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3:38:46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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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조선 정승
심정
沈貞
출생 1471년 11월 16일[1]
(음력 성종 2년 윤9월 25일)
사망 1532년 1월 19일[2] (향년 60세)
(음력 1531년, 중종 26년 12월 3일)
평안도 강서현
사사형
봉호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1530년(중종 25) 삭탈
본관 풍산 심씨
정지(貞之)
소요정(逍遙亭)
부모 부친 - 심응(沈應, 1433 ~ 1504)
모친 - 대구 서씨 서문한(徐文翰)의 딸(? ~ 1523)
부인 하양 허씨 - 허당(許塘)의 딸(1468 ~ 1534)
자녀 장남 - 심사공(沈思恭)
차남 - 심사손(沈思遜, 1493 ~ 1528)
3남 - 심사순(沈思順, ? ~ 1531)
장녀 - 김억(金億)의 처
차녀 - 한윤종(韓胤宗)의 처
(서자) - 심사눌(沈思訥)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6. 묘역

[clearfix]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 중종반정에 참여해 정국공신에 책록되었다.

기묘사화 당시 남곤, 김전, 홍경주 등과 사건을 일으킨 인물로 지목되지만 정작 사건을 주도한 인물은 중종 자신이었다. 경서 해석과 역사에 밝았으며 학문상으로는 관학파 유학자였다. 교묘하게 꾀를 잘 써서 '꾀주머니'라는 별명도 있었는데 결론은 꾀로 흥한 자 꾀로 망했다.

2. 생애

1차 왕자의 난2차 왕자의 난 당시 공신이었던 심귀령(沈龜齡)의 증손이다.[3] 조선시대 심씨 고위 인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청송 심씨가 아니고 풍산 심씨이다. 149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02년 별시 문과에 급제했으며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을 극적으로 피했다. 1503년 수찬을 거쳐 1506년 중종반정이 터지자 가담하여 정국공신 3등으로 화천군(花川君)에 봉해졌다. 1507년 중추부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김공저(金公著)와 조광보(趙光輔)가 역모를 일으켰다며 남곤, 김전, 김극성(金克成) 등과 함께 폭로하여 상을 받았다. 반면 이 옥사를 훈구파 대신들(특히 류자광)을 싫어했던 신진 사림파의 실제 어설픈 기도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이 모의에 참여했던 김공저는 먼저 밀고하여 귀양에 그쳤고 남곤, 심정 등은 뒤에 "좀 더 천천히 알아보고 고하려고 했다"면서 고변했는데 상을 받았다. 이런 사림에는 넓게는 조광조까지 포함되었으나 불문에 부쳤으므로 사림들이 이 사실을 늦게 고변한 남곤, 심정을 싫어하게 될만도 하지만 심정 등의 입장에서는 또 목숨이 걸린 것이었다.

1509년 성천부사 등 외직을 전전하다가 1515년 이조판서까지 승진했으나 삼사의 탄핵으로 물러났는데 그 뒤를 이어 이조판서가 된 사람이 남곤이다. 1518년 형조판서의 물망에 올랐으나 조광조 등 사림파의 비난 및 소인(小人)으로 지목받은 것과, 이조판서였던 안당(安瑭) 등의 거부로 임명받지 못했다. 이후 한성판윤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형조판서를 지냈지만,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당해 정국공신 명단에서도 삭탈당하자 원한을 품고 김전, 홍경주 등과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류를 모조리 숙청할 계획을 세운다. 이후 한강변에 정자를 지어 울분을 달래던 중 아들 심사손(沈思遜)마저 조광조 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자 조광조 등의 사류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맺혀 틈만 노리게 되었다. 이 때쯤 되면 정광필, 안당, 남곤 등도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탄핵질에 우려를 나타내고 거리를 두게 된다.

1519년 이조판서를 거쳐 한직으로 물러났다가 조광조 등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하여 반정 공신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게 되자 경빈 박씨를 통하여 '조씨전국(趙氏專國)'[4]유언비어를 궁중에 퍼뜨리고 홍경주 등과 모의해 중종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키면서 사류를 일망타진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밤에 비밀리에 재상들을 부른 것은 중종이고 조광조를 비난한 것도 중종이었기 때문에 중종의 친위 쿠데타가 맞다. 당장 실록에서도 신하들이 중종을 꼬드겼다는 헛소문이 돈다며 정광필부터가 모든 것이 다 왕이 주도한 왕의 뜻이라는 것을 널리 밝히라고 진언한다. 심정은 조광조와 악감정이 있었어도 삭탈관직이나 유배로 끝내려 했지 사사까지는 너무 지나치다고 중종에게 건의할 정도였다.

1522년 비변사 제조, 1527년 우의정에 이어 남곤, 김전 등과 함께 정권을 장악했으나 1527년 영의정 남곤이 죽고 김전마저 죽은 뒤 좌의정·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수하에 이항(李沆)과 김극핍(金克愊)을 두고 권력을 독점하게 됐다. 세자(뒷날의 인종)의 누나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인 이조판서 김안로[5]와의 경계는 이 때 더욱 격렬해졌는데 이행 등과 함께 대신과 육조, 대간을 총동원하여 김안로를 밀어내게 된다.

하지만 직후 경빈 박씨가 세자를 저주했다는 작서의 변 사건이 터지면서 경빈 박씨파로 몰려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예(權輗)의 탄핵으로 평안도 강서현[6]으로 귀양갔다. 이항, 김극핍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된데다가 김안로의 탄핵으로 경빈 박씨의 뇌물을 받았다는 죄목을 뒤집어 쓰고 사사되었다. 김안로 때문에 몰락했기에 '상은이 지중하다.'라는 말을 남긴 다음에는 죽기 직전까지 "원수 김안로!"를 연발하다가 죽었다.[7]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12년 뒤에 벌어진 일로, 후일 김안로가 죽은 뒤에도 사림의 미움을 받아 사면 복권되지 못하고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두고두고 욕먹었다.[8]

심정은 남곤 못잖게 청렴했으며[9] 자기 가족은 끔찍이 챙겨 형제간에 우의는 지극하여 곤경에 처한 동생 심의(沈義)를 끝까지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한편 유배지에 있을 때 변방의 만포 첨사로 있던 장남 심사손이 여진족에게 살해됐다는 비보를 접한다. 차남 심사순은 아버지의 일로 국문을 받았음에도 끝까지 자백을 하지 않았다가 결국 절명했다. 손자 심수경은 처신을 잘하여 가문의 명예를 회복했다. 그럼에도 심정 본인은 끝까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조선시대 내내 간신의 대표로 남았다.

3. 평가

"심정은 본래 음험한 성품으로 갑자기 높은 권좌에 올라 위복을 자기 멋대로 부리고 사특한 의논을 선동하여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하였다. 지난번 작서(灼鼠)의 변 때 은밀히 박씨(朴氏)의 뇌물을 받아 그의 문앞이 저자 같았다. 그 형세가 더욱 치성(熾盛)하여 죄악이 저절로 드러났는데도 가벼운 벌을 주었는데 공론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그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회개는 하지 않고 분노를 품고 틈을 엿보아 서로 당을 맺어 조정을 다시 어지럽혔다. 심사순이 다시 악한 마음을 품고 사림을 모해하고자 하여 네 거리에다 방문을 붙여 위로는 어휘(御諱)를 범하고 아래로는 인심을 요동시켜 말로 형언하기가 어려운 부도(不道)를 저지를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는 일가가 분심을 쌓음으로 말미암아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라의 대계(大計)를 위해 특별히 사사(賜死)하게 하여 중외에 효유하였는데, 먼저의 전지는 그 사실이 곡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고쳐 효유한다."
중종 26년 12월 3일

4. 기타

  • 아우인 심의(1475~?)는 스스로 바보 시늉을 내서 형이 세상을 떠날 때 아무 일 없이 지나쳤다. 남곤과 심정이 뭔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심의가 들어오더니 "이 두 소인놈들아! 뭔 심보로 온지 몰라도 배설이라도 하고자 모였냐?"라면서 낄낄 꺼렸다고 한다. 남곤이 어이없어하자 심정은 아무렇지 않게 "우리 아우는 바보이니 대감이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남곤의 형 남포도 동생이 기묘사화를 일으킨걸 부끄러워 했다고 전한다.[10] 하지만 심정은 아우가 진짜 바보임을 아닌걸 알았는데 이런 일화도 전한다. 남들 앞에서는 바보처럼 굴던 심의가 하루는 형과 단둘이 있자 진지하게 "이대로 있다가는 형님도 무고한 누명으로 죽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형님도 저처럼 미치십시오. 그러면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할지언정 천명대로 살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그는 무덤덤하게 "이미 원한을 쌓은 이 몸은 늦었으니 아우님만이라도 몸을 잘 간수하여 대를 남기도록 하시게."라고 대답했다.[11] 결국 심정이 비참한 최후를 맞자 심의는 통곡하면서 몰래 장사를 치루고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기생 과의 사이에서 75세와 83세에 서자를 본 심수경이 그의 손자였는데 친할아버지 심정과의 나이 차이는 46세였다.[12]

5. 대중매체

  • 2001년작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김영선이 연기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중종실록에서 등장한다. 남곤, 문서귀와 함께 김공저와 박경의 역모를 고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조광조의 등장으로 쫓겨났다가 중종에게 조광조가 죽음을 맞자 다시 좌의정으로 복귀한다. 정광필과 함께 김안로의 복귀를 반대하였으나 이행의 찬성으로 김안로가 풀려났다. 이후 벽보에 그의 3남 심사순이 고문을 받으면서도 계속 부인하자 그의 종을 국문해서 사실임이 인증되자 심정은 사약을 받았는데 죽기 직전에 “원수 김안로오- 원수 김안로오-”를 외치고는 사약을 마시고 죽으면서 등장종료.

6. 묘역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76호 77호 78호
홍무 25년 장흥사 명 동종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 신선경과 류인호 묘역
<colcolor=#fff>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7호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
豊山 沈氏 文靖公派 墓域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
463-10, 463-13, 855, 산153-3
시대 조선시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기타
수량 / 면적 분묘 6基, 석물 25基, 사당1棟, 토지 1,190㎡
지정연도 1991년 12월 24일
관리자
(관리단체)
풍산심씨 종친회
파일:풍산_심씨_문정공파_묘역.jpg
파일:풍산심씨문정공파묘역.jpg
<colbgcolor=#c00d45,#94153e>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13]
[clearfix]
현재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동에 심정의 묘가 있다. 장남 심사손, 차남 심사순 및 손자 심수경 등 심정 자손들의 묘 60여 기도 함께 있어 하나의 가족 묘역을 이루고 있다. 1991년 12월 24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받았다. 풍산 심씨 문중에서는 심정의 후손들을 그의 시호를 따서 문정공파로 분류하며 따라서 문화재로 지정할 때 공식 명칭을 '풍산 심씨 문정공파 묘역'이라 했다.
[1] 율리우스력 11월 7일[2] 율리우스력 1월 9일[3] 사실 심귀령은 공신이라고는 해도 4등 공신으로 이름만 올린 수준이었으며 여말선초의 무장 중 1명으로 생각하면 된다.[4] 조씨에게 나라가 넘어간다는 뜻.[5] 김안로는 김종직의 제자인 김전의 동생 김흔의 아들이였는데 김전이 중종반정을 계기로 후배 사림파와 원수가 되고 자신은 중종의 딸을 며느리로 삼으면서 외척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6] 서울특별시 강서구가 아니다.[7] 이 장면은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도 나왔다.[8] 사실 김안로를 앞세운 것이 사림이었고, 당시 사림은 김안로를 위해서 죄없는 심정과 이행 등을 모함했다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사림은 이를 두고 "우리를 해하려는 근거 없는 모함"이라고 일축했는데, 만약 심정과 이행이 억울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역으로 공격당할 거라 생각해 사림 입장에선 어떻게든 심정과 이행은 죽었어야 했고, 죄를 뒤집어써야만 했다.[9] 그들이 관학파 출신이었다는걸 상기하자. 세도가 극에 달하게 되는건 권력이 견제없이 집중된 김안로, 윤원형 때의 일.[10] 하지만 남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돌아가면서 "심정... 자네 아우도 내 형만큼 현명하구려..."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남곤은 진짜 억울한 점도 있었는데 남곤은 어떻게든 조광조를 살릴려고 노력한 인물이였다. 원래 조광조를 죽이려 한 이는 중종인데 정광필과 남곤이 결사 반대하여 삭탈관직과 유배형으로 형량을 많이 낮추었다. 결국 중종이 조광조를 죽이려고 하자 남곤은 "옳은 일 하려다가 자신만 옳다는 편집적인 성격이 된 것뿐이라며" 목숨까지 거둘 필요가 있냐고 사사에 반대했고 중종이 계속 죽이자고 할 때마다 끝없이 반대하며 조광조가 죽은 후에는 매우 슬퍼했다. 그런데도 남곤이 사화의 원흉인냥 모든 오명을 뒤집어쓰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 역시 중종의 꼭두각시로 놀아난 심정도 마찬가지.[11] 혹은 아우가 위기에 몰렸을 때 탈출하라는 암시로 쥐구멍을 잘 기억해두라고 이야기를 하자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도 하며 아예 무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2] 조선시대에는 법적으로 남자는 16살, 여자는 14살이면 결혼이 허용(1440년에 제정된 법이다.)되었기에 되려 나이 차가 그 시절에는 늦게 본 손자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증손자뻘을 볼 나이에 아들을 본 심수경이 독특한 것이다.[13]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위키백과: Amond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