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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김안로 金安老 | |
출생 | 1481년(성종 12) |
한성부 | |
사망 | 1537년 12월 9일[1] (향년 55 ~ 56세) (음력 중종 32년 10월 27일) |
사사형 | |
본관 | 연안 김씨 (내자시윤공파-용현 종중 11세) |
자 | 이숙(頤叔) |
호 | 희락당(希樂堂), 용천(龍泉), 퇴재(退齋) |
부모 | 부친 - 김흔(金訢, 1448 ~ 1492) 모친 - 윤지(尹墀)의 딸 |
부인 | 인천 채씨(仁川蔡氏) - 채수(蔡壽, 1449 ~ 1515)의 딸 |
자녀 | 장남 - 김기(金祺) 차남 -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 ? ~ 1531)[2] 삼남 - 김시 |
[clearfix]
1. 개요
조선 중종 시기의 권신.2. 생애
1481년 아버지 김흔(金訢)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지(尹墀)의 딸 사이의 3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작은아버지는 영의정 김전인데 김전과 김흔 형제는 모두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3]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임 관원의 등용을 최대한 억제하고 빈자리에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겸임시킴으로써 그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주고는 하였다. 첫 번째가 조광조였는데 그의 최후는 기묘사화. 조광조 다음에 남곤이 권력을 잡았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뒤를 이은 이행, 심정, 이항 등은 사림임에도 현실적이면서 능력있던 남곤과는 달리 쓸만하고 청렴한 관료들이긴 해도 정치적으로 리더십이 특출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4] 이에 중종이 이들을 대체할 인물을 물색하니 바로 김안로였다.
원래 김안로는 기묘사화때 조광조 일파로 분류되어 유배를 가긴 했지만 풀려난 이후 신진 관료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대사간을 거쳐 이조판서의 자리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는데 그가 화근이 될 것을 두려워한 남곤이[5] 김안로를 탄핵하여 김안로는 경기도로 유배를 떠났지만[6] 남곤이 죽은 이후 아들인 부마 김희(金禧)[7]를 통해 권신이자 간신인 이행, 중종, 대비에게 감언이설을 하여 유배에서 풀려났고 다시 벼슬길에 오르면서 세력을 확대했다.
놀랍게도 그는 사림과 대간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잡았는데 훈구파 권신인 이항, 심정, 이행의 횡포에 사림들이 치를 떨고 있었다고 하나 사실 횡포라고 하기에도 기묘사화의 원흉들로 몰린 것에 사림들에게 미움을 받던 것이 컸지, 이들은 김안로와 달리 탐욕스럽지 않고 청렴했다. 오히려 사림과 대간이 지지한 김안로의 부패가 심각했다. 또한 심정과 이행은 속고내 토벌 때의 조광조와 달리 현실적인 책략에 찬성을 던지며 현장의 일에 열성적이며, 강직한 정광필이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완벽하진 않아도 별 문제가 없이 그럭저럭 제 할일들을 했었다.[8] 당장 김안로 때문에 심정과 이항이 유배를 떠났을 때, 사림들이 저지른 짓이라는 비판이 생기자 사림들은 "우리 사림들을 탄압하려는 수작이다."라고 몰아붙였다. 사림들의 입장에선 사소한 수준에 불과하지 딱히 죽을 죄가 없는 심정과 이항을 죽이려고 들었기에 김안로를 위해서 죄 없는 사람들을 해치려는 비판을 듣는 상황이었으니,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던 것이다.[9] 세자의 지위가 불안해서 세자와 사돈지간인 김안로를 끌어들여 세자의 지위를 탄탄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김안로는 현실주의자였지만 상대방을 잔혹하게 보복하는 냉혹한 성격이었다.
김안로는 자신의 인맥을 바탕으로 한 사림, 대간들과 손을 잡고 공포의 숙청 정치를 휘둘렀는데 그야말로 사림의 흑역사. 대간의 지원 사격과 중종의 버프를 받은 김안로는 그와 대립한 이항, 심정을 사소한 실수를 꼬투리 잡아 숙청했다.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이행이 실수를 깨닫고 정광필 등의 다른 대신들을 규합해 반격을 시도하자 잠시 권세가 주춤했지만, 전열을 재정비하여 이행까지 숙청했다. 숙청된 이항, 심정은 잇달아 사사되었고[10] 이행은 사사되기 전에 유배지에서 자연사했다.[11][12]
이후 김안로는 거의 전권을 틀어쥐면서 최강의 권신으로 자리잡았으며 김안로는 대규모 옥사를 일으키는 등의 폭력 정치를 행하였다. 권력을 잡은 그 역시 다른 권신들처럼 부정축재를 하면서 권세를 부렸는데 김안로의 사치는 집에 단청을 칠하고 각종 서화를 수집하는 등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야담과 설화를 수집해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라는 책을 남기기도 했다.[13] 어떤 사람이 사헌부 문에 '김안로의 손에 국권이 들어갔으니 백년 사직의 주인이 누구인가'[14]라는 익명서가 붙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6년간 우의정, 좌의정에 오르며 승승장구했으며 자신을 따르지 않는 정광필 역시 공격해서 유배를 보냈고 살아 생전에 자신을 경계했던 남곤에 대한 복수도 잊지 않아 그가 장경왕후의 묘를 잘못 쓴 죄를 뒤늦게 물어 그의 관작을 추탈하게 했다. 이 때 정광필을 유배 보냈을 때가 자신의 마지막 위세였는데 그러고 난 뒤 몇 달 안 가서 쫓겨났다.
말년에는 경원대군을 등에 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윤원로 형제들이 급부상하는 것에 위기를 느껴 이들을 숙청하려는 선을 넘게 되자 이러다가는 가만히 냅두면 안되겠다 싶고 자신에게도 위협적인 인물이 될 가능성도 있어 중종은 도승지 양연에게 '김안로를 없애야겠으니 여론을 조성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양연은 "왕의 기대에 부응해 대간들과 함께 김안로의 횡포가 심해 주벌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고 윤은보에게 비망기를 내려 조정에 사람이 없음을 걱정한다는 극론하였다.
윤원로가 김안로의 죄상을 몰래 중종에게 아뢰니 중종은 매우 두려워하여 무사를 시켜 김안로의 무리를 박살내려 했는데 윤임과 초친 윤안인과 함께 서로 의논하여 그렇게 하지 않고 윤임이 중종의 뜻을 양연에게 전달했고 최보한, 윤안인이 받아온 밀지를 양연에게 말해 서로 의논하고 결정하여 김안로를 탄핵시켰다가 사사하고 직첩 회수와 삭탈관직을 하는 선에서 끝냈다. 이때 함께 죽은 허항, 채무택과 함께 정유삼흉으로 불린다.[15][16][17]
집안의 상황 때문인지 아들 김시는 과거에 응하지 않고 서화에만 전념했는데 당시 최립(崔笠)의 문장, 한석봉의 글씨, 김시의 그림을 일컬어 '삼절(三絶)'이라 했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18]
3. 기타
- 퇴계 이황의 인품과 덕망을 보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해서 이황을 미워했다고 한다.
- 개인적으로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 본인도 시서화에 능했고 얼굴도 굉장히 잘생겨 명나라에 갔을때 명나라 사람들도 감탄했다고 한다.
- 세자 시절 인종이 어느 정도 김안로의 덕 아닌 덕을 보기도 했다. 인종의 누나이자 유일한 동복남매인 효혜공주가 김안로의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작서의 변 등을 통해 중종의 서장자였던 복성군이나 경빈 박씨가 제거되어, 세자의 지위가 어느 정도 안정될 수 있었다. 물론 인종의 탓은 절대 아니었지만, 유학에 충실했던 인종이 정치관도 전혀 맞지 않은 희대의 권신 덕을 보았음은 정말 역사의 얄궂음이라 할 것이다.
- 최초의 서원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과 악연이 있다. 김안로가 중종때 직제학을 지내면서 항상 임금의 의견에 영합하곤 했다. 옆에서 보던 주세붕이 김안로의 간교함에 노해 김안로는 곧을 직(直)자를 쓰는 직제학이 아니라 굽을 곡(曲)자를 쓰는 곡제학이라고 비꼬았다. 김안로는 여기에 앙심을 품어 훗날 주세붕을 탄핵했다.
- 실록에 따르면 김안로가 개고기를 굉장히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개고기를 뇌물로 벼슬 청탁도 들어주었다고 한다.(정확히는 사관의 의견에 가깝다.)[19] 그래서 그 전까지는 선비들도 개고기를 즐기고는 했는데, 김안로가 죽은 뒤에는 '개고기는 김안로 같은 간사한 자나 먹는 음식'이라는 말이 나돌아서 선비들이 개고기를 기피하게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훗날 개고기 관련 기록[20]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냥 설화거나 사실이더라도 잠깐의 유행이었을 것이다.[21]
- 그의 고조부가 바로 김자지이다. 생전에 세도가들의 부패를 정면으로 비판한 상소를 여럿 올린 인재였던 고조부와는 참 다른 인생을 산 인물.
- 김안로의 친구 중에는 기묘사화 때 파직당한 김안국이 있다. 물론 김안국은 김안로와 행보를 같이 하지 않아 후대까지 천수를 누렸으나 김안국을 복권시키는데 힘을 쓴 것이 바로 김안로이다. 김안국은 김안로가 실각하고 사형당한 후에도 그의 나쁜 점을 말하지 않고 김안로의 가족들을 돌봐줬다고 한다. 기묘사화를 일으킨 것은 중종이지만 중종에 의해 기묘사화를 주도했다고 억울한 누명을 쓴 먼저 죽은 남곤 일파인 심정, 이행 등을 박살낸 것도 김안로가 아닌가? 대간들 다수는 김안로에 환호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조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비슷한 사례인데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추종자였던 이들은 각각 대윤과 소윤에 들어가 서로 물어 뜯고 사약을 건넸다. 그래서 선조 즉위기가 되면 재야에 묻힌 이를 제외하고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딱히 없는 진흙탕 판이 되었다.
- 한때는 조선 전기 최강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나이로 그가 겸직했던 직함만 치면 한명회도 능가했다. 동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춘추관사, 성균관사,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도총부 도총관을 동시에 겸직했던 사람이다.[22] 조선 시대는 지금의 정부 구성과는 달라서 위의 겸직 중 일부는 당연히 겸직하는 직책이다.[23]
예를 들어 학문연구기관인 홍문관 대제학은 원래 같은 뿌리에서 나온 기관인 예문관 대제학을 겸직하며 홍문관의 종2품 제학 이상과 예문관의 정4품 응교 이상은 모두 타관이 겸직하는 직책이다. 홍문관의 대제학은 경연에 참석하기 때문에 '동지경연사'라는 직함을 받았다. 성균관 대사성은 법제상 전임직이지만 겸임하는 경우도 많아 홍문관 대제학 겸 예문관 대제학 겸 성균관 대사성 혹은 지성균관사를 문형이라고 불렀다. 춘추관은 100% 겸직으로만 이루어지는 기관으로 정2품이 겸직하는 지춘추관사 위에는 영의정과 좌의정 또는 우의정이 겸직하는 직책이 둘이나 있다.
오위도총부도 본래 소임 없는 문무당상관을 대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대체로 문신이 겸임하였고, 정2품인 도총관은 종실이나 외척이 담당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군사를 움직이는 실권은 병조에 귀속되었다. 마지막으로 의금부 또한 종2품 동지의금부사 이상은 겸직이었다. 따라서 위를 정리하면 김안로는 1. (이조판서)로서, 다른 정2품관이 겸직하는 a.(홍문관 대제학 + 예문관 대제학 + 춘추관사 + 성균관사 + 동지경연사)를 맡고, b. 마찬가지로 겸직 직책인 지의금부사를 겸직, c. 외척으로서 마찬가지로 겸직 직책인 도총부 도총관을 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용천담적기에서 귀태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 실록에 의하면 김안로에게는 눈이 멀고 못 생긴 딸 하나가 있었다. 안로가 그 딸을 미워하여, 죽이려고 굶기면 울부짖으며 밥을 달라고 하여 이웃이 들을까 두려워 못 굶기고, 칼로 찔러 죽이면 시체에 칼자국이 나서 친척들이 살해당한 것을 알게 될까 두려워서 못하였다. 그 흔적을 감추려고 독사(毒蛇)를 항아리 속에다 넣고 뚜껑을 덮어서 나오지 못하게 하여 독이 잔뜩 오르게 한 다음 뚜껑을 열고 그 딸로 하여금 항아리에 발을 넣게 하니 한 번 물자 그 자리에서 죽었다. 김안로는 속으로는 매우 기뻤으나 겉으로는 슬픈 척하면서 이웃 일가들에게 떠들기를 ‘내 딸이 변소에 가다가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4. 대중매체
- 2001년작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김종결이 연기했다.
세자의 누이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인 왕실의 인척으로서, 세자의 외숙인 윤임과 함께 세자파의 거두로 통한다. 정난정, 경빈 박씨와 3파전을 벌이며[24] 조정 세력 다툼을 이어가는 권신. 난정과 경빈이 합작한 국유지 문서 조작 사건의 누명을 쓰고 유배되지만, 그로부터 몇 년 뒤 경빈 박씨를 견제하려는 정난정이 이번에는 그와 손을 잡고 작서의 변을 일으켜 경빈 박씨를 축출하였고, 세자를 보호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중종이 다시 불러들이게끔 유도한다. 경빈 사사 후 궁에 복귀한 뒤에는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복성군을 사사시키고 심정과 이항 등을 제거하며 절정의 권력을 누린다. 이때에도 세자를 보위한다는 명분에는 나름대로 충실했지만 세자의 누이인 효혜공주가 죽은 후 그 사실을 늦춰 고한 것 때문에 세자가 자신을 꾸짖자 그 명분마저도 저버리고 희빈 홍씨의 아들을 새로운 세자로 삼아 허수아비로서 마음껏 조종하려는 야욕까지 품는다. 이후 경빈 박씨에게 누명을 씌운 사실이 들통이 나고 그 일에 자신의 누이를 겁박하여 강제로 동생인 자신을 저주하는 일을 시켰다고 생각하는 세자의 김안로에 대한 증오가 더욱 커졌다. 이렇듯 권력을 쥐고 자만했으나 문정왕후와 난정에 의해 자신의 부정부패가 들통나는 바람에 유배되어 재기할 틈도 없이 사약을 받아 죽는다. 김종결의 명연기로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김안로는 김종결의 이미지로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다.
- 대체역사소설 <아침의 나라>에서는 동조선 왕실의 지원을 받는 금강 상단이 조선에서의 억압과 각종 악연을 잇는 후반기 어그로를 끄는 역할로 등장. 악연이 연결된 이들이 동조선에서 막 개발된 천보총으로 유배가던 도중에 저격하여 금강 상단에 대한 도전이 어떠한가를 보여준 표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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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 | 세도가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 | ||||||||
고종 | |||||||||
흥선대원군 (+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남인, 소론, 북인) | 여흥 민씨 (+ 개화파) | 흥선대원군 | 여흥 민씨 (+ 온건 개화파) | ||||||
고종 | 순종 | ||||||||
급진 개화파 | 여흥 민씨 | 김홍집 (+ 친일파, 친미파, 친러파) | 근왕파 | 친일반민족행위자 | |||||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 外 | }}}}}}}}} |
[1] 율리우스력 11월 29일[2]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의 부마.[3] 김전은 항상 청렴결백하고 문장도 잘했으나 기묘사화를 일으킨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남곤과 같이 후세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한편 김전과 김흔의 친척으로 김감이라는 이가 있는데, 이 자는 연산군 때 어용 문인 노릇을 하다가 중종반정 직전 잽싸게 장인(설공찬전의 채수)을 데리고 참여해 줄타기에 성공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였는데 김안로의 부인이 채수의 딸이다.[4] 심정은 청렴한 쪽이었으나, 이행은 김안로의 아들이 주는 선물공세에 넘어갔다. 다만 이행도 재물을 축재함이 적을 정도로 비교적 청렴한 편이었으며 이항도 성품은 강직하다고 평가받았었다. 권력을 전횡했다는 것도, 기묘사화의 누명건으로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5] 조광조와 강경 사림파를 제거한 남곤 입장에선 조광조 일파 출신인 김안로가 걱정될 수밖에 없다[6] 유배당하던 시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쓴 책이 <용천담적기>이다.[7] 당시 세자이자 훗날의 인종의 동복누나인 효혜공주의 남편.[8] 사실 이행은 김종직의 제자인 최부의 문인이고 아버지도 김종직의 제자로 남곤처럼 온건 사림파였다[9] 김안로가 복권될 즈음에 대간의 일부가 심정을 탄핵했던 것도 한몫했다. 만약 자신들의 잘못임이 인정된다면 자신들이 죽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 상황에서 사림에게 심정과 이항은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서라도 죽여야 했던 것.[10] 이항은 사약을 먹고도 죽지 않아서 그냥 목매서 자살했다.[11] 권세가 앞에 둘에 결코 뒤지지 않았음에도 그 둘이 사약을 마시는 동안 본인은 유배에 그쳤는데, 비록 아들을 시켜 한 로비에 넘어갔다지만 본인이 복귀하는 데에 역할을 해주었단 점을 참작해 살려주거나 죽음을 늦춰준 듯.[12] 이행의 형이 윤원형과 결탁해 을사사화, 정미사화를 일으킨 권신 이기다.[13] 이 영향인지 후손들은 예술에 능했다고 한다. 뒷날 선조의 부인이 되는 인목왕후도 작은아버지 김전의 후손이었는데 역시 서예에 능했다.[14] 중종실록, 중종 26년(1531년) 12월 10일[15] <한국의 역사>에서는 사약을 내린 후 심복인 허항, 채무택과 함께 효수했다고 서술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기 큰딸의 시부모 사돈이고 반역자인 것도 아닌데 효수했다고 잘못 설명했다. 애당초 그럴거였으면 거열이나 참수를 했지 자비롭게 사사할 필요가 없었다.[16] 윤휴의 <백호전서>에 따르면 김안로는 생전 사사당하는 정적이 죽었는지 죽은 체 하는지 의심스러워 코에 불을 붙여 확인을 하고는 했다. 김안로가 사약을 마시던 날 사약을 마셔도 죽지 않고 입이 써 생밤을 찾다가(이 부분은 <어우야담>에 나온다.) 금부나졸들이 달려들어 목을 졸라 죽였고 김안로가 평소에 하던대로 코에 불을 붙여 시신을 모욕했다.[17] 어우야담에는 김안로가 파멸하는 징조에 대한 기록이 실려있다. 아들 김시의 결혼식날, 김안로 역시 아비로서 사모관대하고 혼인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이때 솔개 한마리가 날아와 김안로가 쓴 사모를 낚아채갔다. 모두 그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기던 찰나, 어명을 받고 온 나졸들이 들이닥쳐 김안로를 잡아갔고 하객들 모두 혼비백산 놀라 도망치다가 같이 변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록에는 혼례를 노려 체포했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18] 김만중이 정한 송도삼절에는 김시가 빠지고 차천로의 시가 들어간다.[19] 이팽수란 사람이 살았는데 이 사람이 김안로랑 어릴적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라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하는걸 알고는 개고기 요리를 해다 바쳤는데 김안로는 봉상시 참봉에 불과했던 그를 승정원 주서에 앉혀주었다. 게다가 또 하나의 스토리가 더 있는데 이를 벤치마킹하려는 일이 일어났다. 진복창이라는 인물이 같은 짓을 하고는 "내 개고기 맛이 더 뛰어나다!"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는데 김안로는 "이팽수가 나았는데"라고 하면서 그다지 좋은 자리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진복창의 어머니가 (당시 영 좋지 않은 취급을 받던) 재혼한 여자라서, 즉 집안이 좋지 않아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진복창의 이후 행적을 보면 그게 김안로에게는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20] 대표적으로 정약용이 형 정약전에게 쓴 편지에서 개고기 요리법이 나온다.[21] 이후에는 개고기 때문에 사람을 죽인 벼슬아치도 있었다. 그것도 국왕의 상중에 말이다. 이 정도면 개고기를 이후엔 많이 먹은 듯.[22] 오늘날로 치면 외교, 국방, 검찰, 교육 분야의 전권에 언론 기관의 책임까지 동시에 맡았던 셈이다. 이것만 봐도 그의 권력이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본문에 있는대로 그의 능력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중종의 의도적인 권력 몰아주기의 결과. 능력도 준수하기는 했는데 막말로 '머리 나쁜 사람'이면 김안로가 그랬듯이 보스 정치가 노릇도 할 수 없고 왕이 키워주지도 않는다.[23] 원래 조선시대에는 비용 절감을 위해 겸직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겸직을 하면 녹봉은 그 중 한 관직에 해당하는 것만 받기 때문이다.[24] 이 드라마에서 지략으로 계책을 꾸며 조정 판세를 좌지우지하는 세 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