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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충무공(忠武公) 조영무 趙英茂 | |
출생 | 생년 미상공식 1338년(충숙왕 복위 7)족보 기록 |
사망 | 1414년 8월 22일[1] (음력 태종 14년 7월 28일) |
봉호 |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
시호 | 충무(忠武) |
본관 | 영흥 조씨 → 한양 조씨 |
호 | 퇴촌(退村) |
부모 | 부친 - 조세진(趙世珍) 모친 - 영흥 최씨(永興崔氏) |
부인 | 신천 김씨(信川金氏) 재령 강씨(載寧康氏) |
자녀 | 장남 - 조서(趙敍, 1370년 ~ 1429) 김씨 소생 차남 - 조윤(趙倫) 김씨 소생 3남 - 조전(趙琠) 김씨 소생 4남 - 조질(趙秩) 강씨 소생 5남 - 조이(趙理) 강씨 소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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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이다.[2]조영무가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져 본적을 한양으로 옮기게 되면서 조영무의 아들인 조서 대부터 한양으로 본관을 개관하였다. 한편으로 조영무의 후손은 조영무가 한양 조씨의 시조 조지수(趙之壽)의 장자 조인재(趙麟才)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데, 한양 조씨 측에서는 이 모든 주장을 부인하여 조인재의 후손을 일족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또한 조영무의 후손이 본관만 같은 다른 한양 조씨라 보고 있다.[3] 1894년 편찬된 관북읍지 영흥군 부분에도 조영무와 그 아들인 조서는 나오는데, 조지수는 나오지 않는다.
세상을 떠난 이후 태종의 묘정에 배향된 배향공신인데도, 조선왕조실록 조영무의 졸기에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4]
다만 조영무의 아들 조서(1370-1429)가 1399년(정종 1년 ; 건문 원년) 식년문과에 동진사로 급제(당시 과거를 주관한 이는 지공거 여흥백 민제, 동지공거 청성군 정탁임 / KBS 태종 이방원 사극에 출연한 전가식도 이때 급제함)했으며 민제는 이때 급제한 자신의 문생들을 집으로 불러 잔치를 베풀었고 정종 임금도 술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조서 역시 조선왕조실록에 졸기가 기록되었고 60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 '안정' 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이로 미루어 1370년 생인 아들을 둔 조영무는 이방원(1367년 생)의 아버지 뻘 나이임은 확실하다 하겠다. 아울러 족보 기록의 정확성 여부는 재고의 여지도 있겠지만 1338년 생이 맞을 가능성도 있다.
2. 생애
원래는 이성계의 인적 조직인 가별초 중 하나였으나 그의 무예를 눈여겨 본 이성계가 그를 키워준 덕에 크게 활약했다. 1392년 이방원의 명을 받고 조영규 등과 함께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였다. 이성계를 추대하고 조선의 개국에 참여해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조선 개국 이후부터는 정도전에게 불만을 품고 이방원의 심복이 되었는데 1398년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1등에 봉해졌다. 그 후 박포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을 이방원에게 알려 박포가 죽주에 유배되게 한다.그 후 1400년 이방간이 박포의 충동질에 넘어가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1등에 봉해진다. 이후 태종이 사병 혁파를 실시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무기를 가지러 온 군관을 폭행해 잠시 동안 황주에 유배되기도 했다. 애초 태조의 은덕으로 출세한 조영무가 태조를 저버리고 이방원 측에 가담한 원인이 정도전의 사병 혁파 시도 때문이다.[5]
그래도 이후 복귀하여 높은 벼슬을 누리다가 우정승까지 올랐고, 1411년 그가 추천한 무관이 "일을 엉망으로 한다"는 명분으로 관찰사 심온에게 파직당해 사헌부가 이를 탄핵함에 따라 그에게 불똥이 튀기도 했지만 사직을 청해도 태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아 계속 우정승 직위를 유지했다.《태종실록》 권22 11년 7월 29일 무자 2번째 기사, 《태종실록》 권22 11년 윤12월 13일 1번째 기사
그로부터 2년 후,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해서야 비로소 받아들여졌으며 조용히 경기도 광주로 내려간 후 그 곳에서 1414년 숨을 거두었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은 그의 호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3. 평가
그야말로 담백하고 우직한 전주 이씨 문중의 충성스런 가별초이지만 원래 정치적 통찰에는 좀 약한 면이 있었다. 정종 시절까지만 해도 무려 주군의 주 정책인 사병 혁파에 반대해 어명을 받들어 무장을 해제하러 온 군관을 폭행할 정도. 정도전 시절의 사병 혁파 작업이 그 현실적 필요성과 별개로 정적 숙청 성격을 띠었었던걸 떠올리고는 2차 사병 혁파를 그냥 단순히 군신간의 의리를 어기고 재산과 목숨까지 다 뺏으려는 배신스러운 토사구팽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시범 케이스로 귀양형에 처해졌으나, 애초에 별로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머지않아 복귀했다.귀양생활 동안 무슨 처세의 묘리라도 깨우쳤는지 복귀한 후에는 함부로 누구와도 척을 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했다. 하륜과 이숙번이 뭘 하려고 하면 말리고 들어서 일하기 힘들었다고 불평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6] 태종의 공신 중 상당수가 토사구팽의 희생양이 되어 민씨 형제는 목숨을 내놓고 가문이 몰락했으며 거만했던 이거이 부자와 이숙번은 목숨은 건졌으나 귀양지에서 야인으로 삶을 마친 반면 조영무는 이런 처신 덕분에 일생토록 영화를 누렸다. 사실 정종 때 잠깐 내쳐진 것도 태조가 세자 시절의 이방원에게 "조영무와 조온과 이무는 날 배신한 놈들인데, 나중에 너라고 배신을 안 할 것 같냐? 종사를 생각해서 쫓아내라"며 쫓아낼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사실 조영무나 조온이나 태조가 키우다시피한 이들인데 배신을 당했으니 태조 입장에서는 분노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조영무가 무고하다며 대간(?!)들이 상소를 올려서 곧 복직되었다. 다만 정종 말의 2차 사병혁파 때는 진짜로 큰일날 뻔 하긴 했었다.
재미있는 것은 역시 태종의 공신으로 조영무와 함께 정승 반열에 올랐으며 영화를 누린 하륜은 조영무와 비교하면 성격이나 처신이 완전히 반대였다는 점이다. 하륜은 능력과는 별개로 탐욕스런 인물이었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당장에 목이 날아갔을 법한 실수도 여러번 저질렀으며[7] 정적들이 많았다. 하지만 조영무는 평생동안 그냥 전주 이씨 문중의 가별초라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왕권을 위협할 건덕지가 아예 없었다.
정승이었음에도 정승의 권세는 부리려 하지 않아서 공직생활도 깔끔한 편이었다.[8] 그리고 처신은 신중했으나 동시에 왕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한 예스맨이나 표리부동과도 거리가 멀었다. 왕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편이었으며, 실제로 태종이 정도전을 폄하하려 할 때 당당하게 "뭐 정도전이 잘못한건 맞는데, 어쨌든 본심에는 나라를 위하는 의도도 있지 않았겠습니까?"라면서 죽은 정도전을 변호하며 이의를 제기한 일도 있었다.[9] 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쓴 사관도 "소박하고 공정하고 바른 말을 잘했다"며 칭찬할 정도.[10] 태종의 손자인 세조의 공신으로 본다면 청렴하고 엄숙한 구치관이라 볼 수 있다.[11]
조영무 이후 세종 시기에 최윤덕이 그 뒤를 이은 무관 출신 정승이 되는데, 최윤덕을 정승에 앉히기 몇 년 전 세종대왕은 김종서에게 초기에 무관 출신으로 정승을 지낸 자가 있다는데 '어찌 윤덕보다 훌륭한 자이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아마 조영무를 가리킨 듯하다. 그러면서 세종은 "하륜이 정무를 처리할 때 조영무가 이렇다 할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며, "최윤덕도 무인 출신이라 학문이 부족해 조영무처럼 의견을 말하지 않을까봐 우려된다"는 아쉬움을 덧붙이기도 했다. 《세종실록》 권56 14년 6월 9일 병신 3번째 기사 물론 그렇다고 조영무가 마냥 끌려다니듯 예스맨스러운 공직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실록에 적혀 있듯이 의외로 필요할 때는 바른말도 곧잘 하는 편이었고, 태종 재위기 중에 갑사들이 모욕을 받아 사헌부와 격돌했을 때는 갑사들의 편에 서서 원인을 제공한 범인을 처벌해 달라고 강하게 태종에게 간언을 하기도 했다. # 게다가 하륜이 불도저마냥 정책을 추진할 때 신중론을 펴며 브레이크를 자주 걸었던 게 조영무였을 정도.
4. 여담
- 바둑과 관련해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래 직급이던 상호군 권희달이 총제[12] 이밀과 내기 바둑을 두고 있는 상황이었고, 당시 영승추부사[13][14]였던 조영무가 이것을 보다가 옆에서 훈수를 둔 것. 이것 때문에 시비가 붙자 아래 직급의 반항에 노한 조영무는 이밀의 종리(從吏)를 가두고, 권희달에게 베 100필을 징수했는데 이쯤 되자 이것을 부당하다고 여긴 권희달이 조영무와 말싸움을 하다가 관대를 풀어 조영무 앞에 던져버리고 조영무의 집무실에 들어가 욕설을 퍼붓고 깽판을 친 것. 이에 태종도 크게 노해서 조영무를 꾸짖고 권희달을 파면시켰다고 한다.[15][16] 이 일화는 <용의 눈물>에서 코믹하게 각색되어 등장한다.[17] 《태종실록》 권8 4년 9월 23일 신유 1번째 기사
- 태종 2년에 기생 소생이었기에 입궁한지 5달만에 10살(!) 나이로 출궁한 궁녀 관음을 몇 달 뒤 첩으로 삼았다가 태종 12년에 탄핵을 당하게 되지만 태종이 비호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건 또한 <용의 눈물>에서 다뤄졌는데 첩으로 나온 궁녀가 성인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그가 그녀와 만났을 때 궁녀의 나이는 10살이었다. 《태종실록》 권23 12년 6월 6일 기미 3번째 기사 [18]
- 조영무의 넷째 아들 조윤은 아버지 조영무가 사망한 뒤 1달이 채 되지 않아 "부친상 중 기생과 동침을 했다"는 죄로 탄핵당했다. 그러자 태종은 "아비를 배신한 놈이니 아비의 음덕을 베풀 수는 없다"며 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명령했으며 조윤은 장 100대를 맞는다. 《태종실록》 권28 14년 윤9월 21일 신유 3번째 기사 조윤은 4년 후 "저는 그런 적이 없다"며 등문고까지 쳐가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세종은 "그 때 뭘 했다가 이제 와서 억울하다고 함부로 등문고까지 치고 난리냐"고 조윤을 또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자 상왕이 된 태종은 세종에게 "쟤 아빠 봐서 봐달라"고 말했고 세종은[19] "등문고를 함부로 친 것을 처벌해야 되지만 네 아비 봐서 봐준다"고 조윤을 용서했다. 《세종실록》 권2 즉위년 12월 12일 정해 3번째 기사 참고로 <용의 눈물>에서 신문고 제도를 설명하는 장면 중 신문고를 시험삼아 치며 신문고를 찬양하던 사람이 바로 조영무라는 점에서 세종이 "함부로 신문고를 쳤다"며 아들 조윤을 처벌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실제로 신문고가 설치된 날 태종이 하륜, 이무와 신문고에 대해 이야기하던 자리에 조영무도 함께 있었다. 《태종실록》 권2 1년 11월 16일 경자 1번째 기사
5. 대중매체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의 행적은 조영무(용의 눈물) 참고.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등장하는데 분량이 작은 관계로 간간히 지나치는 형식으로만 얼굴을 드러냈다. 이후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했을 때부터 조금씩 비중이 늘어났으며 조선 건국 이후에는 벼슬도 얻었는데 이방원을 지지하고 정도전을 비판하다가 남은에게 멱살이 잡히기도 한다. 1차 왕자의 난과 이방원의 즉위로 이야기가 끝나 이후의 생애는 그려지지 않았다.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조영무가 없고 조영무가 해야할 무력 행사를 조영규가 하고 있다. 조영규는 고려 때 진즉 정3품까지 올라갔던 인물이고[20] 조영무는 이성계의 가병이자 평민이거나 몰락한 귀족 출신이고 시기적으로 봐도 이제 막 이성계의 눈에 들어 무관이 되었다는걸 고려하면 <육룡이 나르샤>의 포지션은 조영무 쪽에 가야 고증에 맞는다.[21] 알다시피 퓨전 사극 뿌리깊은 나무의 프리퀄이라서 별개의 인물을 넣게 되면서 일부 인원이 없었다가 생기거나 일부 실존 인물을 별개의 인물로 대체하게 된 것이다.[22] 그래서 육룡 6명중에 3명을 실존인물인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이 배정되고 나머지 셋은 가상인물인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비중이 있던 정도전과 이방원의 호위무사 이방지와 무휼이 들어가게 된 것.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백성의 상징인 분이가 차지하게 되었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김법래가 연기했다. 드라마 자체가 이전과는 다르게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중심으로 하는 전주이씨 가문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는지라 전주 이씨 가문의 주요 병력을 이끄는 가별초의 한 축으로 조영규와 함께 등장했다가 조영규가 알게 모르게 극에서 퇴장한 이후에는 가별초의 대장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다. 특히나 전주 이씨 가문 사람들이 그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으로 극에서는 그려지고 있다. 또한 이성계의 측근으로 있지만 전주 이씨 가문의 일이라면 이성계의 명이라도 어길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 단적인 예로 정몽주 척살에 직접 나선 것도 바로 그런 점이며, 무인정사에서는 방원을 선택할지 방석을 선택할지 거사 당일 최후의 최후까지 고민한다. 17살인 세자 방석에게, 당당하게 앞에 서서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려 달라고 권하기까지 한다. 드라마 속 이야기지만 만약 이방석의 동복형 이방번이 자신의 군사력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세자인 동생을 돕고 이방석이 더 철이 들어서 조영무에게 확신을 주고 진압 명령을 내렸다면 이방원 측은 패했을 분위기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조영무는 방원을 선택하고 숙위병을 이끌고 방원에게 투항하고 궁궐의 문을 열어준다. 더 자세한 것은 조영무(태종 이방원) 참조.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원 역사의 서술에 충실하여 충성스럽고 우직한 가별초 출신 정승으로 나온다. 하지만 무관이라 배움이 짧았다는 것 때문에, 논어를 펴 들고는 '배우고 때때로 익혀보자니 죽겠다'며 골머리를 앓는 개그씬이 추가되었다.
[1] 율리우스력 8월 13일[2] 이렇게 삼 공신에 이름을 올린 이는 조선 왕실과 연결된 이지란, 이화, 조온을 제외하면 조영무와 조박이 유이한데, 조박이 불노 사건으로 공신직을 박탈당하면서 그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3] 사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본관의 개념이 지금처럼 맨 윗대 조상 즉 시조의 거주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본적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그래서 어느 후손이 독립해 출세하여 다른 지역에 봉군(封君)되거나 그 지역으로 이주할 경우 그 지방을 본관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한양 조씨 측에서 주장하는 바는 영흥 조씨가 한양에 연고를 가지게 되면서 본관을 한양으로 바꾸는 것까지는 상관이 없는데 왜 그걸 빌미로 자기네 집안과 같은 집안이라고 주장하느냐는 것이다.[4] 생년이 알려진 인물의 경우, 실록에 그의 졸기가 기록된 경우 세상을 떠난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5] <용의 눈물>에서도 이 사건이 재연되었는데 군관에게 하는 말이 "주군이 내게 그런 명을 내릴리가 없다!". 그러면서 주군의 명을 사칭했다며 군관의 곤장을 손수 쳐버린다.[6] 태종 13년 10월 22일에 태종이 남재를 우의정으로 임명하며 하륜과 이숙번에게 남재가 일을 하는데 있어서 용기있게 행동하지 못하니 정승으로 삼아도 되겠냐고 묻자 하륜은 그건 조영무가 더 심했다며 자기네들이 뭐만 하려고 하면 말려서 일을 하기 힘들었다고 답하였고, 태종은 웃으며 그건 조영무가 곧은 까닭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조영무와 유양을 부원군으로 봉하다. 남재를 우정승으로 임명하다[7] 민씨 형제들 축출때 망언을 두 번이나 하고 이색 비문 사건에도 관련되었고 심지어 선위 소동 때에는 "그냥 받아들이자"라고 하거나 충녕대군 세자 책봉 때 황희와 더불어 반대하다 이직이 안치되자 태종 눈앞에서 보란 것처럼 비웃음을 흘리기까지 했다. 하륜의 말년만 봤던 세종대왕은 아예 '선왕이시니까 하륜을 그 정도로 다루셨지 나였으면 작살났다.'라고 했을 정도다.[8] 심지어 뇌물 시비에 한번도 말려들지 않았다. 상술한 하륜만 아니라 이후의 황희도 그러하고 정승쯤 되면 뇌물 받아먹는 건 그 시대에 어찌보면 당연하고 또 왕인 태종 자체가 도덕적인 면에서는 관대한 걸 감안하면 흠좀무.[9] 첨언하자면 조영무는 무인정사에 참여하여 정도전을 공격하는 진영의 선봉에 섰던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보통이라면 자신의 반대측인 정도전에 대한 비판을 할때에 맞장구 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마련인데 오히려 정도전을 변호한 것이다.[10] 사관들은 무관들에 대한 평이 박한데, 조영무가 무관출신임을 감안하면 저정도면 꽤 호평이다.[11] 문신의 커리어가 부각되어서 그렇지 구치관은 세조가 서북면 방어에 믿고 임명할 정도로 큰 신임을 보여준 관료였다.[12] 조선 초기,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에 두었던 버금 벼슬.[13] 조선 초기에 창설된 의흥삼군부가 개편되어서 나온 조직으로 주업무는 국방 업무, 왕명의 출납을 담당했던 기관. 태종 즉위 초 아직 정치적으로 불안함을 타개하기 위하여 군사권, 왕명 출납을 장악한 기관이 필요했는데 그게 승추부였다.이후 왕권이 안정되고 난 후 태종 5년에 혁파되었다.[14] 영승추부사의 영과 사는 승추부에서의 직급인 '영사'를 말하는 것이다. 보통 근무하는 기관의 앞과 뒤에 붙인다.(예: 판의금부사, 영춘추관사 등등)[15] 그 시대에 자신보다 더 높은 품계의 윗사람에게 저런 깽판을 치는 것은 상당히 처벌이 엄했다. 이후 권희달은 다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데 동명이인이 아니라면 아마도 어찌저찌 복직에 성공한 듯하다. 조선 시대에는 파직이 잦은 반면 이미 관료가 된 이들은 정말 큰 사고친게 아닌 이상 복직도 쉬웠다.[16] 사실 먼저 시비를 걸었음에도 조영무가 처벌을 피해 간 것은 상급자라는 직위 문제도 있거니와, 조영무에게 대든 이 권희달이란 작자가 누가 봐도 더 문제가 심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권희달은 용맹한 무신이자 호위무사이기는 했지만 거의 분노조절장애,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있는 수준의 인물이었다. 허구헌날 술에 취해 다른 사람을 구타하거나 물에 처넣는 광증을 부려 탄핵되었지만 태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사적으로 매우 친밀한 사이여서, 태종은 매번 집요할 정도로 신하들의 탄핵에서 국법을 어겨 가며 권희달을 비호했다. 심지어 명에 사신으로 간 권희달이 말을 바치는데 "이 말은 사실 조선에서 똥을 싣고 다니던 말이다!"라고 하는 바람에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 권희달을 처형하라고 상소가 빗발쳤을 정도. 죽은 뒤의 시호조차 악시가 주어졌으며, 당시 사람들이 행패를 부리는 미치광이를 보면 '권 총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집안 식구들도 죄다 미치광이였는지, 여동생은 여종들을 학대하다 원한을 품은 여종들에게 맞아 죽었으며 아들들은 서로 싸우고 욕하다 연장자인 형에게 욕을 한 동생이 죽도록 곤장을 맞고 직첩을 회수당했다.[17] 시청자들의 이해를 위해 바둑 대신 장기로 바뀌는데 내용은 조영무가 내기 장기를 하다가 상대가 "한 수 좀 물려달라"는걸 거절하면서 시작한다. 이 때 장기 상대가 "아까 내가 엄청 많이 한 수를 물려드렸는데 조 대감은 쫌스럽게 왜 안해주냐"고 해서 싸움이 터지고 만다. 이런게 워낙에 자주 있던 일이었는지 집에 자주 찾아와서 안부를 묻는 이천우마저도 "적당히 하라"며 면박을 준다.[18] 조선에서 왕이 아닌 자가 궁녀를 탐하는 일은 대역죄에 버금가는 일이었다.[19] 4년 사이에 태종이 양위했다. 조윤이 억울함을 호소한 시점이 마침 세종의 즉위년이었다.[20] 그렇기에 조선이 개국하고 나서 예조전서(훗날 예조판서)의 직위로 승진할 수 있었던걸로 추정된다.[21] <육룡이 나르샤>의 경우 조영규, 조영무가 둘 다 등장해야겠지만 드라마의 주인공 중 1명인 무휼이 조영무가 맡아야 할 무인 포지션을 죄다 가져가버렸고 제작팀도 굳이 조영무를 추가하고 배역을 섭외하려고 하지 않았다.[22] 전자는 정도전의 호위무사 이방지와 비밀첩보조직 화사단의 연희가 해당되며 후자는 조영무의 역할을 하는 무휼과 우의정 하연을 대신하는 인물 이신적이 있다. 별개의 인물인만큼 실존인물과 작중행적도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