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2:41:49

이식(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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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
李植|Yi Sik
파일:택당 이식 묘.jpg
이식의 묘
출생 1584년 11월 12일
(선조 17년, 음력 1584년 10월 11일)
조선 경기 남양도호부 압정면 조암동 무송 윤씨 외가
(現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우정면 조암리)[1]
사망 1647년 7월 14일
(인조 25년, 음력 1647년 6월 13일)
(향년 64세, 62년 8개월 2일 / 22,887일)
조선 경기도 지평군 양동면 쌍학리 택풍당
(現 대한민국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택풍당)
병사 (지병)[2]
묘소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산 9-1 백아곡
학력 교산 허균의 문하 (1596년에서 1610년 사이)
동악 이안눌의 문하 (1596년에서 1610년 사이)
송강 정철의 문하 (불명[3])
생원 식년시 급제 (음력 1610년 3월 6일)
문과 병과 별시 급제 (음력 1610년 10월 22일)
직업 관료, 학자, 문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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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문정(文靖)
본관 덕수(德水)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최종
관등
이조 판서
(吏曹 判書)
식(植)
여고(汝固)
택당(澤堂), 남궁외사(南宮外史), 택구거사(澤癯居士), 일표거사(一瓢居士)
종교 유교 (성리학)
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4]
작품 《택당집(澤堂集)》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두시비해(杜詩批解)》
《수성지(水城志)》
《야사초본(野史初本)》
부모 부: 이안성 (李安性, ? - 1613)
모: 무송 윤씨 (茂松 尹氏, ? - 1637)
배우자 청송 심씨 (1585 - 1658)[5]
자녀 장남: 이면하 (李冕夏, 1619 - 1648)
차남: 이신하 (李紳夏, 1623 - 1690)
삼남: 이단하 (李端夏, 1625 - 1689)
장녀: 덕수 이씨
차녀: 덕수 이씨
삼녀: 덕수 이씨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 개요2. 생애
2.1. 생애 초기2.2. 3명의 스승2.3. 관직 생활 초기2.4. 폐모론 반대와 은퇴2.5. 인조반정 이후 조정 복귀2.6. 최후
3. 평가4. 기타5.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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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관료, 학자, 문장가.

2. 생애

2.1. 생애 초기

1584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병약한 체질과 임진왜란 때문에 12세가 되어서야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 이원상이 과거에 합격하고 도총부도사로 일한 이후 할아버지 이섭과 아버지 이안성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으므로, 직계 가족이 이식의 과거 급제에 많은 기대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식이 과거 급제 전 붕당 출신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스승을 모신 것도 이런 배경과 관련이 되었을 것이며, 가문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절박했을 것이다.[6]

음력 1610년 3월 6일 생원 식년시에 급제했다.#

음력 1610년 10월 22일 문과 병과 별시에 급제했다.# 당시 이식의 과거 시험 감독관[7]허균, 이항복, 박승종, 조탁, 홍봉서, 이이첨, 이덕형이었는데, 이 전시에서 박승종의 아들, 조탁의 동생, 이이첨의 사돈과 친구, 허균의 이복 형 허성의 셋째 아들 허보(許寶)와 셋째 딸의 남편 박홍도(朴弘道), 그리고 허균의 제자였던 이식이 합격했다. 그래서 1610년 음력 11월 13일, 지평 이헌명이 과거 시험 부정 사건을 폭로하자 대간들이 상소를 올렸고, 허균이 혼자서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전라도 함열로 유배되었다. 허균의 조카 허보만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후 택당 이식은 과거 시험 부정사건에 이름이 언급된 것에 죄책감을 가져서 1613년까지 관직에 오르는 것을 거부했다.[8]

2.2. 3명의 스승

2.2.1. 허균

허균의 제자 중 한명으로[9] 생전 저술한 문집 《택당집(澤堂集)》에서 "스승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사실을 밝혔다. 아래 내용 참조.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수호전(水滸傳)》을 지은 사람의 집안이 3대(代) 동안 농아(聾啞)가 되어 그 응보(應報)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도적들이 바로 그 책을 높이 떠받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허균(許筠)과 박엽(朴燁) 등은 그 책을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적장(賊將)의 별명을 하나씩 차지하고서 서로 그 이름을 부르며 장난을 쳤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허균은 또 《수호전》을 본떠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짓기까지 하였는데, 그의 무리인 서양갑(徐羊甲)과 심우영(沈友英) 등이 소설 속의 행동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다가 한 마을이 쑥밭으로 변하였고, 허균 자신도 반란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농아보다도 더 심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하겠다.
《택당선생 별집》(澤堂先生 別集) 제15권 〈잡저〉 ‘산록’ #
위 기록은 이후 문인들에게 신뢰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식 사후 심재(沈梓, 1624년 - 1693년)의 《송천필담(松泉筆譚)》과 홍한주(洪翰周, 1798년 - 1868년)의 《지수점필(智水拈筆)》은 이식의 <택당집>을 인용해서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고 서술했다.

스승 허균과는 친한 관계였지만, 폐모론이 조정에서 제기된 이후 폐모론을 지지한 허균과는 달리 폐모론을 반대했다.

2.2.2. 이안눌

동악 이안눌의 제자였다. 이안눌은 이행의 증손이었으므로, 이식의 종숙(從叔)이 된다.

2.2.3. 정철

송강 정철의 제자였다. 정철은 골수 서인이었는데, 이식은 허균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이후 서인들과 행동을 같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철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2.3. 관직 생활 초기

1613년 음력 4월 22일 세자에게 경사(經史)와 도의(道義) 등을 가르치는 시강원 소속 설서(設書)로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년도 부친이 별세하기 전 이식에게 "우리나라는 붕당 때문에 망할 것이라는 말이 증명되고 있다. 네가 비록 요행이 조정에 나가더라도 함부로 이름있는 선비[10]와 교유해서 세상 사람들의 지목을 받게 되는 것을 피하도록 해라."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식은 스승이 대북과 서인에 속했지만 자신이 어느 붕당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한다.[11]

설서로 일하다가 음력 5월 24일 처형 심정세(沈挺世)[12]계축옥사에서 이름이 언급되어서 역적으로 죽었으므로 # 음력 6월 13일 "감히 신하로서 왕을 모실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을 요청했고, 얼마후 파직되었다.#

1613년 음력 8월 12일 부친이 별세했다. 음력 11월 6일 부친의 시신을 백아곡에 묻었으며, 2년 후 1615년 음력 2월 13일 백아곡에 조부모의 무덤을 이장했다.#

1616년 음력 1월 어렸을 때부터 거주하고 있던 강구촌[13]에서 백아곡으로 이주했으며, 음력 6월말부터 북평사(北評事)로 일했다.# 1617년 선전관을 지냈다.# 이 때까지는 조정의 집권당 대북과 함께 관직 생활을 했다.

2.4. 폐모론 반대와 은퇴

그러나 1618년 폐모론 문제가 조정에서 제기되자 폐모론을 반대한 이식은 조정에서 일을 그만두고 경기도 지평군에 위치한 집 택풍당에서 살면서 제자들과 자손들을 교육하고 학문을 연구했다.# 그래서 대북에게 폐모론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로 탄핵당했다.#

이후 광해군이 계속 이식에게 관직을 주었지만, 거부하고 조정에 돌아가지 않았다.

한편 스승인 허균이 역적으로 죽었을 때 택풍당에서 거주하고 있었다.[14]

1621년 본인을 포함한 온 가족이 전염병을 앓고 있다고 광해군에게 글을 올렸으며, 이후 병을 이유로 관직에 복귀하지 않았다.#

2.5. 인조반정 이후 조정 복귀

인조반정 이후 조정에 돌아가서 순탄한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스승 정철의 제자들이 많이 있는 서인들과 행동을 같이 했고, 그래서인지 다른 스승 허균과 친했던 적이 있지만 역적이 된 허균과 친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한 적이 없었다.

1641년 대제학이 된 이식이 선조실록의 수정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수정을 주관했다. 선조실록의 수정은 1623년 인조반정 당시 이수광이 선조실록의 수정을 청했지만 계속 미뤄지다가 이식이 상소를 올려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식이 1647년에 죽으면서 선조수정실록 작업이 중단되었다. 이후 효종 시기 김육이 주관해서 수정실록을 완성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서인과 남인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는데, 본인의 시각보다는 본인이 같이 일하고 있는 인물들인 서인과 남인의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645년 음력 11월 21일 병을 이유로 면직을 빌을 때까지 오래동안 관직 생활을 했으며,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명나라의 멸망, 그리고 청나라의 승리 등을 지켜보았다.#

2.6. 최후

전 이조 판서 이식(李植)이 죽었다. 이식의 자는 여고(汝固)이고, 호는 택당(澤堂)이다. 소탈하고 빼어나며 통명하였고, 전아하고 고상하며 검소하였다. 어려서부터 박람 강기(博覽强記)하였고, 문장이 절묘하여 한 시대에 우뚝하였다. 혼조(昏朝)에는 여강(驪江)에 물러나 살면서 임숙영(任叔英)·여이징(呂爾徵)·정백창(鄭百昌)·조문수(曺文秀)와 더불어 글짓고 술마시는 모임을 만들어 강호 사이에서 노니니,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였다. 반정하게 되자 청현(淸顯)의 직을 두루 거쳤고 세 번이나 문형을 맡았다. 병술년022) 에 시제(試題)의 일로 죄를 얻으니 모두가 원통하게 여겼다. 《선조실록》이 적신(賊臣) 기자헌(奇自獻)·이이첨(李爾瞻) 등의 손에서 나와 시비가 어그러져 믿을 수 없었다. 이에 이식이 상에게 아뢰어 실록청을 설치하고 야사(野史)나 여러 사대부의 집에 소장된 잡기(雜記)를 모아 수정하고 따로 한 질을 만들어 사고(史庫)에 보관하고자 하였는데,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ㅡ 《조선왕조실록》 이식의 졸기 #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서 택풍당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병이 악화되어서 갑자기 사망했다. 사인은 불명이지만 정황상 어렸을 때부터 쇠약했으므로 지병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3. 평가

문장을 잘 써서 월상계택의 일원으로 불리며, 생전에 붕당정치에 얽매이지 않고, 북인서인을 모두 사귀는 등 사람을 사귀는데 붕당을 가려서 만나지 않았다. 다만 아들들이 서인의 종주 송시열의 문하로 들어가면서 서인 소속이 되었고, 특히 셋째 아들 이단하는 서인의 주요 인물로 성장했다.[15]

4. 기타

  • 이행의 직계 후손이다. 다만 중종 시기 권신이었던 조상 이행과는 달리 권력에 별로 집착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고, 폐모론이 대세였던 대북 정권을 따르지 않고 한성부에 멀리 떨어진 곳에 낙향하는 등 권력에 미련이 크지 않았다.
  • 이순신과 같은 본관인 덕수 이씨이지만 공파가 다르다. 이식은 문정공파 15세손이고, 이순신은 충무공파 12세손이다. 즉 사실상 남남인셈.#
  • 문장을 잘 써서 월상계택의 일원으로 불렸다. 월상계택의 일원인 장유와는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5. 관련 자료

  • 파조이상 선조 행장#
  • 택당 이식(1584~1647)의 삶과 현실인식, 2009년, 이상배 지음.#
  • 실존인물 홍길동, 1998년, 설성경, 정철 지음.


[1] 링크 참조. 한성 남수문 조암동 외가 출신이라지만, 남수문 조암동은 지금의 수원시이므로 사실상 수원시 출신이다.#[2] 어렸을 때부터 병약한 체질이었고, 죽기 2년전부터 병이 악화되어서 급격하게 쇠약해졌으므로 오랜 지병으로 고생한 것을 알 수 있다.[3] 정철은 1594년에 죽었기 때문에 12살부터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식과 애초에 사제관계를 형성할수 없다. 12살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는 얘기는 정식이 그렇다는 얘기고 그전에 이미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4] 대북 소속 스승인 허균과 서인 소속 스승인 정철 문하에서 공부를 했지만, 조정에서 붕당 소속으로 일한 적이 없어서 사실상 무소속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5] 현감 심엄(沈掩)의 딸이다.[6] 택당 이식(1584~1647)의 삶과 현실인식 112쪽 참조.[7] 당시 명칭은 전시 대독관.[8] 실존인물 홍길동 142쪽 참조.[9] 허균의 제자라는 말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언급된다.# 1610년 정호서(丁好恕)와 김성발(金聲發)에 의하면 이식은 "허균에게서 수업을 받은 사람"이라 한다. 여기서 사관이 사실이 아니라 하지만, 이식이 허균과 "범범하게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사실을 적는 등, 서로 맞지 않는 기록이 있으므로, 허균이 1610년 이전 이식과 만나서 친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10] 명사(名士)를 의미한다.[11] 택당 이식(1584~1647)의 삶과 현실인식 112쪽 참조.[12] 김제남의 죽은 딸의 사위이다.[13] 현 대신면 보통리이다.[14] 1618년부터 1623년 인조반정까지 계속 한성부에서 멀리 떨어진 택풍당이라는 집에서 계속 은거했기 때문에, 이식이 한때 스승이었던 허균의 죽음에 대해 정확히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위 부친이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스승의 옥사에 연관되지 않기 위해 은거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15] 택당 이식(1584~1647)의 삶과 현실인식 112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