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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2년(정조 6) |
사망 | 1851년 1월 7일 (향년 68~69세) (음력 1850년, 철종 1년 12월 6일) |
재임기간 | 제227대 영의정 |
1841년 6월 11일 ~ 1844년 11월 2일 (음력 헌종 7년 4월 22일 ~ 헌종 10년 9월 22일) | |
제230대 영의정 | |
1850년 11월 9일 ~ 1851년 1월 7일 (음력 철종 1년 10월 6일 ~ 12월 6일) | |
시호 | 문충(文忠) |
본관 | 풍양 조씨[1] |
자 | 희경(羲卿) |
호 | 운석(雲石) |
부모 | 부친 - 조진관(趙鎭寬, 1739 ~ 1808) 모친 - 남양 홍씨 홍익빈(洪益彬)의 딸 |
부인 | 안동 김씨 김세순의 딸 |
자녀 | 장녀 - 청풍 김씨 김학성(金學性)의 처 차녀 - 전주 이씨 이인우(李寅禹)의 처 3녀 - 대구 서씨 서익보(徐翼輔)의 처 (양자) - 조병기(趙秉夔)[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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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외척. 신정왕후 조씨의 숙부이며 헌종의 외종조부이자 국구 조만영의 동생이다.2. 생애
1819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응교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에 형인 조만영의 딸이 세자빈이 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820년에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다가 1822년에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고, 복귀 후에는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 1825년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이 때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도 홍문관 제학에 같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간다.그러다 1827년 이조참의로 복귀하게 되는데 이 때가 형 조만영의 사위가 되는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시기와 겹친다. 그리고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1828년에 직제학에 이르게 되는데 이 때 중앙 조정에서 형과 효명세자를 지근거리에서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1829년에 전라감사로 나갔다가 1830년 다시 복귀하여 비변사 제조에까지 오르게 되지만 그 해 6월에 효명세자가 죽게 되면서 승진 속도가 살짝 늦춰지게 된다.
하지만 1831년 이조참판과 예조참판을 지내다가 1832년에 공조판서가 되었고, 곧바로 한성부 참판과 우참찬이 되면서 중앙 정계의 실력자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헌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가 되었고, 이후 예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내는데 자신의 형 조만영이 훈련대장과 판의금부사, 그리고 어영대장, 호위대장 등 군사권을 장악한 것과 비교해보면 이쪽은 조정 쪽의 세도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형 조만영이 좌의정에 올라서 실권을 장악한 1837년 그도 호조판서가 되어서 경제권을 장악하면서 풍양 조씨 세도를 확고히 하는데 힘쓴다. 그리고 1839년에 기해사옥 즉 천주교 탄압을 주도하면서 이 공으로 우의정이 되어서 형에 이어서 정승 자리에 오르고 1841년에는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인 영의정에 오르게 되고 이 직책을 무려 3년간 유지하게 된다.
그가 정승에 있던 10여년 동안 상당히 많은 상소를 통해 국가 재정의 확보 방안과 민생 문제에 대한 개선 방안 특히 수령의 부정을 어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안을 꾸준히 거론한다. 한마디로 민생을 살필 줄 아는 재상이었다. 다만 문제는 사실상 실권은 형인 조만영이 지니고 있었고 조만영은 좌의정에서 물러난 이후 지속적으로 군권을 쥐면서 당시 라이벌 세도 가문이었던 안동 김씨 세력의 견제에만 힘썼다는 점에 있다. 그로 인해 동생이었던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중앙 정계에서 형을 보좌하는 역할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실질적인 개혁에는 나서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결국 1844년 영의정 직에서 물러나고 1846년 형 조만영이 죽게 되자 실록에서의 언급이 확연하게 줄어들게 된다. 그러다가 1849년 철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다시금 영의정에 오르게 되나 1851년 죽게 된다. 이후 문충공의 시호가 내려지고 헌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여담으로 그는 추사 김정희의 친구로 유명하다. 특히 1816년 성절사 일행을 따라 연경에 갔을 때 러시아 신부였던 비추린과 편지를 주고 받은 기록이 있으며, 1817년에는 김정희와 함께 북한산을 방문하여 김정희가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재차 확인하게 하는데 같이 하였다. 이후에 김정희가 죽기 직전에 몰렸을 때 살렸던 것도 그였다.
3. 졸기
영의정 조인영(趙寅永)이 졸(卒)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정량(貞亮)한 용자(容姿)와 신밀(愼密)한 규모(規模)로써 일에 임해서는 조심하며 두려워하고 집에 있어서는 검소하고 절약하였으며 나라를 걱정하고 집안 일을 잊음이 종시토록 간절하였으니, 내가 보고 듣는 바로는 이와 같은 대신이 있지 않았다. 더구나 문학의 유창(流暢)함과 재유(才猷)의 숙달(熟達)됨은 오늘날 찾아보려 해도 어디서 구해 오겠는가? 근래에 신절(愼節)이 걱정되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갑자기 이렇게까지 될 줄은 헤아리지도 못하였다. 오직 과매(寡昧)한 나는 성취할 길이 없어졌고 백성과 나라 일을 생각해 보면 실로 망연할 따름이다. 졸(卒)한 영의정의 집에 동원 부기(東園副器) 한 벌을 보내 주고, 성복일(成服日)에는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할 것이며, 녹봉은 3년을 기한하여 그대로 지급하고, 예장(禮葬) 등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참작하여 거행케 하라.”
하였다. 조인영은 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아우이니, 집안은 효우(孝友)로 전해 왔고 몸소 검약을 실천하여 언행(言行)과 조리(操履)가 가히 5척의 어린 임금을 부탁하고 큰 일을 맡길 만하였다. 순조의 지우(知遇)를 받아 헌종을 보도(輔導)하느라 8년을 궁중에서 지냈는데, 전일(專一)한 충심(忠心)은 임금을 받들고 백성을 보살핌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나라를 걱정하고 집안을 잊음을 살림살이로 여겼다. 일을 헤아리고 이치를 보는 데에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모든 일을 설계하여 펼치고 시행함에 있어 조야(朝野)가 믿고 중히 여겼음이 마치 시귀(蓍龜)[3]와 같았다. 문학과 사장(詞章)에 있어서도 세상의 종장(宗匠)이 되었는데, 육경(六經)에 근저(根柢)를 두고 백가(百家)를 섭렵(涉獵)하여 문단의 맹주(盟主)로 지냄이 10여 년이나 되었고, 관각(館閣)에 있으면서 제고(制誥)로 지은 글은 거의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었었다.
철종 2권, 1년(1850년 경술 / 청 도광(道光) 30년) 12월 6일(계해) 1번째 기사
“정량(貞亮)한 용자(容姿)와 신밀(愼密)한 규모(規模)로써 일에 임해서는 조심하며 두려워하고 집에 있어서는 검소하고 절약하였으며 나라를 걱정하고 집안 일을 잊음이 종시토록 간절하였으니, 내가 보고 듣는 바로는 이와 같은 대신이 있지 않았다. 더구나 문학의 유창(流暢)함과 재유(才猷)의 숙달(熟達)됨은 오늘날 찾아보려 해도 어디서 구해 오겠는가? 근래에 신절(愼節)이 걱정되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갑자기 이렇게까지 될 줄은 헤아리지도 못하였다. 오직 과매(寡昧)한 나는 성취할 길이 없어졌고 백성과 나라 일을 생각해 보면 실로 망연할 따름이다. 졸(卒)한 영의정의 집에 동원 부기(東園副器) 한 벌을 보내 주고, 성복일(成服日)에는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할 것이며, 녹봉은 3년을 기한하여 그대로 지급하고, 예장(禮葬) 등의 일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참작하여 거행케 하라.”
하였다. 조인영은 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아우이니, 집안은 효우(孝友)로 전해 왔고 몸소 검약을 실천하여 언행(言行)과 조리(操履)가 가히 5척의 어린 임금을 부탁하고 큰 일을 맡길 만하였다. 순조의 지우(知遇)를 받아 헌종을 보도(輔導)하느라 8년을 궁중에서 지냈는데, 전일(專一)한 충심(忠心)은 임금을 받들고 백성을 보살핌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나라를 걱정하고 집안을 잊음을 살림살이로 여겼다. 일을 헤아리고 이치를 보는 데에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모든 일을 설계하여 펼치고 시행함에 있어 조야(朝野)가 믿고 중히 여겼음이 마치 시귀(蓍龜)[3]와 같았다. 문학과 사장(詞章)에 있어서도 세상의 종장(宗匠)이 되었는데, 육경(六經)에 근저(根柢)를 두고 백가(百家)를 섭렵(涉獵)하여 문단의 맹주(盟主)로 지냄이 10여 년이나 되었고, 관각(館閣)에 있으면서 제고(制誥)로 지은 글은 거의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었었다.
철종 2권, 1년(1850년 경술 / 청 도광(道光) 30년) 12월 6일(계해) 1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