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0:11:13

구선복

구선복
具善復
사초(士初)
출생 1718년(숙종 44)[1]
사망 1787년(정조 11) 1월 27일[2]
한성부
본관 능성 구씨[3]
직업 무신
사인 거열형
죄명 상계군추대하려 함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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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무신. 대대로 서인 정권의 병권을 맡은 능성 구씨 집안의 무장으로 그 권력이 대단했으나, 정조 시기에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역적 선복(善復)으로 말하면 인한[4]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5]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經筵)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마는,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 전후 흉악한 역적들을 끝내 성토하고 처벌하지 못한 것은 실로 선조(先朝)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서 말하기 곤란하기 때문이었는데 의리가 이로 인하여 어두워질까 나름대로 염려해 왔다."
정조실록 정조 16년 윤 4월 27일 기록 중. 정조 10년에 구선복이 처형된 6년 뒤에도 이런 수위로 되뇌는 것으로 정조의 구선복에 대한 증오심을 알 수 있다.

2. 생애

1718년(숙종 44)에 황해도 병마절도사(종2품)를 지낸 아버지 구성필(具聖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구선원(具善元)이 있었다.

1738년(영조 14) 식년시 생원시에 3등 31위로 입격한 뒤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총융사훈련대장 등을 역임하고, 병조판서 ·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병판으로 제수된 기간을 짧은 편이며, 주로 훈련대장이나 판의금부사로 재직했다.

구선복은 원래부터 성격이 잔인무도하여 재직기간 중에 하인부터 조정 고관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욕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인심을 잃었으며, 임오화변 때 뒤주 속에 갇혀 있는 사도세자를 향해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플테니) 술을 주랴, 떡을 주랴?"라고 능멸하고 희롱하기까지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만행을 일삼는 구선복이 장차 후세에 망할 거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이는 실록에는 없는 야사이다. 이러한 죄가 있었다면 분명 정조가 거론했을 것인데 이에 대한 기록은 실록에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저렇게 인심을 잃었으면 비리로 탄핵 당한 순간 당장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실록에서 구선복이 일으킨 문제는 주로 비리나 월권이었다. 또한 성정이 오만한 것만은 확실해 국왕의 어머니인 혜경궁의 6촌 오라비로 현직 좌의정이었던 홍낙성(혜경궁 홍씨의 6촌)을 무시하는 일도 있었다.

임금인 영조는 물론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를 욕보인 구선복을 싫어했다는 기록은 없다. 영묘조 내내 구선복은 중용받았고 비리로 탄핵당해도 영조는 구선복을 보호해 주었으며 처벌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파직했지만, 이내 복귀시켰다. 정조대에도 구선복은 계속 승승장구했으며 정계 거물인 김상철과 사돈을 맺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정조가 병권을 장악하기 위해 홍국영에게 훈련대장을 맡겼을 때에는 이를 잘 따랐다. 그 덕에 구선복은 함께 병권의 중핵이었던 장지항이 정조 초기에 숙청당한 뒤에도 홍국영과 더불어 병권을 틀어쥐었으며 홍국영이 숙청당한 뒤에도 약 7년 동안 훈국의 수장으로 군림했다. 정조가 구선복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치가 떨린다고 말한 것은 역모 사건 이후의 일이며, 이 또한 사도세자의 일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토록 중용했음에도 자신을 배신했던 것 때문에 분노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상계군 이담이 죽자, 정순왕후는 상계군과 관련된 역모에 대한 하교를 내렸으며, 4일 뒤에 상계군의 외조부 송낙휴가 구선복의 아들인 구이겸이 황해 병사로 재직할 때에 상계군에게 선물을 보내고 편지에 소인(小人)이라고 지칭했다고 고했다. 2일 뒤, 대비는 "관상을 보았다는 것과 반정한다는 등의 일을 기어코 시원스럽게 밝혀내어 나라의 형세를 안정시키라. 그러면 탕약을 들겠다."는 하교를 내렸다.

이에 조사를 하자, 구선복은 반정을 일으키려 했음을 시인했다. 처음에 정한 대장은 다른 사람이었지만, 이번의 대장은 구선복이었고 또 이전에 대장을 맡은 자의 운세가 좋은지 문양해[6]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에 정조는 자신의 아들 문효세자가 죽은 뒤에 자신의 조카인 상계군 담을 추대하려 했다는 죄를 물었고, 구선복은 자복했다.

1786년(정조 10) 양자 구이겸(具以謙)[7], 조카 구명겸(具明謙)과 함께 거열형을 당했다. 구선복이 역모로 처형당하면서 인조 반정 이래 대대로 고위직 무관을 역임한 능성 구씨 일가는 몰락하고 말았다.



[1] 족보에 1718년생이라고 적혀 있다.[2] 정조실록 22권, 정조 10년 12월 9일 무신 4번째 기사. 음력 1786년 12월 9일.[3] (족보)[4] 정조가 역시 세손 시절부터 이를 갈던 홍인한을 말한다.[5] 뒤 끝에 붙은 말을 줄여 버림, 즉 여기서는 더 할 말이 많을 정도로 증오스럽다는 뜻이다.[6] 스스로를 신인의 제자라 칭하며 백성들을 혹세무민했으며 홍국영, 김귀주의 일파와 손잡고 역모를 일으키려다 발각당해 주살당했다. 구선복의 역모는 이 문양해의 역모에서 연결되는 일로도 볼 수 있다.[7] 생부는 통덕랑(通德郞:정5품 문관의 품계) 행 공릉 참봉(恭陵參奉:종9품)을 지낸 구종엽(具宗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