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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29년 9월 17일 (음력 인조 7년 8월 1일) |
한성부 | |
사망 | 1689년 5월 27일 (향년 59세) (음력 숙종 15년 4월 9일) |
전라도 진도 | |
사사형 | |
재임기간 | 제138대 영의정 |
1680년 5월 1일 ~ 1687년 8월 31일 (음력 숙종 6년 4월 3일 ~ 숙종 13년 7월 24일) | |
시호 | 문충(文忠) |
본관 | 신 안동 김씨[1] |
자 | 구지(久之) |
호 | 문곡(文谷) |
붕당 | 서인 → 노론 |
부모 | 부친 - 김광찬(金光燦, 1597 ~ 1668) 모친 - 연안 김씨 김내(金琜)[2]의 딸 |
형제자매 | 7남 6녀 중 3남
|
부인 | 안정 나씨(安定羅氏, 1630 ~ 1703)[3] |
자녀 | 6남 1녀 |
[clearfix]
1. 개요
조선의 문신. 서인의 중진이자 노론의 영수이던 거물 정치가.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현종의 종묘 배향공신 4명 중 한 명이다.[4]김상헌의 손자이자 김광찬의 아들이다.[5] 송시열, 송준길로 대표되는 산림과의 정치적 연대로 중앙 조정에서 활동하였다.[6][7][8] 기사환국 때 사사되었으나 갑술환국으로 복권되었다.
훗날 장동 김씨 세도정치의 사실상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그에게서 시작된 후손들과 그들의 학파는 조선 후기의 정계와 학계에서 모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2. 생애
인조 7년, 1629년 8월 1일 한성부에서 김광찬과 연안 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9][10] 곡운 김수증(金壽增)이 큰 형이며[11], 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흥(金壽興)[12]은 둘째 형으로 당대 명문 거족(名門巨族)의 가문이었다. 출생지는 한성[13]이지만, 현재 포천시 영평면으로 이주해서 생활했다.다섯살 때(1633년) 어머니 연안 김씨를 여의고 어려서 강원도 원주(原州)의 외가로 내려가 외할머니댁에서 1년쯤 있다가[14] 6살때 할아버지(청음 김상헌)가 계시는 안동 풍산으로 내려가 16살까지 학문을 닦고 한양(漢陽)으로 올라와 학업에 정진하였다. 1635년 외삼촌 김천석의 임지에 따라갔고, 1636년 외조모 초계 정씨 부인에게 글을 배운다. 1637년 원주로 돌아왔다. 12세(1640년)에 김상헌이 있는 풍산으로 내려가 배웠다.[15] 17세(1645년)에 나만갑의 손녀, 나성두의 딸인 안정 나씨와 혼인하였다.[16][17]
18세(1646년)에 사마시,[18] 1651년 알성시 문과에서 장원 급제하였고,[19] 1656년 문과 중시에도 급제한다. 정언, 교리 등 청요직을 거쳐 이조정랑, 대사간에 이르며, 20대에 당상관에 오르는 어마어마한 승진 속도를 보인다. 1659년 현종 즉위시 승지가 되었다. 1차 예송에서 1년복을 주장하여 3년복을 주장한 남인과 대립하여 승리하였다.
33세가 된 1662년 이조참판, 1663년에는 이조판서, 대제학[20] 이 되어 산림의 양송과 동맹을 이뤄 조정에서 서인의 사론(士論)을 이끈다. 이 때 승승장구하던 김수항에게 첫 시련이 닥친다. 김만균이 청사 접대를 거부하여 승지 서필원이 문제 제기를 하며 공의, 사의 논쟁이 발생하게 된다. 논쟁이 불붙어 있을 때 이조에서[21] 인사 물망을 올렸는데 그 과정에서 서필원의 편에서 공의론을 주장하던 조원기와 윤형성을 지방관으로 추천하여 외직으로 내보내고, 사의론을 주장한 이규령과 조성보는 정언과 지평의 중앙 관직에 복귀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분노한 현종은 이들을 반대로 발령하였고 이조 관리들을 비난하며 김수항, 민정중, 이민서를 파직시켰다. 그리고 다음 해 논쟁을 마무리 지은 현종은 김수항을 함경도 별시의 시관으로[22], 민정중은 함경도 관찰사에 보임시킨다. 절치부심한 김수항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적극적인 함경도에서의 활동으로 민심 수습을 위한 정책을 건의하여 성공적으로 시행하였고[23][24] 추후에도 조정 정책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함경도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였다. 또한 이들은 함경도 문인과 교류하며 학맥과 인맥을 만들었고[25], 함경도는 훗날 노론을 지지하는 지역이 된다. 김수항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수개월 후 중앙직에 복귀한 김수항은 현종의 온천 행차에 여러차례 동행하며 예조, 이조판서, 대사헌을 거친다.
1668년 부친 김광찬이 사망하여 3년상을 치렀다. 1670년 복귀하여 우참찬, 판의금부사,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거쳐 44세인 1672년 우의정이 되었고 (대제학 겸임), 1674년 2차 예송논쟁 때 영의정이던 둘째 형 김수흥이 송시열을 비호한 죄로 파직되고, 남인인 허적이 영의정에 오른다. 김수항은 현종의 붕당 균형 맞추기 전략으로 좌의정에 제수된다.
1674년 현종이 승하한 뒤 숙종이 즉위한다. 남인들의 공세가 강해지면서 송시열은 유배당했고, 김수항은 조정 내 서인의 수장으로서 복창군, 복선군 형제의 석방 명령이 떨어지자 강경한 상소를 올려 정면승부를 걸었다.[26]링크 하지만 숙종은 김수항의 상소를 반박하며 서인의 반대편에 섰고, 김수항은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된다. 1678년에는 강원도 철원으로 이배되었다.
그러나 1680년(숙종 6년) 3월에 김만기의 제안 하에 김석주가 주도하여 이뤄진 경신환국에서 남인이 다시 축출되면서 서인들이 조정으로 복귀한다. 김수항은 복귀 후 영중추부사를 거쳐 영의정이 되어 서인 정권을 이끈다. 5월에 김수항은 윤휴를 법대로 처벌해달라고 청한다.[27] 또한 숙종 즉위 당시 송시열이 올렸던 상소가 효종을 폄강(貶降)하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차자를 올려, 송시열은 이 날 바로 방면되었다. 10월 인경왕후의 승하가 있었고, 1681년 5월 민유중의 딸 여흥 민씨(인현왕후)가 왕비가 되었다. 김수항은 영의정으로 정사가 되어 책봉례를 거행한다.
1684년 4월 최신의 상소로 윤증과 송시열의 갈등인 '회니시비'가 불붙었다. 5월 박세채가 상소하여 윤증을 감쌌으나, 김수항은 최신의 상소가 경솔하기는 하지만 윤증의 문제도 지적하며 비판하였다.실록 링크 8월에 성균관 유생이던 조정만이 윤선거, 윤증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아들 김창업이 상소에 동참했음을 알고 훈계하는 편지를 보냈다.링크
1685년 2월 부제학 최석정이 윤증을 옹호하고 김수항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숙종은 최석정이 사당을 옹호한다며 파직시킨다. 소론계의 김수항 비판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김수항은 결국 7월에 27차례나 체차를 청하여 숙종이 윤허하였다. 당시 소론계는 둘째 아들 김창협의 과거 발언을 가져와 김수항을 비판하였다. 1684년(숙종 10년) 10월에 유생 김엽(金曄)이 상소를 올려 윤증이 터무니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송시열을 비난한다고 하였는데,링크 김창협이 이를 접하고 무상(無狀)하다(=무례하고 경우가 없다)고 했다 한다. 신엽, 윤덕준, 신계화는 교대로 숙종을 뵙고 최석정을 파직한 명을 거두어 달라하며 김창협의 과거 발언을 가져와 안동 김문이 시세에 따라 입장을 바꾼다며 김수항을 비판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영의정 자리를 비워두었다가, 8월에 1달만에 다시 김수항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1685년 말에서 1686년 사이에 장씨(=장희빈)의 재입궁이 이루어졌다. 인현왕후는 장씨의 견제를 위해 간택 후궁을 권하였으며, 1686년 3월 형 김수증의 장남인 김창국의 딸(김수항의 종손녀)로 간택 후궁으로 결정되어 숙의, 소의를 거쳐 귀인이 되었으며, 훗날의 영빈 김씨이다.[28]
1687년 5월 숙종은 조사석을 우의정에 임명했는데 민진주가 복상의 관례가 무시되었다고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불쾌함을 표한다. 또한 6월 혜민서 제조에 동평군을 임명하는데 이때도 서인은 반발하였다. 숙종은 이때도 '형상(刑賞)과 출척(黜陟)은 임금의 큰 권한인 것이다'하며 서인들의 국왕의 인사권 제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김수항은 7월 영의정에서 내려와 영돈녕부사가 되었고, 형 김수흥이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숙종의 장씨 총애는 계속되었고, 1687년 9월 대사헌 김창협의 상소가 올라간다.[29][30] 도리어 숙종은 12월에 장씨를 숙원으로 봉하며 정식 후궁으로 삼았고, 1688년(숙종 14년)에는 소의로 오르고 12월에는 아들 경종도 출산하게 된다.
장씨의 아들의 출생이 100일도 지나지 않은 1689년 1월 숙종이 원자 정호(=장씨의 아들이 내 후계자라고 공표하는 것)의 뜻을 밝히자 남인까지도 당황하게 된다. 2월에 송시열이 원자 정호가 성급하다는 상소를 올리게 되고, 숙종은 그의 영향력을 경계하며 다시 환국을 일으킨다. 기사환국이 일어났고 김수항은 남인의 첫번째 제거 대상이 되어 진도에 유배, 위리안치되었고 그해에 바로 사사되었다.[31] 남인들이 김수항을 논죄할 때 죄목 중 하나는 숙의 김씨(=영빈 김씨)를 통해 임금의 동정을 염탐했다는 것이다.
김수항의 실록 졸기는 다음과 같다. 노론과 소론 사관의 입장이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때 김수항은 진도(珍島)에서 귀양살고 있다가 사사(賜死)하는 명을 받고는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붙이고, 아들들에게 훈계를 남긴 다음 종용(從容)히 자진(自盡)했는데, 사기(辭氣)가 평소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 사람들이 그에게 신조(信條)가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 절필시(絶筆詩)에 이르기를,
세 조정 욕된 벼슬 무슨 도움 주겠는가? / 한 번 죽음 옛부터 당연한 일인 것을
임금 사랑하는 일편 단심만은 / 구천에서 귀신을 보내어 알리리.
하였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슬퍼해 마지않았다. 김수항은 선정(先正)의 가문(家門)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유훈(遺訓)을 이어받아 행실과 마음이 단아하고 간결하여 내외(內外)가 수연(粹然)히 완비되었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괴과(魁科)로 발탁되었고, 나이 40이 넘어서는 이미 태정(台鼎)의 지위에 올랐으며, 문학(文學)과 언론(言論)은 진신(搢紳)들의 영수(領袖)였다. 외모가 빼어났고 걸음걸이가 안중(安重)하여 조회(朝會) 때마다 기상(氣象)이 엄연(儼然)하였으므로 온 조정이 눈길을 모았다. 그리하여 현묘(顯廟)의 고명(顧命)을 받아 사왕(嗣王)을 보좌했는데, 허적(許積)의 무리가 용사(用事)할 때 온갖 비방이 잇따라 일어나 스스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고 극력 떠나가겠다고 요구하였으나, 임금이 오히려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상소를 올려 윤휴(尹鑴)와 홍우원(洪宇遠)에 대해 말하다가 말이 자성(慈聖)에게 핍박되었다는 죄로 드디어 남쪽 지방으로 귀양갔다.
경신년 개기(改紀) 때 영의정으로 국정(國政)을 맡았다가 정묘년에 비로소 자리를 내어놓게 되었다. 이는 장희재(張希載)와 이항(李杭)에게 이미 궁액(宮掖)의 세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중궁(中宮)이 폐위(廢位)되어 사제(私第)에 거처하게 되어 있었고, 또 허적(許積)의 여당(餘黨)에게 무함을 받아 참화(慘禍)를 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진퇴 시종(進退始終)의 대치(大致)를 살펴보면 세도(世道)의 승강(昇降)을 알 수 있음은 물론, 또한 그가 일대(一代)의 명신(名臣)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김수항이 전후 10여 년 동안 국정을 맡았었는데, 그의 재모(才謀)는 혹 미진한 점이 있었지만, 요컨대 지닌 뜻이 정대(正大)하고 나라 위해 몸바치는 정충(貞忠)이 있어 심사(心事)가 푸른 하늘의 흰구름처럼 일호도 숨기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근세(近世)의 명공(名公)들을 두루 헤아려 보아도 김수항에 비견될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들 하였다.
논자(論者)들은, 김수항이 조정에 벼슬하면서 세 가지 대절(大節)을 수립하였다고 했다. 장채(章蔡)의 역모(逆謀)를 미리 꺾어 이륜(彛倫)을 부지(扶持)시킨 것이 그 하나이고, 군소배들이 멋대로 이론(異論)을 제기하여 흉당(凶黨)에 아첨할 적에 홀로 정도(正道)를 지켜 화를 당해도 뉘우치지 않은 것이 둘이고,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한 것을 통렬히 배척하여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사문(斯文)이 힘입을 데가 있게 한 것이 셋이다. 큰 것이 이러하니 세세한 것은 생략해도 된다. 송시열이 김수항의 장사(葬事) 때 지은 지문(誌文)에 말하기를,
"공(公)은 노선생(老先生)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32], 기관(機關)을 농락(籠絡)하는 것은 심술(心術)이 부정한 것이고, 피차(彼此)를 조정(調整)하는 것은 사위(事爲)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는 주 부자(朱夫子)가 일찍이 '송 원헌(宋元憲)이 농락한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고, 건중 정국(建中靖國)때의 조정(調整)은 혼란을 유치(誘致)시키는 방법이었다.' 한 데서 유래된 생각이었는데, 공의 가법(家法)의 연원(淵源)이 본래 이러하였다. 항상 하늘이 사마공(司馬公)으로 하여금 송(宋)나라의 국운(國運)을 돕게 하였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마음을 지녔고, 범 충선(范忠宣)이 은밀히 뒷날 자신을 보전할 계책을 세운 것을 경계로 삼았다. 이것이 번번이 시의(時議)와 어긋나서 유난히 간당(奸黨)들에게 질시를 받게 된 이유인 것이다. 아아! 유양(劉梁)의 죽음에 대해 천하가 슬퍼하였고, 여채(呂蔡)의 화(禍)에 대해 지금까지 그 억울함을 송변(訟辯)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용사자(用事者)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면 제공(諸公)의 죽음은 영광이요, 욕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지금 선모(宣母)께서 무함을 받았고, 성사(聖姒)께서 폐모(廢母)의 욕을 당하였으며, 양현(兩賢)이 성무(聖廡)에서 출향(黜享)당한 이러한 때에 있게 된 공의 죽음은 도리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주자(朱子)가 임종(臨終)할 적에 제생(諸生)들에게 진결(眞訣)을 주기를, '천지(天地)가 만물(萬物)을 생육하고, 성인(聖人)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은 정직(正直)일 뿐이다.' 하였고, 다음날 또 말하기를, '도리(道理)는 이러할 뿐이니, 마땅히 뼈에 새겨 굳게 지켜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맹(孔孟)이 이른바, '인생이 태어난 것은 직도(直道)에 의한 것이니 직도로 길러야 한다.' 한 정법(正法)이 아니겠는가? 공의 일생의 언행(言行)이 사리(事理)에 어긋나는 것이 없었던 것은 여기에서 체득(體得)한 것이 아니겠는가? 분명 여기에서 체득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송시열의 절필(絶筆)이다. 송시열이 김수항을 제일 중히 여겼고 사림(士林)의 종주(宗主)로 추대했기 때문에, 임명(臨命)할 적에 그를 위하여 표장(表章)한 것이 이와 같았다. 김수항이 졸(卒)한 때의 나이는 61세였다. 뒤에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사제(賜祭)하였다.
숙종실록 링크
세 조정 욕된 벼슬 무슨 도움 주겠는가? / 한 번 죽음 옛부터 당연한 일인 것을
임금 사랑하는 일편 단심만은 / 구천에서 귀신을 보내어 알리리.
하였는데, 이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슬퍼해 마지않았다. 김수항은 선정(先正)의 가문(家門)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유훈(遺訓)을 이어받아 행실과 마음이 단아하고 간결하여 내외(內外)가 수연(粹然)히 완비되었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괴과(魁科)로 발탁되었고, 나이 40이 넘어서는 이미 태정(台鼎)의 지위에 올랐으며, 문학(文學)과 언론(言論)은 진신(搢紳)들의 영수(領袖)였다. 외모가 빼어났고 걸음걸이가 안중(安重)하여 조회(朝會) 때마다 기상(氣象)이 엄연(儼然)하였으므로 온 조정이 눈길을 모았다. 그리하여 현묘(顯廟)의 고명(顧命)을 받아 사왕(嗣王)을 보좌했는데, 허적(許積)의 무리가 용사(用事)할 때 온갖 비방이 잇따라 일어나 스스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고 극력 떠나가겠다고 요구하였으나, 임금이 오히려 허락하지 않았다. 이어 상소를 올려 윤휴(尹鑴)와 홍우원(洪宇遠)에 대해 말하다가 말이 자성(慈聖)에게 핍박되었다는 죄로 드디어 남쪽 지방으로 귀양갔다.
경신년 개기(改紀) 때 영의정으로 국정(國政)을 맡았다가 정묘년에 비로소 자리를 내어놓게 되었다. 이는 장희재(張希載)와 이항(李杭)에게 이미 궁액(宮掖)의 세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중궁(中宮)이 폐위(廢位)되어 사제(私第)에 거처하게 되어 있었고, 또 허적(許積)의 여당(餘黨)에게 무함을 받아 참화(慘禍)를 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진퇴 시종(進退始終)의 대치(大致)를 살펴보면 세도(世道)의 승강(昇降)을 알 수 있음은 물론, 또한 그가 일대(一代)의 명신(名臣)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김수항이 전후 10여 년 동안 국정을 맡았었는데, 그의 재모(才謀)는 혹 미진한 점이 있었지만, 요컨대 지닌 뜻이 정대(正大)하고 나라 위해 몸바치는 정충(貞忠)이 있어 심사(心事)가 푸른 하늘의 흰구름처럼 일호도 숨기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근세(近世)의 명공(名公)들을 두루 헤아려 보아도 김수항에 비견될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들 하였다.
논자(論者)들은, 김수항이 조정에 벼슬하면서 세 가지 대절(大節)을 수립하였다고 했다. 장채(章蔡)의 역모(逆謀)를 미리 꺾어 이륜(彛倫)을 부지(扶持)시킨 것이 그 하나이고, 군소배들이 멋대로 이론(異論)을 제기하여 흉당(凶黨)에 아첨할 적에 홀로 정도(正道)를 지켜 화를 당해도 뉘우치지 않은 것이 둘이고,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한 것을 통렬히 배척하여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사문(斯文)이 힘입을 데가 있게 한 것이 셋이다. 큰 것이 이러하니 세세한 것은 생략해도 된다. 송시열이 김수항의 장사(葬事) 때 지은 지문(誌文)에 말하기를,
"공(公)은 노선생(老先生)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는데[32], 기관(機關)을 농락(籠絡)하는 것은 심술(心術)이 부정한 것이고, 피차(彼此)를 조정(調整)하는 것은 사위(事爲)에 매우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는 주 부자(朱夫子)가 일찍이 '송 원헌(宋元憲)이 농락한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고, 건중 정국(建中靖國)때의 조정(調整)은 혼란을 유치(誘致)시키는 방법이었다.' 한 데서 유래된 생각이었는데, 공의 가법(家法)의 연원(淵源)이 본래 이러하였다. 항상 하늘이 사마공(司馬公)으로 하여금 송(宋)나라의 국운(國運)을 돕게 하였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마음을 지녔고, 범 충선(范忠宣)이 은밀히 뒷날 자신을 보전할 계책을 세운 것을 경계로 삼았다. 이것이 번번이 시의(時議)와 어긋나서 유난히 간당(奸黨)들에게 질시를 받게 된 이유인 것이다. 아아! 유양(劉梁)의 죽음에 대해 천하가 슬퍼하였고, 여채(呂蔡)의 화(禍)에 대해 지금까지 그 억울함을 송변(訟辯)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용사자(用事者)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을 안다면 제공(諸公)의 죽음은 영광이요, 욕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지금 선모(宣母)께서 무함을 받았고, 성사(聖姒)께서 폐모(廢母)의 욕을 당하였으며, 양현(兩賢)이 성무(聖廡)에서 출향(黜享)당한 이러한 때에 있게 된 공의 죽음은 도리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주자(朱子)가 임종(臨終)할 적에 제생(諸生)들에게 진결(眞訣)을 주기를, '천지(天地)가 만물(萬物)을 생육하고, 성인(聖人)이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은 정직(正直)일 뿐이다.' 하였고, 다음날 또 말하기를, '도리(道理)는 이러할 뿐이니, 마땅히 뼈에 새겨 굳게 지켜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공맹(孔孟)이 이른바, '인생이 태어난 것은 직도(直道)에 의한 것이니 직도로 길러야 한다.' 한 정법(正法)이 아니겠는가? 공의 일생의 언행(言行)이 사리(事理)에 어긋나는 것이 없었던 것은 여기에서 체득(體得)한 것이 아니겠는가? 분명 여기에서 체득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송시열의 절필(絶筆)이다. 송시열이 김수항을 제일 중히 여겼고 사림(士林)의 종주(宗主)로 추대했기 때문에, 임명(臨命)할 적에 그를 위하여 표장(表章)한 것이 이와 같았다. 김수항이 졸(卒)한 때의 나이는 61세였다. 뒤에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사제(賜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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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前)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을 죽였다. 경재(卿宰)인 민암(閔黯) 등의 말에 따라 영암(靈巖)의 귀양지에서 사사(賜死)된 것이다. 김수항은 현상(賢相)의 손자로서 젊은 나이에 태사(台司)에 올랐고 풍의(風儀)가 단아하고 정중하였으며 지조와 품행이 조용한 가운데 함축성이 있었다. 문사(文辭)에 능하였는데 유술(儒術)로 수식하였다. 갑인년에는 고명(顧命)을 받아 국가의 종신(宗臣)이 되었고 정사년에는 직언(直言)을 했다가 죄를 받았으므로 사류(士流)가 더욱 흠모하였다. 경신년에 요직(要職)에 앉아 역적 허견(許堅)을 다스릴 적에 연좌(連坐)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거듭 그 당여(黨與)에게 원수로 여겨지게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시배(時輩)들이 마음껏 보복하게 된 것이다. 이미 해도(海島)에 귀양보내어 위리(圍籬)시키고 나서 또 합사(合辭)의 논계(論啓)와 경재(卿宰)의 상소가 있어 기필코 죽이고야 말았는데, 그의 죄명(罪名)은 꾸며 만든 것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들 억울하게 여겼다. 김수항은 스스로 강방(剛方)함을 자임(自任)했지만 국량(局量)이 작았기 때문에 괴팍한 데 가까웠고, 스스로 견확(堅確)함을 허여(許與)했지만 사심(私心)이 성했기 때문에 전횡(專橫)에 가까웠다. 스스로 세도(世道)를 담당한다고 했지만 도리어 훈척(勳戚)들에게 부림을 당했고, 스스로 사문(斯文)을 호위한다고 일컬었지만 부억(扶抑)에 중도(中道)를 잃음을 면치 못하는 등 실제로 사무(事務)에 통달하는 능력이 모자랐다. 그리하여 재처(裁處)하는 모든 것이 매양 피상적이었으므로 8년 동안 국정(國政)을 담당하고 있었으면서 일컬을 만한 선정(善政)이 없었다.
경신년 오시수(吳始壽)의 죽음과, 임술년 전익대(全翊戴)의 옥사(獄事)는 크게 공평성을 잃은 처사였으며, 은밀히 밀고(密告)를 주장하였으므로 이미 청류(淸流)에게 배척당하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송시열(宋時烈)에게 마음을 바쳐 그의 말이면 어기는 것이 없었으며, 오로지 이것으로 가계(家計)를 삼아 거의 옳다는 것은 있어도 그르다는 것은 없었다. 갑자년 경연(經筵)에서 사적인 일을 아뢰어 조정(朝廷)에까지 올린 다음 자신의 사견(私見)만을 주장하고 공의(公議)를 거스림으로써 드디어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분열시키고 조정을 불리하게 하여 15 년간의 흑백(黑白)의 논전(論戰)의 꼬투리를 열어놓았으니, 화수(禍首)를 소급하여 논한다면 절로 귀착(歸着)되는 데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관(高官)을 지내어 문벌이 정성(鼎盛)한데 총리(寵利)에 대한 경계에 어두웠고, 겸익(謙益)에 대한 훈계를 소홀히 한 탓으로 부녀(婦女)의 사치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군자(君子)들이 진실로 그가 자신의 죄가 아닌 것으로 화(禍)를 당한 것을 마음 아파했지만, 또 일면으로는 화를 자취(自取)하게 된 이유가 없지 않다고 하였다. 처음 사초(史草)를 편수한 사람이 세 가지 대절(大節)로 그를 허여한 것은 그 또한 여탈(與奪)에 공정성을 잃은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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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년 오시수(吳始壽)의 죽음과, 임술년 전익대(全翊戴)의 옥사(獄事)는 크게 공평성을 잃은 처사였으며, 은밀히 밀고(密告)를 주장하였으므로 이미 청류(淸流)에게 배척당하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송시열(宋時烈)에게 마음을 바쳐 그의 말이면 어기는 것이 없었으며, 오로지 이것으로 가계(家計)를 삼아 거의 옳다는 것은 있어도 그르다는 것은 없었다. 갑자년 경연(經筵)에서 사적인 일을 아뢰어 조정(朝廷)에까지 올린 다음 자신의 사견(私見)만을 주장하고 공의(公議)를 거스림으로써 드디어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분열시키고 조정을 불리하게 하여 15 년간의 흑백(黑白)의 논전(論戰)의 꼬투리를 열어놓았으니, 화수(禍首)를 소급하여 논한다면 절로 귀착(歸着)되는 데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관(高官)을 지내어 문벌이 정성(鼎盛)한데 총리(寵利)에 대한 경계에 어두웠고, 겸익(謙益)에 대한 훈계를 소홀히 한 탓으로 부녀(婦女)의 사치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군자(君子)들이 진실로 그가 자신의 죄가 아닌 것으로 화(禍)를 당한 것을 마음 아파했지만, 또 일면으로는 화를 자취(自取)하게 된 이유가 없지 않다고 하였다. 처음 사초(史草)를 편수한 사람이 세 가지 대절(大節)로 그를 허여한 것은 그 또한 여탈(與奪)에 공정성을 잃은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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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은 김창협이 작성하였고, 전기문 수준으로 대단히 길다.행장 上행장 下
1694년 갑술환국 이후 복권되었다. 사후 10년이 지나 1699년 김창협의 교정, 정리를 거쳐 강화유수로 있던 김창집이 김수항의 문집 '문곡집(文谷集)'을 간행하였다. 김수항의 유언에 따라 준비하였고, 지은 시의 10분의 6, 문장의 절반을 선택하여 수록하였다. 그 결과 시 1030수, 문장 477편이 실리게 된다. 당대의 문장가인 김창협이 편집하여 편제와 구성이 완벽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33] 문곡집은 우리말로 모두 번역되어 있다.문곡집
3. 유계(遺戒)[34]
나의 직위는 삼사(三事 삼정승)에 올랐고, 나이가 육순을 넘겼다. 왕명을 받아 죽어도 다시 한탄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다만 한스러운 것이 있으니, 세 조정에 걸쳐 망극한 은혜를 입었으면서 털끝만큼도 갚지 못한 채, 마침내 큰 죄에 빠져 충성하고자 했던 뜻을 홀로 저버리게 된 일이다. 이것이 첫 번째 한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배움에 뜻을 두어 의리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었으며, 늙어서도 또한 이 뜻을 감히 잊지 못하였다. 그런데 용렬하고 나약해서 대충 그럭저럭 하는 옛 버릇에 빠져 하루도 그 힘을 실제 써 보질 못하고, 마침내 이렇다 할 명성도 없이 죽게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한이다.
내가 비록 벼슬길에 일찍 나왔지만, 사실 벼슬에 대한 뜻은 거의 없었다. 성품이 또한 산수를 좋아하여 매번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한 곳으로 가 고요한 물가에서 노년을 보내려고 생각하였다. 일찍이 백운산(白雲山) 속에 초가집을 지어 실로 여기에 뜻을 두었지만, 속세의 굴레에 매여 마침내 귀자연(歸自然)을 이루지도 못했다. 이것이 세 번째 한이다. 이는 너희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일이기에 써서 보여 주노라.
나는 마침 위태롭고 힘든 날을 만나 오랫동안 차지해서는 아니 되는 높은 지위를 외람되이 차지하였고, 세상을 널리 구제할 책무는 본래 감당할 일이 아니었으니, 관직과 나라를 병들게 한 죄는 참으로 이루 다 용서받지 못하리라.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는 일념만큼은 귀신에게 스스로 물어볼 수 있지만, 오늘에 이르러 구구한 이 마음을 또한 스스로 밝힐 수 없으니, 다만 후세의 양자운(揚子雲)이 알아 주길 바랄 따름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에, 일찍이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유계(遺戒)를 남기셨다. 변변치 못한 내가 진실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만분의 일도 못 따라가고, 더구나 지금 임금님께 죄를 받아 선조의 덕(德)을 욕되게 했으니, 아무런 일이 없었던 사람처럼 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상례와 제례의 모든 일은 검약을 힘껏 준수하여 조금이라도 분수에 넘치지 않게 해서 나의 이 뜻을 따르도록 하거라.
우리 집안의 상례와 제례는 옛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 자못 많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매번 선세(先世)부터 행해진 지 벌써 오래되었으니 뜻에 따라 가볍게 고치기가 어렵다며 가르치셨다. 그렇지만 또한 그 가운데에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면, 후손들이 헤아려서 고칠 수 있다는 가르침도 일찍이 남기셨다. 모든 일이란 오래되면 변해야 하는 법이니, 하나같이 고집스레 지킬 수는 없다. 지금 내가 죽으면 상례와 제례의 여러 가지 예법은, 고금이 다르거나 재력이 미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따라서 시행하라.
묘역의 석물을 지나치게 사치하고 크게 만들어 폐습을 따르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다. 그리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신도비 역시 치명(治命 죽기 전 정신이 맑을 때 내린 유명(遺命))에 의해 세울 수가 없었으니, 이제 내 묘에는 단지 짧은 묘표(墓表)만 세워라. 또한 지석(誌石)을 묻을 때에는 세계(世系)와 생몰연대, 이력만을 간략히 기술해서 장황한 문자로 남에게 비웃음을 사지 않도록 하라.
나는 본래 재주와 덕이 없는데, 한갓 조상의 음덕을 빙자해서 나라의 은혜를 두텁게 입었고, 자리를 훔친 게 분수에 지나쳐 스스로 화를 재촉했다. 오늘의 일은 관직이 융성했음에도 그만두질 못하고, 물러나려 하다가 물러나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비록 후회해 본들 어쩔 수가 없다. 자손들은 마땅히 나를 경계로 삼아 항상 겸퇴(謙退)의 마음을 지녀라. 벼슬길에서는 현요(顯要)[35]의 직책을 피하고 멀리하며, 집에서는 공검(恭儉)을 힘써 행하라. 교유를 삼가고 의론을 간략히 하도록 함에 이르러서는, 선세(先世)의 남긴 법도를 하나같이 따르면서 자신을 바르게 하고 가문을 지키는 터전으로 삼는 것이 지극히 좋을 것이다. 여러 손자들의 이름을 지금 '겸(謙)' 자로 명명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36]
옛사람이 이르기를 독서 종자를 끊어지게 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여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힘을 기울여, 마침내 충효와 문헌의 전승을 잃지 말아야 한다. 문호를 유지하는 일이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기사년(1689, 숙종15) 4월 초이렛날 문곡 노인은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에게 써 주니, 여러 손자들이 성장하거든 또한 이 종이를 전해서 보여 주도록 하라.문곡집 26권
내가 어려서부터 배움에 뜻을 두어 의리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었으며, 늙어서도 또한 이 뜻을 감히 잊지 못하였다. 그런데 용렬하고 나약해서 대충 그럭저럭 하는 옛 버릇에 빠져 하루도 그 힘을 실제 써 보질 못하고, 마침내 이렇다 할 명성도 없이 죽게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한이다.
내가 비록 벼슬길에 일찍 나왔지만, 사실 벼슬에 대한 뜻은 거의 없었다. 성품이 또한 산수를 좋아하여 매번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한 곳으로 가 고요한 물가에서 노년을 보내려고 생각하였다. 일찍이 백운산(白雲山) 속에 초가집을 지어 실로 여기에 뜻을 두었지만, 속세의 굴레에 매여 마침내 귀자연(歸自然)을 이루지도 못했다. 이것이 세 번째 한이다. 이는 너희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일이기에 써서 보여 주노라.
나는 마침 위태롭고 힘든 날을 만나 오랫동안 차지해서는 아니 되는 높은 지위를 외람되이 차지하였고, 세상을 널리 구제할 책무는 본래 감당할 일이 아니었으니, 관직과 나라를 병들게 한 죄는 참으로 이루 다 용서받지 못하리라.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는 일념만큼은 귀신에게 스스로 물어볼 수 있지만, 오늘에 이르러 구구한 이 마음을 또한 스스로 밝힐 수 없으니, 다만 후세의 양자운(揚子雲)이 알아 주길 바랄 따름이다.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에, 일찍이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유계(遺戒)를 남기셨다. 변변치 못한 내가 진실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만분의 일도 못 따라가고, 더구나 지금 임금님께 죄를 받아 선조의 덕(德)을 욕되게 했으니, 아무런 일이 없었던 사람처럼 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상례와 제례의 모든 일은 검약을 힘껏 준수하여 조금이라도 분수에 넘치지 않게 해서 나의 이 뜻을 따르도록 하거라.
우리 집안의 상례와 제례는 옛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 자못 많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매번 선세(先世)부터 행해진 지 벌써 오래되었으니 뜻에 따라 가볍게 고치기가 어렵다며 가르치셨다. 그렇지만 또한 그 가운데에 고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면, 후손들이 헤아려서 고칠 수 있다는 가르침도 일찍이 남기셨다. 모든 일이란 오래되면 변해야 하는 법이니, 하나같이 고집스레 지킬 수는 없다. 지금 내가 죽으면 상례와 제례의 여러 가지 예법은, 고금이 다르거나 재력이 미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상례비요(喪禮備要)》를 따라서 시행하라.
묘역의 석물을 지나치게 사치하고 크게 만들어 폐습을 따르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다. 그리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신도비 역시 치명(治命 죽기 전 정신이 맑을 때 내린 유명(遺命))에 의해 세울 수가 없었으니, 이제 내 묘에는 단지 짧은 묘표(墓表)만 세워라. 또한 지석(誌石)을 묻을 때에는 세계(世系)와 생몰연대, 이력만을 간략히 기술해서 장황한 문자로 남에게 비웃음을 사지 않도록 하라.
나는 본래 재주와 덕이 없는데, 한갓 조상의 음덕을 빙자해서 나라의 은혜를 두텁게 입었고, 자리를 훔친 게 분수에 지나쳐 스스로 화를 재촉했다. 오늘의 일은 관직이 융성했음에도 그만두질 못하고, 물러나려 하다가 물러나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비록 후회해 본들 어쩔 수가 없다. 자손들은 마땅히 나를 경계로 삼아 항상 겸퇴(謙退)의 마음을 지녀라. 벼슬길에서는 현요(顯要)[35]의 직책을 피하고 멀리하며, 집에서는 공검(恭儉)을 힘써 행하라. 교유를 삼가고 의론을 간략히 하도록 함에 이르러서는, 선세(先世)의 남긴 법도를 하나같이 따르면서 자신을 바르게 하고 가문을 지키는 터전으로 삼는 것이 지극히 좋을 것이다. 여러 손자들의 이름을 지금 '겸(謙)' 자로 명명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36]
옛사람이 이르기를 독서 종자를 끊어지게 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여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힘을 기울여, 마침내 충효와 문헌의 전승을 잃지 말아야 한다. 문호를 유지하는 일이 반드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기사년(1689, 숙종15) 4월 초이렛날 문곡 노인은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에게 써 주니, 여러 손자들이 성장하거든 또한 이 종이를 전해서 보여 주도록 하라.문곡집 26권
유계를 받들어 김창집을 제외한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37] 그러나 김창집은 현요의 자리에 올라갔고 좋지 못한 최후를 맞았다.
4. 가족 관계 및 후손
- 양조부: 김상헌(金尙憲, 1570 ~ 1652)
- 친조부: 김상관(金尙寬, 1566 ~ 1621)[38]
- 부: 김광찬(金光燦, 1597 ~ 1668)[39]
- 모: 연안 김씨[40]
- 형: 김수증(金壽增, 1624 ~ 1701)[41]
- 형: 김수흥(金壽興, 1626 ~ 1690)[42]
- 부인: 안정 나씨, 나성두의 딸. 나만갑의 손녀
- 장남: 김창집(金昌集, 1648 ~ 1722)[43]
- 손자: 김제겸(金濟謙, 1680 ~ 1722)[44]
- 증손자: 김성행(金省行, 1696 ~ 1722) [45]
- 현손자: 김이장(金履長, 1718 ~ 1774)[46]
- 증손자: 김달행(金達行, 1706 ~ 1738)[50]
- 현손자: 김이기(金履基, 1724 ~ 1790)[51]
- 내손자: 김용순(金龍淳, 1754 ~ 1823)[52]
- 현손자: 김이중(金履中, 1736 ~ 1793)[53]
- 내손자: 김조순(金祖淳, 1765 ~ 1832)
- 현손자: 김이경(金履慶, 1738 ~ 1816)
- 내손자: 김명순(金明淳, 1759 ~ 1810)[54]
- 증손자: 김탄행(金坦行, 1714 ~ 1774)[55]
- 손자: 김호겸(金好謙, 1681 ~ 1699)[61]
- 차남: 김창협(金昌協, 1651 ~ 1708)
- 손자: 김숭겸(金崇謙, 1682 ~ 1700)[62]
- 삼남: 김창흡(金昌翕, 1653 ~ 1722)
- 손자: 김양겸(金養謙, 1675 ~ 1728)
- 증손자: 김범행(金範行, 1706 ~ 1764)
- 손자: 김치겸(金致謙, 1677 ~ 1747)[70]
- 증손자: 김문행(金文行, 1701 ~ 1754)[71]
- 손자: 김후겸(金厚謙, 1687 ~ 1727)[72]
- 사남: 김창업(金昌業, 1658 ~ 1721)
- 손자: 김우겸(金祐謙, 1676 ~ 1709)
- 증손자: 김유행(金由行, 1706 ~ 1760)
- 현손자: 김이익(金履翼, 1743 ~ 1830)[76]
- 손자: 김언겸(金彦謙, 1686 ~ 1738)
- 증손자: 김제행(金悌行, 1724 ~ 1787)[77]
- 손자: 김신겸(金信謙, 1693 ~ 1738)[78]
- 증손자: 김양행(金亮行, 1715 ~ 1779)[79]
- 손자: 김윤겸(金允謙, 1711 ~ 1775)[82]
- 증손자: 김용행(金龍行, 1753 ~ 1838)[83]
- 손녀[84]
- 오남: 김창즙(金昌楫, 1662 ~ 1713)
- 육남: 김창립(金昌立, 1666 ~ 1683)[87]
김수항의 여섯 아들인 육창의 재능으로 안동 김씨는 힘을 불려 나갔다. 특히 김수항의 차남과 삼남인 김창협, 김창흡을 필두로 사남 김창업, 오남 김창즙이 힘을 보탠 학문과 시문에서 안동 김씨의 위상은 김신겸, 김용겸, 김원행, 김양행, 김이안, 김매순으로 이어져 나갔으며, 정승을 역임한 장남 김창집과 김이소, 김달순 그리고 김조순과 그의 후예들의 세도정치로 이어지며 정계에서도 정점을 찍었다.
정조는 1785년 일득록에서 육창을 포함한 안동 김씨 집안을 이렇게 평가했던 바 있다.[88]
“淸陰 金尙憲의 바른 道學과 높은 節義는 우리나라에서 존경할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도 敬服하는 바이니, 문장은 나머지의 일일 따름이다. 내가 그를 말할 때에 故相이라고 하지 않고 先正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날 致祭文에서 '그의 문장은 韓愈와 曾鞏이요, 그의 학문은 濂洛이라'고 한 것은 道學과 文章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동해의 물과 西山의 고사리, 잔 들어 제향하니 맑은 모습 이와 같도다'라고 한 것은 節義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仙源文集 이 비록 몇 편에 지나지 않지만 형제(김상용・김상헌)의 雙節은 옛날에도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文谷(김수항)이 조부에게 부끄럽지 않고, 退憂(김수흥)가 자기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으며, 夢窩(김창집)의 忠節과 農淵(김창협・김창흡)의 經術文章에다, 老圃澤(김창업・김창즙・김창립)이 나란히 훌륭한 명성을 날렸으니, 참으로 전후에 드문 名閥이다.”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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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정공파 17세손.(족보)[2] 김제남의 장남으로 인목왕후의 오빠.[3] 나성두(羅星斗)의 딸로, 나만갑의 손녀.[4] 나머지 인물들은 정태화, 김좌명, 김만기이다.[5] 김광찬은 본디 김상헌의 둘째 형 김상관의 둘째 아들인데 작은 아버지 김상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김상헌이 병자호란 당시 자결 시도 할 때 함께 있던 아들이 바로 김광찬이다.[6] 김수항은 송시열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렇지 않다. 가까운 관계를 유지함으로 인한 오해이다. 송시열은 1645년 석실에 은거한 김상헌을 방문하여 친분을 갖게 된다. 김상헌이 지닌 이념적 상징을 서인의 명분론으로 가져오려 노력한다. 김상헌을 도학의 전범으로 부각시켰고, 율곡의 비문을 저술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김상헌을 율곡의 학맥에 연결한다. 그리고 그를 도학적 원칙을 체화한 인물로 부각한다. 김상헌 사후 송시열과 안동 김씨와의 관계는 확대되며 효종의 북벌 대의와 김상헌, 그의 후손인 김수증 형제에게 책임 의식을 기대한다. 자신의 저작인 '주자대전차의'에 김수증 형제의 견해를 반영하였고, 자신의 사후 '주자대전차의' 등의 교정을 김창협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 참조: 이경구, 조선후기 安東 金門의 의리 실현과 정치 활동[7] 김창협이 작성한 문곡집 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군은 어려서 할아버지 문정공(文正公) 청음(淸陰) 선생(=김상헌)에게서 배웠는데, 문정공은 매번 부군의 글을 칭찬하면서 주제를 잘 표현했다고 말씀하였다.'[8] 김수항의 묘지명은 송시열이 제주 유배 당시 작성하였고, 그 내용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공은 가정의 학업을 받았고...'. 본인의 제자나 문인이라면 이런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9] 아래의 네 남동생들은 아버지 김광찬의 후처인 청주 한씨의 아들이다. 연안 김씨 소생인 김수증, 김수흥, 김수항은 뛰어난 재능으로 삼수(3수)로 불렸다. 가족 관계가 좀 복잡한 것이 김수항의 모친 연안 김씨는 인목왕후의 아버지인 김제남의 손녀이다. 그런데 김제남이 1613년 계축옥사 때 광해군에 의해 외손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했다는 혐의로 역적이 되어, 3명의 아들과 함께 사사당하면서 그 손녀인 연안 김씨 또한 남편 김광찬과 강제로 이혼을 당한다. 이후 김광찬은 청주 한씨를 후처로 맞았는데 인조반정 이후 김제남이 복권되자 전처인 연안 김씨가 정실로 복귀하면서, 후처 청주 한씨는 졸지에 첩이 되어버렸고 그녀가 김광찬과의 사이에서 낳은 4남 1녀들도 모두 서자녀들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김제남 일가가 사사당한 게 1613년이고 김수항이 태어난 게 1629년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나고도, 6년이 지난 후인데 연안 김씨가 자기 할아버지 때문에 이혼을 당했다는 건 시간관계상 전혀 맞지 않다. 애초에 김광찬의 양첩은 이름도 출신도 미상으로 나온다.[10] 어쨌든 김수항의 이복형제들인 김수징, 김수응, 김수칭, 김수능 중 수징과 수응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수능은 문과 급제자이다. - 출처; 안승준, 朝鮮後期 서울 名門家의 家計經營―京都大學 河合文庫 소장 안동김씨 金壽增 남매 분재기 분석―, 2019[11] 김수증은 1650년 생원시 합격을 하였으며 대과는 급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명문가의 장남이었지만 동생들처럼 고위직을 역임하지는 못했다. 안악군수, 회양부사, 청풍부사 등 지방직을 주로 역임했다.[12] 김수흥은 1655년 문과 급제. 김수항은 형보다도 빠른 1651년에 문과 급제 하였다.[13] 지금의 서울특별시[14] 이미 외할아버지 김내와 외증조부 김제남은 김수항이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사망했다.[15] 그러나 그 해 겨울 김상헌은 심양으로 압송되었다가 1645년 2월에야 귀환할 수 있었다.[16] 김상용, 김상헌 형제와 나만갑의 친분이 작용했을 것이다.[17] 처삼촌인 나성원(장인 나성두의 동생)과 친하여 혼인 후 5년 동안 늘 함께 지냈다.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으나, 나성원은 1649년 5월에 요절하고 만다. 김수항은 나성원을 그리는 제문과 시를 몇 편 남겼다. 제문 링크- 유영봉, 文谷 金壽恒의 詩文에 깃든 家族史 참조[18] 어린 나이에 장원 급제하며 스스로 절제하며 이후 몇 년간 과거장에 나가지 않고 공부에 더 매진하였다.[19] 당시 시험관이었던 이경여가 김상헌에게 편지를 보냈다. '외람되이 과장의 시관(試官) 노릇을 하여 훌륭한 인재를 얻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경여는 병자호란 이후 김상헌, 최명길과 함께 청의 심양에 억류된 경험이 있는 중신이다. 이경여의 아들 이민서는 이들의 후손인 김수항, 최석정과 친했다. 이민서의 딸과 김수항의 막내 아들 김창립이 혼인하여 사돈이 된다.[20] 2년 후 사돈이 되는 벗 이단상의 큰 형인 이일상의 후임이다.[21] 이조판서 김수항, 이조참판 민정중, 이조좌랑 이민서[22] 시험관[23] 함경도 백성들의 조세 부담과 공물 납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방치되고 있던 육진(六鎭)의 경영. 함경도 인재 등용, 대신에게 함경도 일을 전담하게 하자는 건의.[24] 당시 김수항의 상소를 접한 이경석은 부친 김광찬에게 그가 재상의 재주를 갖추었다고 칭찬하기도 했다.[25] 훗날 회니시비의 발단을 일으킨 최신(崔愼)은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김기홍과 함께 함경도 문인을 대표한다. 최신은 민정중과 이단하에게 배웠고, 송시열을 소개 받아 그의 문인이 되고 중앙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26] 이 상소는 서인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고, 송시열은 김수항을 위해 시까지 썼다.[27] 5월 20일 윤휴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송시열은 더욱 강력한 남인의 처벌을 원했다. 하지만 '허견을 잘못 죽였다.'는 말이 나오고 김익훈이 탄핵당하는 상황이 오자 당시 서인을 조정에서 이끄는 대신인 김수항과 민정중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처벌 수위에 대한 송시열과 김수항의 이견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28] 숙의 간선 당시 김수항은 자신의 친족이기에 자신은 간선의 직책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 아뢰었다.[29]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신의 생각으로서는 후궁(後宮)으로서 가까이 사랑할 사람이 간혹 있을 수도 있겠으나 진실로 관어(貫魚, 궁인들의 순서)를 순서대로 할 수 있게 하여 종사(螽斯)의 경사가 있게 하고 미색(美色)에 마음이 현혹될 근심과 치우치게 사랑에 빠져 은총을 열어 준다는 비난을 없게 한다면, 이것이 성덕(聖德)에 무슨 결점이 되겠기에 반드시 그 일을 숨겨야 하겠습니까?', 장씨는 가까이해야 할 순서가 뒤라는 이야기이다. 실록 링크[30] 숙종은 새겨 듣겠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앙금을 가지게 되어 김수항에게도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되었다는 세간의 소문도 돌았다.[31] 남인도 사무친게 있었는지 김수항은 김안로와 정인홍보다 더하다며 그의 사사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근데 흥미로운 것은 김수항은 허적의 사사를 반대했는데도 탁남 역시 김수항을 사사할 것을 주청했다.[32] 송시열 본인은 김수항이 자신의 제자라고 한 번도 한 적 없다.[33] 참고: 김순희, 문곡집의 서지학적 고찰[34] 부친이 남긴 유서. 아들들에게 김수항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35] 현관(=높은 벼슬)과 요직[36] 김수항의 손자들은 이름이 '김x겸'이다.반면, 김상용의 후손인 선원파의 경우, '겸'에 해당되는 항렬자는 '시(時)'이다.[37] 김창립은 부친 김수항보다 먼저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38] 김극효(金克孝)의 차남으로 김상용의 동생, 김상헌의 둘째 형이다. 음보로 관직에 올라 회양부사, 판관, 장단부사를 지냈다. 후손의 번성으로 이조참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39] 본디 김상관의 차남이다. 친형 김광혁(金光爀, 1590 ~ 1643)은 1624년(인조 2년) 문과 급제 후 광주목사, 동부승지를 역임했다. 친자가 없어 김광찬의 차남인 김수흥이 양자로 입적되어 뒤를 이었다. 김광찬은 광해군 시기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1627년 (인조 5년) 생원시에 합격한다.이후 음보로 관직에 진출했다. 1655년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대궐 출입을 하게 되었고, 1658년 파주목사, 1662년 다시 첨지중추부사와 공조 참의가 되었다. 1668년 김수흥, 김수항이 모두 판서를 역임하고 있었는데, 현종의 지시로 1품계를 더 올려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병자호란 시기 김상헌의 자결 시도를 만류하지 못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 김상헌이 심양에 끌려가 있을 때 양모가 사망하였을 때 극진한 효성을 보였다고 하며, 나만갑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모보(某甫)처럼 양자가 되어 상을 치르면서 그 슬픔을 다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라고 했다한다.김수항이 쓴 행장실록 졸기 링크[40]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의 친손녀로 인목왕후의 조카이다.[41] 호는 곡운(谷雲)이다. 당쟁에 관여하기보다는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형조정랑, 회양부사 등을 역임했다. 김상용, 김상헌의 문예 의식을 전수 받아 금석서예에 조문이 깊었고, 조선 예서의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전대의 예서풍을 전수 받아 본인의 필법인 곡운체를 창안하여 후대에 전수한다. 예서의 맥을 전수하며 노론계의 서체로 굳어지게 되며, 훗날 예서의 절정기에 추사에 의해 추사체가 탄생하게 된다. 산수를 좋아하여 많은 유기를 남겼다. 강원도 화천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짓고 만년에는 은거하였다. 본인도 곡운 일대를 경영하는 계획과 과정을 글로 남겼으며, 화가 조세걸(김명국의 제자)이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를 그리고 아들과 조카들의 글을 받아 곡운구곡도첩을 만들었다. 이 기록들로 현대에도 지속적으로 연구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대부의 주거, 생활공간에 대한 기록 및 삶과 문학과의 연관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훗날 기사환국으로 풍비박산이 난 가문을 지탱해낸다. 무너질 수 있던 조카들의 마음을 다잡아준 것이 백부 김수증이다. 김수항은 사사가 결정된 후 큰 형에게 편지를 남겨 아이들을 지휘하고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하였다.김수항의 서한 아들은 김창국, 김창숙, 김창직이 있고, 딸이 어유봉과 혼인하였다. 김창국의 딸은 영빈 김씨이다. 자신의 예술 전통이 자손을 통해 전해지기를 바랐으나, 뛰어났던 둘째 아들 김창숙(金昌肅, 1651 ~ 1673)이 일찍 사망하였고(동갑이지만 생일이 빨라 김창숙이 형이라 부른 절친했던 김창협이 훗날 묘지명에서 '만일 조금 더 살았더라면 아마도 구양영숙(歐陽永叔)이나 조명성(趙明誠, 남송의 금석학자, 시인.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의 남편이기도 하다)처럼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김창협이 쓴 묘지명, 영민함을 보였던 손자 김오일(金五一, 1675 ~ 1682, 셋째 아들 김창직의 아들)에게도 큰 기대를 걸었으나 8세에 사망하였다. 셋째 김창직(金昌直, 1653 ~ 1702)은 1686년 문과 급제 후 지평까지 올랐다. 조카 김창집의 아들인 김호겸(金好謙, 1681 ~ 1699)을 김창숙의 후사로 삼아 소장한 도서, 그림, 김창숙의 유묵을 물려주어 문예 전통을 계승하려 하였으나 그 또한 일찍 사망했다. 결국 그의 계승은 실질적으로 조카 김창협과 김창흡(특히 김창흡의 둘째 아들 김치겸이 김수증의 장남 김창국의 아들로 입적하게 되어 김수증을 잇게 된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김창흡이 백부의 시문을 정리하고 편집하여 서문을 썼고, 김수증의 생질인 이의현(李宜顯, 1669 ~ 1745, 김창협의 제자이며 훗날 영의정까지 역임)이 경상도 관찰사일 때 1711년 문집 '곡운집(谷雲集)'을 간행한다. 실록의 졸기는 링크 참조. - 출처: 이효숙, 기사환국의 트라우마와 그 치유 양상 - 장동 김문을 중심으로 + 안대회, 조선후기 士大夫의 집과 삶과 기록 + 이종호, 金壽增의 文藝志向과 家學傳受[42] 호는 퇴우당(退憂堂)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백부 김광혁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문과 급제 후 동생 김수항과 승승장구하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부교리, 대사간, 도승지를 거쳐 1666년 호조판서, 1674년 영의정에 올랐다가 예송논쟁으로 남인에 밀려났다가, 1680년 서인의 재집권으로 다시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유배당했고 이듬해 사망하였다. 2남 5녀를 두었으며, 후손들 중 일가 친척인 김조순의 항렬인 5대까지 문과 급제자가 보이지 않는다. 장남 김창렬(金昌烈)은 조졸하였고 차남 김창열(金昌說)은 안악 군수를 지냈으며 박태보와 함께 순절한 오두인의 딸과 혼인하였다. 셋째 딸은 이단상의 아들 이희조와 혼인하였다. 김수항은 둘째형에게도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링크 묘지명은 조카 김창흡이 찬하였고, 묘표는 김창협이 찬했다. 실록 졸기 링크[43] 딸 둘은 모두 여흥 민씨와 혼인하였다. 장녀는 민정중의 손자이고 우의정 민진장의 아들인 민계수와 혼인하였고, 차녀는 민유중의 손자이고 좌의정 민진원의 아들인 민창수와 혼인하였다. 양가는 매우 친밀하여 김창흡은 훗날 민정중의 묘표에서 '양가일체(兩家一體)'로 표현하기도 하였다.[44] 숙부 김창흡의 제자이다. 1717년 부친이 영의정이 되었다. 1719년 문과 급제 후 정언, 예조참의, 승지를 역임하였다. 신임옥사에서 부친이 몰락하고, 본인도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한다. 이배 되던 중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되어 묘지문을 작성하였다. 영조 등극 후 관작이 복구되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삼남 김원행은 당숙 김숭겸의 양자로 입적된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45] 신임옥사 당시 지평으로 재직중이었다. 심문 당하는 도중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부, 부친과 함께 사망하였다. 김창집과 김제겸은 사사 당했지만 김성행은 장살되었다. 훗날 영조는 등극 후 '종사(宗社)가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김성행의 힘이었다'고도 하며 직접 그의 제문을 짓기도 했다. 영조의 명으로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가, 훗날 정조가 이조참판으로 추증하고 결국에는 영의정까지 추증된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46] 가문의 봉사손 (부친 김성행은 1남 1녀를 두었다.). 증조부, 조부, 부친이 모두 신임옥사로 사망하였고, 당시 5세였다. 숙부 김원행의 가르침을 받았고, 봉사손으로서의 일에 충실하였다. 1761년에야 음보로 출사하여 황주목사, 장악원정를 역임했다. 셋째 아들 김인순(金麟淳)은 당숙인 김이직(金履直)의 양자로 입적한다.[47] 장남. 음직으로 황주목사까지 올랐다. 장남 김영근(金泳根, 1793 ~ 1873)은 생원시 합격 후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김영근의 장남 김병준(金炳駿)은 진사시 급제 후 이조참의까지 올랐다. 차남 김병기(金炳冀, 1818~1875)는 호가 사영(思穎)이며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의 양자가 된다.[48] 증 좌찬성. 아들 김교근(金敎根, 1766 ~ 1844)은 문과 급제 후 이조판서에 오른다.[49] 양자 김문근(金汶根, 1801 ~ 1863)은 철종의 장인으로 철인왕후의 부친이다.[50] 중형 김원행이 작성한 묘지명에 따르면 가문의 화로 벼슬 생각을 접었고,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배우자는 한산 이씨로 혜경궁 홍씨의 모친의 자매(=혜경궁의 이모). 혜경궁의 모친이 어려운 자매를 많이 챙겼다는 기록이 한중록에 있다.[51] 능주목사, 광주목사[52] 1777년 진사시 급제. 공조참의. 사촌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金逌根, 1785 ~ 1840)이 양자로 입적한다. 김유근은 대사성, 대사헌, 이조, 병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역임했고, 1832년 친부 김조순 사망 및 1834년 순조 승하 후 초기 세도 정권을 무난하게 이끌었으나, 1835년 중풍으로 쓰러져 실어증 후유증으로 정권에서 물러난다.[53] 1771년 진사시 급제. 호조좌랑, 고양군수, 평양서윤, 서흥부사를 지냈다.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54] 친부는 김이기이다. 작은 아버지인 김이경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1810년 문과 급제. 승지, 대사간, 호조, 이조참판을 지냈다. 장남은 김홍근(金弘根, 1788 ~ 1842)이며 문과 급제 후 좌의정까지 오른다. 그의 아들인 김병시(金炳始, 1832~1898)도 문과 급제 후 6조 판서를 거쳐 훗날 영의정에 오른다. 혼란하던 조선 후기 청, 일의 개입을 반대하였고, 아관파천 이후 친러 내각의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나 취임하지 않았다. 차남 김응근(金應根, 1793 ~ 1863)은 생원시 합격 후 가문의 힘으로 충청도 관찰사, 공조판서, 형조판서에 이른다. 삼남 김흥근(金興根, 1796 ~ 1870)은 영의정까지 오른다. 김흥근은 세도를 빙자하여 위세를 부렸고 탄핵 받아 유배가기도 했다. 그의 별장을 탐낸 흥선군에게 반강제로 헌납한 것이 석파정이다. 김흥근의 아들인 김병덕(金炳德, 1825 - 1892)도 문과 급제 후 판서와 참찬을 지냈으며, 대원군 집권에도 숙청되지 않고 좌의정까지 이른다. 청렴했다고 알려져있다. 사촌 동생 김병시의 권력욕을 경계했다는 기록도 있다.[55] 1726년(영조 2년)에 유배지였던 금산에서 풀려났다. 훗날 노론 집권 후 금산군수, 남원부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까지 오른다.[56] 호는 용암(庸庵). 1764년 문과 급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1780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 홍국영을 탄핵한 바 있다. 6조 판서를 모두 역임 후 좌의정까지 오른다. 외교에 뛰어나 청나라에만 5차례 다녀왔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실록 졸기 링크[57] 생부는 부친의 바로 아랫 동생 김이유(金履裕)이다. 생원시 합격 후 충주 목사를 지냈다. 김지순의 아들 김조근(金祖根, 1793~1844)의 딸이 헌종비 효현왕후이다. 김조근의 동생인 김보근(金輔根, 1803~1869)은 종숙 김홍순(金鴻淳, 김이도의 아들)의 양자로 입적한다.1837년 문과 급제 후 대사성, 부제학, 이조참판, 예조,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기에도 등용되었다.[58] 김이유의 차남. 1813년 문과 장원 급제 후 대사헌, 대사성,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도 뛰어났다고 한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아들 김신근(金愼根, 1799 ~ 1851)도 문과 급제 후 예조 참판까지 오른다.[59] 1800년 문과 급제 후 대사성, 대사간을 거쳐 예조, 형조, 병조, 공조판서를 거쳐 좌참찬까지 올랐다. 시호는 정헌(正獻)이다.[60] 김보근이 양자로 입적한다. 증 좌찬성.[61] 김수증의 차남 김창숙의 아들로 입적하나 일찍 사망한다.[62] 호는 관복암(觀復庵)이다. 부친이 벼슬길에 나서지 않으며 은거할 때 함께 학문을 닦다가 요절하였다. 시에 뛰어나 '관복암시고(觀復菴詩稿)'를 남겼다.[63] 호는 미호(渼湖). 본디 김제겸의 차남으로 김창협의 손자인 김숭겸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신임옥사로 인한 친조부, 부친, 형이 사망하였으나, 출계된 상태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1719년 진사시 합격은 하였으나 이후 벼슬의 뜻을 접고 학문에 전념한다. 훗날 김창협, 김창흡을 잇는 낙론의 종주가 되어 가문의 서원인 석실서원을 이끌었고 명유로 이름을 남겼다. 꾸준히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생을 마감한다. 아들 김이안이 '아버지는 과거를 가볍게 여기셨다(知科擧之輕)', '다시는 한양에 한 걸음도 들이지 않았다(不復踐京城一步)' 고 기록한 바가 있다. 제자로 아들인 김이안을 비롯하여 박윤원(朴胤源), 홍대용(洪大容), 황윤석(黃胤錫), 오윤상(吳允常)을 배출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실록 졸기 링크[64] 호는 삼산재(三山齋),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진사시 급제만 하고 부친 아래에서 가학을 계승하여 학문으로 이름이 높아 김장생-김집 부자에 비교되기도 하였다. 실학에도 관심을 보이기는 했으나 예설과 역학에 조예가 깊은 전통적인 성리학자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홍대용, 박제가, 박윤원, 이직보, 오윤상 등과 교유하였다. 1762년 학행으로 천거받아 경연관에 기용되기도 했고, 충주목사, 지평, 보덕, 찬선, 좨주를 역임했다. 정조가 그를 등용하려고 내린 글도 홍재전서에 남아있다. 그의 초상이 남아있는데 보물 1500호이다. 문화재청 링크, 실록 졸기 링크, 증손자 김병운(金炳雲, 1814 ~ 1877)은 문과 급제 후 대사헌, 이조판서에 오른다. 시호는 문정(文靖).[65] 김이장의 셋째 아들로 김원행의 둘째아들인 김이직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음직으로 거창부사까지 오른다. 아들 김수근(金洙根, 1798 ~ 1854), 김문근이 있다. 김문근은 김인순의 형 김이순의 양자로 입적된다. 김수근은 1834년 문과 급제 후 대사성, 공조판서, 대사헌,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김수근의 아들이 김병학, 김병국이다.[66] 문과 급제 후 이조판서, 우의정. 시파였던 대부분의 문중 사람들과는 달리 벽파에서 활동했다. 벽파의 수장으로 1805년 정순왕후 사후 김조순의 섭정에 반기를 들었다. 그를 외척으로 규정하고 공격하였으나, 김조순은 자신의 수족같은 이들(이우, 박하원, 홍지섭)도 내치며 김달순도 함께 처리하여 순조의 명으로 결국 사사된다. 훗날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익헌(翼憲)이다.[67] 1794년 문과 장원 급제. 대사성, 부제학.[68] 김구라(본명 김현동(金賢東))의 직계 6대조다.[69] 호는 대산(臺山). 문과 급제 후 예조참판에 이른다.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사촌형 김달순의 옥사에 연루되어 20년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문집에 포함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는 한양의 연중행사 약 80여 개를 기록해두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70] 삼연의 차남으로 당숙 김창국(金昌國, 1644 ~ 1717, 김수증의 장남)의 양자로 출계되었다.[71] 1746년 문과 급제 후 좌승지, 대사간에 이르렀다. 황윤석이 김문행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는데, 김원행을 추천하여 그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김문행의 증손자 김영근(金英根, 1805 ~ 1885)도 문과 급제하였다. 이조참의 역임.[72] 삼연의 막내 동생 김창립이 18세로 요절하는 바람에 딸 1명 외에는 후사가 없어, 3남 김후겸을 양자로 삼아주어 김창립의 대를 잇게 했다.[73] 김후겸도 후사가 없어 김후겸의 큰 형 김양겸(김창흡의 장자)의 둘째 아들 김간행이 출계되었다.[74] 진사시 급제 후 나주 목사를 지냈다.[75] 호는 화서(華棲). 1805년 증광시 장원, 전시 병과 급제. 순천부사를 거쳐 도승지, 공조, 형조, 이조판서 역임.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학순의 손자 김병주(金炳疇, 1819 ~ 1853)는 순조의 딸 복온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된다(昌寧尉; 창녕위). 김병주의 손자인 김석진(金奭鎭, 1843 ~ 1910) 은 1867년 문과 급제하였고 영의정까지 역임하였으나, 을사조약에 통분하여 벼슬에서 물러난다. 한일합방 후 일본이 내린 남작 작위와 은사금을 거부하고 아편으로 음독 자결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서울 창녕위궁 재사 참조.[76] 1785년 문과 장원 급제 후 대사성, 대사간, 공조, 병조, 형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역임한다. 시호는 간헌(簡獻)이다.[77] 문과 급제 후 우승지, 동래부사를 지냈는데, 1776년 홍인한과 같은 패로 몰려 파직당하여 유배된다.[78] 자는 존보(尊甫), 호는 증소(橧巢),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숙부 김창흡, 김창즙의 제자이고, 이이명의 사위이다. 1721년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였으나, 1722년 신임옥사가 발생하여 백부 김창집과 장인 이이명이 사사되었다. 백부가 사사될 때 임종을 지켰다. 김창집이 사사 명령을 받고 마지막 시를 남길 때 어떤 글자가 나은지, 어떤 표현이 좋을지 김신겸과 의논하며 시의 완성도에 신경썼다. 이후 김신겸도 옥사에 연좌되어 유배되었고 1725년 유배에서 풀렸으나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강원도 영월로 낙향하여 후학 양성을 하였으며 안동 김씨의 의리학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경학과 시문에 뛰어났고 기행문도 많이 남겼다. 민우수, 유숙기, 이봉상 등과 함께 당대 노론의 학맥을 이었으며 김창흡을 가장 오래 모시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창흡이 임종시 자신의 행장을 작성하도록 명한다. 민우수는 김창흡의 의발이 그에게 전해졌다고 평했으며 주변에서 바라본 사실상의 수제자이다. '百六哀吟(백육애음)'을 지어 가문에 남겼고 김창집과 함께 유배되었을 때 그리고 그의 사후에 지어나간 작품이다. 가문 사람(김수증, 김수항, 부친과 삼촌인 육창, 김제겸 등), 가문과 관련 있는 사람들(민우수, 유척기, 이건명, 권상하 등) 과 주변 사람들(승려, 노비, 부친 김창업이 청에서 만난 중국인 등) 각각에 대해 시 106수를 지어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전성건, 선덕(先德)과 조훈(祖訓)의 기억-안동 김문의 가사(家史) 계승을 중심으로, 2012 참조). 김창흡의 행장은 김신겸이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여 아들인 김양행이 이어서 작성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집 '증소집(橧巢集)'이 전한다. 김신겸의 행장은 민우수가 작성했다.[79] 호는 지암(止菴),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부친 김신겸이 민우수와 함께 작은 아버지인 김창즙 문하에서 수학하며 금란지교를 맺었고, 김양행의 딸(=김신겸의 손녀)이 민우수의 손자인 민이현과 혼인하며 인척이 되었다. 18세기 후반 낙론은 김원행과 민우수 학맥으로 분화했는데, 김양행은 민우수와 김종후의 학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공정한 인물로 평가되었다(참고: 조성산, 18세기 洛論系 學脈의 변모양상 연구). 뛰어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아 정조가 꾸준히 불렀으며정조의 편지, 이조참의, 형조참판을 역임했다. 이우신(李友信, 1762 ~ 1822), 민우수의 증손자 민치복(閔致福, 1766 ~ 1814), 박준원(朴準源, 1739 ~ 1807)이 제자이다. 정조가 여주 행궁에 나아갔을 때 일부러 불러 보았던 기록도 보인다.링크 친척 형인 미호 김원행, 녹문 임성주 등과 친하였고 그들과의 서한도 전한다.김원행의 서한임성주의 제문 그의 손자인 김건순이 강이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을 때 보고를 들은 정조는 "김건순은 참판 김양행의 손자라고 한다. 내 일찍이 작고한 참판에게는 잊지 못할 일이 있는데 어찌 그 손자 하나를 돌보아주지 못하겠는가." 라며 김건순을 석방시켜 주었던 바 있다. 그러나 훗날 신유박해가 일어나는데..실록 졸기 링크.[80] 호는 실암(實庵)이다. 1796년(정조 20년) 당시 우의정이던 윤시동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 사헌부 지평, 집의를 지냈다. 천거할 때도 사직하려고 할 때도 김양행의 손자라는 언급이 꼭 들어간다.일성록 링크[81] 신유박해 때 순교한 그 사람이다.[82] 김창업의 서자. 아버지처럼 그림을 잘 그렸으며, 정선(鄭敾)이 이룬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을 이어받아 강희언(姜熙彦), 김응환(金應煥) 등과 함께 정선파(鄭敾派)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정선이나 정선파 화가들의 경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화풍을 갖춘 화가로 평가된다.[83]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직접 서화를 지도받아 나중에는 "서화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고, 고상하고 예스러운 분위기가 나서 우리나라 화가들의 비루한 습관을 떨쳐버렸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초정(楚亭) 박제가, 청장관(靑莊館) 이덕무, 영재(泠齋) 유득공과 매우 친했다고 한다.[84] 김창협의 제자인 조문명과 혼인하였다. 조문명은 처가와 달리 소론계였으며, 영조의 탕평책에 호응한 탕평파의 영수였다. 안동 김씨 사후 조문명은 전주 이씨와 재혼하였고, 그 사이에서 출생한 딸이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비 효순왕후이다.[85] 호는 효효재(嘐嘐齋)이다. 포음의 늦둥이 아들로 12세에 포음이 사망하면서 친한 같은 가문 사람이자(김상용의 고손자) 김창협의 문하인 김시보(金時保, 1658 ~1734)에게 교육을 부탁했다. 20세(1721년)에 백부 김창집 사사시 전주에 유배된다. 당시 살려는 의지 없이 마치 상주처럼 지냈다고 하며 소론 가문인 청송 심씨 부인과는 대화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24세(1725년)에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고 출사를 포기하고 학문에 집중한다. 1726년 부친의 문집 '포음집(圃陰集)', 1727년 '안동김씨족보'의 간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나서, 이재와 박필주 문하에서 학문에 집중한다. 도봉서원에서 이의철, 이규신, 권진응과 함께 강학을 맡았고 '따르는 자가 구름같았다'고 할 정도로 명성을 얻는다. 1740년(영조 16년)의 경신처분으로 가문이 신원되었고, 그의 교유의 폭은 점점 넓어졌다. 44세(1745년)에 처음 천거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고, 47세(1748년)에 음서로 선공감 감역으로 뒤늦게 관직에 오른다. 그러다가 정조의 눈에 들어 공조참판, 승지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른다. 음률, 예학에 밝았으며 북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홍대용, 박지원과도 나이를 넘어서서 친했다고 한다. 첫 관직에서는 책임자던 소론의 이종성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며 파직된 바도 있다. 그러나 점점 도량이 넓어지며 인생 후반기의 김용겸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김원행(김용겸이 당숙이다.)의 제자이기도 한 27세 연하인 황윤석과의 교우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당시 김용겸은 장동 김씨 집안의 좌장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지방 사족으로 한양에 올라와(1766년 38세에 음직으로 참봉을 제수받아 근무하고, 1768년에 의영고 봉사(義盈庫 奉事)가 되어 한양 생활을 시작한다.) 말직에 머무르던 황윤석이 '씨족원류'라는 책을 빌려달라며 느닷없이 찾아왔다고 한다. 김용겸이 처음에는 떨떠름했으나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알아보았고 나들이도 함께 가기로 약속한다. 이후에는 책을 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인맥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도 많이 해주었다. 황윤석의 학문 발전에 가장 지속적이고 우호적인 도움을 주었고 관료생활에서의 어려움에도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참조: 이지양, 黃胤錫의 書籍 筆寫 및 購入으로 본 京鄕 간의 知識 動向 - 1768년~1771년까지의 한양 생활을 중심으로 -) 실록에 언급된대로 송덕상에 대한 평을 정조에게 가차 없이 하여 주변에서 놀랐던 바가 있다. 송덕상은 다름 아닌 최강 권신 홍국영이 추천했던 사람이었다. 김용겸의 삶에 대해 잘 정리된 논문이 PDF 로도 있으니 참조해도 좋다.논문 링크실록 졸기 링크[86] 참고 문헌 - 이경구, 곤경에서 곤혹으로: 18세기 중반~19세기 초반 낙론 학자들의 딜레마, 2020[87] 호는 택재(澤齋)이다. 시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김상헌과 함께 척화파였던 이경여의 손녀(이민서의 딸)와 결혼하였다. 이민서와 김수항은 친밀하였고, 이민서의 아들은 이관명(좌의정 역임. 이관명의 아들인 이망지는 김창즙의 딸과 혼인하였다.), 김창집과 함께 노론 4대신이었던 이건명이다. 김창립은 택재제라는 서실을 짓고 공부했는데 거기에서 호를 땄다. 18세에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마마 감염이 원인이었다. 당시 한양에 마마가 창궐하였고, 임금 숙종도 마마에 걸렸었다. 김창립은 숙종의 모친 명성대비의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거기에서 마마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 김창흡에게 배웠고 빼어난 재주로 가문의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사망 다음해에 같이 김창흡의 제자로 절친했던 홍유인의 주도로 정리된 유고를 김창흡이 산정하여 남겼던 시를 묶은 유고문집 '택재유타(澤齋遺唾)'가 간행되었다 (처음 정리되었을 때의 이름은 '택재고(택재가 남긴 글)'였는데 '택재유타(택재가 남긴 침방울)'로 변경되었다. 간절함과 시를 모두 싣지 못한 아쉬움도 들어있는 이름이다.). 홍유인은 김수항의 큰 형인 김수증의 외손자이다. 이 작은 책의 서문과 발문에 참여한 자들이 엄청난데 서문은 김석주, 발문은 부친인 김수항, 형 김창흡 외에 송시열, 김만중, 남용익이 작성하였다. 부친 김수항의 영향력을 볼 수 있는 일례이다. 김수항의 슬픔은 특히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행장도 직접 작성하였고(보통 자손이나 지인 중 문장력 있는 자가 작성한다), 여러 글도 남겼다. 훗날 본인이 사사 당하기 전에도 김창협에게 명하여 김창립의 묘지명을 짓게 한다.묘지명 링크, 아들이 없어 김창흡의 3남 김후겸이 김창립의 양자로 입적된다. - 김순희, 택재 김창립의 택재유타에 관한 연구, 2011 참조[88] 결국 정조 본인의 탕평책을 파기하는 선택을 하면서까지 김조순을 순조의 후견인으로 낙점한다.[89] 김태희, 김조순 집권의 정치사적 조명, 201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