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생 전 군인이자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김식(1933) 문서 참고하십시오.
金湜 김식 | |
이름 | 김식(金湜) |
출생 | 1482년(성종 13년) |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1]) | |
사망 | 1520년(중종 15년) |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 본가 | |
본관 | 청풍(淸風) |
이명 | 자 : 노천(老泉) 호 : 사서(沙西), 동천(東泉), 정우당(淨友堂) |
직업 | 문신, 성리학자 |
1. 개요
김식(金湜), 1482년 ∼ 1520년조선의 성리학자, 신진 사림파의 인물이다. 자(字)는 노천(老泉)이다. 호는 사서(沙西), 동천(東泉), 정우당(淨友堂)이다.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睦氏)이며 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을 역임한 목철성(睦哲成)의 딸이다.
2. 생애
한성부에서 자랐다. 1501년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고, 성리학 연구에 힘썼다.중종이 즉위하자 조광조 등과 신진 사림파에 속하여서 개혁 정치를 펼치려 하였다. 성균관과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종6품직인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에 서용되었다. 이어 형조 좌랑, 호조 좌랑, 지평,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4월 현량과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성균관 사성,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당시 현량과의 천거명목에는 성품,기국,재능,학식,행실,행적,생활태도 또는 현실대응의식 등의 일곱가지가 있었는데, 김식은 당시 현량과 급제자 28명 가운데에서도 유일하게 이 7개 항목 모두를 만점을 받아 완벽하게 평가받았다.
현량과에 급제한 직후 사림파의 지도자로 올라섰다. 그리하여 그는 현량과 급제 닷새 뒤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였고, 10일 후에는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 올랐는데, 그것은 현량과 실시일로부터 겨우 보름 사이의 일이었다.
이조판서 신상(申鏛)과 의정부우의정 안당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여 대사성에 추천하였으나 중종은 홍문관부제학에 임명하였다
같은 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절도안치의 처벌이 내려졌으나 영의정 정광필의 비호로 선산에 유배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이 일어나자 절도안치 처벌이 내려졌고 거창에 숨었다가 자결하였다.
기묘 사화 후에 현량과가 폐지되면서 그의 직첩과 홍패도 환수되었으나 명종 때 관직이 복구되었다. 그리고 선조 때에 이조 참판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 가족 관계
- 조부 : 김질(金耋)
- 부 : 김숙필(金叔弼)
- 모 : 사천 목씨(泗川睦氏) - 목철성(睦哲成)의 딸
- 부인 : 전주 이씨(全州李氏) - 이이(李怡)의 딸
- 장남 : 김덕수(德秀)
- 차남 : 김덕순(德純)
- 삼남 : 김덕기(德器)
- 사남 : 김덕무(金德懋)
- 오남 : 김덕성(金德成)
- 장녀 : 손세눌(孫世訥)의 처
- 차녀 : 이언수(李彦脩)의 처
4. 작품
- 거창산중
- 군신천재의(君臣千載義)