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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를 묘사한 그림[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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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옛 것을 배워서 새 것을 비방하는 자들은 모두 멸족 시키십시오."
《사기》의 기록 중(中).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파묻음'이라는 뜻으로, 기원전 213년과 기원전 212년에 일어난 별개의 두 사건을 하나로 합쳐서 일컫는 것이다. 실용서를 제외한 사상서를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탄압책으로 중국에서는 분갱(焚坑)으로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사기》의 기록 중(中).
진나라의 시황제는 이전까지 중국 대륙의 기나긴 혼란을 종식시킨 유능한 군주였지만 이 사건 하나로 인해 폭군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실제로도 이후 폭군의 행보를 걷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며 진나라의 멸망을 초래했다.
후에 항우는 초한전쟁 중 주가 등의 유학자들에게 욕을 먹자
"시황제 그놈이 왜 그렇게 너희들을 탄압했는지 알겠다."
며 이기기만 하면 이것을 벤치마킹하려는 기미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그럴 기회는 없었지만. 항우의 성격과 신안대학살을 봤을 때 만약 천하를 얻은 자가 유방이 아니라 항우였다면 진짜 실행했을 가능성이 높다.[2][3][4]2. 발생
진시황 치세때의 분서갱유, 즉 전국적인 사상 탄압의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받는 사건은 기원전 213년 함양에서 열린 연회에서 일어났다. 이때 전국에서 부로(父老) 70여 명을 초대해 연회를 벌이다가 참가자 중 한 명인 주청신이 황제의 공덕과 군현제의 실행을 찬양하자 다른 참가자인 순우월이 옛 것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이때 당시 자리에 있었던 이사가 옛 사상과 제도에 매달려 있다면 통치에 해로울 것이므로, 의약 · 점술[5] · 농업 등의 책을 제외한 제자백가의 책들과 시(《시경》), 서(《서경》), 진나라를 제외한 국가들의 역사서를 불태울 것[6]을 주장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는데 이것이 분서(焚書) 사건이었다.
1년 뒤 후생(侯生)과 노생(虜生) 등이 실패로 끝난 불로초 탐색을 놓고 "불로초 따위에 정신이 팔리다니, 이건 책을 다 불태워서 고전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임."이라는 식으로 진시황을 비난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의 불온 사상가 460여 명이 함양에 매장되었는데 이것이 후대에 갱유(坑儒)로 불리게 되었다. 갱유에 대해서는 사실이 분명하지 않고, 이설(異說)이 많아 후대의 유학자가 꾸며낸 것이거나 그게 아니어도 실상이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3. 원인
3.1. 실제사건
진시황은 여러번의 암살위협을 받고 매일 120근의 문서를 검토결재 하는 등의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불로불사에 매우 집착했는데, 자칭 도를 깨우쳤다던 후생, 노생, 한중, 서복 (혹은 다른 이름으로 서불) 등의 여러 방술사를 곁에 두었다. 이들은 진시황에게 불로불사를 위한 불노초를 구해온다고 하고 여러번 진시황을 꼬드겨서 각종 비용 명목으로 거액을 타내 불노초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떠났지만, 대부분 돌아오지 않거나 행방을 감추었다.방사들에 대한 진시황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고 결국 방술사들을 생매장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여기에 몇몇 유가도 끼어들었는데, 아마도 군현제에 사사건건 반대한 몇몇 선비가 이들 방술사들과 함게 묻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명령의 즈음에 이사의 제안으로 분서도 행해지는데, 사실은 두 사건은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역사적 사건 때문에 이 분서갱유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이 갱유의 주된 타깃은 방술사이고 유가는 군현제에 반대한 유가에 한정되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진나라 시기와 가까운 한나라의 대유학자인 동중서나 가의가 분서에 대해서는 진시황을 매우 규탄했지만, 갱유에 대해서는 그다지 비판하지 않았다는 점도 근거로 될 수 있다.
3.2. 배후의 사건
이 사건은 대개 봉건제적인 질서를 옹호하던 유가가 군현제를 철저히 시행하려 하던 법가 통치에 저항한 시도로 보인다. 봉건제는 책봉을 받아 특정 지역을 대대로 다스리는 대리인을 필요로 하여 지방의 자치적인 질서를 용인하는 반면, 군현제는 전국 통치를 황제가 임명하는 지방관을 통해 철저히 황제와 직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유가(儒家)는 기본적으로 주나라를 중심으로 한 과거의 질서 체계를 옹호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禮)로써 존중받으며 통치자에게 충고를 보태는 봉건제적 신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법가(法家)는 신료로 임명받는 인물은 철저히 법에 의거한 실무 수행만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법을 거스르는 신료의 자율성과 세습이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혈연 관계 혹은 혈연 관계로 의제되는 인물을 각 지방의 제후로 임명하여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종법제도적인 질서가 왕과 제후 사이의 혈연의 거리가 멀어진 서주 시대 후반부터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고, 하극상이 벌어진 것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를 대체할 새로운 통치 구조가 바로 군현제로, 세습되지 않고 철저히 군주에 의해 임명되는 행정 관료인 태수와 현령을 제후 대신 배치하여 고인 물이 썩는 현상을 방지하고 예를 통한 막연한 통제 대신, 법을 통한 철저한 통제로 이들을 제어하자는 이론이었다.
진(秦)나라는 기원전 4세기 상앙의 변법 이래 법가(法家)의 군현제 질서에 완전히 익숙해진 국가였으나, 10여년 만에 급속한 통일을 이루면서 영토가 몇 배나 커졌고, 당연히 각지의 기득권 세력이 표면상으로는 사라졌으나 언제 들고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전국을 36군으로 편성하여 군현제의 틀을 씌워는 놓았으나, 이전까지의 중국은 애초에 각지의 문화 자체가 철저히 달랐고, 정치적인 의견도 완전히 달랐다.[7]
이로 인한 분열을 막기 위해 진시황은 문자의 통일, 도량형의 통일, 도로 규격의 통일[8] 등을 추진했다. 흔히 통일 중국의 첫 번째 다리를 놓았다고 평가되는 이러한 업적들과 같은 맥락에서 사상적인 통일을 꾀하는 과정에서 분서갱유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통일 중국의 기초를 닦은 진시황과 사상을 탄압한 폭군 진시황은 전혀 둘로 나누어볼 인물이 아니다.
역사 저술을 불태운 것도 진나라의 정통성을 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본래 역사서는 함부로 쓸 수 없는 책으로 철저히 관의 주도에 의해 쓰이는 책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으로 각국이 저술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국 각지의 역사서가 존재하는 상황은 세계 유일의 황제를 추구하던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결과 분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선진(先秦)시대의 역사서가 《춘추》, 《국어》, 《죽서기년》 정도만 남은 것은 후대의 역사가들에겐 탄식 거리지만.[9][10]
4. 분서갱유는 과장인가?
춘추전국시대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제자백가의 서책들과 대부분의 역사책이 불타 버려서 현재 전해지는 것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며, 분서갱유로 이름만이 남아있을 뿐 아예 소실된 책들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벽을 파고 책을 숨기는 등 법을 피해 책을 지키려고 필사적이었다. 참고로 이 무렵에 사용된 책은 당연하겠지만 간독이었다.[11] 분서갱유는 유가에 한한 것이 아니라 역사나 문화 전방위적으로 행해졌다.다만 일각에선 분서갱유 과장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의 <분서갱유> 항목 그러나 출처가 불명확하여 지지하는 학자가 많은지는 알 수 없다. 영어 위키백과의 Reasons for skepticism 단락 각주에 따르면 Martin Kern, Michael Nylan 등의 학자가 주장한 관점이다.
서적 탄압을 피해 유생들이 서적을 숨기거나 아예 암송하는 식으로 대처했는데도 그 이전의 기록이 아예 통째로 소실된 수준까지 간 건 진시황 만큼이나 항우의 탓도 컸던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지나가는 길에 고을이 있는 족족 학살로 쓸어버리는 것에 휘말려서 책 내용을 기억하던 사람들이 대량으로 죽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다. 실제 나라에서 책을 모두 관리하는 방식으로 거두어갔다면 그 책들의 거의 대다수가 함양에 있을텐데 그 함양에서 학살과 방화를 저지른 사람은 다름아닌 항우였다.
분서는 둘째치고 갱유도 과장된 것이, 한 고조 유방 밑에서 예법을 부활시키고 유학을 다시 세우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숙손통만 해도 제2대 황제인 호해 밑에서 눈치보며 일하고 있었다. 그외에도 유학자 여러 명이 호해에게 진승의 반란에 대해 예기 하는 것을 봐선 유학자라고 모조리 죽이거나 한 것은 과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진나라 밑에서 눈치보고 숙이는 유학자들은 최대한 봐주며 살려줬다고 봐야 한다.
덧붙여 분서갱유가 유명해서 그렇지 자기네 사상과 맞지 않는 책을 없애는 일은 역사속에서 많이 존재했고, 심지어 조선에서도 제3대 태종 때 음양의 술수니 뭐니 하는건 허황된 거라며 이에 해당하는 책을 소각할 것을 지시한 기록이 있다.
5. 결과
결과적으로 보면 유가를 일시나마 크게 위축시킨 사건이었다. 그 증거로 분서의 풍파 때문에 현전하는 중국의 고서 중에 기원전 3세기 이전의 것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진나라의 멸망과 한나라의 건국을 거치면서 각지에서는 고대의 경전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는데, 문제는 기억과 기록 간의 대립이었다.기본적으로 간독은 필사본이었고, 대부분은 글을 외운 유학자들의 기억을 중심으로 경전들이 복원되었다. 이 시대에는 학자가 되려면 책 몇권을 외우는 것은 필요조건이었다. 애당초 책 자체도 희귀했을 뿐더러[12], 엄청나게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개인이 사사로이 가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동시대였던 중동이나 인도, 그리스에서도 대부분의 서적은 학자들 머리속에 들어있었다. 책 문서 참고. 심지어 고대 바드들은 문자 없이 자기 머리 속에 책 몇 권에 해당하는 지식을 욱여넣고, 지식 계층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생매장당한 460명의 학자들은 중국 전토의 기준으로 많은 숫자도 아닌 덕에 그 정도의 피해는 복원할 수 있었다.
결국 한나라 초기에 《시경》, 《서경》, 《예기》, 《춘추》의 4경이 모조리 복원되었다. 《주역》은 애초에 점치는 책으로 분류되어 분서갱유의 화를 피했고, 《악경》은 발견되지도, 암송되지도 않아 영구히 소실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각 복원본마다 내용이 달랐다는 것이다. 책을 외운 사람들끼리도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고, 필사본 시대에 작성된 책이라 글자가 좀 다르다던지 해서 내용이 바뀌는 일도 흔했다. 결국 이걸 정리해서 논리화하는 학문이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한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훈고학(訓詁學)이었다.
훈고학으로 성립된 4서 3경을 금문경(今文經)이라고 부르는데 대표적으로 《시경》의 삼가시[13]와 《금문상서》가 있었다. 이후, 《시경》과 《효경》, 《예기》, 《춘추》 등은 노공왕(? ~ 기원전 129)이 공자의 집을 철거할 때 과두문자로 쓰인 공자 대 원문이 발견되면서 원전을 보존하고 있다.[14] 다만 전한시대에는 고문경이 위서가 아니냐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금문경이 대세를 차지하고, 동중서 등의 유가 정책도 이를 기반으로 시행되었으나, 전한 말기 유흠이 고문을 정리하면서 권위를 회복하기 시작하여 후에는 고문경의 권위가 더 높아졌다.
이런 전례들 덕에 동아시아의 도서 보존은 상당히 뜻밖의 방식으로 이뤄지기도 했는데 가령 "집을 고치려고 벽을 허물며 들보를 들어내 보니 책이 숨겨져 있더라." 하는 일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한대부터 일어난 고문(古文)과 금문(今文), 비기(祕記)의 떡밥이 이렇게 일어난 것으로, 분서갱유로 사라진 경전을 학자들이 기억력에 의존하여 복구함으로써 금문이 형성되었으나 학파마다 복구된 내용이 달라 논쟁이 일어나는 찰나에 저런 식으로 숨겨 두었던 책이 발견되자 발견된 책들이 원전이라고 권위를 주장하는 이들이 나와 고문이 형성된 것이었다.
《시경》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6편이 실전되었고, 모형과 모장이 주석을 달았는데 이것을 《모시》(毛詩)라고 한다. 또 한편으로 《고문시경》의 발견 이후에는 《금문시경》이 묻히는 바람에 현재는 전하지 않으며 《한시》만 본전이 아닌 외전이 10권 전한다. 반면, 《상서》는 오히려 금문경이 어찌어찌 현대까지 전해졌으니, 오히려 다른 책들과 같이 노공왕이 찾은 고문경의 원전이 소실되었다. 중간에 동진의 매색이 고문경을 다시 찾아서(?) 바쳤고, 상당 기간 동안 진본으로 인정받았으나 후세에 위작임이 밝혀져 《위고문상서》라 하여 원전의 가치는 없는 것으로 여긴다.
중국에서는 이후에도 여러번 이런 조치가 벌어졌다.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때도 크고작은 금서령 또는 분서령이 일어났다. 청나라 때는 문자의 옥,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문화 탄압이 더 일어났다.
분서갱유로 법가 통치 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묵가는 완전히 박살이 났다. 즉, 묵가는 그 이념을 따르는 집단도 진나라에 의해 해체되었고, 경전도 소실되어 이후로는 명맥이 끊어졌다. 다만 유학은 계속 살아남았고, 진나라의 멸망을 이끈 유방과 항우는 둘 다 유학을 경멸한 인물이었지만, 한나라 건국 이후 유학은 정권의 안정을 위협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정권 유지에 이용되었다.[15]
6. 창작물에서
《아랑전설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설정 진의 비전서는 세 권을 모두 소지한 주인에게 불패의 힘을 부여하는데 시황제는 "이 책의 힘을 가진 자가 자신을 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두려워하며 이 책을 제거하려 했지만 명분이 없다 보니 결국 "모든 서적을 제거한다!!!"며 분서갱유 사건을 벌인다. 그러나 그 난리통에도 진의 비전서는 한 권도 소실되지 않았다. 그 후 비전서는 기스 하워드가 전부 소지하게 된다.《Fate 시리즈》에서도 이문대의 황제가 수천년 동안 온갖 반란을 겪으면서,[16]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뿌리부터 완전히 뽑아 버리기 위해 수도 함양에서 자신을 찬양하는 걸 제외한 지방에서 글이나 노래를 익힌 사람이 있으면 위성 궤도 상의 장성에서 폭격을 날려 마을째로 소멸시켜 버리는 방식으로 시행하고 있었으며, 인게임의 스킬명은 더 가관인데 "책은 불태워라"와 "유학자는 묻어버려라"의 두 가지 스킬로 나뉘어 구현되었다.
《화씨 451》에서도 핵심 주제로 등장하는데 인간의 생각을 통제하기 위해 불온 서적들을 불태운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3편 최후의 성전》 중반부에 나치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고 책들을 한데 모아 불사르는 모습이 보인다. 인디는 얼떨결에 아돌프 히틀러와 마주쳐서 노트에 사인도 받는다.
《멜랑꼴리》라는 스포츠신문 신문만화 <복수의 책> 편에서 시황제는 "책 속에 모든 길 있다."는 스승의 말씀을 생각하여 공부를 하는데 특별한 책을 보게 되자 책에 적힌 방법을 보고 책에 배운대로 시전을 했으나 궁녀의 비웃음을 사가고 말았다. 결국 몹시 화가 난 시황제는 특별한 책과 관련된 책을 모두 태워버리라는 명을 내리게 된다.
《고우영 초한지》에서는 자신에게 반발하는 자들이 생겨날 가능성을 없애고자 분서갱유를 실시한다. 그 과정에서 "만화책은 어떻게하냐?"는 병사의 질문에 "그건 놔둬도 된다."고 하는 소소한 개그를 보이기도. 그리고 분서갱유가 시작되자 과거 시험에서 일등을 한 장원 합격생은 어머니를 외치며 슬피 우는데... 사실 이건 역사적 고증에 어긋난다. 중국에서 과거 시험은 진나라보다 훨씬 이후인 수나라 때에야 비로소 등장했기 때문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네번째 확장팩 판다리아의 안개에서는 폭군 레이 션이 판다렌 학자들을 학살하고 책을 불태우는 사건을 일으키는데, 볼 것도 없이 이 사건에서 따왔다. 당장 레이 션 부터가 진시황이 모티브인 캐릭터.
《맹꽁이 서당》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건인데, 학동들이 워낙 글 공부를 싫어하다 보니 오히려 분서갱유가 되면 책이 다 없어져서 글 공부도 할 필요가 없어져 좋을 것이라고 태연하게 언급한다. 또는 그 시절엔 모두 글공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때가 천국이라고 하거나 최고의 성군은 분서갱유로 책을 없앤 진시황이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이 소리를 들은 훈장과 마을 어른들은 그야말로 기절초풍...
《광마회귀》의 무림 세력 중 일각을 차지하고 있는 서생 세력은 이 분서갱유를 시초로 서책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집단이라는 설정이다. 당시에는 일반적인 서책과 무공비급의 경계가 모호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무공비급 또한 대대적으로 보유하게 되었다는 식의 핍진성을 배경으로 한다.
《당신만 몰라!》에서 5화에 언급되는데, 과거 조진희가 할렌과 데이트하고 돌아가는 길에 바바라맨을 만나 기분이 나빠져 부하들을 갈궈 부하들이 자발적으로 바바리맨을 퇴치하는데, 바바리 코트는 태우고 바바리맨을 얼굴만 남기고 땅에 묻어 분서갱유라고 말한다.
《노빈손 시리즈》에서는 생전 먹어댄 약의 효과로 부활한 진시황이 자신을 속이려 든 빈손 일행에게 분노해 화풀이로 책을 다 태워버리라고 하자 돌아온 대답이 '책은 분서갱유 때 진작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빈손 일행을 생매장하라는 지시에는 '사람을 하도 묻어서 이제 남은 땅이 없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디아블로 4》오리지널 엔딩 이후 빛의 대성당이 호라드림을 부정한 이단이라 선포하고 관련된 유산을 전부 압수 후 말살하기 시작했다. 로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빛의 대성당이 호라드림 유적지들을 파괴하고 호라드림 사람들이 집필한 서책도 태워서 없애버리는 것 같으며, 로라스 나르는 그나마 남은 지식이라도 보존하려고 로라스의 기록을 집필했다고 적었다. 이때문에 케인의 기록이나 티리엘의 기록 같은 서적들도 분서당해 말소될 위기에 처했다.
7. 현대의 인터넷 용어
라이트 노벨이나 만화책 등을 읽고 그 내용에 분노한 독자가 책을 불태워서 인증하는 것. 즉, 서적에 관련된 상품파괴인증을 에둘러 말하는 표현이다. '갱유'에는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분서라 하기도 한다.하는 거야 자기 마음이지만[17] 여태 평이 좋았던 작가의 작품에서 분서갱유 인증글이 나타나거나, 단순 처분을 넘어서서 분서갱유까지 가는 팬이 많아진 작품이라면 확실히 인기에 심각한 위험 신호가 왔다는걸 어렵잖게 짐작 가능하다.
8. 같이 보기
[1] 단, 위 그림은 진시황제가 익선관을 쓰고, 황룡포를 입은 오류가 있다.[2] 다만 항우는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과정에서 그곳에 있었던 책들도 불태웠으므로 갱유는 몰라도 분서는 이미 실행했다. 사상적인 탄압이 아닌 순수한 분서로서는 진시황보다 오히려 항우가 한 것이 훨씬 더 심각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3] 사실 진나라에서 책을 불태운 건 사실이지만 전부 다 태운 건 또 아니고 각종 학문에 대한 서적을 한 권씩은 남겨두어 함양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를 항우가 와서 죄다 태워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보니 4서 3경 중에서도 몇몇은 소실되어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고, 결국 한나라 때 유학은 훈고학이 주류가 되었다.[4] 이때 소하는 함양에 보관되어 있었던 전 중원의 기록을 빼낸 후, 이것이야말로 중원에서 제일가는 보물이라고 말하면서 유방에게 바쳤다. 그리고 한나라는 이 기록에 적힌 대로 세금과 공물을 거두고, 군사를 징병하여 그 물량으로 초나라를 물리치는데 크게 기여했다.[5] 《역경》(易經)이라고도 불리던 《주역》(周易)은 당시에도 점(占)을 치는 책으로 분류되어 분서갱유의 화를 피했다.[6] 본래 춘추전국시대에는 각국마다 역사서를 편찬했는데 현존하는 해당 시대의 역사서는 없다. 흔히 헷갈리는 사항인데 공자의 《춘추》는 원래 역사서가 아니었다. 《춘추》는 역사에서 예에 걸맞은 것 혹은 예에 어그러진 것을 지적하여 군주와 제후를 바로잡기 위한 목적을 갖고 쓴 책으로 역사평론서에 가까운 책이었는데 하도 그 시대의 기록이 남은 게 없어서 역사 기록으로 의미를 갖게 된 것이었다.[7] 애초에 춘추시대부터 진나라의 통일까지 텀이 530년이나 되니 모든게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초나라 지역은 완전한 중원도 아니었다.[8] 당시 군사력의 중심이었던 전투 마차의 빠른 동원을 가능하게 하여, 군사와 행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9] 사마천의《사기》조차 이보다 100여년 뒤에 나온 책이며, 그나마도 몇몇 왕들은 뭘 했는지 기록이 없는 등 사마천이 그렇게 고생하며 썼는데도 이 정도였다.[10] 덧붙여서 초중기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부실해서 연구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이유인 즉슨, 고조선은 옆에 위치한 연나라와 적대하고, 바다로 접한 제나라와 활발히 교역했던 만큼 제나라와 연나라의 역사서에 고조선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서술되어 있으리라고 추측되는데 제나라와 연나라의 역사책이 분서로 죄다 날아가면서 고조선에 대한 기록들도 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기》, 《정사 삼국지》, 《한서》 등에 고조선에 대한 기록들이 일부 실려있기는 하지만 그리 상세하게 실려있지 않기 때문에 초중기의 고조선이 어떤 나라였고, 어떻게 세력을 확장해나갔는지에 대해서 전적으로 신화와 고고학에 의존해야 하는 실정이다.[11] 종이가 발명된 것은 채륜이 활약하던 후한시대였다.[12] 당시 중국은 목간을 쓰고 있었고, 중동에서는 양피치를 쓰고 있었다.[13] 《노시》, 《제시》, 《한시》[14] 고문경(古文經)의 발견으로 노공왕은 유교 역사에 빠지지 않는 인물이 되었지만, 공자의 집을 철거하려 한 점에서 보이다시피 노공왕은 유교 학자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사냥과 유희를 좋아하는 인물로, 공자의 집을 철거하려 한 것도 자기 궁전을 넓히려고 그랬던 것이었다. 노공왕은 노나라의 왕이 아니라 전한 경제의 서자였던 유여가 제후국인 노나라에 봉해진 것이었고, 자신의 유흥을 위해 백성들을 착취한 자에 불과했다.[15] 사실 유방은 유학자들을 싫어해서 그들이 쓰는 관에 오줌을 누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탄압하지도 않았고 필요하면 데려다 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에가 숙손통으로 그들의 제자들도 통일 이후에는 관리로써 대접했던 것. 반면 항우는 바른말하는 선비들을 싫어한 건 유방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선비들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 죽였고 함양의 서책들도 죄다 불태우는 등 아예 유가와는 상극에 가까운 인물이었다.[16] 냉동 수면시킨 자들 중에 도원 브라더스나 그쪽 녀석들은 절대로 깨우지 마라고 경고할 정도. 이외에 진양옥이 대서왕의 반란을 언급하는 등, 범인류사의 중국에서 일어났던 반란들 중 몇몇이 이문대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났던 듯하다. 게다가 형가를 잊을 정도로 암살 시도도 수없이 겪었다.[17] 사실 이유야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냥 전개가 맘에 안 들어서, 커플링이 맘에 안 들어서, 캐릭터가 맘에 안 들어서 등등. 그래도 보통은 책이나 관련 굿즈를 처분한다고 쳐도 원형 그대로 처분할 뿐 태우거나 뽀개는 식으로까지 인증하지는 않기에 이 수준까지 갔다면 분서갱유를 시전한 독자나 팬들의 마음이 단단히 빡돌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