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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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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김육
金堉
<nopad> 파일:실학박물관_김육_초상.jpg
출생 1580년 9월 2일[1]
(음력 선조 13년 7월 14일)
한성부 서부 마포면 마포리
(現 서울특별시 마포구)#
사망 1658년 9월 30일 (향년 78세)
(음력 효종 9년 9월 4일)
한성부 회현방 회현동
(現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2가)
재임기간 제122대 영의정
1651년 3월 2일 ~ 1652년 1월 17일
(음력 효종 2년 1월 11일 ~ 12월 7일)
제124대 영의정
1654년 7월 27일 ~ 9월 25일
(음력 효종 5년 6월 14일 ~ 8월 15일)
제126대 영의정
1655년 8월 15일 ~ 8월 25일
(음력 효종 6년 7월 14일 ~ 7월 24일)
시호 문정(文貞)
본관 청풍 김씨
백후(伯厚)
잠곡(潛谷),[2] 회정당(晦靜堂)
부모 부친 - 김흥우(金興宇, 1564 ~ 1594)
모친 - 한양 조씨 조희맹(趙希孟)의 딸
부인 파평 윤씨
자녀 슬하 2남 1녀
장남 - 김좌명
장녀 - 황도명(黃道明)의 처
차남 -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3]

1. 개요2. 생애
2.1. 선조 시기2.2. 광해군 시기2.3. 인조 시기2.4. 효종 시기
2.4.1. 정승직에 오르다2.4.2. 김육과 김집의 갈등2.4.3. 실권을 잡은 김육과 호서 대동법2.4.4. 호남 대동법 추진과 사망
3. 평가4. 가족5. 저서6. 외부 링크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김육은) 유림에서 나온 사람으로 평소에 중망을 지녔고, 그의 명예로운 이름과 역경에도 지켜낸 절개는 한 시대에 으뜸입니다. 정론(正論)이 사라지는 때에 온 조정 신료들의 어른 된 지위에 있으니, 나라 사람들의 그에 대한 기대가 마치 거센 물결에 버티고 있는 돌기둥 같습니다."
김육을 비판하는 이상진의 상소문 中[4]

"국가에서 영(令)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마땅히 소민(小民)들의 바람을 따라야 합니다. 어찌 부호들을 꺼려서 백성들에게 편리한 법을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효종실록》 효종 즉위년(1649) 11월 5일, 대동법 시행을 건의하며.

조선 후기의 명재상, 유학자, 작가. 인조 초부터 효종 후반까지 활동한 고위 관리로서 대동법을 추진해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구했다. 대동법의 아버지이다보니 조선 후기 인물 중에서도 손꼽힐 수준의 연구가 진행된 인물이다. 인쇄업을 차려 의학 서적 등의 보급과 금속활자의 계승에도 힘썼다. 청풍 김씨를 일으켰으며 영의정에 올랐고 서인 소속이다. 손자 김석주우의정에 올라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노론의 창립 멤버가 됐다.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의 할아버지이며 숙종은 외증손자가 된다.

2. 생애

2.1. 선조 시기

김육은 김흥우와 한양 조씨의 장남으로 외할아버지 조희맹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는 기묘팔현[5]김식이고 모친은 조광조의 동생 조숭조의 손녀다. 당시 사화를 당한 가문들은 1568년(선조 원년)에 복권될 때까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는데 책은 읽어야 해서 궁핍했다. 김육의 조부 김비는 복권 후 음보로 세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군자감 판관(종5품)까지 지냈다. 부친 김흥우는 22세되던 1585년 초시에 붙었지만 1590년 김비가 사망하고 1592년 임진왜란 때문에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김육의 가족은 평구(현재 경기도 가평군 부근)를 떠나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경기도 등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이 와중에 김흥우가 1594년 4월 향년 31세로 사망해 김육은 15세에 소년 가장이 됐다.[6] 전란이 끝난 직후인 1598년 8월에는 할머니, 1600년 1월에는 어머니를 잃었다. 김육은 부모님을 고향 가평에 손수 합장했다. 이제 세상에는 자신과 어린 남동생, 어린 여동생 이렇게 셋뿐이었다. 김육은 전란이 막 끝나자 한양으로 올라가 고모에게 의지했으며 모친상을 마친 1603년 사마시에 응시해 합격하고 1604년 2차 회시에도 합격해 생원이 됐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자격이 주어진 그는 윤 진사의 딸 파평 윤씨결혼했는데 27세라면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혼사였다.

그는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지만 학통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일부 계승하였다. 1594년(선조 27) 일찍이 조호익(曺好益)에게 배우고,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또한 윤근수와 윤두수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특히 윤근수 형제에게서 수학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는데, 성리학보다는 경세론에 더 관심이 많았던 윤근수와 그의 학파의 분위기가 후일 김육의 개인적 경험과 더해져 대동법 등의 추진에 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웃긴것은, 보통 우리가 대립관계라고 생각하는 김상헌(조선)역시 윤근수의 문하로서 김육과 같은 학파였다는 것(...)

2.2. 광해군 시기

선조 때부터 사림은 오현종사를 추진하는데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문묘에 배향하자는 운동이었다. 이는 1610년(광해군 2년) 7월에 실현을 본다.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문묘에 배향할 때 누구를 넣고 누구를 빼자 갑론을박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611년 3월 북인정인홍이 이황을 빼고 남명 조식을 넣자는 상소를 올리면서 이른바 '회퇴변척(晦退辨斥)' 사건이 터졌다.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을 빼고 조식과 그의 친구 성운(成運,1497년~1579년)을 넣자"는 주장을 폈다. 이황과 조식의 제자들은 같은 동인으로 분류되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다수의 의병장을 배출한 조식의 제자들이 북인으로 갈렸다.[7] 광해군은 북인에게 정권을 줬고 정인홍은 조식의 제자로서 북인의 상징이었다. 긴 시간 온갖 싸움을 거쳐 겨우 명단을 정해놨더니 집권 당수가 파투(破鬪)를 낸 셈. 그래서 회퇴변척은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각 당간 전면전으로 번졌으며 성균관 학생들 역시 즉각 반발했다. 이들은 정인홍을 비판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렸고 급기야 청금록(靑衿錄, 선비 명단)에서 멋대로 삭적(명단에서 지움)했다. 광해군이 크게 분노해 "가장 먼저 삭적 의논을 낸 자를 색출해 금고형을 내리라"고 명령하자 성균관 유생들은 권당(동맹 휴학)으로 저항했다. 이 무렵 김육은 성균관의 재임(齋任)[8]이었다. <잠곡집>에 따르면 김육이 청금록 삭제를 주도했기 때문에 자수하려 했는데 수사 직전 이덕형이항복 등이 광해군을 만류하고 중재안을 낸 덕에 수사가 유야무야됐다.[9]

결국 1613년 계축옥사로 선왕 선조에게 늦둥이 적자 영창대군을 부탁받은 일곱 대신[10]을 비롯해 신하들이 다수 유배됐고 영창대군은 강화도에서 사사됐다. 영창대군의 생모인 소성대비(인목왕후) 김씨 역시 폐비론으로 폐서인될 위기라 옥사의 뒷수습을 놓고 북인들조차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했는데 광해군은 강경파인 대북의 손을 든다. 김육은 성균관을 팽개치고 가평 잠곡으로 낙향했다.[11] 김육은 직접 밭을 갈고 물길을 만드는 등 농부로서 노동하며 살았다. 낙향 후 2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집 1칸 마련할 수 있었고 산에서 직접 나무해 숯을 굽고 한양에 내다 팔아 생활했는데 가평에서 무거운 지게를 지고 한양까지 가려면 보통 일이 아니다.[12] 그런데 새벽에 파루가 치고 도성 문이 열리면 제일 먼저 김육이 왔다고 할 정도로 부지런했다고 한다. 김육이 이 때를 회상하면서 지은 [13]에는 약초를 캐러 산에 올라가거나 낚시한 뒤 밤에나 돌아오거나 가을이 되면 추수하고 봄이 되면 밭을 가는 당시 일반 백성의 일상적인 노동이 잘 나타난다. 김육은 양반이자 성균관 유생으로서 특권 의식없이 서민 생계를 꾸린 셈이다.[14] 그렇게 30대를 보낸다지만 하루 종일의 노동에 더해 전세, 공납, 군역을 모두 부담하는 백성으로서의 고단한 삶이 김육에게 대동법을 고안하게 했고 현실 감각이 뒷받침이 된 정무 능력에 밑거름이 되었다. 김육의 잠곡 생활은 10년만에 끝이 나는데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의 북인 정권이 몰락하고 서인들의 세상이 됐다. 인조반정으로 수많은 관료들이 숙청되고 조정에 인재가 부족해지자 40대로서 분별력까지 갖춘 김육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2.3. 인조 시기

반정 세력들은 인재가 필요했는데 광해군 재위 15년 동안 많이 숙청됐고 이항복, 이덕형 같은 서인과 남인의 유력 인사들이 사망하거나 긴 유배로 건강을 해친 상태였다. 반정 공신들에게는 젊은 관료들을 새로 기용하는 것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는데 조선에서 관료들에게 배분된 토지들을 반정 공신들이 거의 독점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반정 직후 광해군 때 귀양간 관료나 지조와 절개가 가상한 사람(낙향자)들을 6품직에 우선 서용하고 자리가 나는 대로 품을 올려주는 천거 인사가 있었다.[15] 이 때 약 20여 명이 천거됐는데 김육도 의금부도사(종5품)가 되었다.

1624년(인조 2년) 1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몽진하는 인조를 호종했고 그 공으로 아직 반란 도중인데도 충청도 음성 현감에 임명됐으며 김육은 2월에 음성으로 부임했다. 2개월만에 업무에 관한 상소(음성진폐소)를 올렸으며 공납 문제(특히 부세 부담)가 고을의 크기에 따라 공정하지 못하므로 행정구역을 조정하여 불균형을 완화하자는 내용이었는데 김육이 이미 공납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해결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김육은 공납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고을 현감 정도로는 이룰 수 없는 이었으며 대과에 급제하지 않고는 현감 정도에서 끝인데 마침 그 해 겨울 이괄의 난이 진압됨을 축하하는 증광시가 열렸다(1624년 갑자 증광시). 김육은 업무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장원급제였다.[16] 김육이 제출한 답안지는 책상 머리에만 앉아있던 서생들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내용이라 채점관이 크게 감동했다. 이렇게 갑과 장원한 덕에 고위 관료로서 앞길이 열렸으며 성균관 전적으로 보임까지 대기하는 것도 잠시 곧 병조좌랑을 거쳐 당시 조선 관료의 꽃인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정언을 거친다. 내직에 있으면 외직을 반드시 돌아야 하는 제도 때문에 다시 음성 현감으로 부임하는데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송덕비가 세워질 정도였다. 그래도 김육에게는 산 너머 산이었는데 40대 중반에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 잘 풀려야 정3품 당하관이다. 기묘팔현의 직계라는 레거시가 있기는 했지만 특별한 학맥이나 인맥 역시 없었으며 공납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힘이 없었다. 그래도 김육이 올린 호패법 완화나 행정구역 재조정을 주장하는 상소들에는 서민들의 생활 부담을 줄일 수 있는데까지 줄여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이미 평안도황해도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김육은 <논양서사의소(論兩西事宜疏)>를 올려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세금을 감면하고 재정을 지원하며 탈영병들을 사면해 병력에 보태자고 건의했다. 1633년 김육은 평안도 안변 도호부사(종3품)에 올라 후금의 재침략에 대비했고 1636년 3월에는 동지성절천추진하사로서 명나라 사행길에 올랐다. 당시에는 요동 육로가 끊겼기 때문에 해로로 갔고 김육은 동지사, 성절사, 천추사의 임무를 한꺼번에 해야 했는데 이 때 파견된 사신단은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낸 마지막 사신단이 된다. 사신단은 1636년 6월 중순에 출발해 11월에 북경에 도착해 1637년 4월 말 무렵까지 머물렀는데 그 사이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사신단은 1636년 12월 25일 숭정제생일 축하연을 위해 입궐하던 중 병자호란이 발발하였음을 인지했으나 자세한건 몰랐고 1637년 4월 20일이 되어서야 명나라 관리를 통해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했음을 알았다.(항복일은 1637년 1월 30일) 귀국을 서둘러 5월 14일에 평양, 6월 1일 귀경하자마자 6월 2일 인조에게 사행 경과를 보고했다.

1638년 6월에는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돼 1년여 있었는데 그동안 안면도태안 반도 사이에 운하를 뚫었다.[17] 이후 마침내 대동법 시행을 건의하는데 김육은 충청도에 우선 대동법 실시를 건의했다. 충청도가 하삼도 중에서도 전란의 피해가 그나마 제일 가볍다보니 공납 부담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었다.[18] 전임 충청도 감사 권반(權盼, 1564~1631)[19]이 12년 전 남기고 간 삼도 대동법 관련 문서를 검토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20] 다만 그 내용이 공물가를 과도하게 낮게 잡아[21] 정부 재정을 위험하게 할 우려가 커 반려됐다.

1639년부터 1642년까지 승지직을 역임해 임금을 곁에서 모셨다. 이후에도 병조참지, 홍문관 부제학, 한성부 부윤 등으로 을 나갔다가도 이내 승지직으로 복귀했다. 1642년에 김육은 보양관으로서 소현세자 일행을 중국 심양까지 수행했고 귀국 후 원손 보양관, 세자 시강원 우부 빈객으로 임명받았다. 인조가 김육을 얼마나 신용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인데 세자 시강원 소속은 차세대까지 책임지는 자리다. 1642년 12월부터 1644년 7월까지 소현세자 일행이 잠시 귀국하는 대신 인질이 된 원손을 모시고 심양에 체류했다. 1644년 4월 산해관을 넘은 청나라 팔기군은 마침내 북경을 함락했고 명나라 숭정제는 목을 맨다. 안심한 청나라는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해 김육은 먼저 7월 귀국했다가 세자 일행을 맞아 12월에 원접사로 다시 심양에 갔으며 소현세자가 귀국 후 2개월만에 돌연사하자 김육은 세자 조성까지 맡았다. 이후 예조판서, 세자책례도감 제조, 내의원 제조를 겸임했는데 대국 외교, 봉림대군 세자 책봉, 왕의 주치의인 내의원의 관리 감독까지 모두 김육에게 겸임토록 했음은 인조가 김육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알려준다. 이후 봉림대군에게 보위를 주려던 인조가 그에게 경선군이 덕망을 잃었는지 아닌지는 원손을 가르친 김육이 잘 알거니 대답해보라고 압박했는데, 김육은 그저 원손은 어려 덕망을 잃은 적이 없다고만 대답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잘못 그린 것인지 자세히 그리지 않은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다음컷에서 원손에게 재능이 보였다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당 발언은 김육이 아니라 이식이 한 말이고, 사관에게 김육도 비겁한 놈이라고 그날 입시한 김류 등과 함께 묶여서 까인다.(...) 이후 인조는 봉림대군까지 김육에게 맡겼으며, 이후 경선군은 죽었다.

2.4. 효종 시기

2.4.1. 정승직에 오르다

인조 27년(1649) 인조가 사망하던 해에 김육은 70세로 '치사(致仕)'를 할 만한 나이였다. 치사는 칠순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인데, 노신(老臣)이 치사를 하면 왕은 말리는 것이 대체적인 관행이었다. 효종은 산당을 중용하면서도 김육을 아꼈는데, 산당과 싸워야 할 입장에 있던 김육은 이제 막 즉위한 효종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효종은 그런 김육에게 우의정을 내리고 7번이나 올린 사직 상소도 모두 반려했다. 김육이 죽은 형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하지만, 효종 역시 봉림대군 시절 중국 심양에서 김육과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웠다. 게다가 북벌이든 뭐든 김육의 노련한 행정력과 정무능력은 갓 즉위한 임금으로서는 꼭 필요했다.
마지막 사직 상소까지 반려되자 김육은 7가지 정책 과제[22]를 걸고 효종에게 딜을 걸었다. 효종은 "경은 세상 일에 뜻이 없다며 겸양을 보이고 물러나려고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 조목들을 보니 국사를 위한 간절한 충성이 이렇게 대단한가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경은 모름지기 다시 사임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다스리는 원칙을 논하여 민생을 구제하라."라고 답했다.[23]

아름다운 일화이긴 한데, 김육이 이제 하려는 일은 보수 기득권 세력과 싸워야 하므로 조정에 분란이 그치지 않을 게 뻔했다. 김육은 '당신이 그만한 각오가 돼있는가?'라고 효종에게 물은 것이다. 이제 즉위한 젊은 효종은 좋은 뜻에 감동해 김육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고 말은 했지만 반대파들에게 쉽게 꺾일 우려가 컸다. 일례로 김육은 군포를 이제까지 면세였던 양반에게도 걷자고 주장하는데, 조세 저항이 정말 만만치 않아 효종이 큰 부담을 받았다.

자신의 목숨이 몇 년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김육은 젊은 효종을 심하게 다그쳤다. 마음은 급하고 왕은 우유부단하니 김육은 심한 말을 입에 올렸다. 나중 일이긴 하지만, 효종 7년(1656) 음력 8월 25일 평안도 영변에서 돌풍 때문에 공자 사당 지붕이 무너졌다. 불과 이틀 후 전라 우수사 예하의 수군이 명량 앞바다(진도)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사상자 천여 명을 냈다. 악천후에 명량의 빠른 물살이 빚어낸 참사였는데 병사들만 죽고 다친 것이 아니라 진도 군수도 죽었다. 정치적으로 부담을 느끼고 효종이 이 사건을 유야무야 덮으려 했다. 김육은 '이건 임금이 인심을 잃은 탓'이라며 효종을 앞에서 긁었다. 김육이라면 끔찍히 위하던 효종도 앞에서는 '맞다, 내 탓이다.' 그랬다가 부아가 치밀었는지 사흘 후 경연을 걷어치우고 들어간 일도 있었다.

2.4.2. 김육과 김집의 갈등

말년의 김육을 가로막은 가장 큰 벽은 김집과 그 제자들이었다. 김집은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을 제자로 둔 당시 사림의 대스승이었다. 효종은 김육에게 정성을 들였지만 김집의 출사에도 매우 공을 들여 문과 시험을 보지 않은 그를 바로 종2품 예조 참판에 임명했다.[24] 송시열, 송준길을 비롯한 선비들은 김집을 중심으로 뭉쳐 '산당'을 형성했다.이들은 반정 공신을 주축으로 형성된 두 파벌인 김자점의 낙당, 원두표의 원당과 함께 세력을 형성했고, 김자점이 몰락하자 당시 조정을 주도할 만큼 성장했다.

인조의 졸곡제가 10월에 끝나자 청나라 사신이 왔고 조선에서도 맞사신을 파견했다. 김육이 대동법 관련 논의를 제기하자 김상헌은 아직 인조의 상중이라며 피했고 김집도 반대했다. 그 제자들인 송시열, 송준길 등도 열렬히 반대해 결국 좌절됐다.[25]

게다가 당시 산당의 관심은 정국을 계속 주도해 예학을 집대성하고 완성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산당은 김자점뿐만 아니라 낙당의 일곱 대신들, 그리고 원당의 예조 참의 이행진과 좌승지 이시해를 탄핵, 파직시켰고 김집이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를 장악했다. 김집은 조광조의 현량과를 모델로 3정승[26]과 더불어, 자신과 청서파 원로대신 김상헌도 인재를 추천할 수 있도록 건의했다. 이들은 벼슬을 하지 않고 향리에서 숙독하고 공부하는 이들을 '산림'이란 말로 스스로 높여 불렀는데, 이들을 천거해 자신들 입맛에 맞는 인물로 조선의 기풍을 바꾸겠다는 의도였다.

이에 김육이 인사는 오직 왕의 권한이라며 반대했는데, 산당에게 끌려다니다가는 자칫 과거제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고 문제의식을 느꼈다. 둘은 대동법 문제에 이어 다시 한 번 충돌하고 연이어 사직했다. 이에 송시열 등 산림의 주축 인사들도 김육에게 항의하는 의미로 사직을 청했고, 김상헌 또한 성묘를 이유로 낙향했다.

김육은 이 즈음 "스스로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27]라고 할 정도로 위기에 처했다. 김집의 권위와 영향력은 범접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28] 게다가 김집은 절친 김반[29]의 친형이라 싫은 소리를 하기가 껄끄러웠다.[30]

효종 1년(1650) 김육이 진퇴양난에 빠진 상황에서 청이 개입했다. 안 그래도 김자점 등 친청파가 몰락하고 산당이 집권하자 청은 여러 차례 힐문장을 보냈었다.[31] 그런데 청의 세작이 '북벌' 계획을 빼내었다. 청은 효종을 중국으로 압송하기 위해 압록강변으로 군을 움직였다. 척화를 주장하던 조정 관료 대다수가 낙향하고, 김상헌[32]의 제자였던 영의정 이경석[33]남인 소속의 예조 판서 조경(趙絅)은 자신들의 계획이니 효종 대신 벌을 달라며 의주 백마성에 스스로 감금됐다. 청은 이제까지 일은 덮겠으나 다시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윽박질렀다. 의외로 관대한 처분이긴 했지만 이 때문에 김집, 김상헌이 축출됐다. 전화위복으로 김육은 이때부터 운신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

2.4.3. 실권을 잡은 김육과 호서 대동법

효종 2년(1651) 1월 김육은 영의정에 올랐다. 대동법과 군역 등 공납 문제를 한시라도 빨리 해결하고 싶었지만, 일단 그의 주 임무는 청을 달래는 것이었다. 빈번하게 오가는 사신을 맞고 국정 공백도 메꿔야 했다. 산당이 물러난 조정에는 정통 관료 출신들과 척신들이 대다수였다. 방해물이 사라진 효종 2년(1651년) 7월 결국 호서대동법이 실시되었다. 효종은 김육을 더욱 의지했다. 아예 김육의 손녀(차남 김우명의 )를 세자빈으로 맞았다(음력 7월). 이제 김육은 외척이 돼 날개를 달았다. 게다가 <인조실록>의 총재관, 즉 총편집 책임자가 되었다.[34] 김육의 세상이었다.

김육은 호서 대동법에 끝까지 반대한 원당의 영수 원두표를 호조 판서 직에서 쳐내고 자기 사람인 이시방[35]을 심는다. 원두표의 사돈인 대사간 이시해가 이시방을 김자점 일파로 몰아 유배를 보내는 데 성공하는 듯 했으나, 김육이 개입해 석 달만에 복귀시켰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그였지만, 원두표를 형조 판서에 재기용하는 것으로 한 발 물러섰다.

산림은 여전히 대동법을 반대했다. 1652년 前 사간원 장령(정4품) 안방준[36]은 전란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대동법은 잘못이라면서 상소를 올렸다.[37] 호남 사림의 큰어른 안방준의 반대는 상당한 무게가 있었다. 이에 대해 김육은 안방준의 상소가 '사사로움 없는 지극 정성'이라 평하며, 대동법의 지속, 폐지 판단을 효종의 결단에 맡겼다. 효종은 김육의 손을 들었다.

김육은 화폐 유통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미 효종 즉위 때 진위사로 청에 다녀오면서 동전 15만 푼을 바꿔 의주에서 유통했던 바 있었던 김육은 화폐 보급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평안도, 울산 등 일부 지역에서만 부분적인 성공을 거뒀다. 현재 5만원 권이 유통보다 저장 목적이 크듯, 당시 화폐를 아무리 뿌려도 유통이 잘 안됐다. 하지만 이 때의 경험을 토대로 훗날 친손자인 김석주[38]와 남인인 영의정 허적 등이 상평통보 유통에 성공했다.[39] 또 김육은 아담 샬시헌력[40]을 도입케 해 달력의 오차를 없앴다. 이로써 농업도 좀 더 안정되었다.

2.4.4. 호남 대동법 추진과 사망

김육은 효종 6년(1655) 이후에는 병석에 누웠지만,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 시기 그는 『선조수정실록』의 총재관을 맡았고[41] 호서 대동법과 화폐 유통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편, 호서 대동법이 성공하자 1656년(효종 7)부터 부안의 유학자인 김상곤 등 3명이 연명으로 장계를 올렸고,[42] 익산의 유학자 소필창 등이 상소를 올리는 등[43] 호남 지역의 유생들이 '호남에도 대동법을 시행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충청도의 부담이 크게 완화되자 전라도 백성들이 충청도로 옮겨가 남은 자들의 부담이 심해졌다, 관찰사가 이미 조사해 갔는데도 몇 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 빨리 호남에도 대동법을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감색(관청에서 물품의 출납을 맡아보는 감관과 담당 아전인 색리)과 넓은 토지를 지닌 토호들이 중간에 가로막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토호들이 다수 거주하는 산군 (내륙) 지역과 토호들이 적은 연해 (해안가) 지역을 분리해 연해 지역부터 우선 실시하고 추후에 확대하기로 결정했다.[44] 대동법을 전면 실시할 수 없어 이민을 막을 수가 없다보니 대대적인 노비 추쇄[45]가 이어졌다. 언년아!!!!!

이 때 김육은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호남 대동법에도 온 신경을 기울였는데, 호남 대동법에 대한 그의 주장은 대강 이렇다.
1. 수령들과 부호들은 소수이나 좋아하는 백성은 다수다.
2. 충청도에서 하고 보니 백성들이 관리를 칭찬해 관리들도 좋아한다.
3. 세금이 줄어들지만 나라 쓰임에 부족함이 없고 백성들의 부담이 준다.
4. 줄어든 부담은 백성들의 식량이 되니 구휼의 방책으로도 좋다.
5. 내가 늙어서 이제 충정을 다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제발 시행하자(...)

죽기 직전인 1657년(효종 8) 11월 초까지 대동법에 대한 호남 각읍의 여론 조사 결과를 취합해 김육이 직접 효종에게 보고했다.[46] 또한 호남 대동법의 주요 쟁점인 어공과 진상 물품을 어떤 형식으로 거둘 것인가에 대해서도 김육 자신의 주장인 경각사(중앙 관청 모두를 일컬음)가 일괄징수하는 것으로 관철했다. 지방 관청 말고 중앙 관청이 직접 파견해 거둔다는 방식이다.

그러다가 김육은 이듬해인 1658년(효종 9) 음력 9월 4일 향년 78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김육은 호남 대동법을 걱정했으며,[47] 효종에게는 대동법의 실무를 맡게 될 신임 전라도관찰사 서필원[48]을 격려해달라고 청했다.[49] 또한, 자신의 뒤를 반대파인 송시열송준길에게 맡긴다며 이들을 대우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효종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5일간 조회를 보지 않았고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묘는 현재 남양주시 청풍 김씨 문의공파 묘소에 있다.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의 미원서원(迷源書院)과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의 봉강서원(鳳岡書院), 개성 선죽교의 숭양서원, 평안남도 강동면 강동리의 청계서원(淸溪書院) 등에 배향됐다. 1704년(숙종 30)에는 가평에 잠곡서원(潛谷書院)이 생겼는데, 이들 서원들 중에서 문의공 김식을 모신 봉강서원과 정몽주를 모신 숭양서원 등을 제외하고는 흥선대원군서원 철폐 때 살아남지 못했다.

3. 평가

김육은 기묘 명현(己卯名賢)인 대사성 김식(金湜)의 후손이다. 젊어서부터 효행이 독실했고 장성하자 문학에 해박하여 사류들에게 존중받았다. 광해조 때에는 세상에 뜻이 없어 산 속에 묻혀 살면서 몸소 농사짓고 글을 읽으면서 일생을 마칠 것처럼 했다. 인조 반정에 이르러 제일 먼저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특별히 현감에 제수되고 이어서 갑과(甲科)에 뽑혔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 정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 말을 다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모국이 외국 군사의 침입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니 중국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金集)과 의견이 맞지 않자 김육이 불평을 품고 여러 번 상소하여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그가 죽자 상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했다. 향년 79세였다. 그의 차자 김우명(金佑明)이 세자의 국구(國舅)로서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졌다. - 『효종실록』 효종 9년(1658) 9월 5일 김육의 졸기[50]
허황된 말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정책을 밀고 나가는데 영부사(領府事) 김육보다 더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한밤중에 자리에 누워 있다가도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마치 나라의 기둥을 잃은 듯하다.[51] - 『승정원일기』 155책, 효종 10년 3월 11일 자 효종의 발언

김육은 이전의 황희류성룡, 이원익은 물론 이후에 나오는 채제공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으로 손꼽힌다. 특히 그는 절대 굴하지 않는 강한 추진력으로 유명했다. 대동법의 시행에 있어 그는 여러 정치적 반대파들인 산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일관된 정책을 수행해 나아갔으며, 이는 화폐 유통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굽힘 없는 강한 추진력과 고집이야말로 김육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종 이는 '한 가지를 고집하는 병통'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그를 깊이 신임한 효종도 가끔은 "죽을 때까지 못 고칠 병"이라면서 이런 고집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강한 추진력은 김육의 여러 실무 경험으로 뒷받침된다. 현실을 무시한 탁상 행정을 밀어붙였다면 강한 추진력은 그냥 옹고집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김육은 조정에 나섰을 때부터 주요 실무직, 특히 호패와 재정, 외교 분야와 관련된 관직을 두루 섭렵했고, 이 덕에 현장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육은 실현 가능성이 높은 정책이 무엇인가를 짚고 추진할 수 있었다. 즉 김육의 추진력은 많은 실무 경험이 뒤를 받쳐줬기에 그 빛을 발했던 것이다. [52]

물론 실무에 있어서는 김육 자신도 인정하는 그 이상의 관료[53]들이 있었으며, 김육은 구체적인 실천에 있어서는 이들과 의논하고, 이들에게 맡기는 모습을 보였다. 김육의 역할은 직접 실무를 담당하기보다는 이들 전문 관료들에 대한 정치적 보호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로지 김육의 일관된 고집만이 대동법과 같은 개혁책의 성공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 개인에게만 모든 공을 돌리는 영웅 사관에 불과하다.

이러한 강한 신념과 고집은 사실 자세히 보면, 상술한 집안의 내력뿐만 아니라 김육 개인의 행보에서도 나타난다. 상술했지만, 회퇴변척소 사건 당시 김육은 당대 가장 강력한 정치적 힘을 가진 정인홍의 삭적을 주도했으며, 이후에도 잠곡으로 은거하여 10여 년 가까이 지내기도 했고, 청에 귀부하여 조선을 괴롭히던 매국노급 부청배였던 정명수가 사신으로 오다가 마중 나오는 사람이 김육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 사람은 나이가 많고 성질이 편협하여 우리와 서로 친하지 않다. 어째서 종사관도 대동하지 않고 온단 말인가"라면서 화를 낸 데서 알 수 있듯 위세가 강한 자라 해도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으면 결코 물러서지 않고 굽힘 없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정책적 반대파들이 사적인 원수 지간이 되지 않게끔 신중하게 처신했다. 김집이나 김상헌 등 대동법과 관련하여 그와 충돌했던 인사들은 김육과 개인적으로는 술도 같이 마시던 친한 친구의 형(김집)이거나, 아버지의 비문도 써주고 스승으로 여기던 존경스러운 이웃 동네 선배(김상헌)였으며, 그들의 위명은 당대 사림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했다. 또한 김육이 강하게 정치적으로 견제했던 원두표는 당시 권세가 매우 강력한 인조 반정 공신으로, "성품이 엉큼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거칠고 사나워"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자였다. 이런 반대파들과 정책 측면에서의 대립을 넘어 정치적 정적이 되거나 개인적인 적이 되어버린다면 그건 김육이 추진하던 각종 정책뿐만 아니라 그 개인의 신상까지도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때문에 김육은 항상 이들과의 관계에 신경 썼다. 김집과의 관계는 김집이 대범하게 처신하여 원활하게 유지되었으며, 김상헌과의 관계도 크게 나빠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원두표의 경우 김육은 정치적으로 원두표를 강하게 몰아붙이고 그와 사이가 안 좋던 이시방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고[54] 또한 원두표를 여러 차례 정치적으로 공격하여 그가 대동법과 관련된 사무에 있지 못하게 막았지만, 그와 동시에 원두표의 할아버지인 원호(元豪)[55]를 추증하는 사당을 세워줄 것을 건의하고 직접 원호의 시장을 쓸 정도로 원두표를 배려해 주기도 했다. 즉 김육은 정치적 반대파들을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반대파로만 머무르도록 하고 그들과 개인적인 원수는 되지 않게끔, 개인적 관계는 좋게 유지하는 신중한 처신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김육은 또한 서인 내부의 파벌인 한당(漢黨)의 영수급 인물이기도 했다. 이는 김집을 중심으로 산림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된 산당(山黨)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한강 이북 지역에 모여 사는 관료계를 일컫는 말이다. 다만 이는 당대에는 그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고, 김육 사후에 비로소 이름이 언급되는 등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반대 개념인 산당은 이미 당대에 이름이 나오고 있다.

김육에게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인조효종 등 당시의 조선의 왕들이 김육을 몹시 신뢰함과 동시[56]에 정적이었던 산림들도 김육의 진정성을 신뢰했다는 데 있다. 김집이나 안방준 등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한 거물급 산림들도 그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낼 때도 우선 김육의 진정성, 그가 산림의 신뢰를 받을 만한 군자라는 점은 일단 인정하고, 그 다음에 정책적으로 반대를 할 정도였다. 이러한 양 측의 신뢰를 모두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대동법의 시행에 덕을 본 충청도 백성들은 지역에 통문을 돌리고, 부의하려고 했던 돈으로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현재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행정동은 비전2동)에 있는'대동법 시행 기념비'[57]를 세웠다. 이는 이경석이 쓴 김육의 신도비문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만큼 그는 위로는 국왕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존경받는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편, 그것과는 별개로 최명길에 대해서는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효종 연간 인조 배향공신을 정하는 와중에 최명길을 빼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관철시켰다. 누구랑 동문 아니랄까봐...

4. 가족

파평 윤씨와 사이에서 김좌명, 김우명을 뒀으며, 장남 김좌명은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그 아들이 우의정 김석주로 할아버지 김육의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했으며, 현종 말 숙종 초반 정치에 있어서는 당대 제일의 책사로 불렸다. 호랑이를 닮은 외모가 특이했다.

차남 김우명은 은진 송씨[58]와 결혼해 명성왕후를 낳았다.[59] 아들들인 김석익, 김석연 등이 외척으로 득세를 했지만, 정작 명성왕후는 친오빠들보다 사촌오빠 김석주를 훨씬 의지해 의논을 자주 나누면서 정국을 끌고 가는 데 동행한다. 김우명의 5대손이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다.

동백꽃, 봄·봄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이 김육의 10대손이다. 차남 김우명의 넷째 손자인 김도택의 말예라고.

김육은 50여 년 뒤에 고모 상(喪)을 치르는 자리에서 전란 때를 회고했다. "나는 운명이 기구하여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고모에게 의지하였는데, 8년 동안 상을 치르느라 병이 들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60] 삼년상이 계속 이어져 상복을 벗을 수 없었다는 얘기다.

5. 저서

  • 《잠곡필담(潛谷筆談)》
  • 《유원총보(類苑叢寶)》
  • 《송도지(松都誌)》
  • 《팔현전(八賢傳)》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황명기략(皇明紀略)》
  • 《종덕신편(種德新編)》

6. 외부 링크

2000년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7. 관련 문서


[1] 율리우스력 8월 23일[2] 잠곡은 김육이 은거해 지낸 곳으로, 현재의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이다.[3]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의 아버지.[4] 이 말은 사헌부 지평 이상진이 상소에서 본격적으로 김육의 정책을 비판하기 전에 쓴 말이다. 즉, 정치적 반대파도 그의 능력과 인품을 높게 사고 있었다는 의미다. 출처는 이정철이 쓴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5] 기묘사화 당시 희생된 사람을 일컫는 기묘명현 중에서도 가장 높게 평가된 8명. 정광필, 안당, 이장곤, 김정, 조광조, 김식, 기준, 신명인.[6] 김흥우는 유언으로 "네가 능히 우리 가문을 일으켜 세우면 지하에서도 나는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7] 붕당원들을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갈라서는 안 된다. 이황, 서경덕 등 거유의 제자들은 사실상 여러 파에 걸쳐 있다. 당시 사림들은 자기 정체성을 정해야 했고 각자 학맥과 연줄 등으로 나뉘었다. 북인 정인홍과 남인 류성룡은 같은 동인이었지만 앙숙이었다.[8] 장의(掌議) 2명(동서재 각 1명), 상색장(上色掌) 2명(동서재 각 1명), 하색장(下色掌) 2명(동서재 각 1명) 등 6명으로 구성된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 운영직(요즘 말로 하자면 학생회 정도).[9] 이정철,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역사 비평사, 2013) 345페이지[10] 선조의 유교 칠신 : 선조가 유언으로 영창대군을 부탁한 일곱 신하. 박동량, 신흠, 한준겸, 허성, 한응인, 류영경, 서성. 허성과 한응인은 영창대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죽었고 유영경은 대북파에게 죽었다. 신흠과 한준겸 등은 인조반정 후 바로 복권돼 정승까지 지낸다. 서성도 복권돼 판서를 지내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박동량만은 영창대군이 사사될 단초를 제공했다는 누명을 써 인조반정 후에도 유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때가 돼서야 귀향할 수 있었다.[11] 나중에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돼 "청명고절(淸明苦節)이 탁월했다."라고 고평가돼 순조로운 벼슬길에 도움이 됐다.[12] 현재 경춘선 가평역에서 수도권 전철 1호선 동대문역까지 전철로만 1시간 30분 거리다. 역은 21개로 엄청난 거리다.[13] <잠곡유고>, 권1 <가소음(可笑吟)에 공경히 차운하다.> 약초 캐러 구름 뚫고 산 올라갔고 / 낚시한 뒤 달빛 안고 돌아왔었지 / 나무하는 늙은이나 농사꾼들과 / 세월이 오래됨에 사귐 깊었고 / 가을 서리 내리면 추수 서둘고 / 봄비가 내릴 적엔 밭을 갈았지.(하략)[14] 박병련·곽진·이헌창·이영춘, <잠곡 김육 연구> (태학사, 2003년) 81페이지.[15] <인조실록> 인조 1년(1623) 4월 8일자 기사[16] 초시 장원, 2차 3등, 3차 갑과 장원[17] 원래 고려 때부터 현재 안흥항 일대가 풍랑 사고가 빈번하자 가로림만과 천수만을 뚫어 운하를 만들려고 했지만 계속 실패하자 이 행동을 하게 된 것인데 이로 인해 이 아니었던 안면도는 김육이 운하를 뚫으면서 나중에 다리를 세울 때까지 섬이 되었다. 이후 충청도를 지나가는 세운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18] 특히 내포 지역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은 가야산 일대의 10여 개 고을이 땅이 넓고 기름진 데다가 조운도 편리하고 전쟁의 참화도 겪지 않아 관련 행정 문서도 그대로 남았으므로 집중적인 수취 대상이 되어 조세 불균형이 심각했다.[19] 경기·경상·함경도 관찰사 역임, 한성부 판윤, 호조판서. 인조 원년(1623) 삼도 대동법 혹은 대동선혜(大同宣惠) 실시 결정 당시 호조참판으로서 이익과 참여한 적이 있었다.[20] <인조실록> 인조 16년(1638) 9월 27일자 기사[21] 포 1필과 쌀 2두. 로만 치면 약 7두 정도.[22] 대동법 실시, 어영군을 병사(병부)에 소속, 강화도와 남한 산성에 군량 비축, 삼남의 전세(田稅)를 강화도에 비축, 영남의 전세는 쌀 대신 무명으로 내게 함, 황해도의 전세는 황해도 연안 각산에 저장,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정부가 실시하던 소금 전매를 중단하고 각 고을에 소속하게 할 것.[23] 잠곡선생연보 효종 1년(1649) 10월[24] 대단한 특례이다.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청요직을 두루 거친 데다 왕의 신임을 받은 김육이 예조 참판이 되기까지 20년 걸렸다.[25] 송시열은 우선 공안을 바로잡아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대동법에 대한 개인의 입장은 밝히지 않았다. 송준길은 공안을 바로잡고, 대동법을 실시하고, 궁가와 세도가와 어염에 대한 세금 절감 조치를 금지하며, 내수사 폐지를 주장했다. 유계는 우선 공안을 개정해 공물가를 낮추고, 대동법을 뒤이어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즉 김집 제자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공안 개정이 선결되어야 하나, 대동법을 추후에라도 실시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26] 당시 영의정은 이경석, 좌의정 조익, 우의정 김육[27] 효종실록 효종 1년(1650) 1월 22일 세 번째 기사[28]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그 송시열조차도 후에 "대저 김집으로서도 제수받지 못한 관직을 신이 감히 무릅쓰고 받는다면, 이는 어짊을 소임으로 하는 군자의 도의에 어긋나게 되므로, 후세에 반드시 비난하기를 '수백 년 이래의 금석과 같은 법식이 아무개로부터 땅에 떨어졌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 효종실록 효종 9년(1658) 5월 5일 첫 번째 기사[29] 서포 김만중의 할아버지[30] 김집은 이 일과 관련하여 김육과 한평생 좋은 관계였으며, 서로 잘못한 점도 없고,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전과 다름없이 잘 지낼 것이며, 대동법 관련해서 의견 충돌이 있었을 뿐이지 김육이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옛날의 군자들은 서로 의견이 달라도 얼굴을 붉힐 일이 없다는 표현으로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즉 김육과의 충돌은 사적 감정이 개입된 게 아니라는 것. 또한 김집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방납의 폐단을 인식하여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했고, 그 중에는 대동법을 나중에라도 시행하는 편이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음을 감안하면, 김집이 대동법을 반대함은 산림 전체의 입장이 아니라 김집 개인의 의사였던 듯하다. 여담으로 김집이 대동법을 반대했던 건 삼도 대동법의 실패를 체험한 부친 김장생의 영향으로 여겨진다.(이정철,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역사 비평사, 2013년) 387페이지)[31]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따르면, 효종 1년(1650) 청 사신의 조선 방문 횟수는 9회, 효종 2년(1651)에는 7회였다.[32] 김상헌과 마찰을 빚음도 김육에게는 거북했을 것이다. 김육이 김상헌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 <잠곡유고>에 따르면 김육은 자신보다 10살 많은 김상헌을 스승으로 대하며 깊이 존중했었다고 한다. 잠곡으로 은거해 있을 때는 종종 김상헌의 집에 가서 세상사를 묻고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으며, 김육의 아버지 김흥우의 묘비명을 써 준 것도 김상헌이었다. 즉 그만큼 가까운 사람과도 의견 충돌로 사이에 틈이 벌어졌던 것이다.[33] 삼전도비를 지은 바로 그 사람이다. 왕족 출신이면서 문장에도 능했다.[34] <인조실록>은 효종 4년(1653) 7월 1일에 완성된다. 효종실록 효종 4년 7월 1일자 기사 참조[35] 이시방(1594 ~ 1660) : 연안 이씨로 인조 반정 공신 이귀의 아들. 호조, 형조, 각종 참판을 역임한다. 공신 집안인 훈척이었으나 김육에게 반해 대동법 실시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등 노력한다. 현종 즉위년에 남한 산성을 복구하다가 죽는다. 김육의 뒤를 이어 영의정이 되는 이시백의 친동생이다.[36] 죽산 안씨로 보성 출신.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의병장이자 <호남의병록>, <은봉전서> 등 다수의 시문과 저서들을 남겼다. 성혼, 정철, 조헌의 문하생으로 김류, 송준길과도 친분이 있었다.[37] 효종 실록, 효종 3년 5월 16일 2번째 기사[38] 김육의 장남 김좌명의 아들로 명성왕후 김씨와는 사촌 관계. 즉, 숙종에게는 외당숙이 되는 인물이다.[39] 숙종실록 숙종 4년(1678) 1월 23일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고, 비로소 돈을 사용하는 일을 정하였다. 돈은 천하에 통행하는 재화인데 오직 우리 나라에서는 조종조로부터 누차 행하려고 하였으되 행할 수 없었던 것은, 대개 동전이 토산이 아닌데다 또 풍속이 중국과 달라 막히고 방해되어 행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대신 허적·권대운 등이 시행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물어, 군신으로서 입시한 자가 모두 그 편리함을 말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호조·상평청·진휼청·어영청·사복시·훈련도감에 명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돈 4백 문을 은 1냥의 값으로 정하여 시중에 유통하게 하였다."[40] 시헌력은 원래 숭정력이라고도 한다. 숭정제의 명령으로 아담 샬이 만들다가 명나라가 망했다. 만주족 황제는 아담 샬에게 계속 만들라 명령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아 곧 완성시켰다.[41] 『효종실록』 효종 8년(1657) 1월 3일[42] 『승정원일기』 140책, 효종 7년(1656) 7월 11일.[43] 『승정원일기』 141책, 효종 7년(1656) 7월 27일.[44] 연해 지역은 전선을 만들고 수리하는 등 져야 하는 역이 많았다. 또한 관개가 되는 곳이 적은데다 여차하면 바닷물이 파고들 수 있어서 인구가 적었다. 반면에 산군 지역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관개를 할 수 있어 가뭄에도 강했고, 인구도 많았다.[45] 효종 6년(1655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목적은 재정 적자의 해소. 이 당시 강화도에 대대적인 군사 시설을 확충하느라 세수가 부족했는데 '노비안에 등록된 노비 수가 19만인데 다 도망쳐서 실제로 신공을 거두는 노비는 2만 9천 밖엔 없네? 얘네 잡아와서 신공 거두면 되겠다'는 이유로 노비 추쇄 도감을 설치, 효종 8년(1657) 6월까지 대대적인 노비 추쇄가 이루어졌다. 다만, 결과적으로 추쇄에 성공한 노비는 2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실패한 정책이었다.[46] 『효종실록』 효종 8년(1657) 11월 8일 3번째 기사[47] 『잠곡집』, 잠곡 연보, 효종 9년(1658) 9월 3일(이 때가 그가 죽기 하루 전이었다...독하다.) "같은 마을에 사는 상국(相國-영의정) 정태화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기를, “호남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일은 성상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상공께서 종시토록 힘써 주기 바란다." 하였다.[48] 조선 후기(효종~현종 대)의 문신이다. 본관은 부여, 호는 육곡(六谷)으로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김집의 직계 제자다. 예문관 검열과 홍문관 수찬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를 지냈으며, 김육의 와병 당시 대사간과 승지에 있다가 전라도 관찰사로 가서 '전남도대동사목(全南道大同事目)'을 반포했다. 훗날 조정의 비용을 아끼자는 좋은 뜻으로 왕대비의 삭선(朔膳-매월 초하루 지방 공물)을 줄이자고 간언하다가 죽을 뻔 했다. 현종 대에는 중앙에서는 승지, 대사성, 참의를 지방에서는 함경도 관찰사를 맡았는데, 그는 중앙에서도 유능했지만 지방관으로 갈 때마다 지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온 힘을 다한 진정한 목민관이었다. 실록은 그의 개혁안들을 기록해 남기고 있다. 오직(五直)이라 할 정도로 곧았는데, 현종 4년 수찬 김만균의 사직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해당 소와 관련해서는 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의 내용을 참조.) 김만균을 옹호하던 송시열에게 태클을 걸 정도로 공과 사가 분명했다. 산당(山黨)을 경계하던 현종의 마음에 들었다. 강화유수와 형조판서를 지내다가 병조판서 재임 중이던 167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가 경신대기근이 있던 해였다. 여담으로 해당 문서에도 나오지만, 이 때 김육의 장남인 병조판서 김좌명을 비롯해 많은 전현직 관리들이 이 해에 무더기로 세상을 떠났다.[49] 효종 실록, 효종 9년 9월 5일에 나온 김육의 마지막 상소에,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徐必遠)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이는 신이 만일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 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서 폐지되고 말까 염려되어서입니다. 그가 사은하고 떠날 때 전하께서는 힘쓰도록 격려하여 보내시어 신이 뜻한 대로 마치도록 하소서."라고 적고 있다.[50] 해당 졸기의 위에는 김육이 죽기 전에 올린 상소도 함께 들어 있다. 실록 기사[51] 上曰, 堅强不動浮議者, 孰有如金領府事者乎? 中夜思之, 如失柱石矣[52] 실무경험 없이 원론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다가 결국 죽은 사람이 바로 외가 친척인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실무가 부족해서 강압적으로 나가기만 했지 설득을 시키지 못하고 이는 왕이 위혐을 느껴 죽이게 만들었다.[53] <호서대동절목>에서 김육은 직접 이시방, 남선, 허적, 김홍욱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들은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나이도, 당파도 제각각이었으나 김육은 이들을 믿었으며, 이들이 없었다면 대동법은 성공할 수 없었다고 언급한다.(잠곡유고 권9 <호서대동절목의 서문> "다행히도 호조 판서 이시방(李時昉), 예조 판서 남선(南銑), 예조 참판 허적(許積)이 시종일관 한 마음으로 온갖 부역을 고르게 하고, 일에 따라 변통해서 막히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뚫는 데 힘입어서 봄, 가을로 거두는 공부(貢賦) 외에 다시는 갑자기 징수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에 공사(公私)간에 모두 안정되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농사를 짓게 되었는바, 호산(湖山)에 사는 백성들이 저절로 태평스럽게 되고, 영해(嶺海)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자기들에게 늦게 시행하는 것을 원망하게 되었다. 그러자 당초에 이의를 제기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자못 깨달아서 마음을 돌리는 이가 생겼다. 이것이 어찌 성상께서 결단을 내려 성사시키고, 제공들이 변통하여 마땅함을 얻은 결과가 아니겠는가.")[54] 둘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워낙에 유명해서 인조 22년(1644년) 이시방에 대한 반역 무고가 있었을 당시(이시방이 공신이기도 하고 고발 내용 자체가 허황하다고 판단되었기에 이 때의 무고는 그냥 넘어갔다.) 이 일을 꾸민 것이 원두표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55] 임진왜란 당시 여주 목사 겸 강원도 조방장으로 여주 부근에서 싸웠으며, 강원도 김화 인근에서 전사.[56] 상술된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적힌 효종의 평가들을 보면 답이 나온다.[57] 국가문화유산 포털 당시 지명은 충청도에서 가까웠던 경기도 양성군(현 안성시)으로 1983년에 지역이 평택으로 편입되었다. 참고로 위의 명칭은 약칭으로, 정식 명칭은 "조선국영의정김공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朝鮮國領議政金公堉大同均役萬歲不忘碑)"이다.[58] 송시열송준길의 집안.[59] 훗날 손녀 명성왕후가 조선 제18대 임금 현종과 결혼해 낳은 아들이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이다.[60] 잠곡유고, 권12 고모(姑母)인 의인(宜人) 청풍 김씨(淸風金氏)의 묘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