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8 21:12:31

정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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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2대 국왕
正祖 莊孝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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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3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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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선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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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표준영정, 1989년, 이길범
묘호 정종(正宗)정조(正祖)
시호 조선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
(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공선(恭宣)[1]
본관 전주(全州)
산 → 셩(祘)
형운(亨運)
홍재(弘齋) /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출생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사망 조선 한성부 창경궁 영춘헌
능묘 건릉(健陵)
황후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부황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사도세자)
모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혜경궁 홍씨)
양부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효장 세자)[2]
양모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 현빈 조씨)
생몰
기간
양력 1752년 10월 28일 ~ 1800년 8월 18일
(47년 9개월 21일, 1만 7,460일.)
음력 1752년 9월 22일 ~ 1800년 6월 28일
재위
기간
양력 1776년 4월 27일 ~ 1800년 8월 18일
(24년 3개월 21일, 8,878일.)
음력 1776년 3월 10일 ~ 1800년 6월 28일
종교 유교(성리학)

1. 개요2. 묘호와 시호3. 인 祘에 대해4. 생애와 업적5. 정조의 비밀 편지들6.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7. 가계8. 어진9. 승가사10. 기타
10.1. 술 사랑10.2. 헌종과의 유사성
11. 유사역사학음모론
11.1.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11.2. 독살설과 요절설
12. 미디어
12.1. 정조가 등장한 작품12.2. 정조를 연기한 배우들12.3. 소설12.4. 만화
13. 같이보기14. 둘러보기

1. 개요

왕은 성인이었다. 사도(斯道)의 정체를 밝혀내고 사도가 지향할 바를 주장하였다. 왕이 한 일은 복희·신농·문왕·무왕이 했던 일이며, 왕이 한 말은 공자·맹자·정자·주자가 한 말이었다. 앞으로 천세 후에 옛것을 논하는 자가 있다면 아마 이를 《시경》의 청묘(淸廟) 악장에다 실어 연주하여 역시 한 사람이 창을 하면 세 사람이 감탄을 하리라. 여기에는 특히 남들의 귀와 눈에 배어있는 천덕(天德)·왕도(王道)만을 추려뽑아 굉장한 유자이고 현철한 임금이었던 그의 법도를 이 정도로 소개했을 뿐이다.
정조 묘지문

조선의 제22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정조(正祖), 시호는 선황제(宣皇帝).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며, 선왕인 영조(英祖) 28년에 사도세자(思悼莊獻世子, 1735년 ~ 1762년)와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1759년(영조 35년)에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되었고, 1762년에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임오화변)을 겪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1775년부터는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이듬해 영조가 죽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5년간 재위하다 1800년에 사망하였다.

정조는 승하하기 2년 전인 1798년 다시 새로운 호를 지었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무척 길고도 독특한 호였다. 여기에서 정조가 말한 ‘그 속에 담긴 은미한 뜻’이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만 개의 개울을 비추듯이 자신의 다스림이 일부 특권 계층이 아닌 만백성에게 두루 혜택이 미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특히 다른 호와는 달리 정조는 만천명월주인옹에 담은 자신의 간절한 뜻과 의지를 조정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알 수 있도록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까지 지어 발표했다.

2. 묘호와 시호

  • 조선왕조
    • 묘호: 정종(正宗)
    • 시호: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 대한제국
    • 묘호: 정조(正祖)
    • 시호: 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첫 묘호는 정종. 따라서 실록의 제목 역시 '정종대왕실록'으로 되있다. 후술하듯이 훗날 황제로 추존되어 '정조'로 묘호가 바뀌었지만, 실록명은 그대로 남았다. 제2대 임금인 정종(定宗)과는 한자가 다르다. 사후 시호는 장효대왕.

대한제국을 연 고종 황제 때 3대조인 양증조부로서 묘호가 조(祖)로 격상되고 황제로 추존됐다.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 선황제'이다.

3. 인 祘에 대해

정조의 휘인 '祘'은 셈할 산(算) 자와 같은 음으로 읽기 때문에 흔히 ''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대부분의 백과사전도 '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정조 당대에 정조가 직접 편찬한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의 〈전운옥편(全韻玉篇)〉을 보면 발음이 '셩'[3]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어휘(御諱)라는 주석도 달려있다. 제목인 '규장전운' 앞에 붙은 '어정(御定)'은 임금이 정한 것이라는 의미이니 이 발음 사전은 다름 아닌 당시의 군주인 정조의 명령에 의해 편찬이 시작된 것이며 정조 본인이 직접 감수까지 한 결과물이다. 또한 일제강점기지석영의 《자전석요(字典釋要)》라는 한자 사전에서 이 글자의 음을 '셩'이라고 표기한 이유로 정조의 휘를 '산'이 아니라 이중모음의 단모음화를 감안하더라도 '성'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 옥편에서 저 글자를 '산'이라고 표기해 놨기 때문에 흔히 '이산'이라고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 글자를 '산'이라 읽지 않았다는 것.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 글 참고.

그런데 이 논란을 뒤집는 연구 결과가 나왔으니, 정조 즉위 당시까지만 해도 '산'이라고 읽었으나, 즉위 20년째인 1796년에 '산'의 발음을 '셩(성)'으로 고쳤다는 결론이 나왔다.

초기에 祘 이 글자를 산으로 발음했을 것이란 것을 짐작케 해주는 것을 실록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改戶曹算學算員爲籌學計士, 改理山爲楚山, 改尼山爲尼城, 以御名音同也。
호조의 산학 산원(算學算員)을 주학 계사(籌學計士)로, 이산(理山) 은 초산(楚山) 으로, 이산(尼山) 은 이성(尼城) 으로 고쳤으니, 발음이 어명(御名)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조 1권, 즉위년, 5월 22일, 5번째 기사

이후 발음이 성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짐작케 할 수 있는 것을 실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大司憲李直輔, 疏請改名。 直輔, 以本名城輔, 與姓字連音, 犯先朝御諱也。
대사헌 이직보(李直輔)가 상소하여 이름을 고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직보의 본명은 이성보(李城輔)인데, 성자(姓字)와 연음(連音)이 선조(先朝)의 어휘(御諱)를 범하기 때문이었다.
순조 실록 1권, 순조 즉위년 8월 29일 기묘 7번째기사

정조 원년에는 분명 산으로 읽고 있고 순조 원년에는 성으로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간에 발음이 바뀌었을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다. 피휘의 전례로 보건데 전국의 '이산'이나 '~리산' 지명을 갈아치우다 너무 많아서 결국 그냥 왕 이름 쪽의 발음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1980년대까진 정조의 이름을 이성으로 알았다가 이산으로 고쳤는데 이제 결론이 위와 같아졌다는 것이다.

또한 선대인 영조 대의 운서에 동자 관계인 算자에 어휘(御諱)라는 내용이 있어서 이 주장에 근거를 실어주게 되었다.# 참고. 그 이유는 원래 규장전운의 해당 자리에 있던 渻자를 쓰던 약봉 서성(徐渻)이 자손이 매우 많아 그를 부러워하여 그의 이름과 같은 발음으로 채워 넣은 것이라고 한다.

4. 생애와 업적

5. 정조의 비밀 편지들

사람은 구업(口業)으로 한 때의 쾌락을 얻으려 해선 아니되느니, 나는 천한 마부에게라도 일찍이 이놈 저놈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人不可以口業取快於一時,子雖予僕御之賤,未嘗以這漢那漢呼之也。
정조 이산 어록 중

2009년 2월 발견된 심환지와 교환한 서신첩인 정조 어찰첩을 보면 학자 군주답지 않고 왕의 표현이라 볼 수 없는 표현들을 많이 쓰고 있다. 특히 자유자재로 욕설막말을 구사하는 모습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예를 들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4] 사람 꼴도 못 갖춘 새끼와 경박하고 멍청하여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신이 감히 그 주둥아리[5]를 놀린다."라거나, "대신 ○○○는 몸에 동전 구린내가[6] 나 주변이 모두 기피하는 놈이다", "호로 자식"이라든지(...). 어전 회의 중에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이면 바로 욕설을 구사했다고 한다.

다만 정조가 성군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이유는 자기 기분이 틀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신하들의 유배 등으로 이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7] 실제로 당하관 대신 중 한 명이 "전하의 업무 처리 방식이 아주 글러먹으셨는데 그 이유는 전하의 급한 성질 머리 때문으로, 요즘 옥체가 자주 편찮으신 이유도 그 때문인 줄 아뢰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다. 상당히 무례한 내용의 상소였고 중신들도 중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으나, 정조는 끝내 그 신하를 용서하고 더 높은 벼슬을 주었다.

어떤 편지에는 '아놔, 내가 새벽 세 시까지 잠 못 자고 이러고 있다.'라는 말 뒤에 '가가(呵呵)'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웃음소리 '껄껄'을 뜻한다. 현대로 치면 "ㅋㅋ"와 다를 바 없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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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에도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 많다. 한자로 쓰다가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갑자기 한글近日僻類爲뒤쥭박쥭之時...(요즘처럼 벽파가 뒤죽박죽되었을 때는...)[8]라고 쓴 표현도 있고, 수신인 심환지 본인에게도 "갈수록 입조심 안 하는 생각 없는 늙은이"라며 면박을 주는 편지도 있다. 한자로 쓴 편지에도 한국어에서 표현하는 속담을 자주 한자로 옮겨 인용하고, 이두식 표현도 많이 등장한다. 정조 자신이 소설 장르를 탄압하고 이를 따라하는 신하들에게 바른 문체를 강요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중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9]

사실 이 기록이 남은 것은 후대인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야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다행인 일이지만, 심환지와 정조 사이의 관계만 놓고 본다면 심히 잘못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자신의 사람이라 믿는 신하에게 이런 편지를 쓰면 신하는 편지를 다 읽은 후 태워 버리는 게 예의였다. 한 마디로 심환지가 혹시 모를 상황에 보험을 들기 위해 남긴 편지 혹은 정조의 약점으로 잡으려 남긴 편지가 그대로 내려와 현대에 발견된 것.[10]

한편 이 어찰첩은 독살설이나 노론 만악 근원설을 논파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다. 첫째, 정조가 승하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심환지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눈이 너무 침침해져서 책도 읽을 수가 없다.'라거나 '어디가 아프고 언제 약을 얼마큼 먹고 있는데, 아파 죽겠도다.' 하고 병세의 위중함[11]을 호소하는 대목이 자주, 그리고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실록에서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딱히 심환지에게만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는 점과 정조 본인이 고의적으로 병을 키워서 적었을 가능성이 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환지를 측근이라기보다는 같이 해야 할 한 당의 영수로 봤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둘째, 그 동안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 영수들은 정조의 답이 없는 정적쯤으로 치부되었지만, 이 서찰을 통해 노론 역시 정조의 국정 동반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독살설보다 일리가 있는 설명이다.

정조가 쓴 편지글의 자세한 내용은 정조 어찰첩이란 제목으로 성균관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했으니 그쪽을 참조하길 바란다.

재미있는 점은 300년 후에 발견된 이 왕의 악플(?)이 일반인들에겐 상당히 신선하게 보였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조선시대를 유교의 정점으로 보고 예의를 중시하고 절제의 미학을 담으니만큼 왕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체면이고 뭐고 없는 어린애같은 인신공격을 왕이 거침없이 구사하니 그동안의 선입견이 사라짐은 물론이고 정조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되어서 한참이나 미래인의 입장에선 왕도 결국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

6.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

문체반정의 연장선상에서 정조는 아예 밀려드는 고증학 등의 "이단사설"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주자가 남긴 모든 저작을 모아 편집, 출간, 보급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런 주자대전집을 통해 이단사설들로부터 주자학의 가치를 천명하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조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서형수에게 명하여 사고전서 도입 문제와 더불어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원본을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당시 주자학의 근본이 되던 이 책들은 판본들이 다양했는데 정조는 원본이자 정본을 가져올 것을 명한 것이었다.

서형수는 사고전서 편찬의 총책임자이자 당대 청의 대학자 기윤을 찾아가 사고전서 도입 문제를 논의하면서 주자의 저작물 정본에 대해 문의했고, 기윤은 이후 사신편에 들려 주자대전과 주자어류의 정본을 보내주었다. 서형수는 이 약속을 받은 후 주자대전, 주자어류 이외의 주자의 저작물을 찾기도 한 후 귀국해 정조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정조가 이후 사망하면서 주자대전집 편찬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고 한다. [12] 이런 정조의 노력은 그가 사실상 성리학 유일론자였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사례일 것이다.

7. 가계

8. 어진

정조는 평생 동안 어진을 3번 그렸다고 한다. 정조를 그렸던 어진화사 중에는 김홍도도 있어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 어진 이였다. 정조를 포함한 조선 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들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 부산으로 옮겨졌는데 정전 협정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은 어진을 부산에 방치하였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13] 또한 정조 어진 중 화성행궁 옆 화령전에 모셔졌던 구군복 차림의 어진은 일제강점기창덕궁으로 옮기던 중 분실되어 당대에 그려진 정조 어진은 현재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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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표준 영정 구군복 차림의 영정

정조의 표준 영정으로 공식 지정된 이길범 화백의 정조 어진이다. 물론 실제 어진이 불타 사라졌으므로 완전히 상상해 그린 것인데, 같은 이길범이 그린 고려 태조 왕건의 초상화와 너무 비슷하게 그려서 성의없다는 지적이 있다. 어쨌든 현재 어진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고 방송이나 왕실 관련 행사에 공식적으로 쓰인다.
파일:attachment/BCB1BFF8BAB8C1A4C1B7.png 파일:n3MVlSh.png
선원보감에 실린 정조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정조 초상화

그런데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실린 정조의 초상화는 위의 공식 어진과는 달리 자못 야성적인 얼굴인데 후술된 순조의 회상과 일치한다. 드라마영화에서 귀공자훈남으로 묘사된 정조에 익숙한 사람들 중 일부는 이 초상화를 보고 "나의 정조 대왕은 이러지 않아!", "내 정조 대왕이 이렇게 험상궂을 리가 없어!"라며 당황하기도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시백 화백은 이 어진을 바탕으로 정조의 얼굴을 묘사했다.[14]
파일:external/bookseum.hwabong.com/9718_1_1.jpg 파일:VJdUBFD.jpg
정조 어진 상상화 1 정조 어진 상상화 2

위에 있는 2개의 어진은 후대에 제작된 상상도로서 정조 표준 영정을 그린 이길범 화백이 그린 것이다. 좌측은 1989년 9월 26일수성고등학교가 수원 화산릉 행차 행사에서 사용된 정조의 얼굴을 상상하여 그린 어진이고, 우측의 어진은 경매장에 나온 어진이라고 한다. 수성고등학교에 모셔진 어진이 실제 얼굴과 가깝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파일:조선 정조.jpg
출처

그리고 중국 도자기 골동품 경매 블로그를 운영하는 블로거가 어느 미국의 박사가 스웨덴의 왕족으로 부터 정조 추정 어진을 구입하였다는 정보를 얻어서, 사진을 입수를 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를 하였다. 왕실에서 정식으로 그린 어진이 아니고, 민간에서 그린 어진으로 추정된다. 다만 열성어진의 정조와 상당히 흡사해서[15] 해당 어진이 정조의 모습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링크 [16]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사도세자의 릉인 융릉에 설치된 문인석이 정조의 얼굴를 형상해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링크

9. 승가사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인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 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관련 기사

10. 기타

증조인 숙종과 조부 영조를 이어서 이순신을 높이는 사업을 계속했는데[17] 정조 실록이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를 보면 이순신에 대해 정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 나라에 진정으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은 이 충무공밖에 없다."라든지, "그가 만약 고대 중국에 태어났으면 제갈량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어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발간케 하는 등[18] 재위 기간 내내 이순신 기념, 추모에 신경을 많이 쓰기도 했다.

삼국지후주 유선도 높게 평가했다! 항목 참조. 강희제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상국이기는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금수같은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청나라의 황제지만 의외로 성군(聖君)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강희(康煕)는 그 자체로 성군이니, 이적(夷狄)과 똑같이 일률화할 수는 없다.”

스스로 재판을 집행하여 판결을 내린 경우도 많았는데, 한 번은 모함 사건을 혼자 눈치채고 옳게 판결한 경우도 있었다. 황해도에서 이가원과 조환이 "조재항이 아내 윤씨를 밥에 돌이 섞였다는 이유로 걷어차 죽였다"고 관에 고발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가원은 윤씨의 외삼촌이고, 조환도 윤씨의 인척이었다. 관에서 즉각 부검을 실시하려 했으나 죽은 지 오래되어 시신의 부패가 심했는데, 등뼈에 피부가 붙었음을 근거로 타살을 확정 지었다. 더불어 마을에 '나는 밥 한 사발 때문에 맞아죽었다'는 내용의 노래가 돌아 조재항의 살인 혐의는 더 명확해졌다.

형조와 황해도 관찰사는 조재항의 살인 혐의를 유죄로 보고 사형을 내릴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계를 받은 정조는 "모름지기 그러한 노래는 원통함을 알 듯 말듯 숨기는 법인데, 너무 정확하게 범인을 확정 짓고 있으니 도리어 의심스러우므로 다시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이가원이 노래를 지어 퍼뜨렸고, 조환이 이가원의 꼬드김에 넘어가 소장을 작성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가원이 조재항에게 금전을 요구했으나 조재항이 듣지 않아 무고했다는 것. 조재항은 사형 직전에 무죄 방면되었고 이가원은 종신 유배, 조환은 도형 정배(중노동 처벌 후 특별 감시)에 처해졌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 의하면, 시 짓기 시험을 내서 제 시간 내에 시를 짓지 못하는 관료를 창덕궁의 부용지 가운데에 있는 둥근 섬으로 귀양 보내서 망신을 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파일:external/img9.uploadhouse.com/22127519f6041a36dfdd3a82354b66c46c5927b6.jpg
이런 곳에 조각배 띄우고 노 저어 들어가게 했다.
조선왕조실톡 33화에 이 에피소드가 나온다.

전해지는 초상화를 보면 온화해 보이지만, 이는 후대에 이길범 화백이 표준 영정으로 그린 것이다. 실제로 순조의 회상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를 보면 상당히 억세고 굳건한 인물로 보인다. 그에 대한 묘사로 정조는 반듯한 이마, 우뚝선 콧날에 펑퍼짐란 눈자위,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에피소드 중 하나로, 윤광류라는 농민이 운종가의 종(현대의 종로 보신각)을 멋대로 친 사건이 있었다. 운종가 종은 한양 도성의 시간을 알리는 기능을 했으므로 이는 심각한 사건이다. 그런데 관헌에서 당장 잡아들여서 조사한 결과 종을 친 이유가 참으로 황당했는데, 이유는 정조에게 참외를 바치고 싶어서. 행위 자체는 중죄이고 그 이유가 황당하긴 하나, 딱히 나쁜 의도는 아니어서인지 정조는 그냥 윤광류를 고향으로 내쫓았다. 신하들이 종을 멋대로 친 것은 중죄이므로 엄히 처벌할 것을 주장했지만, 정조는 "영조 임금 때도 광화문 종을 친 자가 있었는데, 뭔가 억울한 일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며 넘어가고 대신 종을 담당하는 관리를 파직했다. 이번 일도 그냥 모르고 한 것일 테이니 대충 넘어가자"며 사건을 흐지부지 끝냈다.[19]

능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구 태안읍 안녕리)에 위치한 건릉(健陵)이다. 원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어서도 모시려고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 동쪽에 자신의 능터를 잡았고 거기에 묻혔다. 그런데 풍수학적으로 좋지 않다는 의견이 많이 나와서 이장 논의가 나던 차에 중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오늘날의 위치인 융릉 서쪽으로 이장, 효의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사도세자의 능과 묶어서 '융건릉'이라고 부른다.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백성들의 민원을 직접 다가가 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격쟁 항목 참조. 신료들이 안전상의 문제를 들어 반대하기도 하였으나 정조는 "백성들은 나의 자식들이고, 백성들이 격쟁을 통해 나에게 호소하는 건 부모에게 호소하는 것과 같다. 그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이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강행했다.

이덕무의 저서 은애전은 정조 치세에 벌어진 실제 사건과 정조의 실제 판결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의빈 성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상당한 로맨티스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미국이 최초로 역사란 무대에 본격 첫발을 내딛었던 시점이 바로 이 정조대왕의 치세기였을 무렵이다.

역대 조선왕들이 앓던 고질적인 유전병 종기를 앓고 있었으며, 말년에는 종기로 굉장히 고생하다 승하했다.
"밤이 깊은 뒤에 잠깐 잠이 들어 자고 있을 때
피고름이 저절로 흘러 속적삼에 스며들고 이부자리까지 번졌는데
잠깐 동안에 흘러나온 것이 거의 몇 되가 넘었다.
정조 실록 24년 6월 25일
그 더운 여름날 '몇 되'나 되는 고름을 쏟으며 고생했다고 하니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심각한 상태에서도 정조는 당시 열악한 의료기술 탓에 종기를 어떻게 손 써보지도 못하고 인삼을 넣은 탕약만 마시다 악화되어 승하했다.

10.1. 술 사랑

어릴 적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담배를 병적으로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임오화변 겪고도 이정도만 비뚤어진 거면 거의 막장가족 분야의 초월신이자 먼치킨이다. 그렇다기보다는 PTSD로 인한 강박증과 완벽주의가 아닐까...

의 경우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한 번씩 먹었는데, 그 어쩌다 먹는 술이 술에 취해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또한 술버릇은 다른 사람 참 피곤하게 만드는 술버릇 중 하나인 '다른 사람에게 어거지로 술 권하기'였다고 한다. 그냥 직장 선배가 그래도 피하기 힘든데, 하물며 전제군주정의 왕이(... )

파일:22082642580EFF0F0E.jpg[20]
여담으로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의 팔달문 시장(남문 시장) 입구 쪽에 보면 정조가 술상 앞에 앉아 있는 동상이 있다. 그 동상에 불취무귀(不醉無歸), 그러니까 '취하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다만, 이는 진짜로 그런 의미로 쓴 것은 아니고, 백성들이 술에 취할 흥취를 즐길 정도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글귀이다.

사실 증류주이든 발효주이든 곡식으로 을 만들려면 엄청난 양이 소모된다. 막걸리 한 잔이 백성들의 밥 한 끼였고, 때문에 흉작이나 나라가 어려워질 땐 항상 금주령이 내려졌다. 이는 서양도 똑같다. 와인이나 꼬냑이 고급 술로 취급되는 이유가 있다. 먹고 살기 힘들 때는 만들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양의 과일을 썩혀서 만들었으니까.

선비들도 강해져야 한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정약용 같은 문약한 선비들을 하루 종일 손이 부러져라 쏘기를 시킬 정도로 가혹했던 인물. 정약용에게는 이외에도 술을 옥으로 만든 필통에 부어 마시라고 종용했을 정도다. 이 시절 필통은 붓 몇 자루가 들어가는, 현대 기준으로는 바가지만한 크기였다(…). 게다가 왕이 직접 삼중소주(三重燒酒)를 하사했다고 한다. 그 당시 소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니 도수를 알수가 없지만, 그냥 소주도 30~40도는 되는데 그 소주의 3배라는 것이면 90도를 넘나드는 무식한 도수가 나오고 청주를 기준으로 해도 45도에서 60도는 된다. 숙종 때 중국 북경사람들도 조선 소주가 너무 독해서 싫어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도수가 높았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가장 무난한 등급의 수성고량주를 피처만한 크기의 필통으로 원샷해도 맥주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고 깡소주를 즐길 정도로 술에 익숙해진 사람도 급성 위궤양으로 실신해 응급실로 직행할 수준인데, 조선식 삼중소주를 필통으로 원샷했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후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되도록 술을 마시지 말고 특히 '원샷'을 피하라고 강조했다. 이때 위의 옥필통 일화를 언급하며 '나는 오늘 죽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편지에 나와 있는 표현 그대로다.)

성균관 제술 시험에서 합격한 유생들을 불러다가 희정당에서 연회를 벌이고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申耆)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閔台爀)과 각신 서영보(徐榮輔)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
정조실록 34권, 정조 16년 3월 2일 신미 1번째 기사

조금만 번안하면 "옛 사람들은 술로 취하게 하고 그 사람의 덕을 살펴본대. 오늘 취하지 않으면 돌아갈 생각하지 말고 실컷들 마셔라. 신기 넌 술자리 자주 해봤으니 알지? 잔 돌려. 내각과 정원, 호조는 술 좀 많이 갖고오고 팔환은배(약 220ml잔)을 쓰되 노인들은 작은 잔, 젊은이는 큰 잔을 쓰자. 태혁이하고 영보는 술잔 돌리는거 잘 보고 누가 뺑끼 안치나 감시해라." 요새 술자리에서 한 말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거기다 이 자리에는 오태증이라는, 집안 대대로 주당으로 이름난 유생이 있어서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 정조는 그의 할아버지 오도일이 숙종 대에 여기 희정당에서 술에 취해 넘어졌다면서, 술 5잔을 더 먹여 결국 취하게 했다. 그래놓고는 "오도일이 여기서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이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지금 그의 후손이 같은 장소에서 취해 쓰러진 것이 우연이 아니다"라며 흐뭇해했다.강제 예언실현도 아니고 여하튼 그토록 술을 좋아하다보니까 사회적 분위기도 같이 따라가서 수도 한양에 술집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하도 많이 들어서다보니까 당대에는 상당한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서 사대부들이 술집을 없애자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한번은 낚시를 한적이 있었는데 채제공, 심환지, 남공철, 서유구, 이가환, 이상황,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성해응 등 각 정파별로 터줏대감부터 새내기까지 줄줄이 거느리고 했는데 제대로 못 잡은 사람은? 을 내렸다.

다만 야사에 따르면 조선은 술에 대해 매우 관대한 나라였다. 높으신 분들부터 천민들까지, 한 번 마시면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게 기본이라 생각할 정도다. 일단 둘러앉아 작정하고 마시기 시작하면, 안주도 거의 안 먹으면서 빠른 속도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술상에 그대로 엎어지거나 술 가지러 가다가 술상 근처에서 쓰러져 잠들기 일쑤인데, 이렇게 아침까지 바닥에서 자다 깨서 영의정은 나랏일 보러 가고, 농부들은 농사 지으러 갔다고 한다. 아무도 영의정 급이 술에 취해 아침까지 널브러져 자는 걸 뭐라고 하지 않았다고...[21] 실제로 조선을 유람하고 간 외국인들의 기록을 보면, "조선은 술 때문에 망할 나라"라는 얘기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커피로 망했다.이는 '조선 놈들은 하도 많이 먹어 농사를 지어봐야 소용없다'는 얘기와 함께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조선 탐방 후기이다. 정조가 유독 병적이었다고 하기에는 조선의 술 문화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던 것. 근데 정승 급까진 이렇게 놀았어도 왕이 이렇게 노는 건 흔치 않긴 했다(...)

게다가 담배 예찬론자여서 담배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거나, "소화에 좋고 추위와 더위를 쫓아낸다"고 극찬한 적이 있다. 심지어는 까지 쓴 적도 있다. 문제는 그의 아들 순조는 지독한 혐연주의자였다는 거... 더불어서, 시력이 나빠 안경을 애용하기도 했다.

10.2. 헌종과의 유사성

정조의 인생을 똑같이 따라걷는 왕이 나오는데 바로 증손자인 헌종이다. 정조는 의빈 성씨를 아끼던 로맨티스트 였는데 헌종 역시 경빈 김씨를 아끼던 로맨티스트였다. 그리고 둘은 개혁을 추구하던 개혁 군주들이었다. 또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헌종은 아버지 효명 세자를 잃어버렸고 두 왕은 늘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성묘하러 가는 등 효를 다했고 헌종 역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둘은 모두 왕대비와 갈등을 벌였다. 정조는 정순왕후, 헌종순원왕후 김씨와 정치적 갈등을 벌였다. 여기서 차이점은 정순 왕후는 정조의 친할머니는 아니였고 순원 왕후는 헌종의 친할머니였다는 점.

게다가 이들 곁에는 이들이 아끼던 신하들이 있었는데 정조는 채제공정약용, 헌종김정희박규수가 있다. 우선 채제공은 정조를 모시던 충신이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키우던 인재였다. 김정희는 비록 헌종 곁에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지만 헌종이 낙선재에 현판은 김정희의 글씨만을 세우게했고 그의 제자를 불러 김정희의 개인적인 근황을 묻거나 전권을 잡자 김정희의 유배를 직접 풀어주는 등 그를 아꼈다. 일설에는 그에게 벼슬을 주려했으나 추사가 당쟁에 지쳐 거부했다는 야사도 있다. 박규수는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아끼던 인재였고 효명 세자 사후 정치에 떨어져 있었으나 당시 세도정치를 끝장내려고 노력하던 헌종의 눈에 띄어 병과에 합격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헌종실록의 한 부분에서 헌종이 얼마나 박규수를 아꼈는지 알 수 있는데 "부친이 아끼는 자네를 등용하겠네. 자네와 같은 인재를 늦게 만난 것이 후회되는구만"이라 하였다. 두 왕이 아끼던 신하들의 운명도 비슷하다. 정약용은 정조가 죽자 정치 인생이 끝나며 유배로 인생을 살아야했고 추사와 박규수 역시 자신들을 비호하던 헌종이 죽자 안동 김씨들에게 공격당해 김정희는 또 유배를 갔고 박규수는 중앙에서 쫓겨나 지방 현감 등으로 한직을 떠돌아 다녔다. 하지만 이들은 이 생활에서 업적을 남기며 왜 이들을 두 왕이 아꼈는지 증명했다. 게다가 죽음도 석연치 않은 점 역시 비슷하다. 그리고 정조는 장용영을 헌종은 총위영을 세운것 역시 비슷하다. 헌종은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정조의 정책을 본떠 했다고 한다.

11. 유사역사학음모론

11.1.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덕일에 의해 발굴된 정조의 전율의 명대사(?).

",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는 즉위하는 당일 빈전殯殿 문 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고 한 말이다.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해) 이후 '하루도 잊지 않고 가슴 속에 간직해 온 한 마디를 선포했다'고 알려졌다. 이덕일에 따르면 그 즉시 일성에 대신들은 경악했다 한다.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으며 '14년 전 뒤주 속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가 다시 살아난 모습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라 한다.[22]

사실은 이덕일의 편집과 픽션 창작에 따른 결과로, 실제로는 완전 다른 맥락이었다.
召見大臣于殯殿門外。 下綸音曰: "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 先大王爲宗統之重, 命予嗣孝章世子, 嗚呼! 前日上章於先大王者, 大可見不貳本之予意也。 禮雖不可不嚴, 情亦不可不伸, 饗祀之節, 宜從祭以大夫之禮, 而不可與太廟同。 惠慶宮亦當有京外貢獻之儀, 不可與大妃等, 其令所司, 議于大臣, 講定節目以聞。 旣下此敎, 怪鬼不逞之徒, 藉此而有追崇之論, 則先大王遺敎在焉, 當以當律論, 以告先王之靈。"

빈전(殯殿)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였다. 윤음을 내리기를, "아! 과인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대 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 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禮)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정도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향사(饗祀)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大夫)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 하고, 태묘(太廟)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혜경궁(惠慶宮)께도 또한 마땅히 경외(京外)에서 공물을 바치는 의절이 있어야 하나 대비(大妃)와 동등하게 할 수는 없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절목을 강정(講定)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미 이런 분부를 내리고 나서 괴귀(怪鬼)와 같은 불령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 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英靈)께도 고하겠다." 하였다.
정조 실록 1권, 정조 즉위년 3월 10일 신사 4번째 기사

정조는 그날 '내가 비록 사도세자의 아들이긴 하지만 영조께서 효장세자의 아들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것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신하들이 "내 뜻을 빙자하여 사도세자를 높이려고 한다면 마땅히 법률로 다스리겠다."라고 말했다. 물론 정조 자신도 사도세자를 높이고 싶은 본심이 있기는 했겠지만 그러면 영조의 결정을 뒤집는 것이 될 테고 즉위 초부터 이런 민감한 문제를 꺼냈다간 정국이 요동치고 역풍이 불 것이 뻔했기에 원칙론을 밝히는 선에서 선언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먼저 밝히고 나서 얘기했다.

이 발언은 사도세자 계승 의지나 복수심에 대해 천명했기보다는 정조의 성공적 즉위 이후 사도세자 문제를 꺼내는 사람들을 제어하고 그를 통해 정국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 부모의 죽음을 복수와 숙청의 명분으로 사용한 이 있었고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던 만큼 정조가 적어도 피에 눈이 먼 복수를 원하지 않는 한, 신하들을 안심시킬만한 행동을 해야 할 필요가 분명 있었다. 사도세자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정조가 막장이 아닌 한 복수할 만한 대상은 거의 없었다. 임오화변 당시 당파를 막론하고 대부분 세자를 감싸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현 국왕의 아버지, 그것도 세자가 죽었을 때 관직에 있었다는 자체는 찬반 여부 불분하고 숙청 대상에 들 수 있었다. 찬성했으면 당연히 죽는 것이며 반대했어도 "네가 더 잘 반대하여 선왕을 제대로 보필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잖냐?"라는 소릴 듣는 순간 죽는 것이고, 가만히 있었으면 있었던 대로 "너는 세자가 죽는데 관심 하나 없었냐?"라는 소리를 들으며 죽을 수 있다. 갑자사화 당시 이세좌는 사약을 전달했다는 왕명을 이행했다는 이유만으로 죽고 광주 이씨에게도 불똥이 튀었으며 폐비 논쟁 때 적극적으로 폐출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받은 신하들도 있었다. 신하들의 경계심 자체가 높았을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혜경궁을 대비와 같이 할 순 없다.", "추숭하려고 하는 자들은 괴귀와 같은 무리다.", "근본을 둘로 하지 않겠다."[23], "인정을 펴서 사도세자에게 제사를 지내겠지만 당연히 태묘의 예는 아니며 대부에 대한 제식을 따른다."라는 말을 통해 영조의 유지를 확실히 계승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뜻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정조의 발언을 사도세자에 대한 직접적인 계승 의지로 해석하는 것은 발화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

물론 해당 발언 놓고 보면 이덕일과 같은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조의 말이 앞뒤 모두 진심인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것이 핵심이고 뒷부분은 명분용 겉치레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실제로 당시에도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부분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해석하고 이에 편승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해당 내용은 위와 같이 실제 이덕일이 쓴 것과는 다른 내용이며 정조는 자신이 한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덕사, 이일화, 유한신의 경우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사형 당했고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영조의 인산이 끝난 뒤에도 안동 유생 이응원이 비슷한 상소를 올렸지만 정조는 이응원과 그의 아버지 이도현을 죽였다. 이때 그 두 부자를 "외로운 새새끼, 썩은 쥐새끼"라고 비난했으며 아예 이 사람들이 태어난 안동을 부에서 현으로 강등하기까지 했다.[24] 이런 조치는 대게 강상을 범하거나 역모를 일으킨 자가 나온 곳이 아니면 잘 나오지 않는다.

노론에서도 위에 나온 것처럼 처음에는 불안감을 가졌을 수는 있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임오화변의 일을 끄집어낼까 봐 불안해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선언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존현각 사건이나 홍계희 집안의 획책 등을 보면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던 듯하다. 이후에도 추숭 반대를 외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오히려 앞서 언급한 발언과 처벌을 통해 노론을 안심시켰고, 사도세자에 대한 추숭도 장기간에 걸쳐 노론 세력과의 협력을 약속하면서 점진적으로 시도했다.[25]

11.2. 독살설과 요절설

정조는 조선왕 독살설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정조의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석연찮은 점과 정치적 논란 때문에 노론 지도부인 심환지정순왕후의 주도로 정조가 암살되었다는 암살론이 제기되었으나 최근 심환지와 정조가 비밀리에 주고받은 서찰이 공개되어 수그러든 감이 있다. 사실 오회연교와 관련해서 전후 사정을 따져본다면 심환지를 측근이라기보다는 함께 해야 할 당파의 영수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하겠다.

또한 암살론 자체가 나오게 된 계기는 정조의 사후 정약용이 직접적으로 시상, 즉 심환지가 정조를 독살했다고 언급을 한 것이 크다. 특히 조선 시대에 무고죄를 극형으로 다스린 것을 고려하면 확실히 정약용이 무슨 의도에서 그런 글을 썼는지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진 않다. 그러나 이 부분 자체도 심환지와 당시 문제의 어의인 심인이 인척 관계인 점을 고려하면 나올 만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 야음을 탄 독살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진 밤을 지새우며 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집권 기간에도 여러번의 독살 위험에 노출되었기에 정조 암살론이 단순한 억측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목소리가 있다.

문제는 다른 어의들과 달리 심인에 대해서는 꾸준히 공격적인 공세가 이어진다는 점과 심환지의 졸기 등에서 사관들이 심환지를 공격하는 부분 등이 암살설의 근거가 되는 것. 정순왕후의 경우에도 기록을 잘 보면 사적으로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고, 죽기 직전 '수정전'[26]을 언급해 정순 왕후를[27] 오게 한 것을 보면 서로의 신뢰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암살론의 여러 근거 때문에 《영원한 제국》의 작가 이인화, 이덕일 등의 작가와 학자들은 계속하여 암살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암살설[28]이 영향인지 소설이나 드라마에선 독살된 걸로 진행된 편이라고 한다.[29]

암살론자들은 오회연교 등 정치적으로 격한 상황에서 정조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고, 첫날에는 연훈방 처방으로 효과를 보았다고 스스로 언급한 다음, 이어서 연훈방을 처방했을 때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사실상 급사해버렸기 때문에 독살설 주장이 더욱 맹렬한 것.[30] 현종, 효종 본인 뿐만 아니라 형 소현 세자 역시 암살의 희생자라는 설이 제기된 마당이니 각자 알아서 판단하길...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정조가 단명한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애연가주당에 식사도 불규칙하게 했고[31] 본인 스스로도 잦은 질병을 앓고 고통스러워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 데다가 거기에 왕을 과로사로 몰고 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조선의 정치 체제를 충실히 따르다 못해 훨씬 과격하게 보낸 인물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32] 이로 인해 정조의 과격한 처방법을 두고 정조의 의술에 대한 논쟁도 발생했다.

따지고 보면 정조는 가장 평균적인 조선 왕의 삶을 살다 간 인물이다. 조선의 왕은 평균 만 23세에 즉위해, 평균 재위 기간은 19년 2개월[33] 평균 수명은 만 47세[34]였는데 정조는 만 24세에 즉위해, 24년을 재위하고 만 47세(한국 나이 49세)에 훙했다. 더군다나 원손, 세손, 사실상의 계승자, 대리 청정 등 기본 코스는 모두 밟았으며, 조금만 더 살았어도 상왕까지 거칠 수 있었다.[35] 즉 엄밀히 따지자면 평균적인 삶을 살았고 요절한 것은 아닌 셈이다.

여기서 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보자면 위에서 언급한 정조의 성격도 요절설, 독살설에 의혹을 지핀 것이 아닌가 싶다. 정조는 매우 다혈질이고 급한 성격인지라 신하들과 갈등이 많았다. 재위 기간 24년 동안 실록에 기록된 신하들과 논쟁만 해도 5차례 ~ 6차례나 될 정도다. 조선 왕의 특성 상 과로는 기본인데다 정조의 경우 스트레스와 잔병치레가 잦았고, 술담배를 즐겼으며, 한 사람이 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밀어붙인 점 등을 고려하면 48살에 죽은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당시에는 50세만 되어도 잘 살았다고 하던 때였고, 60대까지 사는 사람이 전 국민의 5%도 되지 않던 때였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 치명적인 질병이었던 종기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가령 양력 1800년 5월 30일에는 정조는 대전에서 신하들과 또다시 한바탕 논쟁을 벌였고,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오늘부로 난 신하들과 일체 논의를 하지 않겠다!!"고 폭탄 선언을 한다. 이 말인즉슨 갈등의 최고 정점에 다다랐다는 점이며 정조가 정치적으로 단절을 선언한 셈이다. 그리고 약 4주 뒤인 1800년 6월 28일, 정조는 승하하게 된다. 승하하기 직전에 벌어진 신하들과 논쟁에서 생겨난 극심한 스트레스가 정조가 이미 가지고 있던 질병인 종기를 악화시켜 1달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12. 미디어

대표적으로 마치 이 세 명의 선왕처럼 여전히 혈기왕성의 젊은 피 젊고 또 쌩쌩하여 한창 활동하며 창창해보이는 그런 미소/중년 등의 미남 위주로 자주 그려지는 훈훈한 그리고 준수한 외모의 이미지로 꽤나 비춰지는 듯한 느낌이 상당하다.

12.1. 정조가 등장한 작품

사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정조 본인에 대한 관심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따지고 보면 정조 본인보다 그의 주변 인물들, 즉, 영조, 혜경궁 홍씨, 홍국영 등의 인생들이 훨씬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를 다루기 위해선 사도세자를 절대 빼놓을 수가 없었는데, 그럴 거면 그냥 사도세자를 주인공으로 하면 되지 뭐 하러 정조를 주인공으로 하겠는가?

사실 창작물로 만들기 위해선 대중의 관심이나 인지도가 필요한데, 이 무렵까지 대중들의 정조에 대한 인식은, "사도세자의 아들", "할아버지의 탕평론을 계승" 정도일 뿐 정조 본인의 업적이나 생애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런데 1993년에 노론메이슨의 시초라 할 만한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이 발간되면서부터 상황이 변했다. 이 소설의 대흥행 덕분에 정조는 "아깝게 일찍 죽은 절대 개혁 군주"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상 1990년대 중반 이후 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모든 정조 캐릭터의 이미지는, 영원한 제국의 정조를 재탕 삼탕 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 게다가 타이밍 좋게도 1990년대와 2000년대는 개혁이나 혁신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시대였기 때문에, 창작물에서 정조 열풍은 그야말로 대유행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턴 이런 유행도 어느 정도 사그라든 기세. 일단 정조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 중 2008년 이산 이후로 딱히 성공했다고 할 만한 작품이 없다. 사실 모든 작품이 "개혁 군주 정조가 노론과 싸우며 고군분투한다."는 천편일률적인 플롯을 가지고 있는데, 대중들이 질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이 한글화되고, 위에서 언급된 심환지와의 서찰이 발견되면서 실제 정조와 그가 실제로 한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자들은 어느 정도 이해가 깊어진 상태. 한마디로 떡밥이 쉬었다. 가장 최근작인 2014년 역린(영화)의 경우, 항목을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아예 대놓고 역덕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상황(..).

참고로 사무라이 스피리츠 섬의 배경 시대가 정조의 재위 기간인데, 그 때문에 김해령 관련 설정이 고증 오류에 가까운 부분들이 많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12.2. 정조를 연기한 배우들

추가시 되도록이면 년도 순서대로 맞춰주시길 바랍니다.
  • KBS 2TV 하늘아 하늘아 - 이민우(유년기), 조경환(성년기)
  • MBC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 - 장덕수(유년기), 전호진[36](성인)
  • MBC 조선왕조 오백년 '파문' - 김용건
  • KBS 1TV 왕도 - 강석우
  • 영화 영원한 제국 - 안성기
  • 영화 귀천도 - 이기열
  • KBS 2TV 소설 목민심서 - 김흥기
  • MBC 홍국영 - 정재곤
  • 2007년 KBS 2TV 한성별곡 正 - 안내상 : 사실 엄밀히 말하면 정조는 작품 속 왕의 모델이지 작중에는 정조 본인이라고 명확히 나오지는 않는다. 지나치게 마르고 신경질적인 이미지로 나오는데 (물론 연기는 명연기였다.) 실제 정조의 모델과는 맞지 않는다. 이 모습으로 바로 직전 영화 《음란서생》에도 왕으로 나왔다는 게 압박.
  • 2007년 MBC 이산 - 박지빈(유년기), 이서진(성인) : 임오화변을 시작으로 죽음까지의 일대기를 다뤘다. 전체 77회 중 대부분이 세손 시절, 45회 이후부터가 재위 시절을 다룬다. 의빈 성씨(한지민)와의 로맨스도 극의 큰 축을 이뤘다. 최고 시청률 35.5%를 기록하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
  • CGV 정조암살미스테리 8일 - 박건태(유년기), 김상중(성인)
  • 2008년 SBS 바람의 화원 - 최수한(유년기), 배수빈(성인) : 작중 배경이 도화서이다 보니 실제 어진화사 과정이 에피소드로 등장했고, 덕분에 실제 배우의 얼굴을 기반으로 그려진 전신 어진이 탄생했다. 스토리상으론 임금의 손을 드러나도록 어진을 그린 게 트집 잡힌 후 이를 그린 신윤복(문근영)이 자기 손으로 직접 찢어버렸다. 이러니 당연히 대역죄가 되어 참수형을 당하게 생겼는데, 정조의 기지 덕에 죽음은 면한다. 어전 회의가 있는 날 출입구 앞에 문제의 찢어진 어진을 깔아 신하들이 밟고 들어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는데, 이후 신하들에게 '너희가 밟고 들어온 이 그림이 어진인가 아닌가. 이것이 어진이라면 신윤복 이전에 너희들이 대역죄로 참수를 당해야 할 일이고, 어진이 아니라면 신윤복은 억울하게 죽는 것이 아니냐'라고 추궁했고 신하들은 꼼짝없이 버로우.
  • KBS 1TV 거상 김만덕, 성균관 스캔들 - 조성하
  • 영화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 남성진
  • SBS 무사 백동수 - 홍종현
  •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백광두
  • 영화 역린 - 현빈
  • SBS 비밀의 문 - 이도현(유년기), 이제훈(성인) : 이제훈은 이선 역과 더불어 1인 2역을 맡았다. 성인 정조는 마지막회에서 단 한 번 나온다.
  • 2015년 영화 사도(영화) - 이효제(유년기), 소지섭 : 영화 자체는 임오화변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소지섭의 정조 역할은 까메오에 가깝다.
  • 2016년 수원시립공연단 창작 뮤지컬 《정조-만천명월주인옹》 - 이재식, 박성환
  • 2017년 MBC신비한TV 서프라이즈》 746회 - 이재희(아역), 박재현(성인) : 2017년 1월 1일 방송된 '언빌리버블 스토리' 코너에서 '왕이 사랑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 2017년 수원문화재단 창작 판소리 《정조가》 - 전태원
  • 2019년 채널A천일야사》 118회-성덕임, 정조의 첫사랑- 이주호(이성환) : 2019년 3월 25일 방송, 정조와 궁녀 성덕임(의빈 성씨)의 사랑이야기

12.3. 소설

  • 2005년 로맨스 소설 《비단속옷》 : 정조와 호위 무사 연(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
  • 2005년 로맨스 소설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 정조가 현대의 황태자 이한으로 환생해 벌어지는 이야기.
  • 2017년 로맨스 소설 《우아한 환생》 : 현대의 역사학도 오세아가 조선 시대로 가서 정조를 돕는 내용.
  • 2017년 로맨스 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 의빈 성씨 성덕임의 인생과 정조와의 사랑 이야기.
  • 2018년 로맨스 소설 《간택 - 왕들의 향연》: 서탁을 통해서 펼쳐지는 정조와 효의왕후를 모티브로 한 사랑 이야기.

12.4. 만화

13. 같이보기

14. 둘러보기

조선의 역대 왕세손
의소세손 이정 정조 이산 세손 없음(왕세자 문효세자 이순)


[1] 황제 추존과 동시에 폐지[2] 개인적으로는 사도세자를 아버지라고 하였지만, 법적•공식적으로는 효장세자를 아버지라고 스스로 인증하였다. 조선 왕조 실록 정조 실록 1권, 정조 즉위년 3월 10일 신사 4번째 기사 참조. 그리고 사도세자에게는 황숙부라고 칭하는 모습을 실록에서 찾아볼수 있다. 근데 수능 한국사 강사인 설민석은 이 기사의 일부만 인용하여 마치 공식적으로도 사도세자를 아버지라고 선포한 것처럼 사실을 왜곡하기도 하였다. 후술되어있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사도세자가 아버지라고 말했을 뿐, 공공식적으로는 항상 효장세자를 아버지로 섬겼다. 설민석을 포함한 대다수 역사 강사들이나 사극에서 자주 인용되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역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러나 선왕께서 과인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하셨으므로 그 뜻을 따라야 한다. '는 것이 본래 내용이다. 노론 음모론과 정조 암살설을 주장하기 위해 뒷내용을 잘라놓고 앞부분만 가져와 인용하는 것. 실제로 정조는 사도세자를 높이려는 일말의 시도도 용납하지 않았다.[3] 현대 한국어 음가로 치환하면 '성'이 된다[4] 구상유취라는 사자성어에서 따온 욕설이다.[5] 의역이 아니다. 원문에 쓴 글자도 새부리 훼(喙)자를 썼다.[6] 역시 후한 말기 매관매직으로 벼슬을 산 최열에서 유래된 동취라는 성어에서 나온 표현이다. 최열은 제갈량의 친구 박릉 사람 최주평의 아버지이기도 하다.[7] 반면 할아버지인 영조는 상과 벌이 밥 먹듯이 바뀌었다. 영조 48년에는 3명을 번갈아 총합 10번이나 영의정을 갈아치울 정도였다.[8] 위 이미지의 본문 왼쪽에서 세 번째 줄 가장 아래.[9] 정조는 실제로 소위 '이단사설'이라는 양명학과 고증학의 청나라 본토 학계의 트렌드와 한참 뜨는 학자들의 저서와 개념을 쭉 꿰고 있었고, 패관 문학과 소품에 대해서도 상당히 잘 알았다. 이런 것들을 독파했기에 잘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정조는 무턱대고 탄압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정론과 문체를 세워야 한다는 스타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타고난 성정의 한계가 있었을 뿐, 유학 군주로서 모범이 되고자 노력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정조는 곧잘 세종과도 비교되는데, 뼛속부터 유교적 성현이었던 세종과 견주어 이율배반적이라 평가하는 것은 정조로서는 억울할 수 있다.[10] 그러나 사실 군신 관계라는 게 항상 불안정한 정치적 관계이고, 특히 정조처럼 왕이 다혈질일 때에는 신하 입장에서 불안감이 생기고 혹시 모를 일에 대해 보험을 들어 놓는 일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후로 심환지는 정조를 죽인 역적쯤으로 취급당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 편지가 남아 있었다는 게 후손들 입장에선 다행한 일이다.[11] 정조의 공식 사인은 종기로 되어 있으나, 어찰에 적어 놓은 정조의 말에 따르면 온갖 종류의 병에 시달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읽는 사람이 다 안타까울 지경이다.[12] 강명관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참조[13] 정조 어진 뿐만 아니라 조선 왕조의 어진 대부분이 한국 전쟁 중 또는 전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14] 그런데도 많이 준수하게 그려졌다. 가져온 것은 각진 과 짧은 텁석부리 수염 정도...다만 나이가 든 모습은 위 초상처럼 어느 정도 후덕한 모습이다.[15] 특히 겹으로 된 턱과 구레나룻을 보면 꽤나 일치하는 면이 있다.[16] 하지만 이 포스팅을 봐선 아닐 가능성도 농후해 보인다.[17]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충사를 확장하고 숙종 본인이 직접 이순신의 제문을 지었다. 영조는 추승 자체보다도 정작 신하들을 까는데 이순신을 이용했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박문수. 사실 영조 뿐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의 왕들이 이순신과 신하들을 상호 비교하면서 까는 통에 피해자들이 여럿 있다. 특히 더 두드러진 것은 유명 수군 도독을 사후 유일하게 열거한 것. 숨덕을 넘어 대놓고 덕질. 즉, 대표 대덕이다...[18] 여기엔 왕의 사유 재산인 내탕금까지 투입했다.[19] 정조 실록 16권 7년(1783년 청 건륭 48년) 8월 2일 3번째 기사[20] 해당 동상은 팔달문시장 도보 정리로 근처로 이동했다.[21] 근데 이건 서양에서도 비슷했는데 영국만 해도 으로 거리에 술주정뱅이들이 넘쳐날 정도였다.[22] 사도세자의 고백 345쪽[23] 효장세자의 아들 위치를 따르겠다는 의미[24] 정조 실록 1776년(즉위년) 4월 1일, 8월 6일 및 8월 19일 조[25] 참고 문헌: 사료 - 조선 왕조 실록, 국사 편찬 위원회 디지털 베이스 / 단행본 -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 휴머니스트, 2004년 / 논문 - 정병설, 길 잃은 역사 대중화[26] 당시 정순왕후가 기거하던 대비전[27] 정조가 정순 왕후를 부른 이유는 불확실하다. 정황상 정순 왕후에게 뒷일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기려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28] 다만 심환지가 비밀 어찰을 어명대로 태우지 않고 숨겨두었다는 것 자체가 심환지가 정치적으로 정조를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암살론을 100% 반증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29] 드라마 이산(드라마)의 소설판에서는 '수정전'을 정순 왕후에게 피살당해 죽어가는 정조의 단말마로 해석했다. 드라마 이산에서는 시간이 흘러 죽은 것으로 처리했다.[30] 그런데 효종 역시 얼굴에 종기가 생겨 신가귀가 침으로 따자 나아졌다가 출혈이 멈추지 않아서 죽었다. 때문에 막연히 운이 나빴다고 볼 수도 있다.[31] 식사는 꼬박꼬박 챙겼고 반찬을 줄이는 철선도 계획적으로 했던 할아버지 영조와는 달리 정조는 식사를 소홀히 한 편이다. 거기다 《한중록》에 따르면 아침에 약해서 아침을 잘 안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중록 자체가 원체 혜경궁 홍씨의 입장이 강하고, 정조 실록이나 일득록과 차이가 꽤 있기 때문에 유의해야 할 부분이다. 정조는 필통에다가 술을 담아 마실 정도의 주당에다가 담배 예찬론을 선보인 골초였다.물론 이렇게 살다간 현대에서도 훅가는데 조선 시대라고 해서 훅가지 않을리 없다.[32] 세종대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도 너무 지나치게 부지런해서 탈이 생겼다.[33] 단 폐위되거나(광해군, 연산군) 물러나거나(태조, 정종, 단종, 순종), 요절한 임금(문종, 예종, 인종, 경종)을 빼면 평균 재위 년은 28년, 영조를 빼면 26년이긴 하다.[34] 태조, 정종, 광해군, 숙종, 영조, 고종 등 60세를 넘긴 왕들을 제외하면 평균이 40까지 낮아진다.[35] 물론 상왕이 된 왕은 초반기 4명 즉 태조(조선), 정종(조선), 태종(조선), 세조(조선)이다.[36] 이름이 비슷한 배우 천호진이 맡았다고 알려져 있는 곳도 있는데 확인 결과 전호진이라는 다른 배우가 맡은 게 확실하며 전호진씨는 영화 쫄병수첩의 주인공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