)이 타이완 섬으로 후퇴할 때, 미국에게 수송선 몇 척을 빌려, 북경의 유물들의 대다수를 가져갔다.[46] 그래서 대만 타이베이국립고궁박물원에서는, 3개월마다 유물을 순환해서 전시해야하며, 해당 박물관이 보유하는 유물을 몽땅 보려면 6~8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만약 이게 중국에 그대로 있었으면 현재는 베이징의 고궁 박물관의 유물 양이 대만 고궁 박물원 유물들 다 합친 것보다 많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둘이 비슷하다. 정확히는 고대 유물들이 새로 발굴되어 고대부분은 중공이 더 낫고, 명청시기 유물들은 대만이 더 낫다. 아무튼 문화대혁명 때 무진장 까부쉈으면서도 이 정도라니 역시 대륙의 기상이다.

게다가 이 당시 문화대혁명으로 엄청난 중국 문화가 파괴된 반면에, 대만에서는 '중화문명부흥운동'이라 하여 중국 문화를 연구,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덕에, 그 성과 등에 힘입어 스스로를 중국 문명의 종주국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중국의 국력이 넘사벽으로 커진 현재에도, 대만의 이러한 노력과 자부심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애꿎게도 에 불과했던 차우차우도 이때 많이 학살당했다. 또한 다른 개들도 상당수 학살당했는데, 덩치만 크고 먹을 것만 탐낸다고 하여 쓸모없는 개들이라고 하여 덩달아 학살당했다. 우습게도 고양이가 쥐를 잡고 먹을 것도 적게 먹어서, 개(다만 군견 같은 개들을 제외)보다 훨씬 쓸모 있다 하여 고양이들이 우대받았다. 물론 중국 황실에서, 페키니즈 등의 애견을 호화롭게 기르는 일이 있곤 했던 역사의 영향도 있었을지 모른다.

덩샤오핑천안문 6.4 항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이유도 문화대혁명의 트라우마로 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 4인방의 영어 표기인 갱 오브 포에서 이름을 따온 영국 펑크 밴드가 1970년대에 결성되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삐삐 밴드 1집인 《문화혁명》이 문화대혁명에서 따왔을 거라 추측된다 카더라.

21세기에 와서는 중국홍객연맹이 추앙하고 미화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반정부 행위에 속한다. 물론 중국 정부는 이들의 능력이 아까운지 적당히 눈감아주는 분위기이다.

다른 이야기로 베이징에 이 시기를 주제로 한 테마식당이 있다. 홍색경전주제찬청 문서로.

9.1. 영화

중국 현대사에서도 중요도가 남다른 사건이고, 아직도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에 영화 주제로도 많이 등장한다.

장국영 주연의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 에서는 후반부에 문화혁명을 다루고 있다. 홍위병들에게 붙잡혀서 자아비판을 강요당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연기를 뛰어넘어 보기에 너무 안타까울 정도.

장이머우 감독, 공리와 갈우 주연의 《인생(영화)》이라는 영화는 문혁만이 아니라 일본 침략 때부터 문혁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중국 근현대사를 한 번에 알아보기 좋은 작품이다. 토법고로, 집단농장으로 대표되는 대약진운동홍위병으로 대표되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거대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직접적으로 마오를 비판하지는 않지만, 시골 촌부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마오 시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소소한 가족사와 엮어 그려내 문혁을 《패왕별희》 만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반면 이들과 다른 시각으로 문혁을 바라보는 영화도 있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에서 베이즈 맬버스역을 맡은 장원 감독의 《햇빛 쏟아지던 날들》에서는 성장기[47] 아이의 눈으로 문혁을 바라본다. 위에 언급된 영화들이 홍위병에 의한 무질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홍위병들이 상산하향한 후 무질서가 사라진 공간[48] 에서 일어난 평범한 일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느 쪽이든 문화대혁명이 중국과 중국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영화인이 어떤 다른 시각과 해석을 다룰지도 흥미롭게 지켜볼 만 하다.

10. 한국과 북한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큰 이익을 봤다는 호사가들도 있다. 류사오치가 중심이 된 실용주의 정책은 외부 자본을 대거 유입하고 내부 경제도 활성화시켜, 이제야 겨우 경제 성장에 착수한 상황에서, 모든 기회가 중국으로 빨려 들어가 한강의 기적이 좌절될 수 있었는데, 마오쩌둥이 때맞춰 똥을 싸지르고 나라 문을 걸어 잠그는 바람에, 그런 사태를 맞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라는 논리이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문혁 때문에 중국의 소프트 파워가 뒤떨어지게 되면서, 한류가 중국에서 흥하게 되는 소소한 이득을 주기도 했다. 경제학계에서 "한국은 경제대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라는 표현이 대부분 문혁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 성장 단계에서 경쟁국가로 중국을 피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1960년대는 아직 냉전의 절정기였기에, 공산당 체제하의 중국에 대규모의 서방자본이 유입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게다가 서방이 중국 "대신" 한국에 투자를 결정할 정도로 한국의 여건이 좋았다거나, 동아시아에 투자처를 찾고 있었다는 전제 자체에도, 당시 한국의 발전상황을 보았을 때 무리가 있다. 당시 아시아 투자 1순위는 일본이었으며 차라리 필리핀을 택했다.

한국에서는 1960년 외자도입촉진법을 공표하는 등 외자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규제가 심하고 정치적 불안과 외자유치 노력부족으로, 1960~1965년까지 단 한건의 외자도 유치하지 못했다. 이후 1966년의 외자도입법을 기점으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1970년 수출자유지역조치법 등 좀 더 외국 자본 유입을 촉진하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결국 1970년대 초반에는 외국인 투자가 잠시 증가를 보였으나, 자본의 일본 편중이 심했고, 자본이 실제로 정부가 원하는 중공업에 투자되지도 않았던지라, 정부가 원하는 산업에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는 해외차관이 훨씬 선호되며, 결국 1973년, 다시 규제 정책으로 선회하게 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이 모든 면에서 크게 후퇴하여, 이로 인해 한국이 경쟁자가 사라져서 한국이 반사이익을 봤다는 주장이라면 일리가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의 발전이 오로지 중국의 경제적이나 사회적인 후퇴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 자체가 너무 극단적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위에서도 조금 언급했듯 이 문화대혁명로 인해 '중화 문명'의 유산이 중국 본토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남는 현상이 발생해버렸다. 가령 유교 서적, 의례 등도 중국 본토에 있던 게 워낙 많이 훼손된 바람에 한국 학계의 지원을 받아서 복원하는 형편이다.

한편 북한의 경우 1966년 9월 15일자 <로동신문>을 통해 이 사건을 '좌파 기회주의'라고 비난하자, 중국 홍위병들은 오히려 분노하며 대자보를 통해 김일성과 그 측근들을 성토했다.[49] 김일성이 이걸 계기로 중소 관계가 나빠진 틈을 이용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제대로 된 경제 성장을 통해 소련 입장에서의 대(對)중국 견제에 필요한 기반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바꾸고 남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국과의 단독 전면전을 위한 군비증강과 우리민족끼리 산업화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했고, 여기에 실질적인 전제군주제를 전면 도입하면서 나라 전체를 문혁 시절로 돌려놓았다. 실제로 문혁 시기를 보낸 중국인들은 북한을 보면서 향수를 느낀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영화계와 공연예술계가 쑥대밭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1970~80년대에는 북한 영화나 가극이 중국에서 크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 중국에서 크게 히트를 친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가 있다. 영화로 먼저 제작되어 중국 전역을 돌며 상영될 당시 문화대혁명에 지친 중국인들의 문화적 갈증을 풀어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암표가 5~10배 가량 비싼 값으로 거래될 정도였다.

2000년대 이후 북한 예술단이 중국의 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 중국인들이 공연을 구경하러 오는 이유가 중국 중, 장년층이 그 당시 중국에서 인기 있던 북한산 공연에 대한 향수가 있으며 당시 중국에서 상영하던 북한 영화, 가극에 등장하던 북한 배우들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이다.

11. 문화대혁명의 비극들

“그 시절에는 나만 그렇게 고통스럽게 산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랬어. 나는 비참한 축에도 들지 못하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얼마나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났는데! 문혁을 겪어보지 못한 당신 같은 외국인들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다 해도 절대로 알 수 없을 거야. 어떤 위대한 소설가라도 그런 끔찍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상상해서 쓸 수는 없다고. 나는 운이 좋아 94살까지 살아오고 있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 어떻게 또다시 그런 인생을 견뎌내겠어.”
94살의 왕청보 할아버지에게 취재진이 문혁 시절 얘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이를 거절하며

중국 공산당홍위병들 그리고 이들에 선동된 중국 시민들로 인하여 수많은 비극들이 발생했다.#
  • 유명 작가 톈한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개새끼’라고 하며 비판 대자보를 쓰기도 했다.
  • 볜중윈 부교장: 자신의 제자인 그 학교 학생 홍위병에게 고문과 구타를 당하다 죽었다. 당시 스승을 죽인 주범이자 당시 그 여학교 홍위병 지도부는 아래 항목, 문화혁명 부역자들 중 한명이였던 쑹빈빈.
  • 장홍빙(張紅兵) 변호사: 가족모임에서 어머니가 "마오 주석이 잘못하고 있다. 왜 류샤오치(劉少奇)를 박해하나?"라고 한 발언을 당국에 고발했다. 이미 아버지가 어머니의 발언을 당국에 신고했지만 장홍빈은 혹시 아버지가 사사로운(?) 부부 감정 때문에 또는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점 등등을 고려해 어머니의 반혁명적인 발언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았을까봐 직접 어머니의 발언 내용이 담긴 편지를 쓰고 자신의 홍위병 흉장까지 동봉해 홍위병 대표가 묵고 있는 숙소에 전달했다. 아들의 고발로 어머니는 곧바로 체포돼 감옥에 갇혔고 2개월 뒤 반혁명 분자로 몰려 총살당했다. 이후 대학생이 돼서야 자기가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 깨닫고 어머니의 복권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 사형이 잘못됐다는 판결과 함께 어머니가 복권되긴 했다. 그러나 때늦은 후회. #

12. 문화대혁명 부역자들

중국 문화대혁명에 적극 협조한 자들은 ‘35/45세대’였다. 이들은 1935년에서 1945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였다.

베이징 홍위병들을 지도한 조반파(造反派)의 5대 리더 중 4명이 35/45세대였다. 5대 영수는 베이징대 강사 녜위안츠(聶元梓·1921년생), 칭화(淸華)대 4학년 콰이다푸(蒯大富·1945년생), 베이징사대 조교 탄허우란(譚厚蘭·1937년생), 베이징항공대 4학년 한아이징(韓愛晶·1945년생), 베이징지질대 석사생 왕다빈(王大賓·1944년생)이였다.[50]

홍위병에 부역하여 대중들을 파멸과 광기로 이끌며 중국 사회를 세뇌시키고 비방하였던 대학생, 지식인들의 일부는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씩 태세전환하며 오랜기간 자신들의 홍위병 경력과 홍위병 당시 만행들에 대해 침묵한다.
  • 쑹빈빈(宋彬彬)[51]
    가장 먼저 홍위병으로 봉기했으며, 8월 18일 100만 명의 홍위병이 운집한 대회에서 마오쩌둥에게 홍위병 완장을 채워주었던 칭화대 여학생 출신이 있다. 마오쩌둥이 빈빈의 이름을 물어본 후, 이름이 봉건적이라며[52] 야오우(要武: '무장투쟁을 한다)로 개명하라고 한 적도 있다.

    정작 그녀는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우디르급 태세전환을 시전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MIT에서 공학박사를 받고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며 이후 사업가가 되는 등 출세가도를 착착 밞아나간다.[53]

    홍위병으로 베이징사범대부속여자중학교의 문화대혁명은 1966년 6월 2일 붙은 대자보에 참여했으며, 선생님들을 구타하는 폭력에 대해 수수방관[54]하면서 이에 볜중윈 부교장이 고문당하고 이후 몽둥이질에 맞아죽었는데# 이때 거행된 인민재판의 주동자 중 1명[55]이었고#, 그나마 이 사람은 당시 잘못했다고 소극적으로라도 사과라도 한 편으로 보이지만 쑹빈빈 역시 본인의 흑역사인 집회를 주도하며 군중의 광기를 유도하며 이후 인민재판 거행에도 영향을 끼친 주제에 부교장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자기는 억울하고 조사 결과 자기는 깨끗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주장한다.

    수십년 간 침묵해오다가 이후 문화대혁명 사과 열풍에 슬쩍 끼어들어서 면피성 사과를 한 같잖은 사과 뿐이기에 문화혁명 당시 학생들의 구타로 사망했던 볜중윈의 남편은 "쑹빈빈과 류진의 허위 사과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며 부인이 죽은 지 48년이 지났지만, 당시 일을 계획하고 사람을 죽인 이들은 여전히 법을 어기고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비판했다.###
  • 천샤오루(陳小魯·67)
    학교 책임자들과 교사, 동료 학생들이 비판투쟁과 노동 개조를 당하게 만든 주역. 본인도 직접 시인했다. 당시 문화대혁명 초기 조반파에 적극 가담했고, 학교 책임자들에 대한 비판투쟁도 조직했다. 이에 대해 늙은 보수로 낙인찍히고 문혁에 반대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무서워 인도주의를 위반한 핍박 행위를 제지할 용기가 없었다고 변명한다.(매일경제)][中혁명원로 천이 아들 "文革 과오 사과"

13. 현대 중국에서의 인식

당과 국가, 각 민족 인민들에게 심각한 재앙을 가져온 내란(给党,国家和各族人民带来严重灾难的内乱。)

1966년 5월부터 1976년 10월까지 진행된 '문화대혁명'으로 당과 국가, 인민은 건국 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겪었다.(1966年5月至1976年10月的“文化大革命”,使党、国家和人民遭到建国以来最严重的挫折和损失。)
공화국의 발자취—66년 : '문화대혁명' 10년 내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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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에서 (등소평과) 저녁식사 중 영화배우 셜리 맥래인과 한 해프닝이 있었다. 맥레인은 문화대혁명 당시 1970년대 초기에 중국을 방문했었으며, 모택동사상의 사회개혁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1979년 백악관에서의 저녁식사 중, 맥레인은 중국의 농장에서 야채를 키우는 교수를 만났을때를 회상했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연구를 중단하고 고된 노동을 하는 것에 슬픔을 느끼냐고 질문했고, 교수는 가난한 농부들과 함께 노동하며 배울 수 있기에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등소평은 이야기를 들은 후 잠시 멈춘 뒤, "그 교수는 거짓말을 했다"고 대답했다. 맥레인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카터 대통령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China's Quest," John W. Garver. Oxford University Press

2008년에 이원복 교수가 중앙일보에 낸 교양만화 <세계사 산책> '역사의 상처' 편에선 세계적으로 치욕적인 금기어 중 하나로 언급됐는데, 만에 하나 중국인들과 역사 얘기를 할 시에 이 사건 얘기는 안 꺼내는 게 예의이다. 학교에서도 문화대혁명이 발생했다는 것과 함께, 중,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마오쩌둥의 실책임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이후에 끼친 영향까지 자세하게 가르친다. # 어문(중국의 국어) 과목에도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도 가르치며 당시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비판한다. 또한, 문화대혁명을 겪은 세대들이 점차 늙어가고 있기 때문에 젊은세대에서는 이미 지난 세대들의 일로 여기는듯 하다.

중국의 공식언론에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단어도 꼭 따옴표를 붙여서 "文革" 또는 "文化大革命"이라고 한다. 원래 공산당 입장에서 혁명이란 단어는 긍정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워낙 문혁은 흑역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따옴표를 치는 것이다. 덩샤오핑 집권기의 개혁개방 이후로 국가 주석도 여러 번 바뀌고 사회가 점진적으로 바뀌며 현재 젊은 세대들은 문혁이 실책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배우면서 자란다. 현재 중국공산당 핵심세력이 바로 문화대혁명의 최대 피해자 중 하나[56]임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이 사건도 천안문 6.4 항쟁처럼 철저하게 묻고 은폐하고 싶겠지만 알다시피 그 규모가 묻을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기 때문에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직접 관련된 사람들만 수천만이 넘기 때문. 대신 가능한 한 언급하는 걸 피한다. 인터넷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해 언급하면 복불복 확률로 삭제되는 정도.[57]

14. 관련 인물과 사건

14.1. 관련 인물

14.2. 사건 목록

14.3. 기타

15. 만일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마오쩌둥은 이름만 남은 뒷방 늙은이로 전락했을 것이다. 대약진 운동의 후유증으로 인해 정치적인 입지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시 실권을 쥐던 국가주석 류사오치, 당총서기 덩샤오핑이 계속 집권했을 테고, 그들이 점진적으로 굴리던 실용주의적 개혁이 자리를 잡아, 10여년 먼저 개혁개방을 이끌었을지도 모르고, 류사오치-덩샤오핑-저우언라이가 실권을 쥔 기간 동안 대약진 운동의 후유증을 성공적으로 극복하여 능력을 입증했음을 감안한다면 중국이 10여년 일찍 경제성장을 이룩한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그래서 현재 중국의 평가는 10년간 국가기능을 정지시켰고, 다른 나라들이 10년 앞서가는 동안 중국은 20년 뒤떨어지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10년 동안 계속된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교육이 마비되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진학이나 더 이상의 교육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들의 학력은 대부분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육 수준에 머물렀다.

그나마 제대로 된 지식인들도 대다수가 강제 암흑기를 보내고 있어서 그냥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망했었다. 비슷하게 캄보디아킬링필드 사건이나, 북한고난의 행군 사건 때도 교육이 가장 타격을 입었다.[58] 이 시기를 유아나 학생 때 겪은 사람들의 문맹률이 두 나라 모두 엄청나게 증가했다.

한편 문화대혁명의 참화로 인해 소실된 문화유산들이 온존하면서 동아시아의 역사나 문화의 가치가 높여지고, 이를 바탕으로 한 학문연구와 콘텐츠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개방 후의 중국 경제에서 문화/관광산업이 새로운 축으로 부상했을 수도 있다. 전 세계 역덕들의 성지 중 하나가 됐을 것도 자명하다.

하나 여기서 알아둘 내용이 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중국의 대중문화는 여전히 낮은 수준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문화대혁명이 중국 문화가 가지고 있던 잠재력을 엄청나게 깎아먹었지만, 잠재력을 내보내는 것은 다른 내용이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상처를 딛고 일어서려는, 중국 대중문화를 번번히 좌절시키는 것은 무지막지한 검열로 대중문화를 압박하는 중국 정부다. 억압적인 환경에서는 뛰어난 소프트파워가 발휘되기 힘들다.

오랜 역사를 가진 중화권 문화, 표현의 자유라는 두 날개를 모두 달았던 홍콩 대중문화가 엄청난 번영을 누리다가, 중국에게 반환된 뒤부터 무너져버린 과정을 떠올리면 알기 쉽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중국 공산당이 대중문화를 탄압하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물론 문혁으로 대중문화 잠재력이 다 망가진 지금보다야 나았겠지만,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문화유산적 가치나 역사적 가치는 높아졌을 것이 분명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대중문화에 끼치는 영향은 별 차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전자인 역사와 문화유산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그 영향력이 크긴 했겠지만 말이다.

더불어 만약의 이야기이지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 극히 낮은 가능성이긴 하지만 천안문 사태가 학살 사건이 아닌 혁명이 되어서 중국이 민주화 국가가 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훨씬 자유로운 국가가 됐을거라는 말도 있다. 물론, 공산당의 간부들이 중국 인민들에게 순순히 권력을 양보했겠느냐는 반응도 있지만 천안문 사태가 극단으로 치달은 가장 큰 원인 자체가 어느 독재자가 빈사상태로 만든 나라를 기껏 살려놓았더니 우매한 대중들이 그걸 도로아미타불로 만드는 것도 모자라서 나라를 살려낸 동료 지식층들을 모욕하고 숙청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당시 지도층의 트라우마라는 것이 현재의 중국 지도부의 입장이다. 물론 애당초 그 독재자에 편승해서 같이 인민을 탄압하고 굶겨죽인 자들이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였던데다, 유일하게 마오쩌둥에게 저항했던 류사오치펑더화이는 천안문 사태 당시 중국 지도부에는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중국 인민들 입장에선 정말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지만,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핑계거리 하나 더 생기기는 했다.

비록 현재에 와서는 중국 공산당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현재 중국에서 엄격한 수준을 넘어 광적인 수준으로 행해지는 집회 금지 정책도 결국은 제2의 문화대혁명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국내 인권운동가들조차 이를 비난하지 못한다는 점도 이러한 가정의 근거가 될 수 있다.

16. 관련 매체

문혁은 중국공산당에 있어서 지우고 싶은 악몽 같은 기억이라 학문적으로 다루는 것은 거의 금단의 영역이 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 예술적인 면에서는 흥미로운 소재이기도 해서 1970년대 종반에 문화대혁명의 부정적인 면을 본격적으로 다룬 단편소설 <반주임>과 <상흔>[59]이 연재되어 엄청난 화제거리가 된 이래로 중국 현대사를 다루는 작품에는 거의 늘 언급되거나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며 해당시기에 대해 다루거나 비판하는 드라마도 상당수 나와있을 정도다.

덧붙여서 홍위병 생활을 해봤거나 문혁 시기를 살았던 실제 경험을 다룬 후일담 문학들이 1990년대 종반부터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10년 동안에 이렇게 전 인민들에게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는 건,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 마지막 황제》 - 마지막 부분에서 잠깐 나온다.
  • 《5일의 마중》 - 영화가 처음 시작되는 장면에서, 문화대혁명 당시 70년대 초 중국이 묘사된다.
  • 늑대 토템》(소설, 영화) - 문화대혁명 당시 내몽골에 유배된 한 지식청년의 이야기.
  • 패왕별희》 - 문화대혁명은 이 작품 후반의 중요한 배경이다.
  • 허삼관 매혈기》, 《인생》, 《형제》 - 모두 중국 작가 위화(余華)의 작품으로, 《인생》은 장예모 감독이 주연한 영화화하기도 했다. 영화는 원작의 뒷부분을 생략해서 조금 뜬금없이 끝나는 감이 있긴 하지만, 한 가족이 중국 현대사의 큰 사건을 죄다 거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서 중국 현대사를 알고 싶다면 볼 만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문혁은 주인공 가족에게 큰 슬픔을 가져다 주는 사건으로 나온다.[스포일러][61] 위화는 공산당에게 반체제 작가로 찍혀 있는 인물인데, 작품이 전반적으로 문혁 시기 전후를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 《부용진》 - 개혁개방 후 1세대 중국 영화로, 문화대혁명의 잔상을 그리고 있다.
  • 《붉은 스카프》 - 지앙지리의 자전적 성장소설. 어린 나이에 문화대혁명을 경험하며 사고를 바꾸면서도 과연 옳은 것인지 고민하는 청소년기의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 단순한 야설이 아니라 상관의 아내와 저지르는 불륜을 통해 시대상을 그리는 소설. 한국에서 북한을 배경으로 번안되어 영화화되고 있다.
  • 《사람아, 아 사람아》 - 주인공들 모두가 대학생 시절 문화대혁명을 겪었고, 문화대혁명이 주인공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 류츠신의 SF 《삼체》는 문화대혁명을 주요한 모티브로 삼고 있다.
  • 《중국만세!》 - 장리자의 자서전으로, 문화 대혁명 이후, 침체된 중국에서 태어난 저자 장리자의 일생을 담은 이야기다. 주인공인 장리자는 홍위병에 의해 집기가 도난 당하고, 외할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누명이 씌여 구타당했으며, 본인은 어머니를 대신해 탄도학 연구소에서 대신 막노동을 하는 대략 이러한 스토리이다. 문화대혁명 전후의 이야기가 세세하게 담겨있으며, 몰입감도 있어서 한번쯤 읽어볼만 하지만, 이 책은 현재 절판 상태라 구하기 어렵다.
  • 션판은 자신의 회고록, 《홍위병》에서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문화대혁명 전후의 중국 인민들의 삶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 영화 《몽상가들》에서, 주인공들이 마오쩌둥과 문화 대혁명을 두고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 나비부인》을 비꼰 《M.Butterfly》에서도 작품 전반에 걸친 배경이 된다.
  • 중국으로 망명을 왔다 서양 문물의 탄압으로 인해 주인공이 홍위병들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받은 《레드 바이올린》이라는 작품도 있다.
  • 《모닝 선》 - 해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로, 당시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국제다큐멘터리대회 대상을 수상했으며, EBS를 통해 국내에서도 방영되었지만, 중국 정부의 항의로 인해 시간도 기존보다 6시간 30분이나 늦어진 오전 4시 30분에 시작하는 등 1회성 방영으로 끝났다.
  • 《붉은 기와, 검은 기와》- 차오원쉬엔의 성장소설
  • 《대륙의 딸들》- 장융(1952)의 자전적 소설. 만주 군벌 시대 부터 시작하여 일제치하, 내전, 토법고로, 제사해 운동등 중국내 온갖 병크가 다나온다. 장융은 본인은 모택동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홍위병이였고 아버지는 쓰찬성에서 최고위급 간부였다. 그리고 간부답게 문혁당시 최고 수준의 고문과 박해를 당해 결국 아버지는 비참하게 죽는다. 중간 간부인 어머니만 중간급의 고문을 당해 생명은 유지. 장융 본인은 영국으로 귀화하여 책 출판. 서구에서 워낙 베스트 셀러라 그쪽에서 문혁을 얘기할 때 꼭 언급되는 책이다. 물론 중국에선 금서조치.
  • 중국 정권이 ‘안정 유지’를 위한 방어 조치를 지속하면서 종교를 암시하는 모든 단어가 제거되어 세속적인 당 선전 문구로 대체되고 있다. 신 문화대혁명: 종교적 내용 함의된 용어 금지돼 Bitter Winter, 2019-03-25
  • 1960년대로부터 부활한 문화대혁명 수법이 대중과 형제, 신앙 내부 사이의 반목을 조장하여 신앙을 통제한다. 펑챠오(楓橋) – 반(反)종교 마오주의의 부활 Bitter Winter, 2018-12-27
  • 한국의 소설 퇴마록에서는 아미파, 모산파, 화산파 등의 문파 중 일부가 한국에 적을 두고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 여러 문파들이 크게 탄압받았고, 계승자들 중 일부가 가까운 해외인 한국에서나마 사문의 맥을 이으려 한 것이다. 아미파 같은 경우에는 신물인 청홍검까지 한국에 넘어왔으니 사실상 절멸한 상황이라 할 수 있고, 모산파는 중국에도 관련 인물이 등장한 것을 볼 때 중국 본토에서도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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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준중국어 독음 및 한어병음: 우찬제지 원화다거밍(Wúchǎn Jiējí Wénhuà Dàgémìng).[2] 의외로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3] 그보다도 더 심하다. 분서갱유는 희생의 주 대상이 흡수한 타국의 문화였지, 자국의 문화마저 멸절시키지는 않았다.[4] 한국으로 비유하면 세종대왕 상을 때려부순 것이다.[5] 개혁개방이 실시되는 1980년대 이후로는 인적 자원 문제는 거의 해소되었다. 일단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시장 규모도 성장하면서, 대중 문화도 성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직도 중국 공산당에 의한 문화 검열이 상당 부분 남아있다는 것과, 그동안의 발달이 미약하다보니 미국이나 일본, 홍콩, 한국, 유럽 등지의 대중 문화에게 상당량 먹혀버렸다.[6] 물론 현재 시진핑의 행보를 보면 이러한 일기가 어느 정도 과장이 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주류 학계에서도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못해도 7년 이상 시진핑이 깡촌 토굴집에서 고된 삶을 살았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보고있다. 누나인 시허핑이 홍위병에게 폭행당한 후에 수치심에 자살하는 비극을 겪은데다가 바둑기사인 녜웨이핑과 친해진 계기가 반동의 아들로 손가락질 당하는 처지라는 점이라는걸 감안하면 속편한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어차피어릴적이나 젊은적에 고생해도 나중에 갑질하는 인성이 되는 경우도 뭐 흔한자라 [7] 물론 그 기간에 굴곡이 없지는 않았지만 중국에 비하면 그 정도가 훨씬 덜했다.[8]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북한도 나름대로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하기는 했다. 그래서 당대 전문서적들에서 한반도의 경제성장하면 북한을 뜻하기도 했다.[9] 참고로 1981년 당시의 중국의 경제규모는 호주보다도 작았다! 인구 수를 감안하면(호주의 인구는 대한민국의 절반도 안된다. 중국의 거의 1/50정도였다.) 국제망신이 될 굴욕인 셈이다.[10] 정확한 수치는 아무도 모르고 학자별로 기관별로 추정치가 제각각이다. 다만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에 중국 공산당에서 대약진 운동의 피해를 조사했지만 너무 엄청난 숫자가 나와서 은폐했다는 증언이 있기도 하다. 최소 3천만 명 정도로 보더라도 1970년도 대한민국 총 인구수가 약 3천 2백만 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말도 못할 사망자 수인 것은 틀림없다.[11] 총노선(總路線), 대약진(大躍進) 운동, 인민공사(人民公社)를 가리킨다. 중국 경제를 말아먹은 마오쩌둥의 대표적 오점들. 사실 마오쩌둥의 의도는 좋았다. 이념, 즉 정신력으로 성장하는 경제를 더욱 빠르게 한 단계 도약시키려고 한 것. 하지만 워낙 공상적이고 허황된 목표였기 때문에 이를 실행하다가 오히려 경제를 망쳤다.[12] 출처: 김재선, <모택동과 문화대혁명>[13] 젊은 시절 부농의 아버지 밑에서 회계사 노릇도 해보고 베이징대 사서도 해보았으며, 한 줌의 공산당을 이끌고 끝끝내 대륙을 장악한 인물이다. 저정도도 못 알아먹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14] 손쉽게 풀이하자면 극우부르주아라고 부른거다. 이 폭언의 수준은 굉장히 심하다고 할 수 있는데, 1980년대 한국의 국회의원이 빨갱이 소리를 들은 격이고 해방정국의 정치인이 친일파 쪽바리 소리를 들은 격이다. 자신이 충성으로 모시던 사람에게 충언을 올렸는데 이런 폭언이 돌아온 것이다.[15] 마오는 적어도 1943년 쯤에는 누구의 도전도 받지 않았다.[16] 당시 중국 최대의 공업지대는 일제가 만주에 건설한 공업지대뿐이었다. 이곳은 1980년대 개혁개방으로 상하이/선전을 개발하기 전까지 중국에서 가장 발전한 곳이었으며, 중국의 공업생산을 책임졌다.[17] 남한이나 북한이나 라디오가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보급된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으로 농어촌 지역에 라디오를 값싸게 대대적으로 보급했고, 북한에서는 제3방송이라고 하여 1955년부터 1975년까지 30년에 걸쳐서 유선라디오 방송망을 전국단위로 곳곳에 깔아댔다. 다만 선전목적이 작용했기도 한데다가 전기가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지역이 많았다는 점이나 라디오가 상당히 비싼 물품이었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KBS 1라디오만 들을수있게끔 다이얼을 고정시켜놓는 경우가 많았고, 북한에서는 유선라디오는 채널 하나만 들을수있게끔 했다.[18] 명대(明代)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로서 청화대학의 역사학 교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이 시절 명 황제 만력제의 능 발굴을 주도하기도 했다.[19] 대약진 운동 실패의 원인 중에 현장에 나가 있던 이들이 허위보고를 일삼았음을 알고 가정제에게 초과격 팩트폭력을 한 충신 해서 좀 본받아라! 라고 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20] 현대의 연구에서 《해서파관》은 딱히 마오쩌둥을 직접 비판한다기보다는, 일반적인 수준의 정치 비판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21] 天兵怒气冲霄汉은 마오쩌둥의 시구(詩句)에서 인용된 것이다.[22] 비판 대상자의 상반신을 구부리게 하고 두 사람이 옆에서 목덜미를 누르며 팔을 뒤로 꺾어 올린다.[23] 그것도 있지만 사실 근본적인 이유로는 당시 공안은 현재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권위가 넘쳐나고 의심가는 사람을 체포영장없이 바로 잡아가는 수준의 막강한 권한을 가진 조직이 아니었던 것도 컸다. 공안이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은 덩샤오핑 시기에 경제 성장으로 인한 범죄 증가를 막기 위해 지원과 권한을 대폭 강화한 1980년대 중반 이후이다.[24] 어떤 사람들은 마오가 집권 후에 왜 이리 변했냐고 당황할 수도 있는데 마오는 원래 이랬다. 당장 1949년~1950년대 초반, 건국직후 대대적인 토지개혁 - 숙청을 단행했을때 마오쩌둥은 전국의 숙청 과정을 감독하면서 직접 어느 지역에서 얼마만큼 죽이라고 할당치까지 제시하며 독촉하던 양반이었다. 그 예시로 토지개혁 단행 1년 만에 중국 전역에서 80~260만 명이 살해 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부터가 대단히 잔인한 인간인 것.[25] 그러나 이 발언에 대해 오역이라는 주장도 있다.[26] 참고로 캉성은 독립운동가였던 김산일본군 스파이로 모함하여 처형시킨 장본인이다.[27] 중국 경제성장률 통계를 보면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류사오치의 지도하에서 중국의 경제가 급속히 회복되었는데 이를 순식간에 마이너스 5.7%, 마이너스 4.1%로 만들었다. 그나마 홍위병이 하방되어 사회혼란이 어느정도 진정되면서 기저효과로 1969년과 1970년에는 경제성장률이 플러스 16.9%, 19.4%로 회복되기는 한다.[28] 장칭 평전의 번역.[29] 서양식 던스 캡(dunce cap)이다. 바보라는 뜻이다.[30] 최명해, 《중국·북한 동맹관계》, 도서출판 오름(2009), p.275[31] 마오 사망 이후 권력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공산주의 이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선부론"을 내걸고 노골적인 불평등성장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일반 중국인들에게 무리없이 받아들여지게 된 이유는 대부분이 문화대혁명과 홍위병들의 만행과 광기에 질려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도 한 10년쯤 지나서 불평등이 심화될 조짐이 보이자 1989년 천안문 사태라는 반발이 터져나오면서 최악의 대학살까지 벌어진다.[32] 문화대혁명 세대는 추천을 통해 명문대에 들어가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33] 사실 문화대혁명과 같은 운동들이 구시대의 악습을 제거한다는 목적도 있었다. 까놓고 인도의 카스트 같은 것들이 중국 내 민족들에게도 많이 있었는데 그런 악습에 찬동하는 사람들을 초토화해서 많은 악습이 사라지긴 했다. 오히려 이런 면에서 대규모의 혼란을 겪음으로 인해 구체제의 악습이 제거되는 효과는 있다. 예를 들면 패전으로 미군정을 겪어 잔재가 옅어진 일본, 6.25 전쟁으로 신분관습 등 구체제가 뿌리뽑힌 한국 등. 하지만 이런 부차적 효과만을 바라보고 참혹했던 격변기를 찬양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34] 특히 일부(일본공산당 혁명좌파, 게이힌 안보공투 등)는 아예 대놓고 마오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그리고 이들 중 게이힌 안보공투는 훗날 적군파와 통합하여 연합적군이 된다.[35] 물론 60년대에 청년시절을 보낸 좌파 정치인들 중에는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로 한국의 NL성향 주사파같은 극좌 파시즘 성향의 인간들이다.[36] 68혁명 당시 대중운동을 주도했던 가장 큰 계파가 바로 신좌파, 무정부주의, 마오주의였다.[한글번역] 하지만 당신이 마오 주석의 사진을 들고 다닌다면, 어떤 식으로든 누구와도 이뤄내지 못할 거야.[38] 사실 《8억인과의 대화》는 리영희가 직접 지은 서적은 아니고 번역서인데, 당시 기준으로는 중국에 대해 나름대로 자세하게 알 수 있는 르포집이기는 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좀 거시기한 게 사실이다.[39] 리영희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을 미제에 맞선다고 지지한 사르트르처럼, 서구의 수많은 지식인들도 비슷한 일을 저질렀다.[40] 가령 중국의 양판희를 모방해 혁명가극 창작 운동을 벌였고, 영화나 무용 등 나머지 장르에서도 혁명이라는 단어를 붙여 항일 빨치산 이래의 전통을 계승한 작품처럼 선전하고 다녔다.[41] 또한 한비야의 여행기에 따르면, 중국 소수 민족 중 하나인 나시족에 만연해 있던 남존여비 사상이 이때를 계기로 사라졌다고 한다. 거긴 여성들이 온갖 의무를 지고 돈까지 버는 반면, 남자들은 아편이나 빨고 빈둥거리기만 했는데, 문화대혁명 이후 공산주의 특유의 성평등 강조에 따라 중국 공안들이 거기에 하도 딴죽을 걸어서 그러한 악습이 상당수 사라질 뻔했는데, 개혁 개방이 시작되면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다만, 한비야의 책 내용이 대부분 그렇듯이 워낙에 뻥을 많이 친다고 비판을 받는 사람이라 반드시 교차검증이 필요하다.[42] 대학의 평생교육기관 기능 자체는 한국이나 다른 선진국에서도 통용되는 거라, 아무나 다닌다고 무조건 비판하기는 어렵다. 문혁 당시 중국 대학이 문제가 되는 건, 제대로 된 교육과 엄정한 심사조차 외면했기 때문이었다.[43] 사실 이 말은 마오쩌둥이오시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내린 평가에서 유래된 말이기도 하다. 이후 자신이 죽은 후에 덩샤오핑이 같은 평가를 내렸다.[44] He has put forward his views in favor of China’s political meritocracy and against one person one vote as a mode of selection for political leaders in two books, and in comments published in the New York Times, theFinancial Times, the Global Times (环球时报), and in regular columns published in theHuffington Post, in Project Syndicate, inthe Guardian, as well as the Chinese language periodical Nanfengchuang (南风窗, English: South Reviews) and a Chinese language blog site on Caijing(‘财经’).[45] 실제 중국 공산당의 개국공신이라 할 수 있는 1세대 원로들의 후손들인 태자당은 가문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어마어마한 재산을 축적하였다. 사실상 이들은 법위에 존재하는 신중국의 붉은 귀족들이다.[46] 몽땅 가져갔다는 표현이 많은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유물을 선발해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것만 옮겨졌다. 그 엄선된 게 69만점에 달한다는 게 함정이었다.[47] 홍위병의 동생뻘 되는 정도[48] 질서가 지켜지는 것이 아닌, 무질서가 사라진 것이다.[49] 출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개정판)> - 김성보-기광서-이신철 공저 /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웅진지식하우스. 2013. p226.[50] 그나마 이들은 몰락이라도 한 편이다.[51] 중국 공산당 8대 원로 쑹런충(宋任窮)의 딸.[52] 논어 옹야(雍也)편의 구절인 “문질빈빈, 연후군자(文質彬彬, 然後君子)"(겉의 꾸밈과 본질이 조화를 이룬 후에야 군자이다)에서 유래한 이름.[53] 일각에선 정신 차렸다고 하는데 쑹빈빈 개인이 정신을 차린 건 사실이나 이건 결코 긍정적 의미로 정신차렸다는 게 아니다. 본인은 마오쩌둥에 부역하여 중국 시민들과 홍위병들을 대상으로 선동질이란 선동질은 죄다 해놓고 정작 본인은 쏙 빠져나간 것이다. 쑹빈빈 이 사람도 결국은 문화대혁명의 주동자 중 하나일 뿐이다.[54] 말렸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책임회피이다. 본인도 말렸다는 주장 이후에 바로 둘러싸고 있던 학생들이 흩어진 것을 보고 별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저도 자리를 떠났었다고 시인한다.[55] 출처[56] 예를 들면 현 주석인 시진핑[57] 단순히 89, 64같은 숫자를 언급하는 것도 검열되는 것(...)과는 대조된다.[58] 탈북자들의 회고를 보면 고난의 행군으로 봉급과 식량 배급이 끊어지자, 학교 선생님들도 살기 위해서 너나 할 거 없이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거나 학교 기자재를 팔아서 식량을 구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지 않겠는가.[59] 이 작품이 엄청난 화제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1970년대 종반과 1980년대 초반 당시의 문화대혁명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들을 '상흔문학'이라고한다.[스포일러] 후반부에 주인공 딸이 결혼 후 임신을 하여 병원에 입원하는데 문제는 병원에 있던 의사이란 의사들은 죄다 반동분자로 분류돼서 홍위병들이 잡아가 버려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병원을 지키고 있었던 건 홍위병 학생들뿐이었던 것. 한 마디로 병원에 의료인은 없고 웬 중고딩들이 의사, 간호사를 자칭하면서 병원에 진을 치고 있었던 거다. 상황이 걱정된 주인공이 공산당원인 사위에게 잡혀간 의사를 하나 빼와 줄 수 있겠냐고 부탁해서 대학 교수급 전문의를 데려와 진료를 보게 하려 했지만 오랫동안 굶주렸던 의사가 주인공이 준 빵을 급하게 먹다가 혼절하고 만다. 결국 딸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놈들이 어버버 하고 있는 가운데서 출산 중 과다출혈로 죽고 말았다. 그나마 그 와중에 주인공 딸의 아들, 즉 외손자는 무사히 태어난 건 다행이라고 해야하나.[61] 장기간 기아를 겪은 사람이 급하게 고탄수화물, 고단백질 식품을 먹으면 목숨이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