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0:30:08

세조(조선)/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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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3. 찬탈의 업보?
3.1. 자식의 요절3.2. 자신을 돕던 방계 친척 및 총애하던 신하들의 몰락3.3. 세조와 관련된 문화재들의 비참한 상황

1. 개요

세조의 일화에 대해 다룬다.

2. 목록

  •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은 한국 최초의 회곽묘로 한국 묘제사 및 고고학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세조의 능제 형식은 이후 민간으로 퍼지면서 안정나씨 묘 출토 편지,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 청주 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 이응태 묘 출토 편지 등 다양한 한국의 부장 문화재가 땅 밑에서 썩지 않고 보존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초의 회곽묘인 만큼 세조 또한 수많은 국보급 왕실 부장품 및 서적과 함께 땅 밑에서 온전히 미라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선 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을 타고 다녔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낙마도 굉장히 많이 한 왕이라고 적혀 있다.[1] 웃긴 건 낙마할 때마다 바로 벌떡 일어나 아픔을 참고 멀쩡한 척 말을 집어탔다. 사실 낙마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잘못해서 목이 부러지면 죽을 수도 있고, 운이 좋아 크게 안 다쳐도 삐거나 멍들 각오는 해야 하는 터라 곧바로 벌떡 일어나는 건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효령대군충녕대군의 스승이었던 이수 같은 경우 취중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즉, 당시 낙마는 현대의 자동차 교통사고와 같은 큰 사고였다. 이외에도 날조, 과장된 측면이 있긴 한데 자기과시의 사례가 몇 가지 기록되어 있다.
이번 길에 세조가 그 용맹을 보이려고 일부러 노둔한 말을 타고는 노루를 쫓다가 그 말이 수십번을 넘어졌으나 문득 말에서 빠져나와 우뚝 서곤 하였다.

날씨가 차고 비가 온 뒤에 큰 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모두 저고리 세 겹에 가죽옷을 껴입고 귀를 가리고 짐승의 털로 만든 두툼한 요를 뒤집어쓰고서도 오히려 추워서 떨었는데 세조만이 홀로 한 겹의 옷을 입고 팔뚝을 걷고 있어도 손이 불덩이처럼 따뜻하므로 보는 자들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여겼다.

세종이 또 평강에서 강무할 때, 세조가 화살 16발로 16마리의 사슴을 죽였는데, 화살 깃의 피가 바람에 뿌리어 옷이 붉게 물들었다. 늙은 무인 이원기, 김감 등이 이를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다시 태조를 뵙는 것 같습니다." 하였고, 세종문종도 항상 이를 칭찬하였다.
- 《세조실록》 총서(總序)[2]
◈일본 국왕이 사인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올린 서계
세조실록》 30권, 세조 9년(1463년, 명 천순(天順) 7년) 7월 14일 (신축) 2번째기사.[3]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인(使人)을 보내 와서 토물(土物)을 바치니, 그 글[書]에 이르기를,
“보린(寶隣)이 근년에 음모(音耗, 소식) 가 소활(疏闊)하오며, 하늘은 멀고 바다는 막혔으니, 어찌 목마르게 바라는 것을 이기겠습니까? 이제 천룡(天龍, 천룡선사)의 준초 서당(俊超西堂)과 범고 수좌(梵高首座) 등을 정사(正使)·부사(副使)로 삼아, 차견(差遣)하여 전과 같은 호의(好意)를 닦으옵니다. 이에 수년 전에 사선(使船)을 귀국(貴國)에 보냈더니, 이르시기를, ‘가까운 장래에 마땅히 포궤(包軌, 물건을 꾸리어 쌈)를 명(明)나라 조정에 바쳐서 전년[前歲]을 사례하라.’고 하시었는데, 행사(行使)가 불궤(不軌)의 죄(罪)를 범하였습니다. 비록 그러나 누방(陋邦)은 근년에 동벌 남정(東伐南征)하느라고 군사(軍事)에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능히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고, 인순(因循)하여 지금까지 이르렀으니, 자못 돈어(豚魚, 돼지와 물고기)의 신(信)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폐하(陛下)께서 일찍이 일서(一書)를 오는 편에 전(傳)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처검(宋處儉)·대호군(大護軍) 이종실(李宗實)을 보빙 사자(報聘使者)로 삼아 보내었는데, 해상(海上)에서 홀연히 태풍[泰風]을 만나, 두 배가 표몰(漂沒)하여, 글 속[書中]에 기재한 건건(件件)의 방물(方物)은 비록 이 지방에 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미 예의(禮意)의 두터움을 받았으며, 인하여 바닷가 제국(諸國)에 나아가 그 일을 다 찾았으나, 모두 연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표류한 배를 돌려보낼 수 없었으며, 또 그 나머지 시체를 장사지냈습니다.
우리 천룡선사(天龍禪寺)에 명하여, 수륙 대재회(水陸大齋會)를 베풀어 두 사람[二子]을 위하여 명복(冥福)을 자천(資薦)하였을 뿐입니다. 천룡선사(天龍禪寺)는 곧 조종(祖宗)이 창업(創業)하여 누방(陋邦)에서 복(福)을 심는 신령한 도량[靈場]입니다. 근자에 회록(回祿)의 변(變)을 만나서 구관(舊觀)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연곡(年穀)이 익지 않고 재앙(災殃)이 자주 이르러서 이제 장차 승당(僧堂)을 경영하려 하는데, 대방(大邦)의 도움을 빌지 않으면 즐겨 이루기가 어렵겠습니다.
그윽이 명하여 의염(義廉)·생관(生觀)·교직(敎直) 등에게 집사(執事)를 치의(致意)하게 하였습니다만, 무릇 우리 나라가 부처[佛]를 섬겨 착하게 된 것은 바로 귀국(貴國)의 비로 법보(毗盧法寶)를 얻은 소이(所以)이니, 대저 하나의 장서[一藏]를 얻은 것은 그 큰 것을 내려 줌입니다. 더구나 구(求)함을 따름으로써 상도[常]를 삼으시니, 누방(陋邦)이 엎드려 청(請)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인(仁)의 고찰(古刹)을 세우면서 1만 민(緡)을 주는 것을 얻어, 윤환(輪奐)을 아름답게 고치었으며, 이제 또 천룡 만당(天龍滿堂)의 해중(海衆)이 폐하의 비음(庇蔭)을 입으면 어찌 서북(西北)을 바라보며 만세(萬歲)의 축복이 이르지 않겠습니까? 토의(土宜)가 변변치 못하오나 별폭(別幅)과 같이 갖추었습니다. 봄추위가 아직 남았으니, 때를 따라 아끼어 보전하소서.”
하고, 별폭(別幅)은 채화선(綵?扇) 1백 파(把), 장도(長刀) 2자루[柄], 대도(大刀) 10파(把), 대홍칠 목거완(大紅漆木車椀) 대소 합하여 70사(事), 대홍칠 천방분(大紅漆淺方盆) 대소 합하여 20사(事), 홍칠 흑칠 잡색 목통(紅漆黑漆雜色木桶) 2개(箇)이었다.
  • 상국(上國): 조선을 말함.
  • 폐하(陛下): 세조를 말함.
  • 대방(大邦): 큰 나라를 의미함. 여기서는 조선을 가르킴.
  • 누방(陋邦): 일본을 말함.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조공물품과 함께 조선에 보낸 서한에 조선의 세조를 폐하라고 부르면서 일본 자신은 '누방'으로, 조선은 '대방(大邦)'으로 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세조를 직접 '폐하(陛下)'라 호칭하며 조공 서한을 보내는 등 당대 일본과는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후에 성종 시절에도 일본에서 성종을 '황제 폐하'라 불러준 것을 보면 세조 시절부터 형성된 우호적인 양국 관계가 세조 사후에도 계속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 기록에 의하면 신하들과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술자리를 검색하면 1,200여건이 나오는데 이 중에서 470여건이 세조 시절이다. 세조는 이 자리에서 흥이 오르면 악기도 연주하고 춤도 추고 신하를 일으켜 같이 하기도 하고 술게임도 했다고 하는데, 사실 세조는 술자리를 단순한 회식 자리로만 활용하지는 않아서 가령 술자리에서 맘에 드는 신하를 기분에 흥겨워 승진시키는 일도 있었다. 문제는 아무래도 술자리다 보니 각종 소소한 사건사고가 벌어지곤 했다. 이예는 왕의 자리인 어탑에 올라가기[4]도 하고, 정창손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말에 맞장구치기도 하고, 정인지가 세조에게 라고 부르거나 태상이라 부르기도 하는 등 별별 사건이 벌어졌다. 특히 정인지가 가장 많이, 크게 사고를 쳤지만 정작 정인지는 큰 처벌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양정은 술자리에서 세자에게 양위하라[5]는 말을 해 참수당하는 큰 사건[6]을 일으켰는데, 후술했듯이 그날의 상세한 사정을 보면 매우 한심하다.
  • 세조는 신하들을 많이도 갈아치웠다. 아버지인 세종이 웬만하면 한 자리에 오랫동안 앉힌 반면, 세조는 정반대로 자주 갈아치웠다. 그 중에서 전설급인 것은 최단명 정승으로 정승이던 신숙주권람이 술자리에 대해서 간언 좀 했다고 임명 5일만에 파직한 후 새 정승을 임명해놓고 그 둘이 사죄를 하자 4일만에 복직시킨 일이 있었다.
  • 세조의 훈민정음(한글) 창제설이 있을 정도로 창제 과정에서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조 치세에는 문과의 초장 시험에 훈민정음이 반영되었고, 1464년(세조 10년)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과정에 훈민정음을 과목으로 포함하자는 건의가 나왔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자전(사전)인 초학자회는 1458년(세조 4년) 세조의 명에 따라 만들어 졌다. 이후에도 학자들은 세조의 한글보급사업에 따라 잠서주해(蠶書註解, 1458), 언해잠서(諺解蠶書, 1459), 사서삼경언해(四書三經諺解), 손자주해(孫子註解, 1461) 등의 한글책들을 제작했다고 한다. 또한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경, 불교 문헌이 번역 간행하여 한글 서적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 술자리를 원체 좋아해서 신하들이 술버릇으로 인해 술자리에서 막나가는 행동을 해도 처벌하지 않았는데, 말년부터는 아예 군주인 본인에게 변태적인 주벽이 생겼다. 광대로 찍은 신하를 데려다놓고 술자리에서 바보짓을 시키거나 싸움을 붙이는 것이었다. 이 중에 대놓고 사관들이 '이 놈은 풍수쟁이인데 꼬락서니가 우스워 주상께서 어릿광대(배우)로 길렀다'고까지 힐난조로 평가한 안효례와 같은 막장스러운 사례도 있다. 안효례는 자신이 모르는 것도 아는 체 하며 바락바락 우기는 버릇이 있는 풍수학자였는데, 잡학에 관심이 많았고[7] 이런 바보스러운 성격을 유쾌하게 여긴 세조에게 예능 담당으로 발탁되었다.[8] 그의 라이벌은 일단 제대로 된 문관 출신인 최호원[9]인데, 이 둘의 기록은 1464년(세조 10년) 이전까지는 업무, 사고 등과 관련되어서 등장한다.[10]
    그런데 1464년(세조 10년)부터는 이상한 기록이 등장한다. 술자리에 안효례와 최호원을 불러 서로 굳이 말다툼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신하들의 가열찬 토론을 장려한 것 같지만, 토론이 아니라 이 둘을 예능 담당으로 취급하고 강제로 싸움을 붙이며 서로 난리를 치는 꼴을 즐겼다는 것이 문제였다. 세조는 되도 않는 억지를 쓰며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하는 안효례와 그걸 꺾고야 말겠다고 우기는 최호원을 싸움붙이거나, 혹은 그 테마에 진짜로 정통한 전문가 조정 신료들을 데려다 놓고 안효례를 다구리치게 하면서 그걸 보고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이 둘의 이야기는 한심한 에피소드 투성이인데, 세조는 유학자와 달리 아는 것도 없고 허세를 부리기 좋아하는 이들을 완전히 동네 바보나 광대 취급해서 나이가 든 후 자기가 기분이 좋지 않다 싶으면 이들을 입시하게 했을 정도다. 이 둘의 이름은 광대나 막나가는 발언을 하는 인물의 대명사가 되어 세조는 공신에게 병권을 거두어 종친에게 주자는 큰일날 상소를 한 신하를 처벌하자는 요청이 들어오자 "안효례, 최호원 같은 사람도 살려두는데 뭐 어떠냐"하면서 단순한 웃음거리로 흘려보내는 수를 쓴 적도 있다.
    • 변방인 평안도에서 돌아와 임금을 알현하던 양정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에서 늘 그렇듯 세조가 안효례와 최호원을 불러서 싸움을 붙였는데, 둘이 노려보기만 하고 키배를 붙지 않자 세조가 '왕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 저것들을 하옥하라'라고 광태를 부렸고, 최전방 평안도에서 야인을 상대로 고생하며 불만을 쌓다 돌아와 이런 한심한 꼴을 보던 양정은 퇴폐적인 조정의 꼬라지에 순간적으로 밸이 뒤틀렸는지[11] 세조에게 '그만 왕 노릇 때려치고 세자에게 양위하라'는 폭탄발언[12]을 했고, 세조는 피꺼솟해서 "내가 권력에 어디 집착하는 사람인가? 당장 옥새를 가져와라"라면서 양위 소동을 벌였다. 결국 세조의 주벽은 양정이 참수[13]당하고 아들들이 관노가 되는 끔찍한 사건으로 번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세조는 이 버릇을 그만두지 않았다.
    • 하루는 안효례가 "나는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하고 허세를 부리고 최호원이 거기에 지지 않으려고 뻗대자, 세조가 이 둘을 불러 해가 져서 어두컴컴해진 후원을 가리키며 '장소를 정해 줄 테니 거기다가 표를 꽂고 와라'하고 명령했고, 그 장소에 흰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쳐서 귀신으로 가장한 사람들을 매복시켜 놓은 뒤 안효례를 일제히 습격하게 만들었다. 멋모르고 표를 들고 그 장소에 간 안효례는 귀신들에게 습격당해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쳐 왔고, 2번 타자인 최호원은 그 꼴을 보고 뭐가 있는지 알고 갔기 때문에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 세조가 안효례 등 여러 신하를 불러놓고 성리설에 대한 내용을 논하게 했는데, 구종직이 선(禪)에 대한 내용을 강론하다가 도저히 우겨대는 안효례를 이길 수 없어 두 번 절을 하면서 "항복합니다"하자 세조가 구종직을 라이벌인 최호원으로 교체했는데, 최호원과 안효례가 너무나 격론을 벌인 나머지 최호원이 임금 면전인 것도 잊고 "너는 백정 손자놈이다"라고 소리치고, 안효례는 거기에 "내가 백정 손자면 넌 내 아들놈이다"라고 받아치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에 기겁한 대사헌 양성지가 이것을 처벌하기를 주청했지만 세조가 "이것들을 부른 것은 심심풀이를 하자는 것이니 내버려두자"고 했고, 안효례가 계속 난리를 피우자 양성지는 이번엔 직접 안효례를 돌아보면서 꾸짖기까지 했다. 신하들은 오히려 양성지의 탄핵이 너무 약하다고 한탄했고, 신숙주는 최호원을 끌고 가서 "안효례는 애초에 저런 자이지만 너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으니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경고했다.[14]
  • 어린 조카와 동복동생들마저도 정치적 경쟁자로 보고 제거했던 패륜 행각에 비해 본인 기준에서 자신에게 잘해줬거나 가까웠던 가족들에게는 의외로 잘해줬던 것 같다. 우선 친어머니인 소헌왕후에게는 극진히 효(孝)를 다하였는데 오죽하면 궁궐에서 피접나온 소헌왕후가 수양대군의 개인 잠저에서 승하했을 정도. 또한,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를 친어머니 못지 않게 극진히 모셨다. 이유는 동생인 안평대군이 연년생이라서 소헌왕후가 안평대군을 양육하는 사이 세조는 부모로부터 상대적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는데 신빈 김씨가 어린 세조를 업어서 키웠기 때문이라 한다.[15] 그래서인지 신빈 김씨의 소생 5남들은 계유정난 무렵 세조와 가까이 지냈으며 특히 장남 계양군과 4남 익현군은 적극적으로 세조를 지지했으며 세조는 즉위 이후에도 신빈 김씨의 아들들을 극진히 대해줬다.[16]
  • 대단한 애처가였는데 후궁도 둘뿐이었다. 정실 왕후인 정희왕후 윤씨를 아껴서 중요하지 않은 일로 밖에 나갈 때에도 항상 대동했고 국정에서도 그녀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다. 국정 회의에서 왕비의 의견을 소개하는 기록도 있으며 정희왕후도 정치적 식견이 훌륭해서 자신의 친척들을 등용하려는 세조를 뜯어 말리기도 했다. 훗날 정희왕후는 세조 사후 아들 예종과 손자 성종을 위해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2번이나 하면서 국정을 무난하게 꾸려나갔다.
  • 자식들에게도 나름대로 좋은 아버지였다.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성격은 자기 아버지와는 다르게 온화했고 착했다고 하는데 그런 아들의 성격을 질책하기보다는 아들의 성격을 그대로 존중해 주었다. 차남인 예종은 아버지인 세조를 많이 닮아서인지 즉위 초창기부터 대신들을 기겁하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또한 며느리가 되는 의경세자의 빈인 소혜왕후 한씨를 기특하게 여기고 남편을 일찍 여읜 한씨에게 궁궐에 살아도 될 것을 허락하거나 며느리에게 효부라고 칭찬한 적도 있다.
  • 명나라에서 계유정난과 비슷한 사례인 정난의 변이 존재한다. 역시 야심이 많은 숙부가 장손인 큰 조카의 자리를 강탈했고 정난을 기치로 내걸었다는 점이 동일하다.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반에 일어났기 때문에 계유정난보다는 약 50여년 전 먼저 일어났다. 차이점은, 이 쪽은 수도에서 관료들을 죽이며 빠르게 끝난 반면, 저 쪽은 대륙답게 화동 지역 전역에서 아예 전쟁을 벌였다. 삼국지로 따지면 유주, 기주, 연주, 서주, 양주이다. 수 차례의 피튀기는 전투가 일어났고 인명 피해도 전황을 볼 때 1만명 단위는 가볍게 넘긴다. 여파와 사후 처리도, 저 쪽은, 이 쪽의 단종에 대응되는 건문제가 아예 수도 남경 응천부가 불에 탈 때 함께 타죽은 것으로 추정되어 시신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고, 건문제의 충신 방효유와 함께 그의 10족이 멸족될 정도였다(...). 다만 건문제가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 탈출하여 실종된 것이라고 추측하는 의견도 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 약 8000km 떨어진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비슷하게 리처드 3세가 조카들이었던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 리처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섭정(Lord Protector)에 오른 후 돌변해서 조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어 한국에서는 그가 영국판 세조(수양대군)라는 말이 있다. 기사, 기사 2. 공교롭게도 리처드 3세는 조선에서 계유정난이 일어난 해의 바로 이전 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세조보다 10여년 늦게 죽었긴 하지만 세조와 동시기에 살긴 했다. 에드워드 5세 또한 사실상 암살로 의문스럽게 실종되었다.

    다만 속과정은 꽤 많은 차이가 난다. 먼저 권력욕이 미치도록 강한 건 양쪽 다 똑같지만 세조는 왕 유고시 가장 윗서열이자 수렴청정할 왕대비가 없는 것을 노린것이지만 리처드 3세는 형수이자 왕대비가 살아있는데도 섭정으로 지명되었다가 찬탈한 것이다. 에드워드 5세의 어머니이자 왕대비인 엘리자베스가 동서양 막론하고 드문 평민 출신 왕비라서 권력 기반이 정실 왕비치고 매우 약했다는 것과 서양은 외척인 왕비가 내국인이 아니라 외국 왕실의 왕족인 경우가 많아서 이른시기부터 외척을 배제하기 시작했기에 왕대비가 살아있는데도 찬탈을 한 것이다. 다만 결국 가장 왕족의 윗서열인 대비가 살아있는 가운데 에드워드 5세까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상황에서 아예 대비까지 제거하려는 무리수까지 둔탓에 결국 탈출한 대비와 반대세력들에 의해 제거 당했다는 점에서 최종적으로 승리자가 된 세조와는 결과와 그 최후가 아예 다르다.

3. 찬탈의 업보?

쿠데타에 성공해 왕위에 올랐다고는 하나 후손들과 그에게 찬동했던 인물들이 이리저리 불행도 많이 당했다. 이 때문에 세조를 좋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나 중립적으로 공과를 나눠 평가하는 이들은 조카의 자리를 찬탈하고 목숨을 빼앗아간 업보를 받은 것이라고 하기도 할 정도다. 사실 세조 본인도 50세에 사망하여 넓은 의미의 요절에 해당하게 되었다. 당시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당시 기준으로는 요절이 아니었지만, 왕으로서는 의외로 그렇게까지 오래 살지 못한 셈이다.

3.1. 자식의 요절

문종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식복이 없었는데, 장남 의경세자는 세조가 즉위한지 3년 만에 요절했고, 차남 예종은 즉위 13개월 만에 죽었는데 둘 다 20세를 못 넘기고 모두 요절했다. 장녀인 의숙공주는 향년 35세로 그나마 남자 형제들에 비하면 오래 살았지만 자식을 두지 못했다. 야사에 존재하는 맏딸 이세희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면 자식들이 모두 요절한 셈이다.

이런 식으로 워낙에 자기 자손이 단명하는 일이 많아서인지 둘째아들인 예종은 세종의 무덤을 이장하였는데 과거에 세종의 무덤터를 두고 최양선이 장자가 끊어질 자리라고 했는데 그 경고가 사실이 된 것이 아니냐는 야사도 있을 정도. 세종의 적장자인 문종은 요절,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는 단명했으며 예종의 장자인 인성대군도 겨우 1,2세에 사망했다. 예종이 즉위했을 때는 이렇게 장자가 넷이나 날아간 상태였다.

심지어 아들들만 아니라 손자들도 요절했는데 손자들 대부분 자기 큰형 문종보다 오래 산 사람이 59세를 산 제안대군 뿐이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남녀 관계를 모를 정도로 백치였으며 후손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상태가 썩 좋다고 보긴 힘들었다.[17]

증손자대도 문제가 있는데 큰 적증손자인 연산군은 우리가 익히 다 아는 폭군이고 작은 적증손자인 중종은 40년 가까이 재위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도 겪어야 했다. 서증손자들도 공신옹주, 익양군, 양원군, 이성군 네 사람만이 장수했을 뿐이며 나머지는 한 사람 빼고 40세도 넘지 못하고 죽었다.

3.2. 자신을 돕던 방계 친척 및 총애하던 신하들의 몰락

평생 세조를 보좌했던 임영대군은 본인 사후 아들 구성군이 다른 공신의 견제로 폐서인이 돼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고, 훗날 9대손인 이인좌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거열형에 처해지는 바람에 삼족이 거덜났고 역적 집안으로 찍혔다.

계유정난 때 마찬가지로 수양대군을 도운 영응대군은 34세에 요절했다.

세조와 사이가 좋았던 밀성군의 경우는 밀성군의 후손들이 정승판서 및 영의정, 대제학 등에 오르면서 크게 현달했으나 밀성군의 후손인 이사명이 병조판서까지 하다가 기사환국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면서 저주를 피하지 못했지만 갑술환국 이후 이사명이 복권됨과 동시에 이사명의 동생인 이이명과 밀성군의 또 다른 후손인 이건명이 좌의정까지 올라서 노론의 영수가 되면서 부활하는가 했지만 이이명, 이건명은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또 죽음을 당하고 이이명의 가족들까지 죽음을 당하면서 저주를 또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조 즉위 후 노론4대신에 포함되는 이이명, 이건명이 신원됨과 동시에 이관명이 좌의정까지 하고, 이관명의 아들인 이휘지도 우의정까지 하고, 이건명의 후손들도 정승판서에 많이 오르고 이이명, 이사명의 후손들도 대를 이으면서 확실히 부활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주모한 한명회는 자신의 딸인 예종비 장순왕후와 성종비 공혜왕후, 그리고 장순왕후의 유일한 아들 인성대군이 3살에 요절하는 바람에 대대로 외척이 되지 못했고, 성종이 친정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정희왕후에게 한 말이 성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대간의 탄핵으로 인한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일반 신하로 전락했으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생긴 압구정동 사건[18]으로 직첩이 무효화되는 수모까지 당했을 뿐더러 죽은 후 갑자사화로 인해 부관참시를 당했다. 한명회의 적장손인 한경기는 여자를 기피하여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는 야사가 있지만 실제론 아들이 있기에 지금도 계보가 이어져 오고 있으며, 한명회의 아우인 한명진의 후손들이 크게 현달하면서 어느 정도 부활했다고 볼 수 있다.

한명회와 함께 계유정난에 가담한 권람은 자신의 사위인 남이가 후술할 내용대로 역적이 되는 바람에 자신의 차녀와 남이 사이에서 생겨난 자손들이 순조 재위기인 1818년(순조 18년)에 남이가 복권될 때까지 역적의 자손으로 전락했으며[19], 6녀가 신수근과의 사이에서 낳은 외손녀 단경왕후중종반정으로 친정이 멸문지화된 걸로 모자라 본인도 왕비가 된지 겨우 7일만에 폐비가 되었다가 영조 때 겨우 복권되어 '단경왕후(端敬王后)'라는 시호를 얻었다. 그러나 후손인 권반이 형조판서를 하고 신수근의 후손들도 벼슬을 하거나 대를 이으면서 부활에 성공했다. 권람의 동생인 권반의 경우는 권반의 후손인 권징이 공조판서를 하면서 저주를 피해나갔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계유정난에 가담했으며, 황보인김종서를 제거하는 데 두루 공을 세웠던 양정은 훗날 세조에게 살아서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자에게 양위할 것을 종용했다가 그로 인해 세조가 격분하는 바람에 국왕 모독죄로 참수에 처해지는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양정과 비슷하게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세조의 즉위에 있어 공을 세웠다가 그 세조에게 반역 행위를 저질러 처형된 인물로 봉석주가 있는데, 이쪽은 양정과 달리 무려 세조 처단을 계획하기까지 했다. 만약 그가 세조를 처단하는 데 성공했다면 세조는 자신을 왕위에 올린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처절하게 업보를 치른 셈이 되었을 것이다. 봉석주 뿐만 아니라, 어린 아들 1명을 제외한 봉석주의 아들들 또한 아버지인 봉석주의 반역죄 때문에 연좌제로 아버지와 함께 같이 처형되었다.

계유정난에 가담하여 세조 즉위 후 공신이 된 걸로 모자라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도 계속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홍윤성은 홍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외아들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본인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었을뿐더러, 본인의 악행들과 추악한 인간성 때문인지 자신이 속한 회인 홍씨 가문에서 자신의 봉사손이 되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고, 자신의 재산을 상속받았던 애첩마저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의 무덤을 방치, 먹튀하는 바람에 결국 자신의 무덤이 제대로 관리가 안 되었으며, 심지어 홍윤성의 무덤이 향토 문화재로 지정된 후에도 2003년에는 무덤의 장명등이 도난당해 행방불명됐다.

계유정난에 가담하되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조정에서 전권을 장악한 세조를 정치적으로 지원하여 1등 공신이 되었던 정인지갑자사화 때 자신 뿐만 아니라 아내의 묘까지 석물이 철거되고 한명회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시신이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증손녀 1명을 제외한 나머지 후손들이 모두 죽어서 손자 대에서 남계 후손이 단절되었을뿐더러, 본인의 증손녀가 덕흥대원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선조임진왜란 때 왜군을 피해 도망치며 고생하다가 암군으로 전락하여 현재까지도 신나게 까이고 있다. 선조의 세자 광해군은 국방 예산까지 끌어다 무리하게 궁궐 토목공사를 하다가 인조반정으로 몰락했고,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난폭하기로 유명했다. 선조의 또다른 아들인 순화군도 난폭하기로 유명했다. 선조의 다른 아들인 영창대군은 광해군에 의해 의문사했으며 선조가 아꼈던 또다른 아들인 신성군도 요절했으며 또다른 아들인 정원군도 술병과 홧병으로 병사하였으며 선조의 손자인 능창군은 능창군 추대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었고 선조의 또다른 아들인 흥안군도 이괄의 난에 가담했다가 죽음을 당했고 또다른 아들인 인성군도 역모에 세 번이나 연루되었음에도 살아남는 듯 보였으나 결국 죽음을 당했다. 그나마 선조의 또다른 아들인 경평군은 천수를 누리다가 사망했다. 그러나 선조의 또다른 손자인 인조가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왕이 되면서 부활에 성공했지만 인조 역시 삼전도의 치욕으로 큰 치욕을 겪었다. 하지만 인조의 후손들이 왕위를 계속 이으면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정인지의 후손들 또한 정세호가 호조판서를 하고 정광적이 예조판서를 하면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계유정난에 가담했으며 사후에 갑자사화부관참시를 당한 또 다른 인물로 정창손이 있다. 다만 정창손의 아들인 정괄은 부관참시를 당하지 않았고, 정창손의 후손들도 대를 이었으며 정창손의 외가 후손인 이원익이 명신이자 청백리로 이름을 날리고, 영의정까지 하고 정창손의 5대손 딸이 밀성군의 현손 이극강과 혼인하고 이극강의 아들들과 후손들이 크게 현달하면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계유정난에 직접 가담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했지만 마찬가지로 세조의 충신이 되었던 신숙주의 경우 둘째 아들인 신면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다가 전사하여 결국 아버지인 신숙주보다 먼저 죽었으며[20], 넷째 아들인 신정은 비록 아버지보다 나중에 죽었지만, 워낙 탐욕스러워서 자신의 형제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기도 했고 심지어 남의 재산을 탈취하기 위해 왕의 옥새까지 위조하다가 걸려 십악대죄로 비참하게 죽었다. 오죽하면 아버지인 신숙주조차 집안 말아먹을 놈이라고 우려했을 정도.[21] 하지만 신숙주의 후손들은 처신을 잘했는지 대부분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 많고, 사림파 집권 후에도 대부분 높은 벼슬을 차지한 사람들이 제법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가문을 유지시킬 수는 있었다.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거사에 동참하려 했으나 이내 사육신을 배신하여 몰락시키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질은 자신의 직계 후손인 김자점병자호란 때 치명적인 군사적 실책을 저질러 세조의 후손인 인조삼전도의 굴욕을 당했을뿐더러, 인조 사후 김자점이 조선청나라에 팔아먹는 매국행위를 저지르려 하다가 결국 효종에 의해 김자점이 사지가 절단되는 사지절단형이라는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며, 김질의 다른 후손들도 김자점 때문에 졸지에 역적 가문의 일원이 되면서 비참하게 몰락하였다.[22]

또한 세조의 계유정난을 지지했던 박원형 가문도 저주를 피하지 못했는데 일단 박원형의 아들인 박안성이 갑자사화 때 유배를 당했다. 하지만 박안성이 중종반정 이후 풀려나면서 저주를 풀어내고 부활하는 듯 했으나 박원형의 5대손인 박홍구가 광해군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면서 좌의정까지 하다가 인조반정 이후 파직되고 연이어 이괄의 난으로 사사되면서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조의 계유정난을 지지했던 또 다른 신하인 박중손 가문도 저주를 피하지 못했는데 박중손 가문의 경우는 박중손의 증손인 박훈이 조광조 일파로 들어가서 사림파로 활동하다가 기묘사화로 유배되기는 했으나 박중손의 아들들과 후손들이 계속 고위관직을 이어나가면서 저주를 피하는 듯 했지만 박중손의 후손인 박승종이 영의정까지 올라서 광해군과 사돈을 맺고 광해군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인조반정 때 자결을 하고 박승종의 아들인 박자흥도 자결했으며, 박자흥의 딸이었던 세자빈 박씨마저 인조반정으로 왕비가 되지 못하고 남편과 함께 폐서인이 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땅굴을 파고 도주하려고 시도하다가 그마저도 실패하여 세자빈 박씨 본인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니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또 세조의 또 다른 측근이자 조정의 대신이고 훈구파의 중진이기도 하며 왕실의 인척이던 임원준 가문도 저주를 피하지 못했는데 임원준은 중종반정 이후 직위가 추탈되고 임원준의 아들인 임사홍은 성종 때 도승지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유배를 떠나기도 했고 복직한 이후로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거쳐 좌참찬까지 되지만 갑자사화 때 이극균과의 친분관계가 들통나서 투옥당한 뒤에 참수당할 뻔 했고 폐비 윤씨 사사에 반대한 것이 드러나면서 목숨을 건지지만 중종반정 때 임사홍은 목숨을 잃었으며 차남 임희재는 무오사화에 연루되고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었고 임광재, 임숭재도 왕실과 혼인했지만 자손을 남기지 못하면서 저주를 풀지도 못했고 부활에도 실패했다.[23]

또한 세조의 총애를 받던 무관 출신의 대신이자 왕실의 인척인 박중선 가문도 이 저주를 피하지 못했는데, 박중선의 아들인 박원종이 중종반정을 일으켜서 중종을 즉위시키고 1등공신이 된 것은 물론, 영의정까지 하면서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으나 얼마 못 가서 일찍 죽고 박원종의 서자는 김안로에 의해 유배를 갔다.

뿐만 아니라 세조의 처남인 윤사분, 윤사윤, 윤사흔 가문도 저주를 피하지 못했는데 윤사분과 그의 아들 윤흠의 경우에는 편하게 사망해서 저주를 피하는 듯 했지만 윤사윤의 손자인 윤여필이 갑자사화 때 유배를 당하고 중종반정 이후 국구가 되고 그의 딸이 장경왕후가 되면서 부활하는 듯 보였지만 장경왕후는 일찍 죽고 윤여필 역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서 재차 유배되기도 하였고 윤여필의 아들인 윤임은 을사사화에 연루되면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윤임의 아들들도 비참하게 죽었다. 선조 즉위 후 윤임이 신원되고 유일하게 남은 아들 윤흥신이 무신이 되면서 부활했지만 윤흥신 역시 임진왜란에서 전사했다. 윤사흔의 경우는 아들인 윤계겸이 판서를 하고 증손자인 윤지임이 국구가 되고 그의 딸이 문정왕후가 되고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 권세를 틀어쥐고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이 효혜공주의 딸에게 시집가면서 저주를 피하는 듯 싶었지만 그의 아들인 윤원로가 권력싸움에 집착하다가 동생인 윤원형에게 패해서 사사되고 윤원형의 경우는 한 때 권력을 틀어쥐었지만 정난정과 함께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문정왕후가 죽은 이후 완전히 몰락하여 비참하게 죽고 윤춘년 역시 윤원형의 악행에 부역한 사실이 드러나 파직되면서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그래도 윤사흔의 또다른 손자인 윤무의 증손자인 윤경이 예조판서까지 역임하면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세조를 지지했던 심회 역시 갑자사화부관참시를 당했고, 심회의 아들인 심순문도 비참하게 죽는다. 하지만 심회와 심순문은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고 심연원, 심통원이 외척이 되고 높은 벼슬에 오른데다가 손자인 심의겸과 심충겸이 서인의 영수가 되고 이후에도 심회의 후손들이 정승판서 반열에 많이 오르면서 이 경우는 부활한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세조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윤필상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연산군에 의해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죽었다. 다만, 윤필상 역시 중종반정 이후 사후 복권되었으며 그 후손들은 크게 현달했다는 점에서 이 경우 역시 부활한 경우에 본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세조의 계유정난을 지지했던 이인손 가문도 상당히 비극을 맞았는데 이극돈갑자사화로 관작이 박탈되었고 이극균은 갑자사화로 사사되었으며 이세좌 역시 갑자사화 여파로 유배되던 도중에 자결했다. 하지만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고 이세좌의 아들인 이준경·이윤경과 이극균의 후손인 이덕형이 현달했다는 점에서 이 경우도 부활에 성공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세조의 계유정난을 강력히 지지했던 인수대비한씨 가문들도 화를 면치 못했는데, 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명나라에서 돌아오던 도중에 돌연사했고 인수대비의 사촌오빠인 한치형연산군부관참시를 당했다. 다만 한확의 후손들은 크게 현달했고 명문가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점에서 세조의 편에 선 가문들 가운데는 역시 부활한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세조가 총애하던 또다른 신하이자 판서의 자리에 오른 어효첨 가문도 제법 피해를 입었는데 어세겸이 좌의정까지 하고 어세공이 판서를 하지만 어세겸은 무오사화 당시에 실록청총재관에서 파직되었고[24] 죽은 뒤에 갑자사화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러나 동생 어세공의 후손인 어유구, 어유봉이 노론으로써 크게 현달하고 어유구의 딸이 왕실에 시집가서 경종의 비인 선의왕후가 되면서 이 경우도 부활에 성공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경종과 선의왕후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던 탓에 대대로 외척이 되는 데는 실패해서 저주를 완전히 피한 건 아니다.

세조의 공신이자 세조가 총애하던 이계전, 이계린 가문 또한 저주를 면치 못했는데 이계전과 이계린은 편하게 사망했으나 이계전의 아들인 이파는 연산군 때 부관참시를 당했고 이계린의 아들의 사위인 성현은 용재총화를 저술한 학자이자 문신이었으나 역시 연산군 때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러나 이계전의 또다른 아들인 이우, 이봉은 부관참시를 면했고 이우의 후손들이 벼슬생활을 계속 하고 이계전의 후손인 이산해가 영의정에 오르고, 이산보가 판서에 오르고, 그 이후에도 이계전의 후손들이 고위관직을 위시한 벼슬길에 오르고 이계린 아들의 외손자이자 성현의 아들인 성세창이 좌의정에 오르면서 이 경우도 부활에 성공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의 인척인 성봉조 가문의 경우는 성봉조는 편하게 사망했고 성봉조의 동생인 성순조도 세조 때 원종공신으로 봉해지고 고위관직을 한 뒤 편하게 사망했고 성봉조의 조카이자 세조 이전에 죽은 성염조의 아들인 성임 역시 세조와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고위관직까지 하고 성순조의 아들들도 고위관직에 오르면서 저주를 피하는 줄 알았으나 성봉조의 또다른 조카이자 성순조의 아들인 성준이 영의정까지 하다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당했다가 교살당했고 성준의 아들들도 화를 피하지 못하고 죽게 되고 사위인 한형윤도 유배당하고 성임의 아들인 성세명도 파직되면서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종반정 이후 성준과 그의 아들들이 모두 신원되고 성준의 사위인 한형윤과 성임의 아들인 성세명이 고위관직에 오르면서 부활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의 또다른 인척이자 세조의 측근이던 한계미, 한계희, 한계순 가문의 경우에는 한계미의 손자인 한형윤이 갑자사화 때 장인 성준과 연관되면서 유배를 당하면서 저주를 피하지 못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풀려나와서 현달하면서 부활에 성공했고 한계희의 후손들은 크게 현달했을 뿐만 아니라 후손인 한준겸이 인조의 장인이 되고 이에 따라 외척까지 되면서 저주를 피해나갔다고 볼 수 있다.

세조가 총애하던 또다른 신하인 김수온 가문[25]의 경우에는 외손자인 허자가 김안국의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윤원형과 소윤에 협력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데 동조하면서 한 때 선비들의 지탄을 받았지만 그래도 양심이 있어 소윤 강경파와 대립하고 선비들을 구제해주려다가 귀양을 떠나고 귀양지에서 죽으면서 저주를 피하지 못하는 듯 했으나 선조 때 신원되고 가까운 친척인 허준, 허엽을 비롯한 사람들이 의관이나 문관이 되고 허자의 후손인 허목이 남인의 영수가 되면서 부활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세조가 총애하던 또다른 신하인 허종 가문의 경우에는 허종과 허침은 성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폐비 윤씨 사사에 반대하고 연산군의 신임도 얻었음에도 직언을 많이 했고 청렴하고 신중한 면이 있어서 연산군 때 허종은 부관참시를 면했고 허침 역시 피를 보지 않고 높은 벼슬을 유지했고 허종, 허침의 아들들 역시 계속 벼슬을 하면서 저주를 피하는 줄 알았으나 허종의 손자들인 허흡, 허항이 김안로 일당으로 활약하다가 김안로가 몰락한 이후 같이 몰락하면서 저주를 피하지 못하는 듯 했으나 허흡의 손자인 허욱이 좌의정까지 하면서 부활에 성공하였고 허종의 동생인 허침의 후손들은 별탈없이 벼슬을 계속 했다.

세조의 공신이던 황수신-황치신 가문의 경우에는 황수신은 영의정까지 하다 편하게 눈을 감고 황치신 역시 여러 번 탄핵을 받기는 했으나 역시 편하게 눈을 감고 2남인 황사장의 후손들이 크게 현달하면서 저주를 피하는 듯 보였으나 후손인 황정욱이 임진왜란 관련 항복 권유문 문제로 인해 유배를 당하고 황정욱의 아들 황혁 역시 김직재의 옥에 휘말려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 저주를 피하지 못했으나 황혁의 후손들이 대를 유지하고 황경원이 대제학 자리에 오르고 공조판서에 오르면서 부활에 성공했고 9남인 황사경의 경우는 손자인 황윤길이 병조판서를 하면서 저주를 피해나갔다고 볼 수 있다.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으로 녹훈된 홍익생 가문의 경우 홍익생의 손자이자 홍귀해의 아들인 홍형은 갑자사화로 인해 부관참시되고 홍귀해의 또다른 아들인 홍한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활약하다가 무오사화 때 장형을 당하고 귀양을 떠나다가 죽고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면서 저주를 피하지 못했으나 홍형이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고 홍형의 아들인 홍언필이 현달하여 영의정 송질의 사위가 되고 영의정 남곤과도 인척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영의정까지 된 것은 물론이요, 왕실과도 인척을 맺고 홍언필의 아들인 홍섬도 영의정에 오르고 홍언필의 조카인 홍담도 판서 자리를 두루 거치고 그들의 후손들도 정승판서를 두루 거치거나 학자로써 이름을 떨치면서 부활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홍한의 후손들도 홍가신이 명신으로 이름을 떨치고, 홍우원이 청남의 영수가 되면서 부활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홍익생의 손자이자 홍귀연의 아들인 홍숙은 좌찬성까지 하면서 승승장구 하다가 김안로 일당의 모함을 받아서 삭직되면서 저주를 피하지 못하는 듯싶었으나 이후 복권되고 홍숙의 후손들도 별탈없이 벼슬 생활을 하면서 역시 부활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세조의 신임을 많이 얻은 승려인 학조대사의 가문은 왕실과 인척을 맺고 학조대사의 막내동생 김영수의 아들 김번이 가문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후손인 김극효가 돈녕부도정까지 지내고 명문가들과 혼인을 하고 왕실과 인척이 연달아서 맺어지고 김극효의 아들인 김상용이 우의정까지 지내고, 김상헌이 좌의정까지 지내면서 현달하기 시작하지만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하고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했으며 이후 심양으로 압송되어 고문까지 받았다. 하지만 김상관의 아들 김광찬을 양자로 들이고 계속 승승장구하는데 김수흥과 김수항이 송시열의 제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의정을 지내고 현달하면서 저주를 피하는 듯 보였으나 김수항은 기사환국 때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고 김수흥 역시 기사환국 때 귀양을 가서 귀양지에서 죽으면서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갑술환국 이후 김수흥, 김수항이 복권되고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집이 영의정까지 하고, 김창협이 예조판서를 했지만 거의 벼슬을 하지 않고 학자로써 이름을 날리고 김창흡도 학자로써 이름을 날리면서 부활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김창집이 경종 때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사약을 마시고 죽고 김창집에서 끝나지 않고 김창집의 아들인 김제겸과 김창집의 손자인 김성행도 죽음을 당하면서 또다시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조 이후 김창집이 최종적으로 복관되고 김제겸, 김성행도 최종적으로 복관됨은 물론, 김창집의 남은 손자들과 증손자들이 벼슬을 하고 김창집의 4대손인 김조순이 자신의 딸을 왕비(순원왕후)로 들임과 동시에 자신도 국구가 되고 김조순의 아들들이나 안동김씨 일족들인 김좌근, 김유근, 김흥근, 김홍근, 김조근, 김수근도 출세가도를 달렸을 뿐만 아니라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하면서 완전히 부활에 성공했고 고종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밀리기는 하지만 이후에도 김병국, 김병학, 김병기, 김병시, 김병덕 등이 출세를 하면서 최종적으로 부활에 성공했다.

그러나 세조의 계유정난을 지지했던 종친들 중에 영순군은 예외에 속하는데 영순군의 후손들은 정승과 판서를 비롯한 관직에 많이 오르고 크게 현달하면서 저주를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영순군의 16대손인 이지용은 장남 이해충이 일찍 죽음을 맞이했다.

또한 세조의 계유정난을 지지했던 신하들 중에 김국광, 김겸광 형제 또한 예외에 속하는데 김국광의 후손들은 김계휘, 김장생, 김집 등으로 이어지면서 서인의 종주로 자리매김하고 훗날 송시열과도 친분을 다진데다가 노론의 종주가문이 되고 외척까지 되면서 김국광 후손들은 그 저주를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김겸광의 아들인 김극핍은 중종 대의 인물인 김안로에게 죽음을 당했다. 다만 김안로가 사사된 이후 신원되고 김극핍의 아들인 김명윤이 고위관직을 하면서 부활하긴 했지만, 그 역시 윤원형, 이기 등과 가깝게 지내고 윤임을 공격하는 데 가담하면서 사림파가 집권한 이후 사림파들의 강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김명윤은 편하게 사망했으며 김명윤의 사위인 박호원이 호조판서를 하고 김명윤의 외가가 인조반정의 공신인 이서와 이기축을 배출해내고 김명윤의 동생들도 출세가도를 달리고 김겸광의 또다른 후손들도 출세가도를 달리거나 심지어 중종의 부마까지 되면서 빠르게 부활에 성공했다.

세조의 또다른 측근이자 훈구파의 핵심 영수였던 최항 가문도 이 저주를 피했는데 후손인 최흥원이 영의정까지 했다.

그리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또다른 대신이자 훈구파의 영수이고 신숙주의 처남이던 윤자운의 가문도 이 저주를 나름 피했는데 윤자운의 5대손인 윤형이 판서의 벼슬을 하고 선조 때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종계변무의 공을 세웠다.

또한, 세조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서거정 가문도 의외로 이 저주를 나름 피했는데 서거정의 가문은 크게 현달해서 조선 후기에도 명문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조의 총애를 받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서 적개공신 1등에 수록되었던 정난종 가문도 이 저주를 피해나갔는데 정난종의 아들들이 현달하였고 정광필이 한 때 갑자사화 때 유배되기도 하지만 중종반정 이후 석방되면서 여러 요직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르고 정광필의 후손들도 대거 높은 관직에 올라서 명문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또한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대신인 노사신 가문도 이 저주를 나름 피해나갔는데 노사신은 연산군 때 영의정까지 했고 탄핵을 자주 받았지만 성품이 원만하고 연산군 편을 들면서도 사림파들의 강한 처벌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노사신의 아들인 노공필도 한 때 갑자사화로 처벌받기도 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복귀하여 영중추부사까지 했고, 노공필의 아들들도 계속 관직 생활을 이어나갔다.

또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이자 세조의 핵심 공신이던 윤사로 가문도 이 저주를 피해나갔는데 윤사로의 아들들과 후손들은 별탈없이 벼슬생활을 이어나갔고 후손들이 정승판서에 오르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조에게 총애를 받았던 강희맹 가문 역시 이 저주를 피했는데 강희맹의 아들 강귀손은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우의정까지 했지만 절제 있는 행동으로 조정의 신망을 얻었고 강귀손의 아들들도 벼슬 생활을 계속 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강희맹의 차남인 강학손의 4대손인 강항이 형조좌랑까지 하다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잡히지만 1600년에 석방되고 귀국한 뒤 간양록을 저술하였다.

그 외에 세조가 총애하던 또다른 신하인 강맹경 가문도 이 저주를 피했는데 강맹경의 아들 강윤범은 무난하게 경상도관찰사까지 했고 강맹경의 동생인 강숙경의 손자인 강혼은 좌찬성까지 하였다.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또다른 대신인 이석형 가문도 이 저주를 피해나갔는데 이석형의 후손들은 정승판서에 많이 올랐을 뿐만 아니라 대제학도 많이 배출하고 연안이씨 명문가의 핵심으로 자리매김을 했기 때문이다.

세조의 또다른 측근인 권감 가문도 이 저주를 피해나갔는데 권감의 후손인 권상하와 권상유가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고 좌의정과 판서를 했으며 권상하의 후손인 권돈인도 영의정을 했기 때문이다. 근데 권돈인은 후에 철종 즉위 후에 안동 김씨에 의해서 유배된다(...)

세조의 공신이던 원효연 가문도 이 저주를 피해나갔는데 동생인 원효이의 후손들이 크게 현달해서 정승판서 자리에 많이 오르고 왕실과도 인척을 맺었기 때문이다.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해서 적개공신에 봉해진 이숙기 가문도 이 저주를 피했는데, 이숙기 가문 역시 이숙기의 후손들이 고위관직을 많이 하면서 연안이씨 명문가로 자리매김 하기 때문이다.

세조의 총애를 받은 사람이자 정희왕후의 가까운 인척이던 이연손 가문도 이 저주를 피했는데, 이연손의 둘째 아들 이철견은 무과에 급제해서 좌찬성까지 지냈고 이연손의 첫째 아들 이숭수의 후손들이 크게 현달해서 이몽량이 우참찬까지 지냈고 이몽량의 아들인 이항복이 영의정까지 지내고 명신으로 이름을 날리고 이항복의 후손들도 정승판서에 올라서 명문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이항복의 큰형은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피난을 가다가 사고로 물에 빠져 익사했으며, 이항복의 조카 부부는 각각 산고와 도적떼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세조의 공신이자 세조의 총애를 상당히 많이 받았던 구치관, 구치홍 형제 가문도 이 저주를 피해나갔는데 구치홍의 후손들이 승승장구하고 현달했으며 왕실의 인척까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구선복은 정조 때 역모혐의로 죽었다.

또한 세조 때에 공신으로 봉해지지는 않았지만 세조 때에 벼슬을 시작한 후 남이의 옥에 참여하여 익대공신으로 봉해지고 훈구파 인사가 되어 이조참판까지 지낸 조익정의 가문도 저주를 피했는데, 조익정의 가문은 정승판서를 많이 배출하고 풍양 조씨 가문에서 신정왕후 조씨도 배출하면서 외척까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신정왕후 조씨의 아들 헌종이 아들을 얻지 못했고 외동딸마저 요절했으며 헌종 본인조차 그 상태로 요절한 탓에 신정왕후 조씨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어 이후 철종의 즉위를 기점으로 풍양 조씨 가문이 신 안동 김씨에게 실권을 다시 넘겨주게 되었으므로, 저주를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니다. 다만, 풍양 조씨 가문 일원들 대다수는 신 안동 김씨 정권 하에서도 잘 먹고 잘 살았으며 조병헌을 제외한 풍양 조씨 가문 일원들은 모두 무사했다. 그리고 헌종 때에도 신 안동 김씨 세력이 상당수 건재했다.

그리고 상술한 갑자사화를 기점으로 훈구파 중 정난공신파는 완전히 몰락했다.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데 공을 세운 이들을 정난공신 또는 훈구 공신이라고 부르는데, 연산군에 의해 정난공신 집안이 대거 멸족되면서 연산군은 의도치 않게 종조부인 단종의 원수를 갚은 격이 되었다.

다만, 중종반정 이후 다시 정난공신파 중 상당수가 복권되었고, 정난공신 가문 중에서도 살아남은 후손들도 엄연히 있다. 살아남은 정난공신 가문의 후손들은 대부분 예전처럼 큰 권력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중종반정 공신세력에 가담했고 벼슬을 계속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중에는 대부분 사림파 집권 이후 서인계 인사가 된 사람도 적지 않다. 훈구파 자체가 서인에 흡수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사상적 측면에서 훈구파의 명맥이 끊어졌기 때문에 세조의 입장에서는 씁쓸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훈구파의 생물학적 후손들이 단종 복권에 찬성한 셈이니 말이다.

비록 본인은 계유정난과 무관하지만 계유정난에 가담한 권람의 사위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이의 경우 세조 사후 예종 때 병조 판서에서 해임되었으며, 그로 인해 삐진 나머지 유자광에게 반역에 가까운 언변을 내뱉었다가 결국 유자광의 고발로 인해 거열형에 처해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다만 여기에는 다소의 과장도 있다. 몇몇의 경우 먼 후손이 당한 것까지 기술하고 있기 때문. 숙종 시기의 이이명까지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시기 동안 굵직한 정치대립도 중종반정, 4번의 사화, 기축옥사, 광해군의 옥사들, 인조반정, 숙종의 환국정치 등 워낙에 많기에 사실 여기서 1번 이상 걸리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 정치적 분쟁과 그로 인한 숙청행위 등은 어느나라건 있던거고.[26]

3.3. 세조와 관련된 문화재들의 비참한 상황

세조의 어명으로 세워졌던 원각사연산군에 의해 기방이 되어 사찰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가 이후 중종 때 아예 철거되었다. 홀로 남은 원각사지 십층석탑대리석으로 만든 데다가 산성비로 인한 부식 문제 때문에 유리 보호각을 씌웠다. 세조를 마을신으로 모셨던 사당인 신수동 복개당도 노인정 공사로 철거되었다. 세조와 관련된 설화로 유명한 보은 속리 정이품송은 1993년에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진 이후부터 급격하게 나무의 생기가 쇠락하였다.


[1] #.[2] 총서에도 자신의 왕권획득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엄청 자화자찬이 심하다.[3] #.[4]세조실록》 2권, 세조 원년(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11월 20일 (신묘) 1번째기사. #.[5]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6월 8일 (정미) 1번째기사. #.[6]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6월 12일 (신해) 1번째기사. #.[7] 잡학 뿐 아니라 무예에도 조예가 있었는지 무과에도 합격했다고 한다.[8] 1461년(세조 7년)에 아버지의 삼년상 도중 상복을 멋대로 벗어버린 죄목으로 10악의 불효(不孝)를 범한 패륜아로 고발[27]당해 고신을 박탈당했다가 1464년(세조 10년)에 겨우 간신히 복귀했다. 법적, 사회적으로는 막나가는 인간이지만, 세조가 직접 지목해서 복귀시킬 만큼 아끼는 예능 담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자신의 업무인 풍수지리 관련 직무는 긴 기간 동안 매우 충실하게 수행했다.[9] 안효례는 49건 최호원은 25건인데 안효례는 세종 시기부터 기록이 등장한 반면 최호원은 세조 시기부터 등장하는 것을 보면 최호원은 한 세대 가까이 연하로 보인다. 기록으로 최호원이 안효례에게 '넌 백정 손자다'하고 패드립치자 안효례가 '오냐, 그렇다. 그럼 넌 내 아들이다'하고 받아친 적도 있다.[10] 최호원은 직무 관련 능력은 안효례에 못 미쳤는지, 몇 번인가 부적절한 보고나 조언을 올려 처벌된 적이 있다.[11] 사관은 양정이 훈구대신이면서 변방에 처박혀서 불만이 많았고, 한명회도 양정을 굳이 평안도에 둘 필요가 없다고 누차 간했는데, 대신할 사람이 없어 인사가 늦어졌고 양정이 이로 인해 더 화가 난 상태였다고 기록했다.[12]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6월 8일 (정미) 1번째기사. #.[13]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6월 12일 (신해) 1번째기사. #.[14] '신분에 맞게 처신하고 부끄러운 줄 알라'하고 경고하는 의미이며, 실록에도 비슷한 의미의 구절이 상당수 등장한다. 안효례는 상민 출신이지만, 최호원은 주위에서 같은 어릿광대 취급을 받더라도 일단은 유학을 공부해서 정식으로 임용된 문신이었기 때문이다. 똑같이 임금의 비위를 맞추는 잡학쟁이라도 상놈양반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책임은 전혀 다르다. 사관도 둘에 대해서 둘 다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안효례는 그래도 배운거 없는 집안 출신이니 그러려니 하는데 최호원은 배운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한심하다며 최호원을 더 깠다.[15] 신빈 김씨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유모 역할도 했다.[16] 신빈 김씨의 차남 의창군이 자신을 지지했다가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어도 인척이란 이유로 불문에 부치고 3남 밀성군이 계유정난에 가담하지 않았어도 중용하는 등 예우가 각별하였다.[17] 다만 제안대군의 경우에는 일부러 바보 연기를 한 것 아니냐는 가설도 있다. 항목 참조.[18] 한명회중국 사신을 자신의 별장인 압구정에서 접대할 것을 청하자 "중국 사신이 거기가 좋다고 하면 개나 소나 거기로 가서 백성들에게 민폐가 될 걸 왜 모르냐? 그리고 정자에서 술먹고 노는 게 아름다운 일이냐?"라고 성종이 꾸짖자 다른 곳으로 접대 장소를 옮긴 다음에 항의 표시로 "사실 아내가 아파서 전 안 갈랍니다"라고 한다. 그러자 신하들이 "지난번엔 안 간다고 안했는데 저거 전하께 개기는 겁니다."라고 탄핵했고, 성종도 "언젠 아내가 다 죽게 생겼는데도 굳이 명나라 가더니, 이번엔 별로 안 아픈데도 안 간다고? 속셈이 훤하다!" 라고 직첩을 거두어버린다. 몇 달만에 돌려주긴 했지만.[19] 그나마 복권 자체가 이때 남이의 방계 후손이었던 남공철이 간청하여 건의한 덕이었다.[20] 신숙주의 아들들 중에서 제일 나은 인물이었다. 이렇게 좋은 아들을 잃었다는 점에서 신숙주는 더더욱 쓰라린 업보를 치른 셈이다.[21] 게다가 야사에 따르면 신숙주가 술에 취해 세조의 팔을 꺾어버려 세조의 노여움을 샀다가 한명회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면 세조는 아끼던 충신한테 봉변을 당한 셈이고 신숙주는 졸지에 역신으로 전락하여 죽을 위기에 처한 셈이니 두 사람이 동시에 업보를 치른 거라고 볼 수 있다.[22] 의외로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구한말~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김구 또한 간신 김자점의 방계 후손이다. 김구의 11대조 할아버지인 김대충(金大忠)이 김자점하고 10촌 형제 관계가 된다. 백범 일지에 따르면, 집안 사람이 양반에게 천대와 멸시, 하대받았다고 했을 정도로 김구의 출생전후로 사실상 완전히 상민 신분으로 세탁된 상태였다 할 수 있다.[23] 세조의 편에 선 가문들 중에서는 가장 처참하게 저주를 당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24] 무오사화 당시 이극돈은 어떻게 해야 할 지 의견을 물었는데 처음 물은 대상인 어세겸은 이렇다할 의견을 내놓지 못한 반면 나중에 물은 유자광은 이 어찌 미룰 일이냐며 윤필상 등을 모아 연산군에게 사람에 대한 처벌을 주장했다. 결국 우물쭈물하던 이극돈도 처벌받았으니 그의 죄목은 이극돈과 비슷한 셈.[25] 김수온의 형 신미대사도 세조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26] 당장에 한고제의 공신들에 대해서도 사마천은 한나라가 세워졌을 때 공신으로 책봉된 이가 백여명에 달하지만 태초 연간(한무제 시기)까지 가문이 보전된 이는 겨우 다섯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망해버렸다고 기록했다. 즉 내가 공신이라고 해도 후손이 띨띨하거나 줄 잘못 서거나 과욕을 부리면 망하는거다. 세조의 공신들도 특별히 업보라기보다는 왕조사에서 빠질 수 없는 정치사의 흐름 속에서 누군가는 재수없게 지뢰 밟은 것 뿐이다. 무엇보다 세조 증손자가 연산군이고 연산군은 특별히 사람 가려가며 때려잡은 사람도 아니라서 가세가 기우는게 오히려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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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조실록》 23권, 세조 7년(1461년, 명 천순(天順) 5년) 1월 22일 (계해) 2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