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09:30:28

정조(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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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1. 임오화변과 세손 시절1.2. 즉위1.3. 홍국영 숙청1.4. 은언군의 유배1.5. 규장각과 초계문신제1.6. 탕평책 - 준론탕평1.7. 장용영 설치와 수원화성 건설1.8. 숭렬전 설치1.9. 대전통편1.10. 병신정식1.11. 신해통공1.12. 문체반정1.13. 서체반정1.14.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1.15. 사망과 무덤1.16. 정조 독살설과 수명,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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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전략) 왕은 성인(聖人)이었다. 사도(斯道)의 정체를 밝혀내고 사도(斯道)가 지향할 바를 주장하였다[1]. 왕이 한 일은 복희·신농·문왕·무왕이 했던 일이며, 왕이 한 말은 공자·맹자·정자·주자가 한 말이었다. 앞으로 천세 후에 옛것을 논하는 자가 있다면 아마 이를 《시경》의 청묘(淸廟) 악장에다 실어 연주하여 역시 한 사람이 창(唱)을 하면 세 사람이 감탄을 하리라. 여기에는 특히 남들의 귀와 눈에 배어 있는 천덕(天德)·왕도(王道)만을 추려 뽑아 굉장한 유자(儒子)이고 현철(賢哲)한 임금이었던 그의 법도를 이 정도로 소개했을 뿐이다.
정조 묘지문

1.1. 임오화변과 세손 시절

동복형 의소세손이 2살에 요절한 뒤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실질적 장손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영조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영조는 정조가 의소세손[2]의 상중에 태어났다고 처음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러나 정조가 어린 나이에도 그 까다로운 영조조차 만족시킬 만큼의 총명함과 학문에 대한 열의를 보이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예뻐하기 시작했다. 신료들 앞에서 대놓고 정조의 재능을 하루가 멀다 하고 자랑했으며 300년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있도다라는 몹시 파격적인 발언을 하기에 이르른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는 임오화변의 무서운 광경을 보고 11세의 어린 정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때 영조의 서슬퍼런 어명이 내려지자 세손 정조만이 마지막까지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두손을 빌며 애원하는 눈물겨운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조는 매정하게도 "누가 얘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했느냐. 세손까지 뒤주 안으로 들어가길 바라느냐. 어서 데리고 나가라"며 정조를 쫓아냈다. 사도세자 사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폐서인이 되어 신분이 박탈되었으므로 궁궐에 있을 수 없었기에 외조부 홍봉한이 있는 사가로 내려가지만 곧, 어머니와도 생이별해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경희궁으로 돌아간다. 당시 정조는 상중(喪中)이었지만 영조가 교서를 내려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키면서 더이상 상복을 입을 수 없었고 《한중록》은 그 때 정조의 모습을 두고 "슬퍼 우는 소리가 하늘까지 닿았다"고 썼다.

이 때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하는데 영빈 이씨로서는 자식을 대처분이라는 말로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그에 대한 죄책감도 겹쳐 손자에게 정말 극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3] 이 생이별은 오히려 혜경궁 홍씨의 피눈물을 머금은 가슴 아픈 결단에 가까웠다. 어린 정조가 어머니와 떨어지기 싫어하자 영조가 "그래도 어미를 이토록 그리워하는데 같이 사는게 낫지 않겠나"라고 말하자, 혜경궁 홍씨는 혹시 정조가 할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한다며 영조가 질투할 것을 우려해서 단호하게 떼어놓았다고 한다. 영조의 정신나간 수준의 편집증과 그 결과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혜경궁 홍씨의 이러한 걱정은 절대로 기우가 아니었다.[4]

왕세손 시절에는 영조에게서 극진한 총애를 받았는데 《영조실록》에서는 한번도 세손을 꾸짖지 않고 칭찬만 할 정도다. 영조가 말년에 치매가 매우 의심될 정도로 판단력이 많이 흐려졌음에도, 죽기 직전까지 세손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굳건했다. 아들 사도세자에게는 정신병에 걸리게 할 정도로 혹독하게 대한 것과는 대조적인데 이런 세손에 대한 편애가 임오화변의 원인 중 하나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영조는 사도세자는 쳐다도 보지 않은 반면 원손인 정조는 심심하면 불러 글을 쓰게 하고 책을 읽어주거나 읽어보게 하는 등 엄청나게 예뻐했다. 결과적으로 임오화변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정조가 아버지에게 부채 의식을 갖게 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정조가 죽은 아버지에게 보였던 효심은 트라우마에 가까울 정도로 격렬했는데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 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임오화변 이후 정조는 일부러 꼬투리를 잡으려 해도 불가능할 정도로 모범적이고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도 있었으나 영조의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한 정조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살아남아서 왕위에 오르려면 영조에게 후계자로 인정을 받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다만 이는 임오화변 이후 출궁되었다가 다시 궁으로 들어온 직후에 해당되는 것으로 출궁 당시의 정조는 11세였다.

정신병이라는 핑계를 대기는 했어도 죄인인 사도세자의 아들로서는 왕위를 이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영조에 의해 죽은 백부인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는 방식으로 왕위 계승권을 유지하게 된다. 그래서 정조는 즉위 이후 정통성 확보를 위해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했다. 친부는 끝내 추종하지 못했는데 양부는 거의 즉위하자마자 자기 정통성을 위해서 추존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는 고종 대에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세손 시절 궁료로서 주위에 둔 측근으로는 홍국영[5], 김종수[6], 정민시[7], 홍대용[8], 서명선[9] 등이 있다.

1.2. 즉위

즉위하면서 한 말이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하였다.[10] 그 후 자신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척신(홍인한, 정후겸)들에 대한 척결을 완료했다. 홍술해의 아들인 홍상범과 그의 어머니 효임등이 강용휘와 전흥문[11]을 포섭하여 정조가 밤새 글을 읽던 존현각까지 침투시켰다가 발각된 일(정유역변)이 있었는데 홍계능, 홍상길, 홍신해, 홍이해 등 남양 홍씨들이 집단으로 연루된 모반이 드러나면서 일대 피바람이 불기도 했다. 홍계희 계열은 이미 홍인한이 사사되는 과정에서 타격을 입은 상태였고 이에 반발하여 사건을 일으켰다.

이 존현각 자객 침투 사건은 강용휘 등의 자객들이 존현각의 지붕을 뜯다가 잠을 자지 않고 존현각에서 밤새 책을 읽던 정조가 그 소리를 듣고 승지 등을 불렀는데 《승정원일기》에는 이매망량이나 쥐 따위로 취급하고 사건을 덮으려 할 때 홍국영이 전격적인 수색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강용휘와 전흥문은 무사히 탈출한 뒤 재차 암살 시도를 꾀하여 들어왔다가 홍국영의 강력한 주장으로 삼엄해진 경비에 암살을 포기하고 궐의 뜰에 숨었으나 곧 발각되어 사건이 마무리가 된다.

이 사건으로 남양 홍씨의 홍계희 계열이 말끔하게 숙청되는데 정조는 자신의 이복동생인 은전군 이찬을 사사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요구에 직면했고 며칠 간 신하들과 대립한 끝에 눈물을 흘리면서 끝내 강제로 사사했다고 한다.

1.3. 홍국영 숙청

이후 왕대비가 된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를 유배보냈고 1780년(정조 4년)에는 심복이던 홍국영토사구팽하였다. 사실 진상을 보면 홍국영이 버림받을 짓을 했다고 보는게 옳다. 디테일은 다르지만 큰 줄기만 놓고 보면 태종대의 이숙번과 비슷한 케이스.[12]

홍국영은 정조가 세손이던 시절부터 "세손(정조)의 오른 날개"라는 표현이 사서에 등장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누구보다 더 받은 사람이었다. 더욱이 정조는 홍국영을 자신의 즉위를 도운 1등 공신이라 대내외에 천명하며, 힘을 실어주었으니 그는 어느 누구도 감히 맞설 사람이 없을 정도의 권력을 누렸다.

그러자 홍국영은 정조가 즉위 후에도 자신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에 기고만장해졌는지, 나이 지긋한 신하가 와도 개판으로 맞이하며 오만방자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홍국영은 정조 즉위 후 그의 최측근으로서 정국을 장악하며, 자신의 여동생인 원빈 홍씨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다. 원빈 홍씨도 빈호를 '으뜸 원(元)' 자로 쓰면서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있는데 어떻게 일개 후궁이 '으뜸 원' 자를 쓸 수 있냐며 논란[13]이 되었고, 생전에 마치 중전처럼 조정의 문안을 받았으며, 죽어서도 곧바로 '효휘궁(孝徽宮)' 궁호와 '인명원(仁明園)'이라는 원호를 받는 등[14], 살아생전이나 사후에도 일개 후궁으로서 무리할 정도의 예우를 받았다.

당연히 자신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궁을 과하게 예우하는 홍국영의 행태는 중전인 효의왕후는 물론, 법도를 중시하는 왕대비 정순왕후와 왕의 생모 혜경궁 홍씨까지 불쾌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중전인 효의왕후에게 자식이 없는 상황에서 후궁까지 되었으니, 정치 판도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홍국영 쪽으로 쏠리게 되면서 정치 균형이 무너지게 되었다.

하지만 원빈 홍씨는 원자를 낳아 외척으로 만들어 줄 거라는 홍국영의 기대를 저버리고, 아들은 커녕 자식조차 낳지 못하고 고작 14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다. 이에 홍국영은 완전히 이성겁대가리을 상실했는지 중전 효의왕후를 원빈의 죽음에 대한 배후로 모함하거나, 정조가 다른 후궁을 들이는 것과 그의 섭생(攝生, 자식을 생산하는 일)을 대놓고 반대하는 미친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을 원빈의 사후 양자로 삼고 봉호도 '완풍군(完豐君)'으로 고친 뒤, 자신의 조카라고 선포하며 왕위 계승권자로 삼으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로 완풍군이란 봉호는 왕실본관산(전주)과 홍국영 자신의 본관인 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 감히 일개 신하에 불과한 홍국영이 자기 집안을 왕실과 같은 위치에 두려 한다며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에 완풍군을 가리켜 '가동궁(假東宮, 임시 세자)'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의 정조는 28세의 젊은 나이여서, 후궁을 들인다면 충분히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홍국영은 자신의 권세를 연장하기 위해, 마치 정조가 자식을 절대로 못 보는 몸이라는 식으로 양자를 들이는 걸 강행했다. 이런 행동은 임금을 심각하게 모독하고 억누르는 행위로 여겨졌다.[15]

결국 이렇게 도를 넘은 전횡을 부린 홍국영에게 김종수를 비롯한 동료들마저 등을 돌리고, 끝내 정조가 주도적으로 판을 짠 끝에 숙청당해 유배를 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1782년(정조 6년) 이유백, 이택징, 권홍징 등의 모반 사건이 있었는데 이들은 정조 앞에서 스스로를 '신(臣)'으로 칭하지 않고 '나(吾)'라고 하며 정조를 와 같은 폭군이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와 같이 반란으로 정조를 쳐 없앨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홍국영이 추천했던 산림의 영수인 송덕상을 삭탈관직하는 과정에서 호서의 유생들이 통문을 돌리며 반발한 사건이 있었으며[16] 그 이후에도 많은 유생들이 노골적으로 정조의 뜻에 거스르는 행보를 밟다가 유배되었다.

송덕상의 제자라고 자임한 문인방이라는 자는 강원도에서 병사를 모아서 동대문을 치려다가 박서집[17]의 고변으로 처형당했고 문양해라는 자가 가상의 신인을 앞세워 사람들을 선동함과 동시에 정조에게 숙청당한 김귀주, 홍국영 쪽 사람들과 연계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당하기도 했다.[18]

1786년(정조 10년), 권신 홍국영에게 충성하던 훈련대장 구선복[19], 구이겸, 구명겸 등의 무장 일파가 문양해와 내통하여 상계군 이담을 옹립하려던 계획이 정순왕후에 의해 들통나기도 하는 등 정조 초반부는 거의 반란과 역모의 연속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노론 음모론과 무관하게 자기 할아버지 영조 때 역변을 일으킨건 소론 준소와 남인 탁남 세력이었는데 정조 시절에 역변을 일으킨게 대부분 벽파시파의 세력을 제외한 비주류 노론들[20]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야사를 신뢰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구선복 개인은 정조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 자신의 새로운 울타리이자 정조와 최소한 교각의 역할을 해주던 홍국영의 축출은 구선복 등에게 상당한 압박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1.4. 은언군의 유배

한편 상계군 이담은 홍국영이 축출된 이후로 계속 안절부절못하다가 1786년(정조 10년)에 구씨 일가의 반란이 들키기 전에 죽었다. 이 때문에 그의 아버지 은언군 이인을 죽여야 한다는 청이 정조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은언군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사되기 직전까지 가는데 정조가 단식 끝에 유배로 타협한다. 이미 은전군이 죽었는데 또 동생을 죽일 수 없다는 논리에 제주도 유배로 타협을 했으나 다음날 아침 정조가 귀신같이 일찍 일어나 제주로 보내려던 것을 강화 교동도로 날치기해버린다. 이에 신하들이 항의하자 "제주나 강화나 똑같은 이다. 무슨 문제냐? 더이상 논하지 마라"고 강하게 찍어누른다.

이후 은언군은 강화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정조가 몰래 불러 만나고 왕대비 정순왕후와 신하들이 반대하는 등 정조가 살아있는 생전에는 목숨을 부지하나 결국 정조 사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정순왕후에 의해 사약을 먹고 죽는다.

1.5. 규장각과 초계문신제

초월적 군주를 자처하면서 홍문관의 기능을 분산한 학술 기관 규장각을 세우고 젊은 서얼 출신(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학자들을 등용하여 수만 권의 책을 갖추어 두고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였다.

다만 규장각은 후에 너무도 비대한 권력 기구가 되어 홍문관을 비롯한 대간을 무력화시키고 기존의 성균관마저 유명무실화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문(文)'에는 규장각이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무(武)'에는 왕권 강화를 위하여 장용영이라는 자신의 직속 친위부대를 만들었는데 이 역시 그 규모의 비대함으로 인해 규장각과 마찬가지의 문제로 정조사후 반대파에 의해 혁파된다.

다만 규장각은 정조의 문치를 상징하는 기구임에는 분명하고 정조 대에 조선의 그 어떤 다른 왕대보다 수많은 관찬기록이 생산되었다. 일례로 규장각만 봐도 업무기록물로서 정조 3년(1779년)부터 《내각일력(內閣日曆)》이 편찬되기 시작했다. 특히 정조 12년(1788년)에는 호조에서는 《탁지지(度支志)》 예조에서는 《춘관통고(春官通考)》 외교 문서집인 《동문휘고(同文彙考)》 이 셋이 모두 동년에 편찬되어 절정에 달했다. 이처럼 정조 대에 기관별 문서작업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데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기록물인 각사등록에서도 정조년간부터 본격적으로 기록량이 많아진다.

정조 개인부터가 《일성록(日省錄)》을 쓰기 시작했고 《홍재전서(弘齋全書)》 라는 전세계 그 어떤 군주보다도 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그야말로 기록문화의 꽃들이 만개했던 이같은 문예부흥을 두고 흔히 조선의 르네상스라 하는데 후대인 순조 대와 대비되는 것에서 볼수 있듯이 정조 개인의 역량이 이 시대의 기록유산 증가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1.6. 탕평책 - 준론탕평

정조는 자신의 할아버지 영조가 펼쳤던 탕평책을 역시 들고 나왔다. 하지만 정조의 탕평책은 영조의 탕평책과 전혀 달랐다.

정조가 즉위하던 시기는 척신들에 의한 정계 장악이 심화되었던 때였다. 즉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척족인 경주 김씨 세력과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척족인 풍산 홍씨 세력이 영조 말기에 권력을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조는 이러한 점에서는 왕권의 추구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철저하게 배격한다. 그리고 기존 영조의 탕평책이었던 쌍거호대식 완론탕평에서 국왕 스스로가 내건 준엄한 의리[21]를 중시하는 탕평인 준론 탕평을 펼치게 된다. 온 세상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 라는 뜻의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정조의 호가 바로 이러한 초월적 군주를 지향한 정조의 정치 철학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정조 재위 초반에는 준론 탕평에서 유리한 궁료 출신들이 정국을 주도해나갔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홍국영서명선이다. 홍국영은 정조 즉위 이후 숙위대장과 도승지를 겸직하면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하였고, 여러 정파들을 아우르면서 이른바 세도를 부렸다. 서명선은 소론 출신으로 정조의 대리청정을 적극 추천하면서 정조의 눈에 띄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즉위하면서 홍인한을 실각시키는 상소를 올리며 역시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홍국영 서명선 모두 정조가 꿈꾸던 탕평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홍국영은 세도를 부리고 왕위 후계에 욕심을 내다가 결국 실각당했고, 서명선의 경우 지나칠 정도로 남인을 견제하는 바람에 도리어 노론 벽파의 공격을 받을 때 보호 세력이 없어서 결국 실각당했다.

이후 정조는 정계에서 소외당했었던 남인과 소론 강경파를 적극 등용하면서 정계의 중심으로 다시 등장한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조 스스로가 여러 당파를 등용하는 정책[22]인 쌍거호대를 다시 펼치면서 그동안의 파괴적인 정국 운영에서 벗어나는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영조의 초기의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면서도 기존에는 배제되던 소론 준론까지도 포함된 탕평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사와 관련해 이외의 제도적인 해결책으로서 정조는 붕당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조전랑의 추천권을 완전히 폐지하여[23] 탕평책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러 정파를 등용하면서 동시에 사도세자 추숭 문제로 그 세력이 다시금 두 진영 즉 벽파시파로 나뉘게 되었고, 이러한 당파 다툼이 그동안 벽파와 시파를 온건하게 규합해오던 김종수채제공이 죽은 이후에는 두 세력을 막을만한 기재가 없었고, 그런 가운데 정조의 업무가 격화가 되면서 정조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에는 그야말로 탕평 정치가 다 소용 없어지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1.7. 장용영 설치와 수원화성 건설

정조는 상당히 많은 암살 위기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암살 위기는 정조에게 결국 자신을 호위할만한 군사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게 하였다. 당시 군영은 대부분 주요 당파에 장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금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당파를 위해 일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결국 1784년(정조 8년), 아버지 사도세자존호를 축하하기 위해 경과를 실시해 무과에서 무려 2,000명의 합격자를 배출시켰고 이후 홍복영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1785년(정조 9년) 장용위를 설치하게 되는데 1788년(정조 12년),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개칭하면서 정조는 하나의 자신의 직속 친위 부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면서 동시에 이상 도시를 건설하게 되는데 바로 수원화성의 건설이다. 이 이상 도시의 건설을 통해 당시 한양에서는 펼치지 못할 다양한 정책들을 펼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수원화성 건설도 장용영과 마찬가지로 기존 체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자 했던 마음이 강했다고 볼 수 있겠다.

특히 수원화성을 통해서 자주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에 능행을 하게 되는데 이는 궁궐에 갇혀 있는 군주가 아닌 백성들의 모습을 직접 보면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정조의 업적 중에 꽤나 평가 받는 업적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1795년에 있었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은 그 모습을 잘 드러내주는 장면이 되겠다. 그에 대한 내용은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참고하면 된다.

실제로 정조는 장용영의 외영을 수원화성에 설치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군제 개혁을 하고 수원에 수원화성을 지은 것도 역모를 꾀한 반대파들에 대한 대책으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근거는 희박하다. 장용영과 수원화성은 상왕이 되었을 때 자신을 호위하고 머물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그 까닭은 자신의 대에 성공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추숭을 완수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훗날 혜경궁 홍씨가 손자 순조에게 몇 번이나 강조한 바가 있는데 물론 그러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1.8. 숭렬전 설치

인조 대에 남한산성에 건립된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신 사당인 온조왕사(溫祚王祠)에 '숭렬전(崇烈殿)'이란 편액을 하사하면서 온조왕에 대한 제문을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내려 보냈다. 그리고 매년 음력 9월 5일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숭렬전은 팔전 중 하나로 이렇게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 대한 제사를 국가가 정식으로 받들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화는 남한산성 항목 참조.

1.9. 대전통편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이루어졌으니, 국조(國朝)의 전장 제도(典章制度)에 관한 책이다. 태조(太祖)가 처음으로 법제(法制)를 마련할 적에 원전(原典)과 속전(續典) 두 가지가 있었다. 세종(世宗)께서 이 두 법전(法典)을 모방하여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저술하였고, 세조(世祖)께서 최항(崔恒)·김국광(金國光)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케 하였는데, 성종조[成廟朝]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었으며, 또 이어서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이루었다. 중종조[中廟祖]에 《후속록(後續錄)》이 있었고, 숙종조[肅廟朝]에 《집록통고(輯錄通考)》가 있었으며, 영조[英宗]갑자년157)(註 157)(갑자년 : 1744 영조 20년.) 에 김재로(金在魯) 등에게 명하여 《속대전(續大典)》을 찬술(撰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여러 책은 각각 스스로 편(編)을 나누었기 때문에 상고하고 조사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또 전하께서 즉위(卽位) 이후 수교(受敎)로서 법령(法令)이 된 것도 있으니, 마땅히 유별(類別)로 나누어 책을 편찬하여 시행에 편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속전(續典)》은 갑자년에 이루어졌는데, 선왕(先王)의 교령(敎令)으로서 갑자년 이후의 것도 많으니 어찌 감히 가까운 것만을 내세우고 뒤의 것은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에 봉조하(奉朝賀) 김치인(金致仁) 등에게 명하여 원전(原典)과 속전 및 지금까지의 수교(受敎)를 모아 통틀어서 한 책으로 만들고 부문(部門)과 항목(項目)을 나눔은 한결같이 원전에 따랐다. 원·속(原續)과 증·보(增補)를 표시하고 횡간(橫看)을 바꾸어 직행(直行)으로 하니, 증수(增修)된 조목(條目)은 이전(吏典)이 2백 12, 호전(戶典)이 73, 예전(禮典)이 1백 1, 병전(兵典)이 2백 65, 형전(刑典)이 60, 공전(工典)이 12로써 모두 7백 23조이다. 손수 서문(序文)을 지어 첫머리에 기재하고 인하여 교서관(校書館)에 보내어 간인(刊印)하였다. 이 책이 이루어지매 편집(編輯)에 참여한 여러 신하가 전문(箋文)을 갖추어 올리니,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몸소 받아서 전국(全國)에 반포하였다. 또 호남(湖南)·영남(嶺南)·관서(關西)의 감영(監營)에 명하여 번각(翻刻)하여 판본(板本)을 간직하게 하였다.
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 9월 11일 정사 2번째기사

차대(次對)하였다. 형조 판서 이명식(李命植)이 아뢰기를,
"《대전통편(大典通編)》을 마땅히 반포하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공사(公事) 가운데 예로 인용할 것은 마땅히 《대전통편》으로 한다고 썼으니 오늘부터 시작하여 사용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명년 정월부터 준용(遵用)하라고 명하였다.
정조실록 20권, 정조 9년 9월 12일 무오 2번째기사
사실상 조선 최후의 법전대전통편(大典通編)》[24]이 정조 9년(1785년)에 편찬되었다. 《속대전(續大典)》을 보완하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통합시켜 법제운용에 일원화를 꾀한 것으로서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영조시대 제도화된 균역(均役)(영조 27년)이나 비총(比總)(영조 36년)같은 주요 세제개혁들이 《대전통편(大典通編)》의 조항으로서 자세히 수록되었다.

1.10. 병신정식

조선 후기 왕실 재정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궁방전의 확대는 세수의 감축과 차인(差人)[25]·도장(導掌)[26] 등의 대민 침탈을 초래해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다. 왕실 재정 문제에 고심하고 있었던 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년)에 규정 외로 보유하고 있는 궁방전을 조사하여 대대적인 출세를 단행하고 여러 궁방의 전결을 호조로 이속시키는 등 다양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를 통해 6만여 결에 달하는 궁방전의 1/3∼1/2 정도[27]가 과세(課稅)됨으로써 내수사와 주요 궁방의 면세결은 크게 줄어들고 면세 정액이 확정되었다. 이때 반포된 것이 「병신 정식(丙申定式)」[28]이다.[29]

1.11. 신해통공

조선 전기 때만 해도 상업이 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들의 특권은 그대로 인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이 이루어지면서 이들이 국역에 종사하고 있으면서도 특권이 적어지면서 불만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이들의 독점적 상권을 인정해주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금난전권은 결국 도시의 상업을 폐쇄적으로 바꿔놨고, 물가의 상승을 초래하여 영세 상인, 수공업자, 도시 빈민층들에게 위협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러한 시전 상인들은 중앙의 고관들과 연계가 되면서 역시 폐단을 낳게 되었다.

또 금남전권 때문에 시전에서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에 뇌물도 매우 많았다.

중앙의 고관 특히 노론들과의 연계는 노론의 세력을 약화시켜 탕평책을 펼치려는 정조의 정책에 이반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타개가 필요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 바로 금난전권을 혁파하려는 통공 발매 정책이었다.

사실 통공 발매 정책은 영조 시기인 1764년(영조 40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오던 사안이었다. 그리고 정조는 1787년(정조 11년) 일부 통공 발매 정책을 시행하였고 1791년(정조 15년)에 이르러 남인의 영수 채제공에 의해 통공 발매 정책이 제기가 되었고 결국 시행을 하기에 이른다.

통공 발매 정책은 그동안 독점권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던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공 발매 정책을 통해서 그동안 경화되어있던 상업 구조의 변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노론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던 시전 상인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면서 준론 탕평책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조선이 한 단계 발전되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즉 중앙 정부에 의한 특권이 없어지면서 상업이 더욱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1.12. 문체반정

정조의 치세를 이야기하면서 문체반정을 배제할 수 없다. 정조의 개혁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문체반정은 북학이나 청의 문물처럼 박지원열하일기로 대표되는 새롭고 신선한 문물에 관심을 보이던 조선의 선비들을 탄압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문학으로 명성이 드높은 이옥에 대한 탄압은 가혹하였다. 이옥은 장원급제를 하고도 문체를 이유로 촤하위를 기록하게 되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이옥에게 정조는 승하하는 날까지 이옥을 향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옥에게 예외를 인정한다면 그것도 문제라는 맹점이 발생한다. 역설적으로 박지원이나 김조순처럼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타협을 거부한 이옥에게도 문제는 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정조는 문체반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신해통공으로 왕이 노론을 타격하고 서학의 신앙을 문제삼아서 노론이 정조의 측근인 남인 시파들을 공격한다. 이후 다시 문체반정으로 박지원이 포함된 노론에게 반격한 형국인데 정조가 승하한 후에 이에 대한 벽파의 반격이 신유박해이다. 이러한 사건을 이해한다면 박지원의 실학적 측면이나 문체반정이라는 명분은 의미가 없어지고 정치적인 의미만 강해진다. 애초에 문체반정이 청에서 유행한 문체와 유사한 박지원의 문체와 노론의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적 사상의 괴리를 지적하여 성공한 것이기 때문에 문학사적 의미를 제외한다면 애초에 반동적이냐 아니냐도 아리송하다.

문체반정을 보는 시각 중에 보수적인 성리학자로서의 정조의 성향이 문체반정의 중요한 요소라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정조가 자신의 일기에 "나는 본래 책을 읽어도 성현의 말씀만 읽었으며 패관 잡기에 대해서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아무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독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대목을 보면 정조는 진심으로 유학 경전만이 진리이며 다른 것에는 매우 적대적이었던 성리학 근본주의자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삼국지연의를 잡스러운 책이라고 "나는 삼국지(연의)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30] 실제로 당시 사상계에서는 중국의 양명학과 고증학 등이 들어와서 성리학의 한계를 공격하는 상황이었으며, 이러한 흐름이 원칙주의자 성리학자였던 정조의 심기를 무척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가 오늘날의 소설 격인 패관 문학을 무척 싫어하여, 당시 소설 중독에 빠진 관료를 징계한 사례가 있고, 김조순도 숙직 중 연애 소설을 읽다가 걸려서 청나라 사신단에 포함되어 가는 길에 반성문을 써야 했다. 심지어 정조가 파발까지 보내 '반성문 내놔!'고 독촉했을 정도. 하지만 그 반성문이 명문이라 왕을 감동시켰고 왕과 사돈지간이 된다. 유교 문화권에서 글이라는 것이 갖는 상징성을 생각해 보면 새로운 문체를 구사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이옥의 경우, 문체 교정 안 하면 평생 과거 금지라는 선비로서는 치명적인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31] 그래서 그는 온건한 분서갱유라 할 수 있는 문체반정을 한 것 같다.

굳이 따지면 정조는 문체에서는 노론이고 그 중이서도 벽파이다. 세손에서 즉위하여 척신과 홍국영을 물리칠 때까지 김종수를 위시한 노론의 일부 벽파와 정조는 사실상 동맹이며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에는 '우리 벽패'라는 말로 호감을 표현한다. 송시열에게 송자라는 호칭을 내리고 '송자대전'을 편집한 사람도 정조이다.

자신이 징계한 관료들이 정조의 뜻을 따라서 반성하면 중용한다. 김조순이 반성문을 훌륭하게 작성하여 정조에게 용서받고 정조의 사돈으로 입지를 강화한 것이 그 예시. 실제로 정조는 문체를 난잡하게 만든 원흉으로 지목한 열하일기를 서술한 박지원에게도 과거의 문체로 반성문을 작성하면 중용한다는 서찰을 보낸다.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음서로는 오를 수 없는 종2품 벼슬인 문임을 준다고 하자 박지원의 주변인들은 기뻐하며 자신들 나서서 글을 쓸 자료를 모아준다고 한다. 하지만 박지원은 "나 같은 못난 놈의 글에 전하께서 관심을 보이시다니. 나의 못난 글로 반성문을 써서 전하의 눈을 썩게 하는 무례는 저지를 수 없다. 전하께서 반성문을 쓰면 중용한다는 말은 나보고 반성하라는 이야기인데 눈치없이 반성문을 써서 벼슬을 달라는 말은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볼만한 글을 몇 편 모아놓고 전하께서 다시 반성문을 내라고 하시면 그걸 낼 것이다."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반성문 작성을 회피한다. 그러다가 회피를 멈추고 '과농소초'라는 농서를 지어 정조에게 올리며 나름의 성의를 보였다.

문체반정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재밌는 일화가 있다. 바로 천주교(서학)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학에 관해 정조와 채제공 이하 신하들이 토론을 하고 있었다. 채제공이 "말이 불교를 배척한다는데 하는 소리가 별반 다를 것도 없으니 그냥 불교의 한 별파라 하겠고,[32] 죽은 사람을 살리고 봉사를 눈뜨게 하고 천상의 문을 연다니, 어떤 멍청이가 그걸 믿습니까?"[33]라고 하자 정조가 "이게 다 패관 문학을 하도 보니까 그따위 황당무계한 소리도 믿게 되는 것이니 이제부턴 순정 고금체만 쓰라!"고 했다.[34]

여담이지만 소설을 싫어했던 정조와 달리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군주청선군주, 그리고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는 10책에 달하는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할 정도로 소설 애호가였다. 1773년(영조 49년) 봄, 《곽장양문록》의 필사 시기이며 문체반정보다 20년 정도 앞선다. 비단 이 두 군주와 후궁만이 아니라, 현재 전하는 소설책들을 보면 정조가 문체반정을 하거나 말거나 궁중 여인들은 소설을 즐겨 필사하고 읽었던 것 같다.

한편 이덕무와 이상황 등의 경우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을 문책받아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이덕무의 경우 당시 유행하던 소설을 가리켜 '더럽고 더럽도다'라고 표현할 정도의 글을 남겼다. 다만 애초에 그가 소설 읽기에 빠졌다가 들켜서 정조에게 문책받은 것이니, 본심이었을지 정조 눈치를 본 결과인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이상황의 경우 정조 생전에는 반성하고 소설을 배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조 사후 늙을 무렵에 그의 집을 찾아간 선비가 서가에 청나라 소설책들이 빽빽이 꽂혀있음을 보았다고 한다.

1.13. 서체반정

정조는 문체만 개혁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서체까지도 개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를 서체반정이라고 한다. 문체반정과 더불어 정조의 문화 통제 정책이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는 사례.

조선 개국기에는 반듯반듯한 고려풍 안진경체, 전기에는 정밀하고 우아한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였고, 중기 무렵에는 품위 있고 강경한 왕희지체가 유행하였다. 안평대군이나 선조가 명필로 이름난 왕족들이다. 특히 선조는 워낙 유명해 그의 글씨를 명나라 사신들도 탐을 냈으며 본인도 자신의 글씨에 상당한 자부심이 있었고 한석봉을 매우 총애해 석봉체로 문서를 작성토록 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영조에 이르기까지 선조의 글씨에 기반을 둔 서체를 구사하였는데, 대가 내려갈수록 화려해졌다. 영조 시기 즈음 되면 그 당시의 남성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럽고 미려한 글씨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상님들과는 다르게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서예 철학이 매우 뚜렷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 철학은 유지되어 그는 글씨란 무릇 굵직굵직하게, 꾸밈없이 소박하게 써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후로 바뀐 서체를 점잖은 서체로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그의 이런 영향을 받아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굵직하고 소박하며 남성적인 서체는 조선 후기에 주류로 자리잡는다.

1.14.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

문체반정의 연장선상에서 정조는 아예 밀려드는 고증학 등의 "이단사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주자가 남긴 모든 저작을 모아 편집, 출간, 보급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런 주자대전집을 통해 이단사설들로부터 주자학의 가치를 천명하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조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서형수에게 명하여 사고전서 도입 문제와 더불어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원본을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당시 주자학의 근본이 되던 이 책들은 판본들이 다양했는데 정조는 원본이자 정본을 가져올 것을 직접 명한 것이었다.

서형수는 사고전서 편찬의 총책임자이자 당대 청나라의 대학자 기윤을 찾아가 사고전서 도입 문제를 논의하면서 주자의 저작물 정본에 대해 문의했고, 기윤은 이후 사신편에 들려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정본을 보내주었다. 서형수는 이 약속을 받은 후 주자대전과 주자어류 외의 주자의 저작물을 찾기도 한 후 귀국해 정조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정조가 이후 사망하면서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고 한다.[35] 이런 정조의 노력은 그가 사실상 성리학 유일론자였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사례일 것이다.

1.15. 사망과 무덤

정조는 매우 다혈질이고 급한 성격인지라 신하들과 갈등이 많았는데 재위 기간 24년 동안 《정조실록》에 기록된 신하들과 논쟁만 해도 5차례~6차례나 될 정도다. 조선 왕의 특성상 과로는 기본인데다 정조의 경우 스트레스와 잔병치레가 잦았고 담배를 즐겼으며 한 사람이 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밀어붙였다.

정조의 마지막 해에 그는 빠르게 진행되는 노화(시력약화 및 백발화)와 질병의 고통을 이전보다 격하게 호소하게 되는데 이는 과로로 인한 수명 단축의 한 증거가 된다.[36][37] 정조는 몇 해에 걸쳐 고질적인 지병인 종기를 앓고 있었으며 특히 고름으로 굉장히 고생했다. 그 더운 여름날 몇 되나 되는 고름을 쏟으며 고생했다고 하니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당시의 열악한 의료 기술 탓에 인삼을 넣은 탕약과 고약, 연훈방 등의 요법만 의존하였으며, 특히 선대인 효종이 종기를 터트렸다가 과다출혈, 즉 의료 사고로 사망했으니 외과적 시술도 어려웠으리라.

1800년 5월 30일 정조는 대전에서 신하들과 또다시 한바탕 논쟁을 벌였고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오늘 부로 난 신하들과 일체 논의를 하지 않겠다!"고 폭탄 선언을 한다. 이른바 '오회연교(五晦筵敎)'다. 이 말인 즉슨 갈등의 최고 정점에 다다랐다는 점이며 정조가 정치적으로 단절을 선언한 셈이다. 불과 4주 뒤인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끝내 승하하게 된다. 승하하기 직전에 벌어진 신하들과 논쟁에서 생겨난 극심한 스트레스가 정조가 이미 가지고 있던 질병인 종기를 악화시켜 1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고, 상이 이르기를,
"심인(沈鏔)과 정윤교(鄭允僑)를 들어오게 하라. 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잠을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요자리에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38] 종기 자리가 어떠한지 궁금하므로 경들을 부른 것이다."
하였다. 제신이 진찰한 뒤에 아뢰기를,
"피고름이 이처럼 많이 나왔으니 근이 이미 다 녹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들의 반갑고 다행스러운 마음은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원기를 보충하는 면에 한층 더 유념하지 않을 수 없는데 부어고(鮒魚膏)를 본원(本院)에서 봉하여 올리겠습니다. 잠자리도 전에 비해 편안하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밤에 비하면 조금 나았다."
하자, 시수가 아뢰기를,
"날이 밝은 다음에 다시 자세히 진찰해 보아야겠으나 기쁘기가 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조실록 54권, 정조 24년 6월 25일 병자 1번째기사
능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위치한 건릉(健陵)이다. 원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어서도 모시려고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 동쪽에 자신의 능터를 잡았고 거기에 묻혔다. 그런데 풍수학적으로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이 나와서 이장 논의가 나던 차에 중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오늘날의 위치인 융릉 서쪽으로 이장해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사도세자의 능과 묶어서 '융건릉'이라고 부른다.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16. 정조 독살설과 수명, 건강

<colbgcolor=#bf1400> 정조 독살설을 다룬 KBS 〈역사스페셜〉 영상

정조는 조선왕 독살설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정약용이 여운당전서에 직접적으로 언급(심환지가 인척인 어의 심인을 통해 정조를 독살했다고 언급) 하는 등 노론 지도부인 심환지정순왕후의 주도로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주장은 90년대까지 정설에 가깝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심환지와 정조가 비밀리에 주고받은 서찰이 공개되어 수그러든 감이 있다.[39]

정순왕후의 경우에도 기록을 잘 보면 사적으로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고, 죽기 직전 '수정전'[40]을 언급해 정순왕후를[41] 오게 한 것을 보면 서로의 신뢰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에 이미 남인들에 의해 독살설이 퍼졌고, 그 후예격인《영원한 제국》의 작가 이인화, 이덕일 등의 작가들은 계속하여 노론 음모론에 기반한 독살설을 주장했다.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독살설의 대중적 인기로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정조의 죽음에 대한 음모론을 기정사실화 한 경우가 많았다.[42] 과연 오회연교 등 정치적으로 격한 상황에서, 정조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고 첫날에는 연훈방 처방으로 효과를 보았다고 스스로 언급한 다음 이어서 2차 요법 후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훙한 것 때문에 음모론의 토양은 비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록은 그의 죽음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기에 독살설에 대해 부정적인 학자가 많다. 정조가 스스로 처방에 관여했기에 그의 죽음을 스스로의 과격한(?) 처방에 따른 의료사고로 보는 시각도 있다.

요절했다는 잘못 된 인식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정조는 오히려 가장 평균에 가까운 조선 왕의 삶을 살다 간 인물이다. 조선의 왕은 평균 만 23세에 즉위해, 평균 재위 기간은 19년 2개월[43] 평균 수명은 만 47세[44]였는데 정조는 만 24세에 즉위해, 24년을 재위하고 만 47세(한국 나이 49세)에 훙했다. 더군다나 원손, 세손, 사실상의 계승자, 대리청정 등 기본 코스는 모두 밟았으며, 조금만 더 살았어도 상왕까지 거칠 수 있었다.[45]

한편으론 정조의 선대였던 영조가 워낙 장수했기 때문에 대비된 면도 크다. 오히려 정조는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영조의 발자취 덕분에 즉위한 직후부터 사실상의 실권을 틀어쥐고, 20년 넘게 자신이 원하는 정치를 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망이 급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조선의 왕 가운데 그런 기회를 가진 군주는 정말 흔치 않았다.

[1] 여기서 '사도'는 유교의 도덕을 말하는 것으로,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최고 수준의 찬사라고 할 수 있다.[2] 의소세손 역시 처음으로 얻게된 손주였음에도 자신이 사랑한 딸 화평옹주의 상중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미워했다. 그러나 화평옹주와 똑같은 점이 있는 것을 보고 의소세손이 화평옹주의 환생이라 믿어서 예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3] 영빈 이씨의 역할에 대해 박시백의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어쩌면 영조가 시켰을지도 모른다고 했다.[4] 여차하면 영조가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풍산 홍씨를 박멸해버리고, 정조를 거두어 들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세력이 혜경궁 홍씨와 친정을 사도세자와 얽어 모함하여 몰락시키고 세손의 보호자를 자처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자기 아들을 한여름 속 뒤주에 가둬 굶겨죽이고 양위 요구같은 자신의 권위를 침범하는 일에 눈을 부라리던 의심병 환자인 영조가 신하들을 쥐락펴락하며 막강한 왕권을 자랑하고 있고, 늘 엎치락 뒤치락하며 역모 고발을 반복하는 조정의 당파 싸움 속에서 그 왕의 손에 직접 죽임당한 남편을 가진 홍씨가 바로 그 왕의 유일한 적통을 보호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실제로도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은 정조 대까지 권력을 누리긴 하지만 중간에 탄핵당해 실각하기도 하고, 사도세자의 서자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혜경궁의 이런 결단이 빛을 발했는지 다행히 영조와 정조 모두 홍봉한을 중용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혜경궁의 인척들이 정조 암살 시도에 연루되기까지 했으니 혜경궁은 친정으로부터도 유일한 혈육인 아들을 지켜야 했었다.[5] 정조의 왕실 경호실장 격의 역할을 했다.[6] 세손 시절 스승.[7] 정조의 충신.[8] 50대 초반에 사망하며 재위 기간을 오랫동안 함께하지는 못했으나, 실학자로 유명한 사람이다.[9] 홍인한 탄핵소를 올려 대리청정 저지 기도를 막았다. 이 때문에 서명선이 상소한 12월 3일 정조는 자기를 도왔던 이들을 모아 '동덕회'라 이름짓고 모임을 친히 가졌다.[10] 물론 그 다음은 인정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선왕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다는 내용이었고, 득달같이 사도세자 추숭과 노론 토벌을 주장하던 선비들에게 강력하게 처벌을 내려 신하들을 안심시켰다.[11] 전흥문은 힘이 장사였으나 가난했기 때문에 혼인을 못해서 강용휘가 그에게 돈 1,500문(文)을 주고 예쁜 여자 노비(女奴)를 아내로 주자 강용휘에게 고마움을 느껴 그와 함께 정조를 암살하려고 했었다. #[12] 이쪽도 이방원이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를 거머쥐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이자 측근이었지만, 이후 기고만장해져 안하무인으로 각종 전횡을 일삼다 끝내 미래권력인 세자에게까지 접근하는 바람에 태종의 분노를 사 숙청당했기 때문이다.[13] 으뜸 원(元)' 자는 왕의 정실부인인 왕비나 왕세자만이 쓸 수 있는 것이다.[14] 본래 '원(園)'은 왕세자, 왕세자빈, 차기 국왕을 낳은 후궁묘소를 일컫는 단어인데, 이 3가지 경우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원빈이 원호를 받는 것은 당시 왕실 전통예법에 어긋난다. 홍국영 몰락 후인 1786년(정조 10년)에 저 원호와 궁호를 강등시켰다.[15] 비슷한 사례로 정조에겐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가 되는 경종이 있다. 경종은 두명의 왕비를 들였는데도 슬하에 자식이 하나도 없었는데 여기에다가 본인의 병약함, 이복동생 연잉군(훗날의 영조), 노론의 득세가 얽혀, 당시 33세의 나이로 아직 자식을 볼 수 있는 젊은 경종에게 노론이 감히 대놓고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자는 소리를 했고, 청나라의 사신으로 갔던 이건명은 아예 "임금이 양기가 없어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한다."라는 망발을 내뱉었다가 참수당했으며, 나중에는 왕세제대리청정까지 주장했다. 이에 경종연잉군을 세제로 삼아준 뒤 대리(代理)도 해주겠다면서 노론을 낚아서 그들을 일제히 숙청했고, 영조도 이때 정치적으로 최대의 위기에 몰려 폐세제를 자처하며 석고대죄까지 해야 했다. 즉, 홍국영의 행동은 앞서 벌어졌던 사례를 감안할 때 충분히 숙청 사유에 포함된다.[16] 왜냐하면 송덕상은 송시열의 후손인데 송시열이 서인노론의 영수였음을 감안하면 호서의 유생들이 반발할 이유가 된다.[17] 당시 송덕상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송시열의 사당에 올렸다는 죄로 유배된 평산 유생 신형하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유배간 인물이다.[18] 김귀주 쪽 사람인 이율한양에서 내응키로 했고 홍국영의 사촌인 홍복영은 100칸짜리 집과 소금 1,000포를 내놨다.[19] 구선복의 경우 사도세자뒤주에 갇혀 죽을 당시 뒤주를 지킨 인물로 야사 등에서는 그가 사도세자를 조롱(세자 옆에서 고기와 술을 먹기도 하고, 놀리며 오줌도 싸는 짓)하기도 했다고 언급이 되고 있다.[20] 대부분 척신당(탕평당)들이다.[21] 현대적 표현으로는 국정 지도자의 철학을 이해, 동참하는[22] 대표적으로 1788년(정조 12년)에 영의정에는 노론 벽파인 김치인, 좌의정에는 소론 강경파인 이성원, 우의정에는 남인 채제공을 임명하였다.[23] 영조 때 완전히 혁파한 것을 부활시키려고 했지만 또다시 폐단이 일어나자 완전히 폐지한 것이다.[24] 이름이 비슷한 《대전회통(大典會通)》은 흥선대원군 시절에 만들어졌으나 《대전통편(大典通編)》에 소폭 증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에 낚시 문제로 나올 수도 있다. '통'편 '회'통이니 'ㅌ' 다음 'ㅎ' 가나다 순서로 외우면 된다. 시험장가서 '통'편 회'통' 둘다 통인데 뭐지하고 헷갈려서 순서생각 안나서 당황하면 답이 없으니 두문자 암기는 슬기롭게 활용하기 바란다.[25] 조선시대 각 궁방(宮房)에서는 자체적인 재원 마련 수단으로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이러한 둔전을 궁방전(宮房田)·궁장토(宮庄土)라고 불렀는데, 이곳을 관리하고 토지세를 징수하기 위해 궁방에서 파견한 차인(差人)이 바로 궁차(宮差)였다.[26] 궁방에 소속된 농장의 전세 등을 대신 징수하거나 궁방전을 관리하던 궁방의 청부인.[27] 정조실록 24권, 정조 11년(1787, 정미) 10월 26일 경신 1번째기사 1787년 청 건륭(乾隆) 52년 백성에게 세를 받을 때 궁방의 하속이 폐단을 만드는 것을 묘당이 살피게 하다[2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병신정식(丙申定式))」[29]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1776년) 4월 10일 신해 6번째기사 1776년 청 건륭(乾隆) 41년 궁방이 함부로 받은 면세 전결을 사정하다[30] 참고로 선조 시대의 인물인 기대승은 삼국지연의에 대하여 "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잡박(雜駁)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치는 소설"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대의 꼬장꼬장한 선비들이 보기에는 격조있는 한시나 경전류와 비교해 잡기소설류가 천박해 보였을 것이다.[31] 여담으로 패관 문학체는, 소설을 즐겼던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32] 두 종교 모두 천국(극락)이니 지옥이니 하는 내세를 언급하고, 숭배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유학자의 눈에는 충분히 그렇게 보였을 수 있겠다. 그걸 떠나서 불교천주교나 교리 자체는 민생을 현혹하는 다 좋은 말들이니 거기서 거기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33] "그 책에 '천주가 내려와서 예수가 된 것이 중국(堯舜)이 있는 것과 같아 소경을 눈을 뜨게 하고 절름발이를 잘 걷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허무맹랑한 말입니다. 하늘의 문을 열고 날아서 들어간다는 설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단 채제공은 "그 가운데 좋은 것도 간혹 있으니, 이를테면 하느님[上帝]이 굽어살피시어 사람들의 좌우에 오르내리신다는 설이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이어 "다만 그 인륜(人倫)을 무시하고 상도(常道)를 배반하는 것 가운데 큰 것으로는, 저들이 높이는 대상이 하나는 하느님[玉皇], 하나는 조물주[造化翁]이고, 제 아비는 3번째로 여기니 이는 아비를 무시하는 것"이라 덧붙였다.[34] "근래 문체(文體)가 날로 더욱 난잡해지고 또 소설을 탐독하는 폐단이 있으니, 이 점이 바로 천주교에 빠져드는 원인이다. 우리나라의 문장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로 모두 육경(六經)과 사자(四子)에 오랫동안 노력을 쌓은 속에서 나왔으므로 비록 길을 달리한 때가 있었지만 요컨대 모두 경학(經學) 문장의 선비들이었다."[35] 강명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참조[36] 당시에는 50세만 되어도 잘 살았다고 하던 때였고 60대까지 사는 사람이 전 국민의 5%도 되지 않던 때였다. 더구나 정조는 항생제가 없던 시기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종기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37] 훗날 영국 국왕조지 6세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과로, 스트레스와 잦은 흡연으로 인해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1952년 조지 6세 사망 당시 영국의 기대 수명은 69.5세로, 그 당시 영국 기준으로도 일찍 사망한 것이었다. #[38] 그릇으로 거의 몇 잔을 쏟았다. 다행히 숙면을 취하게 되었으나 그리 앓은 얼마 뒤 신하들과의 면담 도중 쓰러지고 말았는데, 약을 넘기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끝내 숨졌다.[39] 전술하듯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야음을 탄 독살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진 밤을 지새우며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고 집권 기간에도 직접적인 암살 위험에 노출되었던 건 사실이다. 반면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정조는 자신이 무슨 약을 먹어야 하는지 직접 처방하는 등 자신의 병후를 철저하게 통제했다.[40] 당시 정순왕후가 기거하던 대비전인 창덕궁 수정전(壽靜殿)을 말한다. 경복궁 수정전(修政殿)이 아니다.[41] 정조가 정순왕후를 부른 이유는 불확실하다. 정황상 정순왕후에게 뒷일(후사)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기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42] 예를 들어 드라마 <이산>의 소설판에서는 '수정전'을 정순왕후에게 피살당해 죽어가는 정조의 단말마로 해석했다. 하지만 드라마화 된 <이산>에서는 건강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다가 쓰러졌다가, 겨우 소생하고 이후 정무를 보는 모습을 보여주며 병사로 죽은 것으로 처리했다.[43] 단 폐위되거나(광해군, 연산군) 물러나거나(태조, 정종, 단종, 순종), 요절한 임금(문종, 예종, 인종, 경종)을 빼면 평균 재위 년은 28년, 영조를 빼면 26년이긴 하다.[44] 태조, 정종, 광해군, 숙종, 영조, 고종 등 60세를 넘긴 왕들을 제외하면 평균이 40까지 낮아진다.[45]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과 일제에 의해 사실상 퇴위당한 고종 황제를 제외하고, 살아서 상왕이 된 왕은 초반기 3명 즉 태조(조선), 정종(조선), 태종(조선) 뿐이다. 세종은 전위 대신 대리청정을 새로운 전례로 만들었으며, 선조나 영조는 맨날 전위를 주장하고도 죽는 날까지 왕위에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양위한 사례는 세조, 중종 등의 경우도 있지만 정조의 예는 전자를 고려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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