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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7대 왕 세조의 어진.2. 상세
세조의 어진은 전쟁의 참화를 무려 세 번이나 비껴간 어떻게 보면 운이 정말 좋은 어진이라 할 수 있다.임진왜란을 기준으로 그 이전, 조선 전기 임금들의 어진은 전쟁 중에 대부분 소실됐거나 혹은 보관상의 문제로 사라져버렸다. 여기서 예외가 태조 어진과 세조 어진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주 경기전에 있던 어진이 살아남은 덕분에 현재 태조 어진이 전해지는 것 처럼, 세조 어진은 광릉의 능침사찰인 남양주 봉선사의 진전(眞殿), 봉선전(奉先殿)에 한 점이 봉안돼있었다. 이 두 어진은 다른 어진들과 달리 한양 밖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났다고 볼 수 있는데 현재 조선 전기 임금의 어진은 태조 어진과 세조 어진 초본만 살아남았으므로 아주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세조 어진의 첫 번째 운은 임진왜란때 있었는데, 1593년 3월 봉선사에 침입한 왜군이 세조 어진을 훼손하려 하자 봉선사의 승려 삼행(三行)이 왜군에게 애걸하고 사정하여 이를 막아 일차적으로 세조 어진을 구해낸 것으로 시작한다. 그 후 왜군이 광릉 숲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봉선사에까지 불길이 닿게 됐는데 이 당시 광릉의 능참봉이었던 이이첨이 개경에서부터 소식을 듣고 봉선사까지 달려와 삼행에게 세조 어진을 어디에 두었는지 물어 찾아 꺼낸 다음 위험을 무릅쓰고 개경의 행재소(行在所)까지 가지고 갔다. 이이첨이 목숨을 걸고 세조 어진을 찾아왔다는 내용은 곧 임금에게 치계됐고, 이이첨이 어진을 빼온 그 날 봉선사와 광릉의 모든 전각이 소실됐다는 사실까지 보고되면서 이 일로 이이첨은 승승장구하게 된다.
봉선전에서 가져온 세조 어진과 경기전에서 가져온 태조 어진은 임진왜란때는 임시로 영변 보현사에서 보관했으나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서 원래 있었던 봉선전과 경기전에 돌려놓아야 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두 건물이 사라진 상태였으므로 경기전에서 온 태조 어진은 경기전만 빠르게 복구해 다시 봉안했다. 그런 후 평양 영숭전(永崇殿)에 걸어두기 위해 경기전의 어진을 모사한 새로 만든 태조 어진과 봉선전을 다시 지을 때까지 보관처가 필요했던 세조 어진을 임시로 보관하기 위해 두 어진을 1619년(광해군 11년) 한양의 남별전(南別殿)에 봉안했다.
세조 어진의 두 번째 운은 병자호란때 있었는데 청나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광해군은 남별전에 있던 두 어진을 미리 대피시키기 위해 1622년(광해군 14년) 강화도에 영숭전과 봉선전을 중건해 그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전쟁이 일어나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됐고 이 과정에서 두 어진을 분실하고 말았다. 이후 두 어진을 찾긴 했지만 태조 어진은 너무 심하게 훼손돼 복원할 수 없어 종묘 북쪽에 묻어버렸고 천만다행으로 세조 어진은 약간 찢어지긴 했지만 크게 훼손은 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됐다. 나중에 인조는 자신이 덕이 없어 어진을 잃어버렸다며 세조 어진을 빨리 수리하라는 명을 내렸고 자신의 아버지 원종의 사당인 숭은전(崇恩殿)에 잠시 두었다가 수리를 마친 후 원종의 어진과 함께 중건한 남별전에 봉안했다.
그 이후로 세조 어진은 틈틈이 수리를 받았는데 이와 함께 1677년(숙종 3년)에는 남별전을 크게 수리하였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인조때 남별전을 중건하면서 3칸을 만들었는데 빈 1칸에 태조 어진을 두기로 하면서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모사해와 이때부터 태조, 세조, 원종의 어진이 함께 남별전에 봉안됐다. 1690년(숙종 16년)에는 별도의 이름이 없는 것은 이상하다고 하여 남별전을 영희전(永禧殿)으로 고쳤다.
그 후 1735년(영조 11) 영희전에 있던 세조 어진이 그린지 오래돼 종이가 해지고 흐려져 새 어진을 그리기로 했는데 이때 영조는 세조 어진에 무척 큰 관심을 보였다. 1735년 9월 10일, 영조는 아직 날이 밝지도 않은 새벽 5시부터 나와 5명의 화사(畵師)들이 모사한 초본과 기존 세조 어진을 비교하면서 이런저런 수정사항을 지시했다. 특히 세조의 얼굴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면서 지시를 내렸는데 눈동자와 눈썹 끝 부분이 기존보다 옅다며 묵을 더하라는 지시, 오른쪽 뺨 채색 부분에 안료가 뭉쳐 들떠보이는 부분을 수정하라는 지시, 얼굴빛이 기존에는 도화색(桃花色)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희다며 붉은색을 더 섞어 채색하라는 지시, 턱 아래쪽 부분이 다른 곳에 비해 좀 옅으니 도황색(桃黃色)을 더 섞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때 집필화사(執筆畵師)[1]는 이치(李𤦮)였는데 눈이 흐릿해 안경을 쓴 이치가 못미더웠는지 작업에 참여한 대신들이 수종화사(隨從畵師)[2] 장득만(張得萬)이 낫겠다며 장득만이 얼굴을 그리는 것을 추천하자 영조가 직접 장득만이 그리라고 명한 뒤 장득만에게는 동참화사(同參畵師)[3]로서 상을 내리라는 명을 내린다.[4]
세조 어진이 만들어진 후 영조는 직접 세조대왕어용(世祖大王御容)이라고 표제까지 썼는데 그러고도 어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직도 얼굴빛이 옅은 것 같다며 다시 채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후 마지막으로 개안(開眼)을 위한 가장 중요한 의식, 점정(點睛)이 남아있었는데 원래대로라면 집필화사인 이치가 하는 것이 맞지만 앞서의 일 때문에 장득만이 하는 것이 낫겠다는 대신들의 의견이 있었다. 그러자 영조가 직접 이치에게 점정을 할 수 있겠는지 물어보았는데 이치는 자신은 점정을 하기에는 눈이 어두우니 장득만이 하는 것이 낫겠다며 사양했다. 영조는 동참화사 김익주(金益周)에게도 점정을 할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그 역시 눈이 어둡다며 부담스러해 결국 장득만이 점정을 했다.
그러고도 오후 4시 경에 영조는 다시 어진을 살폈는데 이때까지도 어진 속 세조의 얼굴빛이 예전에는 도화색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희다는 말을 했다. 영조가 얼굴빛이 너무 옅은 거 아니냐며 주위에 물어보면, 대신들은 옅지 않은 것 같다고 하나 결국 영조가 다시 채색을 시키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다 원본과 비교해 충분히 똑같아 보이고 더 이상 채색도 불가능하다는 의견들, 마지막에는 심지어 세조의 정신까지 되살린 것 같다는 의견이 나오자 그제서야 영조도 크게 흡족해하며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9월 17일, 새 어진을 영희전에 봉안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조 어진은 영희전에 있다가 다른 어진들과 함께 1908년 경운궁 선원전으로, 1921년에는 창덕궁 신선원전으로 옮겨졌다. 1935년까지 창덕궁 신선원전에는 12명의 임금 어진이 총 46점 봉안돼 있었는데 다른 어진들과 달리 세조와 원종의 어진은 딱 한 점 뿐이어서 최소 두 점은 있어야 한다는 문제 의식으로 한 점씩을 더 그리게 됐다. 이렇게 해서 세조와 원종의 어진이 한 점씩 더 제작돼 조선 임금들의 어진은 총 48점이 됐다. 하지만 마지막 전쟁이 또 남아있었다.
세조 어진의 세 번째 운은 6.25 전쟁때 있었는데 전쟁을 피해 모든 궁중 유물이 부산으로 가있을 때인 1954년, 부산 용두산 대화재로 사실상 대부분의 유물들이 소실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세조 어진 두 점도 소실됐는데 천만다행으로 1935년에 어진을 모사했던 김은호가 어진의 초본을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천만다행인 이유는 원래 초본은 나중에 세초(洗草)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김은호가 가지고 있던 어진 초본은 1969년 5월 14일 경향신문 기사에 실리기도 했으나 그의 사망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2016년 11월 서울옥션에서 진행한 김은호 작품 고미술 경매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를 국립고궁박물관이 구입해 현재 소장하고 있다.
3. 어진의 역사와 종류
3.1. 김은호 어진 이모본 초본
1935년에 찍힌 세조 어진의 모사 작업 사진(좌)과 1969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세조 어진 초본(우). |
위 사진은 1935년 창덕궁 신선원전(新宣元殿)에서 이당 김은호가 당시 궁에 보존되어 오던 세조의 어진을 이왕직의 주문으로 새로 이모(移模)해 그려내는 광경을 담은 것이다.출처. 하지만 사진 자체가 원본과 모사본 자체를 찍으려고 촬영한 게 아니라 모사본을 만드는 장면을 기록하기 위해 촬영한 것이라 원본인 어진은 잘 보이지 않는다. 모사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간단하게 그려낸 초본 외에, 완성한 정본과 모사하는 데 사용되었던 원본 두 점은 1954년 12월 26일 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 다른 왕의 어진들과 함께 소실되었다.
사진에서 멀리 보이는 세조 어진은 200년 전인, 1735년(영조 11년)에 이모했던 그 어진이다. 세조 어진만의 두드러진 특징은 신발이 백피화(白皮靴)라는 점이다. 1872년(고종 9년) 영희전에 있는 세조 어진을 살피던 고종이 백피화를 신은 모습이 특이했는지 옛날에는 흰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었는지 물어보는 기록이 남아 있다.# 흐릿하지만 김은호의 머리 옆으로 보이는 어진 속 세조의 신발이 흰색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1969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에 어진의 이모본에 관한 기사가 실렸는데, 1928년 원종과 세조의 어진을 모사했던 김은호가 영릉 세종대왕기념관 내에 새로 건립된 김경승 작 세종대왕 동상의 고증에 대해 지적하면서 '1928년 당시 작업했었던 세조의 어진에 거의 수염이 없었다', '아들인 세조의 얼굴과 역시 수염이 성근 편인 태조의 얼굴처럼 세종의 얼굴도 그닥 수염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또 이 기사에는 세조 어진의 초본의 얼굴이 실린 사진이 남아 있는데, 오른쪽 사진으로 수염이 거의 안 보이는 모습이었다.[5] 이 흐릿한 어진의 초본을 바탕으로 하여, 세조의 얼굴을 청강문화산업대학 안태성 교수가 복원한 세조의 어진, 그리고 안태성 교수가 아래에 언급된 세조의 어진 초본으로 복원한 어진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입수한 초본의 전체 이미지(좌)와 얼굴 부분 확대 이미지(우). |
김은호가 1970년대에 정부의 의뢰를 받아 신사임당, 논개 등 표준영정을 그리는 과정에서 잠시 공개되었던 세조 어진 초본은 경향신문의 보도 이후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실전이 우려되었으나 2016년 뜻밖에 경매에 나타나면서, 누군가 개인 소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예상 낙찰가는 최대 5천만 원이었는데 국립고궁박물관이 7천 2백만 원에 낙찰받았다.#
김은호의 세조 어진 초본은 100% 완벽한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김은호가 이 초본을 그릴 때 어좌 밑에 있는 채전 등의 모양이나 어좌에 새겨져 있는 문양 등을 생략했기 때문이다. 왼쪽 아래에 바닥무늬를 그리다 만 모양이 2개 있어서 바닥무늬 정도는 추측이 가능하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나중에 복원하더라도 다른 어진을 참고하거나 추측으로 재현해야 한다. 그리고 의상의 문양이 세세하게 그려진 것에 비하면 얼굴 부분의 표현이 너무 단순하게 처리되었다며 얼굴 자체도 미완성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처음에는 초본에 손상된 부분이 없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복원이 가능하다며 곧 복원작업에 착수하겠다고 밝혔으나 최근에는 잠정적으로 복원하지 않는 것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이 초본이 윤곽선만 남아 있기 때문인데 옷이나 얼굴빛, 음영, 눈빛에 따라 모습이 크게 달라지는 초상화의 특성상 결국 윤곽선만 가지고 상상도를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 초본의 아쉬운 점은 김은호가 초본을 만들 때 당시 어진에 함께 적혀있었을 표제 같은 것들을 옮겨 적지 않아 최초의 세조 어진이 언제 그려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전시에서는 '세조가 사망한 직후, 예종이 세조의 어진을 제작해서 봉선사에 모시게 했었다'는 역사적 설명만을 더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 어진이 세조 때가 아니라 수양대군 때가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는데, 수염이 매우 적고 주름살도 많이 없는 등 전체적으로 젊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군 신분으로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될뿐더러, 용보에 새겨진 용의 발가락이 다섯 개인 것으로 보아[6] 즉위 직후 30대 후반이었던 임금 시절에 그린 어진임이 유력해보인다.
한편, 이 초본 속 세조의 얼굴은 영화 관상 등으로 대중에게 박힌 세조의 인상과는 180도 다른 너무나 순박한 상이어서 상당수 네티즌들에게 충격을 선사하기도 했다.
3.2. 선원보감 초상화
선원보감에 실린 세조의 초상화(좌)와 열성어진의 초상화(우). |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실린 세조의 모습이다. 세조의 어진과 다르게 하관이 매우 크고 수염을 풍성하게 그렸다.
둥그런 얼굴을 가진 세조의 얼굴을 하관이 넓게 그리고 수염을 풍성하게 그렸다. 그리고 관상학에서는 하관이 넓은 것을 좋은 관상으로 여긴다.
3.3. 합천 해인사 존상도
합천 해인사 존상도 |
3.4. 민간에서 그려진 초상화
민간에서 그려진 세조 초상 | 민간에서 그려진 세조 무속화 |
3.5. 기타
일본인이 세조의 어진을 그린 적도 있다고 한다(1472(성종3)년 6월 6일 실록의 기록). 시로에몬 마사히데(四良衛門正秀)라는 일본인에 대한 기록인데, 그는 일본 교고쿠(京極) 가문의 사신으로 와서 세조를 알현했을 때 세조로부터 "다음에 돌아올 때 불상을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와 달라"라는 요청을 받는다.[7] 이에 귀국하여 불상 장인들을 모았는데 세조가 그만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에 그는 우선 장인들을 일본에 남아 있게 한 후 조선의 새 왕에게 이전의 일을 문의할 겸하여 세조의 어진을 그려서 조선에 도착했다. 그의 친족들이 "너는 조선 왕의 명을 잊지 않은 데다가, 초상화까지 그려서 가니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고. 그런데 조선의 변방 장수는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8] 이에 빈 손으로 일본에 돌아간 그는 친족들은 물론 불상 장인들에게 크게 한소리 듣게 되었고(...) 먼 길을 오가느라 돈도 돈대로 썼던지라 무척 상심했던 차에 조선에 다시 사신으로 오게 되자 조선에서 어진만이라도 받아 서울에 안치한다면 마음이 좀 풀릴 것 같다며 어진을 받아 달라고 요청해 온 것.
이에 조정에서는 "부모의 초상을 그릴 때 털끝 하나라도 다르면 부모라 이를 수 없다는데[9] 좋은 뜻에서 한 일이라지만 알현 때 잠깐 본 기억만으로 그린 그림을 어찌 선왕의 어진[10]이라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제 이익을 위해서였을지언정 교화를 받지 않은 외국인이 선왕의 뜻을 잊지 않고 먼 길을 오가며 수고한 것은 정성스러운 것이다" 등의 의견이 나왔고, 결국 내국인이 어진을 사사로이 그렸다면 벌을 내릴 일이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며 마사히데에게 상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다만 그림은 역시 마음대로 받기가 좀 뭣했던지 마사히데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그 사신 일행이 보는 앞에서 소각했다고.
"인사부모지진, 일호일발불사, 즉비부모의(人寫父母之眞, 一毫一髮不似, 則非父母矣; 사람이 부모의 초상을 그릴 때, 털끝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즉 부모(의 초상화)가 아니다.)"의 정신에 충실했던 것이야 당시 관념상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해당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졌다면 당대 외국인의 시각에서 묘사된 진귀한 자료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에 여러 모로 아쉽다.
4. 갤러리
비공식 복원본[11] |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세조 전시회를 맞아 복제한 초본 |
합천 해인사 존상도(1458년). | 좌측 그림의 민간 모사도. |
세조 종친회에서 따로 복원한 어진[12] |
5. 테마전 세조
어진을 구입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018년 10월 22일부터 2019년 1월 13일까지 테마전 '세조'를 열었다.#, # 임금 단독으로 테마전이 개최된 것은 최초로, 세조 어진 외에도 진법, 세조 태항아리, 열성어필, 선종영가집언해, 경국대전, 영정모사등록, 광릉 제기 등 세조와 관련된 유물 30여점도 함께 전시되었다.[1] 어진의 용안 부분을 담당[2] 채색 담당[3] 어진의 용안 외 나머지 부분을 담당[4] 어진을 제작하고 봉안까지 마치면 집필화사>동참화사>수종화사의 순으로 포상을 하는데 집필화사는 품계를 올려줬고, 동참화사는 1년간 녹봉을 줬으며, 수종화사에게는 말 1필 정도를 지급했다.[5] 광대뼈가 드러났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광대뼈가 아니라 머리카락과 당시 별로 좋지 않은 신문 인쇄 기술로 인한 착시현상이었다. 발견된 초본을 보면 광대뼈가 없다.[6] 왕과 왕비는 오조룡, 세자와 세자빈은 사조룡, 세손과 세손빈은 삼조룡이 용보에 새겨진다.[7] 세조의 친불 성향이 작용한 듯하다.[8] 사신의 정식 행차가 아닌지라 변장의 권한으로는 감히 마음대로 통과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9] 유학자인 송나라 정자(程子)의 말이다.[10] 사실 본 문서 첫머리에서 보았듯, '어진'이라는 용어가 정해진 때는 1713년이므로, 1472년 당시의 기록에는 '어용(御容)'이라고 되어 있다.[11] 안태성 교수의 세조 용안 복원본(링크1)을 바탕으로 중국인 류첸(영연세자)이 다시 작업한 어진(링크2). 링크1, 링크2.[12] 이목구비나 얼굴형 등은 김은호 화백이 남긴 어진 초본 스케치와 비슷해 보이나, 초본 실물이 발견된 지 얼마 안 되었으므로 참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밖에 수염과 넓은 얼굴, 하관은 열성어진의 간략하여 그린 어진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복원된 어진이 멀리서 찍힌 사진으로 남아있는 세조의 어진과 해인사 세조어진과 비교하면 완벽하게 복원하지 못했다. 원래 세조의 어진은 백피화를 신고 있었다. 흐릿한 흑백 사진이긴 하지만 세조 어진을 이모하는 사진을 보면 뒤쪽에 있는 이모본에서 세조가 백피화를 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조 종친회에서 복원한 어진에는 백피화를 신은 모습은 반영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